-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 만든 일본의 중학교 역사 교과서는 제2차 세계대전 때 무조건 항복하게 된 과정을 ‘스즈키 수상이 천황의 聖斷을 기다렸다’는 식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 교과서는 일본의 야마토 조정이 한반도에 임나 일본부를 만들고 고구려의 조공을 받았다고 기술하고 있는데…
그러나 최근 일본에서 두 나라의 밀월관계를 위협하는 움직임이 고개를 들고 있다. 역사 교과서 왜곡 현상이다. 아직 그 심각성이 충분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 문제는 한·일 관계의 시한폭탄으로 발전될 수도 있다. 양국 관계를 악화시키는 결정적인 요인은 늘 과거사에 대한 인식 차와 독도로 대표되는 영토문제였기 때문이다.
20년 전으로 후퇴한 日 역사 교과서
일본의 중학교는 2002년부터 현재의 97년판 대신 새 역사 교과서를 사용한다. 이를 위해 지난 4월 한 출판사와 기존의 7개 출판사가 2002년판 중학교 새 역사 교과서를 만들어 문부성에 검정을 신청했다. 그런데 이 역사 교과서의 기술내용이 일본의 침략사실을 부인하거나 왜곡하는 등 기존 역사 교과서보다 훨씬 후퇴한 것으로 확인됐다.
97년판에서 종군위안부에 대해 모두 기술했던 기존 7개 출판사의 교과서 가운데 6개사가 관련 내용을 삭제하거나 표현을 바꾸었다. 기존 교과서는 또 이번 검정 신청에서 난징(南京) 대학살, 731부대, 간토(關東) 대지진 당시의 조선인 학살, 조선의 항일운동 등에 대한 기술도 완전히 삭제하거나 표현을 애매하게 바꾸었다.
특히 이 교과서들은 ‘침략’이라는 표현을 ‘진출’로 바꾸거나 아예 삭제해버렸다. 이는 ‘침략’과 ‘진출’이라는 표현을 놓고 빚어졌던 82년 ‘일본 역사 교과서 파동’ 이전으로 회귀한 것을 의미한다. 당시 일본 문부성은 한국과 중국의 반발이 거세지자 “근·현대사의 역사적 사실에 관해서는 국제 이해와 국제 협조의 견지를 배려해서 기술한다”는 ‘근린 제국(諸國) 조항’이라는 것을 신설해서 검정에 임했다. 종군위안부에 대한 기술이 들어가고 ‘침략’이라는 표현을 쓰게 된 것도 이 조항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이같은 배려를 완전히 무시하고 20년 전으로 후퇴했다.
더 큰 쟁점은 기존 교과서보다 이번에 처음으로 검정 신청을 한 새로운 교과서다. 초강경 우익 인사들로 구성된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 저술한 교과서가 바로 그것. 출판사는 일본 우익의 정서를 대변하고 있는 산케이 신문사 계열의 후요샤(扶桑社)다.
극우파 ‘새로운 역사… 모임’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은 96년 12월 니시오 간지(西尾幹二) 전기통신대 교수를 회장으로 창립 기자회견을 갖고 이듬해 1월 정식 발족했다. 이들은 기존의 역사관을 ‘자학(自虐)사관’이라고 몰아붙인다. 일본이 잘못한 것도 없는데 너무 저자세라는 것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역사관을 ‘자유(自由)사관’이라고 하며, 철저히 ‘자유사관’에 입각한 새 역사교과서를 만들겠다고 밝혔다.
니시오 회장은 그 전 단계로 지난해 10월 ‘국민의 역사’라는 책을 발간했다. 770쪽에 이르는 두꺼운 책이다. 이 책의 내용은 일본의 침략사실을 전면 부인하고 일본의 행위를 미화하는 내용으로만 기술되어 있다.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은 이 책을 근거로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들어 검정을 신청했다.
이 책은 최소한 60만 부 이상이 팔려나가는 베스트셀러가 됐다. 이런 역사관에 박수를 보내는 일본인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증명해보인 셈이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설마 ‘국민의 역사’를 그대로 교과서에 담지는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기대는 빗나갔다. 따라서 이 교과서는 기존 역사 교과서보다 훨씬 왜곡이 심하다.
‘어린이와 교과서 전국 네트워크 21’이라는 일본의 시민단체는 9월 12일 도쿄(東京)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 만든 역사 교과서와 기존 7개사의 새 역사 교과서의 내용을 분석해서 발표했다.
이 단체가 분석해서 밝힌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의 교과서를 살펴보자. 다음은 한국과 중국, 그리고 아시아와 관련된 부분의 요약이다.
① 국민이 전쟁을 긍정하고 열렬히 지지했다고 기술
-‘대동아전쟁(태평양전쟁)’의 ‘초기 승리’에서 “이것(진주만 습격)이 보도되자 일본 국민의 기분은 일거에 고양되고 장기전에 돌입한 일·중 전쟁의 음울한 기분이 일변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또 ‘전시하의 국민생활’에서는 “생활물자는 매우 적었다. 그러나 그런 중에도 많은 국민은 열심히 일했고 잘 싸웠다. 이는 전쟁에서 승리를 원했기 때문이다”라고 기술해 국민이 일치해서 전쟁에 협력했음을 강조하고 있다.
-“전쟁은 비극이다. 그러나 전쟁을 선악으로 구분할 수는 없다. 어느 쪽이 정의이고 어느 쪽이 옳지 않다고 말할 수 없다. 국가와 국가의 이익이 충돌한 결과 정치로서는 결론을 내지 못하고 최종 수단으로 벌어지는 것이 전쟁이다. 당시의 일본인은 미군과 싸우지 않고 패배하는 것을 선택하지 않았다”며 전쟁 자체를 긍정하면서 일본의 침략전쟁에 면죄부를 주고 당시의 일본인(이 중에는 조선이나 대만인도 포함되어 있다)이 모두 지지한 것처럼 기술하고 있다.
-“일·러 전쟁은 일본의 생존을 건 장엄한 국민전쟁이었다. 일본은 이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자국의 안전보장을 확립했다. 근대 국가로 탄생한 지 얼마 안 된 유색인종 국가인 일본이 당시 세계 최대의 육군 대국이었던 백인 제국 러시아에 이긴 것은 억압당하던 세계의 여러 민족에게 독립에 대한 한없는 희망을 주었다”고 기술하여 일·러 전쟁을 전면적으로 긍정하고 있다.
② 침략전쟁이 아니고 민족해방전쟁이라고 기술
-근대 일본의 조선 침략을 위한 최초의 사건이었던 강화도사건의 원인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고, 당연히 일본의 책임도 분명히 밝히지 않았다. 그후에 맺었던 일·조 수호조약의 불평등성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았다.
-난징 대학살을 부정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종군위안부’나 ‘중국·조선인의 강제연행·강제노동’에 대한 기술은 어느 곳에도 없다.
-‘대동아전쟁’의 ‘초기 승리’에서 “100일 정도 싸워 대승리로 서전을 장식했다”는 동남아시아 점령 기술에 이어 “이것은 수백 년에 걸쳐 백인의 식민지배에 신음하고 있던 현지인들의 협력이 있었기에 얻은 승리였다. 일본의 서전 승리는 동남아시아나 인도인, 멀리는 아프리카인에게까지 독립에 대한 꿈과 용기를 안겨줬다”고 기술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의 피해에 대해서는 “일본인의 사망 행방불명자는 군인·군속 약 186만 명, 민간인 약 66만 명, 제2차 세계대전 전체의 전사자는 약 2200만 명, 부상자는 약 3400만 명으로 추정된다”고 하면서도 아시아의 피해에 대한 언급은 없다.
③ 아시아 민족을 멸시하고 한국 합병은 합법적이었다고 기술
-“조선반도는 대륙으로부터 뻗어나온 팔”이라고 표현하면서 “조선반도는 일본에게 들이대는 흉기가 되기 쉽다”고 기술하고 있다. 따라서 “조선반도가 일본에게 적대적인 대국의 지배하에 들어가면… 일본의 방위가 어려워진다.” 이것이 이 교과서의 기본적인 아시아관이다.
-“청은 굴욕적인 난징조약에 조인했다” “조선에서는 위기의식이 희박했다” “중국, 조선 양국은 열강의 위협에 대해 일본처럼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았다” “열강은 청에 몰려들어 곧바로 조차지를 획득하고 중국 진출의 발판을 마련했다. 만약 일본이 졌다면 중국과 같은 운명을 겪었을지 모른다”고 기술하는 등 중국·한국에 대한 멸시가 전면에 깔려 있다.
“한일 합방은 합법적”
-“1910년(메이지 43년) 일본은 한국을 병합했다(한국 병합). 이것은 동아시아를 안정시키는 정책으로서 구미 열강으로부터 지지받았다. 한국 병합은 일본의 안전과 만주의 권익을 방위하기 위해 필요했지만 경제적·정치적으로는 반드시 이익을 안겨준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것을 실행한 당시로서는 국제관계의 원칙에 따라 합법적으로 행해졌다”며 한국 병합이 일본의 안전에 필요했고 더욱이 합법적이었다고 기술했다.
그러나 식민지배 실태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창씨개명이나 강제연행, 징병제의 시행에 대한 기술도 없다. 한국 내의 저항에 대해서는 “그러나 한국 내에서는 당연히 병합에 대한 찬반 양론이 있었고, 반대파의 일부가 격렬하게 저항했다”고만 기술하고 의병투쟁에 대해서는 기술하지 않고 있다.
-간토 대지진에 대한 기술이 없으므로 당시의 조선인·중국인의 학살은 당연히 기술되지 않았다.
④ 일본군의 잔학행위 등 아시아·태평양의 여러 민족에게 준 피해나 그들의 저항은 기술하지 않음.
-일본군의 잔학행위나 조선·중국·동남아시아로부터 인적·물적자원을 약탈한 행위 등 전쟁 실태에 대해서 기술하지 않았다. 아시아 지역의 피해에 대해서도 ‘전시하의 국민생활’항의 마지막에 작은 활자로 “일본이 전쟁으로 나아감으로써 전장이 된 아시아 여러 지역의 사람들도 피해를 입었다. 전쟁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국제법으로 금지하는 것뿐만 아니라 일본을 포함한 세계인들이 평소부터 국제 협조의 정신을 배양하고 정치나 경제·외교 등 여러 가지 방안을 쌓아가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생각해봅시다”라며 피해 실태는 기술하지 않고 중학생에게 무리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아시아 여러 민족의 항일무장투쟁에 대하여 “그때까지 구미의 식민지 지배를 통해 이익을 얻고 있던 사람들이 항일 게릴라 활동을 벌였다”며 사실과는 다른 기술을 하고 있다. 거꾸로 “1927년 난징에서 일어난 외국인 습격사건에서도 일본은 중국에 대하여 매우 관대한 태도를 취했다”고 기술했다.
⑤ 천황의 전쟁 책임은 묻지 않고 거꾸로 ‘성단(聖斷)’을 강조
-15년 전쟁의 천황 역할이나 ‘극동 국제군사재판’에서도 천황이 소추받지 않았다는 것에 대하여는 전혀 기술하지 않았다. 유일한 기술이 ‘성단을 내리다’ 항에서 “10일 오전 2시 스즈키 수상이 천황 앞으로 나아가 성단을 기다렸다. 이는 이례적인 일이다. 천황은 포츠담 선언을 수락함으로써 일본의 항복을 결단했다”고 기술했다.
-인물 칼럼 ‘쇼와(昭和) 천황-국민과 함께 걸어온 생애’라는 부분에서 “어렸을 때부터 매우 성실한 성격”으로 “입헌군주로서 정부나 군 지도자가 결정한 것에 대해서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 때문에 의지에 반해서 이를 인정하신 경우도 있었다”면서 “격동하는 쇼와시대에 진정 일본국과 일본 국민 통합의 상징으로서 그 생애를 일관하셨다”고 기술, 쇼와 천황의 전쟁 책임에 관한 논의를 무시하고 찬미하는 것으로 끝맺고 있다.
전·근대 기술에 대하여
-“야마토(大和) 조정은 반도(한반도) 남부의 임나(가락)라는 땅에 세력을 떨쳤다. 후에 일본의 역사서는 이곳에 만들었던 우리 국가의 거점을 임나 일본부라고 불렀다”고 기술, 임나 일본부에 관한 최근의 역사동향을 무시하고 있다. 불리한 것은 무시하겠다는 자세다.
-“반도정책에 실패한 야마토 조정이지만 강국 고구려 등의 예기치 않은 조공을 받고 일거에 자신감을 얻음으로써 아시아 중심의 하나라는 강한 자각을 갖게 됐다.”
-“백제에서 왕족이나 귀족부터 일반인까지 1000명 정도가 일본열도에 망명해 와서,… 정주했다. 조정은 후하게 우대조치를 해줬다.”
-“일본의 율령과 연호의 독자성은 우리나라가 중국에 복속하는 것을 거부하고 자립국가로서 나아가겠다는 의지를 내외에 보여준 것이었다.”
이 교과서는 이 밖에도 곳곳에서 천황을 찬미하고 천황을 중심으로 한 일본사, 지배자를 미화한 국가의식을 강조하고 있다.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은 역사 교과서말고도 중학교 공민 교과서도 만들어 검정을 신청했다. 이 교과서도 문제가 많다. 이 교과서는 일본의 평화헌법에 대하여 “전쟁포기 조항은 침략전쟁만 포기한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면서 “이를 개정할 필요가 강하게 제창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또 핵문제에 대해서도 ‘핵무기 폐기는 절대 정의인가’라는 칼럼을 통해 “핵무기가 있으면 전쟁이 일어나기 어렵다. 즉 핵무기에는 전쟁 억제력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핵무기 폐기가 표면적으로 합의되면 그때가 세계질서에 가장 위험한 순간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핵무기 폐기를 절대 정의라고 하는 것은 핵 폐기를 위반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라는 가정에 따른 것이어서 이는 안이하게도 인간을 성선설의 입장에서 파악한 것이 아닌가 한다”고 지적했다.
일본은, 전쟁을 포기하고 군대 보유를 금지한 ‘평화헌법’과 핵을 만들거나, 보유·반입하지 않는다는 이른바 ‘비핵 3원칙’을 국시(國是)라고 한다. 그러나 이 공민 교과서는 이를 근본부터 부정하고 있다. 일본이 왜 그런 헌법과 원칙을 갖게 됐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현재만 부각한 셈이다.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의 이같은 ‘강공’은 기존 교과서에도 영향을 주었다. 기존 7개 교과서의 역사 인식이 후퇴한 원인 중에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의 끊임없는 공격이 한몫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역시 ‘어린이와 교과서 전국 네트워크 21’이 작성한 기존 7개 교과서의 개정내용을 살펴보자. 이도 한국과 중국 등 아시아에 관계된 내용만을 발췌했다(표 참조).
일본 역사 교과서의 내용변화는 최근 달라지는 일본 사회 분위기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른바 ‘보통국가’를 지향하는 움직임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후 일본의 ‘비정상적인’ 정치·사회 질서를 바로잡자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뒤집어 읽으면 우경화와 맥락을 같이한다. 전쟁에 패한 뒤 숨죽여왔는데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이 ‘보통국가론’이다. 일본은 그 일환으로 최근 몇 년간 국기 국가법을 제정했고 ‘주변사태법’을 만들어 자위대의 활동범위를 넓혔다. 최근에는 중(衆)·참(參) 양원에 헌법조사회를 만들어 군대 보유와 전쟁 포기를 규정한 평화헌법 개정의 기초작업에 나섰다.
일본이 군사침략을 받았을 때를 상정한 ‘유사법제’도 정비하려고 하고 있다. 총리가 당당하게 A급 전범의 위패가 놓여 있는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방위청도 방위성으로 승격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는 한편으로 자위대의 평화유지 활동 조건을 완화해야 한다는 움직임도 표면화하고 있다. 새 역사 교과서는 바로 이런 사회 분위기가 반영된 것이다.
그렇지만 한국정부는 교과서 문제에 대해 예전처럼 강력하게 항의하지 못하고 있다. 98년 10월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이 일본을 공식방문해서 과거사에 대해 ‘면죄부’를 줬기 때문이다. 당시 김대통령의 방일은 일본인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그 중에서도 천황이 주최한 만찬석상에서 과거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은 사실과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당시 총리와의 정상회담에서 과거사를 일단락지은 일은 지금도 ‘김대통령이 뛰어난 결단을 내렸다’며 높이 평가하는 일본인이 많다.
소극적으로 대응하는 한국정부
김대통령은 당시 “다시는 과거 문제가 나오지 않도록 하겠다. 국민은 언론의 자유가 있지만 정부 여당은 스스로 책임을 진다”고 말했다. 이는 “앞으로 최소한 정부측이 먼저 과거사를 거론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한 것이었다. 이 때문에 한국정부가 교과서 문제에 대해 나서기가 힘든 실정이다.
최상룡(崔相龍) 주일대사는 지난 8월 전·현직 문부상과 비공식적으로 만난 자리에서 교과서 문제에 우려를 표시했다. 이때 문부상들은 “무라야마(村山) 총리 담화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무라야마 담화라는 것은 95년 당시 무라야마 총리가 전후 50년을 맞아 일본의 식민 지배와 침략 사실에 대해 포괄적으로 사죄의사를 표시한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무라야마 담화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은 “무라야마 담화의 정신을 존중해서 검정할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9월 23~24일 일본 아타미(熱海)에서 열린 한·일 정상회담에서 이정빈(李廷彬) 외교통상부장관도 고노 요헤이(河野洋平) 일본 외상과 만나 역시 같은 우려를 전달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상황은 그리 밝지 않다. 약간의 수정은 거칠지 모르지만 이들 역사 교과서들은 통과될 가능성이 높다. 이들 교과서가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음지에서 이들 교과서를 지지하는 강력한 정치집단과 세력이 있다는 뜻이다. ‘일본을 지키는 국민회의’나 집권 여당인 자민당 내 ‘일본의 앞날과 역사 교과서를 생각하는 젊은 의원들의 모임’, ‘자유사관연구회’ 등은 지금까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역사 교과서에서 ‘종군위안부’ 내용을 삭제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종군위안부’에 대해 가르치는 것은 교육적·정서적으로 옳지 못하다는 주장이었다. 종군위안부의 삭제를 목표로 삼았지만 이들 단체가 노리는 것은 ‘종군위안부’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고 문부성이 새로운 교과서를 엄격하게 검정할 것이라는 보증도 없다. 98년 마치무라 노부다카(町村信孝) 당시 문부상은 국회 답변을 통해 “일본의 역사 교과서가 전체적으로 균형을 잃고 있지 않은가 생각한다”며 “특히 메이지 시대 이후에는 부정적인 요소를 너무 많이 쓴 것 같다는 인상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메이지 이후라면 바로 근·현대사 부분을 가리킨다. 마치무라 문부상은 한걸음 더 나아가 “앞으로 교과서 검정이나 집필단계부터 각 편집자와 균형을 잡도록 논의하고 싶다”고 밝혔다. 관료의 힘이 어느 나라보다 강한 일본에서 문부상의 이와 같은 발언은 새 교과서 집필진에 직접적인 압력이 되기에 충분한 것이다.
“일본정부가 왜곡하라고 압력”
하지만 시민단체들은 ‘정부·문부성 압력설’을 제기하고 있다. ‘교과서에 진실과 자유를’ ‘어린이와 교과서 전국 네트워크 21’ ‘사회과 교과서 문제 간담회 간사회’ ‘일본 출판노동조합연합회’ ‘역사적 사실을 주시하는 모임’ 등 5개 시민단체는 9월 12일 발표한 성명을 통해 “기존 교과서가 내용을 바꾼 것은 자율적인 판단에 따른 것이 아니고 정부 문부성의 강력한 압력에 따른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99년 12월경 한 출판사의 사장이 총리관저측으로부터 ‘종군위안부 기술에 관하여 신중히 취급해주었으면 좋겠다’는 요청을 받았다는 신뢰할 만한 몇 가지 정황증거를 제시했다. 시민단체들은 성명서를 낸 경위에 대해 “출판사들이 받은 압력을 언론에서 확인하기가 어려울 것이므로 성명서의 내용을 인용해서 기사를 쓰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밝혔다. 즉 시민단체가 책임을 질 테니 이 문제를 여론화시켜 달라는 주문이다.
일본 언론들도 요즘 이 문제를 꾸준히 기사화하고 있다. 그러나 시민단체의 지적처럼 교과서 내용이 어떻게 달라졌는지에 대해서는 많이 보도하고 있지만, 그 배경에 대해서는 아직 밝혀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기존 교과서도 문제지만 역시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 쓴 교과서의 통과 여부가 최대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이 모임은 현재 자신들이 만든 교과서가 검정을 통과하도록 정계 등을 통해 상당한 압력을 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 검정을 통과하면 일선 학교 채택률을 최소한 10%까지 올리기 위해 전국에 지부를 만들어 판촉활동을 벌인다.
이 단체는 교과서 채택률을 높이기 위해 기존 교과서를 공격하고, 일선 교사들보다는 교육위원들을 포섭하며, 국민의 역사관을 바꾸기 위해 노력하고, 정치력으로 교과서를 바꾼다는 행동지침을 마련해놓고 있다. 한마디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일단 교육현장에서 이 교과서가 쓰이게끔 하겠다는 전략이다. 이 단체는 이 교과서의 원본이라고 할 수 있는 ‘국민의 역사’ 10여만 부를 교과서 채택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지방의회 의원들이나 지역유지들에게 무료로 증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단체가 어느 출판사보다도 조직적으로 교과서 채택운동을 벌였지만, 이에 맞서는 시민단체는 아직 전열이 정비되어 있지 않다.
문부성은 현재 각 출판사가 검정을 신청한 교과서를 검토하고 있다. 늦어도 11월에는 각 교과서에 대해 ‘수정의견’을 만들어 각 출판사에 통보한다. 문부성의 ‘수정의견’은 공개되지 않는다. 출판사는 수정의견을 토대로 내용을 고쳐 내년 3월 이전까지 문부성에 제출하고, 문부성은 수정한 교과서를 다시 검토해 6월경 합격여부를 판정한다.
일선 중학교는 7월경 새 교과서 중에서 어떤 교과서를 쓸 것인지 결정하고 이에 따라 출판사들은 인쇄를 한다. 새 교과서는 2002년 4월 새 학기부터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