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11월호

구세력·자민련·가신 3대 고리를 끊어라

‘동교동 분열’ 이후 민주당 권력지도

  • 박성원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입력2006-07-31 14:2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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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대중정권은 자민련에 연연하고 가신에 대한 편애에 빠져 광범위한 민주·개혁세력을 세우는 데 실패하고 있다.
    • 국가주도세력 형성이 아닌 동교동의 기득권에 천착하는 사적인 인재풀의 한계에서 탈피하지 못한다면 ‘국민의 승리’없는 DJ만의 ‘반짝승리’에 그칠 것이다.
    신 촌 이화여대 후문앞 ‘석란‘. 한적한 분위기의 이 음식점에서는 매달 셋째주 목요일이면 거의 빠짐없이 한 모임이 열린다. 이문영(李文永) 경기대석좌교수, 한승헌(韓勝憲) 전감사원장, 고은(高銀) 시인, 정의구현사제단의 함세웅(咸世雄)·김승훈(金勝勳)신부, 이해동(李海東)목사, 강문규(姜汶奎) 새마을운동중앙협의회이사장, 김종철(金鍾澈) 전연합뉴스사장, 김병걸(金炳傑) 지도자육성장학재단이사장, 한명숙(韓明淑) 전여성단체연합공동대표(현 민주당 국회의원), 소설가 유시춘(柳時春)씨 등 10여명이 참석한다. 대부분 70~80년대부터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을 지지한 재야 민주화운동의 지도급 인사들이다. 이들은 그래서 누구보다도 DJ(김대통령의 영문 이니셜)가 ‘성공한 대통령’으로 역사에 남기를 바라던 처지다.

    97년 대선 ‘승리’ 이후 딱히 역할을 설정할 것도 없고 해서 “가끔 얼굴이나 보고 지내자”고 몇사람이 만나기 시작하다가 점차 사람도 늘고 만남도 정례화했다. 두 달에 한 번 정도는 이해찬(李海瓚) 민주당정책위의장도 참석하며 고(故) 문익환목사의 동생 문동환(文東煥) 전의원(미국 거주)도 틈틈이 참석한다. 모임에서 나온 얘기 중에 김대통령이 꼭 알아야 되겠다 싶은 얘기는 나름대로 청와대 쪽에 전달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은 최근 청와대 쪽에 대고 발언하는 것을 거의 포기한 상태다.

    “큰일 하시느라고 바쁘신 대통령한테 괜히 시간만 뺏는 것 같아 미안하기 때문”이라는 설명이지만 실은 “마땅히 들어줄 사람도 없고 얘기해봐야 귀에 잘 들어가지도 않기 때문”이라는 게 솔직한 사정이다. 그래서 모여서 자기들끼리만 걱정하는 경우가 잦아졌다. 특히 최근 노벨평화상에 빚나는 남북관계의 눈부신 성과에도 불구하고 내정은 첩첩산중 어두운 그림자여서 자칫 노벨상의 업적마저 퇴색되고 종국에는 ‘실패한 정권’으로 기록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까지 나오고 있는 것이다.

    대통령이 사무관보다 더 많이 안다고?



    나라와 민생을 도외시한 무한정쟁, IMF사태의 악몽을 떠올리게 하는 경제난국, 의약분업파동 같은 사회적 갈등의 조정능력부재 등이 국정의 발목을 잡고 있다. 이런 시점에 언제까지 50년간 누적된 적폐니 거대야당의 발목잡기니 하고 상황만 탓할 것인가. 정권내부적인, 특히 김대통령 자신의 ‘동티’와 취약점은 무엇인지 솔직하게 돌아보고 내치의 틀을 다시 짜야 할 때 아닌가?

    이와 같은 문제의식이 김대통령을 지지하던 지식인그룹 사이에서 최근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 기자는 이들 사이에서 최근 강력히 제기되기 시작하는 ‘DJ정부 국정난맥상의 내부원인과 처방’을 취재해보았다.

    먼저 원로급인 이문영(李文永·73) 경기대 석좌교수부터 만나 보았다. 80년 김대중내란음모사건을 비롯, 김대통령과 정치적 고난기를 줄곧 함께하면서 정치적 이유로 3차례나 구속·해직 당하기도 했던 이교수는 아·태평화재단이사장을 지내는 등 대표적인 ‘친(親) DJ ‘지식인’이다. 이교수는 현재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이 미국행정에 끼친 영향을 해부한 ‘인간 교회 국가’라는 저서를 내년봄에 출간하기 위해 연구실에서 막바지 원고정리 작업에 한창이다.

    기자의 갑작스런 방문에 원고를 잠시 밀쳐둔 이교수는 “김대중이라는 나무를 보지 말고 숲에서 문제를 볼 필요가 있다”고 말문을 열었다.

    “앙시앙 레짐(구체제)이 망가진 뒤 즉각 경쟁적 정당에 의해 대치된 예를 우리는 서구문명에서 보았다. 우리는 실로 오랜만에 수평적 정권교체라는 것을 경험했다. 아시아권에서는 드문 역사를 창출한 것이다….” DJ의 정권교체가 갖는 ‘역사적·문명사적’ 의의를 적극 설파하던 이교수는 “근데 이 문명사적 전환이 뭔가 빛을 발하지 못하고 있단 말예요”라는 대목에 이르러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빛을 발하지 못하는 원인이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먼저 민주주의가 제도화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에요. (정권을) 뒤집으면 될 줄 알았는데 그렇지가 못해요. 국회의원 공천을 보면 지역구민들이 아니라 중앙당지도부가 좌우하고 있죠. DJ는 ‘정치를 당에 맡기고 싶다’ 그러지만 그 이전에 모순이 있어요. 민주당의 서영훈(徐英勳)대표나 권노갑(權魯甲) 한화갑(韓和甲) 김옥두(金玉斗) 이런 사람들의 자리와 실권을 과연 지역구민들이 만들어준 겁니까? 아니죠(DJ가 만들어준 거죠). 기본적으로 당내민주주의가 없다는 말이에요.”

    이교수는 본론에 들어가면서부터 DJ주변에 본격적인 비판의 화살을 날리기 시작했다. “의약분업을 예로 들면 제도가 아무리 좋다 해도 행정책임자들이 도대체 준비를 안해요. 장관도 일단 어렵게 그 자리에 앉고 나서는 일을 안해요. DJ만큼도 안하죠. 왜 그러느냐면 권한의 위임 구조가 없기 때문이에요. 대통령이 특정분야의 사무관보다 그 분야에 대해 더 많이 안다고 생각하니 권한위임이 되겠어요?”

    ─민주주의를 위해 평생을 싸워온 대통령이 집권했는데도 그런 권한위임과 민주주의의 제도화가 안 되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사실 우리가 오랫동안 이렇게 해왔어요. 다만 이제 그러지 않는 시대여야 한다니까 이 흠이 더 크게 보일 뿐이에요. 한승헌 감사원장에게 ‘청와대 감사를 얼마나 엄격히 했는지’ 한번 물어보세요. 미국은 의회소속 기관이 백악관을 감사하는데 우리는 대통령이 임명한 감사원이 청와대를 감사해요. 아들이 아버지를 감사하는 격이죠.”

    당총재의 횡포로부터 자유로워야

    ─그럼 어떡해야 민주주를 제도화할 수 있겠습니까?

    “양 정당이 총재의 횡포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해요. 공천권을 지역주민이 가져야 하고 386이든 누구든 소신껏 법안을 내도 당지도부에 불려가 혼나는 일이 없어야 해요.

    대통령이 구체사안에 대해 담당사무관·서기관보다 아는 체하고 말을 많이 하는 것은 아주 큰일날 일이에요. 그건 담당 사무관 서기관이 할 일이에요. 사실 의약분업 문제는 목숨을 걸고 열심히 하는 담당자가 없어서 이렇게 된 거예요. 예견을 해서 ‘이거 못합니다. 하려면 이런 준비가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얘기를 하는 사람이 없고 전부 아전(衙前)만 있으니 안 되는 거예요. 행정부 공무원이 어떤 상부 눈치도 보지 않고 자기 권한을 행사할 수 있어야 돼요. 김대통령은 사무관과 초선의원, 그리고 교사들이야말로 자기보다 높으며 이 나라를 버텨나가는 중심세력임을 알아야 해요.”

    ─정부가 최근 국민의 신뢰를 얻는 데 실패하는 예가 많은 것 같은데요?

    “그렇습니다. 설사 일이 안 풀리더라도 국민들이 ‘정부가 최선을 다했는데도 안되니 어쩔 수 없다’고 믿게 해야 돼요. 기본적으로 정부의 공정성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있어야 그런 믿음이 나와요. 그런데 최근 상식에 벗어나는 예가 너무 많아요.”

    ─어떤 게 상식에 어긋나던가요?

    “예컨대 이한동(李漢東)씨가 이 정부를 얼마나 공격했는데 어떻게 이 정부의 총리를 할 수 있느냐 말입니다. 또한 박지원(朴智元) 문화관광부장관 문제인데요, 이 정부에 중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남북관계까지 중요한 역할을 한 그가 도덕성 시비에 휘말렸다면 이는 무척 예민하게 생각해야 할 문제예요. 공직자는 의심을 받지 않아야 하기 때문에, 이건 신속히 처리해야 할 문제였어요. 옳을 뿐만 아니라 옳게 보이는 데도 성공해야 해요. 이 공직이란 것은 김대중씨의 자리가 아니라 국민의 자리예요. 그걸 가혹하게 해서 성공한 나라가 싱가포르잖아요.

    또 정치는 정당에 맡긴다면서도 말과 행동이 안 맞아요. 맡긴다면서 왜 대통령이 임명한 사람들이 (당의) 책임자 자리에 떡하니 앉아 있습니까?

    어저께 민주당의 서영훈 대표가 TV인터뷰에 나와 거짓말을 합디다. 자기가 정말 실권을 행사하고 있습니까? ‘나야 솔직히 말해서 무슨 실권이 있느냐. 실권이 없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지만 거기에 머물러서는 안된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이런 식으로, 뭐 좀 진지하게 말하려는 고민이 있어야죠.”

    ─김대통령은 왜 그렇게 일을 밑에다 맡기지 못하는 겁니까?

    “우리나라 사람들이 대개 같이 하기보다는 혼자 하려고만 그래요. 김대통령이 특히 그래요. 지난 올림픽 때 일본과의 야구시합에서 좋은 경기를 보여준 김응룡감독에게 기자가 마이크를 들이대며 ‘수고가 많으셨는데요’ 하니까 그 사람이 ‘난 아무것도 한 게 없습니다. 벤치에 앉아 있기만 한 걸요’라고 말하더라고요. 참 멋있어요. 우리도 정당에서, 행정부에서 그런 기풍이 나오지 않으면 안돼요. 대통령이 고군분투할 게 아니고 슬슬 글씨나 쓰고 그러는 게 나아요. 공무원들 속에 있을 때는 ‘나는 잘 모릅니다, 오늘 참 좋은 것 배웠습니다’ 이렇게 북돋워줘야 신명나게들 뛸 거 아니에요. 초선의원들 얘기도 더 듣고 말이죠. 대통령 혼자 뛸 게 아니라 사무관이 더 뛰어야 해요. 대통령은 공무원에게 ‘어떻게 그렇게 멋지게 뛰었느냐, 난 참 감탄한다’며 자기는 흡사 바보처럼 돼야 해요.”

    사실 바보짓을 못하는 게 우리나라에서 소위 ‘공부 잘한다는’ 사람들의 특색이다. 김대통령 수첩에는 참으로 깨알같이 많은 글씨가 정밀하게 써 있다. 완벽주의자의 면모를 잘 나타내는 대목이다. 김대통령의 지나친 완벽주의와 거기서 비롯되는 1인무(一人舞), 이것이 활력있고 자율적인 국정운영에 장애물이 되고 있음을 이교수는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대표적인 원로급 인권변호사인 이돈명(李敦明·78) 전 조선대총장은 인사문제와 관련해 DJ가 더 엄정한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전총장은 “한빛은행사건의 경우 과거의 관행 버릇 등에 비추어 국민들은 실제 박지원 전장관이 그러지(대출압력에 개입하지) 않았겠느냐 생각하고 있다”면서 “실제 죄가 없다면 본인으로서야 억울하겠지만 국민정서를 고려해 조기에 민심을 잡았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전총장은 윤철상(尹鐵相)의원의 ‘여당 선거비 실사 개입’ 시사 발언과 관련해서도 “실제 여부와 관계없이 과거 권력이 그런 짓을 해온 점에 비춰 국민들은 의심을 갖고 있다”면서 “윤의원 개인에게는 가혹할지 몰라도 당직뿐만 아니라 조기에 전국구의원직도 사표를 받았어야 국민들 속이 풀렸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전총장은 또한 송자(宋) 전 교육부장관의 사례를 들며 “인사정보를 소홀히 하거나 사전에 제대로 검증하지 않은 것은 문제”라고 지적했다. 오래 전에 2중국적 문제로 구설수에 올랐던 장본인인 데다 특정기업의 사외이사 자격으로 실권주 편법취득을 통해 거액의 시세차익을 확보하고 있었음을 쉽게 파악할 수 있는 그를 교육부장관에 천거한 것은 그만큼 이 정부의 사전검증 작업이 소홀하다는 얘기다. 이 전총장은 “대통령을 보좌하는 사람들부터가 투명하고 당당해야 근거 없는 정부비판에 맞서 당당히 설득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민주당 내에는 당내 인사구조를 대폭 쇄신, 당의 자율역량을 확대해야 한다는 의견을 가진 소장파가 적지 않다.

    김대통령 가까이서 일한 적이 있는 한 초선의원은 “당에 자율성과 독자적 문제해결 능력을 부여하는 일이 시급하다. 그러려면 그런 능력과 성실성을 갖는 사람들로 지도부를 구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지금은 거꾸로 당이 ‘대통령의 생각이 뭐냐’를 헤아리는 데만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DJ 만의 승리’ 아닌 ‘국민의 승리’ 돼야 또한 정책적 측면에서도 당이 행정부의 테크노크라트들을 주도할 수 있어야 하는데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정부의 형식적 타당성만이 일방통행하고 국민들의 체감이나 정치적 해석, 수용역량 등은 정책결정에 반영되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다. 예컨대 의약분업의 경우 관료나 행정 쪽에서는 ‘해야겠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그것의 후유증이나 부작용에 대해선 당이 완충역을 해서 초기부터 막았어야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고 변화할 조짐도 안 보인다는 것.

    성공회대총장 출신의 이재정(李在禎)의원은 “당이 면모를 쇄신하지 않고 가니까 어느 쪽으로도 확실한 지지기반을 얻지 못하고 있다”면서 “그런데 당은 쉽게 변할 것 같지 않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시인 신경림(申庚林)씨는 “김대통령을 보좌하는 사람들이 문제”라는 시각을 보였다.

    “문화분야에 관해 말하자면 돈 되는 것만 문화로 생각하는 것 같아요. 박지원 전 장관도 그렇고 후임 장관도 별반 다를 게 없어요. 아무리 돈이 중요하다지만 순수문화라는 것도 있는 건데 정책하는 사람들이 잘 모르는 것 같애요. 김대통령 자신은 잘하고 철학도 있는 분인데 왜 이럴까 하는 안타까운 생각이 들어요.”

    하기야 문화라는 게 그렇게 금방 돈이 되는 게 아니다.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이다. 일본의 아사히 신문은 책광고도 베스트셀러 위주로 하지 않는다. 정말 장기적으로 필요한 밑거름이 되는 책만 광고한다. 반면 ‘문화대통령’을 표방했던 김대중정부의 문화정책에 대해 문화계 인사들은 지금 상당히 불만이 많다.

    나병식(羅炳湜) 풀빛출판사 사장은 김대중정부의 국정난맥의 원인을 ‘참여정치의 실패’에서 찾았다. 50년 만에 정권을 교체했지만 모든 게 자꾸 권력의 의미로 축소될 뿐 국민의 승리, 민의의 지배로 승화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대통령은 깊은 성찰이 있는지 몰라도 관료나 주변인사들은 순전히 사무적·기술적 차원에서만 움직이고 있어요. 일종의 권력적 행태만 보일 뿐 ‘국민의 정치’는 보이지 않습니다.”

    하기야 뉴 밀레니엄에 ‘새천년’을 화두로 붙이고 출범한 민주당도 과거 동교동이니 상도동이니 하던 시절처럼 소수의 폐쇄적 이너서클 위주로 운영된다는 지적이 적지 않다. 이러다 보니 정작 ‘국민의 위기’가 닥쳐도 단순히 소수 ‘권력의 위기’로만 치부되는 경향이 있어 치유가 어렵다는 것이다. 다시 나사장의 말.

    “40~50년간 누적된 모순을 해소하는 데 공적자금 50조원이 소요됐잖아요. 그럼 이 어려움을 국민이 같이 안고 갈 수 있도록 정부가 솔직히 설득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런 여론형성 과정이 없어요. 정치적 목표나 구조조정을 추진하며 어려움은 국민들에게 솔직히 공개하고 동참을 끌어내야 하는데 관료나 대통령 측근들은 면종복배(面從腹背·앞에서는 따르는 시늉을 하면서 뒤에서는 배신함)만 합니다.”

    DJ의 가부장적 태도, 강박관념

    나사장의 지적대로 공공 기업 금융 노사 등 이른바 4대 개혁이나 의료개혁 등은 단순히 정책집행에 그치는 게 아니라 사회적 공동선, 사회적 연대 차원에서 합의가 이뤄져야 성공을 거둘 수 있다. 고용이나 수익과 직결되는 이 문제는 단순한 관료적·기술적 발상으로만 해결되기 어려운 난제인 것이다.

    관민참여·국민참여에 의해 사전에 서로 이견을 포괄해내고 접점을 찾아낼 수 있어야 하는데 의약분업의 경우 이런 과정 없이 일을 추진하다가 막판에 문제가 불거진 것이다. 특히 관료에게 지나치게 의존하는 개혁추진력을 떨어뜨리고 심지어 방해요소로 작용할 수도 있다는 지적이다. 예컨대 150조원에 이르는 각종 공적기금의 개혁이 시급한데 이 개혁을 당사자들에게만 맡겨놓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개혁적 관료와 건강한 시민, 그리고 통찰력있는 CEO가 힘을 합쳐 국민을 주체로 끌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풀빛출판사의 나사장은 인사운용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대중설득에 대한 노력이 부족하다는 점도 DJ의 문제로 지적한다. “DJ개인은 성찰이 높은 사람이나 개혁에 대한 사회적인 위로나 설득없이 가부장적인 태도를 보임으로써 면종복배와 민심이반을 야기한다”는 것이다. DJ가 논리적인 것은 사실이나 개혁의 사회적 파장이나 고통에 대한 치유, 감성 끌어안기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사실 교원정년단축도 교원수요에 대한 정확한 예측없이, 또한 교사들에 대한 설득과정 없이, 3~4년간의 유예기간없이, 교사들을 개혁대상으로 삼음으로써 교사들의 자존심을 건드렸다는 지적이 많다.

    나사장은 DJ가 특검제를 비롯, 야당시절의 정치적 주장을 실천하려는 노력이 부족하다고 지적한다. 집권자라는 위치에 매몰돼 경직된 태도를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특검제는 김대통령도 야당 때 주장해온 사안이라는 점에서 쉬 물리칠 수 있는 성질이 아니에요. 또한 특검제는 국민적 의혹과 불신을 해소한다는 차원에서 다뤄야지, 실효성이 있느냐 없느냐만 따질 문제가 아닙니다.

    또한 김대통령은 ‘밀리면 끝장’이라는 식의 정치적 강박관념을 내비치는데, 워낙 논리적 완벽주의자이기 때문에 자칫 정치적 타협이나 탄력성을 잃을 가능성이 있어요. 과거에 DJ를 지지했건 안했건 간에 국민들은 특별히 ‘국민의 정부’에 기대하는 보상심리 같은 게 있는 거예요. 김대통령은 이를 어느 정도 충족시켜줌으로써 사회적 통합을 이뤄야 합니다. 설사 개혁 대상이라 해도 상대방 얘기를 들어줄 수 있는 게 민주주의잖아요. 야당의 목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더욱이 현재의 야당세력은 50년간 한국사회의 주류로 존재해온 사회적 실체예요. 이를 적대관계로 몰아가서는 안됩니다.”

    인사쇄신 없이 개혁없다

    김종수 민주개혁국민연합 사무총장은 “김대통령은 야당시절 같은 측근정치와 구세력 의존행태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대통령이 ‘나도 여러 군데서 민심을 듣고 있다’고 강조하지만 듣기 좋은 것만 듣고 있지 않느냐는 얘기가 많다. 이는 참모들이 그렇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DJ는 야당 때와 같이 제한된 인재 풀만 갖고서 지난 2년간 국정운영을 해오다가 한계에 봉착한 것 같다. 야당 때 곁을 지킨 인사들이 곧 국가경영 전문가는 아니지 않으냐. 국가경영에 베스트 멤버를 형성하고 그들에게 힘을 실어줘야 한다.”

    김 사무총장은 또한 DJ가 정권재창출에 연연하는 까닭에 스스로 장기적 입지를 좁히고 있다고 지적한다. “정권재창출에 연연하기 때문에 측근정치를 하게 된다. 측근정치에서는 밖의 소리들이 잘 들리지 않는다. 지난해 옷로비파문 당시 언론의 의혹제기를 ‘마녀사냥’이라고 무시하려 했던 김대통령의 태도는 한빛은행 의혹사건에 대해서도 ‘박장관은 아무 죄가 없다는데…(왜들 난리냐)”는 태도로 이어졌다.

    이 정권은 소수기반 정권이기 때문에 국민의 의혹을 사거나 구태의연하게 검찰을 이용, 사건을 덮으려 한다면 금세 기반이 불안해진다. 소수정권은 아무리 작은 의혹이라도 신속히 털어버리고 신뢰의 기반 위에서 나가야만 한다. 그래야 설사 다음 대선 때 정권을 빼앗기더라고 ‘야, 그때 그래도 정권교체 해놨더니 정치는 잘 하더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야만 그 다음번에 뭔가 희망이 있지 않겠느냐.”

    민주화운동세력이 대안으로 강조하는 것은 물론 민주화세력을 국가운영에 적극 기용해야 한다는 것이며, 이것이 ‘개혁정신’이라는 것이다. 김종수 사무총장의 말.

    “김대통령이 진정 정권교체의 의미를 살리려면 과거 기득권을 포기하고 민주화운동에 헌신했던 사람들을 배치했어야 한다. 민주화보상법으로 돈 몇푼 쥐어주는 차원이 아니라 나라를 개조하는 데 그들을 제대로 배치했어야 한다.

    그게 진정한 제2건국 아니냐. 지금 DJ는 기본적으로 역사성을 같이할 수 있는 세력을 동원(Mobilization)하는 데 실패하고 있다. 까탈부리는 자민련 붙들기에 연연하거나 ‘평생동지’라고 자신을 따라다니기만 한 사람들에 대한 편애에 빠져 있다. 광범위한 민주·개혁세력을 국난돌파 주력군으로 묶어세우는 데 실패하고 있다.”

    삼성사회봉사단 부단장을 맡고 있는 이해동목사도 “인적구조가 개혁되지 않고 있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 목사는 “김대통령은 천성이 착하고 여린 사람이어서 과감한 인적 청산·개혁을 못하는 것 같다”면서 “사회가 여전히 기득권자들 위주로 나가면서 역사적으로 무엇이 옳으냐 그르냐보다는 눈앞의 자기 이익만 절대시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고 말했다.

    인사(人事)를 할 때 ‘전문성’ ‘참신성’ ‘도덕성’을 기준으로 했다지만 실제 참신성과 도덕성은 액세서리로 붙이는 말일 뿐이고 순전히 전문성만 중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실무경험만 따진다면 일제 때부터, 이승만(李承晩)정권 때부터 권력에 참여한 사람만 고려대상이 되고 민주화 개혁 세력의 역사적 역할과 정체성(正體性)은 배제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76년과 80년 김대통령과 같이 감옥살이를 했던 이목사는 그러나 “김대통령은 지금까지 원칙을 버리거나 비난받을 일을 한 적은 없는 분”이라면서 “다만 옷로비사건이나 한빛은행사건 송자장관의 도덕성시비 등에서 보듯 밑의 인사 때문에 곤욕을 치르는 것 같다”고 진단했다. 이 목사는 특히 “개혁성향을 가진 사람들의 불만은 개혁이 지체되고 있다는 것”이라면서 “개혁을 느낄 수 있게 하는 것은 역시 인사를 통한 면모의 일신”이라고 재삼 강조했다.

    이목사는 그러나 “정말 비난받아야 할 사람은 김대통령이 아니라 남에게는 개혁을 해야 한다고 쉽게 말하면서 정작 자기가 개혁대상이 될 때는 ‘고통분담’을 외면하는 우리 사회의 이기심”이라고 꼬집었다.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개혁을 위한 실효성있는 프로그램의 제시’를 강조하고 있다. 사제단의 한 관계자는 “최근 별도의 모임을 갖지는 않았지만 지난 8월초 청와대에 들어가서 말하던 때와 상황이 별로 달라지지 않았고 따라서 사제단 입장도 달라진 게 없다”고 말했다. 사제단은 지난 8월 김대통령 면담 때 준비해둔 문건에서 “임기중에 개혁을 모두 완성할 수는 없다”면서 실효성 있는 개혁프로그램의 제시를 주문했다.

    “…독재시대의 잔재 청산마저도 실효성 없는 영남껴안기로 좌절하고 있다. 의약분업 문제도 국민건강을 걱정하기 이전에 한국적으로 100여년간 정착된 제도였으므로 정치적 기반이 약한 ‘국민의 정부’로서는 중기(中期)적 프로그램만 제시했어야 할 문제다. (그동안의 의약분업 추진방식은) 사회적 혼란과 공권력 경시풍조만 용인하는 식이 되었다. 이제 할 대상을 명확히 하고 다른 개혁은 대안제시로 가야 한다”

    사제단의 일원인 함세웅신부는 특히 “구세력과의 고리를 끊고 개혁세력을 등용해야 한다”는 지론을 갖고 있다. 옷로비사건 등 현 정부를 곤경에 몰아넣은 일련의 사건들이 대체로 DJ가 소수정권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끌어안은 구세력들에 의해 일어난 일이며 DJ는 이제라도 면모를 일신해서 개혁으로 진검승부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함신부는 한때 이런 의견을 청와대측에 적극 전달하기도 했으나 청와대측의 뜨악한 반응에 부딪히자 최근에는 거의 ‘포기한’ 상태라고 함신부와 가까운 한 인사는 전했다. 지난해 옷로비사건 때는 김대통령과 가까운 ‘민주화동지’가 몇 사람을 모아 시중의 분노여론을 전했으나 김대통령은 “서운하다. 당신들마저…”라는 반응이었다고.

    국민정치연구회 정책실장을 맡고 있는 소설가 유시춘씨는 “김대중정부가 구세력 청산과 개혁기반 구축에 실패함으로써 적잖은 개혁지지층이 실망과 배신감을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현정권에서 개혁지지층이 이탈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얼마 전 열린 서울관악민주포럼 행사를 들 수 있다. 70~80년대에 민주화운동을 한 서울대출신들의 모임인 관악민주포럼 행사에 한나라당은 현역의원만도 심재철(沈在哲) 원희룡(元喜龍) 김부겸(金富謙)의원 등 4명에다가 서울대 운동권 출신 원외위원장들도 대거 참석했다. 반면 민주당 소속인사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현정부가 더 이상 과거 야당시절처럼 정통 민주화개혁세력의 대변자를 자임하기 어려워졌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개혁세력 아닌 동교동의 집권

    유씨는 “현 정부가 동서화합을 내세워 구세력과 기득권세력 위주로 끌어안았고 인재등용 방식도 시스템 또는 공적인 형태가 아니라 사적인 의논관계에 의존하는 등 인재풀의 한계를 보여주고 있다”면서 “이는 국가의 장래나 개혁세력의 운명보다 동교동의 기득권에만 관심을 두는 데서 비롯된 결과”라고 비판했다. 유씨는 “개혁세력이 집권한 줄 알았더니 동교동만 집권했더라”면서 “영남쪽 사람도 개혁적인 사람이 아니라 옛날에 다 ‘해먹던’ 사람들, 감옥가기 싫어서 줄바꿔선 사람들만 그대로 껴안아 과거와 달라진 게 없다”고 말했다.

    정권교체 직후 한때는 영남에서도 ‘DJ가 됐으니 한 번 확 뒤비질(뒤집어질, 바뀔)거라는, 변화에 대한 나름의 기대가 있었으나 이제는 그런 꿈을 꾸는 사람도 없다는 것이다.

    국민대 유승남교수(柳勝男·행정학)도 “새로운 민주주의 시대에 걸맞게 개혁적이고 참신한 인재들로 국정 면모를 일신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유교수는 친(親)DJ 지식인 그룹인 지정회(智井會) 멤버이다. 유교수는 “국민의 지지기반을 확대해나가면서 개혁이 이뤄져야 하는데 점진적 개량적 방식으로 해나가다 보니 개혁지지층의 지지가 약해졌다”면서 “더욱이 정부가 체감경제나 사회개혁 등에서 단기적인 문제해결 능력을 보여주지 못하는 것이 국민의 지지약화를 초래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과거부터 김대통령과 철학 및 역사인식을 같이 하면서도 국정에 이를 반영할 기회를 봉쇄당했던 지식인들의 참여와 연대를 강화하는 것, 그리고 재임중 할 수 있는 일과 다음 정권이 할 일에 대한 프로그램을 다시 짜서 구조개혁과 변화를 적극 추진하는 것, 이것이 유교수가 내놓은 해법이다.

    김상근(金祥根) 제2건국위 상임위원장은 무엇보다 “정권에 들어와 있는 사람들이 몸을 던져 권한과 책임을 다하려 들지 않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장차관이나 실국장 등 중간책임자들이 과거와 같은 (강압적) 힘을 갖고 있지 못하니까 국민들이 이들 책임자들을 제끼고 막바로 대통령을 상대하려 든다. 한편 민간인들은 지금도 정권과 뜻을 같이 하면 무조건 ‘관변’으로 생각하고 야당은 무조건 대여투쟁을 한다. 이러한 상황을 해결하려면 정치가, 정당이 제 구실을 해줘야 한다. 대통령은 전지전능하거나 모든 걸 다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현장에 몸 던지는 정치인이 없다

    김위원장은 며칠전 최장집(崔章集) 전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장이 주장한 ‘남북관계 속도조절론’에 이의를 제기했다.

    “사람이 운전을 하다보면 시속 100㎞를 넘어 무심코 130㎞까지 속도가 날 수도 있는 거다. 정치가 제 구실을 해줘야 한다. 대통령더러 속도조절을 하라는데, 정치가 제 구실하면 브레이크는 걸리는 것이다. 대통령 눈치나 보는 것은 정치인이 아니다. 소장파 13인의 ‘반란’은 잘한 거다. 그러나 투쟁에 그쳐서만은 안된다. 뭔가를 만들어내는 데까지 이르러야 한다. 예컨대 의약분업도 이렇게 심각하다면 당내에서 불만만 토로해선 안된다. 의사들을 붙잡고, 약사들을 붙잡고 밤새 씨름을 해서라도 조정하고 길을 열어줘야 한다. 이런 것도 전부 대통령한테 책임을 미루고 불평만 하고 있어서는 해결이 안된다. 지금 정치인 중에 정치현안이 있는 현장에 몸을 던져 밤을 새워가며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이가 누가 있는가. 전부 대통령 얼굴만 쳐다보고 있다.”

    ─대통령이 너무 많은 것을 ‘전지전능하게’ 알고 계시다는 생각이 드니까 뭐 어디 감히 나서서 스탭을 못 밟는 것 아닌가? 대통령이 너무 똑똑하셔서…

    “설사 그렇다 해도 얘기해야 한다. 장차관이나 수석들도 마찬가지다.”

    ─회의 때나 보고 때나 대통령께서 먼저 누가 얘길해도 ‘더 이상 오를 곳이 없을 정도로’ 결론을 쫙 정리해 주시는데 어찌 ‘뱁새’들이 함부로 말할 수 있겠는가? 누가 감히 ‘아니오’라고 아뢸 수 있겠는가.”

    “꼭 대통령 앞에서 ‘아니오’라고 하는 게 중요한 건 아니다. 정치인이나 행정부당국자들이 현장에 먼저 몸을 던져 풀어나가는 자세가 중요하다. 그런 자세가 없으니까 고민도 덜하고 공부도 덜하고, 각오도 덜한 상태에서, 대통령 앞에 선다. 그러니 대통령은 답답하다. 답답해서 먼저 얘길 꺼낼 거다.” 김대통령은 야당시절 의원들에게 ‘숙제’내주기로 유명했다. 회의 때 참석자들이 하도 얘길 안하니까 김대통령이 ‘당신은 이 문제 좀 검토해오시오’ ‘당신은 저 문제 좀 검토해 오시오’ 하고 숙제를 내준다. 당사자들은 잊어 먹고 있다가 나중에 김대통령이 ‘김의원, 그거 어떻게 됐습니까?”라고 ‘숙제검사’를 하는 바람에 곤혼스러워하던 경우가 한두번이 아니다. 당사자들은 “우리가 무슨 어린 학생도 아닌데…”라고 볼멘 소리도 하지만 오죽 답답했으면 그랬을까.

    ─말을 꺼내시는 정도가 아니라 결론까지 모두 정리를 해주시니 수석이든 장관이든 그저 ‘아, 예’하고 메모지 꺼내서 받아적어 나오기 바쁜 것 아닌가?

    “참 한심한 일이다. 사람들이 결국 저 양반(김대통령) 얘기가 맞더라는 경험을 반복하게 되니까 그러는 건데, 대통령을 모시는 사람들이 먼저 할 얘기와 설득시킬 얘기를 준비해가서 관철시켜야 한다. 이걸 않는 것은 자기 맡은 일을 팽개치는 거다. 괜히 헛소리했다가 찍히기나 할까봐 눈치볼 게 아니라 책임지고 맡은 일 얘길 하고 의견을 적극 개진해야 한다. 지시·교시만 받겠다는 자세는 곤란하다. 물론 대통령도 되도록 수석이나 장관, 기타 아랫사람들이 먼저 말할 수 있게 들어주는 게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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