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11월호

이필상 고려대 경영대학장 “한국경제, ‘혈색’ 좋지만 癌 위험 상존”

  • 이형삼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hans@donga.com

    입력2006-08-01 10: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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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시지표는 개선됐지만, 이는 경제의 구조나 체질을 바꿔 얻은 자생적 경제회복이 아니다. 외국자본을 들여오고 공적자금을 푼 데 따른 일시적 현상이다.
    이 필상(李弼商·53) 고려대 경영대학장은 “거시지표가 개선되긴 했으나, 경제가 구조적으로 여전히 불안하기 때문에 언제 주저앉을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확산되고 있다”고 우리 경제의 현주소를 진단한다.

    IMF 사태 이후 전 경제주체들의 노력에 힘입어 외환보유고가 900억 달러를 넘어서고 경제성장률도 10%대에 올라서는 등 가시적인 성과가 있었지만, 이는 경제의 구조나 체질을 바꿔 얻은 자생적 회복이라기보다는 경제를 개방해 외국자본을 들여오고 정부가 막대한 공적자금을 푼 데 따른 일시적 현상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밥을 많이 먹고 보약을 달여 마시면 당장 혈색은 좋아 보일지 몰라도 장기(臟器)의 심각한 질환을 방치하다가 어느날 갑자기 암으로 쓰러질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라는 설명이다.

    ―그래도 97년 말의 긴박한 상황과는 비교하기 어려울 만큼 좋아지지 않았습니까. ‘제2 위기론’은 좀 성급한 전망이 아닐까요?

    “정부는 자꾸 거시지표를 들이대면서 그런 주장을 펴는데, 설득력이 떨어져요. 외환보유고가 900억 달러를 넘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증권시장 개방에 따라 증시에 들어온 외국자본이 700억 달러이고, 단기 외채가 460억 달러입니다. 장기 외채 중 만기가 다가오는 외채까지 합한 유동외채는 600억 달러나 돼요. 1년 안에 언제든지 빠져나갈 수 있는 돈이 1300억 달러라는 얘긴데, 외환보유고가 900억 달러라고 어떻게 안심할 수 있습니까.



    설령 증시에서 외국자본이 유출되지 않고 외채의 일시상환 압력이 없다 해도 금융기관이 제 기능을 못해 돈이 안 돌면 외환 900억 달러를 안고 쓰러질 수도 있어요. 종합주가지수가 연초 1000에서 500대로 떨어지고 280까지 치솟던 코스닥지수가 80대로 추락했다는 것은 증시의 기능이 마비된 것으로 봐야 합니다. 증시는 투자자본을 끌어들여 산업자본화 함으로써 경제를 기름지게 하는 젖줄인데, 이게 끊겨버린 겁니다. 그래서 기업들이 주식이나 회사채를 발행하기도 어렵게 됐으니 멀쩡한 회사가 흑자도산할 가능성이 높아졌어요.”

    위기요인 상존

    이학장은 “여러 상황이 97년과 너무 비슷해 겁이 난다”고 말한다. 가령 94년에서 96년까지 우리 경제가 호황을 누렸던 것은 반도체 자동차 조선 석유화학 분야의 수출 호조에 힘입은 것이었다. 그러다 이들 업종이 위축되면서 외환위기를 맞았다. 그런데 지난해부터 경제가 살아난 것도 반도체 자동차 조선 분야의 호황이 주요인이었다. 이렇듯 특정 업종의 주기적 호황에 따라 경제가 회복된 것이라면 마음을 놓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지난 9월의 수출실적이 사상 최대의 흑자를 기록했다고 하지만, 수출을 이끈 것은 반도체 자동차 컴퓨터 등 몇몇 업종에 지나지 않았다. 건설 섬유 음식료품 신발 같은 전통산업은 붕괴되다시피 하면서 극심한 경기 양극화 현상을 보였다. 대다수 근로자들의 생활기반인 전통산업이 무너진 상황에서 일부 대기업에만 숨통이 틔였다고 해서 경제가 회복됐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는 게 이학장의 해석.

    또한 97년 7월에 기아자동차가 무너지면서 증시가 대폭락하고 대외신인도가 추락해 외국자본이 순식간에 빠져나간 것을 생각하면, 최근 대우자동차 매각이 철회된 이후 구조조정에 대한 불신이 증폭되면서 외국자본이 조금씩 빠져나가고 있는 상황을 예사롭게 봐 넘기기 어렵다.

    97년 외환위기 직전의 상황과 더욱 흡사한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정부가 “펀더멘털이 좋으니 걱정할 것 없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 그래서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게 아닐까 하는 불안감을 떨쳐버릴 수 없다는 것이다.

    ―같은 실수를 거듭하지 않을까 우려되는 게 또 있습니다. 공적자금입니다. 금융권을 정상화시키기 위해 110조 원을 투입했는데도 부실채권은 크게 줄지 않았습니다. 이번에 또 40조 원을 넣겠다는데, 재경부 장관의 약속대로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 될 수 있을까요?

    “문제는 부실채권의 실상을 제대로 밝히지 않은 데 있습니다. 어느 은행이 부도날 것 같다, 어느 기업에 구제금융이 필요하다고 문제가 터질 때마다 땜질하듯 찔끔찔끔 공적자금을 투입했어요. 암세포는 그대로 남겨둔 채 말입니다. 관료들이야 어떻게든 부실규모를 적게 발표하고, 적은 공적자금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해야 책임을 면할 것 아닙니까. 그러니 공적자금 규모가 계속 늘어났죠.

    공적자금은 타이밍이 가장 중요합니다. 지나간 일이지만, 기아나 대우사태가 터졌을 때 그 속사정을 낱낱히 밝히고 조기에 암세포를 떼냈으면 훨씬 적은 돈으로 문제를 해결했을 겁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40조 원을 더 투입하겠다고 하면서 부실채권의 실상은 공개하지 않았어요. 공적자금이 지금까지 어떻게 사용됐고, 지금은 왜 또 40조 원이 필요한지 명확하게 설명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것도 밑빠진 독에 물붓는 꼴 되지 않겠느냐는 얘기가 나올 수밖에요.

    지금이라도 실상을 투명하게 밝히고 분명한 대책을 내놓아야 합니다. 책임을 물을 것은 묻고, 고통이 필요하다면 감내하자고 호소해야죠. 캄캄한 밤에 아이들이 무서워하는 건 어둡기 때문이예요. 불을 켜주면 무서워하지 않아요. 밝히고 설명하면 대응하고 준비합니다.

    경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심리입니다. 사람들이 다 불안해 하면서 아무것도 안 된다고 생각하면 멀쩡하다가도 정말 그렇게 됩니다. 반대로 뭔가 될 것 같다 싶으면 다들 한번 해보자는 분위기로 변하죠. 이렇게만 되면 증시로 돈이 다시 몰립니다. 시중에 돈이 넘쳐 국민은행 주택은행으로 들어온 돈이 350조 원이고, 부동자금도 200조 원이나 된다는데, 비전이 보이면 이 돈들은 증시로 오게 돼 있어요.”

    공적자금을 투입하는 과정에서 저지른 잘못은 이것뿐만이 아니다. 공적자금이 외국자본에 대해 지나치게 저자세였다는 것이 이학장의 지적이다. 외국에 매각한다고 하면 앞뒤 재보지 않고 무작정 공적자금을 퍼부었다는 것이다.

    예컨대 우리나라 1년 예산의 5분의 1인 17조 원을 쏟아부은 제일은행은 외국자본에게 ‘단돈’ 5000억 원에 팔렸다. 그렇다고 건전한 은행으로 탈바꿈한 것도 아니다. 부실은 부실대로 커졌고, 혈세인 공적자금은 은행 임원과 사외이사의 수억원대 연봉으로 빠져나갔다. 그렇게 해놓고도 기업을 수혈해 되살릴 생각을 하기보다는 잔돈푼 챙기는 소비자금융에나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것.

    ―IMF 체제로 들어가면서 외국자본의 국내시장 잠식은 어느 정도 예견됐던 일 아닌가요?

    “IMF가 구제금융의 대가로 요구한 것이 고금리와 긴축정책, 경제개방정책이었습니다. 이건 교과서 같은 정책이긴 해도 우리 경제현실에는 적절하지 않았어요. 우리나라에 자기 돈으로 기업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너나없이 부채율이 높은데, 10%이던 금리가 30%로 뛰어오르니 어떻게 되겠어요. 돈을 빌리려 해도 긴축정책 때문에 빌릴 데가 없었죠. 그 결과 수많은 중소기업들이 흑자도산 했습니다. IMF 프로그램이란 것은 잠깐 정신잃고 쓰러진 환자에게 링거 주사 놓아서 정신 차리게 하는 건데, 우리 경우는 아예 회복이 불가능하게 만들었어요.

    그런 상황에서 증권시장, 주식시장, M·A 시장을 다 개방하니 그 아까운 흑자기업들이 고스란히 외국기업들에게 먹혀버린 겁니다. 그때는 주가가 폭락한데다 환율도 높았기 때문에 400억 달러면 우리나라 상장기업 전부를 살 수 있었어요. 외국자본으로선 빨리 들어가서 먹으면 임자였습니다. 외국자본이 증시에서 그렇게 벌어간 돈이 최소 50조 원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경제를 이끄는 주력기업들의 외국인 지분율이 크게 높아졌어요. 삼성전자의 외국인 지분율이 60%가 넘고, 주택은행 국민은행 같은 우량은행 지분율도 50%가 넘습니다. 포항제철은 공기업이라 외국인 지분율이 30%로 묶여 있었는데, 이걸 풀어주니 금방 40%를 넘어섰어요. 만일 이들이 담합해서 경영권을 위협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런 일이 없더라도 우리 근로자들이 피땀 흘려 번 돈의 절반이 외국자본으로 흘러들어 간다는 얘깁니다.

    경제가 살려면 개방은 불가피하지만, 준비는 해놓고 개방을 했어야지요. IMF 프로그램으로 기업 초토화시키고 주가 폭락시키고 외국자본들이 마음대로 들어와 먹도록 하는 게 개방정책입니까?”

    개혁엔 순서가 있다

    이학장은 정부가 초기부터 역점을 둔 재벌개혁에 대해서도 낙제점을 줬다. 사업구조 개혁, 재무구조 개혁, 지배구조 개혁, 투명성 확보 등 재벌개혁의 핵심과제 가운데 제대로 성과를 본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재벌을 개혁실적 올리기 위한 대상물로 생각하고 무작정 ‘과감한 개혁’만 외쳤어요. 주먹만 휘두른다고 개혁이 됩니까. 가령 사업구조를 개혁하려면 개혁의 큰 틀을 마련한 다음 법적·제도적으로 이를 뒷받침하고 재벌에 대한 금융지원을 단계적으로 중단해 기업이 구조조정을 안 하고는 못 배기게 만들었어야 합니다. 그런데 빅딜을 하라면서 사업부문을 이렇게 저렇게 바꾸라고 일방적으로 지시만 했으니 구조조정이 제대로 되겠습니까?

    또한 부채율을 200%로 낮춰 재무구조를 개선하겠다고 해놓고 결국은 순환출자를 허용해 도망갈 길을 열어줬어요. 지배구조도 변한 게 없어요. 말만 요란했지, 실질적으로 이뤄진 건 없습니다. 관치 구조조정의 한계지요.”

    관치경제는 더 심화됐다. 금융감독위원회라는 무소불위의 기구가 기업과 금융기관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다. 특히 금융기관들은 공적자금 투입을 명목으로 사실상 국유화되다시피 했다. 과거보다 통제하기가 훨씬 쉬워진 것이다. 정부가 강조해 온 시장경제논리를 무색케 하는 대목이다.

    한마디로 개혁에 순서가 없었다는 게 이학장의 주장이다. 재벌과 금융 등 민간부문의 개혁을 효과적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는 정치개혁, 정부와 공공부문 개혁, 관치금융을 청산하는 등의 관료주의 개혁을 솔선해야 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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