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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착인터뷰

“죽는 날까지 지식인의 위선 벗기겠다”

‘독설가’ 강준만 교수 11시간 밀착 인터뷰

  • 조성식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mairso2@donga.com

“죽는 날까지 지식인의 위선 벗기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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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만식 글쓰기’에 대한 논쟁은 언론 매체와 각종 잡지를 통해 찬반 양론이 뜨겁게 맞서는 가운데 최근 언론에도 소개된 홍윤기 교수(동국대 철학과)의 ‘원고망명 사건’으로 절정에 달했다. 이 사건은 계간 ‘당대비평’(주간 문부식)의 편집위원인 홍교수가 ‘강준만식 글쓰기’를 분석한 자신의 글(‘우리 시대의 권력 비판과 권력 감수성’)이 다른 편집위원과의 의견 차이로 ‘당대비평’ 가을호에 실리지 못한 데서 비롯됐다. 홍교수는 그 원고를 강교수가 발간하는 월간 ‘인물과 사상’ 10월호에 싣는 한편 ‘당대비평’의 편집위원직을 그만두었다.

― ‘강준만식 글쓰기’에 대한 논쟁이 최근 부쩍 잦아지는 양상인데요. 홍윤기 교수의 ‘원고망명 사건’을 비롯해 여기저기서 논쟁이 벌어지고 있지요. 공공연하게 ‘강준만 현상’이라는 말도 나오고. 한국 지성사 또는 비평사의 흐름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찬사가 있는 반면 도덕적 기반이 결여된 인신공격이라는 등 비판론도 만만찮습니다. 글쓰기의 목표·전략·전술이 있다면 어떤 것입니까?

“그렇게 체계적이지는 않은 것 같아요.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지금 언론개혁운동하는 것도 그래요. 서울에 있는 교수들은 지방대 교수들이 자꾸 나선다고 그런단 말이에요. 지방대 교수들이 서울에 올라오지 못한 것에 한이 맺혀서 그런다고 사석에서 그래요. 그리고 그 정서가 의외로 널리 퍼져 있습니다.

제 이야기는 그 말이 맞다는 거예요. 왜 그러냐, 서울에선 유혹을 너무 많이 받다 보니까 기존 언론구조에 편입돼 버리는 겁니다. 저는 한국언론학회가 한국의 언론 발전에 기여하지 못한다고 봐요. 오히려 언론을 정당화해주고 유착체제로 가고 있는 게 한국 언론학자들의 큰 흐름이 아닌가 봐요. 그러나 지방에 있으면 중앙의 그러한 흐름에 대해 문제 의식을 가지고 볼 수 있다는 거죠.

저 같은 경우 학부 전공과 대학원 전공이 다른 게 큰 요인인 것 같아요. 학부에서 경영학을 한 탓에 학연이 없어요. 저도 만약 학연 덕을 보고 학연에 안주할 상황이라면 잘못된 줄은 알지만 세상이 다 그런 거지, 하고 그냥 그대로 갔을 거란 말이죠. 저는 한국의 지식인들이 다 알고 있을 거라고 봐요. 왜 몰라요. 세상이 다 그런 건데 네가 문제 삼는 게 이상하다는 거죠. 문제 삼는 것 자체가 자신의 욕구 불만에서 비롯된 개인 한풀이 차원이 아니냐는 시각이 강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제 얘기는 개인 한풀이가 뭐가 나쁘냐는 겁니다. 모든 문제의식이라는 것이 그렇죠. 한국 지식계에서 노른자위를 차지한 사람들에 대해 노른자위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이 갖는 문제의식을 배가 아파서 그런다고 매도해버리면 새로운 비판이 어떻게 나올 수 있느냐는 겁니다. 저 같은 경우 문제의식이 분명히 제 개인적인 입장에서 출발했을 거다, 그렇게 보죠. 동기유발도 그렇고. 저라는 사람이 그렇게 순수하진 않아요.”

‘콜럼버스의 달걀’

“한풀이는 중요하고 정당하다”는 강교수의 독특한 ‘한풀이론’은 호남인들의 정치적 정서에도 적용된다.

“과거에 호남 사람들이 김대중한테 몰표 주면서 한풀이한다고 그랬잖아요. 저는 그걸 정당한 한풀이로 보죠. 한풀이라고 욕하지 말라는 겁니다. 다만 오늘날에 와서 밥그릇 싸움의 양상으로 변질되는 것에 대해서 혹독하게 비판하긴 하지만 한풀이라는 것이 무조건 매도되어야 할 것은 아니라는 거죠.”

―‘강준만식 글쓰기’의 특징을 말하자면, 실명 비판, 독설, 메타 비판―곧 비판에 대한 비판이 많다는 점이죠. 교수님 자신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저는 제 글쓰기를 ‘콜럼버스의 달걀’로 보거든요. 제 작업은 대단한 지적 능력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에요. 누가 먼저 (달걀을) 깨 가지고 세우냐의 문제일 뿐이라는 거죠. 무슨 말이냐 하면 한국 지식계가 언론계보다 ‘침묵의 카르텔’이 더 강해요. 마땅히 내부 비판이 있어야 할 곳에 내부 비판이 없는 것을 ‘썩었다’고 표현한다면 언론계보다는 지식계가 훨씬 더 썩었다는 거예요. 직무유기 차원이죠.

과거에 군사독재정권을 예찬하고 참여했던 교수들이 지식계 내부에서 비판의 형식으로나마 응징을 받아본 적이 있느냐는 거예요. 없어요. 그때 그들이 차지하고 있던 대학 내의 위상 덕분에 제자들 가운데 진보적이고 개혁적인 지식인들이 많아도 갈등이 별로 없어요. 과거 청산이 있습니까, 비판이 있습니까. 아무것도 없어요. 제가 어떤 존경받는 지식인을 탐구하기 위해서 그 사람에 관해 나온 글을 다 확인해보면 비판과 반론이 거의 없어요.

한국 사회에서 지식계의 논쟁이라는 건 백낙청(서울대 영문학과 교수·계간 ‘창작과 비평’ 편집위원)과 손호철(서강대 정치학과 교수)의 분단체제에 대한 논쟁처럼 자기들은 빼놓은 공리공론에 관한 논쟁이에요. 특정인을 논할 때 그 사람의 사상이나 주장에 대한 비판까지 안 들어간다는 거죠. 그런 풍토가 지배적이기 때문에 제가 하는 실명 비판을 인신공격으로 보는 건 기존 풍토에 비춰보면 정당하다는 거예요. 저는 그 풍토를 바꾸자는 거죠. 언제까지 ‘침묵의 카르텔’을 유지하면서 내부 상호비판은 안 하고 사회를 향해서만 비판할 거냐는 거죠.”

강교수의 실명비판 방식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가장 문제 삼는 것 중 하나는 그것이 비판의 정도를 넘어 대상자에게 모욕감을 준다는 점이다. 이와 관련, 홍윤기 교수는 ‘인물과 사상’ 2000년 10월호에서 “강준만은 타도나 응징이나 적발이 아니라 모욕에 너무나 많은 지면과 정력을 소모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홍교수 주장의 타당성 여부와는 별개로 지난 10년 동안 강교수가 써온 글에서 비판 대상자가 ‘모욕적으로 여길 만한’ 표현을 찾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몇 가지 예만 들어보자.

“그렇다. 바로 교활함이다. 나는 이문열씨를 표현할 마땅한 단어를 찾지 못해 고민했는데 (이씨를 교활하다고 한) 김명숙씨의 글을 보고 손뼉쳤다.”

“이인화는 홧김에 오입하나…. 그에겐 영웅 콤플렉스뿐만 아니라 촌놈 콤플렉스도 있다. 그는 촌놈 출신으로 어린 나이에 크게 출세했다.”

“잡글에 대해 그리 자학하지 마십시오. 손교수님의 글은 논문도 잡글 식이던데 뭘 그러십니까(손호철 교수에 대해).”

“참 큰일 낼 사람이다. 더 큰일 내기 전에 따끔하게 손을 봐야겠다(한양대 사학과 임지현 교수에 대해).”

한국 지식계의 ‘침묵의 카르텔’

이런 지적에 대해 강교수는 “한국 지식계가 정상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방식으로 비판할 수밖에 없다”고 강변한다.

“저는 홍선생님(홍윤기 교수)께 한국 지식계에 ‘침묵의 카르텔’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시냐, 그게 바람직하다고 보시냐, 묻고 싶어요. 그분은 기존 풍토에 비춰 내 비판방식이 모욕적이고 인신공격적이고 상처를 주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제 주장은 모욕받아 마땅한 짓을 했으면 모욕당해야 하고, 상처 받아 마땅한 짓을 했으면 상처 받아야 한다는 거죠. 그건 정당한 응징이라는 겁니다.

모욕이란 건 주관적인 감정이기 때문에 정당한 비판도 모욕으로 받아들인다면 그건 어쩔 수 없죠. 주관적인 느낌까지 어떻게 책임을 지겠습니까. 이런 얘기가 나오는 건 한마디로 말해 한국 지식계에 내부 비판이 없었다는 거죠, 여태까지. ‘콜럼버스의 달걀’이라고 표현한 건 제가 인사이더로서 큰 흐름에 속해 있었더라면 저도 그렇게 못했을 거라는 의미예요. 한국의 지식계 문화는 누구든지 이래선 안 되겠다 싶어 흠집을 내려고 들면 쉽게 할 수 있습니다. 너무 엉망진창이니까.

제가 글을 양산할 수 있는 것도, 너무 쉬우니까, 그 사람의 말이나 글을 인용해놓고 몇 마디 툭 던지고 넘어가면 되기 때문이에요. 말하자면 방이 너무 어질러졌으니까 치우고 정리하는 게 급하지 인테리어는 나중 문제라는 거죠. 그러니까 저의 글쓰기는 아직 인테리어로 들어갈 단계가 아니라는 겁니다. 너무 거칠고 양산에 따른 질의 문제는 인정하죠. 조금 더 뜸들이고 손질하면 훨씬 매끄럽고 좋은 글이 되지 않겠어요?

그러나 열불 터지게 하는 사건들이 너무 많이 벌어지니까 그럴 여유가 없습니다. 특히 제가 열 받는 게 YS정권에 참여했던 지식인들의 행태입니다. 정말 나빠요. 한국 지식계는 정말 반성해야 합니다. YS가 저렇게 깽판 치는데 어떻게 입을 봉하고 있어요? 거기에 대해선 입을 다물고 있으면서 언론매체에 한국 사회를 개탄하고 비판하는 글을 써댑니다. 이게 마피아 집단이지 뭐냐 이거예요. 자기가 충성했던, 자기에게 한자리 줬던 전직 대통령에 대해서는 말 한마디 못하면서… 이건 의리의 문화가 아니에요, 깡패 문화지. 친DJ 지식인들도 마찬가지죠.

김아무개인가, YS 정권에서 청와대 수석하던 사람이 김대중 대통령에게 보내는 고언을 언론에 기고했던데, 한대 때려주고 싶더라고요. 말은 다 옳아요. 김대통령도 반성해야죠. 그런데 지금 김영삼씨가 지역주의로 나라를 갈가리 찢고 있는데, 거기에 대해 여태까지 말 한마디 한 적 있어요? 당시 재야 세력을 YS 문중으로 끌고 들어간 사람이. 그러고선 ‘생활성서’(월간)에는 매달 자기가 민주화투쟁한 것을 자랑하고 있더라고요. 그런 걸 보면 정말 화가 나서 글을 안 쓸 수가 없습니다.”

문제는 좌파·진보지식인

―말하자면 분노가 글쓰기의 원동력이군요.

“분노죠. 그나마 언론계는 일부 신문이 나름대로 내부 비판을 하잖아요. 그런데 학계에는 그런 게 없어요. 조금만 실명으로 비판하면 10대 소녀들처럼 상처를 받아요. 온실에서 과보호 받아서 그래요.”

―객관적으로 심하다 싶은 표현이 여러 번 있었던 것 같아요. 예를 들면 임지현 교수의 경우만 하더라도 큰일 낼 사람이라느니, 손 좀 봐야겠다느니 하는 표현은 자존심 상할 만하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제 글을 다 읽지 않아 그러는데, 제 글은 상대편이 한 발언의 어이없는 정도에 따라서 비판의 정도가 달라집니다. 가령 언론개혁에 동의하지만 방법에 대한 의견 차이가 있을 수 있죠. 그 경우 어떻게 감히 독설을 합니까. 어림도 없는 이야기죠. 임교수님에게 제가 화가 나는 이유는 좌파라는 분이 말이 안 되는 행태를 보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자꾸 왜 네 생각만이 옳다고 그러냐, 다른 방법이 있을 수 있지 않으냐고 묻는데 저는 그게 이 길로도 갈 수 있고 저 길로도 갈 수 있는 문제라고 볼 수 없다는 거죠. ‘당대비평’에 쓴 글을 읽어보면, 표현은 안 했지만, 총선연대의 낙천·낙선 운동도 일상적 파시즘적인 방법이라고 보는 분이에요. 말도 안 되는 얘기죠. 좌파적 담론을 깔면서 그런 얘기를 하니까, 나는 그분이 정말 큰일 낼 사람이라고 보는 거예요.”

좌파 지식인으로 분류되는 임지현 교수와의 논쟁은 ‘인물과 사상’ 2000년 2월호에 강교수가 ‘임지현, 당신의 조선일보관이 일상적 파시즘이다’라는 제목의 글로 임교수를 먼저 공격하면서 시작됐다. 강교수는 그 글에서 임교수가 조선일보에 체 게바라(쿠바 혁명가)에 대한 글을 기고하고 조선일보 편집국에서 강연한 것을 두고, “조선일보의 극우 이데올로기와 양립할 수 있는 주제로 글을 기고해 조선일보의 상품성을 높여줘도 괜찮다고 보는 생각”이라며 맹렬히 비난했다.

이에 임교수는 3월호 ‘인물과 사상’에 반론을 실었다. 곳곳에 ‘노여움’이 서려 있는 이 글의 제목은 ‘두더지의 슬픈 초상’. 두더지는 물론 강교수를 비아냥거린 표현이다. 그는 강교수의 조선일보관을 ‘조잡한 지면 결정론’으로 깎아내리는 한편 “글쓰기를 통해 조선일보 독자의 일부라도 전유하는 것은 지식인으로서의 사회적 책무를 짊어지는 것이라 생각한다”고 반박했다.

강교수는 같은 잡지의 4월호에 실린 재반론을 통해 좌파 지식인의 조선일보 기고를, 유신 또는 5공 정권 참여에 비유했다. 한편 임교수가 편집위원으로 있는 ‘당대비평’은 가을호에서 ‘조선일보의 극우 냉전적 논리와 갈등하고 대립하는 논리를 전파할 수 있다면 기고를 굳이 마다하지 않겠다는 개인의 선택을, 매명주의나 보신주의라는 딱지를 붙여 일거에 매도해선 안 된다’고 강교수에 대한 공격을 재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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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식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mairso2@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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