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11월호

철저한 현장주의로 할리우드 거장을 키운다

  • 박성원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wpark@donga.com

    입력2006-08-01 14: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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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A영화학교들의 공통점은 철저히 시장과 현장을 지향하고 현장에 의해 지배되고 교육된다는 점이다. 일종의 산학협동이 잘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육 상효 감독(37). 영화 ‘장미빛 인생’의 시나리오로 대종상 청룡영화상 백상예술대상을 수상하는 등 주목받는 신예로 활동하던 그는 지난 98년 8월 도미(渡美), 현재 USC 영화학교에서 수학하고 있다.

    영화프로듀서 김수진(33)씨. ‘꽃잎’ ‘나쁜 영화’ ‘해적’ ‘강원도의 힘’을 기획하는 등 10년간 충무로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던 그녀는 1년 전 미국으로 건너가 지금 AFI(미국영화연구소)에 재학중이다.

    이렇듯 한국에서 실력과 패기로 주목받던 젊은 영화인들이 줄줄이 미국 할리우드의 영화 명문학교에 늦깎이로 입학, 정식으로 영화공부를 하는 경우를 최근 심심찮게 목격할 수 있다. 이른바 ‘잘 나가는’ 한국의 영화인들을 태평양 건너로 불러들이고 있는 할리우드 영화학교들의 매력 포인트는 무엇일까. 세계의 영화, 아니 세계의 문화를 지배한다는 할리우드 영화산업의 맨파워는 어떻게 길러지는 것일까?

    이런 궁금증을 안고 캘리포니아주 LA에 모여 있는 미국의 영화 명문학교들을 찾았다. 대상으로 잡은 학교는 USC와 UCLA의 영화학교, 그리고 AFI와 CalArts(California Institute of the Arts) 등 4곳이다. 미국의 영화명문 반열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는 NYU(New York University)다. 뉴욕의 독립정신이 살아 숨쉬는 NYU 영화학교의 창의정신과 실험정신이라는 전통 역시 미국 영화산업에서 간과할 수 없는 부분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미국 동쪽 끝에 위치한 이 영화 명문학교는 서부 LA의 영화 명문학교들과 지리적으로나 문화적 배경에서 상당히 동떨어져 있는 게 사실이다. 그래서 NYU는 다음 기회로 미룬다.

    최고의 전통-USC



    로스앤젤레스 중심에서 남쪽으로 약 6㎞ 내려가면 군데군데 녹음이 우거진 일단의 건물들이 펼쳐진다. 오랜 역사를 느끼게 하는 건물과 현대적 건물이 공존하고 있다. 바로 1880년 설립된 캘리포니아의 명문사립 USC(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다.

    USC 영화-TV학교는 1929년 더글러스 페어뱅크스와 D.W. 그리피스, 에른스트 루비치, 대릴자눅 같은 사람들이 모여서 출발해 미국 영화학교 중 가장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시대로 들어가면서 전문기술인을 체계적으로 양성할 학교가 필요했던 것이 USC 영화학교의 출범배경이다. ‘스타워스’에 빛나는 거장 조지 루카스와 ‘포레스트 검프’ ‘백 투더 퓨처’의 로버트 자메키스, ‘X맨’의 브라이언 싱어 감독, ‘분노의 역류’ ‘아폴로 13’ ‘Far and Away’의 론 하워드 등등이 바로 USC 출신이다.

    학교 한가운데는 조지 루카스가 기증한 ‘조지 루카스 강의동’이 자리잡고 있다. 루카스는 종종 강사로 초빙돼 학생들의 수업을 지도하기도 한다. 할리우드 최고의 영화제작자들이 학생을 직접 가르치고 지도교수가 되기도 하는 까닭에 졸업생들은 자연스레 영화시장 인사들과 접촉할 기회가 많으며 이는 다시 취업으로 연결된다. 또한 선배와 회사들이 첨단 관련 시설과 기자재 등을 학교에 기증해주므로 학생들은 새로운 기술을 빨리 익힐 수 있다. 가령 소니사는 이번 학기에 디지털 카메라와 디지털 편집시설을 USC에 기증했고, 로버트 자메키스 감독은 모든 영화 디지털 후반작업을 할 수 있는 디지털 센터를 기증했다.

    USC 영화학교는 학부와 대학원생을 합쳐 1300명이나 된다. 할리우드 근처에 있는 USC는 할리우드 주류 상업영화를 생산하는 학교라는 평을 자주 듣는다. 실제교육도 시장에서의 생존능력을 중시하는, 프로페셔널한 측면이 많다. 예컨대 대학원 고급 연출과정의 경우 일정한 자격을 인정받아야 수강이 가능하다. 전 학기에 시나리오 등을 미리 제출, 교수위원회의 심사를 통과한 뒤에야 다음 학기 수강자격 여부가 가려진다. 이렇게 뽑힌 시나리오 전공자는 같은 방식으로 심사를 통과한 감독 각본 촬영 편집 음향(사운드) 등 전공분야별 학생들끼리 서로 적절한 멤버를 골라 ‘짝짓기’를 함으로써 하나의 작품을 만들 팀을 구성한다. 이렇게 구성된 팀들이 준비한 프로젝트 중 최종적으로 교수위원회의 심사를 통과한 프로젝트의 팀원들에게만 수강자격이 주어진다.

    다른 학교들에서는 대체로 작품을 만드는 과정에 교수가 크게 개입하지 않지만 USC에서는 촬영에 들어가면 1주일 단위로 학생들이 찍어온 내용을 놓고 교수가 지속적으로 간여(평가)해나간다. 필름이나 현상료 등은 모두 학교에서 지원한다. 학부과정의 경우 UCLA나 NYU는 첫해부터 자기 전공을 해야 하는 반면 USC는 첫 2년간은 교양과목을 듣게 한다. 전반적 경험과 종합적 교양습득을 통해 전공분야 뿐 아니라 인접분야로의 진출기반도 마련해주기 위해서 예컨대 ‘유주얼 서스펙트(Usual Suspect)’를 만든 브라이언 싱어 감독은 USC에서 ‘비평(Critical Studies)’을 전공했다.

    주류 상업영화, 프로페셔널

    학교관계자들은 USC가 주류영화뿐만 아니라 실험정신에서도 결코 뒤지지 않음을 강조한다. 가령 조지 루카스도 학교를 다니던 60, 70년대에 많은 실험적인 영화를 만들었고, 지금은 주류가 된 SF 영화를 만들면서 다큐멘터리도 만들고 시각적인 효과로 이야기를 전개하는, 당시로서는 실험을 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USC 영화학교의 앨런 베이커(Alan Baker) 학장은 “실험정신으로 말하자면 NYU가 우리보다 강하고 Calarts는 더 강한 것 같다”고 솔직히 인정하면서도 “그러나 USC도 애니메이션 학과에서는 실험영화 예술영화 방식을 대폭 수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베이커 학장은 “다만 연출 분야는 주류 상업영화 분야에서 경쟁하는 게 주된 목적이므로 강조점을 달리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USC는 현재 멀티미디어 시대의 새로운 테크놀러지에 적응하기 위한 노력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복합미디어(interactive media)에 관한 수업은 학생들에게 필수가 됐다. 비평 전공과정에서도 멀티미디어에 관한 과목을 수강하게 돼 있다. 전통적 영화과목뿐만 아니라 인터넷 프로그램 짜기, 비디오 게임 짜기 등도 과목에 들어가 있다.

    반면 기존의 제작 관련학과는 다소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할리우드 영화산업의 인력시장이 오래 전부터 포화상태여서 신인들의 진입로가 좁아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USC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할리우드 영화학교가 졸업 후 바로 영화감독으로 데뷔하는 케이스를 찾기는 어렵다. 학교측은 학생들의 할리우드 현장 진출을 돕기 위해 여름방학중에 인턴십을 추천해주거나 인턴과정을 학점으로 인정해주고 있다. 또한 해마다 학생들이 직접 만든 영화를 시연하는 ‘First Look’이라는 영화제를 개최, 할리우드 영화인들이 학생들을 발탁하는 통로로 제공하고 있다.

    USC 영화학교 출신의 한국인으로는 김경현 UC(University of California·캘리포니아 주립대) 얼바인 교수, ‘비천무’ ‘퇴마록’ 등의 녹음을 맡았던 이규석 국립영상원 교수, MBC TV 편성국 이보영 PD 등이 있다. 재학중인 한국인 유학생은 10여 명. 특히 한국에서도 강의한 적이 있는 데이비드 제임스(David James) 교수가 한국영화에 관심이 많은 것을 아는 한국 유학생들이 그가 있는 영화비평(Critical Studies) 학과를 선호하고 있다.

    현재 USC 대학원에서 시나리오를 전공하는 육상효 감독은 이 학과에 입학한 아시안 1호 학생이다. 한국에 있을 때 동숭아트센터에서 시나리오를 가르치기도 했던 육감독은 “일주일에 절반은 밤을 새워가며 시나리오를 써내고(물론 영어로), 다른 급우들이 쓴 것을 읽어가지 않으면 수업시간의 토론에 낄 수 없다”고 말했다. 육감독은 현재 시네와이즈필름을 통해 ‘Iron Palm’이라는 영화를 LA에서 찍기 위해 차인표를 캐스팅 해놓은 상태다. 시나리오는 USC에 와서 쓴 것인데 “미국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 미국을 철저히 표현해보겠다”는 게 육감독의 변.

    LA 다운타운에서 자동차로 30분쯤 웨스트우드 쪽으로 가다 보면 오른쪽으로 안온(安穩)한 분위기의 UCLA 건물들이 나타난다. 뒤쪽으로는 베벌리힐스의 고급 주택단지가 자리잡고 있다. UCLA(University of California, Los Angeles)는 캘리포니아에서 USC와 쌍벽을 이루는 명문학교지만 주립이라는 점이 다른 영화명문들과 다르다. 주립이라는 특성에 맞게 학비가 저렴, 영화학 공부에서 자칫 소외되기 쉬운 서민층 학생에게도 배움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UCLA가 다양한 계층의 학생들에게 문호를 제공한다고 해서 입학하기가 쉽다고 생각하면 천만의 말씀. 교육의 외형적 확대보다는 내실을 중시하겠다는 학교방침에 따라 정원수는 오히려 적은 편이어서 입학경쟁이 뜨겁다. 특히 유학생들은 저렴한 학비혜택을 쉽게 받지 못한다. 유학생을 비롯한 다른 주 학생들에게 적용되는 차별적인 등록금제 때문에 유학생에게 UCLA 영화학교의 등록금은 사립대보다 별로 싸지도 않다.

    UCLA 영화학교는 대학의 명칭부터 ‘School of Theatre, Film and Television at UCLA’인 데서 알 수 있듯 종합적인 공연예술인 양성을 추구하고 있다. 이 영화학교에 속한 영화학과 명칭도 ‘영화와 TV 학과(Department of Film · Television)’다. 영화·TV학과는 1955년 연극학과에서 분리독립됐다. 이들 예술은 근접한 영역으로 서로 유기적 연관 속에 성장할 수 있다는 게 UCLA의 교육관이다. 예컨대 시나리오 작가가 무대공연을 맡을 수도 있고 감독이 작가가 될 수도 있게 키운다는 것이다.

    UCLA 영화학교의 로버트 로젠(Robert Rosen) 학장은 “창조하고 만드는 것은 자신의 몫이지만 우리는 방법론에 관한 모든 것을 가르치려 한다”면서 “따라서 학생들은 관심 있는 분야뿐만 아니라 상호연계돼 있는(interactive) 과들의 모든 것을 묶어서 배워야 한다”고 말했다. 로젠 학장은 “중요한 것은 테크니컬 또는 기술적 트레이닝이 아니라 영화를 만드는 능력과 방법”이라면서 “우리 학교에서 애니메이션을 전공한 호이게튼이 현장에 나가서 ‘아마겟돈’ 등의 특수효과 책임자로 활약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능력을 길렀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단순히 촬영기사나 편집맨을 키우는 게 아니라 영화와 관련된 만능(cross over)맨을 키워낸다는 것이다.

    이론 강하고 유명극작가 다수

    USC가 비즈니스 측면의 교육, 실기가 강하다면, UCLA는 전통적으로 이론 분야에 강하다는 평이다. UCLA 영화학과 설립 초기에는 영화산업이 요구하는 기능인 양성보다는 예술적 표현을 강조하는 경향이 강했다. 그래서 진보적이고 실험적인 학풍이 많았다. 이러한 분위기는 소수민족의 영화운동으로 이어져 찰스 버닛, 하릴레 제리마, 래리 클라크 등이 중심이 된 70년대 흑인영화운동을 낳았다.

    하지만 이런 성향은 주류 영화산업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을 듣기도 했다. 그래서 학교측도 현실에 부응하는 방향으로 궤도를 점차 수정했다. 공립영화학교 나름의 실험적 전통과 주류 영화산업의 현실적 요구를 효과적으로 접목시키기 위한 UCLA 영화학교의 노력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USC와 마찬가지로 할리우드에서 명성을 날리며 세계 영화흐름을 주도하는 선배들이 자주 특강 등의 형태로 교습을 도와주고 학교건물도 동문들이 세워준 게 많다. 특히 영화학과는 강의보다는 토론과 참여 위주의 쌍방향(interactive) 방식으로 수업이 이뤄진다.

    UCLA 출신으로는 극작 분야의 인재들이 많다. ‘스타트랙’ Ⅱ, Ⅲ, Ⅳ,Ⅴ의 극작가이자 감독, 제작자인 하브 베네트(Harve Bennett), ‘심프슨(The Simpsons)’의 여배우 낸시 카트라이트(Nancy Cartwright), ‘이유없는 반항’ ‘자이언트’ ‘에덴의 동쪽’으로 유명한 제임스 딘, ‘미녀와 야수’의 여배우 수전 에건(Susan Egan), ‘포레스트 검프’의 극작가인 에릭 로스(Eric Roth), ‘해리가 샐리를 만날 때’ ‘어퓨 굿 맨’ 등을 감독 제작한 로브 라이너(Rob Reiner), ‘스팅’ 등을 극작, 감독한 데이비드 워드(David Ward), ‘탑건’ ‘흐르는 강물처럼(A River Runs Through)’ 등의 배우 톰 스커리트(Tom Skerritt), ‘캐스퍼’를 감독한 브래드 실버링(Brad Silberling), ‘마스크’의 각본을 쓴 마이클 웨브(Michael Werb), ‘쥐라기 공원’ ‘캐스퍼’ ‘백 투더 퓨처’ ‘아폴로 13’ ‘후크선장’ 등을 촬영한 딘 컨디(Dean Cundey), ‘The Long Kiss Goodnight’을 쓴 셰인 블랙(Shane Black) 등이 UCLA 출신이다. ‘대부’의 프란시스 코플라 감독도 마찬가지다. 국내에는 하길종 감독과 ‘아름다운 시절’의 이광모 감독, 김세훈 세종대교수, 소재영 서울예전교수 등이 UCLA 졸업생이다. 재학중인 한국인 유학생은 4~5명 정도.

    실기 위주의 팀워크 강조하는 AFI

    LA 중심가에서 할리우드를 관통하여 그 끝자락에 이르면 가톨릭 교회풍의 아담한 AFI 건물들이 눈에 들어온다. 이따금씩 사슴이 머리를 힐끔 내밀며 낯선 손님의 침입에 가슴을 콩당거리고 있고, 캠퍼스 뒤편에는 니콜라스 케이지가 살던 집을 비롯해서 근처에 유명배우들이 사는 집이 많다. AFI는 처음에는 할리우드 한복판에 건물 하나로 시작했으나 워너브라더스 유니버설 등 유명회사들의 재정 기증에 힘입어 10년 만에 이곳으로 터를 넓혀 이주해왔다.

    워싱턴에 본부를 두고 있는 미국 영화연구소(AFI·American Film Institute)는 1967년 존슨 대통령의 국가예술장려법에 의해 정부기금으로 설립된 이래 영화정책개발, 영화인에 대한 교육훈련, 영화와 관련된 신기술 전파의 견인차 구실을 해왔다. 우리의 영화진흥위원회에 가까우며 초대 이사장은 할리우드의 톱스타 그레고리 펙이다.

    교육기관으로서의 AFI는, 정확히 표현하자면, 이 AFI 산하에 있는 ‘Center for Advanced Film· Television Studies’(CAFTS)를 가리킨다. 할리우드에 있는 AFI가 바로 이것으로 이 영화학교를 통칭해 AFI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AFI는 당초 대학이라기보다는 MGM 소니 파라마운트 등 유수의 영화사들이 재정을 기부, 필요한 전문인력을 조달하기 위한 방편으로 출발시킨 할리우드 영화인들의 재교육기관이다. 따라서 학부가 없이 대학원만 있다. 물론 학위를 주니까 학교는 학교이되 학력(學歷)에 관계없이 수학능력만 인정되면 누구든지 입학해 교육받을 수 있다.

    그러나 입학을 위해서는 해당 분야에서 3년 이상 일한 경력이 있어야 하고 에세이와 함께 자기가 만든 16㎜나 35㎜ 작품을 포트폴리오(시연작품)로 제출해야 한다. 학사학위 없이 입학한 학생은 졸업할 때 석사학위는 받지 못하고 수료증만 받을 수 있다.

    1학년은 짧은 길이의 영상작품 3편을 만드는 데 참여해야 하고 2학년은 16㎜ 필름으로 졸업작품을 만들어야 한다. 실제 할리우드 영화제작처럼 다른 분야 전공자들이 하나의 작품을 위해 팀을 이뤄 작업(수업)하게 한다. 할리우드에 나가서 쉽게 적응할 수 있도록 팀워크를 이루며 일을 해나가는 경험을 쌓게 해주려는 것이다. AFI의 조 페트리카(Joe Petricca) 학장보는 “연출을 전공하는 사람도 카메라를 모른다면 현장에서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없다”면서 “팀을 이뤄 다른 분야 전공자와 함께 실습을 해보는 것은 현장에 가서 필요한 팀워크를 키우는 데 아주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실기 분야 최고의 학위인 MFA 취득 여부는 졸업논문이 아닌 작품심사로 결정된다. 학생들의 졸업작품은 3차례로 나뉘어 교내극장에서 상영되며 이때 할리우드의 각 전문가들이 초청돼 유능한 인재를 눈여겨 봐둔다. 실력이 안 되면 학기마다 제적이라는 벼랑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으며 휴학도 허용되지 않는다. 졸업 후 현장에서 바로 써먹을 수 있는 인력을 배출하기 위해 강도 높은 제작·실습 교육을 시키는 것이다. 시험이나 논문은 없다. 이론공부는 입학하기 전에 30여 권의 필독서적을 학교측이 제시, 미리 다 읽고 들어오게 한다.

    교수진은 영화 및 텔레비전 프로그램 제작과 관련해 각 분야의 풍부한 현장경력을 가진 베테랑들로 구성된다. AFI에서는 교수들이 학생들에게 ‘학생(student)’이라는 호칭을 잘 쓰지 않는다. 그냥 ‘동료(fellow)’라고 부른다. 교수-학생의 수직적 관계보다는 동등한 관계로 자유롭게 토론한다. 교육의 수요자와 공급자라는 두 주체로 만났다는 인식 때문이다. 1·2학년 전원을 다 합쳐도 학생수가 200여 명에 불과해 오붓한 분위기다. 캠퍼스도 여학교 건물을 개조해 만든 고딕양식의 스페인풍 건물들이다.

    MFA 학위가 인정되는 교육과정으로는 촬영 감독 편집 제작디자인 극작가 분야에다가 1997년부터는 디지털미디어 분야가 추가됐다. 학풍은 예술이나 학문의 다양성을 추구하기보다는 현재의 주류 상업영화를 지향하는 경향을 보인다. 페트리카 학장보는 다만 “지난 5년간 독립영화의 흥행은 기존 상업영화에 훌륭한 자극이 되고 있으며 스토리상의 새로운 시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깨워주었다”면서 “따라서 AFI는 스토리 전달을 위한 영화교육에 비중을 두고 실험영화나 예술영화 쪽 교재도 사용을 확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AFI는 미국영화자료원으로 출발한 기관답게 방대한 영화자료를 소장하고 있다. 영화·비디오 자료보관센터는 데이터베이스를 수집하고 광범위한 미국 영상문화 유산을 자료화해 보존하고 있다. 1940년대와 1950년대의 영화 스크립트부터 모두 비축돼 있다.

    이 센터에 가면 로버트 드니로가 직접 쓴 메모, 영화 ‘택시 드라이버’의 스토리 보드(그림, 일지 등이 망라된 콘티의 일종) 등 기증받은 전시물들이 영화제작의 생생한 과정을 기록으로 보여주고 있다.

    현장과 연계된 수업을 극명하게 나타내주는 것이 촬영기자재 등의 외부지원이다. 예컨대 소니사가 제공한 소니비디오센터가 있기에 AFI는 디지털 편집용 기자재 등을 따로 살 필요가 없다. 나아가 이 밖에도 워너빌딩 MGM빌딩 등 유명 스튜디오들이 빌딩이나 시스템을 기증해준 경우가 많다.

    매주 수요일에는 교내극장에서 유명한 감독 시나리오작가 프로듀서 촬영감독 등을 초청, 그들의 작품을 시사한 뒤 학생들과 토론하는 자리를 갖는다. AFI는 영화제작 예술 분야에서 유망한 인재에게 ‘AFI Life Achievement Award’라는 영광스런 상도 수여하고 있다. 또한 AFI는 매년 10월 할리우드에서 ‘AFI 국제영화제’를 여는데 올해 한국에서는 ‘춘향전’이 초청됐다.

    AFI는 ‘트윈픽스’ ‘블루벨벳’의 데이비드 린치, ‘붉은 10월’ ‘다이하드 1·3’의 존 맥티어넌, ‘가을의 전설’의 애드워드 즈윅, 그리고 존 애브닛(John Avnet), 킬 프랭클린(Carl Franklin) 등 많은 중견 감독을 배출했다. 촬영감독으로 ‘쉰들러 리스트’ ‘쥐라기공원 Ⅱ’ ‘라이언일병 구하기’의 ‘야누스 카민스키’ ‘딥 임팩트(Deep Impact)’의 미미 리더, 올리버 스톤의 영화 일체를 촬영한 로버트 리처드슨, ‘히트’의 프로듀서 피터 존 블러기 등이 있다.

    국내에서 활동하고 있는 AFI 출신은 ‘비트’ ‘닥터봉’ ‘아름다운 시절’의 김형구 촬영감독(현 국립영상원 교수), ‘퇴마록’의 박현철 촬영감독(현 국립영상원 교수), 박종호 부산동서대(영상매스컴학부)교수, 최명근 상명대 교수 등이 있다. 재학중인 한국인 유학생은 3명에 불과하고 교포학생이 4명이다. 충무로에서 영화 프로듀서로 활동하다가 현재 AFI에 유학중인 김수진씨는 “이곳에 와서 전문적인 실전공부를 하면서 한국에서 느꼈던 능력의 한계, 특히 여자로서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면서 “졸업 후 전세계를 겨냥하는 이곳 할리우드 시장에서 승부를 보겠다”고 말했다.

    LA 중심에서 북쪽으로 50㎞ 정도 올라가면 한적한 계곡 사이로 칼아트(CalA rts)가 나타난다. 일종의 종합예술대라고 할 수 있는 칼아트는 특히 애니메이션 분야에서 최강을 자랑한다. 1961년 개교한 칼아트는 현재 여섯 개의 단과대학(School)으로 나누어져 있다. Arts, Dance, Film·Video, Music, Theatre, Critical Studies 등. 이 가운데 애니메이션 관련학과는 Film·Video 스쿨에 속해 있다.

    애니메이션의 산실- 칼아트

    칼아트는 특히 애니메이션 관련 학과를 실험애니메이션(Experimental Animation)과 인물애니메이션(Character Animation)으로 구분하여 교육하는 것이 특색이다. 인물애니메이션 학과는 애니메이션 전문가가 되기 위한 전반적인 교육프로그램으로 학부과정만 있다. 실험애니메이션 학과는 실험정신을 바탕으로 학생들이 창조적인 애니메이션 작품을 다양한 각도에서 시도할 수 있는 교육환경을 제공한다. 실험애니메이션은 학부뿐만 아니라 3년 과정의 대학원도 있다.

    석사학위를 받기 위해서는 학생들은 3분 이상의 작품을 제작, 교수진의 심사를 통과해야만 한다. 두 학과 사이에는 과거 벽이 존재하는 듯했으나 현재는 장벽이 없어져서 인물애니메이션과에 있는 어느 학생이 실험애니메이션과에 있는 수업을 듣고 싶다면 얼마든지 들을 수 있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칼아트에서는 흔히 다른 영화학교에서 제작(Production)과로 불리는 학과(영화과·Cinema Production에 해당)를 애니메이션과와 구별하기 위해 라이브액션과(Live Action Film/Video Program)라는 명칭을 쓴다. 하지만 칼아트는 애니메이션을 단순히 미술 차원에서 다루지 않는다. 오히려 학생들에게 영화 스토리에 대한 감각을 익히도록 스토리 라이팅을 전공 커리큘럼에 넣어놓았다. 자신의 스토리를 만들 줄 모르는 사람은 영화와 관련된 어떠한 일도 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다.칼아트 애니메이션 과정은 월트 디즈니사의 투자에 의해, 디즈니사의 직업연수기관격으로 설치됐던 까닭에 초기에는 예술이나 학문보다는 영화업계가 원하는 바를 충족시켜 주는 데에 교육의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점차 성격이 변해 칼아트 영화·비디오 스쿨의 학풍은 오락과 상업성보다는 대안과 실험, 대안영화 또는 실험영화를 추구하는 경향을 보인다.

    하트무트 비톰스키 학장은 “판에 박인 할리우드의 상업영화나 프로페셔널한 옛날 영화의 틀을 베끼는 것보다 생각이나 비전에서 한발 앞설 수 있는 창의적 능력과 더 넓은 예술적 문제해결 능력을 키워주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창의적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하기 위해 1학년 때부터 실전과 관련된 모든 분야를 가르친다. 영화와 관계되는 모든 분야를 스스로 다룰 수 있게 해주어야 자기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칼아트 영화·비디오 스쿨에 소속된 애니메이션학과도 역시-일반적으로 디즈니 애니메이션이 상업적 성격이 강함에도 불구하고-학생들을 철저히 실험적으로 키운다. 프랭크 테리 인물애니메이션학과장은 “칼아트 애니메이션 출신의 특징은 개성을 잘 표현하는 데 있다”면서 “전통적 애니메이션 기법부터 충실히 습득한 학생들이이야말로 컴퓨터 애니메이션 등 첨단·응용기법에도 자유자재로 적응할 수 있다”고 말했다.

    자유로운 사고와 창작력을 갖추어야 졸업 후 상업화의 틀 속에서도 자생력을 가질 수 있다는 게 칼아트 애니메이션학과의 교육철학인 셈이다. 디즈니 애니메이션이 한때 사양산업이 되어가자 이를 다시 일으켜 세운 주력군이 칼아트 출신이었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

    이런 전통으로 말미암아 칼아트는 감수성과 창의성을 고집하는 저항정신이 남다르다는 평을 듣는다. 또한 다른 영화학교보다 개성이 강하고 자유분방하고 대중적이고 개방적이다. 칼아트 영화학교 400명 가운데 한국학생만 60여 명에 이를 정도로 한국학생들에게 인기 있는 학교다. 외국 출신 교수와 좌파적 또는 리버럴한 교수도 많다. 미국 전역에서 금연운동이 확산돼가고 있지만 칼아트의 복도에서는 담배 피우는 학생들을 쉽게 볼 수 있으며 복도벽에는 스프레이 등으로 갈겨 쓴 여러 형태의 낙서가 가득하다.

    칼아트 애니메이션학과 졸업생들은 디즈니나 워너브라더스 등 만화기업들에 취업률이 높다. 칼아트 출신으로는 ‘가위손’ ‘배트맨’ ‘크리스마스의 악몽’ 등을 연출한 팀 버튼(79년 졸업)과 ‘벅스 라이프’ ‘토이 스토리’의 존 래스터 감독 등이 있으며, 미국의 음악전문 케이블방송 ‘M TV’에서 방영한 애니메이션 단편시리즈 ‘이온 플럭스’로 세계에 알려진 교포 애니메이션작가 피터 정도 이곳 출신이다. ‘라이온 킹’ ‘타잔’ ‘인어공주’ 등 국내에 소개된 디즈니 애니메이션은 대부분 칼아트 출신이 감독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4년 전 ‘LA 타임스’는 한 면 전체를 할애한 특집을 다루면서 “디즈니가 지난 25년간 투자했던 사례 중 가장 성공적인 것은 바로 칼아트를 만들어서 감독들을 배출한 것”이라고 썼다. 육상효 감독, 부산동서대 박종호 교수도 칼아트를 거쳐갔다. 칼아트를 졸업하고 TV시리즈 ‘퓨처 라마’의 제작사인 ‘Rough Draft 스튜디오스’에서 애니메이터로 일하고 있는 이정환씨(29)는 “본래 만화가를 꿈꿨으나 영화는 물론 TV 인터넷 게임 등으로 수요가 끝없이 확대되고 있는 애니메이션에 매료돼 칼아트에서 공부한 뒤 이곳에서 일하게 됐다”고 했다.

    철저한 시장과 현장 지향성

    LA 영화학교들을 돌아보면서 느낀 공통점은 철저히 시장과 현장을 지향하고 현장에 의해 지배되고 교육된다는 점이다. 일종의 산학협동이 잘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각 학교의 경쟁력은 흔히 할리우드 현장에서 일하는 인력을 얼마나 많이 배출했는가, 또는 자기네 학교 출신 중 성공한 할리우드 거장이 얼마나 많은가에 따라 평가된다.

    적잖은 수의 학생들이 늘 자신이 만든 작품이 조만간 자신을 벼락부자 또는 고소득자 반열에 올려놓을 수도 있다는 긴장과 기대감을 갖고 있다. 올해 AFI 스크린라이팅과를 졸업하는 한 학생이 졸업논문으로 발표한 장편영화 시나리오가 무려 78만 달러에 팔렸다는 소식이나 지난해 USC의 스크린라이팅과 졸업생 중 한 명이 65만 달러에 자신의 스크립트를 팔았다는 등의 얘기가 늘상 학생들의 성취욕을 자극하고 있다. 성공한 동문이나 현업에서 부를 축적한 영화업계 인사들은 출신학교에 서슴없이 거액의 시설을 기증(donation)하거나 강사로서 수시로 학생들과 만난다.

    물론 내로라하는 영화 명문학교를 나와도 할리우드 시장에서 살아남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할리우드의 웬만한 영화인치고 이런 영화명문 출신이 아닌 이는 별로 없다. 그만큼 할리우드 시장의 경쟁이 거세다.

    따라서 할리우드 영화학교들의 교육시스템도 졸업과 동시에 바로 현장을 움직일 수 있는 실전능력 배양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게 대체로 공통점이라고 할 수 있다. 학교가 끊임없이 현장과 학생들을 연결하며 학생들에게 할리우드 분위기를 파악케 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같은 영화학교 내에서도 전문성을 길러주기 위해 연출 스크린라이팅 프로듀싱 프로덕션디자인 등으로 전공이 세분화돼 있으면서도 학과간 또는 전공간 장벽이 없는 점도 특징이랄 수 있다. 영화는 종합예술이며 유기체라는 인식에 따라 서로 다른 전공간 학생들이 하나의 작품제작을 통해 협동하거나 수강 가능한 전공과목에 벽을 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교육방식도 교수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가르쳐주는 방식이 아니라 학생들의 자발적 능동적 준비에 의한 실습 위주이고 교수는 접점을 찾아주는 데 그친다는 점도 한국과 다른 점이다.

    그러나 이러한 미국 영화학교의 교육시스템과 교육방식이 당장 한국의 영화학교에도 그대로 도입되기를 바라는 것은 지나친 기대일 수 있다. 막대한 투자비가 드는 영화교육 기자재를 확충하는 일과 체계적인 교육을 받은 교수진을 확보하는 일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최근 이와 같은 조건을 무시하고 영화 관련 학과들이 많이 생겨나고 있지만 영화제작을 시스템으로 가르치는 체계가 없으므로 여전히 연기 중심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해 자칫 부실교육을 양산할 소지가 있다.

    다만 미국 영화학교에 유학해본 경험자들은 이 영화학교들에 대해 덮어놓고 환상을 갖는 것은 금물이라고 충고한다. 한국과는 시장 규모나 산업시스템 교육방식 자체가 다른데 무턱대고 미국 영화학교의 문을 두드리기보다는 국내에서 어느 정도 현장경험을 갖고 가는 것이 좋다고 한다. 한국 영화산업의 현실을 어느 정도 알고 할리우드에서 공부할 때 무엇을 배우고 무엇을 취할 것인가가 한층 분명해질 것이라는 충고다.

    칼아트 인물애니메이션학과에 재학중인 고성욱씨(29)는 “현실적으로 한국에서 현업경력을 가진 사람이 미국 영화 명문에서 공부하고 귀국하면 일거에 감독급 대우를 받을 수 있지만 그런 바탕이 없는 단순 유학생 출신은 한국 영화산업의 두터운 기득권층에 막혀 제대로 능력을 발휘할 만한 자리를 잡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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