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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 분신 30년 인생을 바꾼 사람들

  • 육성철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ixman@donga.com

전태일 분신 30년 인생을 바꾼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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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대 청계노조 위원장을 맡았던 최종인씨도 그중 한 사람. 최씨는 “우리는 노동자나 노동운동에 대해 몰랐다. 태일이가 우리를 깨우쳐 놓고 죽어간 것이다. 우리는 태일이의 죽음을 헛되게 만들지 않기 위해 사명감을 가지고 노동조합운동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최씨는 전태일 정신의 순수성을 강조했다. 정치투쟁보다는 노동자들의 근로조건을 개선하고 나아가 학교를 짓고 복지시설을 늘리는 데 중점을 두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70년대의 양심세력들은 청계노조에 그 이상의 의미를 부여했다. 반독재투쟁의 전진기지로 여겼던 것이다.

“친구가 앞에서 죽었으니 다음 타자로 우리가 죽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싸웠다. 우리는 정말 순수했다. 그때는 외부세력 때문에 조합원의 희생이 늘고 있다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보니 우리 생각이 좁았던 것 같다.”

이 과정에 초창기 노조를 이끌었던 전태일의 친구들은 마음 고생도 겪었다. 후배들이 노조집행부의 조합주의 노선을 비판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실제로 최씨에 따르면 당시 노조 간부들은 임금체불 사업장이 있을 경우 사장을 불러다 주먹을 휘두르고 돈을 받아내는 식으로 처리한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청계노조를 정치투쟁과 연결지으려 했던 사람들과 갈등이 빚어졌던 것.

“우리의 한계가 왔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아마추어였다. 그래서 후배들에게 노조를 물려주고 나왔던 것이다. 죽은 태일이에겐 미안한 일이었지만, 그것이 최선의 선택이었다.”



최씨는 전태일의 분신을 바로 옆에서 지켜본 사람이다. 그런 까닭에 청계노조를 떠난 뒤에도 마음으로는 전태일을 잊지 못했다. 최씨는 현장에서 후배들과 함께 하지 못하는 것을 늘 부끄럽게 여겼다고 한다.

“옷 장사를 해서 돈을 많이 벌었는데, 문득 그렇게 사는 것이 태일이의 뜻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고심 끝에 출판업을 시작했는데 뜻대로 되질 않았어요. 그게 잘되면 ‘전태일 장학사업’ 같은 걸 해보려고 했는데….”

평화시장 친구들은 지금도 한 달에 한 번씩 모임을 갖고 있다. 최씨와 함께 초창기 청계노조에서 중심 역할을 맡았던 이승철, 김영문, 임현재, 신진철씨 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평생 전태일을 대신해서 이소선 여사의 아들이 되겠다고 맹세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명절이면 다같이 모여서 쌍문동 집을 찾는다.

평화시장 친구들은 대부분 의류업계에 종사하고 있다. 전태일이 떠난 지 30년이 지났지만 친구들은 아직도 돈독한 우정을 지키고 있다. 전태일과 함께 했던 시절의 기억이 뜨겁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

“한 20년 동안은 태일이의 마지막 모습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어요. 아마 죽을 때까지 태일이한테 빚지고 살아가야 할 것 같아요.”

죽어서 만난 대학생 친구 장기표

서울대 법대에 다니던 장기표는 수배중이었다. 당시 장기표는 지하신문 ‘자유의 종’을 발행하고 있었는데, 전태일이 분신하기 한 달 전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열악한 상황을 실었다. 이런 인연으로 장기표는 전태일이 분신했다는 소식을 듣고 성모병원으로 달려갔던 것이다.

이소선씨는 장기표를 처음 본 자리에서 오랜 친구처럼 반겼다. “우리 태일이가 그토록 대학생 친구를 갖고 싶어했는데, 죽어서야 만나는구나.” 이날 이소선씨는 태일이가 살아온 세월을 폭포수처럼 쏟아냈다. 장기표는 그 얘기를 친구 조영래에게 전했고, 그것이 뒷날 ‘전태일 평전’의 모태가 됐다. 장기표는 전태일의 장례식을 준비하면서 이소선씨를 존경하게 되었다고 한다.

“당국에서 어머니를 강제로 납치해 엄청난 돈을 주고 장례식을 치르려 했습니다. 그때 어머니께서 돈을 뿌리치면서 맨발로 도망쳐 나왔어요. 어머니께서 ‘검은 치마폭에 싸서 뒷산에 묻더라도 내 아들 장례는 내가 치르겠다. 태일이의 요구사항을 받아주지 않으면 한발짝도 물러설 수 없다’고 외치는 거예요. 그때의 감동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 뒤 장기표는 수배망을 뚫고 거의 날마다 이소선 여사를 만났다. 이소선씨는 노동교실 실장으로 청계노조에 직접 관여했고, 장기표는 배후에서 각종 유인물을 쓰고 전략을 수립했다. 장기표는 근로조건 개선에 주력하던 청계노조를 정치투쟁의 장으로 끌어낸 배후인물이었다. 장기표는 한때 ‘김씨 아저씨’라는 가명으로 평화시장에 위장 취업한 일도 있었다.

그런 장기표가 90년대 이후 달라졌다. 전태일 분신 30주년을 맞는 지금 그는 민국당 최고위원을 맡고 있다. 30년의 세월이 길다지만 그의 변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변명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투쟁하는 삶만으로는 전태일의 삶을 구현할 수가 없다고 생각해요. 나는 정치를 통해 그것을 하려고 했구요. 내가 만약 한나라당이나 민주당을 갔으면 지금처럼 욕을 먹지는 않았을 거예요. 하지만 그렇게 하면 내 뜻을 펼칠 가능성은 영원히 사라지는 거예요. 나는 내 꿈을 꺾지 않으려고 민국당을 선택한 겁니다.”

그러나 민국당의 탄생 과정을 보면 장최고위원의 주장과 동떨어진 부분이 많다. 총선을 앞두고 한나라당과 민주당 공천 탈락자들이 모여든 곳이 민국당이었다. 장최고위원은 그런 정당의 전국구 후보로 나섰지만 국회 진출에 실패했고 최근 김윤환 전 의원과 당대표 경선을 준비하다가 도중에 포기했다.

“나의 민국당 참여 전략은 철저하게 실패했음을 인정합니다. 앞으로도 민국당을 고쳐보려고 노력하겠지만, 여기에 고집할 생각은 없습니다. 새로운 정치를 위한 그랜드 디자인을 구상하려고 합니다.”

장최고위원에게 전태일 정신에 관한 얘기를 꺼내자 속내를 털어놓았다.

“나 같은 사람은 그때나 지금이나 같다고 봐야 하는 거 아닙니까? 나보고 대충 산다고 말한다면 정말 억울해요. 나는 학생운동할 때의 노선을 포기하지 않았고 전태일 정신을 버리지도 않았어요.”

그렇다면 장최고위원이 지금껏 붙들고 있는 ‘전태일 정신’은 무엇일까. 그의 대답이 궁금해졌다.

“전태일은 인간해방 사상을 말했습니다. 내 정치의 목표도 바로 인간해방 사회를 건설하자는 것입니다. 나는 인간해방 노선을 포기한 적이 없습니다. 이게 아니라면 나는 정치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는 ‘순수’를 지향하지만 ‘힘없는 순수’를 지향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쉽지는 않겠지만, 나는 내가 선택한 길을 갈 것입니다.”

노동운동가로 나선 김문수

70년 당시 서울대학교는 혜화동에 있었다. 개울 하나만 건너면 바로 청계천이었다. 이런 이유로 전태일의 분신은 서울대생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전태일의 장례식을 학생장으로 치르기 위해 법대, 상대, 문리대 등이 잇따라 집회를 열었던 것도 그런 맥락이었다. 법대는 장기표와 조영래 등 이른바 ‘사회법학회’ 멤버들이, 상대에서는 김근태 등이 이끌던 ‘경제복지’ 회원들이 적극적이었다.

김문수 의원(한나라당)은 줄판으로 등사된 전태일 수기를 읽고 현장에 뛰어들었다. 그때부터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마석 모란공원을 찾아 참배했다고 한다. 김의원은 “처음엔 청계노조 간부들에게 한자와 상식을 가르쳐 주기로 했으나, 막상 노동자들을 만난 뒤부터는 오히려 내가 현장을 배워야 했다”고 회고했다. 김의원은 직접 재단 일을 배워 통일상가에 취업하기도 했다.

김의원은 전태일 정신을 ‘양심에 대한 성찰’로 규정했다. 그런 측면에서 자신은 전태일 정신을 꾸준히 계승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국회에서 노동문제를 다루는 상임위원회는 제일 인기가 없어요. 하지만 나는 어렵고 힘든 사람들과 고뇌하면서 노동문제를 해결해 나가고 있습니다. 물론 치열함과 자기 헌신성에서는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전태일은 목숨을 바쳤는데, 나는 아무것도 바친 게 없잖아요. 내가 비록 운동을 했지만, 전태일처럼 희생한 건 없지 않습니까? 전태일은 작은 일도 그냥 넘어가지 않았어요. 그렇게 철저하게 실천하는 사람은 그 갑갑한 세상에서 죽을 수밖에 없었어요.”

김의원은 “전태일을 식상한 눈으로 보지 말고 깊은 통찰력으로 재조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노동계가 전태일 정신을 70년대의 봉제공장에 가둬두고 있다는 것이다.

김의원은 전태일 정신을 어떻게 계승하자는 것일까. 그는 이 문제를 오랫동안 고민했다고 한다. “한국적 정신 영역과 전태일의 시대정신이 결합돼야 해요. 전태일을 노동자로만 남겨둘 것이 아니라 ‘성인’으로 승화시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봐요. 예수도 죽고 나서야 재평가되지 않았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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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성철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ixm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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