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11월호

남북화해시대의 지하조직 한민전

  • 여영무 남북전략연구소 소장(전 동아일보 논설위원 겸 통일연구소장) KAYAMT21@hanmail.net

    입력2006-08-01 14:2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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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한 관영매체인 조선중앙통신은 남한 내의 베트콩 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한민전이 여전히 서울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보도를 내보내고 있다. 남조선 혁명을 목표로 한 한민전은 왜 남북 화해 무드가 날로 고조되는 이때에도 남한에서 활동하고 있는 것일까. 북한 권력 핵심부의 속셈을 분석해 본다.
    6·15 남북 공동선언이 있은 후 서울공항에 돌아온 김대중 대통령은 “남의 흡수통일과 북의 적화통일을 배제한다”고 선언했다. 과연 그러한 선언에 걸맞게 남과 북은 매우 빠르게 남북 화해 시대를 열어가고 있다. 이산가족이 만나고 끊어진 경의선을 복구하는 등, 백년지기처럼 서로를 믿고 하루가 다르게 하나가 되려고 달음질치고 있다.

    “북한에 속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러나 일각에서는 ‘북한이 우리를 속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도 만만치 않다. 북한은 과연 신뢰할 수 있는 집단인가. 급변하는 남북화해시대에 북한의 속내는 무엇일까. 북한은 과연 적화통일을 포기했는가?

    1969년 북한 노동당은 남한에 통일혁명당(통혁당)을 만들어 남조선 적화를 기도했다. 1985년 7월 통혁당은 한국민족민주전선(한민전)으로 이름을 바꾸었는데, 북한은 이날 이후 한민전이 서울에서 활동하고 있다고 주장해왔다. 남조선 혁명을 목표로 한 지하당이 서울에 존재하고 있다고 주장해온 것이다.

    이들은 그 증거로 ‘구국의 소리’ 방송(라디오 방송)을 든다. ‘구국의 소리’ 방송 아나운서들은 방송중에 서울에서 이 방송을 내보낸다는 설명을 덧붙이고 있다. 서울에서 방송하는 것으로 꾸미기 위해 이 방송 아나운서들은 전원 서울 표준어를 구사하고 있다.



    그러나 1979년 2월 국제주파수등록위(IFRB)와 한국이 이 방송 전파의 발신지를 추적해 본 결과, ‘구국의 소리’ 방송 발신지는 황해도 해주 남산(동경 125도 4분 17초, 북위 38도 1분 17초)이라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한민전이 남한에는 없는 가짜 조직일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실제로는 북한에 있는데 서울에서 활동하는 것으로 꾸며, 서울에 남조선 혁명을 추구하는 세력이 있는 것으로 위장한 것이라는 뜻이다.

    한민전은 북한 노동당의 지령을 받아 움직이는 위장 단체다. 그렇다면 남북정상회담과 6·15 선언 후에는 활동을 중단했어야 한다. 그러나 북한 관영 매체인 조선중앙통신은 6·15 선언 후 과거보다 훨씬 더 많은 한민전 관련 보도를 쏟아내고 있다. 다음은 지난 7월8일 북한의 대표적 관영 매체인 조선중앙통신이 보도한 한민전 관련 보도다(중앙통신 보도내용은 원문 그대로 옮긴다).



    김정일은 통일 대통령(?)

    한민전 평양대표부는 서울에 있는 한민전이 평양에 설치한 대표부다. 비유해서 말하면 한민전은 김대중 대통령이 이끄는 대한민국 정부에 반대하는 지하 정부고, 한민전 평양대표부는 이 지하 정부가 평양에 설치한 대사관이라 할 수 있다. 조선중앙통신 보도대로라면 지금도 남조선에는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장군을 따라 (남조선 혁명을 위해 노력하는) 한민전의 전위 투사들이 활동하고 있는 것이 된다.

    7월9일 조선중앙통신은 서울에 있는 한민전 중앙위원회가 김정일 총비서에게 편지를 보냈다며 다음과 같은 보도를 내놓았다.



    서울에서 버젓이 활동하는 한민전

    이 보도문대로라면 한민전은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총비서가 정상회담에서 남북이 화해 협력과 평화통일을 위해 흡수통일도 적화통일도 하지 말자는 뜻을 담은 6·15공동선언을 발표한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다. 그런데도 한민전은 남조선을 적화한 후 김정일을 기어이 통일대통령으로 만들겠다는 의지를 편지 곳곳에서 드러내 보이고 있다. 김정일을 통일 대통령으로 삼겠다는 북한의 의지는 그들이 남북정상회담에 응한 진정한 의도일 수도 있다.

    7월17일에 있었던 조선중앙통신 보도는 한발 더 나아가 아예 서울이 평양이 된 듯한 느낌을 준다.

    (조선중앙통신 7월17일자)

    7월19일자 보도는 아예 서울에 한민전 혁명정부가 수립돼 있고, 이 혁명정부가 정부로서 당당히 작동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조선중앙통신 7월19일자)

    남북정상회담이 있기 전 북한은 평양학생소년예술단과 평양교예단의 서울 공연을 성사시킨 바 있다. 두 예술단체의 서울 공연은 우리 언론으로부터 상당한 관심을 받았고 국민들 또한 따뜻한 박수를 보내주었다. 조선중앙통신은 구국의 소리 방송을 인용해 이러한 환대를 이렇게 왜곡 보도하고 있다.



    아무리 남북한 격차가 커졌다고 해도 남한 체제에 대해 불만을 품은 사람이나 공산주의에 심취한 ‘자콤’(자생적 코뮤니스트)이 생겨날 수 있다. 그런 인물이 가명을 쓰며 한민전 같은 지하당에 접근할 수도 있으므로, 무턱대고 남조선 미래음악회원 김유정이 실존 인물이 아니라고 잡아뗄 수는 없다. 그러나 남북 정상회담 후 적어도 남한 언론은 북한 주민 아무개가 김대중 대통령을 흠모하고, 남한 사회를 동경한다고 보도하지 않았다. 북한측의 이러한 보도는 너무나 큰 반칙이요 속임수가 아닐 수 없다.

    북한은 한술 더 떠서 남조선혁명 단체인 한민전이 서울에서 당당히 회의를 열고 6·15 공동선언을 지지했다는 보도를 내놓고 있다.

    (조선중앙통신 8월16일자)

    그런가 하면 8월25일자 조선중앙통신은 한민전 평양 대표인 박광기가 한민전 창립 31돌 담화를 발표하였다고 보도하고 있다. 이 담화는 한민전의 목표가 무엇인지 명확히 알 수 있는 자료인데, 담화에서 박광기는 한민전은 이남에서의 미국 식민 통치 청산과 민족 자주 정권 수립을 목표로 줄기차게 투쟁해왔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주장은 한민전이 노동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대남적화혁명노선을 충실히 추종 실천하고 있는 지하당 조직이라는 사실을 명백히 보여주는 자료다. 8월25일자 담화 보도는 다음과 같다.

    (8월25일자 조선중앙통신)

    필자는 인터넷을 통해 6·15공동선언 후 9월 초순까지 석 달 동안 조선중앙통신이 보도한 한민전 관련 보도를 수집했는데 모두 14건이었다. 한민전 활동에 관한 이러한 보도는 남북 정상회담 전보다 결코 적어진 것이 아니다. 북한은 남북 정상회담 이후에도 과거와 같은 탄력으로 남조선 혁명을 줄기차게 추진해오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민전 관련보도의 배경

    조선중앙통신 보도를 종합해 보면 한민전은, 서울에 중앙위원회와 상무위원회를 두고, 지방에는 시도위원회를 거느리고 있는 전국적인 조직이다. 한민전 중앙위원회는 대변인실·선전국·청년학생국·노동국·종교국·상공인국·부녀국 등을 두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내부 조직과는 별도로 한민전은 각종 단체를 거느리고 있다.

    한민전은 평양 대표부에 박광기를 대표로 임명해 놓고 있는데, 박광기가 실존 인물인지, 가명을 쓰는 자라면 그의 정체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진 바가 없다.

    조선중앙통신은 한민전이 평양대표부 외에 시리아와 쿠바, 일본에 대표부를 두고 있다고 주장한다. 또 구국의 소리 방송과 별도로 서울에서 ‘구국전선’이라는 신문을 발행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구국의 소리’ 방송의 정체는 독일에 거주하다 85년 가족과 함께 입북해 대남 선전방송인 ‘민중의 메아리’ 방송 요원으로 활약했던 오길남씨(58)에 의해 확인되었다. ‘구국의 소리’ 방송은 ‘통혁당의 목소리’ 방송으로 출범해 85년 8월 통혁당이 한민전으로 바뀔 때 현재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구국의 소리’ 방송은 남한에서 방송하는 것처럼 위장하기 위해 방송원고와 발음법 등을 남한실정에 맞게 교정하는 남조선특제품위원회까지 운영하고 있다. 이 방송은 69년 납북된 KAL기 승무원 성경희씨(54)와 정경숙씨(54), 재불한인회장을 하다 북한에 들어간 허홍식씨(65) 등을 방송요원으로 활용해왔다.

    한민전은 남한 내에 실존하는 조직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북한은 공식 관영매체인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한민전이 서울을 중심으로 남한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는 보도를 계속 내보내고 있다.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이 이뤄진 뒤에도 북한이 이러한 자세를 견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는 한반도를 베트남식으로 통일하기 위한 통일전선전략 차원에서 북한이 한민전을 ‘한국판 베트콩’으로 운영하고 있을 가능성이다. 한민전이 실존하고 유사시 그들이 한국의 베트콩이 된다면 이는 안보에 심각한 위협요인이 아닐 수 없다.

    둘째로 한민전은 남한에 실존하지 않으나 북한 내부 체제 단속을 위해 실존하는 것으로 위장했을 가능성이다. 특히 남북정상회담 이후 전광석화로 치닫는 환경 변화 속에서 남한 내 김정일 추종 세력이 혁명활동을 착착 진행시키고 있다고 노동당 간부들과 북한주민들에게 선전함으로써 북한 내부의 사상적 동요를 막고 내부결속을 다지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셋째, 남북 관계가 악화돼 다시 대립 시기로 들어갈 때를 대비한 장기 포석일 가능성이다. 남북 관계가 다시 악화되면 이에 반대하는 남한 내 세력을 묶어 김정일 사상을 중심으로 통일하자는 운동을 펼치기 위해 한민전을 존치하는 경우다.

    북한의 약속위반 지적해야

    넷째는 한민전과 별도로 남한 내에 실존하는 지하당 조직에 한민전이 6·15공동선언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활동하고 있음을 알리는 것일 수도 있다. 한민전이 활동하고 있다는 소식은 남북 정상회담 후 꺾였을 이들의 투쟁 의지를 되살리는 요인이 될 수도 있다.

    다섯째, 주사파를 비롯한 남한 내 숨은 친북 좌파들에게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영향력을 과대 포장해서 알리기 위한 방법일 수도 있다. 한민전이 건재하다는 사실을 알면 남한 내의 친북 좌파들은 김정일 지지를 표면화할 가능성이 있다.

    남북 정상회담 후 우리 사회는 남북 관계의 급진전을 지지하는 세력과 이와는 반대로 김대통령의 대북정책 행태와 북한의 의도를 의심하는 세력으로 나뉘고 있다.

    반면 6·15공동선언 후 북한은 사상교육을 강화하고 강도 높은 군사훈련을 반복해 내부 단결을 강화하고 있다. 때문에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만 무장 해제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질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갈등 양상이 공개토론 등을 거쳐 하나의 국론으로 수렴되지 않는다면 이는 심대한 국론 분열 양상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

    김대중 대통령이 남한 국민들의 대북 불신을 걷어내고 진정으로 남북 화해시기로 들어가려 한다면, 이번 기회에 한민전 활동 사실을 지목해 북한의 약속 위반을 과감히 지적해야 한다.

    김대중 대통령은 “당신들이 남조선 혁명을 주장하는 한민전이 버젓이 서울에서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보도하면, 한국 사회의 보수 세력이 뭉쳐서 남북 화해분위기를 거부할 가능성이 있다. 북한도 적화통일을 포기했다는 것을 실증적으로 보여달라”고 당당히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요구해야 한다.

    지피지기면 백전불패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 국민도 북한이 남북 정상회담 후 어떠한 변화를 보였는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아야 한다. 보수세력을 안심시키지 않고는 진정한 남북화해와 통일로 들어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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