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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쉬리’와 ‘JSA’

키싱구라미의 ‘이념’을 녹인 ‘초코파이’의 휴머니티

  • 변정수 미디어평론가

키싱구라미의 ‘이념’을 녹인 ‘초코파이’의 휴머니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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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층 흥미로운 것은 테러리스트에 대한 묘사다. 국제 테러조직이 등장하는 영화에서 테러리스트는 인간적인 면모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적’으로 묘사된다. 반면 자국 내에서 일어난 사건을 다룬 영화에서 테러리스트는 ‘범죄자’일 뿐이다. ‘적’과 ‘범죄자’는 엄연히 다르다. ‘범죄자’는 응징의 대상이지만, ‘적’은 말살해야 할 대상이다. ‘쉬리’에서 북한 특수부대 장교인 박무영이 ‘범죄자’가 아니라 ‘적’이라는 것은 명백하다.

‘쉬리’의 이러한 한계는 이 영화의 장르적 특성에서 예견된 것이기도 하다. 할리우드 스타일의 화려한 스펙터클을 의도했다면 당연히 단순명료하게 정의된 ‘적’이 있어야 하며, ‘적’은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이다. 일각에서 ‘쉬리’를 ‘세련된 반공영화’라고 평가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영화 애호가로 알려진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쉬리’의 대북관에 대해 언짢은 심사를 표출했다는 얘기가 들리는 것도 이와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쉬리’에 대해 상반된 평가가 공존할 수 있는 것은, 어쩌면 그간의 대북 인식이 너무나 편향되어 있었던 탓이기도 하다. ‘쉬리’가 ‘세련된 반공영화’라 할지라도 반공 측면에 대한 비판과 별도로 ‘세련됨’에 많은 점수를 주어도 아깝지 않을 만큼이나 그간의 반공영화들이 보여준 대북 인식이 단세포적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사실 ‘쉬리’가 책임질 부분은 아니며 그런 점에서라면 ‘쉬리’는 ‘반공영화’라도 ‘제대로 된 영화’를 보고 싶어하는 관객들의 기대에 대해서만큼은 자신의 책임을 다하고도 남은 셈이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쉬리’가 흥행에 성공한 비결일 것이다. 관객은 극장에 영화를 보러 가는 것이지 통일교육을 받으러 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군인답지 않은’ 군인들

그런데 ‘JSA’의 구도는 ‘쉬리’와는 전혀 다르다. 우선 이 영화에는 인격화된 분명한 ‘적’이 존재하지 않는다. 비극을 만들어내는 것은 영화 안의 악당이 아니라 영화 밖의 현실에 존재하는 분단과 그로 말미암은 적대, 그 자체다. 따라서 우리는 눈에 보이는 적과의 스펙터클한 싸움을 구경하는 대신, 영화 전체를 짓누르는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을 힘겹게 의식하면서 영화 밖의 현실로 진지하게 눈을 돌릴 것을 요구받는다.



그렇게 우리의 시선이 영화를 넘어 현실로 나아갔을 때 거기엔 ‘김정일 신드롬’이 있고, 이산가족 상봉의 감동이 있었다. 이것은 어쩌면 기가 막힌 우연의 일치다. 지금은 정확하게 ‘JSA’ 같은 영화를 요구하는 시기인 것이다. 관객들은 이를테면 남과 북의 청년들이 어울려 호형호제하며 닭싸움을 하는 장면을 보고 싶었다. 그리고 이 영화는 어색하지도 않고 허황하지도 않게 이것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영화의 비극적 결말은 더욱 가슴아픈 절실함으로 남겨질 수 있는 것이다.

이 영화의 핵심을 이루는 그 ‘군인답지 못한’ 천진난만함이 얼마나 자연스러웠으면,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 근무했던 제대 군인들이 영화사로 몰려가 ‘이 영화의 내용은 사실이 아니라 허구’라는 점을 자막에 넣어달라고 요구하는 사태까지 벌어졌을까.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들이 항의한다고 해서 이 영화의 개연성이 훼손되지는 않는다. ‘김훈 중위 사망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 판문점 근무자가 실제로 대북 접촉을 했다는 사실이 이미 알려졌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정작 아이러니컬한 점은 이 영화의 원작인 박상연씨의 소설 ‘DMZ’와 관련된 뒷얘기다. 소설가 이문열씨가 밝힌 바에 따르면, 이 작품은 1997년 초 발표 당시 ‘오늘의 작가상’ 후보로 최종심까지 올라갔다가 탈락되었는데, ‘판문점에서 남북 병사들이 접촉을 한다는 설정이 비현실적’이라는 데 심사위원 다수가 동의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물론 ‘김훈 중위 사건’이 일어나기 전의 일이다.

남북한 병사의 만남을 통해 이 영화가 전달한 메시지는 1980년대 말 북한을 방문했다가 옥고를 치른 소설가 황석영씨가 쓴 방북기의 제목을 빌려 한마디로 압축하자면 ‘사람이 살고 있었네’다. 우리는 이 영화를 통해 북한 군복을 입고 있는 그들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라는 놀라운(?) 사실을 새삼스럽게 발견한다. 북한 군복을 입은 존재가 ‘악마’가 아니라 ‘사람’일 수 있다는 것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인격 파탄자’가 아니라는 것만큼이나 또는 ‘장군님에게 충성하라’는 당부가 전국으로 생방송된 것만큼이나 깜짝 놀랄 만한 일종의 ‘문화 충격’이다.

‘악마’가 아닌 북한군인

게다가 이러한 ‘문화 충격’은 실제로 우리 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현실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당장 남북간의 교류가 급격하게 확대될 터인데, 우리는 그 동안 입으로만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되뇌었을 뿐, 그에 대한 준비가 전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에서 이 영화가 보여준 보기 드문 미덕은 거꾸로 함정으로 작용할 위험에 빠진다. 그들도 우리와 다를 바 없는 똑같은 사람인데, 달리 준비하고 말고 할 게 뭐가 있겠는가. 부딪쳐 보면 사소한 갈등이야 없을 수 없겠지만 별다른 충돌 없이 금세 잘 어울리게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낙관하는 분위기가 일반적이다.

물론 긴장을 완화하고 적대를 해소하고 화해의 물꼬를 트는 데는 그런 낙관이 분명히 필요하다. 경계하고 낯설어하고 불안해하는 태도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50여년을 다른 체제에서 다른 사고방식과 생활습관으로 살아온 사람들이 어떻게 하루아침에 마음이 통할 수 있을까?

‘피는 물보다 진하기’ 때문에 별다르게 노력하지 않아도 거저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서로의 마음을 열기까지는 얼마나 많은 인내와 노력이 요구되는가.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그 모든 과정이 생략되어 있다. 아무리 ‘생명의 은인’이라는 특수한 정황이 제시된다 하더라도 50여년간의 단절과 적대는 어쩌면 그보다 훨씬 더 특수한 정황일 수도 있다. 이는 뒤에서 좀더 본격적으로 언급하겠지만, 원작 소설과 비교해보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는 문제이기도 하다.

이러한 문제는 이 영화가 그려내고 있는 휴머니즘이 그만큼 허술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요컨대 우리가 이 영화를 보면서 느끼는 ‘인간적인’ 냄새가 실은 너무나 ‘남한적’이지 않은가 하는 의문이다. 우리에게는 언뜻 낯설게 느껴지지만 그 나름의 문화적인 배경 속에서 휴머니티를 드러낼 수 있는 그런 북한의 모습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어쩌면 실제로 우리가 북한 사람들을 만난다면, 영화에서처럼 ‘자연스럽게’ 동질감을 확인하는 부분보다 그렇게 얼마간의 낯가림 속에서 서로의 ‘차이’를 존중해야 하는 부분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오경필(송강호)과 정우진(신하균)이 이수혁(이병헌)을 만나기 전에도 닭싸움을 하고 놀았는지는 사실 아무도 모른다. 혹은 그때까지 닭싸움을 거의 해 본 적이 없다 해도 처음 배운 놀이라서 더 재미있게 놀았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마찬가지로 그들이 이수혁에게 가르쳐줄 그들만의 놀이는 없었을까. 이수혁이 가져간 도색잡지만큼이나 거꾸로 이수혁에게 신기하게 보였을 그들의 문화는 없었을까. 도대체 왜 김광석의 테이프니 지포 라이터니 하면서 이수혁만 선물하는 것일까. 바르는 구두약을 선물하고 사용법까지 알려주는 남성식(김태우)에게 정우진이 답례로 줄 만한 것은 정말 없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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