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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완수의 우리 문화 바로보기<17>

중국풍 배제한 신라 고유미, 상원사 동종

  • 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

중국풍 배제한 신라 고유미, 상원사 동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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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산사 석조미륵보살의 발견

성덕왕(690년경∼737년)의 외숙부인 이찬 김순원(金順元, 651년경∼730년경)은 그의 외숙부이자 성덕왕의 작은할아버지인 김개원(金愷元, 645년경∼720년경)을 움직여 성덕왕 15년(716) 1월에 김원태(金元泰)의 딸인 성정(成貞)왕후를 출궁시키고 그 소생인 태자 중경(重慶, 706∼717년)을 시해하고 나서 3년 후인 성덕왕 19년(720) 3월에 자신의 딸을 왕비로 입궁시킨다. 이 사람이 소덕(昭德)왕후 김씨(700년경∼724년)이다.

이때 성덕왕의 나이가 31세 경이었으니 소덕왕후와 나이 차이는 10세 전후였을 것이다. 그러니 성덕왕은 10세 정도 어린 외사촌 여동생을 계비로 맞은 것이다. 처음에는 자신을 강제 이혼시킨 외숙부 김순원에 대한 감정 때문에 선뜻 이 정략결혼을 받아들이기 힘들었겠지만, 3세에 부왕인 신문왕이 돌아가고 11세에 모후인 신목(神穆)왕후가 돌아간 바람에 천애고아가 된 그를 국왕으로 옹립해준 외숙부이고 보면 그 뜻에 따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형인 효조왕이 불과 16세의 어린 나이로 돌아갔을 때 성덕왕은 13세 정도의 나이에 외숙부의 지원으로 왕위에 올랐던 것이다.

성덕왕 19년 6월에 책비례(冊妃禮; 왕비를 책봉하는 예식)를 치르게 된다. 3월에 입궁하여 석 달 만에 치른 혼인 예식이었다. 그 사이 이 혼인을 앞장서 주선했을 전대등(典大等) 김지성(金志誠, 652∼720년)이 4월22일에 69세로 돌아가는 일이 발생하였으니, (제16회 도판 2)의 광배 조상기(造像記)가 새겨진 것은 이 어름의 일이었다.

성덕왕은 결혼하고 나자 어린 소덕왕후에게 깊이 빠져들었던 듯한데, 혼인식 다음해인 성덕왕 20년(721)에 낳은 왕자 승경(承慶, 721∼742년)이 겨우 3세를 넘기자마자 23년(724) 봄에 태자로 책봉하고 나서 천하에 대사령(大赦令)을 내렸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결혼하고 나서 곧바로 황룡사 9층탑을 중수한다. 성정왕후와 결혼한 뒤에 황복사지 3층석탑을 중수하여 고태자 중경(重慶)을 얻었던 옛일을 거울 삼은 것이다.



성덕왕은 왕자 승경을 얻자 아들을 위해 더욱 국방을 튼튼히 하려는 의욕을 과시한다. 20년 7월에는 하슬라(何瑟羅, 강릉)도에서 장정 2000명을 징발하여 안변 근처에 장성을 축조하여 발해의 남진을 대비하고, 다음해인 성덕왕 21년(722) 10월에는 울산에서 경주로 들어오는 길목인 모화(毛火, 毛伐)에 각간 김원진(金元眞)으로 하여금 관문성(關門城)을 쌓게 하여 일본의 침략을 대비하게 한다. 그 사이 21년 8월에는 정전제(丁田制)를 실시하여 백성들에게 토지를 나눠주는 혁신적인 경제정책을 단행하기도 하였다.

여난 겪은 신라 성덕왕과 당 현종

그리고 우연히 융기(隆基)라는 이름이 같고 나이도 비슷하여 서로 친밀감이 깊었던 당 현종과는 더욱 긴밀한 외교관계를 맺어서, 매년 두 차례 이상 사신을 정례적으로 교환하고 특별한 일이 있으면 그때마다 사신을 증파할 정도로 굳건한 동맹관계를 맺어갔다.

성덕왕 김융기(金隆基)와 당 현종(玄宗) 이융기(李隆基, 685∼762년)는 각기 자기 나라의 국운을 극성으로 끌어올려 태평성세를 이룩한 성군(聖君)들이었다. 문예(文藝)에도 정통하여 자국 문화의 황금기를 이룩한 다정다감한 문예군주들이기도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절대권력과 애정 사이에 끼어 많은 갈등과 고통을 겪기도 한다. 당 현종이 양귀비(楊貴妃)에게 현혹되어 안녹산(安祿山)의 난을 유발하고(755년) 나라를 거의 멸망에 이르게 할 뻔했던 일은 누구나 다 아는 일이지만, 성덕왕도 여인들로부터 받은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에 주변의 친위세력들에 의해서 별리(別離)를 강요당해 첫째왕비 성정왕후를 출궁시키고 엄청난 상처를 받았는데, 이후 계비 소덕왕후와도 사별(死別)해야 하는 더 큰 고통이 성덕왕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10여 세나 어린 외사촌 여동생을 계비로 맞아들여 왕자 둘을 연거푸 생산하고 막 신정(新情)이 깊어져서 23년(724) 봄에 불과 4세밖에 안 된 큰왕자 승경을 태자로 책봉하여 가정의 행복을 되찾으려 하던 차에, 이해 12월 뜻밖에 소덕왕후가 4세와 2세의 젖먹이 왕자들을 남겨 놓은 채 불과 20여 세의 젊은 나이로 돌아가고 만다.

성덕왕은 자신이 어려서 고아가 되었던 쓰라린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상처했다는 슬픔보다는 어린 왕자들이 모후를 잃은 슬픔을 너무 안타까워했던 듯하다. 그래서 이후에는 다시 계비를 맞아들이지 않고 어린 왕자 형제를 유모에게 맡겨 양육한다.

따라서 왕자들의 외조부이자 자신의 외숙부인 김순정(김순원의 아우로 추정)과 그 추종세력들이 성덕왕 일가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보내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또 출궁당한 성정왕후의 친가 쪽에서도 성덕왕이 다시 계비를 맞아들이지 않은 것을 성정왕후에 대한 예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에 김개원과 요석(瑤石)공주, 지소(智炤)공주의 세 자매 후손들은 성정왕후 출궁을 둘러싼 그간의 갈등을 풀고 성덕왕을 중심으로 재결속하는 듯하다. 다음 해인 성덕왕 24년(725) 4월에 김유신의 손자라고 생각되는 이찬 김윤충(金允忠)이 중시로 임명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속일본기(續日本記)’ 권9에 의하면 이해 6월30일에 이찬 김순정(金順貞, ?∼725년)이 돌아갔다고 하였다. 김순정은 강릉태수와 재상을 지낸 인물로 ‘삼국유사’ 권2 수로부인(水路夫人)조에 의하면 천하절색인 수로부인을 아내로 두었던 인물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 딸과 손녀딸이 장차 경덕왕의 초비와 계비가 되어 실권 있는 외척으로 부상하는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김순정은 김순원의 아우인 듯하다.

소덕왕후와 김순정을 잇따라 잃은 김순원 집안은 이 당시 상당한 위기의식을 느꼈을 터인데, 이런 상황에서 성덕왕이 재혼하지 않았으니 집권 외척으로 우선 안도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뒷날 효성왕(孝成王, 721년경∼742년)과 경덕왕(景德王, 723년경∼765년)이 되는 승경(承慶)과 헌영(憲英) 두 어린 왕자들을 적극 보호하여 자기 가문의 집권 연장에 이용하려 했을 듯하다.

어떻든 35세경의 한창 나이에 상처한 성덕왕이 끝내 재혼하지 않은 이유에는 이런 복잡한 정치적인 세력균형 관계가 내재해 있었던 것으로 보아야겠다. 성덕왕은 이 상황을 재혼 거부라는 적절한 방법을 통해 극적으로 대처하면서 화합과 단결을 도모해내 통일신라 문화의 황금기인 불국(佛國)시대를 연출해 내었던 것이다.

바다 용에게 납치당한 수로부인 사건

그런데 김순정이 어떤 인물이었던가를 알기 위해 ‘삼국유사’ 권2 수로부인조의 내용을 옮겨보자.

“성덕왕대 순정(純貞)공이 강릉태수로 부임하면서 바닷가에 이르러 점심을 먹게 되었다. 곁에 바위 봉우리가 있는데 바다에 병풍을 두른 듯하고 높이가 천길이나 되며 철쭉꽃이 한창 피어나 있었다. 공의 부인인 수로가 보고 ‘꽃을 꺾어다 줄 사람이 그 누구일까’ 하고 옆사람에게 말하였다.

시종하던 사람들은 사람의 발길이 닿는 곳이 아니라 하며 모두 할 수 없다고 사양하는데 암소를 끌고 가던 늙은이가 부인의 말을 듣고 그 꽃을 꺾어 왔으며 또한 가사(歌詞)를 지어 바쳤다. 그 늙은이가 어떤 사람인지는 알 수 없다.

문득 이틀 길을 지나다가 또 바닷가에 정자가 있어 점심을 먹던 차에 바다 용이 갑자기 부인을 채어 가지고 바다로 들어간다. 공이 엎어지며 땅을 굴렀으나 내놓을 방법이 없었다. 또 한 노인이 있어 이렇게 고하였다.

‘옛사람들이 말하기를 여러 사람의 입은 쇠도 녹인다 했는데 이제 바닷속에 사는 짐승이 어찌 뭇 사람의 입을 두려워하지 않겠는가. 마땅히 경계 안의 백성들을 나오게 하여 노래를 지어 부르고 몽둥이로 해안을 두드리면 부인을 볼 수 있으리이다.’

공이 이를 좇으니 용이 부인을 받들고 바다를 나와 바쳤다. 공이 부인에게 바닷속 일을 묻자 이렇게 말하였다. 칠보궁전에 음식은 달고 부드러우며 향기롭고 깨끗하여 인간세상에서 익혀 만든 것 같지 않았다. 이 부인의 옷에 밴 이상한 향기도 인간세상에서 맡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수로부인은 잘생긴 용모가 한 시대에 제일이라서 깊은 산과 큰 물가를 지날 때마다 여러 번 신물(神物; 신령스런 물건)에게 약탈당했었다. 뭇 사람이 바다에 대고 불렀다는 가사는 다음과 같다.

‘거북아 거북아 수로를 내놓아라. 남의 부녀를 약탈하면 죄가 얼마나 지극하냐. 네가 만약 거역하고 아니 내다 바치면, 그물 넣어 잡아다가 구워 먹겠다.’

노인의 헌화가는 이렇다.

‘붉은 바윗가에서, 잡은 손 어미소 놓고. 나를 아니 부끄리시어든, 꽃을 꺾어 드리오리다.’

여기서 김순정 부인이 당대에 비교할 수 없는 일등미인이었다는 사실과 김순정이 강릉태수로 부임해 가는 도중에 수로부인이 용에게 납치되어 바다로 끌려갔다 나왔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용이라고 표현한 것은 해적이라고 보아야 하니 왜구가 아니었던가 한다. 이는 이후 김순정이 친일적인 성향을 보였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으리라 생각된다.

김순정이 죽은 다음해인 성덕왕 25년(726) 6월 일본에 사신으로 간 김조근(金造近)이 김순정의 죽음을 알리자 일본 천황이 그 편에 이를 애도하는 국서와 황색 명주 및 무명을 부의로 보냈다는 사실이 ‘속일본기’ 권9 신구(神龜) 3년 9월 무자조에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김순정은 일본과 깊은 유대관계를 맺고 있었다.

당시 신라 조정의 전체 분위기는 통일전쟁 시기에 백제와 연합해 신라를 공격했던 일본에 대해 상당히 적대적인 태도를 견지하는 것이었는데, 김순정이 집권가문의 일원으로 이와 같이 친일적인 성향을 보였다는 것은 수로부인 약탈사건으로 맺어진 어떤 사적인 친분관계에서 기인한 것으로밖에 볼 수 없다. 일본이 이를 노리고 의도적으로 당대 집권 외척의 실권자 중 한 사람인 김순정에게서 그 부인을 납치해 갔을 수도 있다.

어떻든 수로부인이 이렇게 절세 미인이었으니 그 자녀들이 미남미녀일 수밖에 없었을 터라서 자연 김순원의 자녀들과 함께 성덕왕의 자녀들 사이에는 특별한 친분관계가 이루어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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