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11월호

중국풍 배제한 신라 고유미, 상원사 동종

  • 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

    입력2006-08-08 10:2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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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의 발견

    성덕왕(690년경∼737년)의 외숙부인 이찬 김순원(金順元, 651년경∼730년경)은 그의 외숙부이자 성덕왕의 작은할아버지인 김개원(金愷元, 645년경∼720년경)을 움직여 성덕왕 15년(716) 1월에 김원태(金元泰)의 딸인 성정(成貞)왕후를 출궁시키고 그 소생인 태자 중경(重慶, 706∼717년)을 시해하고 나서 3년 후인 성덕왕 19년(720) 3월에 자신의 딸을 왕비로 입궁시킨다. 이 사람이 소덕(昭德)왕후 김씨(700년경∼724년)이다.

    이때 성덕왕의 나이가 31세 경이었으니 소덕왕후와 나이 차이는 10세 전후였을 것이다. 그러니 성덕왕은 10세 정도 어린 외사촌 여동생을 계비로 맞은 것이다. 처음에는 자신을 강제 이혼시킨 외숙부 김순원에 대한 감정 때문에 선뜻 이 정략결혼을 받아들이기 힘들었겠지만, 3세에 부왕인 신문왕이 돌아가고 11세에 모후인 신목(神穆)왕후가 돌아간 바람에 천애고아가 된 그를 국왕으로 옹립해준 외숙부이고 보면 그 뜻에 따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형인 효조왕이 불과 16세의 어린 나이로 돌아갔을 때 성덕왕은 13세 정도의 나이에 외숙부의 지원으로 왕위에 올랐던 것이다.

    성덕왕 19년 6월에 책비례(冊妃禮; 왕비를 책봉하는 예식)를 치르게 된다. 3월에 입궁하여 석 달 만에 치른 혼인 예식이었다. 그 사이 이 혼인을 앞장서 주선했을 전대등(典大等) 김지성(金志誠, 652∼720년)이 4월22일에 69세로 돌아가는 일이 발생하였으니, (제16회 도판 2)의 광배 조상기(造像記)가 새겨진 것은 이 어름의 일이었다.

    성덕왕은 결혼하고 나자 어린 소덕왕후에게 깊이 빠져들었던 듯한데, 혼인식 다음해인 성덕왕 20년(721)에 낳은 왕자 승경(承慶, 721∼742년)이 겨우 3세를 넘기자마자 23년(724) 봄에 태자로 책봉하고 나서 천하에 대사령(大赦令)을 내렸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결혼하고 나서 곧바로 황룡사 9층탑을 중수한다. 성정왕후와 결혼한 뒤에 황복사지 3층석탑을 중수하여 고태자 중경(重慶)을 얻었던 옛일을 거울 삼은 것이다.



    성덕왕은 왕자 승경을 얻자 아들을 위해 더욱 국방을 튼튼히 하려는 의욕을 과시한다. 20년 7월에는 하슬라(何瑟羅, 강릉)도에서 장정 2000명을 징발하여 안변 근처에 장성을 축조하여 발해의 남진을 대비하고, 다음해인 성덕왕 21년(722) 10월에는 울산에서 경주로 들어오는 길목인 모화(毛火, 毛伐)에 각간 김원진(金元眞)으로 하여금 관문성(關門城)을 쌓게 하여 일본의 침략을 대비하게 한다. 그 사이 21년 8월에는 정전제(丁田制)를 실시하여 백성들에게 토지를 나눠주는 혁신적인 경제정책을 단행하기도 하였다.

    여난 겪은 신라 성덕왕과 당 현종

    그리고 우연히 융기(隆基)라는 이름이 같고 나이도 비슷하여 서로 친밀감이 깊었던 당 현종과는 더욱 긴밀한 외교관계를 맺어서, 매년 두 차례 이상 사신을 정례적으로 교환하고 특별한 일이 있으면 그때마다 사신을 증파할 정도로 굳건한 동맹관계를 맺어갔다.

    성덕왕 김융기(金隆基)와 당 현종(玄宗) 이융기(李隆基, 685∼762년)는 각기 자기 나라의 국운을 극성으로 끌어올려 태평성세를 이룩한 성군(聖君)들이었다. 문예(文藝)에도 정통하여 자국 문화의 황금기를 이룩한 다정다감한 문예군주들이기도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절대권력과 애정 사이에 끼어 많은 갈등과 고통을 겪기도 한다. 당 현종이 양귀비(楊貴妃)에게 현혹되어 안녹산(安祿山)의 난을 유발하고(755년) 나라를 거의 멸망에 이르게 할 뻔했던 일은 누구나 다 아는 일이지만, 성덕왕도 여인들로부터 받은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에 주변의 친위세력들에 의해서 별리(別離)를 강요당해 첫째왕비 성정왕후를 출궁시키고 엄청난 상처를 받았는데, 이후 계비 소덕왕후와도 사별(死別)해야 하는 더 큰 고통이 성덕왕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10여 세나 어린 외사촌 여동생을 계비로 맞아들여 왕자 둘을 연거푸 생산하고 막 신정(新情)이 깊어져서 23년(724) 봄에 불과 4세밖에 안 된 큰왕자 승경을 태자로 책봉하여 가정의 행복을 되찾으려 하던 차에, 이해 12월 뜻밖에 소덕왕후가 4세와 2세의 젖먹이 왕자들을 남겨 놓은 채 불과 20여 세의 젊은 나이로 돌아가고 만다.

    성덕왕은 자신이 어려서 고아가 되었던 쓰라린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상처했다는 슬픔보다는 어린 왕자들이 모후를 잃은 슬픔을 너무 안타까워했던 듯하다. 그래서 이후에는 다시 계비를 맞아들이지 않고 어린 왕자 형제를 유모에게 맡겨 양육한다.

    따라서 왕자들의 외조부이자 자신의 외숙부인 김순정(김순원의 아우로 추정)과 그 추종세력들이 성덕왕 일가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보내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또 출궁당한 성정왕후의 친가 쪽에서도 성덕왕이 다시 계비를 맞아들이지 않은 것을 성정왕후에 대한 예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에 김개원과 요석(瑤石)공주, 지소(智炤)공주의 세 자매 후손들은 성정왕후 출궁을 둘러싼 그간의 갈등을 풀고 성덕왕을 중심으로 재결속하는 듯하다. 다음 해인 성덕왕 24년(725) 4월에 김유신의 손자라고 생각되는 이찬 김윤충(金允忠)이 중시로 임명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속일본기(續日本記)’ 권9에 의하면 이해 6월30일에 이찬 김순정(金順貞, ?∼725년)이 돌아갔다고 하였다. 김순정은 강릉태수와 재상을 지낸 인물로 ‘삼국유사’ 권2 수로부인(水路夫人)조에 의하면 천하절색인 수로부인을 아내로 두었던 인물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 딸과 손녀딸이 장차 경덕왕의 초비와 계비가 되어 실권 있는 외척으로 부상하는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김순정은 김순원의 아우인 듯하다.

    소덕왕후와 김순정을 잇따라 잃은 김순원 집안은 이 당시 상당한 위기의식을 느꼈을 터인데, 이런 상황에서 성덕왕이 재혼하지 않았으니 집권 외척으로 우선 안도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뒷날 효성왕(孝成王, 721년경∼742년)과 경덕왕(景德王, 723년경∼765년)이 되는 승경(承慶)과 헌영(憲英) 두 어린 왕자들을 적극 보호하여 자기 가문의 집권 연장에 이용하려 했을 듯하다.

    어떻든 35세경의 한창 나이에 상처한 성덕왕이 끝내 재혼하지 않은 이유에는 이런 복잡한 정치적인 세력균형 관계가 내재해 있었던 것으로 보아야겠다. 성덕왕은 이 상황을 재혼 거부라는 적절한 방법을 통해 극적으로 대처하면서 화합과 단결을 도모해내 통일신라 문화의 황금기인 불국(佛國)시대를 연출해 내었던 것이다.

    바다 용에게 납치당한 수로부인 사건

    그런데 김순정이 어떤 인물이었던가를 알기 위해 ‘삼국유사’ 권2 수로부인조의 내용을 옮겨보자.

    “성덕왕대 순정(純貞)공이 강릉태수로 부임하면서 바닷가에 이르러 점심을 먹게 되었다. 곁에 바위 봉우리가 있는데 바다에 병풍을 두른 듯하고 높이가 천길이나 되며 철쭉꽃이 한창 피어나 있었다. 공의 부인인 수로가 보고 ‘꽃을 꺾어다 줄 사람이 그 누구일까’ 하고 옆사람에게 말하였다.

    시종하던 사람들은 사람의 발길이 닿는 곳이 아니라 하며 모두 할 수 없다고 사양하는데 암소를 끌고 가던 늙은이가 부인의 말을 듣고 그 꽃을 꺾어 왔으며 또한 가사(歌詞)를 지어 바쳤다. 그 늙은이가 어떤 사람인지는 알 수 없다.

    문득 이틀 길을 지나다가 또 바닷가에 정자가 있어 점심을 먹던 차에 바다 용이 갑자기 부인을 채어 가지고 바다로 들어간다. 공이 엎어지며 땅을 굴렀으나 내놓을 방법이 없었다. 또 한 노인이 있어 이렇게 고하였다.

    ‘옛사람들이 말하기를 여러 사람의 입은 쇠도 녹인다 했는데 이제 바닷속에 사는 짐승이 어찌 뭇 사람의 입을 두려워하지 않겠는가. 마땅히 경계 안의 백성들을 나오게 하여 노래를 지어 부르고 몽둥이로 해안을 두드리면 부인을 볼 수 있으리이다.’

    공이 이를 좇으니 용이 부인을 받들고 바다를 나와 바쳤다. 공이 부인에게 바닷속 일을 묻자 이렇게 말하였다. 칠보궁전에 음식은 달고 부드러우며 향기롭고 깨끗하여 인간세상에서 익혀 만든 것 같지 않았다. 이 부인의 옷에 밴 이상한 향기도 인간세상에서 맡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수로부인은 잘생긴 용모가 한 시대에 제일이라서 깊은 산과 큰 물가를 지날 때마다 여러 번 신물(神物; 신령스런 물건)에게 약탈당했었다. 뭇 사람이 바다에 대고 불렀다는 가사는 다음과 같다.

    ‘거북아 거북아 수로를 내놓아라. 남의 부녀를 약탈하면 죄가 얼마나 지극하냐. 네가 만약 거역하고 아니 내다 바치면, 그물 넣어 잡아다가 구워 먹겠다.’

    노인의 헌화가는 이렇다.

    ‘붉은 바윗가에서, 잡은 손 어미소 놓고. 나를 아니 부끄리시어든, 꽃을 꺾어 드리오리다.’

    여기서 김순정 부인이 당대에 비교할 수 없는 일등미인이었다는 사실과 김순정이 강릉태수로 부임해 가는 도중에 수로부인이 용에게 납치되어 바다로 끌려갔다 나왔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용이라고 표현한 것은 해적이라고 보아야 하니 왜구가 아니었던가 한다. 이는 이후 김순정이 친일적인 성향을 보였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으리라 생각된다.

    김순정이 죽은 다음해인 성덕왕 25년(726) 6월 일본에 사신으로 간 김조근(金造近)이 김순정의 죽음을 알리자 일본 천황이 그 편에 이를 애도하는 국서와 황색 명주 및 무명을 부의로 보냈다는 사실이 ‘속일본기’ 권9 신구(神龜) 3년 9월 무자조에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김순정은 일본과 깊은 유대관계를 맺고 있었다.

    당시 신라 조정의 전체 분위기는 통일전쟁 시기에 백제와 연합해 신라를 공격했던 일본에 대해 상당히 적대적인 태도를 견지하는 것이었는데, 김순정이 집권가문의 일원으로 이와 같이 친일적인 성향을 보였다는 것은 수로부인 약탈사건으로 맺어진 어떤 사적인 친분관계에서 기인한 것으로밖에 볼 수 없다. 일본이 이를 노리고 의도적으로 당대 집권 외척의 실권자 중 한 사람인 김순정에게서 그 부인을 납치해 갔을 수도 있다.

    어떻든 수로부인이 이렇게 절세 미인이었으니 그 자녀들이 미남미녀일 수밖에 없었을 터라서 자연 김순원의 자녀들과 함께 성덕왕의 자녀들 사이에는 특별한 친분관계가 이루어지게 된다.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동산리 소재 오대산 월정사의 산내 암자인 상원사(上院寺)에는 국보 36호인 (도판 1)이 있다. 이 동종에는 다음과 같은 명문이 용뉴(龍; 용 모양을 하고 있는 종의 꼭지, 걸쇠로 사용됨)의 양 옆에 새겨져 있다.

    ‘개원(開元) 13년(725) 을축 3월8일 종이 이루어져서 이를 기록한다. 도합 놋쇠가 3300정(鋌)이다. 원컨대 널리 모든 중생에게 들리게 하소서. 도유내(都唯乃) 효○(孝○), 한 해 동안 일을 맡은 여러 승려 충칠(忠七) 충안(安) 정응(貞應), 단월 유휴(有休) 대사(大舍; 제12관등)댁 부인 휴도리(休道里), 덕향(德香) 사(舍; 제13관등), 상안(上安)사, 조남(照南)댁 장인, 사○(仕○)대사.’

    개원 13년은 성덕왕 24년으로 소덕왕후가 돌아간 바로 다음해이다. 통일신라문화가 황금기로 접어드는 불국시대 초반이라 자못 건실한 창조정신이 신라 고유색을 발현해 나가던 시기로, 의상대사의 직제자들이 전국 각지에서 신라화한 해동화엄종(海東華嚴宗)의 종지를 활발하게 펼쳐 나가고 있었다.

    그래서 미술양식에서도 신라 고유색이 점차 노골화되고 있었으니 불보살상에서는 제16회에서 살펴본 것처럼 (제16회 도판 2)과 (제16회 도판 1) 같은 신양식의 출현이 이를 대변한다. 초당양식을 수용하면서 북위 극성기에 이루어지는 운강석굴의 고전적 불보살상 양식을 근간으로 하여 신라고유색을 창안해 냈던 것이다.

    을 보면 동종에서도 이런 맥락으로 여러 선구 양식을 독창적으로 절충하여 신라 고유양식을 창안해내고 있었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원래 불교 교단은 대중의 집단 수행생활을 전제로 하여 형성된 것이므로 교조인 석가모니 시절부터 비구의 소집을 알리기 위해 건치( 稚)와 북, 소라 등 법구(法具)로 소집신호를 보내게 했다는 내용이 ‘오분율(五分律)’ 권18에 실려 있다. 이중에서 건치는 나무 속을 파내 종처럼 만들고 나무토막으로 이를 쳐서 소리를 내는 기구였다고 한다.

    그런데 ‘대지도론(大智度論)’ 권2에서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수제자인 마하가섭이 이를 동으로 만들었다고 하니 인도에서도 초기 불교시대부터 동종과 비슷한 건치라는 법구가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 건치가 중국에 들어와 중국 동종의 영향을 받아 독특한 중국 범종(梵鐘)으로 탈바꿈하는데 이는 불교가 중국화되어 주도이념으로 부상하던 남북조시대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이 사실은 일본 내량(奈良)국립박물관에 소장된 남조 진(陳) 선제(宣帝) 태건(太建) 7년(575)명이 새겨진 (도판 2)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동종은 높이 39.1cm, 입지름 21cm밖에 안 되는 소형 동종이지만 몸체가 원통형(圓筒形)으로 생기고 두 마리 용으로 이루어진 쌍룡형 용뉴가 달려 있으며 표면에 십자형(十字形)의 줄무늬가 양각되어 있고 그 교차점에 앞뒤로 활짝 핀 연꽃 모양의 당좌(撞座; 종 치는 망치, 즉 종채를 맞는 자리)가 돋을무늬로 새겨지는 등 이후 중국 범종의 기본 틀을 모두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개원 8년(720)명이 있는 절강성박물관 소장의 당나라 범종도 이와 동일한 양식을 보이고 있다.

    원래 중국에서는 은(殷, 서기전 1401∼서기전 1121년)·주(周, 서기전 1122∼서기전 780년)시대에 벌써 동종을 악기로 만들어 쓰고 있었는데 그 모양은 암키와 두 장을 서로 맞붙여놓은 것 같은 납작원통형(扁圓筒形)으로 주둥이가 복숭아씨처럼 생겼다.

    이를 춘추(春秋)시대(서기전 781∼서기전 404년)에 만들어진 (도판 3)에서 확인할 수 있다. 거기에는 손잡이인 용(甬)이 달려 있다. 걸쇠인 용뉴나 죽절뉴(竹節紐; 대나무마디처럼 생긴 고리)가 달려 있는 것도 있으니 춘추시대 후기에 만들어진 (도판 4)과 같은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런 중국 동종의 외형장식과 순수 원통형의 인도식 건치가 합쳐져서 원통형의 종신(鐘身; 종의 몸체)에 용뉴와 당좌, 십자무늬띠 장식을 갖춘 중국범종 형식을 이루어냈던 것이다.

    그런데 중국범종 안에서도 남북이 양식적 차이를 보이고 있으니 과 과 같은 계열은 양자강 이남의 남방종이고 이나 측천무후(則天武后, 684∼704년)시기에 만들어진 감숙성 무위(武威) 종루에 걸려 있는 등은 북방종에 해당한다.

    남·북방종이 전체적으로는 비슷하나 남방종은 과 같이 주둥이가 수평으로 되어 있는 평구(平口) 형식이고 북방종은 (도판 5)처럼 주둥이가 물결치듯 곡선이 반복되는 파구(波口) 형식이다. 그리고 남방종보다 북방종의 주둥이가 넓어서 우람한 맛은 있으나 단단한 긴장감이 부족한 것이 서로 다르다.

    중국 종과 다른 신라 고유의 종

    이런 중국 종과 별도로 신라에서는 신라 고유 종을 만들어냈다는 사실을 에서 확인해 보기로 하겠다. 은 조형에서 중국의 남·북방 어느 쪽의 영향도 받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은·주시대 이래 중국에서 만들어져 온 중국 동종의 특성을 완전히 파악하고 인도에서 전래해 온 건치의 용도를 철저히 이해한 위에서 이 양대 동종의 기능을 종합하여 전혀 다른 제3의 동종형식을 창안해낸 것이다.

    우선 종의 몸통을 원통형으로 한 것은 인도의 건치를 본받은 것인데, 이는 주둥이가 배 모양으로 생긴 납작원통형의 중국 종으로는 긴 소리를 낼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음색을 맑게 하여 소리를 널리 퍼지게 하기 위해서 중국 종의 표면에 부착했던 젖꼭지 형태의 매(枚; 요즘은 이를 乳頭, 즉 젖꼭지라 부른다)를 부착하였는데, 어깨 아래에 네 군데로 나누어 네모진 구역을 만들고 그 안에 각각 9개씩을 배치한 모양이다(도판 6).

    젖꼭지는 둥근 연꽃잎 받침 위에 앵두 모양의 꼭지를 올려놓고 활짝 핀 연꽃 한 송이로 끝을 마무리한 형식인데 가로 세로 각각 셋씩 배치하여 아홉을 만들어 놓고 있다. 9는 10진법에서 홀수의 마지막에 해당하는 숫자로 하늘과 남성을 상징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유두를 가둬놓은 네모난 틀은 종신의 윗부분을 죄어 마무리지은 상대(上帶)를 일변으로 삼아 3변의 띠를 보태어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네모난 틀이 정사각형이 아니라 위가 좁고 아래가 넓은 마름모꼴이다. 따라서 좌우 양쪽 띠는 위가 좁고 아래가 넓은 상태이며 아랫변은 또 직선이 아니라 약간 둥근 맛이 나는 호선(弧線)이다.

    넓은 띠는 이중의 구슬무늬 장식띠와 은행잎 장식띠로 안팎을 마무리짓고, 가운데 넓은 공간에는 인동무늬를 늘씬하게 돋을새김해 채워놓았다. 그 가운데로는 두 줄의 매화무늬띠와 박쥐무늬띠가 타원형 호(弧)를 이루어 놓았는데 그 안에 젓대를 불거나 가야금을 타는 등 음악을 연주하는 주악천(奏樂天; 음악을 연주하는 천인)을 새겨 놓았다.

    그리고 소리가 가장 크게 울리게 하기 위해 원통형의 몸체를 항아리 모양으로 위는 좁고 아래는 넓게 하되, 당목(撞木; 치는 나무)을 맞아 소리를 내는 부위는 가장 불룩하게 솟구치도록 하였다. 그 솟구친 부위에 앞뒤로 활짝 핀 연꽃을 돋을새김해 놓았으니 이것이 당목을 맞아 종이 소리내는 당좌(撞座)이다.

    당좌는 허리 아래에서 그 중심보다 약간 위로 치우쳐 있는데 연꽃은 씨방과 꽃술을 두루 갖춘 겹꽃이고, 그 둘레에는 2중 구슬무늬띠 안에서 힘차게 덩굴을 뻗어나가며 휘감고 돌아간 인동무늬 장식이 돋을새김되어 있다(도판 7).

    이 당좌는 춘추시대 동종인 (도판 4)에서 그 의장을 따온 것이다. 당좌와 당좌 사이의 공간에는 한 쌍의 주악천이 마주보고 악기를 연주하며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모습을 돋을새김해 놓았다(도판 8).

    생황(笙簧)을 불고 공후()를 타는 모습인데 구름을 타고 허공을 헤엄쳐 날아오는 동작이 음악의 선율을 따르는 듯 자못 율동적이다. 허공을 타고 하늘에서 떨어져 내려오자니 옷자락은 모두 하늘로 치솟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가닥가닥의 천의(天衣)자락과 구슬띠는 바람을 머금고 위로 솟구쳐 오르게 되니 옷자락이 겨드랑이에서도 나오고 허리 뒤에서도 나오며 두 무릎 근처에서도 나와 힘차게 나부껴 오른다.

    가늘고 날카로운 옷주름선이 가볍고 상쾌한 느낌을 자아내어 바람 타고 내리는 구름 위의 하늘 세계를 실감나게 하는데 웃음 띤 얼굴에서 6년 전에 이루어진 (제16회 도판 1)의 표정을 그대로 읽어낼 수 있다. 치마의 옷주름선이 두 다리를 따라 매미날개처럼 겹쳐 내리는 것도 비슷하다.

    종의 주둥이 부분도 다시 주악천과 인동무늬로 장식한 넓은 띠로 장식하였는데 당좌 부분에서부터 서서히 좁혀 들다가 다시 바짝 죄어 조붓하게 마무리지음으로써 소리가 갑자기 흩어져 달아나지 못하게 하였다. 따라서 입으로 한꺼번에 다 빠져나가지 못한 소리는 종 안을 맴돌아 위로 오르게 될 터이니, 이를 위해 종 머리는 용통(甬筒)을 마련해서 위로 오른 소리가 빠져 하늘로 오르도록 하였다.

    용통은 춘추시대 (도판 3)과 같은 용종(甬鐘; 자루 달린 종)의 자루에서 생각을 얻어낸 것이다. 중국 용종의 용(甬)이 다만 손잡이 구실을 하는 단순한 종자루에 불과하여 속이 막혀 있었던 것을, 속을 뚫어 소리가 이곳으로 빠져나가 하늘로 오르게 하였다. 대담한 변용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종을 거는 걸쇠꼭지는 역시 의 포뢰(浦牢)형 걸쇠꼭지에서 그 형상을 빌려다가 고유화시켰다. 에서는 두 마리의 포뢰가 꼬리를 마주 대고 머리를 양쪽 밖으로 내밀고 있는 모습인데 에서는 한 마리의 포뢰가 등에 용통을 짊어진 채 종머리 천판(天板; 천장반자) 위에서 네 발로 힘주어 버티고 서 있는 모습이다.

    따라서 용통을 짊어진 포뢰의 등줄기는 휘어 오르게 마련이니 이 휘어오른 포뢰의 등줄기가 바로 종을 거는 걸쇠가 되었다. 용통은 고사리 무늬가 장식된 연꽃잎을 둘러 붙여 꾸몄는데 아랫단은 장구통처럼 연꽃잎을 아래위로 마주대며 구슬무늬띠로 나눠 놓았고 윗단은 위로 솟은 연꽃잎만 표현하였다. 포뢰는 입을 있는 대로 벌려서 힘겹게 소리치는 모습이다(도판 9).

    이런 모습으로 표현한 데는 이유가 있다. 삼국 오나라 때 사람인 설종(薛終)이 ‘서경부(西京賦)’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바닷속에 큰 물고기가 있으니 고래라 하고 또 큰 짐승이 있어 포뢰라 한다. 포뢰는 본디 고래를 두려워하여 고래가 포뢰를 치면 문득 크게 운다. 무릇 종으로 하여금 소리를 크게 내도록 하려고 하는 사람은 그런 까닭으로 포뢰를 위에 만들고 치는 것은 고래로 만든다.”

    그러니 고래 형태로 만든 경목(鯨木)으로 맞은 포뢰는 고통과 두려움에 못이겨 크게 울부짖을 터이니 의 포뢰가 이와 같이 힘겹고 고통스럽게 표현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포뢰는 용왕의 아홉 자식 중에 울기를 좋아하는 용이라 한다.

    이 은 조선왕조 전기에 억불정책에 따라 각처에서 절을 허물 때 경상도 안동부로 옮겨와 안동부의 정문 문루인 관풍루(觀風樓)에 걸려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성화(成化) 5년(1469) 기축, 즉 예종 원년에 상원사를 세조의 원찰로 지정하면서 전국에서 가장 멀리 들리는 종을 구해 오라는 왕명에 따라 안동에서 상원사로 옮겨졌다 한다.

    이 내용은 만력 36년(1608) 무신, 즉 선조 41년에 권기(勸紀, 1546∼1624년)가 편찬한 안동의 읍지인 ‘영가지(永嘉誌)’ 권6 고적(古蹟) 누문고종(樓門古鍾; 누문에 걸린 옛 종)조에 상세하게 실려 있다. 이제 그 내용을 옮겨보겠다.

    “무게 3379근이며 이를 치면 소리가 크고 맑아서 멀리 100리 밖에서도 들을 수 있다. 강원도 상원사는 곧 (세조의) 내원당이라, 멀리 들리는 종을 두고자 하여 8도에서 구하였는데 본부의 종이 가장 으뜸이었다. 성화(成化) 기축(1469)에 나라의 명령으로 장차 옮겨가려고 죽령을 넘는데 종이 슬피 울면서 지극히 무거워져서 넘을 수가 없다. 종의 젖을 떼어 본부(안동부)에 보낸 후에야 운반할 수 있었다. 지금도 상원사에 있다(重三千三百七十九斤, 撞之則聲音雄亮, 遠可聞百里. 江原道上院寺, 乃內願堂也. 欲置遠聞之鍾, 求八道, 本府之鍾爲最. 成化己丑, 以國命, 將移運踰竹嶺, 鍾幽吼極重, 難越. 折鍾乳, 送本府後, 可運, 至今在上院寺).”

    이때 강원도 보안도(保安道) 찰방(察訪, 종6품) 김종(金鍾)이란 사람이 이 을 옮겨오는 일을 주관한 승려인 학열(學悅)이 역말을 함부로 쓰고 길을 마음대로 돌아와 인마(人馬)를 피로하게 했다는 장계를 올리는데 이 사실이 거짓으로 밝혀진다. 그러자 당시 20세로 왕위에 올랐던 예종은 어린 왕을 깔보는 처사라고 대로하여 김종을 참수하고 3일 동안이나 그 목을 운종가(雲從街, 종로)에 걸어두게 하였다. 경상도 금종이 강원도로 옮겨지면서 강원도의 김종(金鍾)을 잡은 희한한 일이라 하겠다.

    성덕왕과 당 현종의 ‘별난’ 우의

    성덕왕은 소덕왕후가 돌아간 후에 어린 두 왕자에게 모든 희망을 걸고 국기를 굳건하게 다지는 일에만 몰두하게 되니 더욱 성군(聖君)의 길을 걷게 되었다. 아직 당으로부터 신라가 차지하고 있는 옛 삼국 영토에 대한 공식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라, 우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당과 외교 관계를 원만히 지속해 나가야 했다.

    더욱이 옛 고구려 영토 대부분을 차지하고 동북의 강국으로 성장하고 있는 발해의 위협이 점점 커지면서 발해와 일본의 밀착 관계를 경계하지 않을 수 없게 되니 당과 동맹관계를 철저하게 다져나가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런 위에 당은 현종의 밝은 정치를 만나 이른바 개원의 다스림(開元之治)이라고 불리는 태평성대를 누리고 있었다.

    이에 성덕왕은 정성을 다해 특산물을 선물로 보내니 당 현종도 성덕왕 25년(726)에 사신으로 온 왕제 김흠질(金質)에게 낭장의 벼슬을 주어 돌려보내는 예우를 베푼다. 이미 성덕왕은 13년(714) 2월에 대당외교담당관인 상문사(詳文司)를 통문박사(通文博士)로 고치고 왕자(문무왕이나 신문왕의 서왕자이거나 종실 중에 가왕자로 봉한 사람일 것이다) 김수충을 사신으로 보내 숙위(宿衛; 제왕의 측근에 머물면서 호위함)하도록 하여 김인문(金仁問, 629∼694년) 사후에 일시 단절되었던 숙위의 맥을 다시 이어놓았었다.

    이에 당 현종은 감격하여 김수충에게 집과 비단을 하사하고 조당(朝堂; 조회를 베푸는 집)에서 연회를 베풀어주는 특전을 내린다. 이로부터 신라 사신들은 가기만 하면 벼슬과 선물을 받고 궁전 안에서 연회를 베풀어주는 대접을 받았다. 숙위 왕자 김수충이 성덕왕 16년(717) 9월에 돌아오면서 공자와 그 제자들인 10철(哲) 72제자의 초상화를 가지고 돌아오는데, 이는 당나라 국학(國學; 현재의 대학에 해당)에 모셔져 있던 것을 모사한 것이었다.

    이로부터 신라에서도 국학체제를 당나라식으로 수용해 나갔을 듯하다. 드디어 성덕왕 27년(728) 7월에는 왕제 김사종(金嗣宗)을 보내 당나라 국학에 신라 자제들을 입학시켜줄 것을 요청하게 되는데, 당 현종은 이를 쾌히 허락하여 신라 자제들의 당나라 유학길이 트이게 된다. 당 현종은 왕제 김사종이 마음에 들었던지 과의(果毅) 벼슬을 주고 숙위 왕자로 자신의 측근에 남아서 시중 들게 하였다.

    이에 성덕왕은 29년(730) 2월에 왕족 김지만(金志滿)을 사신으로 보내 작은 말 5필, 개 한 마리, 황금 2000냥, 두발 80량, 바다표범가죽 10장을 선물한다. 당 현종은 감격하여 김지만에게 태복경(太僕卿) 벼슬을 주고 비단 100필과 자줏빛 겉옷과 비단띠를 하사하며 머물러 숙위하게 하는 한편, 성덕왕을 한번 만나보기를 청한다. 이융기가 김융기를 만나보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성덕왕은 병을 핑계대어 당 현종의 초청에 응하지 않고 다음해인 성덕왕 30년(731) 2월에 왕족 김지량(金志良)을 사신으로 보내 이 사실을 통보한다. 그때 우황(牛黃)과 금 은 등 선물을 보내었던 듯 당 현종은 김지량에게 태복소경의 벼슬과 비단 60필의 하사품을 내려주고 돌려보내면서 성덕왕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을 보낸다.

    “보내준 우황 및 금 은 등의 물건은 표문(表文)에 갖추어 쓰여 있어 잘 살펴보았다. 경은 두 아들을 둔 경사스런 복이 있고 삼한(三韓)은 좋은 이웃이 되었다. 지금은 인의(仁義)가 있는 나라라고 일컬을 만하고 대대로 공훈을 세우는 어진 일을 해왔다. 문장과 예악(禮樂)에서 군자(君子)의 기풍을 드러냈으며 정성을 들이고 충성을 보내 왕을 위해 힘쓰는 절개를 다하였으니 진실로 번방(藩邦; 울타리로 삼는 땅)의 요새이며 참으로 충의(忠義)의 표본이라 할 수 있다.

    어찌 색다른 지방의 먼 풍속과 같이 놓고 말할 수 있겠는가. 더해서 정의(正義)를 그리워함에 더욱 부지런하고 직무를 말함에 더욱 삼가서 산을 오르고 바다를 건너는데도 험하고 먼 길에 게으름없이 폐백을 드리기를 항상 해의 첫머리에 하였다. 우리 왕법(王法)을 지켜 나라의 법전을 세워 놓았으니 이에 그 간절한 정성을 돌아봄에 심히 가상하다고 하겠다.

    짐이 매양 새벽에 일어나 우두커니 서서 생각하고 밤에 의복을 입은 채로 자며 어진 이를 기다리는 것은 그 사람을 보고 마음을 터놓고자 해서였다. 경을 기다렸다 만나서 품은 마음을 펼치려 했더니 이제 사신이 이르렀고 질병에 걸려서 초청에 응할 수 없음을 알았다.

    말과 생각이 멀리 떨어져 있어 근심만 더할 뿐이다. 날씨가 따뜻하고 화창하므로 나아서 회복되었으리라 생각한다. 지금 경에게 물들인 비단 500필과 흰비단 2500필을 보내니 꼭 받아주기 바란다.”

    당 현종은 성덕왕을 친구로 삼고 싶었던 모양이다. 당 태종과 신라 태종의 극적인 만남을 재현하고 싶었겠지만 신라 태종 때처럼 급박한 처지가 아닌 신라에서 국왕의 당나라 방문 같은 위험을 무릅쓸 리 없어 이융기와 김융기의 극적인 상봉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당 현종이 신라 성덕왕을 만나서 우의를 다지고자 했던 것은 단순히 우정 때문만은 아니었다.

    일찍이 신라와 당의 연합세력에 의해 고구려와 백제, 일본의 연합세력이 무너져서 고구려와 백제의 옛 땅이 당과 신라에 의해 분할되었었다. 그런데 그 동안 고구려 옛 땅에서 발해가 일어나 그 대부분의 영토를 회복하고 나서 당나라를 넘보게 되고, 일본은 고구려와 백제의 피란민들을 상당히 흡수하여 국력이 강대해지자 수군세력을 재정비하여 신라 침공을 준비하니 국제기류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었다.

    이를 감지한 당 현종은 신라와 동맹관계를 더욱 굳건히 다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여 성덕왕을 초청하였을 것이다. 성덕왕도 이를 몰랐을 리 없다. 그러기에 더욱 신라를 떠나 당나라로 여행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어떻든 이러한 우려는 적중하여 이해 4월에 일본은 병선(兵船) 300척을 동원하여 바다를 건너 신라의 동쪽 해변으로 대거 침공해 들어왔다. 이에 성덕왕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대군을 출동시켜 일거에 격퇴시켰다. 그만큼 신라는 국력이 튼튼하였다. 그리고 전시체제로 돌입하여 31년(732) 12월에는 각간 김사공(金思恭)과 이찬 김정종(金貞宗), 김윤충(金允忠), 김사인(金思仁)을 각각 장군으로 임명하였다.

    신라가 이렇게 외침에 대비하고 있을 때 마침 발해는 당나라를 침공하였다. 성덕왕 32년(733) 7월의 일이었다. 발해가 수군을 발동하여 산동반도 등주를 함락한 것이다. 이에 당 현종은 마침 숙위하러 와 있던 태복원외경(太僕員外卿) 김사란(金思蘭)을 급히 신라로 돌려보내 성덕왕에게 개부의동삼사영해군사(開府儀同三司寧海軍師)의 직위를 보태주면서 발해 남쪽을 공격해 달라고 부탁한다.

    신라는 가을걷이가 끝난 다음 군대를 출동시켰으나 북쪽에 눈이 많이 와서 길이 막히고 병사들이 추위 때문에 많이 얼어죽었다는 핑계로 곧 회군하고 만다. 신라는 적극적으로 발해 공격에 나설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배후를 공격해올 일본이 더욱 심각한 근심거리였다.

    그러나 당나라의 신뢰를 외면해서도 안 되므로 성덕왕은 조카 김지렴(金志廉)을 숙위왕자로 보내면서 작은 말 4필, 개 3마리, 금 500냥, 은 2000냥, 베 60필, 우황 20량, 인삼 200근, 두발 100량, 바다표범 가죽 16장을 선물로 보낸다.

    그러자 당 현종은 김지렴에게 홍려소경(鴻少卿)의 벼슬을 내린다. 이때 교대해 돌아가는 숙위왕자 김충신(金忠信)은 좌령군위원외장군(左令軍衛員外將軍)의 자격으로 당 현종에게 표문을 올려 전해에 현종이 성덕왕에게 영해군대사(寧海軍大使)의 직함을 내려 제해권을 위임하였으니 자신에게 그 부사(副使)의 직함을 내려주면 발해를 제압하겠노라고 큰소리친다.

    이에 현종은 그의 청을 들어주니 이때부터 신라는 당으로부터 제해권 장악을 공식 인정받게 된다. 그러자 당 현종은 발해와의 관계에서 신라의 지위를 분명히 해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던 듯 성덕왕 34년(735) 1월에 사신으로 온 김의충(金義忠)이 2월에 돌아가게 되자 그 편에 패강(浿江, 대동강) 이남의 땅을 신라에게 내려준다는 칙서를 들려 보낸다.

    이미 태종 무열왕 김춘추가 진덕여왕 2년(648)에 당 태종을 만나 받아낸 약속이었는데 이제야 그 약속이행을 공식적으로 보장받게 된 것이다.

    신라는 문무왕 8년(668)에 삼국통일을 이룩하고 나서 당에게 바로 이 약속의 이행을 촉구했었다. 그러나 영토확장의 야심이 컸던 당 고종은 도리어 신라까지 자국 영토에 편입시키려는 야욕을 보여 문무왕은 재위기간 내내 당군을 물리치는 일에 심혈을 기울여 끝내 당군을 한반도 밖으로 쫓아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 조정은 백제와 고구려 옛 땅의 신라 점유를 끝내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당 현종이 자진해서 공식 인정해 주었으니 신라로서는 67년 동안 풀지 못했던 숙원을 해결한 셈이었다. 발해의 성장으로 인한 국제적인 이해관계의 변화가 이와 같은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그러나 이는 거저 얻어진 것이 아니었다. 성덕왕의 통치 능력과 외교 수완이 거둬들인 결실이라고 보아야 한다.

    어떻든 이 사건은 성덕왕의 치적을 더욱 빛나게 하는 일이었다. 이에 성덕왕은 다음해인 35년(736) 6월에 사신을 보내 당 현종에게 감사의 뜻을 표하고 패강 일대의 점유를 확실히 하기 위해 이찬 김윤충, 김사인, 김영술(金英述) 등으로 하여금 평양과 우두주(牛頭州, 춘천) 2주의 지세를 살펴보고 오게 한다.

    그런데 이런 경사를 하늘이 시기하는 듯 다음해인 성덕왕 36년(737) 2월에 성덕왕이 불과 48세 정도의 나이로 갑자기 돌아가고 만다.

    왕실 내외척의 권력 다툼과 모반

    성덕왕이 돌아가자 불과 17세밖에 안 된 태자 승경(承慶, 721년경∼742년)이 왕위에 오르니 이가 효성왕(孝成王, 재위 737∼742년)이다. 효성왕이 즉위하자 이찬 김정종(金貞宗)이 상대등(上大等, 국무총리)이 되고, 이찬 김의충(金義忠)이 중시(中侍, 총무처 장관)가 되는데 김의충은 김순정의 아들로 효성왕에게는 외가의 당숙에 해당되는 인물이었던 듯하다. 그가 모후 소덕왕후와 사촌형제간이기 때문이다.

    성덕왕 생존시에는 성덕왕이 중심을 잡고 집권 내·외척 가문을 모두 왕실에 충성하도록 유도하였지만, 어린 태자가 왕위에 오르자 집권가문들 사이에서는 다시 세력다툼이 일기 시작했던 듯하다.

    분명히 효소왕 즉위시에 이미 왕비가 있어서 2년(738) 2월에 당나라에서 사신을 보내 왕을 책봉할 때 왕비 박(朴)씨도 함께 책봉하고 있는데, 3년(739) 3월에 이찬 김순원(金順元)의 딸인 혜명(惠明)을 맞아들여 왕비로 삼았다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순원의 딸이라면 효성왕의 친이모이다. 그렇다면 왕비 박씨를 출궁시켰다고 보아야 한다. 외가인 김순원 집안에서 저지른 일일 것이다. 이해 정월에 중시 김의충이 죽어서 김신충(金信忠)이 대신했다 했으니 이 둘은 형제간이거나 4촌형제간일 듯하고, 김의충의 죽음은 자연사가 아니라 효성왕의 재혼과 관련된 비명횡사일 가능성이 크다.

    그러고 나서 두 달이 지난 5월에는 이제 17세가 된 효성왕의 한배 동생인 김헌영(金憲英, 723∼765년)을 태자로 삼는다. 이제 겨우 19세가 된 청년왕이 재혼했는데 불과 2개월 후에 그 17세 된 아우를 태자로 삼았다는 사실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이미 이해 2월에 김헌영에게 파진찬(波珍, 제4관등)의 중책을 맡겨 놓고 있었다. 그렇다면 집권 귀족들이 효성왕에게서 미래의 희망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그 사실은 그 다음 효성왕 4년(746) 3월에 당나라에서 사신을 보내 왕비 김씨를 책봉했다는 기록과, 7월에 비단옷 입은 여자가 예교(隸橋) 밑에서 나와 조정을 비방했다는 내용, 8월에 일어난 파진찬 김영종(金永宗)의 모반복주(謀叛伏誅; 반란을 꾀하려다 잡혀 죽음) 사건으로 대강 짐작이 가능하다.

    김영종의 모반복주 사건을 ‘삼국사기(三國史記)’ 권9 효성왕 본기 4년조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보다 앞서 영종의 따님이 후궁으로 들어왔는데 왕이 몹시 그를 사랑하여 은혜 깊어감이 날로 심해졌다. 왕비가 질투하여 친족들과 함께 모의하고 이를 죽이니, 영종이 왕비의 종당(宗黨; 종족과 그 당여)을 원망하여 이로 인해 반란을 일으켰다.”

    결국 외척들간의 세력다툼이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이에 효성왕의 외가 집안에서 외척으로서 실권을 놓치지 않기 위해 왕비 박씨를 출궁시키고 후궁 김씨까지 죽여버린 것이다. 그리고 효성왕이 국왕의 자질이 없다고 생각하여 그 아우인 김헌영을 바로 태자로 책봉하여 외척으로서의 대권을 지속적으로 보장받으려 했던 듯하다. 이런 상황이니 효성왕이 왕위를 오래 부지할 수 없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결국 효성왕 6년(742) 5월에 효성왕은 22세 정도의 나이로 돌아가고 마는데 자연사가 아닐 가능성이 더욱 크다. 당연히 왕제인 태자 김헌영이 즉위하니 이가 경덕왕(재위 742∼765년)이다. 그런데 경덕왕은 이미 김순원의 아우인 김순정(金順貞)의 딸을 태자비로 맞아들이고 있었다. 곧 절세미인이었던 수로부인의 사위가 되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김순원, 김순정 형제 가문의 적극적인 비호 아래 상식 밖의 상황에서 태자로 책봉될 수 있었다.

    그러나 경덕왕은 효성왕과 달리 상당히 과단성 있고 총명한 인물이었던 듯 2년(743) 4월에 서불한(舒弗邯, 제1관등, 이벌찬 또는 각간이라고도 함) 김의충의 딸을 새 왕비로 맞아들이고 김순정의 딸인 삼모(三毛)부인을 출궁시키는 과감성을 보여 집권세력들의 기를 꺾어놓는다. 감히 외가인 김순원, 김순정 집안을 정면 공격하여 왕권의 절대성을 과시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현명하게 전왕비인 삼모부인의 조카딸에 해당하는 김의충의 딸을 계비로 선택하였으니 김순정 집안에서 결사적으로 대항할 리는 없었다. 여기서 경덕왕은 오히려 김순원, 김순정 형제의 혈손들과 그 종당으로 이루어진 집권세력들을 친위세력으로 끌어들여 성덕왕대에 다져놓은 튼튼한 기반을 이용해 통일신라 문화의 황금기인 불국시대의 화려한 꽃을 피워내게 된다.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鐘)

    우리는 그 현상을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국보 29호 (도판 10)에서 확인해볼 수 있다. 은 형식을 그대로 계승하여 신라 범종 양식의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

    우선 항아리 모양의 원통형 종신(鐘身)에 종 머리와 종 주둥이를 휘감아 죄는 국모란(菊牡丹) 덩굴무늬띠(종래 寶相唐草文이라는 추상적인 용어를 썼으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이런 명칭이 좋을 듯함)가 새겨져 있다. 그리고 종신의 어깨에는 유곽(乳廓)이라 부르는 4개의 네모진 구역을 만들었고, 그 안에 매(枚)라고 부르던 젖꼭지를 연꽃 9송이로 상징하여 각기 돋을새김해 놓았다(도판 11).

    또 이 종신의 좌우 측면에 4명의 주악천상(奏樂天像)을 새긴 것에 반해 은 4명의 헌향천인상(獻香天人像)(도판 12)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는 종명(鐘銘)과 종기(鐘記)를 향해 좌우에서 향 공양을 올리는 모습이다. 이 역시 하늘에서 꽃구름을 타고 내려오는 모습으로 천의자락이 모두 허공을 향해 나부껴 오르고 있다.

    국모란 덩굴무늬 형태의 꽃구름은 크고 작은 세 줄기로 천인을 감싸 허공에 떠오르게 하였다. 천인은 큰 줄기의 꽃구름에서 피어난 모란꽃같이 생긴 연꽃 위에 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데 명문을 바라본 채 두 손으로 연화향로를 받쳐들고 있다. 이목구비(耳目口鼻)가 물크러져서 얼굴 표정은 알 수 없으나 향 공양을 올리는 간절한 마음이 전신에서 배어 나온다.

    종신의 앞뒤 허리 아래쪽에 당좌(撞座)가 하나씩 마련되어 있는데 연꽃을 모란꽃처럼 변형시킨 것이다. 꽃잎은 모란꽃과 같은데 씨방에는 9개의 연밥이 표현되어 있다. 꽃잎은 8개이다. 의 당좌는 꽃술과 씨방을 갖춘 겹연꽃 한 송이가 구슬무늬띠로 안팎을 두른 인동무늬띠로 둘러져 있는 모습인데, 에서는 인동무늬띠가 사라진 대신 꽃잎 장식이 훨씬 복잡해져 있다(도판 13).

    고사리 머리장식이 켜켜로 쌓아 올려져 겹꽃임을 나타내고 있다. 이 역시 처럼 종신에서 가장 배부른 부위에 새겨져 있다. 입 가장자리를 두른 국모란 덩굴무늬 장식띠는 8모를 이루는 곡선에 의해 8등분되어 있는데 모서리마다 홑잎 연꽃이 새겨져 구획을 분명히 나눠 놓고 있으며 아래위는 구슬무늬띠로 마감하였다(도판 14).

    종머리를 두른 띠 역시 국모란 덩굴무늬를 가득 새겨 넣었고 꽃 장식이 더욱 풍부하고 화려하여 겹모란꽃을 보는 듯하다. 아래는 구슬무늬띠로 마감하였으나 위로 천판(天板)과 연결되는 부위는 다만 두 줄의 선만을 둘러놓고 있다.

    용통(甬筒)과 용뉴(도판 15)는 의 의장(意匠)을 그대로 계승하였다. 연꽃잎을 아래위로 마주 붙여 한 마디를 이루게 한 표면장식이 근본적으로 같은 의장인데, 의 연꽃잎 마디 사이가 벌어져 장구통을 연상시키는 것에 반해 의 연꽃잎 마디는 아래위 꽃잎이 서로 밑바닥을 마주대고 있다.

    연꽃잎 표면 장식도 쪽이 훨씬 복잡해져서 꽃술이 구슬처럼 튀어나온 들국화꽃 한 송이를 국화 잎새가 좌우에서 감싸고 있는 것과 같은 복잡한 구조이다. 의 경우는 다만 꽃잎 중앙에 고사리 무늬가 새겨져 있을 뿐이었다. 마디 사이는 이 훨씬 짧아졌다. 이 한 마디 반으로 용통 전체를 꾸민 데 반해 은 세 마디 반으로 꾸며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에서는 마디 사이에 인동무늬와 대형 국화꽃 무늬를 널찍널찍하게 배치했는데 에서는 꽃잎이 짧고 꽃술이 큰 국화꽃 무늬만을 좁은 띠 사이에 꽉 차게 돌려 꾸미고 있다.

    용뉴는 역시 포뢰 한 마리가 천판 위에 달라붙어 머리를 땅에 박고 뒷발로 힘을 주면서 용통을 힘겹게 짊어지고 있는 모습이다. 그래서 휘어져 올라간 등줄기가 걸쇠로 되었는데 종신이 커져서 무게를 지탱하기 위해 그랬는지 머리와 배 부분의 밀착 부위가 더욱 넓고 몸통의 살집도 더 좋다. 그리고 용통 앞 굽은 등줄기 위에는 여의주(如意珠)라고 생각되는 구슬 하나가 불꽃에 휩싸여 올려져 있다.

    천판에 머리를 박고, 있는 대로 입을 벌린 포뢰의 사실적인 표현은 고래의 공격을 받고 고통에 못 이겨 울부짖는 모습 그대로이다. 천판의 바깥 둘레에는 연꽃잎을 둘러 꾸몄는데, 연꽃잎 표면에는 역시 국화꽃잎으로 둘러싸인 들국화 무늬를 매 장 새겨 꾸몄다.

    의 종신 좌우에는 성덕대왕신종명(聖德大王神鍾銘)이 기(記) 부분과 사(詞) 부분 둘로 나뉘어 각각 돋을새김으로 새겨져 있고, 그 좌우로는 헌향천인이 향로를 들고 헌향공양하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이는 한림랑(翰林郞) 김필오(金弼奧)가 짓고 한림대(翰林臺) 서생(書生) 김백환(金)이 쓴 것이다. 그중 한 부분만 옮겨 성덕왕이 어떤 인물이었는지 밝혀보자.

    “엎드려 생각건대 성덕대왕은 덕이 산하(山河)와 같아서 그와 같이 높고 이름은 해와 달과 가지런할 만큼 높이 걸려 있다. 충성스럽고 어진 이를 등용하여 세속을 어루만지며 예악(禮樂)을 숭상하여 풍습을 바로잡으니, 들에서는 근본인 농사에 힘쓰고 시장에서는 넘치는 물건이 없었다. 당시 풍속은 금과 옥을 싫어했고 대대로 문재(文才; 글 잘하는 재주)를 숭상하였다.

    내 자신이 신령스럽다 생각하지 않았고 마음에는 노인의 경계함이 있었다. 40여 년 나라에 임하여 정치에 힘썼으나 한번도 전쟁으로 백성을 놀라고 어지럽게 한 적이 없었으니 그런 까닭으로 사방의 이웃나라들이 만리 밖에서 손님으로 찾아와 오직 교화를 흠모하여 바라다보았을 뿐 일찍이 화살을 날리려고 엿보지는 않았었다.

    연(燕)나라(昭王)와 진(秦)나라(穆公)가 사람을 쓴 것이나 제(齊)나라와 진(晋)나라가 패권을 번갈아 차지한 것과 어찌 바퀴를 나란히 하고 고삐를 쌍으로 해서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사라쌍수에 눕는 시기(석가모니불은 두 그루의 사라나무 아래에서 열반에 들었음)는 헤아릴 수 없고 천추(千秋)의 밤은 길어지기 쉬운지라 돌아가신 이래 이미 34년이 되었다. 그 전에 아드님인 경덕대왕이 살아 있던 날 대업(大業)을 이어 지키며 모든 일을 살피고 어루만졌었다.

    그런데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어 해가 지날수록 그리움이 일어났고 뒤이어 아버지를 여의었으므로 대궐의 전각에 임하면 슬픔이 더하였다. 추모하는 정(情)이 더욱 처절해지고 혼령을 이익 되게 하려는 마음이 다시 간절해져서 삼가 동 12만근을 시주하여 한 길쯤 되는 종 하나를 주조하려 하였다. 그러나 뜻을 세워 성취하지 못하고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성덕왕이 어떤 임금이고 경덕왕이 왜 을 만들려 했는지를 밝혀주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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