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12월호

무너진 아메리카의 자존심

  • 이형삼 han@donga.com

    입력2006-07-24 11: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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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장 모범적인 민주국가'이자 첨단 과학기술 부국임을 자부하는 미국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을까.
    • 불씨를 빨리 제거하지 않으면 '플로리다 사태'는 국가적으로 커질 수도 있다.
    제43대 미국 대통령선거를 나흘 앞둔 11월3일, 기자는 플로리다주 오렌지 카운티 선거감독위원회를 방문했다. 오렌지 카운티의 빌 카울즈 선거감독관은 투표절차와 개표과정, 그리고 이번 선거에서 시범 실시된 인터넷 투표 등에 대해 상세한 설명을 들려줬다. 오렌지 카운티는 공화당과 민주당 어느 한쪽도 우세를 장담하지 못하던 접전지역. 엄정중립을 지켜야 할 선거감독관에겐 우문(愚問)이란 걸 알면서도 “당신은 누가 당선되기를 바라느냐”고 장난삼아 물었다. 카울즈 감독관은 지나가는 말처럼 이렇게 한 마디를 던지고 자리를 떴다.

    “고어든 부시든 상관없다. 누가 당선되든 제발 큰 표 차이로나 이겼으면 좋겠다. 플로리다 주법은 후보간 표차가 0.5% 이내일 경우 재검표하도록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럴 일이야 없겠지만 만약 재검표에 들어간다면 며칠밤을 새워야 할지 모른다….”

    노련한 선거전문가의 직감이었을까, 아니면 말이 씨가 된 것일까. 다른 곳도 아닌 바로 플로리다주에서 사상 초유의 대선 재검표 사태가 빚어진 것이다. 카울즈씨에겐 미안한 얘기지만, 덕분에 기자는 참으로 역사적인 순간을 현장에서 지켜보는 짜릿함을 맛봤다.



    ‘Too Close To Call’



    기자는 미국 국무부의 초청으로 21개국에서 온 22명의 언론인, 정치인들과 10월17일부터 약 4주간 미국의 대통령선거 전후상황을 둘러보는 프로그램에 참가했다. 수도 워싱턴D.C.를 비롯해 캘리포니아 플로리다 매사추세츠 등 정치적 비중이 높은 몇 개 주를 돌면서 정치인과 정당 관계자, 정치학자, 정치 컨설턴트, 언론인, 민간 정치활동기구 관계자, 선관위 간부, 그리고 다양한 집단과 계층의 유권자들을 만나 그들이 이번 선거를 보는 시각과 선거에 임하는 자세 등을 들어봄으로써 미국 정치·선거시스템의 윤곽을 파악하는 기회였다.

    투표는 11월7일 저녁 8시에 마감됐다. 예전 대통령 선거에서는 대개 투표가 끝난 뒤 한 시간쯤 지나면 승부의 향방이 드러났다. 뉴욕 플로리다 펜실베이니아 오하이오 등 대통령 선거인단 수가 많은 동부지역은 서부지역보다 3시간 이르기 때문에 서부지역의 투표가 채 끝나기도 전에 전국적인 결과를 예측할 수 있을 만큼의 개표가 이뤄지곤 했다. 그래서 서부인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의 공화당과 민주당지부는 이번에도 투표마감 직후인 8시30분과 9시(동부 시간으로는 11시30분과 자정)에 각각 당선축하파티를 갖기로 일정을 잡아놓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승부는 예측불허였다. 플로리다 펜실베이니아 위스콘신 테네시 아이오와 아칸소 워싱턴 뉴멕시코 등 경합지역은 물론, 당초 부시 후보의 우세지역으로 꼽혔던 오하이오 뉴햄프셔 네바다 애리조나, 고어 후보의 우세지역으로 점쳐졌던 미네소타 미시간 등지에서도 접전이 계속되면서 두 후보가 확보한 선거인단 수는 밤새 엎치락뒤치락을 거듭했다.

    가닥이 잡힌 것은 동부 시간으로 8일 새벽 2시 무렵. 접전이 펼쳐지던 플로리다에서 부시 후보가 1700여 표차로 승리, 한꺼번에 25명의 선거인단을 가져감으로써 그의 대통령 당선이 확정된 것으로 알려졌다. NBC, CNN 등은 ‘제43대 대통령 조지 W. 부시’라는 자막과 함께 부시 후보의 사진을 내보냈다. 화면을 반으로 나눠 왼쪽에는 텍사스주 오스틴의 주지사(부시가 주지사) 공관 앞에서 환호하는 부시 지지자들을, 오른쪽엔 궂은 비 뿌려대는 테네시주 내슈빌(고어의 고향)의 전쟁기념광장에서 잔뜩 풀죽은 모습으로 멍하니 서있는 고어 지지자들을 함께 보여주기도 했다.

    같은 시간 TV 홈쇼핑 채널에서는 부시의 얼굴이 새겨진 ‘부시 대통령 당선자 기념주화(Bush President-elect Coin)’를 판매하기 시작했다. 두 후보의 기념주화를 모두 만들어 놓고 결과를 기다렸을 게 뻔한데도 쇼핑 호스트들은 “정말 정확한 시점에 나왔군요” 어쩌고 하면서 능청을 떨었다. 얼마 후엔 고어가 부시에게 전화를 걸어 당선을 축하했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결과를 보고 나니 긴장이 풀렸던 것일까. 잠깐 눈을 붙였다 싶었는데, 눈을 떠보니 어느새 아침 7시였다. 습관적으로 TV를 틀었다. 순간 눈을 의심했다. 지난 밤을 꼬박 새운 개표방송 앵커들이 그때껏 카메라 앞을 떠나지 않고 있었고, 그 아래에는 ‘박빙의 승부(Too Close To Call)’라는 자막이 깔려 있었다. 재방송 아닌가 했지만 화면에 표시된 시각은 분명 현재 시각이었다. 이른 새벽 ‘부시 271, 고어 237’로 결판났던 선거인단 수는 ‘부시 246, 고어 260’으로 뒤집혀 있었다. 부시 품에 안겼던 플로리다가 푸드덕 날아가버렸던 것이다.

    11월8일은 두 후보 지지자 모두의 손에 땀을 쥐게 한 하루였다. 재검표 결과는 공식 발표되지 않았지만, AP통신은 플로리다주 67개 카운티의 재검표 비공식 집계를 시시각각 전했다. 두 후보의 표차는 계속 좁혀졌다.

    그런데 이 날 오후 팜비치 카운티 투표소에서 투표용지 시비가 일면서 하루 이틀이면 다시 윤곽을 드러낼 것으로 예상됐던 투표결과가 오리무중으로 빠져들었다. 전날 ‘부시 당선자 기념주화’를 팔던 홈쇼핑 채널에선 발 빠르게 고어의 기념주화를 부시의 기념주화와 한 세트로 묶어 ‘대선 박빙 기념주화(Presidential Election Too Close To Call Coins)’라는 이름으로 팔고 있었다.

    ‘나비’(butterfly ballot)라는 별명이 붙은 이 투표용지는 나비가 양 날개를 편 듯한 형태의 펀치카드인데, 왼쪽에는 위로부터 부시, 고어, 네이더 후보 등의 이름이 기재돼 있고, 오른쪽에는 뷰캐넌, 맥레이널즈 후보 등의 순으로 이름이 기재돼 있었다. 가운데는 지지후보를 표시할 기표 구멍이 세로로 나 있었다. 문제는 기표 구멍이 왼쪽 후보와 오른쪽 후보에게 번갈아 하나씩 배정돼 있었다는 점.

    이 때문에 왼쪽 날개의 위에서 두 번째에 이름이 명기된 고어후보의 기표구멍은 부시, 뷰캐넌에 이어 위에서 세 번째에 표시돼 있어 유권자들의 착각을 초래했다. 고어를 지지한 일부 유권자들이 위에서 두 번째 기표 구멍에 펀칭을 하는 바람에 개혁당의 뷰캐넌 후보에게 표를 준 것이다. 덕분에 플로리다의 다른 카운티에선 수십∼수백 표를 얻는 데 그쳤던 뷰캐넌이 팜비치 카운티에선 3407표를 얻는 진기록을 세웠다.

    가령 팜비치 카운티의 덜레이비치 선거구 주민들은 대부분 뉴욕과 뉴저지에서 이주해온 유태계 민주당 지지자들이다. 그런데 반유태주의자로 알려진 뷰캐넌이 이 선거구에서 47표를 얻었다. 덜레이비치 주민 로버트 로즌씨는 “나를 포함한 20명 이상의 주민이 기표구멍을 잘못 펀칭해 고어 대신 뷰캐넌에게 표를 준 것으로 확인됐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일부 주민은 뷰캐넌에게 기표한 투표용지를 투표함에 넣기 전에 자신이 잘못 기표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새 투표용지를 받아 다시 기표했지만, 상당수 주민들은 잘못 기표했다는 것을 알고서도 “당황해서”, 혹은 “창피해서” 이렇다 할 조치를 취하지 못하고 투표장을 나섰다고 한다. 팜비치 카운티의 한 관리는 “이곳에선 아라파트(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가 대통령후보로 나왔어도 뷰캐넌보다는 표를 많이 받았을 것”이라며 이 지역의 반뷰캐넌 정서를 귀띔했다.



    엉성한 투표관리

    팜비치에서 중소기업을 경영하는 메리 비탠코트씨는 “많은 유권자들이 처음엔 뷰캐넌을 찍었다가 실수를 깨닫고 다시 고어를 찍는 바람에 투표용지에 두 개의 구멍이 뚫려 무효표로 처리됐다”며 “투표를 마치고 나오니 몇몇 주민이 ‘고어 대신 뷰캐넌을 찍었다’며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고 말했다.

    웨스트팜비치에 사는 한 주부는 9일 저녁 CNN의 방담 프로그램에 출연, 투표 전 선관위에서 자신에게 발송한 투표안내서를 내보이며 “투표안내서와 실제 투표용지의 후보 이름과 기표구멍 위치가 완전히 다르다”며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재투표뿐”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플로리다주 카운티들은 대부분 펀치카드 방식과 광학스캐너 방식 투표방법 가운데 하나를 채택하고 있다. 67개 카운티 중 펀치카드 방식을 채택한 카운티는 27개. 유권자가 컴퓨터용 사인펜으로 투표용지의 공란을 메우고 이를 개표소의 스캐너가 읽도록 한 광학스캐너 방식에 비하면 펀치카드 방식은 시대에 뒤떨어진다는 지적이 많았다.

    ‘마이애미 해럴드’의 안드레스 비글루치 기자는 “플로리다주 카운티들은 지금껏 선거 때마다 수백, 수천 장의 투표용지를 무효처리해왔다. 두 명의 후보에게 동시에 기표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번 대선도 예외가 아니다. 펀치카드 방식을 채택한 팜비치에서 전체 투표수의 4%에 달하는 1만9000여 표의 무효표가 나왔다는 것은 그냥 지나칠 일이 아니다”고 우려했다. 더욱이 노인 인구가 많고 이민자가 급증하고 있는 플로리다주의 특성상 이 투표방식은 선거 때마다 비슷한 혼란을 초래하게 마련이라는 것.

    투표관리 면에서도 허술한 부문이 눈에 띄었다. 투표소는 대개 빈 사무실이나 차고 같은 허름한 공간에 엉성하게 마련됐고, 투표인명부와 투표용지를 관리하는 사람도 선관위에서 일용직으로 고용한 듯한 노인이나 동네 주부 2∼3명이 전부였다. 투표용지를 들고 이리저리 돌아다녀도 누구 하나 제지하지 않았다. 누군가 “기표를 잘못했다”며 새 투표용지를 덥석 집어가도 투표관리자들은 개의치 않는 표정이었다.

    국무부 프로그램에 함께 참가한 동료들과 함께 투표 당일 샌프란시스코의 몇몇 투표소를 둘러봤다. 워낙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투표가 치러지고 있기에 투표관리를 맡고 있던 주부에게 “투표가 끝나면 투표함은 어떻게 개표소로 수송하느냐”고 묻자 그녀는 “우리 남편이 저녁 때 쇼핑센터에 갈 텐데, 거기에서 개표소가 가까우니 가는 길에 내려놓으라고 했다”고 대답해 우리 일행을 아연실색케 했다.

    샌프란시스코 시청에 마련된 상황실에는 투표소를 찾은 유권자들의 항의전화 내용이 대형 모니터에 줄지어 띄워졌는데, ‘○○투표소-투표관리자가 없음’ ‘△△투표소-투표용지가 바닥났음’ ‘××투표소-전등이 켜지지 않음’…같은 한심한 내용이 태반이었다.

    이런 사정이라면 누군가 나쁜 마음을 먹고 작정하면 얼마든지 빈틈을 노릴 수 있을 듯했다. 의도적이지 않은 ‘실수’의 가능성은 더욱 다분해 보였다. 투표 다음날인 8일 오후 플로리다주 볼루시아 카운티 투표관리자의 자동차 뒷좌석에서 800여 장의 투표용지가 뒤늦게 발견된 것이 그 예다.

    기자와 함께 투표소를 둘러본 이탈리아 국회의원 다리오 파바넬로씨는 이렇게 소감을 털어놨다.

    “이탈리아의 투표소에선 자동소총으로 무장한 군인과 경찰이 경계를 선다. 유권자는 신분확인을 거쳐 투표소에 들어간 뒤 지정된 자리에 앉아 기다리다 선관위 관리가 호명하면 투표용지를 받아들고 기표소로 간다. 그 전에 투표용지에 손을 댔다간 난리가 난다. 기표를 마치면 투표함이 보관된 또다른 방에 들어가 투표용지를 넣고 나온다. 이 방도 출입이 엄격하게 제한된다. 투표를 마치고 자리로 돌아오면 관리가 ‘아무개씨께서 투표를 끝냈습니다’고 선언한다. 유권자는 그제야 투표소를 벗어나 자기 의지대로 행동할 수 있다. 투표가 끝나면 투표함은 경찰의 삼엄한 경계 속에 개표소로 호송된다.

    그렇듯 성역과도 같은 이탈리아 투표소에 비하면 미국의 투표소 분위기는 가위 충격적이다. 아니, 쇼핑센터 가는 길에 투표함을 내려놓는다니? 그 안에 적어도 몇천표가 들어 있을 텐데 사고라도 나면 어떻게 한단 말인가. 지금 부시와 고어가 겨우 몇백표를 놓고 싸우고들 있지 않나.”

    같은 날 같은 선거를 치르면서도 주마다, 그리고 카운티마다 투표용지가 다르고 투표방식과 개표방식이 제각각인데다 투·개표 과정도 느슨하다 보니 획일적이고 긴장된 선거 분위기에 익숙한 이방인의 눈에는 혼란스럽게 비칠 법도 했다.

    팜비치 카운티에서는 11월9일 재검표 결과 고어에게 751표, 부시에게 108표가 더해졌다. 두 후보가 이렇게 새로 얻은 표 가운데 절반 정도는 수작업 재검표가 아니라 단지 똑같은 투표용지를 똑같은 펀치카드 판독기에 다시 한번 집어넣은 결과 얻어진 것이었다. 그런데도 선관위 관리들은 “투표 전후에 기계를 시험했을 때는 제대로 작동했는데…”라고 말끝을 흐릴 뿐 누구도 정확한 원인을 설명하지 못했다.

    팜비치 카운티의 테레사 라포레 선거감독관은 “무효표 중 상당수는 기표구멍에 펀칭할 때 ‘SET’ 버튼 대신 ‘CLEAR’ 버튼을 누르는 바람에 구멍이 완전하게 뚫리지 않은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판독기가 같은 투표용지를 한번은 무효표로, 또 한번은 유효표로 읽었다는 것은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

    볼루시아 카운티에서는 개표 초기에 컴퓨터 디스크 에러로 고어가 얻은 표 가운데 1만6000표가 누락되고 부시에게는 수백표가 더해지는 사고가 생겨 개표작업이 몇시간 동안 중단됐다. 소프트웨어 회사 직원이 부랴부랴 현장으로 출동해 손상된 디스크를 복구하고서야 개표가 재개됐다.

    가장 모범적인 민주국가이자 첨단 과학기술과 정보통신 부국임을 자부하는 미국에서 어떻게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들이 일어날 수 있을까. 그나마 플로리다주는 재검표 사태로 온 언론의 관심이 집중됐기에 이런 일들이 세상에 알려졌을 것이다. 나머지 49개 주의 수천 개에 이르는 카운티에서 이와 비슷한 일들이 생기지 않았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 것인가. 이런 광경을 지켜보면서 “‘플로리다 사태’는 미국의 선거시스템은 물론, 이 나라 정치·사회적 기강이 흔들리고 있다는 방증”이라고 해석하는 이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시각에 대해 대만 차이나TV의 두나이웨이 기획제작부장은 “미국의 선거시스템이 우리에겐 문제투성이처럼 보이지만, 그럼에도 이런 ‘엉성한’ 시스템이 미국이라는 나라에선 지금껏 제 기능을 다해왔다는 사실을 간과해선 안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사회구성원들의 준법정신, 정직성, 성실성, 인내심, 참여의식, 상호신뢰, 정치인과 유권자의 여유와 아량, 탄탄한 커뮤니케이션 인프라 같은 긍정적인 요소들이 제도적, 기술적 허점을 보완함으로써 시스템의 취지를 제대로 구현해왔다는 얘기였다.

    사실 미국에서 선거에 참여한다는 것은 대단한 정성과 인내력을 요한다. 우리 선거에서처럼 일정 연령 이상이 되면 누구나 자동적으로 투표인명부에 기재되고, 임시공휴일로 지정된 선거일에 한가로이 투표소에 나가 투표용지의 후보자 이름 옆에 도장 하나 콕 찍고 나오는 것으로 끝나는 일이 아니다.

    미국에서는 18세 이상이 되어 투표권을 가진 사람도 실제로 투표에 참여하려면 선거일 한 달 전까지 주(州) 선관위에 특정 서식을 제출해 투표자 등록을 마쳐야 한다. 이 제도는 19세기 말에 복수투표 등 부정선거를 방지하기 위해 도입됐는데, 그 이면에는 이민자와 노동자들의 투표를 어렵게 하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한다. 선거를 한 달이나 앞둔 시점에 투표자 등록을 해야 한다는 것은 문자해독은 물론, 선거시스템과 정치 이슈에 대해서도 상당한 수준의 지식과 관심을 요구하는 일. 따라서 지금도 이 제도는 유색인종과 이민자, 저소득 근로자 등 소외계층의 선거 참여를 제한하는 요소로 작용한다.

    이 때문에 등록제도를 완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여러 차례 제기됐으나, 민주당의 주요 지지기반인 빈곤층과 소수계층, 저학력 유권자의 투표율 상승을 두려워한 공화당의 반대로 실현되지 못했다. 그러다가 클린턴의 민주당 정부 출범 후 운전면허증을 갱신할 때 자동차관리사무소에서 투표자 등록을 할 수 있게 하는 등 제도가 다소 완화됐으나, 아직도 소외계층의 선거 참여에는 걸림돌이 되고 있다.



    투표,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투표행위 자체도 간단치가 않다. 선거일은 공휴일이 아니기 때문에 직장인은 대부분 출근 전이나 점심시간, 퇴근 후에 투표소를 찾는다. 아니면 회사의 허락을 얻어 일과중에 잠깐 짬을 내 투표를 마치고 와야 한다.

    투표용지를 기입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다. 미국의 대선 투표용지는 가로 60cm, 세로 40cm쯤 된다. 신문 한 면보다 조금 더 크다. 통째로는 투표함에 들어가지 않기 때문에 세로로 3등분해 유권자에게 나눠준다. 대통령선거라고 대통령만 뽑는 게 아니다. 임기 2년의 하원의원 전원과 임기 6년인 상원의원의 3분의 1을 함께 뽑는다. 주(州) 의원과 보안관, 카운티 행정관 등도 함께 뽑는다.

    한 예로 플로리다주 세미뇰 카운티의 투표용지를 보자. 대통령, 부통령, 상원의원, 하원의원(2명), 주정부 회계국장, 주 교육국장, 주 상원의원(2명), 주 하원의원(5명), 카운티 순회법원 서기, 카운티 보안관, 카운티 행정관(3명) 등 기표해야 할 선출 공직자가 19명이나 된다. 주 대법원 판사 3명과 지구(地區) 항소법원 판사의 유임에 대한 의견도 묻는다.

    이와 함께 수정헌법안을 설명하면서 찬반 여부를 묻고 있고, 순회법원 판사와 카운티 법원 판사를 선출직에서 임명직으로 바꾸는 개정안, 자연환경 개선을 위한 공채발행에 대한 의사도 묻고 있다. 또한 카운티 내 알타몬테 스프링즈, 캐설베리, 록우드, 윈터 스프링즈 등 4개 도시 주민에게는 이들 도시와 관련된 주 헌장 수정안에 대한 찬반 여부와 시장 및 시 행정관 선출을 요구하고 있다. 기표해야 될 항목이 30여 개나 된다.

    캘리포니아주 지역의 투표용지도 이와 비슷했다. 선거일에 샌프란시스코의 710 투표소에서 만난 에밀리 게첼씨가 기표소에 들어갔다 나올 때까지의 시간을 재봤다. 정확하게 10분35초가 걸렸다. 기표소 커튼을 내리지 않아 그녀가 기표하는 광경을 지켜볼 수 있었는데, 마치 시험문제를 푸는 여학생처럼 골똘한 표정으로 펜끝을 깨물어가며 한 항목, 한 항목을 차근차근 메웠다. 투표를 마친 그녀에게 “투표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겠다”고 말을 걸었더니 “이젠 익숙해져서 괜찮다. 쉽든 어렵든 투표는 내 권리를 행사하는 기회기 때문에 며칠 전부터 신문과 투표안내서를 꼼꼼히 읽으며 준비했다”고 답했다.

    번거로운 등록절차와 투표방식이 투표율을 떨어뜨리는 주요 원인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72년 이후 미국 대선 투표율은 50∼55%대에 머물러 왔으며 96년에는 49.1%로 낮아지기도 했다. 이는 또 무효표를 늘리는 원인이 될 수도 있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이번 대선을 견학하러 왔다는 방글라데시 선관위원장 모하마드 사이드씨는 “우리나라에서도 무려 7500만 명이 하루에 선거를 치르지만, 이번과 같은 혼란이 빚어진 적은 없다”며 “미국의 선거는 너무 복잡한데다 투표용지에서 보듯 지나치게 많은 정보가 제공되는 게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는 “하지만 미국에서는 커뮤니케이션이 체계적으로 발달했기 때문에 이런 선거가 가능한 것 같다. 투표소를 찾은 유권자들이 잘 모르는 부분이 있으면 책을 뒤적여 가면서 열심히 투표하는 것이 인상적이었다”고 했다.

    플로리다 재검표 사태가 터지면서 선거인단(electoral college)을 통한 대통령 간접선거제도가 도마 위에 올랐지만, 사실 이 문제는 미국 대선이 가까워오면 늘 안줏거리가 되곤 하는 단골메뉴다. 고어의 경우처럼 전국 득표 수에서 앞서고도 선거인단 수에서 뒤져 대권을 위협받게 된 것은 1888년 클리블랜드가 해리슨에게 득표수에서 1%포인트 차이로 이기고도 대권을 내준 이래 처음 있는 일.

    11월8일 아침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은 “어제 선거에서 가장 많은 표를 얻은 후보가 대통령이 못될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은 공민교육을 받은 세대를 적잖이 혼란스럽게 만든다”고 비꼬았다.

    국민은 선거인단을 선출하고 선거인단이 대통령을 뽑는 미국의 대선 방식은 건국 초기에 ‘국회에서 대통령을 선출해야 한다’는 세력과 ‘국민의 직접투표로 대통령을 뽑아야 한다’는 세력 사이의 타협책으로 고안됐다. 양 극단세력 간에 힘의 균형을 유지하고, 인구가 많은 주들이 인구가 적은 주들의 권익을 침해하지 않게 하겠다는 의도가 담겨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교통수단이 열악하고 전국적인 정당조직을 갖추기 어렵던 당시 여건 때문에 지역후보들이 난립, 표를 분산시킬지도 모른다는 염려도 작용했다.

    각 주의 선거인단 수는 그 주의 하원의원 수(10년마다 인구 센서스를 토대로 결정)에 상원의원 수(2명)를 더한 것이다. 이에 따라 인구가 가장 많은 캘리포니아주에는 54명의 선거인단이 배정된 데 비해 버몬트 몬태나 델라웨어 같은 주의 선거인단은 3명에 불과하다.

    그런데 메인과 네브래스카 2개 주를 제외한 모든 주는 선거인단 투표(‘대통령선거’의 정확한 의미)에서 승자승 원칙(winner-take-all)을 채택하고 있다. 한 표라도 많이 얻은 당이 그 주의 선거인단 전체를 가져가는 것이다. 예컨대 캘리포니아에서 민주당이 51%, 공화당이 49%를 득표했다 해도 민주당이 선거인단 100%를 가져가는 것. 많은 미국인들은 이 대목에서 몇가지 의문을 제기한다. 전체 선거인단 538명 중 270명을 가져오면 대권을 거머쥘 수 있는데, 산술적으로 캘리포니아(54명) 뉴욕(33명) 텍사스(32명) 플로리다(25명) 등 선거인단 수가 많은 11개 주에서만 승리하면 된다. 11개 주에서만 이기면 나머지 39개 주에서 패배해도 대통령이 된다는 게 과연 연방주의의 정신에 맞는 것인가.

    또한 이번 선거에서 보듯 더 많은 지지를 얻은 후보가 더 적은 지지를 얻은 후보에게 무릎을 꿇는 것이 민주적이라고 할 수 있는가.

    가령 와이오밍의 선거인단 1명은 16만 명의 주민을 대표하지만(인구 48만 명에 선거인단 3명), 캘리포니아(인구 3200만 명에 선거인단 54명)의 선거인단 1명은 60만 명의 주민을 대표한다. 이것을 다수결의 원칙이라고 할 수 있는가.



    갈등의 조짐

    선거인단 제도가 제3당의 성장을 원천봉쇄한다는 비난도 만만치 않다. 92년 대선에서 로스 페로는 19%의 득표율을 올리며 약진했지만 단 한 명의 선거인단도 확보하지 못했다. 이번 대선에서 4% 가까운 표를 얻은 녹색당의 랠프 네이더는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이런 문제점이 있다고 국민 직선으로 대통령을 뽑자고 하면 덩치 작은 주들의 정치적 입지가 좁아질 수밖에 없다. 앞서 예로 든 것처럼 캘리포니아의 인구는 와이오밍의 67배나 되지만 선거인단 수는 18배에 지나지 않는다. 선거인단 제도 덕분에 와이오밍은 대선 과정에서 ‘모기소리’나마 낼 수 있는 것이다.

    플로리다의 정치성향은 매우 다채롭다. 뉴욕 등 미국 동부지역의 부유층 주민들이 은퇴후 편안하게 여생을 보내기 위해 플로리다 해안으로 모여들면서 이곳은 전통적으로 공화당 우세지역이었다. 하지만 중남미로부터의 히스패닉계 이민과 흑인 및 유태계 인구가 꾸준히 증가하면서 민주당의 지지기반도 성장을 거듭했다. 또한 최근에는 공화당이 사회보장 예산을 축소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공화당 지지층이던 고령 유권자들의 상당수가 민주당 지지로 돌아섰다. 그런가 하면 히스패닉계 중에서도 쿠바 출신들은 카스트로 정권에 비교적 유화적인 민주당보다는 공화당을 선호하고, 같은 기독교인이라도 개신교는 부시를, 침례교는 고어를 지지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지만 이런 스펙트럼이 심각한 갈등이나 분열로 불거지는 경우는 드물었다. 인종, 민족, 언어, 종교, 빈부, 직업의 다양성은 미국 사회의 공통적 특질이며, 비록 지지후보는 달라도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선거를 흥미진진한 축구경기쯤으로 여긴다. 그래서 일단 선거가 끝나면 지든 이기든 결과에 승복하고 다음 선거 때까지 정치를 잊고 산다.

    그러나 이번엔 사정이 달랐다. 재검표 논란이 가열되면서 이 지역 유권자들이 심각한 갈등을 빚으며 선거후유증을 앓고 있는 것이다. 거리로 쏟아져 나와 시위를 하는 사람들은 대개 양 후보 진영에서 동원한 이들이지만, 지나가다 시위에 동참한 자발적인 시민들도 적지 않았다.

    마이애미에 사는 쿠바 이민 엘바 가텔씨는 “모니카(르윈스키) 스캔들로 나라 망신을 시킨 것도 모자라서 또 이러는가. 민주당은 재검표(1차) 결과를 받아들여 국가의 위신을 세워야 한다”고 쏘아붙였다. 하지만 퇴직한 은행간부인 사우스 비치 주민 로버트 트락스씨는 “가장 중요한 것은 정확한 결과다. 이를 위해서는 수작업 재검표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반박했다.

    문제는 이런 갈등이 플로리다를 넘어 전국으로 번져갈 조짐이 보인다는 점. 이번 선거에서 부시와 고어에게 표를 던진 유권자들이 전국적으로도 지역, 인종, 학력, 민족, 연령, 소득에 따라 뚜렷하게 양분됐기 때문이다. 한 조사기관이 선거 당일 실시한 출구조사 결과 남성, 무직여성, 백인, 대졸 이상 학력소지자, 연수입 10만 달러 이상인 사람들 가운데 과반수가 부시를 지지했고, 여성, 직장여성, 흑인, 히스패닉, 고교 미졸업자, 연수입 3만 달러 이하인 사람들 중 다수가 고어를 지지한 것으로 밝혀졌다.

    ‘USA 투데이’는 “민주당과 공화당은 이번 선거에서도 자신들의 진부한 극단적 이미지를 공고히 했다. 민주당은 여전히 여성, 소수계층, 동성애자, 이민, 도시 거주자의 고향이었고, 공화당도 변함없이 남성, 신앙인, 시골 거주자, 총기 소지자, 모럴리스트의 지지를 받았다”고 보도했다.

    선거운동 과정에서 부시는 ‘온정적 보수주의자(Compassionate Conservative)’를, 고어는 ‘新민주당원(New Democrat)’을 자처하며 상대방의 영역까지 지지기반을 넓히려 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부시측이 유세기간에 배포한 사진에는 거의 항상 흑인이나 히스패닉계 어린이가 등장했다. 그러나 흑인 10명 가운데 9명이 고어에게 투표했다.

    지역적 편차는 특히 심했다. 대도시 주민의 71%가 고어에게 표를 준 반면 시골과 소도시 주민 10명 가운데 6명 정도가 부시를 지지했다. 그 중간지대인 교외지역에서는 두 후보가 표를 비슷하게 나눠 가지면서 이번 선거의 주요 격전장이 됐다. 공화당은 농촌지역인 서부와 남부, 그리고 중서부 대부분 지역을 휩쓸었고, 민주당은 대도시가 몰려 있는 북동부, 서해안, 그리고 중서부의 일부 산업지대를 장악했다. 마치 우리네 ‘영남당’과 ‘호남당’처럼 민주당과 공화당은 ‘도시당’과 ‘시골당’으로 전락, 전국정당의 명성이 무색케 된 것이다. 양 당이 그나마 확보한 지지기반을 유지하기 위해 각각 도시 거주자와 시골 거주자의 이익 보호에 주력할 경우 지역감정의 골은 더 깊어질 전망.

    범(凡) 진보진영 내부의 반목도 격화될 것 같다. 민주당과 녹색당의 경우가 그 예. 녹색당을 이끈 랠프 네이더 후보는 민주당측의 끈질긴 사퇴 요구를 뿌리치고 끝까지 대선을 치러냈다.

    후보들의 유세가 한창이던 10월말 경 매사추세츠주 앰허스트에서 만난 녹색당 사무총장 데니슨 울프씨에게 “녹색당의 의도는 좋지만, 결국 이번 선거에서 민주당 지지층을 잠식해 부시를 돕는 결과가 되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발끈한 낯빛으로 네이더, 고어, 부시의 공약을 비교한 팸플릿을 흔들며 “이걸 읽어보라. 우리의 철학은 고어의 그것과 판이하다. 가령 고어가 입버릇처럼 자랑하는 정부예산 흑자도 사회복지예산을 깎은 결과이므로 새빨간 거짓말이다. 우리를 지지하는 유권자와 고어를 지지하는 유권자는 전혀 다르다”고 주장했다.

    네이더는 이번 선거에서 4%에 미치지 못하는 득표율을 기록, 연방보조금을 타내는 데는 실패했다(5% 득표시 지급). 그러나 그가 플로리다주에서 얻은 표는 약 9만7000표. 득표율은 2%에 불과했지만, 겨우 수백표가 뒤져 대권을 내줄 위기에 처한 고어에겐 천문학적인 숫자다.

    그런데 플로리다주에서 실시된 출구조사에 따르면 네이더에게 표를 준 유권자의 절반 정도가 ‘네이더가 선거에 나오지 않았다면 누구를 찍었겠느냐’는 질문에 ‘고어’라고 답했다. 이런 숫자는 다른 주에서도 비슷했다. 네이더는 고어에게 천추의 한을 안긴 셈이다. 이 때문에 고어의 지지자 중에는 부시보다 네이더를 더 미워하는 이도 적지 않다.

    이런 상황에 재검표 논쟁과 당선자 확정, 법적 시비를 신속하고도 합리적인 방법으로 매듭짓지 못할 경우 플로리다의 ‘국지적 대리전’은 일파만파의 ‘전면전’으로 비화돼 국가적 통합을 위협할 가능성이 높다. 설령 그렇게까지 악화되진 않는다 해도 변방의 일개 카운티에서 빚어진, 어찌 보면 극히 미미한 개표사고 하나가 온나라를 뒤흔들며 정치·사회적 분열을 몰고 올 수 있었다는 것은 ‘휴화산’과도 같은 미국 사회 갈등구조의 취약성을 극명하게 드러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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