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상의 세계가 현실로 실현되는 것을 진보라고 말할 수 있다면, 박물관은 그런 상상을 마음껏 펼쳐볼 수 있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문화의 세기’에 가장 어울리는 문화공간이다. 따라서 좋은 박물관을 하나 갖는 것은 국가의 밝은 장래에 주춧돌을 하나 놓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이런 부정적인 이미지는 매우 정적인 유물이나 작품을 보관, 전시하는 박물관의 특성상 어쩔 수 없는 결과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세계의 이름있는 박물관, 미술관을 다니다 보면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어떻게 꾸미고 운영하느냐에 따라 박물관은 도서관·극장·공연장·미술관을 한데 합쳐놓은 것 같은 구실을 해내는 복합문화공간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바로 이와 같은 문화공간을 바라보고, 운영하고, 이용하는 데서부터 발상의 전환이 시작되어야, 말로 하는 ‘문화의 세기’가 아니라 명실상부한 문화의 세기를 이룩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게 된다.
문화란 말이 이렇게 시대의 화두가 됐다는 것은 산업사회를 이끌어왔던 물질이 한계를 맞았다는 것과, 그것을 혁파하고 새로운 비전을 갖기 위해서는 감동과 상상력을 키울 수 있는, 다시 말해서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문화에 대한 세뇌가 필요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새로운 아이디어나 기발한 상상은 머리를 붙들고 짜낸다고 해서 그냥 나오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렇다고 어느 날 갑자기 떠오르는 것은 더더욱 아니고. 결국 그건 자신의 경험 속에서 꺼낼 수밖에 없다. 꺼내긴 꺼내되, 시대 상황에 맞게 재해석의 과정을 거쳐서.
앞날을 밝힐 수 있는 비전과 새로운 가치는 늘 그렇게 얻었다. 씨앗을 뿌려야 싹이 돋고 꽃을 피울 수 있듯이 아이디어라는 것도 언젠가 자신이 경험했던 것, 아니면 어디서 보았거나 들었던 것에서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중국 역사에 자주 등장했던 ‘혁명’이란 것도 따지고 보면 주공(周公)의 질서로 복귀하려는 노력이었으며, 유럽 역사에 나타났던 르네상스도 고대 그리스·로마세계의 재해석을 통한 만남, 바로 그것이었던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과거의 유물을 보존, 전시하는 박물관을 어떻게 꾸미고 또 이용할 것인가를 각자의 위치에서 한번 생각해보는 것은 어떨까. 이를 위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까 하여 그 동안 박물관을 다녔던 이야기를 털어놓을까 한다.
박물관은 상상력을 극대화시키는 공간
고대 그리스에서 학예·시·음악 등을 관장하는 여신 ‘뮤즈’에게 제사를 드렸던 제단이나 신전을 일컫던 ‘무제이온(Museion)’에서 유래되었다는 영어의 ‘뮤지엄’은 우리말로 박물관으로 번역된다. 서양에선 미술품만 전시하는 미술관도 박물관이라는 말을 쓰지만(예: 흔히 MoMA라고 부르는 뉴욕의 현대미술관 Museum of Mordern Art), 미술관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이탈리아 피렌체의 우피치미술관(Galleria degli Uffizi)처럼 갤러리라고 쓰는 경우도 많다. 우피치미술관의 전시공간이 갤러리라고 부르는 회랑 구조로 돼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편의상 둘 다 박물관의 개념 속에 포함시키려 한다.
그런데 내가 놀랍게 생각하는 것은 동양 3국에서 쓰는 박물관이라는 번역 용어가 박물관의 기능과 양상을 너무나 잘 표현해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내가 그 동안 둘러본 세계 각국의 박물관들은 하나같이 깊고 다양한 세계를 보여주면서 새로운 세계에 눈뜨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내가 박물관다운 박물관을 처음 찾은 것은 첫 유럽여행 길에 나섰던 81년, 런던의 자연사박물관이었다. 그날 이후 내 인생이 바뀌기 시작했으니 그걸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고백하건대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자연사박물관이 어떤 곳인지 몰랐다. 그때가 마침 박물관 창설 100주년이라면서 특별행사가 열리고 있다는 신문기사를 보고 호기심에서 찾았을 뿐이었다. 그런데 거기서 나는 그만 압도되고 말았다.
웅장한 로마네스크 건물, 중앙 홀을 주인처럼 차지하고서 방문객을 맞아주는 거대한 공룡의 뼈, 태초의 지구 생김새와 그후 계속된 생명 진화의 역사, 지구상에 나타났다가 사라진 수많은 동물과 식물의 표본, 그리고 그들의 핏줄과 살갗, 뼈마디가 그대로 드러나 있는 화석, 신기하기 짝이 없는 돌멩이들, 인간의 사고작용과 꿈꾸는 과정을 비롯하여 인간에게서 일어나는 다양한 현상을 시청각적으로 보여주는 인간관(館), 달에서 가져왔다는 운석….
나는 이런 것들을 보면서 세상이 얼마나 넓은지, 시간의 세계는 얼마나 장구한지, 인간의 가능성은 또 얼마나 무한한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 순간 자신이 우물 안 개구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저렇게 넓은 세상을 두고 코앞에 닥친 작은 것들에 왜 그토록 버둥거렸는지를 후회했던 나는, 문명과 역사가 시작된 원점에 서서 인간이 도대체 무엇인지, 그들이 그 동안 이룩해 놓은 것들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구명해 보자고 결심했다.
그날 이후 나는 어디를 가건 그곳에 박물관이나 미술관이 있으면 거의 빠지지 않고 찾았으며, 그러다 보니 지금에 와선 역사여행가로, 또 문명비평가라는 이름으로 일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인생의 전기라는 것도 아주 우연히 찾아올 수도 있는 거구나 생각한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자연사박물관이란 동물과 식물, 광물, 지질, 화석, 천체 그리고 인류의 과거와 현재에 관한 각종 표본을 수집, 전시, 연구하는 기관으로서 식물학, 동물학, 고생물학, 의학, 화학, 지질학, 광물학, 물리학, 천문학, 지리학, 유전공학, 철학, 고고학, 문화인류학 등을 연구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찾아야 할 그런 학술문화공간이다. 이를 다시 내 나름대로 정의를 내린다면 ‘지구 생명의 역사를 한눈에 보여주는 곳’ 정도라고나 할까. 지구를 하나의 생명체로 생각하고는, 그가 태어나고, 지진 화산폭발 융기 습곡 침식 퇴적 태풍 해류 운행 등의 모든 활동과 그 과정에서 키워내는 동식물의 세계를 빠짐 없이 보여주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 대형 자연사박물관들은 저마다 DNA연구실을 두고 수천만 년 전의 화석에서 추출한 DNA와 현존하는 생물종의 그것을 비교해 진화과정을 연구하는 작업까지 행하고 있어 머지 않아 스필버그의 영화 ‘쥐라기공원’에서 보여주었던 장면들을 과학적 근거에 입각하여 박물관에 전시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상상의 세계가 현실로 실현되는 것을 진보라고 말할 수 있다면, 박물관은 그런 상상을 마음껏 펼쳐볼 수 있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문화의 세기에 가장 어울리는 문화공간이라 할 것이다.
문화제국주의의 상징, 대영 박물관
자연사박물관이 있는 런던의 사우스 켄싱턴 지구는 한마디로 박물관 단지다. 일대에 100만 점이 넘는 방대한 양의 암석, 광물, 화석과 지질의 형성과정을 보여주는 지질박물관, 세계 각국에서 수집한 각 시대의 미술공예품, 생활용구, 민속자료, 악기류, 건축 디테일 등을 집대성해 놓은 빅토리아 알버트박물관, 과학기술에 관한 영국 최고의 박물관으로서 특히 제임스 와트의 증기기관 등 산업혁명기의 여러 발명품을 모아놓은 과학박물관 등 대형 박물관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최고급 공연장인 알버트홀과 세계 각국의 다양한 지도와 탐험 기록들을 보관하고 있는 영국왕립지리학회까지 있어 지적 호기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며칠을 보낸다 해도 시간 가는 줄 모를, 그런 곳이다.
그런데 이 박물관들은 모두 입장료를 받지 않는다. 프랑스나 독일의 박물관은 우리와는 달리 입장료가 만만찮은데, 이 점을 생각한다면 영국의 무료입장제는 나처럼 주머니가 가벼운 여행자에겐 참으로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무료 입장의 전통은 영국의 거의 대부분 박물관에 공통되는 사항으로, 그 연원은 대영박물관의 창립과정에서 찾을 수 있다.
의사이자 전직 외교관이었고, 또 대단한 컬렉터였던 한스 슬로안 경이 평생에 걸쳐 수집한 필사본 메달 서적 악기 그림 지도 드로잉 등 7만여 점을 국가에 바친 것이 계기가 되어 1753년에 설립된 대영박물관은 설립 초기에 이미 기증자 슬로안 경의 뜻에 따라 ‘모든 수집품은 연구자와 관심을 가진 사람들에게 언제나 공개돼야 한다’는 원칙을 정했기 때문이다. 그게 다른 박물관에도 적용되어 무료 입장의 전통이 수립된 것이다.
물론 뜻있는 사람들로부터 기부는 받는다. 실제로 그런 돈이 박물관의 수장품을 늘리고 새로 꾸미는 데 요긴하게 쓰이고 있다. 이번에 개관한(11월8일) 대영박물관 내의 한국전시관도 국제교류재단과 우리 기업의 기부금으로 지은 것이다.
그렇게 설립된 대영박물관은 그 후 영국 정부가 관리 운영해 왔는데, 그 과정에 외국으로부터 거의 빼앗다시피 하여 손에 넣은 유물들이 생겨났고, 그리하여 대영박물관은 ‘문화제국주의의 온상’이란 좋지 않은 말도 듣게 됐다. 그중에도 그리스가 오스만제국의 지배하에 있던 1801∼1806년 사이 이스탄불 주재 외교관이었던 엘진(Elgin) 백작이 아테네 파르테논신전의 박공부분에서 떼어낸 대리석 조각, 소위 ‘엘진 마블’은 두고두고 이 박물관의 짐이 되고 있다.
지난 83년, 당시 그리스의 멜리나 메르쿠니 문화부 장관이 영국을 방문, “파르테논신전은 고대 그리스를 엿볼 수 있는 유일한 기념물로, 거기에 양각된 조각들을 탈취해간 행위는 사람의 몸에서 팔과 다리를 떼어간 것이나 다름없다. 19세기 초 몇 푼 안 되는 돈으로 반출한 것을 합법화하려는 것은 계략에 지나지 않는다”며 반환을 촉구한 이래 원래 소유국인 그리스가 박물관의 명품 중에 명품의 반환을 끈질기게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약탈 문화재의 원래 소유국 반환은 이미 국제법으로 정해진 것인데도 이게 지켜지지 않아 문제가 되고 있다. 그건 강제력이 갖추어지지 않아서인데, 그런 유물을 대거 보유하고 있는 영국과 프랑스 등은 “과거의 일은 과거의 일이다” “원래 소유국보다 우리가 더 잘 보존할 수 있다”는 이유를 들어 줄곧 거부하고 있다.
그래서 최근 다시금 우리의 관심사로 떠오른 외규장각 도서 반환 문제도 잘 풀리지 않고 있다. 외규장각 도서 반환의 경우, 그 열쇠를 쥐고 있는 것은 프랑스의 대통령이나 문화부장관 또는 관장이 아니라 ‘레기스터(registre)’라는 보존 담당 실무책임자다. 그들은 정치적 성향이 강한 대통령, 장관, 관장의 의견이 유물 보존원칙에 어긋난다고 생각하면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런데다 그들의 행정체계상 아무리 상부의 결정이라고 해도 해당 분야의 실무책임자인 레기스터의 사인이 없으면 아무것도 처결할 수 없는 구조니, 우리가 뭐라 해도 동종의 의궤와 맞교환해야 한다는, 지금과 같은 협상결과 이상을 얻기가 힘든 것이다. 비전문가이자 그때그때 여론이나 상황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대통령이나 장관이 ‘뚝딱’ 하면 문화고 과학이고 교육의 큰 줄기가 바뀌어버리고 마는 우리 나라와는 일의 처결방식이 전혀 다른 것이다. 전문가 집단이 장기적 안목을 갖고 일을 추진해 나간다는 그들의 시스템을 이해하지 못한 채 늘 고위직 인사를 만나 차나 마시고 함께 사진 찍는 방식으로는 그들과 백날 협상해도 얻을 게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들의 요구를 그대로 들어주라는 뜻은 아니다. 그와 같은 틀을 깨부술 수 있는 새로운 전략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외규장각 도서를 편찬한 것은 조상들의 일이었지만, 그것을 보존하고 활용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몫이다. 시한을 미리 정해 놓고 협상을 하다가 우리 뜻대로 되지 않는다며 적당히 타협할 것이 아니라 장기적 안목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바람직한지 냉정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 과정에 우리와 같은 처지인 그리스나 이집트 등과 공동전선을 펴는 일도 고려해 볼 수 있으리라.
그렇다고 영국과 프랑스가 남의 나라에서 발굴한 유물을 항상 자기 나라로 가져간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었는데, 그건 국가적 차원이 아니라 고대문명에 대한 열정으로 몸을 바쳤던 개인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들은 자신이 참여한 발굴 현장에 유물을 남김으로써 원래 소유국에 세계적 규모의 박물관을 세울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해 주었고, 그리하여 그들 스스로 역사를 만들어낸 주역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중 한 사람이, 카이로를 찾은 사람이라면 반드시 한번은 들러야 하는 이집트박물관의 초대관장을 지냈던 프랑스인 오귀스트 마리에트(1821∼1881)다. 이집트인들은 그가 세운 박물관 앞뜰에다 그의 등신대 동상을 만들고, 그 아래에 시신을 묻을 만큼 그를 존경한다. 그렇다고 마리에트가 처음부터 발굴품을 이집트에 남겨야 한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그 역시 초기에는 발굴되는 대로 모조리 루브르박물관으로 보냈다. 그러다가 이집트에 수에즈운하가 건설된다는 소식을 듣고는 생각을 바꾼 것이었다. 운하 공사가 시작되면 이집트의 유물이 대거 유럽으로 흘러나갈 것이 불을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그는 당시 이집트의 최고 지도자 사이드 태수를 찾아가 유물의 해외 유출을 막지 않으면 이집트가 살아남기 힘들며, 그것을 위해서는 유물을 보관할 수 있는 박물관을 건립해야 한다고 제안했던 것이다. 태수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마리에트를 초대 고고국장으로 임명했다. 마리에트는 곧바로 이집트에서 발굴된 유물은 반드시 이집트에 보존시켜야 한다는 ‘현지보존 원칙’을 만방에 알렸다.
일제는 이 땅의 문화재를 그렇게 파헤치고 가져갔지만 이와 같은 원칙을 천명하고 실천한 인물이 끝내 나오지 않았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마리에트를 만난 이집트는 그나마 다행이었다고 할 것이다. 일본의 경우 그와 비슷한 인물을 굳이 찾는다면 우리 민속문화에 관심을 가졌던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가 고작인데, 그 역시 자신의 수집품을 일본으로 가져가 자신이 세운 ‘일본민예관’에 전시했다.
죽은 날까지 자신의 원칙을 지켰던 마리에트에게는 이런 에피소드가 있다. 그는 1867년 파리에서 개최된 만국박람회장에 이집트 전시관을 열었다. 물론 대성황이었고, 프랑스의 왕비까지 방문했다. 그런데 문제는 왕비의 등장 때문에 일어났다. 그녀가 전시장을 둘러보다 욕심이 생겨 사이드 태수에게 “전시품 중 일부를 프랑스에 두고 갈 수 없냐”고 물었던 것이다. 대답이 궁했던 태수는 “그 대답은 이 분야에선 내 상관인 마리에트가 결정할 사항”이라며 살짝 떠넘겼다.
왕비는 똑같은 질문을 마리에트에게 던졌다. 그는 주저 없이 “결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라며 단호하게 거절했던 것이다. 순간 왕비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고, 장내 분위기도 싸늘해졌다. 이 일이 있고 난 뒤로 마리에트는 고국 프랑스를 다시 찾지 않았다. 카이로에서 세상을 떠났고 또 거기에 묻혔다.
마리에트의 이런 현지보존 원칙 덕분에 이집트가 보유하게 된 최고의 보물은 1921년 영국인 하워드 카터가 룩소르의 ‘왕들의 골짜기’에서 몇 년에 걸친 작업 끝에 힘들게 찾아낸 투탕카멘 왕의 미라와 황금마스크다. 석관과 미라, 황금마스크, 벽화 등 모든 것이 무덤 속에 원형 그대로 있어 고대 이집트인들이 그토록 매달렸던 영생 추구의 과정을 고스란히 알 수 있게 됐고, 그래서 세계 고고학 사상 최고의 성과란 평가를 받기도 했다. 귀중한 유물이 많은 이집트박물관이지만 특히 이 황금마스크가 전시돼 있는 2층 전시실은 늘 사람들로 붐비고, 카메라 셔터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관심분야에 집중해야
다른 한 사람은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미노스왕의 궁전이자 괴물 미노타우로스가 갇혀 있었다는 크노소스궁전 유적을 발굴한 영국인 아더 에반스. 그는 트로이와 미케네 유적을 발굴하여 세계를 놀라게 했던 독일인 하인리히 슐리만이 발굴하려다가 땅 주인이 값을 높게 부르는 바람에 포기하고 말았던 케팔라 언덕의 땅을 사들여서 문제의 궁전 유적을 발굴해냈다. 그런데도 그는 거기서 출토한 다량의 귀중한 유물을 모두 그리스 문화재청에 기증했다.
그게 기반이 되어 크레타의 주도(州都) 이라클리온에 박물관이 세워졌다. 여기에 전시돼 있는, 크노소스궁전에서 나온 각종 프레스코 벽화, 황금의 뿔을 가진 황소 머리조각, 양 가슴을 노출한 채 양 손에 뱀을 쥐고 있는 여신상, 제사 때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대형 철제 솥, 성물(聖物)이었던 양날 도끼, 45개 신성문자가 앞뒷면에 새겨진 파이스토스 원판 등을 이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유적과 함께 보게 된다면 에게 바다를 무대로 태어난 고대문명이 얼마나 화려하고 수준 높았는가를 확인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들이 남겨놓은 신화의 세계를 나름대로 그려보는 재미도 만끽할 수가 있다.
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 그런데 이런 유물들이 영국으로 건너갔을 경우를 상상해보라. 그러므로 유물은 유적 가까운 곳에 보존돼야 하는 것이다.
지구의 숨결을 들려주는 자연사박물관과는 달리 대영박물관은 인간의 손때와 상상력의 세계가 어떠한지를 잘 보여준다. 그런데 대영박물관의 전시물량은 너무나 방대하다. 그러므로 누구도 그 전부를 볼 수는 없다. 설령 그럴 수 있다 하더라도 그걸 모두 머리 속에 담을 수는 없는 일이다. 따라서 욕심을 버리고 자신이 관심을 가진 분야나 지역을 중점적으로 보면서 나머지는 스쳐 지나가는 식으로 볼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1시간도 채 안 되어 관람을 끝내는 것은 곤란하다. 아무리 공짜라도.
여기서 내가 오랜 시간을 보낸 곳은 아시리아실과 이집트실, 그리고 메소포타미아실이다. 그건 내 관심분야여서다. 아시리아와의 인연은 중학시절에 시작됐다. 그때 ‘앗시리아’란 별명을 가진 분이 세계사 선생님이었다.
나이가 지긋했던 선생님은 수업 진도와는 상관없이 시간마다 아시리아 이야기를 꺼냈고, 또 ‘아’에다 얼마나 힘을 주어 말했던지 ‘앗’ 소리가 그만 귀에 박히고 말았다. 앗시리아 선생님이 아시리아의 강대함과 그들의 용맹함을 우리에게 들려주었기에 아시리아는 세계사에서 차지하는 비중 이상으로 내 머리에 각인됐고, 어느새 아시리아에 대한 묘한 향수 같은 것을 갖게 되었는데, 대영박물관의 아시리아실에서 왕궁을 지키던 거대한 ‘사람 얼굴에 커다란 날개를 단 황소상’(‘라마스’라 부름)과 ‘아슈르바니팔 대왕의 사자사냥도’ 부조를 실물로 보았으니 나는 발걸음을 쉬 옮길 수가 없었던 것이다. 거대하면서도 사실적인 조각과 부조들을 보면서 나는 만약 앗시리아 선생님이 그걸 직접 보았더라면 우리에게 어떤 말씀을 들려주었을까를 떠올려보기도 했다.
왕이 쏜 화살을 맞아 발버둥치는 사자는 매우 사실적이긴 하나 익살스런 구석도 있어 웃음을 짓게 했다. 그런데 라마스는 현실세계에 존재하는 동물이 아니라 상상하여 그린 것이라, 왜 저런 것을 만들어냈을까 하는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다. 자세히 보니 얼굴과 앞가슴, 두 팔은 사람의 그것이었는데, 양쪽에 커다란 독수리 날개를 두 개 달고 있었고, 몸통과 다리는 황소의 그것이었다. 또 복부에는 용의 비늘이 새겨져 있었다. 네 가지 동물이 한 몸을 이루고 있는 이 혼성동물은 결국은 육·해·공군을 한데 합쳐 놓은 것으로, 그들은 하늘과 땅, 물 속으로부터 오는 적과 재앙을 모두 막아내겠다는 뜻에서 그런 수호신상을 만든 것이었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독일 페르가몬 박물관의 유래
이들 아시리아 유물은 19세기 중반 영국의 오스틴 헨리 레이야드가 발굴한 것으로 그가 직접 영국으로 옮겨왔다. 어릴 때부터 여행기를 즐겨 읽고 모험심과 낭만적인 기질을 기르면서 ‘서양 지혜의 발상지’인 유프라테스 강 너머의 땅으로 가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했던 그는 옛 아시리아의 폐허를 발굴하고자 이라크의 고도 모술로 달려갔고, 드디어 1845년, 모술 인근 니느베의 폐허에서 왕궁 유적과 거대한 라마스를 파냄으로써 유럽 사회에 아시리아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급기야 프랑스까지 아시리아 발굴에 뛰어들게 만들었다. 당시 모술 주재 프랑스 부영사 에밀 보타가 레이야드가 미처 손을 대지 못하고 있던 코르사바드에서 왕궁 정문을 지키고 있던 32t에 이르는 라마스와 벽부조를 발굴하여 루브르박물관에 선사했던 것이다.
당시 아시아, 아프리카, 태평양 등지에서 더 많은 땅을 차지하려고 각축전을 벌이던 영국과 프랑스는 유물 발굴에서도 접전을 벌였는데, 그것은 땅을 더 갖는 것보다 더 큰 자긍심을 자기네 국민들에게 안겨줄 수 있다고 생각해서였다. 이런 문화제국주의 대열에 뒤늦게 통일을 이룬 독일(당시 이름은 프러시아)까지 끼여들었다. 삼파전이 된 것이다. 독일은 영국의 3C(Cairo, Capetown, Calcutta)정책에 3B(Berlin, Byzantium, Baghdad)정책으로 대응하는 등 적극적인 해외진출을 꾀했으며, 오리엔트학회를 통해 오리엔트지역에서의 발굴작업도 병행 추진했다. 그리하여 로베르트 콜데바이는 그때까지 성서와 헤로도투스의 ‘역사’ 속에서만 살아 있던 바벨탑의 도시 바빌론에서 성스러운 동물 조각들이 박혀 있는 거대하고도 화려한 이시타르 성문을 발굴하여 바빌론의 실재를 증명했을 뿐 아니라 독일의 문화적 자존심도 한껏 높였다. 그는 그걸 해체하여 베를린의 페르가몬박물관으로 옮겼다.
이 박물관은 에게 바다와 가까운 소아시아의 고도 페르가몬에 있던 거대한 신전의 제단을 몽땅 옮겨온 독일이 그걸 전시하기 위해 특별히 세운 박물관이다. 1871년 독일 통일 후 새로운 수도가 된 베를린을 파리나 런던, 로마와 어깨를 겨룰 수 있는 문화도시로 만들고, 신생 후발국가 독일이 유럽에서 행세깨나 하려면 그럴 듯한 그리스 조각 작품 몇 점쯤은 갖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그렇게 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무척 장엄한 느낌을 주는 하얀 대리석 신전 제단과, 빛나는 청색 바탕에 금방이라도 달려나올 것 같은 황소와 성수(聖獸) 시르시, 그리고 식물 문양이 다채롭게 펼쳐져 있는 이시타르 성문을 모셔놓은 페르가몬박물관은 독일 제국주의의 문화적 자긍심의 상징이기도 했다.
슈프레강을 끼고 있는 이 박물관 옆에는 유럽 여러 나라의 회화작품을 전시하는 국립미술관과 국립미술관 구관, 이집트 미술 전문인 보데미술관이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런던의 사우스 켄싱턴처럼 박물관 단지인데, 그래서 이름도 ‘박물관 섬’이다.
베를린에는 또 하나의 세계적 박물관인 베를린 민족박물관이 있다. 중남미와 서아시아, 동남아, 태평양 지역 원주민들의 삶을 보여주는 유물과 생활용구들을 집중 전시하고 있는데, 전시방식이 개방적이라 관람객은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전시물을 접할 수 있고, 꽤 자세한 안내문도 유물 곁에 비치해 놓아 웬만한 궁금증은 그 자리에서 해결할 수 있다.
이런 민족학 박물관으로 유명한 곳은 오사카의 세계민족학박물관이다. 1975년 오사카 만국박람회에 전시된 작품을 기초로 세워진 것이라 세계적인 행사를 개최하고 그 부산물로 박물관을 건립한 것이었다. 우리는 행사를 치르고 나면 모든 것을 짐으로 생각하는데 일본인들은 그걸 세계적인 박물관으로 만들었다. 대단하지 않은가. 우리는 지금도 국제니 세계니 하는 이름이 들어간 행사를 열심히 치르고 있는데, 과문한 탓인지 이렇게 사후문제까지 고려한 예는 아직 들어보지 못했다. DDD라는 새로운 전화방식을 처음으로 선보인 오사카 만국박람회는 행사기간 내내 풍성한 화젯거리를 만들어내 긴장을 고조시키면서 즐거움과 배울 것을 동시에 선사했다. 살아 있는 박물관이 어떤 것인가를 몸소 보여주었던 것이다.
아시리아실 다음으로 자주 찾았던 메소포타미아실은 20세기 초, 이라크 남부의 우르(Ur)란 곳에서 4500년 전의 신전 유적인 지구라트를 발굴한 레오나르도 울리가, 그 인근 왕의 무덤에서 발굴해낸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어 인류 최초의 문명인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실체를 접할 수 있는 아주 귀한 곳이다. 우르는 미국의 고고학자 사무엘 크래머가 ‘역사는 수메르에서 시작됐다’라고 한 그 수메르왕국의 도읍지였기에 그 방에 전시된 유물 하나하나는 역사의 고고 소리를 담고 있는 것이었다.
그중에서도 내가 흥미를 갖고 오랫동안 살펴보았던 것은 ‘우르의 깃발’이다. 거기에는 사람들의 용모와 복장, 무기, 수레, 가축 등이 그려져 있어 그 시대의 삶을 엿볼 수 있었다. 우리는 비가시적인 신화를 통해서도 상상의 나래를 펴기도 하지만 가시적인 그림을 보고서도 얼마든지 상상력을 발휘할 수가 있다. 4500년 전이라면 단군 할아버지께서 조선을 세우기 직전인데, 그렇다면 우리 할아버지는 과연 어떤 복장을 하고 계셨을까, 그 시대 사람들은 무얼 먹었고, 그 많은 시간은 또 무얼 하면서 보냈던 것일까. 관념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들을 현실 속에 투영시켜 보는 일은 엔돌핀을 자극한다. 크지는 않았지만 우르의 깃발은 많은 것을 생각나게 했기에 나는 잠시나마 그런 것들을 그려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정작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현장인 이라크는 지금 외국인의 발길이 끊기고, 이집트박물관과 함께 중동의 2대 박물관으로 꼽히는 바그다드의 이라크박물관은 문이 잠겨 있다. 서방측의 공습에 대비하여 유물들을 소개(疏開)시켰기 때문이다. 89년에 찾았을 때에는 수메르, 바빌로니아, 아시리아, 페르시아, 이슬람 시대의 유물들이 별도의 방에 모셔져 인류문명의 심오함을 얘기해 주었는데, 96년에는 지하의 음습한 곳으로 유배되어 거기엔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이라크 문화재청 보존전문가 토니 박사는 언제쯤 다시 볼 수 있느냐는 질문에 “지금으로서는 거기에 답변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대답만 들려주었다.
전쟁으로 박물관의 유물이 소개된 경우로는 2차 세계대전 때 러시아의 에르미타지 박물관과 6·25 때 우리의 중앙박물관도 있었지만, 내 눈으로 직접 본 것은 이것이 처음이라 안타깝고 서글펐다.
대영박물관의 ‘1000년 개조계획’
레닌그라드(지금의 상트 페테르부르크)는 1941년부터 44년까지 무려 900일 동안 나치군에 포위돼 수많은 사람이 추위와 배고픔으로 쓰러졌다. 박물관 역시 언제 공습을 당할지 모르는 처지였다. 레닌그라드 시민들은 그런 악조건 속에서도 ‘인류문화유산을 지키자(Save the Humanity)’며 소개시킬 것은 소개시키는 등 갖은 방법을 다 동원하여 에르미타지를 사수했다.
궁전 한 곳에 자신의 은둔처(Ermitage, 영어로는 Hermitage)를 마련하고 취향에 맞는 예술품들을 수집함으로써 박물관의 기초를 닦은 에카테리나 여제 자신이 독일 태생인데다 로마노프 왕조가 전통적으로 서구지향적이었던 탓에 에르미타지는 서유럽의 미술품들을 많이 소장하고 있다. 또 한때 중앙아시아 초원지대를 주름잡았던 스키타이인들이 남긴 황금 유물 컬렉션도 대단하다. 그건 박물관 속의 박물관이라 할 수 있는 ‘골드 룸’에 모셔 놓았다.
그런데 기원전 4∼7세기 스키타이인들이 사용했다는 황금 사슴상과 황금 빗 등은 어쩐 일인지 경주지역에서 출토된 황금 유물들과 닮은 점이 많았다. 그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골드 룸에는 이외에도 목걸이, 귀고리, 반지, 팔찌, 브로치, 허리에 차는 시계, 보석함 등 금, 백금, 다이아몬드, 사파이어, 에메랄드, 루비 등으로 만들어진 진귀한 보물들이 전시되고 있었다. 하나같이 여자들의 마음을 뺏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세계의 유명한 박물관은 이집트 유물 한두 점은 소장하고 있기 마련이라 나는 그것들을 심심찮게 보았는데도, 웬일인지 그것들은 늘 새롭게 다가왔다. 대영박물관 이집트실을 가득 채우고 있는 목관과 미라, 인물석상, 비석들도 그랬다. 나는 여기서 이집트 마니아들을 보았다. 그들은 별로 유명하지 않은, 그래서 사람들의 발길이 뜸한 작품을 앞에 놓고 거기에 나타난 미학과 상징 등을 제 나름대로 해석해내는 것이었는데, ‘이건 말이야’ 하면서 동행한 친구들에게 내뱉는 코멘트를 듣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범상치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건 나에게도 큰 도움이 되었다.
오는 2003년이면 대영박물관은 개관 250주년을 맞게 된다. 지금 그 준비에 한창이다. 그런데 그들은 우리처럼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서둘지 않는다. 90년대 초부터 그 준비를 시작했다는 이 프로젝트의 제목은 ‘1000년 개조계획(The Great Court)’. 그 목표는 자꾸만 늘어나는 관람객들을 모두 받아들이면서 그들에게 또 최상의 관람 편의를 베풀자는 데 있다.
그러자면 우선 시급한 것은 확장. 그래서 카를 마르크스가 ‘자본론’을 집필했던 대영도서관의 원형 열람실을 세인트 판크라스의 새 건물로 옮기고 그 자리에 교육센터와 시민광장을 만들고, 그 위를 투명 지붕으로 덮어 쾌적한 공간을 마련하겠다는 것이다. 편의시설에는 테라스와 레스토랑, 만남의 광장이 포함되며, 관람객의 절반을 차지하는 외국인들을 위한 다양한 언어서비스 프로그램도 준비중이다.
이러한 대영박물관의 대변신은 82년부터 시작된 루브르박물관의 ‘그랑 루브르(위대한 루브르)’ 계획에 자극받은 것이다. 200년도 넘는 루브르의 역사를 통틀어 1981년 9월 권좌에 오른 미테랑 대통령이 집권 5개월 만에 내놓은 그랑 루브르만큼 야심에 찬 변신 시도는 일찍이 없었다.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박물관을 센 강변에 건설하겠다는 그랑 루브르는 3단계로 이루어졌다. 그 1단계는 89년에 준공된 유리 피라미드의 건설이었고, 2단계는 93년의 리슐리외관(館) 완공, 제일 마지막은 99년에 있은 ‘이집트 신관’ 건설이었다. ‘문화는 곧 건축’이라며 이런 일들을 대대적으로 벌인 것을 보면 미테랑은 고대이집트의 파라오를 닮고자 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아무튼 그랑 루브르는 ‘전통과 현대의 만남’ 그리고 ‘관람자에게 최대의 편의’를 지향했다. 그것은 이집트문명을 상징하는 피라미드와 현대기술의 성과인 투명 유리의 결합인 유리 피라미드로 가시화됐다.
이렇게 꾸며진 루브르는 리슐리외, 슐리, 드농 등 세 개의 커다란 전시관으로 나뉜다. 이들은 각기 시대와 지역, 장르를 달리하기에 각자의 취향과 선호에 따라 관람순서와 소요시간을 정하는 것이 좋다. 루브르의 명물로는 잔잔한 미소를 띠고 있는 미켈란젤로의 ‘모나리자’와 오른쪽 다리에 무게를 싣고 왼쪽은 프리 스탠딩 자세를 취하면서 팔이 없어 몸통에 시선을 집중케 하는 ‘밀로의 비너스’, 교황의 권위를 깔아뭉개려는 나폴레옹의 의도가 교묘하게 드러나 있는 다비드의 ‘나폴레옹의 대관식’, 인간의 자유와 여성의 해방을 그려 후일 프랑스 여성의 상징인 마르안느의 모델이 된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등을 꼽을 수 있다.
박물관의 도시, 파리
그러나 이 루브르에는 1848년 이후 제작된 작품은 없다. 원래는 이곳에 있었으나 한때 기차역으로 쓰였던 오르세 역이 86년 미술관으로 개조되자 그곳으로 옮겨졌기 때문이다. 오르세는 기차역이었던 관계로 천장이 높고 벽은 없다. 지붕도 유리로 되어 있어 아주 밝다. 여기에 전시된 작품들은 미묘하게 변하는 빛을 그렸던 모네, 마네, 르누아르, 고흐, 세잔 등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들이 주류를 이룬다.
인상파는 세련된 도시적 감성의 예술이다. 산업화가 이룩한 근대적 풍모의 생활양식을 즐겨 다룬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자연을 보는 그들의 눈이, 그리고 다루는 방법이 감각적이고 주관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감미롭고 경쾌하면서도 고조된 정감과 긴장이 그들의 화폭을 지배하고 있다. 1층에는 밀레의 ‘만종’과 ‘이삭줍기’, 마네의 ‘피리 부는 소년’, 쿠르베의 ‘아틀리에’ 등이, 2층에는 제3공화국 시대의 작품이, 3층에는 고갱의 ‘타히티의 여인’을 비롯해 마네, 세잔, 르누아르, 고흐 등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이 전시되고 있다.
파리는 예술의 도시라는 이름에 걸맞게 미술관, 박물관이 정말 많다. 그중에서도 유럽 최대의 동양 미술 컬렉션인 기메박물관, 전위예술을 주로 소개하는 파격적인 외관의 퐁피두센터, ‘생각하는 사람’ ‘칼레의 시민’ ‘지옥의 문’ 등 로댕의 대표작을 모아놓은 로댕미술관, 클로드 모네의 대작 ‘수련’과 함께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을 보여주는 오랑주리미술관, 1900∼1960년까지의 피카소 작품만 모아놓은 피카소미술관 등은 조금이라도 시간의 여유가 있다면 찾아보아도 좋을 그런 곳이다.
20세기 최고의 화가라면 누구나 피카소를 꼽을 텐데, 마치 이를 증명하기라도 하듯 그의 작품만 전시하는 미술관이 4군데나 된다. 파리의 피카소미술관, 바르셀로나의 피카소미술관, 남불(南佛) 앙티브의 피카소미술관, 발로리스의 국립 피카소도자박물관이 그것이다. 이중 남불에 있는 두 개의 미술관은 그가 말년에 심취했던 도자 작품들이 대종을 이루는 데 반해 파리와 바르셀로나는 그의 작품을 연대기적으로 정리해 보여주어 그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어떤 세계를, 어떻게 그렸는지를 알 수 있게 해준다.
나는 파리의 미술관에서 그림 옆에 피카소의 사진을 붙여놓은 것을 보았다. 작품 제작을 전후하여 찍은 것으로 알 만한 사람들과 여행지에서 찍은 것이었다. 그걸 읽다 보니 그가 누구와 교분을 나누었고 또 어디를 여행했는지 알 수 있었다. 순간, 그가 그렇게 다양한 세계를 접할 수 있었기에 변신과 변신을 거듭하며 대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스페인의 화가 후안 미로도 말했듯이 그림의 테크닉은 노력하기에 따라 10년이면 마스터할 수가 있고 또 가르쳐주는 선생은 언제든지 구할 수 있지만, 그렇게 터득한 테크닉으로 무엇을 그릴 것인지를 가르쳐주는 사람은 없다. 오직 자신의 노력으로 찾을 뿐, 왜냐하면 그건 창조적 작업이기 때문에. 그러므로 예술의 세계에서 가장 중요하고도 본질적인 것은 수단인 테크닉이 아니라 내용인 아이디어인 것이다. 피카소는 시인, 철학자, 음악가, 화가, 소설가, 무용가 등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과 교분을 나누며 자극을 받고, 낯선 곳을 찾아다니며 새로운 세계에 눈뜨고, 그렇게 해서 얻은 것들을 자신의 내면 속에 침전시켜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기능 위주의 우리 예술 교육방식은 다시 한 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기능만 가르쳐서는 ‘학원 선생’은 키울 수 있을지 몰라도 ‘예술가’는 키울 수 없다.
피카소의 대표작은 ‘게르니카’다. 검은 색 바탕의 대형 캔버스에 할 말을 다 못했는지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쓰러져 있는 사람, 죽은 아이를 부둥켜안고 목이 빠져라 흐느껴 우는 어머니, 옷이 벗겨지건 말건 아랑곳하지 않고 거기서 빠져나가려는 여인, 이제 어떻게 할 수 없다며 ‘만세’ 부르는 사람, 쓰러지며 울부짖는 말, 근엄한 표정을 지은 황소….
‘게르니카’는 평온과 정상이 아니라 파괴된 일상에 대한 분노와 절규, 절망, 죽음을 상징한다. 그것은 1937년 4월26일 스페인의 한 작은 마을 게르니카에 퍼부은 나치 독일의 폭격에 대한 한 예술가의 분노와 항의의 표현이긴 하지만 그것은 1만 권의 스페인 내란 역사서보다 더 심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예술의 위대성을 ‘게르니카’가 증명했던 것이다.
1937년 파리 만국박람회의 스페인관에 전시되면서 세상에 알려진 게르니카는 그 직후 가진 유럽 순회전시회가 끝나자 곧바로 뉴욕 현대미술관으로 옮겨졌다. 화가가 ‘스페인에 공화정이 들어설 때까지’라는 조건으로 그걸 맡겼기 때문이다. 81년 프랑코가 죽자 작품은 마드리드의 프라도박물관으로 되돌아왔고, 마치 파리의 오르세처럼 현대미술만 전시하는 소피아왕비미술관이 92년 마드리드에 문을 열면서 그곳으로 이전돼 지금에 이르고 있다. 소피아왕비미술관에는 ‘게르니카’ 원작뿐 아니라 습작과 드로잉도 함께 전시하고 있어 대작의 출산과정을 더듬어볼 수 있으며 후안 미로, 살바도르 달리 등 스페인 현대미술가들의 작품도 볼 수 있다.
‘게르니카’를 보고 마드리드를 떠난 나는 바로셀로나를 거쳐 마르세유에서 아프리카 민속가면들을 집중 전시하고 있는 인류학박물관을 관람했다. 아프리카는 순수했다. 그러면서도 역동적이었다. 프랑스인들이 즐겨 말하는 ‘에랑 비탈(생의 활력)’을 느낄 수 있었다. 하긴 젊은 시절 피카소도 파리의 인류학박물관을 매일 출근하다시피 하면서 아프리카 민속가면들을 그렸다고 하니까. 내가 느꼈다고 해서 특기할 일은 아니다.
나는 다시 니스로 향했다. 그곳은 문명의 이름으로 걸쳤던 가면들을 모두 벗어버린 듯 사람들은 벌거숭이에 가까웠다. 그리고 ‘꼬뜨다쥐르’라 부르는 푸른 바다 위로는 파도가 넘실댔다. 내 눈에는 그게 꿈과 낭만의 조각 같아 보였다. 니스는 그렇게 부담 없는 도시였다. 여기에는 멋진 미술관들이 곳곳에 박혀 있어 시간을 죽여야만 했다.
남불은 19세기에 들어 유럽의 예술가들을 불러들이기 시작했다. 물가가 싼데다 광선이 투명하다고 소문이 나서였다. 샤갈, 마티스, 르누아르, 피카소, 모딜리아니, 시냑, 콜레뜨 등의 화가와 장 콕토, 사르트르, 보부아르, D.H. 로렌스 등의 문학가, 소피아 로렌, 그레타 가르보, 카트린 드뇌브 등의 영화배우들이 이곳을 찾았다. 자연 그들의 작품이 이곳에 남게 됐고, 이를 소장한 세계적인 미술관들이 들어서게 된 것이다.
먼저 찾은 것은 샤갈미술관(정식 명칭은 국립샤갈성서메시지미술관). 보라색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앞뜰을 지나 미술관 문을 여는 순간, 갑자기 무중력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화면을 채우고 있는 새, 꽃, 천사들은 어느 한곳에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부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아무런 무게를 느낄 수 없었다. 시간도 멈춘 듯했다. 에덴동산 이전의 세계를 보는 듯했기 때문이었다. 샤갈의 그림은 그렇게 신비로웠다.
샤갈은 1887년 러시아의 한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1931년 이스라엘을 여행하고는 잇따라 시리아와 이집트도 여행하게 됐는데, 그때 성서의 분위기를 체득했다. 그것을 토대로 1954년부터 13년 동안 17점의 연작 ‘성서의 메시지’를 제작했다. 천지창조, 다윗, 노아, 모세, 이삭 등의 인물을 환상적인 기법으로 그렸던 것이다. 그는 그 그림들을 67년 프랑스 정부에 기증했고, 프랑스는 그 답례로 니스에 이 미술관을 지어 73년 샤갈의 86회 생일날에 맞춰 개관했다. 살아 있는 화가에게 바쳐진 프랑스 유일의 미술관이었다.
‘색채의 반란’. 이것은 샤갈미술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있는 마티스미술관이 내게 던져준 인상이다. 마티스만큼 색채의 천재가 있었던가. 넓은 전시공간에 포진해 있는 그림, 도자, 포스터 등에 구사된 색채 감각은 신기에 가까웠다. 그는 색채와 색채의 관계, 색채의 구조 등에 관해 치밀하게 연구한 것 같았다. 거기에 표현된 적·청·녹의 색채는 자연 속에서는 볼 수 없는 마티스만의 것이었다. 그는 그런 색채로 인간을 그렸다. 그것도 살아 움직이는 여인들을.
니스 시내의 현대미술관에서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작품 등을 관람하고, 르 콜레트라는 교외 마을에 들러 신경통과 류머티스로 고생하던 르누아르가 파리 생활을 청산하고 죽을 때까지 12년간 작품활동을 계속했던 아틀리에를 찾아서는 아직 식지 않은 그의 체취를 느꼈다. 그리고는 산길을 따라 20여 분 달려, 작으나 아주 아름다운 생폴 마을에서 벌레와 새들이 우짖는 깊은 숲 속에 자리잡은 마그재단 미술관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서울 충정로에 있는 프랑스대사관저를 닮은 2층 건물과 굴곡이 많은 정원으로 구성된 미술관에는 그림보다는 조각이 많았다. 자코메티의 ‘걸어가는 사람’, 미로의 ‘미궁’과 ‘태양 새’, 칼더의 움직이는 조각들이 인상적이었는데, 거기에 샤갈의 환상적인 모자이크와 유화, 신비스런 분위기를 자아내는 브라크의 스테인드글라스가 보태져 더할 나위 없이 멋진 예술공간이 됐다.
미국으로 건너가기 전에 아직 언급하지 못한 것으로 내가 보기에 기회가 닿는다면 한번 찾기를 권하고 싶은 유럽, 아시아의 박물관, 미술관의 이름이라도 열거해야겠다. 뮌헨의 과학박물관, 동서양의 도자작품을 대거 소장하고 있는 독일 드리스덴의 쯔빙거궁, 로마의 바티칸미술관과 로마문명박물관, 빈의 미술사박물관, 리스본의 항해박물관, 바르셀로나의 후안 미로재단미술관, 암스테르담의 국립미술관과 고흐미술관, 오슬로의 콘티키박물관(헤이에르달의 문명탐험 관련), 튀니스의 바르도박물관(세계 최대의 모자이크 컬렉션), 시리아의 다마스쿠스박물관, 예루살렘의 이스라엘박물관과 성서의 전당(Shrine of Book), 이스탄불의 톱카프박물관, 파키스탄의 페사와르박물관, 뉴델리의 인도박물관, 베이징의 고궁박물원, 타이페이의 고궁박물관, 상하이의 상해박물관, 도쿄의 동경박물관, 오사카의 동양도자박물관 등이 그것이다.
뉴욕 현대미술관의 뛰어난 기획력
미국은 유럽인들에게 자유와 희망의 땅이었다. 정치적·종교적 압박으로부터의 해방은 물론 기아에서도 벗어나게 했기 때문이다. 그 관문인 뉴욕에는 그래서 자유의 여신상이 세워졌다. 이런 뉴욕에는 세계적인 미술관이 여럿 있다. 그중에서도 현대미술관(MoMA)과 구겐하임미술관, 휘트니미술관이 특히 유명하다.
맨해튼 53번가의 모마는 한때 ‘게르니카’를 소장했다. 피카소가 왜 그렇게 했을까. 그를 세계적인 예술가로 만든 저 유명한 ‘아비뇽의 아가씨들’이 이곳에 있어서였을까. 모마는 유명 작가들의 작품을 백과사전처럼 나열하는 곳이 아니다. 미술사적으로 의미 있는 작품들을 선별하여 보여줌으로써 ‘작품을 통한 미술사 학습공간’이기를 지향한다. 생각해보라. 1년에 수백 점이나 되는 대작들이 쏟아져 나오는데, 그걸 무슨 수로 구입하고 전시할 수 있겠는가. 특별한 의미를 가진 것들에 집중 투자할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는 것이다. 또 그래야만 그 대열에 들고 싶어 작품을 기증하는 작가가 나타날 테고. 피카소도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겠는가.
미술관 운영에는 이런 고도의 지적 능력이 요구되는 것이다. 이곳엔 유럽의 미술관에서 볼 수 있는 인상파 대가들의 것도 있지만 그곳에선 좀처럼 보기 힘든 데 쿤닝, 잭슨 폴록 같은 미국산 대가들의 작품도 만날 수 있다. 모마는 또 기획전도 자주 갖는데, 그때마다 세계의 주목을 받곤 한다.
21세기 첫 전시회를 백남준에게 헌정한 구겐하임미술관은 달팽이 모양의 독특한 외관과 현대미술의 최첨단 흐름을 반영하는 수준 높은 기획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추상화가 바실리 칸딘스키 작품의 최대 컬렉터이기도 하지만 피카소, 콘스탄틴 브란쿠시, 알렉산더 칼더 등 유명 작가의 작품도 다수 소장하고 있다. 달팽이처럼 생긴 통로를 따라 6층까지 올라가면서 작품을 볼 수 있는데, 끊기지 않고 그 느낌이 계속될 수 있어 좋았다.
모마와 구겐하임이 전세계 작가를 대상으로 한다면 매디슨 애버뉴 75번가의 휘트니미술관은 미국 현대회화가 주 전공이다. 전시작품들을 보면 왜 뉴욕이 20세기 들어 세계미술의 메카가 될 수 있었으며, 그 주역들이 누구였는지 알 수 있다. 미국현대회화사의 학습장인 셈이다.
뉴욕에 이런 미술관만 있는 것은 아니다. 대영박물관에 맞먹는 규모와 질을 자랑하는, 흔히 ‘메트’라 부르는 메트로폴리탄박물관과 세계 최대 규모의 자연사박물관이 있다. 그레이트 홀이라 부르는 로비에서 시작되어 이집트관, 로마관, 중세관 등으로 이어지는 메트는 센트럴 파크에 연해 있는데, 유럽 박물관이 미처 갖지 못한 마야와 잉카, 인디언 관련 유물이 풍부하다. 세계의 정치·경제·군사·외교를 주름잡는 미국이 문화재 분야에서도 결코 남들에게 뒤지지 않겠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는 듯했다.
중생대의 거물 ‘바로소루스’ 공룡이 마치 ‘여기는 우리 같은 동물의 세계야’ 하며 안내하는 자연사박물관은 며칠을 보아도 다 못 볼 정도로 표본이 방대했다. 동물을 박제해서 그들의 생활환경을 재현한 것에서부터 조개와 어류, 양서류와 파충류, 포유류, 운석, 광물, 보석, 나무와 풀, 그리고 인간. 이들을 지나서 만나게 되는 공룡들의 세계…. 4층의 공룡전시실은 그들이 어떻게 그 오랜 세월, 지구상의 왕자로 군림할 수 있었는지를 곰곰이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주었다. 그것을 보노라면 인류가 멸망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는 묘안을 찾아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보스턴엔 보스턴미술관이, 시카고엔 시카고미술관이, LA엔 게티미술관이 있었지만 내가 보기에는 워싱턴의 스미소니언 인스티튜션이 최고다. 16개 박물관과 7개 연구기관, 그리고 9개 교육시설과 동물원. 이 모두를 아우르는 거대한 문화시설은 놀랍게도 시 외곽이 아니라 한복판에 있었다.
‘용산시대’ 개막에 붙여서
스미소니언은 제임스 스미손(1765~ 1829)이란 영국 과학자의 이름에서 나왔다. 그가 죽기 전 조카 제임스 헝거포드에게 유산을 남기면서 “네가 만약 자식이 없이 죽게 되면 내 유산을 모두 미국에 기증하여 지식 증대와 보급을 위한 시설을 건립하는 데 쓰도록 해라”는 유언을 남겼는데, 헝거포드가 자식이 없이 1835년 일찍 죽게 되자 그의 유언대로 미국에 맡겨졌고 그리하여 이 박물관이 세워진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스미손이 모국인 영국이 아니라 평소 별다른 인연도 없었고 한번도 찾은 적도 없었던 미국에 유산을 기증했다는 사실이다. 아무튼 미국 의회는 1846년 그의 뜻을 받아들이면서 스미소니언 인스티튜션을 설립할 수 있는 법률을 제정했다.
본부 기능을 하는 스미소니언 캐슬에서 얻은 팸플릿을 보니 없는 게 없었다. 박물관이 다룰 수 있는 영역은 실로 넓었으며 또 깊었다. 인류가 도달한 항공·우주 분야에서의 기술발전과 그 가능성을 함께 보여주는 항공우주박물관, 미국의 과학적 발명의 성과와 미국 역사를 들려주는 미국역사박물관, 자연사박물관, 중세, 근세, 현대에 이르는 세계적인 대가의 미술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내셔널 갤러리, 현대미술과 야외조각에 초점을 맞춘 허숀미술관, 아프리카미술관과 아메리카미술관,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는 아시아 미술의 다양한 세계를 보여주는 새클러미술관과 프리어미술관, 미국의 발전에 기여한 인물들의 초상화를 모아놓은 초상화박물관, 20세기 미국 공예작품의 컬렉션인 렌윅갤러리, 산업미술의 역사를 보여주는 산업미술관, 여기에 분점으로 뉴욕에 쿠퍼 휴트미술관과 인디언미술관이 있었다.
부러운 것은 이런 것만은 아니다. 창립 이래 150여 년 동안 지켜오고 있는 무료입장 전통, 크리스마스를 제외하고는 연중 무휴 개관, 무료 짐 보관시설, 완벽한 안내정보 시스템 등도 그러했다. 그렇지만 내가 제일 감탄했던 것은 연방정부가 예산의 75%를 부담하면서도 종신직(본인의 의사에 의한 사임은 가능)인 박물관장에게 운영의 전권을 맡긴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들은 공정하고 효율적인 운영을 위해 17명으로 구성되는 ‘평의회(Board of Regents)’를 두고 있다. 평의회는 당연직인 대법원장(감사 겸임)과 부통령, 상원에서 추천하는 3명의 상원의원, 하원에서 추천한 3명의 하원의원, 그리고 6년 임기의 사회 각 분야 저명인사 9명으로 구성된다. 관장은 평의회의 간사지만 표결에는 참여하지 못한다.
그러나 아무리 이런 평의회가 있다고 해도 제도와 사람에 대한 신뢰 없이는 이런 제도가 오래 유지될 수 없다. 미국인들은 박물관장을 단순한 행정관료로 보지 않기에 이게 가능한 것이 아닐까 싶었다. 그는 창의적이어야 하기에 대통령도 간섭이나 지시를 할 수 없다. 세계의 박물관들의 역사를 살펴보면 대개가 창의적인 개인의 아이디어와 노력을 씨앗으로 해서 태어났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성공한 박물관의 수집과 운영, 전시기획 등 모든 일은, 그것이 국립이건 시립이건 관료적인 분위기 속에서가 아니라 창의적이고 열성적인 분위기에서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제 우리는 ‘용산 시대’의 개막을 앞두고 있다. 박물관 건물의 건축도 중요하지만 그걸 어떻게 운영할 것인가를 밝히는 종합운영계획의 수립이 사실 더 중요하다.
거기에는 박물관 직제의 개편, 필요한 인력의 확보와 양성, 기자재의 확보도 포함돼야 하겠지만, 그보다 더 시급하고 중요한 것은 정부와의 관계 정립, 다시 말해서 주무부서인 문화관광부 또는 예산 당국과의 관계 정립이다. 그들로부터 독립하지 않고서는 중앙박물관은 제 구실을 해낼 수 없기 때문이다. 하긴 중앙은행인 한국은행도 아직 그런 위상을 갖지 못했는데, 우리가 언제 중앙박물관의 독립을 보겠는가. 관장을 임명식이 아니라 개방형으로 채우는 것만으로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문화의 세기에도 후진국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