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석진/서울대 수학과 교수
한국 축구가 위기라고 한다. 시드니올림픽과 아시안컵에서의 잇단 졸전과 부진으로 한국 축구가 총체적 위기에 빠졌다는 것이다. ‘위기’란 ‘위험한 때나 고비’를 뜻한다고 국어사전에 나와 있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나라 축구가 아주 위험한 지경에 이르렀다는 뜻인데 나는 ‘보지 않고도 믿는 것’과는 거리가 먼, 심지어는 ‘눈으로 보고서도 잘 믿지 않는’ 수학자이므로 우리 축구가 어디가 어떻게 위험하다는 것인지 따져 봐야 할 필요를 느낀다.
시드니올림픽 첫 경기에서 우리 올림픽대표팀은 스페인과 맞붙어 말 그대로 ‘졸전’ 끝에 3대 0으로 완패했다. 경기 시작 30분 동안 온갖 촌티를 줄줄 흘리며 정신없이 우왕좌왕하다가 잇달아 세 골을 허용하고 무너졌다. 그렇지만 그 뒤에는 전열을 정비하여 모로코를 1대 0으로 눌렀고, 칠레와의 마지막 경기에서는 이천수의 퇴장으로 전반 중반부터 10명이 싸우는 불리함 속에서도 투혼을 발휘하여 1대 0으로 승리, 2승 1패의 성적을 거두었다. 물론 8강 진출은 실패했다. 네 팀 중 상위 두 팀이 8강 토너먼트에 진출하는데 하필이면 한국, 스페인, 칠레 세 팀이 2승 1패 동률이 되는 바람에 골 득실차에서 밀려난 것이다. 스페인과의 첫 경기가 두고두고 아쉬운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 성적을 가지고 ‘부진’이라면 나는 조금 의아해진다. 그동안 우리 축구가 올림픽 무대에서 거둔 성적을 살펴보자. 우리나라는 1948년 런던올림픽에 처음 출전하여 멕시코를 5대 3으로 격파하고 첫 승리를 올렸다. 그리고 그 다음이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에서 가나를 1대 0으로 이긴 것이다. 무려 48년을 기다린 것이다. 그런데 이번 대회에서는 2승이나 거두었다. 지난 48년 동안 거둔 성적을 단 번에 거둔 셈이다. 그런데 어째서 ‘부진’인가?
결과만 놓고 볼 때는 그렇지만 경기 내용이 신통치 못했다고 반박한다면 그동안에는 시드니올림픽의 경기 내용을 ‘부진’이라고 표현할 만큼 훌륭한 경기를 펼쳤느냐고 반문하고 싶다. 우리나라는 런던올림픽에서 스웨덴에게 12대 0으로 진 적이 있고, 도쿄올림픽에서는 이집트에게 10대 0으로 졌다. 이건 사치스럽게 ‘경기 내용’을 논할 수준도 못된다. 도쿄올림픽 이후 우리나라가 ‘자력으로’ 올림픽에 출전하기 시작한 것은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 때부터다. 그때 3무승부, 애틀랜타올림픽에서 1승 1무 1패, 그리고 시드니올림픽에서 2승 1패. 이만하면 차츰 성적이 나아지는 유망한 학생 아닌가? 경기내용 역시 그때라고 지금보다 썩 훌륭했던 것도 아니다.
시드니올림픽에서 우리를 밀어내고 8강에 올랐던 스페인과 칠레는 각각 은메달과 동메달을 차지했다. 이 정도면 우리나라가 ‘부진’한 것이 아니라 ‘불운’했다고 표현해야 되지 않을까?
아시안컵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가 아시안컵에서 우승한 것은 1956년과 1960년이다. 호랑이가 담배 피던 시절 얘기다. 그 뒤로는 1980년 쿠웨이트 대회와 1988년 카타르 대회에서 준우승을 차지한 것이 고작이다. 지난 1996년 아랍에미레이트 대회 때는 다들 기억하는 것처럼 이란에게 6대 2로 대패하여 8강에서 탈락했다. 1992년 아시안컵 대회의 성적은? 놀라지 마시라. 우리나라는 지역 예선전에 대표 2진을 출전시켰다가 태국에게 덜미를 잡혀 본선에 나가지도 못했다. 결국 이번 레바논 아시안컵에서 3위를 차지한 것은 ‘최근 들어‘ 가장 좋은 성적이다.
또 이번 대회를 되돌아봐도 쿠웨이트에겐 이길 수 있는 경기를 ‘졸전‘ 끝에 졌고, 이란에게는 진 뻔한 경기를 재수 좋게 이겼으며, 사우디아라비아에겐 이길 수도 질 수도 있는 경기를 놓쳤다. 따라서 3등이면 실력만큼 한 것이다. 아니 지금 우리 축구가 처해 있는 현실을 냉정하게 바라볼 때 아시아에서 3등이면 ‘무지무지’ 잘 한 것이다. 그런데 왜 한국 축구가 위기라고 하는가?
우리나라 사람들이 요즘 들어 한국 축구가 위기에 빠졌다고 느끼는 것은 모두 일본 때문이다. 지난 20여년 동안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등 중동의 산유국들이 남미와 유럽의 명감독들을 오일 달러로 데려와 축구에 집중 투자할 때도 우리 축구팬들은 위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바로 옆의 일본이 잘하니까 갑자기 위기감을 느끼는 것이다. 일본이 어떤 나라인가. 우리에겐 자존심과 열등감의 알파요, 오메가가 아닌가.
한국 축구의 상대성 원리
역설적으로 우리 축구가 위기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것도 일본 때문이다. 일본은 그동안 “脫아시아”를 외치며 세계무대를 두드려 왔다. 그 첫 번째 결실이 1968년 멕시코올림픽에서 명장 크라머 감독의 지휘 아래 동메달을 따낸 것이다. 그때 일본 최고의 스트라이커 가마모토는 득점왕이 되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그 가마모토가 뛸 때에도 일본이 우리나라를 이긴 적은 거의 없다. 그때 우리나라엔 이회택, 박이천, 김호, 김정남, 이세연 등 지금 이름을 불러봐도 가슴뛰는 아시아 최고의 스타들이 즐비했다. 그렇다고 세계 수준과의 거리가 지금보다 가까웠던 건 아니다. 오히려 지금보다 더 뒤쳐져 있었다.
그 뒤 일본 축구는 약 20년 동안 침체해 있었다. 반면 한국 축구는 1983년 박종환 감독이 이끄는 청소년대표팀이 ‘멕시코 4강 신화’를 일구어내면서 전 국민을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그때부터 우리 국민들 사이에서 ‘몇 강’ 아니면 성적으로 치지 않는 터무니없는 습성이 생겨났을까?)
그리고 프로축구가 생겨났다. 우리 선수들이 이젠 생계를 걱정하지 않고 운동에만 전념할 수 있다는 꿈을 갖게 된 것이다. 1986년 멕시코월드컵과 1990년 이탈리아월드컵 출전권을 연거푸 따내면서 한국 축구는 전성기를 구가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갑자기 위기가 찾아왔다. 1993년 카타르 도하에서 열린 미국월드컵 예선전에서 일본의 미우라에게 일격을 당하고 만 것이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경기내용 면에서 일방적으로 밀렸다는 사실이었다.
그동안 일본은 축구발전을 위한 장기 계획을 세우고 유소년 축구 육성, 유망선수 선진국 유학, 우수선수 해외진출, J리그 출범 및 월드컵 유치 등을 치밀하게 준비해 왔다. 한국 축구인들이 염불처럼 외는 천연잔디구장은 도처에 깔려 있다. 1994년 J리그가 출범한 뒤 일본의 경기력은 무서운 속도로 발전했다.
우리나라가 일본에게 경기 내용에서 밀리기 시작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선수 개개인의 기량, 벤치의 전략 및 전술, 실전에서의 경기 운영 등 모든 면에서 현저하게 밀리고 있다. 레바논 아시안컵 우승을 계기로 일본 축구는 그야말로 “脫아시아”의 야망을 이룬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일본 선수들은 한국만 만나면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했고, 우리 선수들은 “한민족 전체의 과거와 미래를 걸머진” 사명감과 투혼, 그리고 “하느님의 보우하심”으로 여러 차례 결정적인 고비에서 일본을 이길 수 있었다. 만일 레바논 아시안컵에서도 우리가 사우디를 꺾고 결승에 올라갔으면 또 다시 일본을 꺾고 우승했을지도 모른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우리나라는 3위에 그쳤고 일본은 우승을 차지했다. 그리고 우리 국민들은 ‘일본이 우리보다 잘 했으므로’ 한국 축구가 위기에 빠져 있다고 느끼고 있다. 이것이 바로 ‘한국 축구의 상대성 원리’이며 현재 한국 축구에 대한 여러 가지 위기설이 난무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월드컵이 끝나도 축구는 존재한다
그러나 정작 한국 축구의 가장 큰 위기는 모든 위기설의 초점이 2002년 월드컵 성적에만 맞추어져 있다는 데 있다. 사실 이제 와서 별 짓을 다해 봐야 2002년 월드컵까지 한국 축구의 전체적인 수준을 세계적인 수준까지 끌어올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2002년 월드컵 16강 진출”이 한국 축구의 유일무이한 목표라면, 그건 지금부터 노력해도 충분히 가능하다. 당장 국내외를 막론하고 한국 출신으로 최고의 기량과 재능을 지닌 선수 40명을 뽑아 충분한 경제적 보상(2년 간 10억 원 정도면 될까?)을 약속한 후 ‘공포의 외인구단’처럼 ‘지옥 훈련’을 시키는 것이다. 물론 월드컵 때까지 대표팀이 일사분란한 조직력을 갖추어야 하니까 국내 프로축구야 죽건 말건 국내경기 출장을 금지시켜야 한다. 오로지 해외 전지훈련과 국가대표팀 간의 A매치를 반복하여 ‘축구기계’를 만들면 된다.
그렇게 하면 월드컵 우승은 몰라도 16강 진출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실제로 몇몇 외국 감독들은 8강 진출도 가능하다고 떠들고 있지 않은가? 그렇지만 그게 어디 사람이 할 짓인가? 그리고 그게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축구 발전인가? 2002년 월드컵에서 우리나라가 16강에 진출하면 한국 축구는 위기에서 탈출하는가?
굳이 일본과 비교하지 않더라도 한국 축구에 문제가 많다는 것은 축구를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책 또한 누구나 줄줄 욀 정도로 진부한 얘기들이다.
‘유소년 축구 육성, 충분한 천연잔디구장 확보, 정정당당한 경기문화 확립, 생각하는 축구를 통한 경기력 향상, 연령별·지역별 리그제 도입, 대한축구협회 행정 쇄신, 프로축구 활성화, 우수 지도자 및 심판 양성을 위한 교육과정 개설, 학원축구 개혁….’
문제는 이런 ‘희망사항’을 어떻게 ‘실천사항’으로 바꾸는가 하는 점이다. 특히 ‘학원 축구의 개혁’과 ‘정정당당한 경기문화 확립’은 당장 해결할 문제다. 한 시대를 풍미하며 수많은 축구팬들에게 멋진 감동을 선사했던 뛰어난 축구인들이 대학입시 비리에 연루되어 별로 더 깨끗할 것도 없으며 심지어는 ‘축구도 잘 못하는’ 사람들에게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정말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1999년 한국 프로축구 챔피언결정전의 승부가 ‘비열한’ 핸들링 골든골로 결정된 것도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 정정당당한 승부에 대한 믿음이 없는 축구판을 누가 애정어린 눈길로 쳐다 보겠는가? (그때 수원 삼성의 샤샤는 분명히 고의로 볼을 손으로 쳐 넣었으며 심판을 한 번 쳐다본 후 골 세레머니를 연출했다.) 따지고 보면 우리 사회처럼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어디서 이상하게 굴러먹다 온 인간들이 온갖 정치적, 경제적 권력을 장악하고 설치는 나라에서 축구판만은 신성하길 바라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일 것이다.
한 가지 지적하고 싶은 것은 방송 매체의 발달로 우리나라 축구 팬들이 안방에 앉아서 유럽과 남미의 선진 축구를 감상할 수 있게 된 지금, 우리 축구가 처한 현실은 돌아보지도 않으면서 대표선수들에게 세계 수준의 경기력을 요구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다.
“한국 축구가 왜 이 지경이냐”고 묻는 당신은 당신이 속한 분야의 모습을 한번 돌아보라. 한국 정치는 왜 이 꼴인지, 한국 경제는 왜 이렇게 헷갈리는지, 한국 과학계는 왜 이 모양인지, 한국 금융계는 왜 그렇게 절망적인지, 한국 언론은 왜 그렇게 천박한지….
이런 상황에서 한국 축구만 우리들의 모습과 다르기를 기대하는 건 너무 뻔뻔스럽지 않은가? 한국 축구 위기의 본질은 스스로의 모습을 냉철하게 돌아보지 못하고 실상과 환상 사이의 머나먼 거리를 헤매고 있는 우리 사회의 슬픈 자화상인 것이다.
2002년 월드컵이 끝난 뒤에도 축구는 존재한다. 내가 한국 축구에게서 바라는 것은 훌리건들처럼 인생의 절망을 폭력으로 대치시키는 흥분제도 아니고, 아프리카 선수들처럼 가난에서 탈출할 수 있는 비상구도 아니다. 한국 축구가 날마다 일본을 이겨주지 않아도 좋고, 2002년 월드컵에서 16강에 오르지 못해도 좋다. 그저 정정당당하고 흥미진진한 경기를 가족, 친구, 연인들이 상쾌한 마음으로 즐길 수 있는 그런 ‘폼나는’ 축구 문화를 가지고 싶을 뿐이다.
이주일/코미디언
축구는 훌륭한 스포츠다. 우선 정신 건강에 좋고 강한 체력을 기를 수 있다. 또한 축구를 하면 머리가 좋아진다. 어떤 사람들은 축구 선수는 공부를 못한다고 하는데 모르는 소리다. 영리한 사람이 축구도 잘한다. 나는 축구와 공부를 모두 잘했다. 축구를 하면 순발력이 생기고 시야도 넓어진다. 축구는 단체경기이기 때문에 여러 사람과 잘 어울려야 한다.
50년대 시골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운동이라고는 축구밖에 없었다. 그때는 축구공이 없어서 새끼를 동그랗게 말아서 찼다. 집에서 학교까지 시오리쯤 됐는데, 논바닥 길을 줄곧 새끼를 차면서 다녔다.
중학교 때부터 선수로 뛰다가 춘천고 시절엔 전국대회 준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그때 태클에 걸려 다리를 다치는 바람에 중요한 시기에 운동을 쉬었다. 당시 박종환 감독은 수비수였고, 나는 라이트윙이었다.
박종환 감독과 경희대에 들어갈 예정이었는데, 입학금을 날리는 바람에 못갔다. 그때 대학에 갔으면 나도 틀림없이 국가대표가 되었을 것이다. 83년 박종환 감독이 세계청소년축구대회에서 한국을 4강에 올려놓았을 때 사실 나는 색다른 쪽에서 흥분하고 있었다. ‘나도 계속 축구를 했으면 세계적인 감독이 되었을텐데…’
축구선수로서 나는 재능이 많았던 것 같다. 나는 100m를 12.5초에 뛰었는데 발재간도 있었다. 선배들이 길게 때리고 뛰는 ‘뻥축구’를 하고 있을 때 나는 구석을 파고 들어 짧게 찔러주는 패스를 했다. 코너에서 밀어주는 숏패스는 지금 생각해도 일품이었다. 누가 지도해준 것도 아니고 내 스스로 그런 플레이를 터득했다.
나는 여학생들에게도 인기가 좋았다. 요즘엔 많은 선수들이 골을 넣은 뒤에 멋진 골 세레모니를 펼친다. 당시엔 그냥 손을 치켜드는 게 고작이었는데 나는 남들이 하지 않는 제스처를 많이 선보였다. 유니폼을 벗고 관중에게 환호한 적도 있다.
우리가 뛸 때 춘천고는 전성기를 달리다가 졸업한 뒤 성적이 떨어졌다. 한동안 축구부가 해체됐었는데 박종환 감독과 내가 의기투합해서 축구부를 다시 살렸다. 나는 축구붐을 조성하기 위해 연예인 50여명을 데리고 내려가 ‘연예인 축구대회’를 열기도 했다. 나는 84년 ‘연예인 무궁화 축구단’을 만들었고 86년엔 동대문운동장을 가득 메우고 ‘뭔가 보여주는 연예인 축구대회’를 열었다. 후반전 동점 상황에서 나는 남보원이 치고 들어가다 백패스한 볼을 그대로 중거리슛해 영화배우 남궁원이 지키고 있던 골네트를 갈랐다. 3만 관중이 기립 박수를 보내는 가운데 나는 4백미터 트랙을 전속력으로 돌았다.
어려울 때마다 도와준 박종환
나와 박종환 감독은 인연이 깊다. 박감독이 나보다 세 살 위지만 친구처럼 지냈다. 박감독은 내가 어려울 때마다 힘을 주었다. 박감독은 내가 무명배우로 일하던 시절 우리 집을 도와주었다. 나도 박감독이 중요한 경기에 나가면 꼭 따라가 응원했다.
83년 박감독이 기적을 일으키기 전까지 나는 축구와 완전히 떨어져 있었다. 그러다가 박감독이 엄청난 일을 해내니까 자연스럽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때 효창운동장을 잔디구장으로 만들자는 움직임이 있어서 내가 1000만 원을 냈다. 박감독이 “잔디구장이 필요하다. 잔디구장만 있었으면 이번에 우승까지 바라볼 수 있었을 것이다”라는 얘기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인조잔디를 깔았다. 힘들더라도 그때 잔디구장으로 만들었으면 한국 축구가 조금을 달라졌을 거라는 생각을 해본다.
전두환 대통령도 박종환 감독을 좋아해서 나도 청와대 구경을 한 일이 있다. 사실 나는 전두환 대통령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방송출연까지 금지당했으니… 그런데 박감독과 인연이 닿아서 전대통령을 만났는데 그분은 내가 출연정지를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후 내가 어려울 때마다 전대통령은 좋은 말씀을 많이 해주었다. 특히 우리 아이가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는 직접 문상을 오셨다. 장례를 치르는 날은 나하고 박감독을 불러서 밤새 술을 마셨다.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나는 응원에도 열심이었다. 90년 북경아시안게임 때는 사비를 들여 연예인 10여명을 데리고 갔다. 경기장에서 남한과 북한이 따로 응원을 하고 있었는데 내가 태극기를 들고 북한측 응원단으로 뛰어들었다. 그랬더니 북한 응원단이 “이선생, 이러시면 안됩니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나를 어떻게 아느냐”고 물으니까 “이주일씨 다 안다”고 했다. 알고 보니까 그 사람들 대부분이 배우들이었다. 그래서일까? 내가 자기들처럼 동원돼서 온 것으로 생각하고 “다 아는데, 왜 이러십니까?” 라고 해서 한바탕 웃었던 기억이 있다.
90년 통일축구가 열렸을 때도 잠실 주경기장에서 응원을 펼쳤다. 내가 응원을 하겠다고 하니까 정보기관에서 조사를 해야 한다는 둥 말이 많았다. 사실 나는 그때 준비도 없이 나갔다. 마이크를 잡고 남북한 기자들 앞에서 그렇게 얘기했던 것 같다.
허정무 체제로 가자
“우리는 지금 아무런 준비도 없이 응원하려고 한다. 북한에서는 연습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남한에서는 연습이라는 게 없다. 지금부터 뭔가 보여주려고 한다.”
내가 코믹하게 파도타기 응원을 했더니 7만 관중이 박장대소를 하면서 따라했다. 내가 운동장에 쓰러질 듯한 포즈를 취했더니 파도타기가 무려 다섯 번이나 주경기장 스탠드를 돌았다. 그때만 해도 어린 아이부터 노인까지 나를 다 알아서 호응이 좋았던 것 같다.
내 뒤를 이어 이상용, 이용식, 김흥국 등이 축구장에서 열심히 응원을 하고 있다. 누구보다도 김흥국은 축구에 대한 열정이 있는 것 같다. 후배지만 정말 기특하다. 열심히 해서 2002년 월드컵때 중요한 역할을 맡아주었으면 좋겠다.
90년대 후반엔 축구장에 자주 가지 않았다. 그래서 박종환 감독이 국가대표팀 감독을 그만둔 뒤엔 한번도 간 일이 없다. 남들은 뭐라 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박감독이 대표팀 감독에서 물러난 것에 불만이 많다. 대표팀 성적이 좋지 못했던 데는 수많은 이유가 있었는데, 오로지 박감독에게 모든 책임을 덮어씌웠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박감독과 함께 나도 축구와 인연을 끊어야겠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이미 축구과 인연을 맺은 걸 어떻게 하겠는가? 때론 TV를 지켜보면서, 때론 축구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울분을 토하곤 했다.
최근 아시안컵에서 기대에 미치지 못하자 많은 사람들이 허정무 감독을 비판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그게 불만스럽다. 왜 우리는 실패한 사람에게 기회를 주지 못하는 것일까? 박종환 감독, 차범근 감독, 허정무 감독 모두 축구로서 국가에 많은 봉사를 했는데, 한 번 실수로 사람을 버리는 것을 보면 축구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안타깝기 그지없다.
물론 박종환 감독의 축구가 최고라는 얘기는 아니다. 박감독은 83년에 청소년축구에서 돌풍을 일으킨 감독이지, 영원히 성공한다는 보장이 없다. 그래서 박감독을 만나면 그런 얘기도 자주 했던 것 같다.
“스타들을 옛날 방식으로 다루면 안된다. 너보다 팬이 더 많은 선수에게 ‘죽여’, ‘살려’ 해서는 안된다. 너는 너무 카리스마가 강하다”
하지만 아무리 얘기해도 박감독은 달라지지 않았다. 한번 형성된 스타일은 좀처럼 바뀌지 않는 모양이다.
박감독은 96년 아시안컵에서 추락했다. 내가 생각하기로는 그때 선수들이 ‘스트라이크’를 일으킨 것 같다. 어떻게 그런 플레이를 할 수 있었을까? 언젠가 박감독을 응원하기 위해 싱가포르에 간 일이 있는데 그때도 선수들이 어이없는 경기를 하다가 패했다. 그래서 박감독과 술을 한잔 하면서 선수들을 탓한 것 같다.
이번에 올림픽과 아시안컵을 자세히 보니까 정말 큰일났다는 생각이 든다. 개인기도 모자라고, 조직력도 딸리고, 체력도 떨어지고…. 예전엔 투지 하나로 버틸 수 있었는데 이젠 그것도 찾아볼 수 없다. 나는 한국이 아시안컵 준결승에서 사우디를 틀림없이 이길 것으로 생각했는데 어이없이 패했다. 전후반 90분도 뛰지 못하는 선수들이 무슨 국가대표인지 한심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우리나라 선수들이 외국 선수들에 비해 정신력이 뛰어나다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이번 아시안컵에 나간 선수들은 그렇지가 않았다. 뭔기 단단히 잘못된 구석이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질 수가 없다.
나는 직접 축구를 해봐서 안다. 운동장에서 뛰는 선수들의 눈빛과 자세를 보면 심리상태를 읽을 수 있다. 이번에 보니까 정신자세가 흐트러져 있는 것 같았다. 선수들이 급하게 볼을 다루고 지구력이 급격히 떨어지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태극마크를 단 선수는 긍지와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 그것이 없으면 한국 축구는 힘을 쓸 수가 없다.
언론에서 자꾸 잘못한 점을 끄집어내서 비판하는 것도 문제다. 운동장에서 뛰는 선수들은 얼마나 부담을 느끼겠는가? 아시안컵에서 선수들은 완전히 언론에 노이로제가 걸렸다. 조금만 실수하면 ‘내일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나오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니 게임이 풀리겠는가? 그래서 나는 이런 큰 대회가 있으면 선수들을 언론과 차단시켰으면 하는 바람이다. 내가 감독이라면 선수들이 신문도 보지 못하게 할 것이다.
축구 선진국에서는 모든 정보를 열어놓고 대표팀을 운영한다. 하지만 우리는 좀 경우가 다르다고 생각한다. 게임을 치르기도 전에 선수들이 자꾸 언론을 의식하는 것 같다. ‘이거 지면 어떡하나. 한번 실수하면 어떻게 귀국하나’ 이런 생각이 선수들의 몸을 무겁게 만들고 있다. 이겨야 된다는 욕심과 잘해야 된다는 조바심이 문제다. 이게 잘 풀어질 때는 기가 막히게 플레이가 좋다. 하지만 조금만 안 풀어지면 게임을 망치는 것이다.
지금 외국 감독을 데려와야 한다고 말들이 많은데, 나는 잘못됐다고 본다. 잉글랜드는 스웨덴의 명감독을 데려오는데 무려 160여억원을 썼다고 한다. 우리가 그 많은 돈을 쓸 수 있는가? 여러 가지 사정을 고려할 때 어려운 얘기다. 또 한가지. 그 사람이 앞으로 1년 6개월 동안 선수들과 호흡을 맞출 수 있는가? 그것도 불가능한 일이다. 한국을 알고 한국 선수를 이해하는데 1년 이상 걸린다. 지금 전술을 새롭게 짜고 할 시간이 없다. 그래서 나는 외국 감독 타령하지 말고 허정무 체제로 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허정무 감독은 능력있는 사람이다. 한 번 실수했다고 이렇게 버릴 수 있는 건가? 꼭 정치권을 보는 느낌이다. 써먹다 조금 지나면 버리고…. 잘 나가던 서울대 총장이 정치권에 들어가서 몇 명이 망가졌는가? 유능한 사람을 자꾸 망가뜨려서는 안된다. 이런 풍토에서는 누가 와도 안된다. 허정무 감독에게 대표팀을 맡기고 박종환 감독, 차범근 감독 등 훌륭한 감독들로 자문기구를 만들어서 지원하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축구계가 단합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도 대안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경험이 많은 외국 감독이라도 선수들은 하루 아침에 달라지는 게 아니다. 인간이 다르고 음식이 다른데 어떻게 하겠는가? 일본도 오랜 세월에 걸쳐 외국 감독이 뿌리를 내린 것이다. 만일 외국인 감독이 들어오면 더 큰 혼란이 온다. 선수를 이해하고 자기 전술을 심어주는 데만 1년이 걸린다. 말이 통하지 않으니 배우는 속도도 느리다. 외국 감독을 영입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정부 차원에서 돈을 듬뿍 써서 대표팀을 1년쯤 브라질이나 유럽으로 내보내자. 1년 동안 들어오지도 말고 그곳에서 선진 축구를 익히도록 하자. 지금으로서는 그 방법밖에 없다.
월드컵을 앞두고 선수와 감독의 처우도 개선해야 한다. 옛날에는 선수들이 돈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저 태극마크만 달면 그게 명예라고 생각했다. 이젠 그것만으로 통하지 않는다. 우리가 그동안 국가대표팀에게 무슨 대접을 해주었는가? 요즘은 대표선수로 발탁됐다고 해서 선수가 감동하지도 않는다. 대표선수가 되면 아무 걱정없이 운동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지금처럼 지원도 해주지 않다가 잘못되면 욕만 바가지로 퍼붓는 것은 곤란하다.
공부한 사람이 국가대표 돼야
한국 축구는 일본보다 10년쯤 떨어진 것으로 보인다. 지금부터 열심히 해서 일본 수준으로 올라서면 일본은 또다시 저만큼 앞서갈 것이다. 그러니까 자꾸 일본을 의식하는 건 도움이 안된다. 일본이 어떻게 가든 신경쓰지 말고 한국 축구를 발전시키겠다는 생각만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초등학교부터 리그제를 도입해야 한다. 지역별로 매주 게임을 하고 거기서 우승한 팀들이 전국대회에 참가해야 한다. 지금처럼 지역리그 없이 1년에 서너차례 전국대회를 열면 아이들은 그 대회만 바라보게 된다. 대회가 없을 때는 전혀 실전 경험을 쌓지 못하는 것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축구 선수에게 희망을 주어야 한다. 축구 하나만 확실히 하면 ‘고생 끝’이라는 믿음을 심어줘야 한다. 초등학교 대회에서 한 번 우승하면 마음놓고 공부하면서 축구를 배울 수 있어야 한다. 지금은 우승을 해도 그것으로 끝이다. 이건 너무 허무하다.
축구 지도자의 자질도 키워야 한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축구를 가르치고 있는 지도자 중에서 외국에 나가서 1년이라도 배우고 온 사람이 몇 명이나 되는가? 많은 지도자들이 그냥 자기가 아는 상식으로 축구를 가르치고 있다. 일본을 보라. 1년부터 5년까지 외국에서 배울 수 있는 과정이 있다. 10년 전부터 그렇게 투자하니까 지금 좋은 성적이 나오는 것이다.
투자하지 않고 한국 축구가 강해지길 바래서는 안된다. 이젠 선수들의 힘만 믿고 축구를 하는 시대가 아니다. 선수도 지도자도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 앞으로는 머리가 좋은 선수들이 축구계를 휘어잡을 것이다. 나는 우리나라 국가대표 선수도 제대로 공부해서 대학을 나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상적으로 공부한 선수라야 나중에 지도자가 돼도 정상적인 선수를 길러낼 수 있다.
대학을 나오면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진다. 당연히 축구를 보는 눈도 달라질 것이다. 이건 비단 축구만의 문제가 아니다. 만일 나도 대학을 나왔다면 더 수준높은 코미디를 보여주고 대단한 코미디언이 됐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대학 축구는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다. 정상적인 축구 선수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간판’ 따는 곳이 돼버렸다. 고대나 연대 졸업생 중에 훌륭하게 성장한 선수가 별로 없다. 좋은 대학에서 공부하고 축구를 배운 선수들이 대표선수가 돼야 한다. 그런 ‘수재’들이 대표팀에 모여있으면 지도자는 얼마나 긴장하고 열심히 공부하겠는가? 그런 세상이 오면 감독은 대학원 가서 ‘축구박사’가 돼야 살아남을 수 있다.
차범근 감독은 고려대를 나와 독일에서 뛰었다. 허정무 감독은 연세대를 나와 네덜란드에서 뛰었다. 나는 그 사람들이 훌륭한 감독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선수들과 맞지 않는 것이다. 선수들이 감독을 따라주지 못하고 있다. 불행한 일이다.
월드컵은 얼마 남지 않았다. 유소년 축구를 활성화하고 잔디구장을 만드는 것은 장기적으로 준비할 일이다. 지금 당장 중요한 것은 국가대표팀의 경기력이다. 나는 이 점에 있어서는 편법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대표팀을 1년 동안 축구 유학 보내자는 것이다. 이 방법이 아니면 2년 뒤 월드컵에서 16강에 올라갈 수가 없다.
정부기관 구조조정해서 축구를 살리자
축구협회와 축구인들에게도 책임이 있다. 사태가 이 지경이 됐는데도 아직까지 방관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어제 여자축구대회가 있었는데 원로 축구인들이 많이 모였다. 그 자리에서 “여러분들도 책임을 느껴야 한다”고 말했다. 축구협회에 몰려가서 얘기하고, 문화관광부에 가서 대책을 세워야 할 것이 아닌가?
축구협회가 여러 가지 일을 하는 것은 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의 능력은 의문이다. 축구협회 직원 중에 단 1년이라도 브라질이나 유럽으로 유학다녀온 사람이 몇 명인지 모르겠다. 말로만 선진 축구를 부르짖어서는 안된다. 협회 직원은 선수 이상으로 국제 경험을 쌓아야 한다. 하다 못해 세계적인 축구 전문지라도 열심히 읽으면서 공부해야 한다. 돈이 들더라도 협회 직원들을 축구 선진국에 적극적으로 파견해야 한다. 단순히 축구 구경을 시켜주는 것이 아니라 축구 유학을 보내야 한다.
문제는 돈이다. 정몽준 회장이 그 많은 돈을 다 내놓을 수는 없다. 수많은 정부기관을 구조조정해서 그 돈으로 우선 축구만이라도 살리자. 방대한 조직을 가지고 있는 기관이 많다. 운전기사에게 연봉을 6천6백만원씩이나 주는 그런 기관을 구조조정해서 축구를 살리자는 것이다. 나는 국회 체육위원으로 있을 때도 그런 주장을 했다.
일본은 지금 8강까지 내다보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식으로 가면 예선 탈락이 확실하다. 초반에 우리가 탈락하고 일본이 올라가면 엄청난 파문이 올 것이다. 한국으로 들어온 관광객은 모두 짐싸들고 일본으로 갈 것이다.
월드컵이라는 기회는 다시 오지 않는다. 지금 한국 축구를 살려서 16강에 올려놓으면 우리 경제가 달라진다. 국민이 똘똘 뭉치게 된다. 정치고 뭐고 다 소용없다. 16강 하나면 얘기가 달라진다.
하지만 현실은 비관적이다. 만일 이대로 가다가 한국이 예선 탈락한다고 가정해보자. 잔뜩 부풀어있던 국민들이 어떻게 되겠는가? 실망해서 일도 못하고 경제가 마비된다. 상대적으로 일본이 16강을 넘어 8강까지 가면 문제가 더 심각해진다. 그 엄청난 파장을 예상하고 지금부터 대비책을 세워야 한다. 아직도 늦지 않았다.
고원정/작가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은 제주도 북제주군의 애월읍 하귀리란 마을이다. 우리나라의 어느 동네나 비슷하겠지만 이 하귀리란 마을은 유난히도 축구열이 높은 곳이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축구로 해가 뜨고 축구로 날이 저무는 동네였다고나 할까? 하귀 초등학교의 운동장은 정작 어린이들보다는 동네 청년들로 언제나 북적거렸다. 아침이면 조기축구, 방과후면 또 이런저런 명복을 내건 그들만의 축구시합….
돌아가는 분위기가 이렇다 보니 머리가 굵어진 아이들 사이에서는 ‘공깨나 차지 않으면’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는 게 너무도 당연한 일로 치부되고 있었다. 사실 나는 축구를 못하는 아이였다. 초등학교 시절 나는 남달리 키는 껑충했지만 그다지 운동신경이 발달하지 못한 편이었다.
축구를 버리고 농구를 택하다
운동장에서 뛰어 다니는 것보다는 교실 한구석에서 조용히 책을 펴드는 것이 훨씬 즐겁던 나였지만, 그 미친 듯한 축구의 열기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초등학교 동급생들끼리도 운동장이 비는 틈을 타서 마을 대항 축구시합을 가지곤 했기 때문이다. 사실 그 무렵의 나는 언제나 그놈의(?) 축구를 저주했다. 제대로 된 축구공도 없이 당시 싯가로 15원 하던 어른 주먹만한 고무공을 놓고 양팀 합해 22명의 사내 아이들이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축구시합이 어쩐지 ‘바보들의 행진’ 같았다.
그렇지만 마냥 코웃음칠 수는 없었다. 우리 동네의 동급생 사내 아이들은 나를 포함해야만 정확하게 11명이 되기 때문이었다. 이를 어찌하면 좋으랴. 아이들이 축구시합을 할 눈치만 보이면 나는 어떻게 하면 그 곤욕스러운 시간을 피할까 싶어 온갖 궁리를 짜내야만 했다.
동료들은 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당부하곤 했다.
‘넌 숫자만 채우면 된다. 골대 앞에 가만히 서 있기만 해라. 공이 앞으로 와도 건드리지 말아라. 가만히 있으면 다른 애가 처리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골키퍼보다 4-5미터쯤 전방인 위치에 그저 말뚝처럼 서 있기만 했다. 그 모습을 한 번 생각해보라. 그렇지만, 그렇지만 말이다. 공이 앞으로 와도 건드리지 말라는 당부는 정말이지 지키기 힘든 것이었다.
왜냐? 동네 여학생들이 응원을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녀들의 눈길과 함성 속에서 다른 방향으로 가는 공도 아니요, 바로 내 앞으로 오는 공을 그저 모른척하고 있기에는 내 자존심이 너무 강했다. 그래서 나는 당부를 무시하고 앞으로 날아오는 공을 향해 과감하게(?) 발을 내밀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어찌하면 좋을까. 그 15원짜리 고무공은 바운드가 제멋대로여서 모처럼 마음먹고 내민 내 발은 하릴없이 허공을 가르기 일쑤였다,
까르르 터져나오는 계집애들의 웃음소리…. 하지만 그 정도만이라면 또 얼마나 좋을까. 내 발을 피해서 튀어오른 공은 심술이라도 부리듯 팔을 건드리고 만다. 핸들링! 60년대의 시골 아이들은 신이 나서 외친다. “핸드!” 혹은 “햄!”
게다가 내 위치가 어딘가. 골키퍼의 바로 앞이다. 여지없이 페널티킥이다. 상대방 아이들은 더욱 기승을 부린다. “페날뚜기! 페날뛰기!” 결국 우리 팀은 한 골을 허용하고 그 한 골이 승부를 가르는 경우가 열이면 일고여덟이었다.
이 천덕꾸러기를 어찌할 것인가. 참다 못한 우리 팀의 동료들은 다음 시합에서 도무지 말이 되지 않는 흥정을 벌이곤 한다.
‘우리는 재를 빼고 열 명만 뛰겠다.’
하지만 거기에 응할 상대팀은 없다.
‘무슨 소리냐? 법대로 열한 명이 뛰어야지.’
그래서 나는 언제나 우리 팀 동료들보다는 상대팀을 더 즐겁게 하는 기막힌 선수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축구가 나를 싫어하니, 낸들 축구를 좋아했겠는가. 나는 우리 마을에 가득한 축구열기를 늘 흰 눈으로 흘겨보며 자라났다. 그 무렵의 제주에서는 축구를 가장 잘 한다는 마을이 하귀리와, 제주시의 외도동, 역시 제주시의 화북동이었다. 이 3개 마을은 인근에서 벌어지는 여러 대회에서 언제나 우승을 놓고 다투는 라이벌이었다. 특히 제주시와 북제주군의 경계선을 사이에 두고 인접한 마을인 하귀와 외도의 라이벌 의식은 유난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두 마을간의 전적에서 외도쪽이 6 대 4 정도로 우세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더구나 외도에서는 매년 8월이면 ‘8·15기념 마을대항 축구대회’가 열리곤 했다. 올해로 55회를 맞은 이 대회의 홈그라운드가 바로 외도였으니 하귀팀은 늘 나름대로의 홈 어드밴티지에 피해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동네 골키퍼로 축구에 입문
그러나 어쨌든 그 대회가 다가오면 마을 전체에서 기부금을 내고 형편이 되지 않는 집에서는 하다못해 보리쌀 한 되, 계란 너댓 알이라도 내놓았다. 이런 금품을 경비삼아 합숙훈련을 하고 대회가 열리는 날은 온동네 사람들이 남녀노소 떨쳐나가 응원을 하고…. 하지만 나는 이방인이었다. 우리 팀이 이기면 이기는대로 억울하게 패하면 패하는대로 선수들과 동네 사람들은 술에 취해서 돌아온다. 나는 마을 전체가 잔치판이 되거나 한풀이의 난장판이 되는 풍토가 못마땅했다.
나는 잊을 수 없다. 또래끼리의 축구시합에서 당했던 그 수모를…. 그러나 나의 한계 또한 분명했다. 내가 어떻게 5년후, 10년후 하귀리 대표팀의 주전 자리를 약속받고 있는 내 친구들을 따라갈 것인가? 그래서 중학교에 입학할 때부터 나는 방향을 틀었다. 남보다 큰 키를 살려서 농구 선수가 되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것은 정말 탁월한 선택이었다.
나는 어렵지 않게 농구 선수로 성공할 수 있었다. 중3이 되었을 때는 팀의 주장을 맡아 제주도내의 모든 대회를 석권했다. 보란 듯이 농구공을 끼고 다니던 나는 변함없이 축구에 열을 올리는 내 친구들을 은근히 눈 아래로 내려다보기도 했다.
그러나 어찌 하랴. 축구와의 모진 인연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하귀리 대표팀에 문제가 생겼다. 주전 골키퍼가 군에 입대한 것이다. 8·15 축구대회를 앞두고 마땅한 골키퍼를 구하지 못하자 하귀리 대표팀의 프런트는 키가 큰 나에게 눈길을 돌렸다.
‘농구 선수니까 공을 잘 다룰 것 아닌가. 적어도 로빙볼은 안심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순간부터 나는 스카우트 제의에 시달렸다. 나의 대답은 ‘노’였다. 며칠을 고민했지만, 결국 나는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나는 골키퍼가 되었다. 약속한대로 골킥은 풀백이 도맡았다. 상대의 슛이나 센터링을 잡아서 손으로 던지는 나의 플레이는 시골 축구팬들을 열광시켰다. 농구로 단련된 나는 언제나 하프라인 너머까지 공을 던질 수 있었다. 우리 팀은 준결승에서 탈락했지만 그것은 스타 골키퍼의 탄생을 알리는 무대였다. 그후 고등학교 3년간 나는 하귀리 대표팀의 골문을 대과없이 지켜냈다. 조금 과장하자면 나는 당시 ‘오빠부대’를 몰고 다니는 골키퍼였다.
그러나…. 기본이 없는 명성은 오래갈 수 없었다. 감각과 재치로 그럭저럭 자리를 지켜오던 나는 참으로 처절한 최후의 날을 맞았다. 하귀리에서 새로운 축구대회를 출범시켰든데 ‘우승후보’로 꼽히던 우리팀이 1회전에서 1 대 4로 참패한 것이다. 모든 게 내 책임이었다. 나가야 할 때는 머뭇거리고, 기다려야 할 때는 뛰쳐나가고, 잡아야 할 공은 펀칭하고, 펀칭할 공은 무리하게 잡으려다 빠트리고…. 그야말로 골키퍼가 할 수 있는 모든 실수를 보여주었다.
어안이 벙벙해진 선배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니 벼룩도 낯짝이 있지 어떻게 내가 하귀리 대표팀에 남아있겠는가. 나는 18세의 한창 나이로 은퇴할 수밖에 없었다. 하귀리 축구사에 영원히 남을 치욕을 뒤로 하고….
추억의 효창운동장
축구와의 인연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어설픈 골키퍼 경력 3년 동안 나는 나름대로 축구의 재미를 알아버렸다. 축구는 나를 버렸지만, 나는 축구를 버릴 수 없었다고나 할까.
나는 축구팬이 되기로 했다.
74년 대학진학을 위해 서울로 올라왔을 때, 나는 다른 무엇보다도 국가대표 경기는 물론, 실업단, 금융단의 경기를 직접 운동장에서 볼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가슴이 설랬다. 일이 되느라고 그랬는지 경희대학교 입학이 확정된 내가 임시로 거처를 정한 곳이 효창운동장의 아랫 동네인 용운동이었다.
그해 2월말 효창운동장에서 ‘대통령배 쟁탈 전국축구대회’가 열렸다. 40대 이상의 올드팬이라면 기억할 것이다. 바로 ‘비운의 스타’ 이회택이 포항제철팀을 이끌고 화려하게 컴백한 무대였다. 이회택 외에도 최재모, 김창일, 박수일, 배기면, 김종우, 윤종범…. 그야말로 ‘준국가대표’ 라고 해도 좋을 멤버였다.
나는 학교의 오리엔테이션까지 빼먹어가면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운동장을 지켰다. 비록 맨땅이지만 난생 처음 눈앞에서 지켜보는 대표급 선수들의 플레이는 화려했다. 특히 이회택 선수의 드리블은 환상적이었다. 공이 발에 붙어다닌다는 표현이 결코 과장이 아니라는 걸 나는 그때서야 알았다. 상대 수비수의 걸음과 자기 걸음의 차이를 정확하게 계산한 드리블과 문전으로 찔러주는 패스는 속된 말로 오금이 저릴 지경이었다.
나는 지금도 확신한다. 드리블 돌파에 관한한 우리 축구에서는 아직도 그만한 경지에 이른 선수가 없었다고…. 결국 포항제철은 우승했고 나는 더욱 골수팬이 됐다.
70년대 중반 경희대 축구팀은 연세대, 고려대와 함께 3강체제를 이루고 있었다. 이영무, 박창선, 김황호, 최용식, 박주만, 송준복 등이 경희대에 있었다면, 연세대에는 김희태, 박종원, 허정무, 조광래, 신우성 등이, 고려대에는 차범근, 홍황표, 최종덕, 김강남, 김성남 등이 버티고 있었다.
경희대는 연세대에 유난히 약했던 반면, 고려대에겐 강세를 보였다. 당시 고려대의 스트라이커 차범근 선수는 아직 기량이 무르익지 않아서 스피드 말고는 주특기가 없었다. 차범근이 오른쪽 미드필드를 질풍같이 질주하면 경희대 응원단은 항상 고함을 질렀다.
‘태클!’
‘걸어버려!?p>? 실제 성큼성큼 큰걸음으로 질주하던 차범근은 깊은 태클에 걸려 그라운드에 나동그라지기 일쑤였다. 한두 번 그러고 나면 차범근 선수는 외곽으로 돌았고, 경희대는 게임을 수월하게 풀어나갔다.
그밖에도 당시 전성기를 구가하던 금융단과 실업단 축구의 여러 게임들, 대표팀의 주무대이던 ‘박스컵 대회’…. 모두가 엊그제의 일인 듯 눈에 선하다.
그 중에서도 77년 열렸던 아르헨티나 월드컵 예선전 이스라엘전을 떠올려본다. 3 대 1로 이긴 그날 게임에서 첫 골은 차범근이 넣었다. 두 번째 골은 당시 한창 이름을 날리던 박상인의 문전 강슛. 백미는 마지막 최종덕의 골이었다. 하프라인을 겨우 넘어선 40m 거리에서 벼락같은 슛을 날렸고, 공은 미사일처럼 날아서 네트에 꽂혔다.
서울운동장을 가득 메운 축구팬 속에 나도 끼어있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스탠드 중단쯤에 앉아 응원하던 내 친구가 앞으로 달려나간다 싶더니 갑자기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당황한 나는 사람들을 헤치며 스탠드 앞으로 뛰쳐나갔다. 내 친구는…. 스탠드 아래 운동장 트랙에 떨어져 있었다. 흥분한 나머지 이리저리 뛰어오르다가 그만 스탠드 난간을 넘어버린 것이다.
내 나이쯤 되는 축구팬이라면 다들 기억이 비슷할 것이다. 한국 축구는 한국 사람의 숨겨진 앨범 어딘가에 잊을 수 없는 장면을 남겨놓았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30년동안 우리 축구에 대한 찬사와 비난, 기대와 실망이 반복되고 있다는 점이다.
지금은 우리 축구가 다시 어두운 그늘로 접어든 시점이다. 여기서 나는 초미의 관심사가 되고 있는 외국인 감독 영입 문제에 대해 언급하고 싶다.
91년 3월 나는 올림픽대표팀을 찾아간 적이 있다. 당시 우리 대표팀은 독일의 크라머 감독을 영입해서 총감독을 맡겼고, 감독은 김삼락씨, 코치는 김호곤씨가 맡고 있었다. 말 그대로 ‘옥상옥’이었다.
김삼락 감독을 찾아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점심식사를 위해 식당으로 자리를 옮겼을 때 나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식당에서 마주친 크라머 총감독과 김삼락 감독은 대화는커녕 아는 체도 하지 않았다.
물론 식사도 따로따로였다. 크라머는 자신이 데리고 온 외국인 트레이너와 함께, 김삼락 감독은 김호곤 코치와 함께 떨어져 앉아 식사를 하는 것이 아닌가. 코칭스태프의 불화를 피부로 느끼는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식사를 끝낸 뒤 김감독이 한마디로 크라머에 대한 불만을 표시했다.
“크라머의 능력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한국에는 한국의 방법이 있지 않느냐. 선수들이 여기 입촌한 뒤 모두 2-3kg씩 체중이 늘었다. 말이 된다고 생각하느냐?”
김호곤 코치를 따라 운동장으로 나가보니 선수들은 아직 봄바람이 찬 운동장을 3-4명씩 무리를 지어 걸어다니고 있었고 크라머 감독은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다. 김코치의 설명에 따르면 크라머의 훈련일정에는 ‘30분 산책’이라는 프로그램도 들어있다는 것이었다.
외국인 감독의 허와 실
나는 그 설명을 들으면서 크라머의 불만도, 김삼락 감독의 불만도 모두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결국 크라머는 아시아 예선 통과후 한국을 떠났고, 정작 그의 능력이 필요한 본선에서는 스탠드를 지켰다.
월드컵은 1년 6개월밖에 남지 않았다. 유소년 축구를 육성하고, 잔디 구장을 늘리는 것은 장기적인 처방이다. 그리고 중요한 건 그런 얘기를 해봤자 실천이 안된다는 점이다. 나는 눈앞에 다가온 월드컵에 집중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외국인 감독을 영입해서 언제 한국 선수들과 손발을 맞출 것인가. 아무리 뛰어난 감독이라도 이미 때는 늦었다. 지금이라도 한국 감독에게 맡겨서 한국 축구의 장점을 최대한 끌어올렸으면 한다.
요즘 한국 축구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많다. 하지만 한국 축구가 단점만 있는 건 아니다. 과거 한국 축구는 체력과 스피드, 투지와 조직력으로 아시아 정상을 지켰다. 나는 그런 장점을 잘 살리는 게 중요하다고 본다. 남아있는 1년 6개월동안 장점을 극대화하고 단점을 보완해야 한다.
지금 일부 선수를 해외로 보내자는 주장도 문제가 있다. 이미 유럽은 시즌에 들어갔다. 지금은 들어갈 곳이 없다. 내년에 들어간다면 한 시즌도 제대로 뛰지 못하고 월드컵대표팀에 합류해야 한다. 그때는 한 자리에 모여 조직력을 다져야지 외국에서 뛸 일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외국으로 선수를 보내자는 축구협회의 구상에도 반대한다.
감독이 역할은 선수들의 장단점을 일고 그것을 팀 전력으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래서 오랜 시간 선수를 지켜보면서 연구해야 하는 것이다. 지금 외국 감독이 들어와서 언제 선수를 파악하고 자신의 전술을 언제 가르칠 것인가. 축구 선진국처럼 선수들의 개인 기량이 뛰어나면 며칠만 손발을 맞춰도 전력을 끌어올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 선수들의 기술은 그런 단계가 아니다. 제발 한국 축구의 현실을 깨닫고 그에 맞는 처방을 내렸으면 좋겠다.
나는 앞으로 어느 나라의 어떤 명감독이 온다고 해도 그는 과거 크라머 감독이 겪었던 상황에 부딪힐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외국 감독을 영입하는 데는 세 가지 원칙을 지켜야 한다고 본다.
첫째, 정말로 외국인 감독이라야 되는 지를 재검토할 것.
둘째, 영입해야 한다면 한국적인 정서에 대한 이해도까지 포함해서 신중하게 판단할 것.
셋째, 일단 영입했으면 철저하게 지원할 것.
또 한가지 주문하고 싶은 게 있다. 월드컵 조추첨이 끝나면 정말 총력전으로 맞서야 한다. 한국과 예선에서 맞붙을 3개국에 기술위원을 대거 파견해서 약점을 찾아내야 한다. 최소한 5-6명이 한 나라에 투입돼야만 효과를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월드컵은 총력전으로 치르자
축구팬들이 한국 축구에 기대하는 것은 승패보다도 경기 내용이다. 아시안컵 3위는 한국 축구의 현실을 반영할 때 당연한 결과다. 하지만 축구팬들은 쿠웨이트전이나 사우디아라비아전을 주목하고 있다. 승패보다도 경기내용이 나빴기 때문이다. 한국이 월드컵에서 16강에 오르지 못하고 1승2패나, 1승1무1패를 하더라도 경기내용이 좋으면 축구팬은 박수를 보낼 것이다.
동네 축구로 잔뼈가 굵고 오랜 세월 한국 축구를 지켜본 골수 축구팬들은 진심으로 바란다. 꼭 16강, 8강이 아니어도 좋다. ‘우리의 축구’를 보여다오. 지난 한세기 동안 축구는 영국이나 독일, 이탈리아, 브라질에서만 행해진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도 면면히 그 전통을 이어왔다는 것을 플레이로 보여다오!
장영달/민주당 국회의원
나는 거의 모든 스포츠 관람을 좋아하는 편이다. 나뿐 아니라 사람들은 모두가 서로 경쟁하여 즉석에서 우열을 다투는 운동경기 보기를 즐긴다. 그 중에서도 나는 축구경기를 제일 좋아한다. 첫째 이유는 아무래도 탁 트인 경기장의 시원함 때문일 것이고, 둘째는 선수들이 비호처럼 달리며 가끔씩 시원하게 때리는 슈팅을 기대할 때의 심리적 쾌감 때문이다. 셋째는 축구는 혼자만 잘해서는 점수를 낼 수가 없다는 점이다. 축구는 광활한 운동장을 헤집고 다니며 조직적 연결을 통해 기민한 패스 속에 기막힌 연결이 완성되면 점수를 얻을 수 있는 인간 예술이다.
오늘날처럼 세상이 무언가 잘 열리지 않는 상황에서 축구를 보며 답답함을 푸는 것은 정말 즐거운 일이다. 나는 축구경기를 보면서 많은 것을 생각한다. 좋은 정치인들이 모여 짝을 이루고 개혁안을 연구하며 힘을 키우면 마침내 정성을 모아 한 골을 성공시키듯 국민에게 희망을 선물하는 정치도 빚어낼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을 얻는다.
바쁜 생활 속에서도 나는 축구를 즐긴다. 등짝에 번호판을 달고, 축구 스타킹 위로 축구화를 신은 채 축구공을 몰고 그라운드를 달리는 일도 즐긴다.
나는 고등학교 1학년때까지 선수생활을 해본 경력이 있다. 한때는 국가대표가 되어 태극마크를 가슴에 달고 뛰어보는 것이 소망이었다. 그러나 교장선생님과 나의 큰형님의 권고에 따라 축구를 그만두고 정치인이 되었다.
국회의원 생활 9년, 그동안 힘들고 즐거웠던 기억도 많았다. 그 중에도 한·일의원 친선 축구를 하던 일은 한때 대표선수를 꿈꾸었던 나에게는 유별난 즐거움이었다.
국회의원 중에도 축구에 남다른 소질과 열정을 가진 분들이 많다. 김근태, 강창희, 정몽준, 정균환, 정동영 선수, 권오을, 남경필 선수 등. 또 어렵사리 잡은 공을 놓쳐버리고 무안한 표정을 짓던 신영국 선수, 공을 따라 뛰어나가 막상 볼을 잡고는 쓰러져 버린 설훈 선수, 육중한 체격으로 폼만은 대표급이었던 이윤수 선수, 헛발질에도 즐겁기만 한 이재오 선수 등.
여기에는 오랜 시간 축구를 위해 힘쓴 정몽준 의원의 노력이 크다. 정 의원은 프로선수도 아니면서 자동차 트렁크에 축구화를 싣고 다닌다. 길을 가다가, 시골에서나 도시에서나 공 차는 현장만 보면, 얼른 신발 갈아신고 공을 향해 달려든다. 대한축구협회장으로 누가 처음 추천했는지 몰라도 정말 어울리는 직책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분의 월드컵유치 성과를 놓고 본다면 국민훈장 하나쯤은 수여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 정도다. 오는 12월 16일 일본에서 치러질 한·일의원 친선 축구에는 허운나, 김희선, 임진출 의원 등 여성 선수들도 대거 등장할 예정이어서 또 다른 재미가 기대되고 있다.
기본기가 중요하다
올림픽보다 더 신나는 월드컵. 지구가 한바탕 들썩거리는 세계인의 축제 월드컵이 한국에서 열린다는 사실은 우리를 흥분시키기에 충분한 사건이다. 하지만 시드니올림픽과 아시안컵에서 일본에 뒤진 한국축구를 개혁하지 않는다면 2002월드컵은 우리에게 흥분이 아니라 좌절감을 안겨줄지도 모른다.
나도 우리 선수들을 응원하기 위해 정몽준 대한축구협회장과 함께 시드니올림픽에 잠시 들렀지만, 스페인과의 경기에서 한국축구는 참담하게 무너졌다. 한국인의 기개라고는 찾을 수가 없었다. 져도 기분 좋게 진들 누가 그토록 탓하겠는가? 그런데 두 다리가 땅에 얼어붙듯 주눅들어버린 당시의 한국축구는 우리 국민에게 너무 큰 실망을 던져준 게 사실이다. 단, 뿌리는 대로 거두는 것이라는 진리를 깨달으며 우리 모두가 제 정신을 가다듬는 것이 필요한 때인 것 같다.
흔히들 “한국 축구는 기술이 뒤떨어진다”고 말한다. 허정무 감독도 “일본 선수들은 개인기가 잘돼 있기 때문에 전략을 제대로 펼 수 있지만 우리는 그렇지 못하다”는 말을 여러 차례 한 바 있다. 왜 한국 축구는 기술이 떨어질까? 이런 질문을 던지기에 앞서서 우리가 축구 발전을 위해서 얼마나 투자를 했는지 곰곰이 따져봐야 한다.
축구야말로 기본 기술이 승패를 좌우하는 운동이다. 그런데 그 기본기술이란 건 한 사람의 과학 영재를 키우기 위해 어렸을 때부터 특수 프로그램을 통한 영재교육을 실시하듯 선수들이 한창 자라나는 시절에 체계적으로 가르쳐야만 형성될 수 있다.
독일, 프랑스 등 유럽의 축구 선진국에서는 프로구단이 의무적으로 청소년 팀을 연령별로 보유하고 있다. 프로구단의 전문적인 기술이 축구 새싹에게 전수될 수 있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한 것이다. 우리의 영원한 맞수 일본의 경우에도 ‘원터치 플레이’ 등 축구 기술의 기본 개념을 중심으로 꿈나무들을 끊임없이 교육하고 있다.
반면 우리나라에서는 청소년들이 학교 이외의 별도 축구 프로그램을 갖추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리고 그 학교축구 역시 기본 기술의 습득보다는 승패에 연연하기 마련이다. 무슨 대회에서 입상해야만 그 학교의 명예가 빛나고, 축구단의 존속 근거가 생긴다. 그러다 보니 드리블, 패스 같은 기본기술보다는 지구력을 중심으로 한 체력 훈련에 열중한다.
어디 그 뿐인가? 일본의 경우 축구 선진국에 어린 선수들을 일찍부터 보내 훈련을 시키고 있다. 몇 해 전만 해도 우리보다 열세였던 일본축구는 선진기술을 착실히 습득해 이제 확연히 아시아의 울타리를 벗어나고 있다. 반면 우리나라는 일본과 2002년 월드컵대회의 공동주최국이면서도 ‘아시아 축구의 맹주’라는 허명에만 매달리는 게 아닌지 하는 의문이 든다.
단지 ‘하면 된다’는 정신력만으로는 기술을 기반으로 한 선진 축구강국을 이길 수 없을뿐더러, ‘아시아 축구의 맹주’ 자리도 내놓아야 할 것이다. 투자는 1/10도 않하고 성적은 무조건 1등을 바라는 것이야말로 한국 축구의 잘못된 환상을 키우는 일이다. 우리 축구에서 부족한 것은 단지 기본 기술만이 아니다. 축구 역시 과학이다. 체력만으로는 뒷받침할 수 없는 것이 현대 축구의 특징이다.
일전에 한 축구 감독으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다. 그는 축구 경기에서 코너킥을 왼쪽에서 할 경우 76%의 득점 확률이 나타나고, 반면에 오른쪽에서 할 경우 24%의 득점확률이 나타난다는 말을 해주었다. 이는 오른발잡이들이 많기 때문이다. 이런 과학적인 데이터를 토대로 수비를 할 경우에는 오른쪽보다 왼쪽 수비를 더욱 강화해야 한다는 분석이 나온다는 주장이다.
그는 또 하나의 재미있는 사례를 들었는데, 예를 들어 논스톱 슛의 골 성공 확률은 68%인데, 투터치로 슛하면 확률은 20%, 3번의 터치 때는 7%로 떨어진다는 수치를 제시했다. 우리 선수들은 이런 기초 이론을 몰라 논스톱 슛을 할 마음의 준비를 못한다고 그는 털어놓았다. 과학적 이론이 뒷받침되지 않는 실기가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은 뻔한 이치다.
물론 축구인들이 하기 싫어서 안하는 건 절대 아니다. 문제는 사회적인 지원 체계가 마련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국제대회에 나가서 무조건 이기고만 돌아오기를 바랄 것이 아니라, 우리 축구가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출 수 있도록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교육훈련 프로그램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온국민이 국가대표처럼 뛰자
이제는 2002년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때까지 우리 스스로가 한국을 대표하는 축구선수가 되어보자. 한국축구가 월드컵 축제를 리드할 수 있도록 온국민이 축구선수가 되어보자. 축구에 대한 국민적인 애정과 적극성이 축구를 위해 과감하고 계획적인 투자를 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할 것이다.
월드컵 경기를 여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나라 축구가 세계 수준에 성큼 다가서는 훌륭한 경기를 보여준다면 이것도 세계 속에 한국의 기개를 널리 알리는 길이 될 것이다.
2002년 월드컵에서 한국 축구가 정말 우수한 성적을 거두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우리 국민 모두가 들썩이고 삼천리 반도가 한번 마음껏 들떠 봤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지금부터 한국 축구를 위해 모두가 아낌없이 투자해야 한다. 돈과 마음과 정성 모두를 보태야 하겠다. 왜 못하느냐고만 꾸짖을 게 아니다. 우리도 남들만큼 투자하고 노력한 뒤라면 원망할 권리가 있겠지만, 맨 땅에서 우승만 하라고 주장해대면 얼마나 답답한 노릇이겠는가?
나는 2002년 월드컵 그 날까지 한국 축구가 최소한 8강에 진출할 수 있도록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고 싶다. 꼭 그렇게 하려고 한다. 2002월드컵은 단순한 운동경기가 아니다. 월드컵은 세계 속에 다시 한번 한국을 우뚝 세울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나는 시드니올림픽에 출전한 우리 선수들을 격려하기 위해 호주를 방문했을 때 북한의 국제올림픽위원(IOC)인 장웅씨와 만난 일이 있다. 그 자리에서 일제시대에도 우리 민족의 화합과 단결에 주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경평 축구를 빠른 시일 내에 재개하자는 제의를 포함, 남북한 체육교류의 필요성에 대해 폭넓은 의견을 나눴다. 그때 장웅 위원은 북한 축구 재건에 시간이 다소 필요하다는 의견을 밝혔다.
이후 제3차 남북장관급회담에서 서울과 평양을 오가는 경평축구 개최를 긍정적으로 검토키로 했다는 소식을 듣고 반가운 마음 금할 길 없었다. 1929년부터 남북 분단으로 인해 마지막이 된 46년까지 23차례나 치러진 경평축구는 단순한 체육행사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그라운드에서 남북한 선수들이 서로 몸을 부딪치며 하나의 목표를 향해 매진하는 경평축구가 개최된다면 올림픽에서 남북한 동시입장을 성사시킨 데 이어 체육 분야에서 통일의 단초를 마련하는 또 하나의 쾌거를 일궈내는 셈이다. 서울 월드컵경기장이든, 평양 능라도경기장이든 쏜살같이 축구공이 날아가서 골 네트를 흔드는 순간 터져나올 남북의 하나된 환호성…. 정말 생각만 해도 가슴 설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이광남/숭민그룹 회장
골목에서 동네 아이들과 함께 고무신짝을 끌며 새끼뭉치나 작은 고무공을 차며 놀던 때부터 나는 축구와 인연을 맺었다. 물론 우리나라 사람 치고 축구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또 싫어하는 사람도 별로 없다. 우리의 경제사정이 몹시 어려웠던 시대에도 그랬다. 제대로 된 축구공이 없을 때도 아이들은 발로 차기에 적당한 둥근 물체만 있으면 떼로 몰려다니며 차고 놀았다. 다른 운동에 비해 특별한 장비가 없어도 되고 따라서 비용이 훨씬 덜 든다는 점 때문인지 우리 국민에게 축구는 일찍부터 친근한 운동이었다.
축구를 좋아하는 것이 우리에게만 한정된 이야기는 아니다. 최근 월드컵 중계를 보면 유럽과 남미를 비롯한 세계의 거의 모든 나라 사람들이 축구에 열광하고 또 즐기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경기장에 가서 보면 저들의 축구사랑은 우리가 생각하는 정도가 아니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 그들은 거의 미칠 듯이 축구를 좋아하고 그래서 축구장에 나와서도 미친 듯이 응원한다. 축구는 그들의 생활이며 문화다.
그만큼 그들은 축구에 막대한 투자를 한다. 실제로 월드컵 축구의 시청자가 올림픽 시청자보다 두배 이상 많다는 통계가 있다. TV중계권료도 그만큼 비싸다고 한다. 그런 차원에서 보면 축구는 오락이나 스포츠의 차원을 넘어 이미 거대한 산업으로 발전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아닌게 아니라 외국에선 엄청난 자본을 동원해 훌륭한 선수를 영입하는 프로축구단이 계속 생겨나고 있고 프로축구가 하나의 거대한 시장으로 기능하며 엄청난 부가가치를 창출하고 있다.
박종환 감독과의 인연
내가 축구를 좋아하는 것이 단지 사업적 계산 때문만은 아니다. 그저 축구가 좋고 축구인을 좋아하는 개인의 취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박종환 감독과 오래 전부터 친분을 갖고 있다는 것이 축구를 더욱 좋아하게 된 계기라 할 수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박종환 감독을 좋아했다. 그의 팬으로 경기에 따라다니다 보니 그를 ‘친형님’처럼 모시게 됐다. 그가 우리 청소년대표팀을 이끌고 멕시코 세계청소년축구대회에서 4강에 오르는 것을 보고 특유의 리더십에 큰 감명을 받았다. 당시 온 국민이 열광했고 나 자신도 우리 축구의 가능성에 흥분했다. 그 때까지 우리 축구는 비록 일본을 이기고 동남아에서 꽤 좋은 성적을 올리기는 했지만 세계수준에 비하면 아직도 동네축구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때문에 우리 청소년축구를 잘만 다듬고 정성들여 키우면 멀지 않아 우리도 세계무대에서 손색이 없는 팀으로 만들 수 있으리란 기대도 가졌다.
그래서 나는 개인적으로 어느 정도 사업이 궤도에 오르면 프로축구 구단을 운영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 나라같이 척박한 풍토에서 프로축구 구단의 운영은 ‘밑빠진 독에 물붓기’ 격으로 상당 기간 막대한 자금만 투입해야 하는 소비적 구조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다. .
그 때문에 프로축구 구단을 운영하겠다는 생각은 한동안 꿈속의 구상에 머물러야 했다. 그러다가 나는 드디어 그 때를 맞게 됐다. 나와 형제처럼 지내는 박종환 감독이 국가대표팀은 물론 대학강단에 서는 일도 그만두고 멀리 외유를 떠났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는 결심했다. 축구를 잘아는 감독, 그리고 우리 축구 역사상 전례없이 뛰어난 성적을 올린 감독의 탁월한 지도력과 기술력을 썩히게 만들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의 재능이 너무 아깝고 우리 축구의 미래가 너무 어둡다는 생각도 했다. 그래서 나는 국제전화를 통해 박감독의 의사를 타진하고 함께 축구팀을 만들자고 결의했다.
나는 우리 축구의 현실에서 남자팀보다는 여자 팀을 만들기로 마음먹었다. 남자팀은 이미 여러 곳에서 운영하고 있고 또 프로리그까지 만들었기 때문에 뒤늦게 새로운 팀을 만드는 것보다는 여자팀을 새롭게 만드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나는 미국에서 열린 여자월드컵을 지켜보면서 우리 여자팀을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일이 시급하다고 생각했다. 아닌게 아니라 우리나라 여성들은 유난히 구기종목에 강하다는 생각도 했다. 핸드볼이나 농구 심지어 배드민턴과 하키에서도 좋은 성적을 내는 한국 여성들이 축구에서도 기적을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미국월드컵에서 북한은 본선에 올라 선전하는 상황이었고, 이웃나라 중국은 결승에 올라 미국과 정상을 다투는 실력을 보였다. 당연히 나는 우리 여자선수를 제대로 훈련시키면 세계수준에 오를 수 있다고 자신했다.
나는 숭민원더스 여자축구팀을 창설했다. 그리고 박종환 감독을 단장으로 모셨다. 팀을 박감독에게 맡기면 기필코 세계 정상팀들과 어깨를 겨눌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나는 숭민 원더스의 운영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나는 우리 구단에 남다른 애정을 갖고 있다. 우리 숭민원더스가 출전하는 경기에는 바쁜 일정을 쪼개 빼놓지 않고 그룹 사장들을 모시고 관전한다.
경기도 광주의 내 사무실 창밖으로 운동장에서 연습하는 선수들을 바라보는 것도 내 일과처럼 되었다. 그것은 나의 사업운영에도 큰 활력을 주고 있다.
나는 우리 숭민원더스 팀만으로 우리 여자축구가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여자월드컵의 인기가 해를 거듭할수록 고조되고 심지어 올림픽에서까지 여자축구가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는 마당에 우리 나라도 이제는 체계적으로 여자축구 선수를 길러내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이다.
여자대표팀을 키운다는 사명감
나는 2002년 월드컵 경기에 앞서 세계의 강호들을 초청해 이 땅에 여자축구 붐을 조성할 계획도 세워놓고 있다. 그렇게 해서 우리 여자대표팀이 2003년에 열리는 여자월드컵에서는 세계의 정상팀들과 어깨를 겨눌 수 있게 한다는 구상이다.
나는 여자축구만이 아니라 한국축구 전체의 발전가능성도 모색하고 있다. 나는 우리 축구가 지난번 시드니올림픽과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부진한 성적을 거둬 국민들로부터 질책을 받은 것을 잘 알고 있다. 특히 2002년 월드컵을 유치한 상황에서 공동개최국인 일본 축구의 비약적 발전에 비해 답보상태에 있는 우리 축구에 대해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깊은 우려감도 갖고 있다.
하지만 다른 모든 분야와 마찬가지로 축구도 하루 아침에 성적이 좋아지게 할 수는 없다. 우리는 그동안 엄청난 투자와 국민의 지원으로 프로축구 리그를 만들었다. 도처에 좋은 경기장을 짓기 위해 애쓰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 축구를 세계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장기적인 축구발전계획과 그에 따른 끈질긴 투자가 있어야 한다. 도처에 잔디구장을 만들고 우리 청소년들이 어렸을 때부터 축구를 즐기며 기술을 연마할 수 있도록 동네마다 유소년팀을 만들고 초·중·고교팀을 늘리려 한다.
몇 사람의 선수를 양성하는 엘리트체육 시스템이 아니라 국민체육, 사회체육, 학교체육 차원에서 전국민이 건강한 생활을 위해 즐길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일본의 경우도 단지 J리그의 창설로 축구발전을 마무리한 게 아니다. 일본은 60년대부터 초·중·고교 축구를 장려해 유능한 인재를 발굴, 매년 1천5백명 정도를 브라질 등 축구선진국에 유학보냈다. 97년엔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축구구장으로 평가받은 후쿠시마 ‘J 빌리지’까지 만들어 선수들이 적은 비용으로 좋은 시설에서 합숙훈련을 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일본축구협회의 노력으로 축구에 대한 일본 국민의 관심과 애정도 점점 높아지고 있다. 이렇게 체계적이고 장기적인 투자를 통해 일본 축구는 지금 우리보다 한발 앞서게 됐다.
따라서 지금 당장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대표팀 감독을 누가 맡느냐’ 하는 단기적 처방 못지 않게 미래를 내다보는 장기적 발전계획의 수립과 착실한 실천이 다. 장기적인 계획이 있어야만 국민의 축구사랑을 유도할 수 있을 것이다. 국가적 계획에 앞서 우리 축구를 발전시키겠다는 뜻있는 이들의 노력과 헌신은 더욱 중요하다. 여자축구를 육성하겠다는 나의 작은 노력이 우리 축구발전에 밑거름이 된다면 더 이상 큰 보람이 없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