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계 신데렐라’에서 ‘실패한 기업인’의 표본으로 급락했던 32세의 청년사업가. 그가 백발 성성한 장년의 모습으로 우리 앞에 돌아왔다. 꼭 21년 만큼의 피와 땀과 투지를 끌어 모아 이루어낸 대역전 드라마. 재벌이 아닌 전문기업으로 되살아난 율산에서 한국 경제는 무엇을 배울 것인가.
센트럴시티가 들어선 1만8781평 대지는 땅값 비싸다는 강남에서도 ‘금싸라기’에 해당하는 곳이다. 반포천 복개 주차장 1만여 평까지 합친 감정가는 약 6000억 원. 여기에 건물 값어치까지 합산하면 센트럴시티의 자산 규모는 1조800억 원에 이른다.
23년 전, 복부인들조차 외면하던 배추밭 시외버스터미널 부지를 사들여 오늘의 ‘도시(시티)’로 변모시킨 이는 신선호(申善浩·53) (주)센트럴시티 회장이다.
70년대 ‘율산(栗山) 신화’의 주인공. 79년 외국환관리법 위반 및 업무상 횡령 혐의(횡령 부분은 이후 재판에서 무죄 확정)로 구속되면서 ‘재계 신데렐라’에서 ‘실패한 기업인’의 표본으로 급락했던 비운의 청년사업가. ‘한 번 망하면 아주 간다’는 한국의 재계 풍토에서, 그는 꼭 21년만큼의 피와 땀과 투지를 끌어 모아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던 역전의 드라마를 연출해냈다. 센트럴시티는 율산의 후신(後身)에 다름 아니었다.
신회장이 구속된 것은 79년 4월3일. 그가 지난 9월1일 메리어트 호텔 개관식 자리를 빌어 공식석상에 재등장하기까지는 무려 21년 5개월, 날 수로 따져 8857일이라는 긴 시간이 필요했다. 그동안 ‘율산의 신선호’ 혹은 ‘신선호의 율산’은 도대체 어떤 세월을 살아낸 걸까.
“나는 자유인이야!”
9월29일 오전 11시 30분, 궁금증을 풀기 위해 신세계 백화점 10층에 있는 (주)센트럴시티 사무실을 찾았다.
“회장님께선 인터뷰를 싫어하십니다. 혹 때가 맞으면 얼굴이나 뵐 수 있을지….”
전화로 이렇게 말해주었던 기획부장은 마침 다른 일로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칸막이 뒤로 저만치 넘겨다 뵈는 한 백발신사의 뒷모습에 자꾸 시선이 갔다. 홍보담당 직원에게 넌지시 물었다.
“저 분, 신선호 회장님 맞지요?”
“네, 맞습니다.”
거기 자신감 넘치는 청년실업가 대신 백발 성성한 ‘장년의 신선호’가 서 있었다. 급한 마음에 무작정 다가섰다. 임원들과 대화를 마치고 돌아서던 신회장은, “신동아 기자”라며 인사를 건네자 그 자리에 멈칫 섰다. 마지못해 명함을 받아드는 손길에서 당황스런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난감한 시간이 길어지는 게 싫었던 걸까, 신회장은 인사 한 마디 없이 몸을 돌려 갈 길을 재촉했다. 뒤를 좇는 과정에서 한 임원과 작은 실랑이가 벌어졌다. 별안간 뒤편에서 격앙된 목소리가 들렸다.
“왜 남의 회사에 와서 횡포야?”
“죄송하다”며 좀 더 가까이 다가서자 신회장은 한 번 더 언성을 높였다.
“나는 자유인이야! 내가 살고 싶은 대로 살 권리가 있다구!”
신회장과의 조우는 이렇듯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끝을 맺었다. 잠시 고성이 오갔던 임원과는 곧 오해를 풀었지만, 마음 속에선 몇 가지 의문이 고개를 들었다. 신회장을 찾은 것은 지난 20여년 간의 힘겨웠던 재기 과정과 앞으로의 계획 등을 듣기 위한 것이었다. 언론마저 ‘보기 드문 경우’라며 감탄해 마지않는 ‘율산 부활’이 그는 조금도 기쁘지 않단 말인가.
또 한 가지. 인터뷰 요청에 대한 신회장과 직원들의 반응이다. 보통의 기업인이라면 ‘성공기’를 취재하러 오겠다는 데야 굳이 거부할 이유가 없을 것이었다. 설사 싫다 해도 그토록 강력한 거부반응을 보일 필요가 있었을까. 원치 않는 취재의 대상이 된 모든 사람들이 “나는 자유인”이라고 외치는 것은 아니다. 성품 탓이라기엔 이립(而立)의 나이에 대그룹을 이끌었던 전력이 무색하고, 세상 탓이라면 무엇이 그를 그토록 낯가리게 만들었는지 궁금하지 짝이 없는 노릇이었다.
신선호 회장과 재회한 건 10월 6일, 그의 부친인 율산 신형식(申衡植·99세) 옹의 백수연(白壽宴)과 어머니 임옥빈(林玉彬·88) 여사의 미수연(米壽宴)을 겸한 자리에서였다. 센트럴시티 중앙부 ‘센트럴웨딩’에서 열린 연회는 직계손들과 임여사가 집사로 봉직 중인 광주중앙교회 신도들만이 참석한 가운데 조촐하게 진행됐다. 행사가 파한 뒤 식장 밖 로비에서 신회장을 만났다. “지난번엔 본의 아니게 결례했다”며 한껏 고개를 숙였지만 역시 반응은 묵묵부답. 미소는커녕 말 한 마디 없이 돌아서는 모습에서 ‘기자와는 상대하지 않겠다’는 강한 고집이 엿보였다.
신회장은 7남 2녀 중 여섯 번째 아들이다. 장남 은호씨는 하버드대 박사 출신의 물리학자. MIT를 거쳐 마이애미대 교수로 있다. 2남 상호씨는 (주)타임포인트디자인 회장, 3남 동호씨는 버클리대와 피츠버그대에서 각각 생화학과 의학박사학위를 받은 뒤 미국에서 안과 의사로 활약 중이다. 4남 춘호씨도 마이애미대 화학박사 출신. 같은 대학 교수를 거쳐 미국 소재 화학회사에 근무하고 있다. 5남 명호씨는 행정고시 합격 후 재무부 제2차관보, 주택은행장을 거쳐 현재 아시아개발은행 부총재로 재직 중. 막내 아들 민호씨는 경기대 경제학부 교수, 장녀 연영씨와 둘째 딸 혜영씨는 미국에서 각기 사업가와 공인회계사로 활약하고 있다.
얼른 훑어보아도 만만치 않은 이력들이다. 어쩌면 누구 하나 모자람 없이 이렇게들 잘 풀렸을까. 그러나 화려하게만 보이는 가족사에도 ‘율산 부도’의 아픈 상처는 여전히 어두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
75년 6월17일. 남대문 근처 그랜드빌딩 302호실에 경기고등학교 동문인 엘리트 청년 7명이 모여들었다. 리더는 서울대 응용수학과 출신 신선호(당시 28세). 그는 부친의 호를 빌어 ‘율산실업’이란 작은 무역회사를 차렸다. 자본금 100만 원의 일개 오퍼상에 불과했던 율산은 그 해 말 일약 340만 달러의 수출실적을 올리면서 세인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 곧이어 신진알미늄과 금룡해운, 동원건설을 인수하고 76년 4300만 달러, 77년에는 1억6500만 달러 수출에 성공해, 삼성 현대 대우 등 쟁쟁한 재벌그룹들의 뒤를 이어 13번째 종합무역상사로 지정받기에 이른다. 그 결과 회사 설립 3년 후인 78년 말에는 자본금 100억 원, 종업원 8000여 명에 14개 계열사를 거느린 재벌그룹으로 급부상하게 되었다.
그러나, 여기까지였다. 사세가 절정에 이르렀던 78년, 위기는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당시 그룹 기획실에 근무했던 김모씨는 “78년 말, 벌써 월급이 제대로 안나오기 시작했다. 관리 체계도 허술해져 수출선이 들고나던 부산항에선 ‘율산 돈 못 먹으면 바보’라는 말이 유행하기도 했다”고 술회한다.
승승장구하던 율산이 창업자 구속-부도-공중분해라는 최악의 수순을 밟게 된 연유에 대해선 이미 수많은 진단과 증언이 쏟아져 나와 있다. 간략히 정리하면 ▲단기성 자금을 고정자산에 묶어놓는 등 관리능력 부족 ▲차입 경영으로 몸집 불리기 몰두 ▲주 수출국이던 사우디아라비아와의 마찰이 과장돼 자금 시장 신용도 하락 ▲저돌적이고 독창적인 경영 스타일이 기존 재벌들의 반감을 삼 ▲부동산 경기 냉각으로 인한 소라아파트 분양 차질 등이다.
이에 덧붙여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 정치적 외압설. 율산 측에서는 79년 1월25일 발생한 신회장 납치사건이 그 직접적 도화선이 됐다고 주장해 왔다. 괴청년들에 납치됐다 극적으로 탈출한 신회장이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범인들이 정부 고위 비서실을 사칭하는데다, 도심의 경제기획원 구내에서 만나자고 해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는 말을 한 것. 이 ‘솔직한’ 답변이 당시 청와대비서실장이던 김계원(金桂元)씨의 심기를 건드려, 율산과 채권은행단 간에 거의 합의돼 있던 90억 원 규모의 금융지원 방안이 돌연 취소되는 등 그룹에 암운이 끼기 시작했다는 설명이다.
꼭 그것이 아니더라도 율산 정리 과정을 살펴보면 석연치 않은 점을 여럿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일까, 취재 중 만난 옛 율산맨 중에는 아직도 심중에 ‘억울하게 당했다’는 울분을 품고 있는 이가 적지 않았다. “젊고 정직했던 까닭에 정권에 아부할 줄도, 돈 써가며 로비 할 줄도 몰랐다. 그게 죄가 되느냐”는 항변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신회장이야말로 지난 20여년을 말로 표현할 길 없는 분노와 절망에 시달리며 고통스럽게 살아오지 않았을까.
79년 3월20일, 신씨 집안 3형제는 느닷없이 들이닥친 ‘요원’들에 의해 모처로 연행됐다. 신선호, 신상호, 그리고 신명호. 율산그룹에 몸담고 있던 신상호씨는 원래 전남대 철학과 교수였다. 동생 일을 돕고자 교수직을 버렸던 것.
당시 재무부 국제금융과장이던 신명호 씨는 68년 행정고시에 합격, 이헌재 임창열과 함께 ‘이재국 3총사’으로 불리며 고속 승진을 거듭하고 있었다. 그런 신명호 씨마저 사무실로 들이닥친 사내들에 이끌려 어디론가 사라졌다. 당시 청와대 파견 검사였던 동창조차 행방을 찾는 데 꼬박 하루가 걸렸다고 한다. 조사 후 별다른 혐의가 드러나지 않아 옷 벗는 일만은 면했지만, 이후 그의 공직생활은 주위의 기대만큼 잘 풀려가지 못했다.
‘3총사’ 중 하나였던 이헌재씨도 율산 사태로 인생의 큰 굴곡을 경험한 사람이다. 금융정책심의관이라는 직책상 사건의 책임을 지고 사퇴할 수밖에 없었던 것. 그가 재정경제부(재무부 후신) 장관으로 금의환향하기까지는 꼭 20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3형제는 조사를 받는 와중에 모진 고초를 겪은 듯하다. 이미 옛 일이 된 탓일까, 가족 모임에서 간혹 그 때 얘기가 화제에 오르면 “손가락을 어찌나 세게 꺾던지 지금도 시리고 아프다”는 말이 농담처럼 툭 튀어나오기도 한단다. 특히 신회장은 당시의 후유증으로 인해 한동안 육체적으로도 힘든 나날을 보내야 했다.
한가지 의문점은 3형제가 끌려간 ‘모처’가 보안사 서빙고분실이었다는 신회장 최측근의 증언이다. 경제사범을 왜 검찰도, 그렇다고 당시 최고의 권력기관이던 중앙정보부도 아닌 보안사에서 연행·조사한 것일까. 신회장이 “아직은 말할 때가 아니다”라며 함구하고 있는 한 액면의 진실이 밝혀지기는 어려운 노릇이다.
1심에서 징역 7년, 2심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은 신회장은 사건이 대법원에 계류 중이던 80년 7월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1년이 넘는 복역 기간 동안 그는, 어린 아들의 사진을 한시도 놓지 않고 들여다보며 가슴에 쌓인 한을 달랬다고 한다. 보석 중이던 83년 4월 13일, 드디어 대법원 판결이 났다. 징역 5년에 집행유예 4년. 피 말리는 시간들이었다.
집행유예가 끝날 무렵인 85년까지 신회장은 대부분의 시간을 논현동 자택에서 보냈다. 한 지인은 그 때의 생활에 대해 “소식이 궁금해 찾아가 가보면 양주(兩主)가 나란히 화선지를 펼치고 앉아 한 편에선 난을 치고 또 한 편에선 글씨를 쓰고 있었다”고 전한다. 알고 보면 신회장 부부에게 서도는 고아한 취미, 그 이상의 무엇이었다.
친지에 따르면 신회장과 부인 부정애 씨는 각기 경기고와 이화여고에 재학 중이던 시절, 동양화의 대가 청전 이상범 선생 문하에서 서도를 배우며 첫 만남을 시작했다. 부씨는 조선일보 주필, ‘사상계’ 편집인을 지낸 당대의 문사 부완혁씨(작고)의 딸이다. 15세 때 국전 서예 부문에서 최연소 입선, 화제를 모았던 재원. 후에 서울대 역사학과에 입학했다. 신회장은 경기고 시절 서도부에 가입하면서 본격적으로 붓을 잡기 시작했다. 그 역시 재능이 많았던지 대학 1학년 때 유수의 미전에서 특선을 차지해 주위를 놀라게 했다. 나란히 대학생이 된 두 사람은 여초 김응현(金膺顯) 선생을 스승 삼아 서울대에 서도회를 만들기도 했다.
오랜 기간 사랑을 키워 온 두 사람은 자연스레 결혼을 이야기하게 됐다. 그러나 곧 양가의 거센 반대에 부딪혔다. 부씨는 건강이 좋지 못했다. “수술을 하지 않으면 서른 살을 넘기기 어렵고, 출산도 쉽지 않다”는 진단이었다. 부완혁씨는 “건강 상태도 좋지 않은 딸아이를 시집보낼 수 없다”고 했고, 신씨 집안 역시 같은 이유로 사돈 맺기를 주저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끈질긴 설득전을 펴 마침내 결혼에 성공했다.
부씨는 위태로운 상황 속에서도 용감하게 아이를 낳았고 두 차례의 대수술도 무사히 이겨냈다. 주변 사람들은 이들을 두고 “동지애로 맺어진 아주 특별한 부부”라 칭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어떤 이는 “신회장이 곧이곧대로 믿고 따르는 이는 부인뿐일 것”이라는 이야기를 곁들이기도 했다.
신회장의 장인 부완혁씨가 작고한 건 85년 1월이었다. 70년 ‘사상계’에 김지하의 담시 ‘오적’을 실어 옥고를 치르기도 했던 그는, 사위가 수감되면서 풍비박산이 난 율산의 회장자리에 앉아 갖은 고난과 풍상을 대신 겪어 주었다. 또한 유고(遺稿)조차 율산 부도의 부당성을 조목조목 지적하는 내용으로 채워놓았을 만큼 사태 해결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래서일까. 장인의 빈소에서 신회장은 그간 쌓인 한을 다 풀어 내놓듯 몹시도 섧게 울었다고 한다.
터미널 부지 지켜낸 사연
이제 사연 많은 땅, 센트럴시티의 연원(淵源)을 짚어보자. 사는 집마저 담보로 잡혀야 했던 급박한 상황에서, 신회장은 어떻게 1만8781평의 금싸라기 강남 땅을 고스란히 지켜낼 수 있었을까.
율산이 서울시로부터 이 땅을 구입한 건 77년 4월. 평당 7만원, 총 13억여 원을 지불했다. 황무지나 다름없는 땅, 터미널 부지로 묶여 있어 용도조차 제한됐던 이 곳을 신회장은 높이 평가했다. 이미 그의 머리 속에는 복합문화생활공간의 아이디어가 들어 있었던 것이다.
78년 3월 율산은 가건물을 지어 호남·영동선 고속터미널 영업을 시작했다. 이어 본 건물 신축을 위한 허가를 제출하고 터파기 공사에 들어갔다. 그러나 지하 2층을 파 내려가던 79년 4월, 전면적인 부도 사태에 직면하면서 공사는 결국 중단되고 말았다.
당시 호남터미널에 근무했던 김모씨는 “지금 센트럴시티의 모습은 22년 전 계획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빌딩을 지어 아래층은 터미널, 중간층은 전문상가, 그 위는 호텔로 활용하겠다는 것이 신회장의 구상이었다. 건물 뒤 하천 복개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심지어, 멀티플렉스(상영관이 여러 개 있는 복합극장)에 대한 계획까지 잡혀 있었다. 멀티플렉스가 우리나라에 본격 소개되기 시작한 것이 겨우 5년 전 안팎의 일임에 비춰보면 놀라운 혜안이 아닐 수 없다.
신회장은 부도 직전 과천 서울랜드 공사를 수주했고, 석촌호수 주변에 백화점 및 종합레저시설을 설립하려 땅 매입을 계획 중이었다. 율산 부도와 함께 모든 일이 수포로 돌아가버리고 말았지만, 석촌호수 프로젝트의 경우 ‘롯데월드’라는 이름으로 실현돼 해마다 롯데그룹에 막대한 이윤을 남겨주고 있다.
율산 부도가 터지자 채권은행단은 한푼이라도 건지기 위해 계열 기업은 물론 회사의 모든 자산을 팔아치우기 시작했다. 터미널 부지도 당연히 그 대열에 끼여 있어야 했다. 그런데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 땅 주인은 율산이지만 법적으론 여전히 서울시가 소유주로 돼 있었던 까닭이다.
77년 율산이 이 땅을 매입할 당시에는 서울시의 환지 확정이 이루어지지 않아 율산측으로 소유권이 넘어가지 못했다. 82년 10월 환지확정이 됐음에도 서울시는 여전히 소유권을 넘기지 않았다. 애초 서울시가 율산에 터미널 부지를 매각할 때, 용도를 터미널로 못박고 계약서에 ‘일정 기간 내 터미널을 건축하지 않을 경우에는 계약을 무효로 할 수 있다’는 단서조항을 달아놓은 때문이다. 즉 ‘고속버스터미널을 완공해야만 소유권 이전 등기를 해주겠다’는 조건이었다.
채권단으로서는 멀쩡한 땅을 두고도 팔 수가 없으니 답답한 노릇이었다. 서울시가 붙여놓은 복잡한 조건이, 결과적으로 율산 재기(再起)의 유일한 ‘밑천’을 붙잡아두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셈이다.
부지 매각이 여의치 않자 채권은행단은 복합건물을 신축해 그 수익금으로 부채를 갚겠다는 율산측의 제의를 적극 검토하기 시작했다. 82년 율산은 주거래은행이던 서울은행(당시 서울신탁은행)과 터미널 신축에 대한 약정을 체결했다. 그러나 은행 측의 사정으로 약정 체결 3년 후인 85년 5월에야 수도권정비심의 실무회의(위원장 건설부차관)를 통과했다.
남은 과제는 재무부가 수도권정비심의위원회(위원장 국무총리)에 터미널 신축안을 상정시켜 통과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재무부는 적극적으로 나서주지 않았다. 여건 조성에 시간이 필요하고 채권은행단 간 협의가 미진하다는 것이 이유였다. 엄청난 물의를 빚은 율산을 다시 일어나도록 돕는 것은 사회정의에 어긋난다는 뜻도 밝혔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율산 사태 당시 재무부는 국장급 2명과 은행장 4명이 해직되는 등 깊은 상처를 입었다. 그러니 율산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갖고 있었겠느냐”는 수군거림이 터져 나오기도 했다.
율산과 재무부의 갈등은 87년 1월, 재무부가 경제기획원과 협의, 터미널 부지를 금호그룹에 넘기기로 했다는 소문이 나돌면서 절정에 달했다.
금호그룹은 83년 이후 줄기차게 정부 요로에 민원을 제출, 터미널을 계속 가건물로 둘 수는 없지 않느냐는 이유로 매각을 청원해 왔다. 광주고속이 섬유단지조성도매상가협의회와 손잡고 터미널을 짓겠다는 의사표시였다.
당시 정인용(鄭寅用) 재무장관은 김만제(金滿堤) 부총리와 합의, 빠른 시일 내에 터미널 부지를 금호그룹에 넘기기로 방침을 정하고, 서울시와 서울은행으로 하여금 구체적인 절차를 진행토록 했다. 율산에 맡겨놓았다간 도저히 터미널 신축을 할 수 없을 뿐더러, 엄청난 물의를 일으켰던 율산에 거액의 신규 금융지원을 해 줄 수도 없으니 같은 호남재벌인 금호그룹에 넘기는 게 현실적이라는 이유였다.
그러나 율산의 한 관계자는 전혀 다른 분석을 내놓았다. “김만제 부총리와 금호그룹 박성용 전회장은 매우 절친한 사이였다. 박 회장이 그 친분을 이용, 과욕을 부린 것이다”. 그는 또 “금호그룹은 부지에 걸려 있는 부채가 많다는 이유로 단돈 1원에 입찰에 나설 예정이었다”고 밝혔다.
사실이 어떻든, 결과적으로 이 거래는 성사되지 않았다. 소문이 기사화되면서 ‘금호그룹에 특혜를 주는 것 아니냐’는 여론이 일었던 것. 그러나 이 사건은 신회장이 회사 일에 더욱 적극적으로 매달리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당시 센트럴시티(전 서울종합터미널(주))는 신회장이 갖고 있는 유일한 회사였다. 고속버스 매표 수수료(표 값의 4~7%)와 약간의 상가 임대료, 직영하던 한가람문고 매출액이 수입의 전부. 연간 총 매출액이 30억 원(87년 기준)을 약간 웃도는 빈약한 회사였지만 신회장이 재기를 꿈꿀 수 있는 단 하나의 불씨였다.
출옥 후 칩거하던 신회장은 83년부터 터미널 가건물 2층에 위치한 사장실에 간혹 모습을 비추기 시작했다. 85년부터는 매일 출근했으나 회사 경영 및 대외 교섭에는 직접 관여하지 않았다. 당시 그의 최대 관심사는 컴퓨터. 사무실에 컴퓨터 한 대를 갖다놓고 독학을 했다. 한 번 시작한 일은 끝장을 보고야 마는 것이 그의 성품. 신회장은 그 성격대로 새 분야에 매달려, 85년쯤에는 신축 건물의 레이아웃을 직접 프로그래밍할 정도의 수준에 도달했다.
신회장의 성품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는 대체로 일치한다. 말수 적고 극히 내성적인 성격, 마음 먹은 일은 꼭 해내고 마는 집념과 끈기, 다방면에 걸친 해박한 지식, 과묵한 이미지 뒤에 숨겨져 있는 예인 기질. 사교생활도 거의 하지 않으며, 조용한 곳에 숨어 일에 몰두하길 즐기는, 기업인에 대한 일반의 통념과는 좀 거리가 먼 인물이다. 젊은 시절엔 술·담배도 거의 하지 않았으나, 요즘은 위스키 두 병을 혼자 마실 수 있을 만큼 주량이 늘었다.
율산 출신의 한 법조계 인사는 신회장을 “매우 현실적인 사람”이라 평했다. “사업 구상은 파격적이다. 보통 사람들이 보기엔 몽상적이기까지 하다. 그런데 그걸 실행하는 방식은 매우 실무적이고 현실적이다. 이름뿐인 것, 실제가 아닌 것, 자신의 경험이 아닌 것, 불필요한 요식행위들은 좋아하지 않는다.”
금호 인수설 후 신회장은 바짝 회사 사정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전히 앞에 나서는 일은 삼갔다. 시간이 나면 터미널 내 서점에 내려가 책을 읽었다.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전형적 ‘야행성 인간’인 신회장은 예나 지금이나 남다른 독서광이다. 분야는 경제·경영·컴퓨터 쪽에 치중해 있다.
겉으로는 조용한 생활이었지만 내부 사정은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가장 시급한 것이 건물 신축에 돈을 댈 전주(錢主)를 찾는 일이었다. ‘정부의 허가를 얻고 돈을 끌어들여 새 건물을 짓는다’. 신회장, 그리고 율산이 살 길은 오직 그 하나 뿐이었다. 원금에 이자, 연체료까지 합쳐 눈덩이처럼 불어난 빚이 하루하루 목을 죄어오고 있었다. 건물을 짓지 못하면 돈 벌 길이 없고, 그래서는 빚을 갚을 날 또한 요원할 수밖에 없었다.
율산의 전주 찾기 노력은 눈물겨울 정도였다. 은행돈을 빌리면 간단한 일이었지만 막대한 채무에 시달리는 부실기업의 손을 선뜻 잡아줄 은행은 어디에도 없었다. 결국 율산은 타 기업을 상대로 합작 건설 방안을 모색했고 그 과정에서 진흥기업, 정우개발, 대우조선공사, 미도파, 대우그룹 등과 잇따른 접촉을 가졌다. 그러나 협상은 번번히 실패로 돌아갔다.
해결의 실마리는 뜻밖의 곳에서 찾아졌다. 롯데백화점에 업계 선두 자리를 빼앗기고 절치부심 중이던 신세계백화점이 강남 요지의 터미널 부지에 관심을 보인 것이다. 한쪽은 땅이 필요하고 또 한 쪽은 돈이 필요했던 만큼 협상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호텔신라와 삼성종합건설도 가세키로 했다. 88년 6월29일, 신회장과 삼성그룹은 ‘터미널복합건물 신축에 관한 기본합의’를 맺었다. 그러고도 신회장은 4년 가까운 시간을 더 기다려야 했다.
92년 11월12일, 수도권정비심의위원회에서 율산 측이 제출한 종합터미널 신축계획안이 거의 원안대로 통과됐다. 반포동 호남·영동선 터미널 가건물을 헐고 지하 3층, 지상 16층, 연건평 4만6881평의 백화점·호텔·터미널 복합건물을 짓겠다는 것이 주 내용이었다. 삼성그룹의 가세가 채권은행단과 정부에 신뢰를 준 것이다. 이태 후인 94년 11월, 관할구청인 서초구청의 건축 허가가 떨어졌다. 같은 해 12월, 드디어 5년 6개월의 ‘대장정’이 시작됐다.
애초 율산은 공사비로 900억~1000억 원이 들 것을 예상했다. 사업비 전액은 신세계백화점과 호텔신라가 임대보증금 선납 형식으로 부담키로 했다. 공사는 삼성종합건설에 맡게 됐다. 그런데 93년으로 예정돼 있던 착공이 한 해 미뤄지면서 몇 가지 큰 변화가 생겼다.
우선 호텔신라와의 계약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다. 제주신라 건설로 자금사정이 좋지 않았던 호텔신라는 율산 쪽에 다양한 부가조건들을 제시했다. 그 중에는 율산이 받아들이기 힘든 것도 있었다. 결국 호텔신라 입주 건은 백지화됐고 신회장은 새로운 파트너를 물색해야 하는 난관에 봉착했다. 다행히 신회장에게는 89년 9월 29일 법인 설립해 놓은 센트럴관광개발(주)이 있었다. 이후 호텔 건설 사업은 센트럴관광개발 쪽에서 주도하게 된다.
굳이 호텔 쪽 법인을 따로 설립한 데는 은행 차입을 쉽게 하려는 의도도 적지 않았다. 센트럴시티에는 해결 못한 율산 부채 1700여억 원(원금 430억원, 이자 1270억원)이 그대로 달려 있었다. 이 상태로 은행 융자를 받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호텔 시공 법인을 분리함으로써 그쪽만이라도 은행 돈을 쉽게 끌어쓸 수 있도록 하려는 고육지책이었다.
한편, 삼성종합건설의 가세도 무산됐다. 역시 서로의 조건이 맞지 않았다. 율산은 공개입찰에 응한 8개 건설사 중 현대건설을 파트너로 선택했다. 계약은 턴키(turn key)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자재 구입부터 감리까지 건축과 관련된 일체를 건설사가 일괄 수주하게 한 것이다.
가장 큰 문제는 역시 돈이었다. 막상 시작하고 보니 1000억 원 정도로는 어림도 없었다. 임대보증금을 선납키로 했던 호텔신라마저 떨어져나간 상태가 아닌가. 부족한 돈, 부족한 사람, 어그러지는 계획들. 공사는 시작부터 난항이었다.
첫 번째 복병은 뜻밖에도 ‘물’이었다. 그 정도 대형 건물을 지으려면 지하수 개발이 필수적이다. 그런데 15억 원이란 돈을 쏟아붓고도 수맥을 찾을 수 없었다. 고심하던 중 가톨릭 신자인 직원 배모씨가 다소 엉뚱한 제안을 했다.
“상도동 성당에 임응승 신부란 분이 계십니다. 추 하나로 수맥을 찾는데요. 그분한테라도 부탁해 보죠.”
이제는 은퇴한 임신부(78)는 그 때 일을 선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귀가 어두워 전화통화가 쉽지 않은 그를 대신해 측근이 당시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배시몬이라는 신도로부터 부탁을 받고 공사 현장에 갔습니다. 오래 헤맬 것도 없이 금방 찾았지요. 지하수맥 하나, 그리고 온천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센트럴시티는 지하수 외에 서울 시내에 두 개밖에 없다는 온천 중 하나를 갖게 됐다.
IMF가 살린 신선호
수맥은 찾았지만 공사 진행은 더디기만 했다. 돈이 부족한만큼 공기(工期) 단축이 절실했던 터미널 측으로서는 답답한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설계 변경이 있을 때마다 비용은 나날이 늘어갔다. 뭔가 결단이 필요했다. 96년 8월8일, 신회장은 (주)센트럴건설을 설립했다. 97년, 현대건설은 물러가고 폐허를 방불케 하는 공사현장에는 신선호 회장과 몇 안 되는 직원들만이 남았다.
전쟁이 시작됐다. 한 편에선 돈 구하러, 또 한 편에서는 공기 단축과 비용 절감을 위해 밤낮 없이 뛰었다. 합작투자 할 호텔 사업자도 찾아야 했고 분양 준비도 해야 했다.
공사비를 마련하기 위해 율산은 빌릴 수 있는 모든 돈을 빌렸다. 기본 자금은 신세계백화점 선납금 560억 원과 지하철 보상금 300억 원 정도. 나머지는 모두 어딘가에서 차입해와야 했다.
기자재는 대부분 리스 회사 것을 썼다. 호텔의 경우 세계 최대 호텔 체인 메리어트가 합작 투자를 제안해 오면서 얼마간 숨을 돌릴 수 있게 됐다. 메리어트가 17.5%, 센트럴관광개발이 82.5%의 지분을 가졌다. 운영은 메리어트에 일임했다. 한빛은행으로부터 융자도 받았다.
이어 추진한 것이 각종 공적 기금 및 자금을 융자받는 것. 지난해에는 반포천 복개 후 4000대 규모의 주차장을 설립하는 조건으로 SOC펀드를 지원 받았다. SOC펀드란 ‘사회간접자본 시설에 대한 민간투자법’에 의거 운영되는 기업 지원책. 기획예산처의 위탁을 받아 신용보증기금에서 운영하는 ‘산업기반 신용보증기금’으로부터 은행 융자 보증을 받게 된다. 센트럴시티는 SOC펀드를 통해 산업은행으로부터 300억 원을 빌릴 수 있었다. SOC펀드 수혜기업으로서의 신용은 다른 은행에서 융자를 받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됐다.
같은 해 메리어트호텔은 문화관광부의 위탁을 받아 산업은행이 운영하는 77억 원의 관광진흥기금을 융자받았다. 열병합시설 건설을 이유로 에너지관리공단으로부터 에너지이용합리화자금 34억 원(센트럴시티 20억 원, 메리어트호텔 14억 원)을 지원받기도 했다.
센트럴시티의 관계자는 “모두 서류 준비가 까다롭고 시간도 오래 걸리는 일이라 웬만한 기업에선 쓰려 하지 않는 돈들이다. 하지만 우리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나마 빌릴 수 있었던 것도 땅이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당시의 절박했던 상황을 설명했다.
신회장과 센트럴시티를 살린 건 역설적이게도 IMF 구제금융 사태였다. 인력 부족과 자금 부족이란 두 가지 난제 해결에 결정적인 도움을 준 것. 경기 불황으로 실업자가 양산되자 정부는 각 기업에 1인당 매월 50만 원의 임금을 보조하는 조건으로 인턴사원제 실시를 권유했다. 센트럴시티는 즉각 90명의 인턴사원을 채용했다. 월급은 정부지원금에 10만 원을 더 보탠 60만 원. 그런데도 지원자가 몰려들었다.
“대학 갓 졸업한 친구들이 뭘 알겠는가. 가르쳐가며 했다. 중간에 그만두는 사람도 없지 않았지만 그래도 다들 참 열심히 일했다. 덕분에 회사는 큰 짐을 덜 수 있었다.”
한 임원의 설명이다.
일하게 해달라는 하청업체들도 줄을 이었다. 여기에 신회장의 솔선수범과 직원들의 열정이 보태져 공사는 놀랄 만큼 빠른 속도로 진행됐다.
자금이 절대적으로 부족했기에 웬만한 일은 임직원들이 힘을 모아 자체 해결했다. 회사 로고는 신회장이 직접 디자인했고, 사내 전산망도 신회장과 현재 센트럴시티 대표이사를 맡고 있는 군(소장) 출신 컴퓨터 전문가 최석산씨가 진두지휘했다. 호텔 합작 계약서의 경우 메리어트호텔 측은 김·장 법률상담소에 의뢰한 데 비해, 센트럴시티는 율산맨 출신인 정문수 인하대 경제통상학부 교수와 신회장 동생인 신민호 경기대 경제학부 교수가 밤을 새워가며 직접 작성했다.
신회장은 특유의 창의력과 추진력, 치밀함으로 난공사를 주도했다. 크고 뚜렷한 목표를 세워놓고 가장 합리적인 방법을 찾아 한발 한발 앞으로 전진하는 신회장의 스타일을 혹자는 “조용한 리더십”이라고 표현했다. ‘세상에서 가장 재미없는 사람’이란 평을 듣는 그의 주변에 늘 인재(人才)가 모여드는 것은, 이처럼 강한 신뢰와 찬탄을 불러일으키는 특유의 독특한 통솔력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메리어트 호텔이 개관한 9월1일은 율산인들에게 참으로 감개무량한 날이었다. ‘반사회적 기업’으로 낙인 찍혀 황무지로 내몰린지 20여년, 마침내 1조800억 원 자산 기업의 주인으로 화려하게 재등장한 것이다.
그러나 눈물겹도록 감격스러운 이 날, 센트럴시티에는 폭죽도, 샴페인도, 환호성도 없었다. 걸어온 길이 너무 벅차, 또 가야 할 길이 아직 멀기에 누구도 긴장 풀고 태평가를 부를 수 없었던 탓이다.
건물 짓는 데 든 비용은 모두 4500억원. 이 중 상당액이 빚으로 남아 있다. 여기에 내년부터 12년간 분할상환하기로 한 율산 빚 1700억 원(일부 상환), 안정적인 수입이 발생할 때까지 필요한 6개월 간의 운전자금까지 합하면 4000여 억 원이라는 어마어마한 금액이 산출된다. 채권단 규모가 너무 큰데다 금액이며 거치 기간, 상환 조건이 다른 부채들이 들쭉날쭉 난립해 있는 것도 골치아픈 일. 그래서 요즘 추진 중인 것이 삼성생명·교보생명이 주도하는 ‘프로젝트 파이낸싱’이다.
몇몇 금융사와 보험회사들이 컨소시엄을 구성, 센트럴시티에 필요한 4000억 원을 마련해 부채와 기업 안정 자금을 한번에 해결해주는 것. 이렇게 되면 센트럴시티로서는 복잡한 채무관계와 자금 부족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고, 컨소시엄 측은 센트럴시티의 현금 흐름을 장악함은 물론, 이후 발생할 거액의 매출액으로 다양한 투자를 실시, 브로커 피(broker fee)를 챙길 수 있게 된다.
이렇듯 어마어마한 딜을 진행할 수 있는 것도 따지고 보면 센트럴시티의 미래가 그만큼 밝기 때문이다. 센트럴시티의 올 하반기 매출 목표는 100억 원, 내년에는 4000억 원을 예상하고 있다. 주 수입원은 메리어트호텔 매출과 신세계백화점을 비롯 각 점포가 내는 임대료. 액수는 각 점포 매출액의 25%정도다. 매출 규모가 큰 신세계백화점만 1.6~1.7%를 지불하게 돼 있다.
센트럴시티 완공 전이나 후나, 신회장의 일상에는 변함이 없다. 아침 10시쯤 출근해 회사 구석구석을 돌아본 뒤, 관리 사무실 한켠에 자리잡은 집무실에서 일에 몰두한다.
몇 달 후에는 30년 가까이 거처해온 논현동 주택을 떠나 새 집으로 이사할 예정이다. 그동안 늘 담보로 묶여 있어 이사가고 싶어도 갈 수 없었던 집이다. 논현동 집은 센트럴시티를 찾는 외국 귀빈들을 위한 게스트 하우스로 개조된다.
신회장은 이제, 포승에 묶여 이 악물고 곱씹던 재기의 꿈을 이뤘다고 생각할까. 그를 잘 아는 한 측근은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에게는 ‘재기’라는 단어조차 불쾌하게 들릴지 모른다. 아직 갈 길이 먼데 무엇을 이루었단 말인가. 그러나 아무리 욕심나는 일이 있더라도 과거와 같은 방식을 택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충분히 고통받았고 그 속에서 배울 만큼 배웠다.”
대우자동차가 부도나고, 현대건설이 부도의 위기를 겪는 등 한국 경제가 IMF 직전의 상황으로 돌아간 듯 위태로운 국면이다. 한때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던 대우그룹은 공중 분해된 채 온데 간데 없고, 프라이드 신화를 낳았던 기아자동차는 이제 일개 계열사로 전락했다. 이 땅에 재벌이 탄생한지 40여년, 이제 재벌은 그 용어에서 풍기는 ‘불순함’만큼이나 우리 경제에 IMF 위기라는 짐을 지우고, 차입경영에 의존해 제 배를 채웠다는 혐의를 뒤집어 쓴채 쇠락의 길을 걷고 있다.
큰 산불이 나면 50년이 지나야 다시 수풀이 되돌아온다고 한다. 청년 재벌 율산이 재기하는데는 20년이 걸렸다. 그러나 율산은 재벌이 아닌 전문기업으로 우리 곁에 돌아 왔다. 문어발식 계열사 확대와 선단식 기업경영 구조가 얼마나 허무하고 약한 것인지, 율산은 반면교사의 교훈을 한국 경제에 남기고 있다. 율산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2000년이 저물고 있는 오늘, 경제인들은 한번쯤 진지하게 이 화두를 챙겨 보아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