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나라의 축구가 발전하려면 다섯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선수와 지도자, 심판의 자질이 향상돼야 하고 협회 기능이 강화돼야 하며 축구팬들의 성원이 뒤따라야 한다.
- 그런 측면에서 현재 한국 축구는 총체적인 위기에 빠져 있다는 진단이 가능하다. 2002년 한·일 공동월드컵을 앞둔 지금, 한국축구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해 있다.
- 과연 한국축구는 시련을 딛고 부활할 수 있을까? 아니면 계속해서 시행착오를 되풀이할 것인가?
- *대담자 : 신문선 MBC 축구해설위원
- 허승표 전 대한축구협회 부회장
- *사회 : 육성철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sixman@donga.com
- *장소 : (주)미디아트 회의실
- *일시 : 2000년 11월 7일
잠시 2년 전을 돌이켜보자. 한국축구는 98프랑스월드컵에서 예선 탈락했다. 특히 네덜란드전에서 0대5로 패한 사건(?)은 엄청난 파문을 몰고 왔다. 차범근 감독이 월드컵 도중에 경질됐고, 후임자를 뽑기 위해 축구협회는 사상 최초로 대표팀 감독을 공개 검증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기술위원회의 추천으로 후보에 오른 사람은 김호곤, 이차만, 허정무 감독이었다. 2차 결선투표까지 가는 접전 끝에 대표팀을 맡은 허정무 감독은 한국축구의 세계화를 부르짖으며 2년 뒤에 벌어질 올림픽에 강한 자신감을 보였다.
그리고 2년이 흘렀다. 한국은 시드니올림픽에서 목표로 했던 8강 진출에 실패했다. 곧이어 벌어진 아시안컵에서도 쿠웨이트, 사우디아라비아에게 패하며 3위에 그쳤다. 상대적으로 일본이 우승을 차지하면서 충격은 일파만파로 번졌다.
이번에도 축구협회는 ‘분위기 쇄신’을 외치고 있다. 그동안 개혁세력으로 분류됐던 이용수 세종대 교수를 기술위원장에 앉히고 외국인 감독 영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하지만 뭔가 알맹이가 빠진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많은 축구인들은 한국이 2002년 월드컵에서 16강에 오르지 못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더 심각한 것은 월드컵이 끝난 뒤 한국축구는 더 큰 재앙을 맞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왜 그렇게 비관적으로 전망하는 것일까? 간단히 말해서 수십년간 거의 달라지지 않은 ‘축구 인프라’의 부족을 지적할 수 있다.
‘신동아’는 위기의 한국축구를 심층 진단하는 특별대담을 마련했다. 그동안 한국축구의 문제점을 끊임없이 제기한 신문선 MBC 축구해설위원과 허승표 전 대한축구협회 부회장이 대담에 참여했다. 신문선 위원은 축구계에서 ‘재야인사’로 불릴 만큼 쓴소리를 많이 냈던 사람이다. 또한 허승표 전 부회장은 지난 96년 정몽준 체제에 반기를 들고 ‘축축모’(축구를 사랑하는 축구인들의 모임) 대표로 축구협회 회장 경선에 나선 바 있다.
사회 : 이번 대담은 한국축구의 여러 가지 문제점을 짚어보면서 대안을 함께 모색해보자는 차원에서 마련했습니다. 최근 한국축구는 국민들에게 큰 실망을 안겨준 것 같습니다. 올림픽이나 월드컵이 끝날 때마다 되풀이된 일이지만, 이번엔 월드컵이 얼마 남지 않아서 그런지 충격이 더한 것 같습니다. 먼저 시드니올림픽과 아시안컵을 지켜보신 소감부터 말씀해주시지요.
허승표 : 우리가 너무 특징 없는 플레이를 했다고 봅니다. 경기를 풀어가는 방식에서 예전과 비교해 위기감을 느낄 정도로 위축돼 보였습니다. 옛날에는 우리 나름의 컬러가 있었어요. 조직력이나 투지, 스피드와 체력을 가지고 아시아권에서는 어느 정도 통했던 거지요. 그건 아시아 축구가 그만큼 약했다는 뜻이기도 하죠. 하지만 이번에 보니까 상대 국가의 기술과 전술은 발전했는데 상대적으로 우리는 정체된 것을 느낄 수 있었어요.
부실한 시스템이 문제
신문선 : 올림픽과 아시안컵은 예견됐던 ‘인재’가 결과로 나타난 겁니다. 한국축구는 그동안 월드컵을 유치했다는 꿈에 취해 있었지요. 그러다 보니 계획이 없고, 구조나 시스템 자체가 부실해진 거죠. 성수대교나 삼풍백화점이 부실공사 때문에 무너진 것처럼 한국축구도 부실구조 때문에 주기적으로 망신을 당하는 겁니다.
사회 : 구조와 시스템의 부실화 문제는 오래 전부터 나온 얘기인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어떻게 부실하다는 것인지 말씀해주셨으면 합니다.
신문선 : 자전거의 앞바퀴와 뒷바퀴는 서로 밸런스를 유지해야 잘 나갑니다. 지금 한국은 앞바퀴가 대표팀, 뒷바퀴가 프로축구로 돼 있어요. 그런데 이게 거꾸로 돼야 한다는 겁니다. 역대 축구협회 회장들은 대표팀 성적이 좋아야 국내 축구가 잘 된다는 생각으로 이끌어왔는데, 그건 잘못됐어요. 프로축구가 강한 나라치고 그 나라 대표팀이 약한 나라가 없어요. 한국은 축구협회 회장이 전시 행정에 치우치다 보니 앞바퀴에 너무 신경을 쓰는 겁니다. 실제로 축구협회 1년 예산 중에 국가대표팀에 들어가는 비용이 가장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아마추어 축구는 시들 수밖에 없고 프로축구를 운영하는 기업들은 투자할 의욕이 꺾이는 겁니다.
90년대까지는 대표팀 성적이 그런 대로 ‘바람’이 될 수 있었어요. 일본이나 중국이 우리가 이길 수 있는 범위에 있었던 거지요. 하지만 이젠 앞바퀴마저 바람이 빠졌어요. 펑크가 났다니까요. 그래서 문제가 더 심각해진 겁니다. 한국축구의 구조적인 문제는 이러한 불균형에서 오는 거지요. 정몽준 회장이 국가대표팀 위주로 회의장에서 안면을 세우고 정치적인 시각에서 체면치레 방식으로 협회를 운영하는 시스템이 오늘과 같은 결과를 낳은 겁니다.
허승표 : 한 나라의 축구가 어느 날 갑자기 세계 수준으로 발전할 수는 없습니다. 먼저 대표선수들이 실력을 키울 수 있는 시스템이 구축돼야 합니다. 제가 보기에 한국축구는 30년간 큰 변화가 없었습니다. 협회가 눈앞의 성적만 생각해서 대표팀에 치중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프로리그에 차질을 빚으면서까지 대표선수를 소집해서야 되겠습니까? 프로가 살지 않으면 대표팀도 살 수 없어요.
사회 : 토론을 좀더 구체적으로 진행시켜보죠. 한국축구의 수많은 문제점 가운데 먼저 선수에 대한 문제점부터 따져보겠습니다. 왜 우리 선수들의 기량이 좀더 발전하지 못하는 걸까요?
프로가 살아야 대표팀이 산다
신문선 : 협회 예산이 대표팀 위주로 편성되다 보니 하부구조는 자연스럽게 부실해질 수밖에 없어요. 그러다 보니까 좋은 선수가 나오질 않아요. 냉정하게 말해서 2002년 월드컵에서 뛸 선수들이 98년 프랑스월드컵에서 뛰었던 선수들보다 경기력이 향상되었느냐? 저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잘못된 인프라가 끊임없이 병든 선수들을 만들어내고 그 선수들이 부메랑이 돼서 한국축구를 부실하게 만들고 있어요. 대학을 졸업한 선수들이 실제 연령은 20대인데 신체적인 연령은 환갑이 넘어요.
그동안 한국축구의 장점으로 지적됐던 정신력과 심리적 요인은 이제 한계에 왔어요. 이번에 보니까 일본, 중국 하다 못해 아시아의 변방으로 얘기했던 태국이나 카타르도 정신력은 많이 올라와 있어요. 아시안컵 쿠웨이트전을 지켜보면서 우리 선수들이 과연 국가대표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개인 기량이 미흡했어요. 전체적인 한국 선수들의 수준이 떨어졌어요. 정몽준 회장 집행부가 들어선 지 8년째인데, 자전거의 방향을 잘못 잡고 페달을 잘못 밟아 좋은 선수를 길러내지 못한 결과를 초래한 겁니다.
허승표 : 지금 축구인들과 매스컴이 잘못 보는 게 있습니다. 제가 74년 영국으로 유학 갔을 때 아담스 감독을 만났어요. 그분은 한국에서도 가르쳤고 캐나다 대표팀도 맡았던 지도자예요. 그 사람 얘기가 한국 선수들은 탤런트 기질이 있다는 겁니다. 실제로 60~70년대 우리 선수들은 열악한 시스템에서도 아시아 정상을 지켜왔습니다. 그 후 세계축구는 엄청난 속도로 변했는데 우리는 하나도 변하지 않은데 문제의 원인이 있습니다. 우리는 좋은 선수를 배출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지 못했습니다. 기반이라는 것은 경기제도, 팀 수, 좋은 코치겠지요. 3년 전 축구협회 예산을 보니까 유소년 축구 지원금은 겨우 3억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 선수들에게 정신력을 강요할 수는 없는 겁니다.
요즘 축구협회가 일부 선수들을 외국 프로팀에 유학 보내려고 하는 모양인데, 그건 정말 난센스라고 생각합니다. 정말 외국 프로팀의 시스템을 모르고 하는 얘기입니다. 예를 들어 고종수 선수를 외국으로 보낸다고 했을 때 그쪽에서 생각하는 것은 시장논리 딱 하나입니다. ‘고종수가 우리 팀에서 뛸 때 이길 수 있느냐.’ 이거 하나로 판가름나는 겁니다. 우리 협회가 ‘이 선수가 유망하니 써주십시오’라고 부탁한다고 받아줄 외국 프로팀이 아닙니다. 만일 우리나라의 삼성이나 LG에서 태국 선수를 데려온다면 1군 경기에 넣어주는 줄 압니까? 2군 연습에 겨우 참가할 뿐입니다. 물론 해외진출을 위해 노력하는 건 좋지만, 정확히 알고 가야 합니다. 그래서 나는 우리 선수들이 국내 프로에서 열심히 뛰면서 인정받고 그렇게 해서 외국으로 진출하는 게 좋다고 봐요. 실력이 있으면 에이전트들이 먼저 알고 외국으로 보내주게 돼 있습니다.
신문선 : 한 가지 덧붙일게요. 이동국도 그랬고, 최용수도 그랬는데 국내에서 뛰는 선수들이 너무 과대 포장돼 있어요. 선수들은 시장경쟁 논리에 따라 싸워서 이겨야 해요. 외국 프로팀이 한국 선수를 스카우트하기 전에 테스트하겠다는 것은 당연한 겁니다. 수백만 달러면 한국이 아니라 아프리카나 유럽에서 좋은 선수를 뽑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한국 선수들은 이런 사실을 몰라요.
프로선수 스카우트는 기업적인 시각에서 봐야 해요. 예를 들어 최용수는 안양 LG의 자산입니다. 그러면 최용수의 해외진출은 안양 구단이 알아서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걸 정부가 나서서 외국으로 보내기만 하면 모든 게 된다는 식으로 도깨비 방망이처럼 생각하는데…. 내 생각은 달라요. 유럽의 프로팀들은 이미 수개월 전부터 다음 시즌에 보강할 선수들을 눈여겨보고 스카우트를 준비해요. 그래서 지금 보내면 후보로 앉아 코카콜라나 마셔서 배만 나와요. 괜히 살만 쪄가지고 오는 거예요. 그걸 모르고 정부에서는 그런 생각이나 하고, 정몽준 회장도 거기에 동의하고 있어요. 그쪽이야 ‘공짜’나 헐값으로 선수를 보내준다니까 테스트는 해보겠지요. 하지만 선수에게는 마이너스입니다. 안정환을 봐요. 페루자에서 한두 게임 시켜보고 안 되니까 빼잖아요. 그쪽은 철저한 시장논리로 선수를 기용합니다.
사회 : 선수의 기량을 향상시키는 문제는 장기적인 대책과 단기적인 대책이 동시에 논의돼야 할 것 같습니다. 축구계의 당면 과제는 눈앞에 다가온 월드컵에 대비해 선수의 기량을 어떻게 끌어올릴 것인가 하는 문제가 아닐까 합니다.
허승표 : 욕심을 부리면 안 됩니다. 결과를 정해놓고 거기에 맞추려고 하면 실패합니다. 우리 대표팀의 수준을 냉정하게 알아야 합니다. 기술위원회가 외국 감독을 영입한다고 하는데 명성을 중시해서는 안 됩니다. 세계적인 선수를 데리고 전력을 극대화시킨 감독이 한국에서도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무엇보다 한국축구를 잘 아는 감독이 선수들을 지도해야 합니다. 또 한 가지 한국축구가 유럽식으로 갈 것이냐, 남미식으로 갈 것이냐 하는 문제도 신중하게 판단해서 지도자를 선택해야 합니다.
신문선 : 경기력에 영향을 끼치는 요인은 4가지가 있습니다. 체력, 기술, 전술, 심리적인 요인입니다. 기술과 전술에서는 분명히 한국이 부족합니다. 따라서 나머지 두 요인을 어떻게 끌어올릴 것인지를 연구해야 합니다. 전술적인 면에서는 한국 선수들의 특성을 잘 파악해서 꿰어줄 필요가 있습니다. 1년 6개월 남겨놓고 기술적으로 떨어지는 부분을 어떻게 극복할 것이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정말 답이 없습니다.
사회 : 자연스럽게 지도자 문제로 넘어가는 것 같습니다. 한국축구 지도자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과 더불어 지도방식의 문제점을 말씀해주시죠.
코칭스쿨 프로그램을 짜야
허승표 : 우리 축구의 지도자 자격시스템은 너무 취약합니다. 초등학교나 중학교에 가보면 자질이 모자라는 사람이 축구를 지도하는 경우를 봅니다. 지도자 자질은 축구협회가 코칭스쿨 프로그램을 짜서 교육을 통해 끌어올려야 합니다. 기술위원회는 각급 학교 지도자들에게 체계적인 훈련 프로그램을 제공할 의무가 있습니다.
신문선 : 지도자는 정말 공부해야 합니다. 이제 스포츠는 과학입니다. 과학을 도외시하면 결과는 참패만 있을 뿐입니다. 아시안컵을 예로 들지요. 아시안컵에 가기 전에 아랍 에미리트에서 4개국 친선대회가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해외 일정이 약 한달로 짜였습니다. 스포츠생리학으로 볼 때 아시안컵에서 최악의 컨디션 사이클이 올 수밖에 없었다는 겁니다. 선수의 컨디션 사이클을 어디에 맞출 것인가는 지도자가 고민해야 할 문제입니다. 일본은 이번 아시안컵 예선전에서 승승장구했어요. 그런데 일본의 축구전문가들은 준결승과 결승을 걱정하고 있었어요. 그때 가면 컨디션 사이클이 떨어진다는 거지요. 그게 바로 과학이에요. 우리는 그런 걸 아예 생각조차 못 해요.
나는 21세기에 축구 감독을 하려면 선수들과 커뮤니케이션이 원활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대표팀 감독의 경우 프로팀에서 선수를 빌려다 쓰는 상황이니까 프로팀 감독이나 언론과의 커뮤니케이션도 중요해요. 프로 선수를 누가 가장 잘 알겠어요? 당연히 프로팀 감독이죠. 지난번 프랑스월드컵에서 우리가 참패한 원인을 보죠. 선수와 감독의 커뮤니케이션이 단절됐던 거예요. 언론과도 불편했고 프로팀 감독과도 좋지 않았어요. 그러다 보니 감독은 외롭게 싸울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스포츠조직론에 이런 말이 있어요. ‘유능한 감독이 되려면 유능한 코치를 만나야 한다.’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보충해줄 수 있는 사람을 열린 마음으로 맞아들여야 합니다. 지금 한국축구는 너무 폐쇄적입니다. 라이벌이면 어때요? 궁극적인 목표는 ‘victory’잖아요.
사회 : 우리나라 축구 감독들이 일부러 공부를 안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지도자들이 문제점을 알면서도 개선하지 못하는 속사정이 있지 않겠습니까.
신문선 : 우리나라에도 이탈리아의 사키 감독 같은 지도자가 나와야 해요. 그 사람은 어린 나이에 무릎을 다쳐서 일찍 축구를 그만두었어요. 명문 프로팀에서 활약한 선수가 아니지만 열심히 공부해서 이탈리아 대표팀 감독이 됐어요. 한국에서도 축구를 열심히 공부한 감독이 성적을 내고 그 사람이 대표팀을 맡아야 해요. 국가대표팀 감독은 그 나라에서 최고의 감독으로 뽑힌 사람이 맡아야지요. 지나간 일이지만 차범근 감독이 K리그에서 우승한 적이 있습니까? 96년 아시안컵에서 박종환 감독이 망가지니까 정몽준 회장이 정치적인 논리를 갖고 차범근 감독을 선택한 겁니다. 대표팀 감독은 과거의 명성에 의존하지 말고 철저하게 시장경쟁 논리로 따져보아서 뽑아야지요. 그래야 끈질긴 생명력을 갖습니다.
우리나라는 지도자를 어떻게 평가합니까? 과거의 명성, 협회와의 원만한 관계, 정치적 성향, 미디어와의 관계 등을 중시하잖아요. 이게 잘못됐다는 거예요. 유럽에서는 선수를 선발했을 때 성패의 80% 정도가 결정된다고 합니다. 한국 같은 특수한 상황에서는 감독을 선임할 때 이미 80%가 결정된다고 생각해요.
감독은 사회적 경험도 쌓아야
허승표 : 우리 선수들은 너무 어릴 때부터 축구 밖의 사회와 단절돼 있어요. 중학교 때부터 수업에도 들어가지 않는 나라는 별로 없을 거예요. 그래서인지 몰라도 나중에 성장하면 사회인으로서 적응력이 많이 떨어진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아요. 인간적으로 좋은 친구도 많이 만나고 여러 가지 경험을 쌓아야 창의력도 생기고 지도자 생활을 하는 데도 도움이 될 텐데, 우리 선수들은 그런 기회를 갖지 못하고 있어요.
영국에서 코칭스쿨을 다닐 때였어요. ‘대표팀 감독의 자질론’이라는 과목이 있었는데, 영국 사람들은 해박한 축구지식과 더불어 포용력과 인터뷰 능력을 중요한 덕목으로 꼽더라구요. 그래서 내가 “왜 인터뷰가 중요하냐”고 물으니까 “대표팀 감독은 그 나라의 얼굴이다. 인터뷰는 많은 지식과 인격적인 수양을 필요로 한다”고 말하더군요.
신문선 : 한국 지도자들은 너무 바빠요. 자기 직업에 만족하는 지도자가 많지 않아요. 중·고등학교 지도자들은 불행하게도 학교 용원이에요. 서무과와 임시로 계약한 사람이지요. 상급 학교에 많은 학생을 보내야만 유능한 감독으로 자리를 지킬 수 있어요. 그러니 상급 학교 지도자와 만나 술도 먹어야지, 고스톱도 쳐야지, 학부모도 만나야지….
아이들을 위해서 투자할 시간이 별로 없어요. 지도자는 계속 공부해야 하는데 돈이 없어요. 대학원을 가려면 한 학기에 200만 원 이상이 드는데 월급이 100만 원도 안 돼요. 그런데 이상한 건 일부 감독들은 차를 타고 다니면서 룸살롱에서 술을 먹어요. 그게 다 학부모 주머니에서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지도자들의 의식 개혁이 없으면 아무리 좋은 선수가 나와도 성장하지 못하고 한계에 부딪히는 거지요.
운동을 마친 뒤에는 사회 활동을 하면서 다양한 경험을 쌓아야 하는데 그걸 못하고 있어요. 그러다 보니 융통성이 없어지고 남의 얘기를 듣지 않아요. 그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한국축구의 지도자들은 한쪽 눈으로만 보는 겁니다. 이건 축구뿐만 아니라 체육계 전반에 관한 얘기예요.
사회 : 심판 문제도 짚고 넘어가지요. 심판은 경기의 질에 영향을 끼치는 아주 중요한 요인이면서도 그동안 본격적인 논의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허승표 : 심판 개혁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고 봅니다. 축구협회가 기본적인 제도를 운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의도적인 실수나 음성적으로 오심을 유발하는 커넥션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경우엔 강력한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프로 같으면 리그에서 제외시키거나 심판 자격을 박탈하는 겁니다. 엄격한 룰을 공정하게 적용한다면 개선될 것으로 보입니다.
신문선 : 한국 심판의 수준은 아시아 최고라고 봅니다. 다만 우리 심판들이 좀더 국제화될 필요가 있습니다. 아시아축구연맹 심판위원장이 “한국 심판은 영어를 못한다”는 말을 했어요.
심판 불신풍조도 문제라고 봐요. 중·고등학교 경기가 끝나면 학부모들이 스탠드에서 뛰어내려와 자기 자식 보는 앞에서 심판 멱살을 붙잡고 “얼마 먹었느냐”고 따져요. 그런 일이 누적되다 보니 심판이 마치 부패집단인 것처럼 매도되고 있어요.
국내 심판들에게 물어보면 가장 힘든 게 경기 배정이라고 해요. 그건 공정한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배치하면 해결될 것으로 봐요. 또 신상필벌은 냉정히 해야 합니다.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문제가 있는 사람에게 페널티를 주면 됩니다.
그동안 축구협회는 심판위원장 자리를 놓고 끊임없이 갈등을 겪어왔어요. 그러다 보니 여기저기 줄서기를 하고 좋은 심판도 나오지 못했어요. 그러니까 아시아 최고 수준의 자질을 갖추고도 실제 운동장에서는 실력을 보여주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왔어요. 이제 심판 스스로 자기 정화 노력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사회 : 요즘처럼 축구협회에 대한 비판 여론이 뜨거웠던 때도 없는 것 같습니다. 축구협회는 한국축구의 컨트롤 타워라고 볼 수 있는데, 그동안 맡은 일을 충실히 해내지 못했다는 의견이 많습니다. 축구협회의 문제점과 개선방안에 대해서 말씀해주십시요.
허승표 : 우선 구조적인 문제가 있다고 봐요. 지금까지 축구협회 회장은 외부에서 모셔왔어요. 그건 축구에 돈이 많이 들어가니까 돈 쓸 분을 찾았던 거죠. 최순영 회장, 김우중 회장, 정몽준 회장이 그런 경우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그분들 말씀 중에 축구인들을 가슴 아프게 했던 게 있어요. “내 돈 내 마음대로 쓰는데 무슨 말이 많아?” 잘 모르는 분들은 축구협회 회장이 일방적으로 돈을 내기만 한다고 생각하겠지만 그게 아닙니다. 그분들은 축구를 통해 여러가지 개인적 이득을 얻었어요.
한국축구를 어떻게 하면 발전시킬 수 있는지 축구협회가 잘 모르는 것 같아서 답답할 때가 많아요. 일본이 어떻게 한국을 따라잡았느냐? 그건 인프라였어요. 제가 따져보니까 일본의 축구팀이 한국보다 30배쯤 많은 것 같습니다. 리그제는 어떻고 잔디구장은 또 어떻습니까? 인프라 구축이 관건이에요. 축구협회 예산과 행정을 그런 방향으로 재조정해야 합니다. 그것을 무시하고 대표팀에만 신경 쓰면 이번과 같은 망신을 또 당하게 돼 있습니다. 구조가 약한데 어떻게 합니까? 이용수 교수가 신임 기술위원장으로서 의욕적으로 일하는 모습이 보기 좋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걱정도 됩니다. 한 사람에게 너무 많은 하중이 실리는 것 같아요. 또 이교수를 지원할 수 있는 시스템도, 인적 자원도 부족해 보입니다.
신문선 : 정몽준 회장이 이끌고 있는 현 집행부는 최순영 회장이나 김우중 회장 시절과 비교해 가장 무능하고 부패하고 자기 반성도 하지 않는 체제라고 말하고 싶어요. 우선 현 집행부는 ‘정몽준 플랜’이 없어요. 일본은 ‘100년 계획’을 세워놓고 차근차근 실천하고 있어요. 93년도에 J리그가 출범했는데 지금 100분의 8이 달성됐다고 자평하고 있고, 10년 뒤에는 100분의 50 정도 달성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어요. 그 플랜 속에서 2002년 월드컵도 치르는 거죠. 우리보다 한참 떨어지는 싱가포르도 ‘30년 플랜’이 있어요. 30년 뒤엔 월드컵 본선에 나가겠다는 꿈이지요. 인도네시아도 앞으로 10년 뒤엔 FIFA(국제축구연맹) 랭킹 40위에 들어가겠다는 플랜이 있어요. 그런데 한국은 플랜이 없어요. 플랜이 없다는 건 목표가 없다는 거지요. 기업 차원에서 얘기하자면 경영목표가 없이 어떻게 일을 합니까? 목표가 있어야 경영을 평가하지요. 지금 한국축구는 평가를 할 수도 없어요. 평가가 없다 보니까 축구협회가 무엇을 잘못 하고 있는지 알 수도 없는 답답한 현실인 거죠.
축구협회가 있어야 할 이유가 두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축구를 널리 보급하는 것이고, 둘째는 올바른 축구문화를 창출하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의 축구협회는 ‘정치 도구화되는’ 심각한 국면에 처해 있습니다. 조직이 회장 중심이고, 자금 활용도 투명하지 않고…. 작년에 130여억 원을 집행했다는데 그 돈을 어디에다 썼는지 모르겠어요. 축구협회는 지난해 얼마를 벌었고, 또 얼마를 어디에 썼는지 투명하게 밝혀야 합니다. 그래야 축구인들의 신뢰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지적한다면 유명무실해진 축구협회 이사회입니다. 이사회를 아예 열지 않고 있어요. 협회 요직에는 전부 현대그룹 사람들이 나와 있어요. 국제담당 부장, 사무국장, 프로연맹 사무국장이 ‘현대맨’입니다. 그렇다면 이사회는 뭐냐 이겁니다. 또 협회 조직에 월드컵특별지원단을 만들었어요. 그건 매우 중요한 조직입니다. 그런데 그 조직이 몇 번이나 모였는지 한 번 봐라 이 말입니다. 거기서 얼마나 코미디 같은 제안이 나왔는지 아십니까? 해외진출 대상선수 명단을 구단과 협의도 없이 지목해서 보냈어요. 그냥 무조건 보내자 이 말이에요. 그런데 어떤 결과가 나왔습니까? 설기현이 하나 벨기에로 보내고 끝났어요. 시장경제 논리에 의해 철저히 무시당했어요. 그게 지금 협회가 하는 일입니다.
축구협회가 정몽준 회장의 사조직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한국축구는 계속해서 부실해질 수밖에 없고 국제대회에서 계속 추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본질은 선수도 아니고 지도자도 아니라고 봐요. 그건 플랜입니다. 왜 ‘정몽준 플랜’을 안 만드느냐 이 말이에요. 일본은 93년도에 J리그를 출범시키고 100분의 8을 달성했다는데, 한국은 똑같은 시기에 정몽준 회장이 취임해서 무얼 했습니까? 그래서 저는 모든 ‘인재(人災)’의 주범이 축구협회라고 보는 겁니다.
사회 : 이야기가 정몽준 회장에 대한 평가 쪽으로 넘어간 것 같습니다. 정회장은 임기 중 월드컵을 유치한 반면, 국내 축구의 인프라를 확충하는 데는 이렇다 할 실적을 남기지 못한 것 같습니다. 정회장이 이끌어온 축구협회에 대한 얘기를 좀더 해보죠.
허승표 : 월드컵을 유치하는 데 공헌한 것은 인정해야 합니다. 어려운 상황에도 정회장은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하지만 2002년 월드컵이 한국축구의 전부는 아닙니다. 월드컵은 4년마다 찾아옵니다. 월드컵 이후의 한국축구를 생각하는 측면에서 현 집행부는 부족한 점이 많다고 봅니다. 장기적으로 우리 축구의 발전을 위한 투자에서 결코 높은 점수를 줄 수 없습니다.
신문선 : 한마디로 얘기해서 ‘외화내빈’입니다. 월드컵 유치는 정말 화려한 일입니다. 하지만 성적으로 보면 엉망이에요. 94년 미국월드컵에서 16강 진출이 좌절됐어요. 96년 아시안컵에서 이란에 2 대 6으로 참패했습니다. 96년 애틀랜타올림픽에서는 예선탈락, 97년 세계청소년축구대회에서는 브라질에 3 대 10으로 참패했습니다. 98년 프랑스월드컵에서 차범근 감독이 경질되는 사태가 있었고 98년 방콕아시안게임 때 태국에게 0 대 1로 지는 개망신도 당했어요. 이게 정몽준 회장 집행부를 평가할 수 있는 성적표입니다.
월드컵 유치는 그 당시 국민의 80% 이상이 찬성했던 일입니다. 하지만 요즘 와서 시름을 주고 있어요. 가장 큰 원인이 뭐냐 하면 바로 경기력입니다. 대통령까지 고민하게 만들었잖아요. 앞으로 월드컵대표팀의 성적에 따라 정회장은 엄정하게 평가받게 될 겁니다.
사회 : 그게 꼭 정몽준 회장 책임이라고 볼 수 있습니까? 한국축구는 정회장 집행부가 들어서기 전에도 참패당한 기록이 있습니다.
허정무 감독은 희생양
신문선 : 이번 아시안컵을 봅시다. 4강 중에 동북아시아가 세 팀입니다. 그건 프로리그가 뒷받침이 됐기 때문입니다. 최순영 회장은 우리나라에 최초로 프로축구 시대를 열었습니다. 김우중 회장은 한국축구가 32년 만에 월드컵에 출전하는 계기를 만들었어요. 94년 미국월드컵에서 한국이 그런대로 선전할 수 있었던 것도 김우중 회장이 재임중 단초를 마련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축구가 미국월드컵을 통해 쌓은 자신감을 발전시켜주길 정몽준 회장에게 기대했는데 그게 안 됐어요. 정회장은 지난 8년 동안 가야 할 방향도 잡지 못했어요. 만일 LG나 삼성이 부도 나면 누가 책임을 집니까? 오너가 질 수밖에 없는 거예요. 축구협회 조중연 전무가 문제다, 다른 누가 문제다, 말이 많지만, 최종 책임은 정회장이 져야 하는 겁니다. 그건 피할 수 없어요. 축구인과 팬들이 엄하게 책임을 물어야만 지금이라도 정회장이 정신을 차립니다. 그걸 ‘축구인들이 협조하지 않았다’ ‘대표팀 감독의 자질에 문제가 있다’ 하고 어물쩍 넘어가면 안 돼요. 내가 볼 때 허정무 감독은 희생양입니다. 축구 인프라가 없는데 허정무가 혼자서 어떻게 해요.
또 한 가지 지적할 게 있어요. 정몽준 집행부는 도무지 책임질 줄을 몰라요. 옛날에 김우중 회장 집행부 때 이재명 부회장은 협회의 실세였어요. 그 양반이 92년 다이너스티컵에서 일본에 패하자 사퇴했어요. 그런데 정몽준 회장 집행부가 들어선 뒤에는 국민에게 분노를 심어주는 무수한 ‘사건’이 있었는데 누구도 책임을 안 져요. 자기는 ‘모르쇠’라는 식이에요. 그러면서도 언론을 빌미로 감독을 자르잖아요.
정회장이 울산과 미사리에 연습구장을 만든 것을 치적이라고 얘기하는 사람도 있는데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한번 묻고 싶어요. 나중에 정몽준 회장이 떠나면 축구인들이 그곳에 가서 연습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정회장이 정말 축구인들의 공감을 얻고자 한다면, 이번에 기획예산처에서 52억원을 삭감해 대표팀이 차질을 빚게 됐을 때 자기가 알아서 돈을 내야지요. 정회장이 국제축구계에서 명성을 쌓았으면 그에 걸맞게 투자를 해야지요. 기업인을 축구협회 회장으로 내세운 이유가 뭡니까? 돈을 쓰라는 거잖아요.
사회 : 축구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언론과 팬도 대단히 중요한 요인이라고 생각됩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냄비언론’ ‘냄비팬’이라는 얘기가 많은데요, 팬과 언론의 역할을 어떻게 보십니까.
허승표 : 언론은 특별히 잘못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다만 아쉬운 건 언론이 핵심을 짚어내지 못한다는 거예요. 팬들이 결과에 따라 감정적으로 반응하는 건 당연해요. 팬들이 흥분하는 건 그만큼 축구에 대한 애정이 깊다는 거잖아요. 제가 답답한 건 앞으로도 팬들에게 희망을 주기가 어려울 것 같다는 절망감 때문이에요. 그렇게 되면 국민들의 열기도 차츰 시들 거예요. 그런 상황이 오기 전에 서둘러 축구를 개혁해야 하고 축구인들이 힘을 모아야 할 겁니다.
‘붉은 악마’는 축구협회에서 나오라
신문선 : 언론이 근본적인 문제를 지나치는 것 같아 아쉬울 때가 있어요. 한국축구의 문제점을 파고들면 그 핵심에 축구행정이 있어요. 축구협회가 얼마의 돈을 벌어서 어떻게 쓰고 있는지 팬들은 알아야 해요. 팬들에게도 아쉬운 점이 있어요. 팬은 순수성을 잃어서는 안 돼요. ‘붉은 악마’는 프랑스월드컵을 거치면서 한국축구의 열기를 되살린 고마운 존재예요. 저는 감히 ‘붉은 악마’에게 호소합니다. ‘붉은 악마’는 축구협회 건물에서 나와야 해요. ‘붉은 악마’가 왜 그 건물에 있어야 합니까? 팬은 축구협회의 행정과 정책을 냉정한 시각으로 비판할 의무가 있어요. 그게 없으면 팬의 순수성을 잃어버리는 겁니다.
지난 총선에서 시민단체가 정몽준 회장 낙선운동을 벌였어요. 왜 그때 각종 축구조직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이 동원됐는지 모르겠어요. 그건 대단히 위험한 일입니다. 축구는 단지 축구일 뿐입니다. 그래야만 팬에게 사랑받고 국민에게 사랑받는 겁니다.
사회 : 국가대표팀 감독 문제로 넘어가겠습니다. 마침내 외국인 감독 시대가 열렸습니다. 아직까지 기대 반, 우려 반인 것 같습니다. 외국인 감독이 대표팀에 어떤 영향을 끼칠까요?
허승표 : 워낙 시간이 짧아서 어느 감독이라도 상당히 어려울 거예요. 나는 무엇보다 한국축구의 현실을 잘 아는 감독이 맡았으면 하는 마음이에요. 그래야 대표팀의 목표와 방향을 비교적 정확하게 잡을 수 있어요. 기술위원들은 외국 감독을 데려오는 이유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단지 한국감독이 능력이 없어서 외국 감독을 데려온다거나, 다른 나라에서도 그렇게 한다는 식으로 처리하면 실패할 확률이 높아요.
신문선 : 자동차에는 오토매틱과 스틱이 있잖아요. 오토를 운전하던 사람이 스틱을 잡으면 불편해요. 지금 외국 감독 누구를 데려오는 게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타고 있는 자동차의 기종을 먼저 살펴야 합니다. 시간이 1년 6개월 남았다지만, 이미 올 시즌이 끝났기 때문에 내년 봄까지는 외국 감독이 선수를 볼 수가 없어요. 그러면 1년 남짓입니다. 결국 짧은 시간에 한국 선수의 특징을 파악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거지요.
일본대표팀의 트루시에 감독은 무명 시절 아프리카로 들어가서 나이지리아 대표팀을 맡아 성적을 냈어요. 비싼 돈을 주지 않더라도 의지가 있고 한국축구를 아는 사람이 더 효과적이죠.
허승표 : 한국축구가 딜레마에 빠졌어요. 아시안컵 도중에 이미 외국 감독을 영입할 수밖에 없는 분위기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이젠 외국 감독으로 갈 수밖에 없어요. 남은 문제는 실패할 확률을 줄이는 거라고 봐요. 기술위원들이 외국 감독의 명성이나 몸값보다는 의지를 보고 판단했으면 합니다.
신문선 : 선수 선발을 해둔 상태에서 감독을 데려올 거냐, 감독을 데려와서 선수를 선발할 거냐, 이 문제부터 풀어야 해요. 한국축구를 모르는 감독이라면 우리가 선수를 뽑아줘야 해요.
또 한 가지 기억해둘 게 있어요. 한국축구는 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에 대비해 크라머 감독을 데려왔어요. 크라머 감독은 새로운 방식으로 훈련을 시켰어요. 한국 선수들은 경기가 끝나면 운동장을 10바퀴씩 뛰는데 익숙해져 있는데 크라머 감독은 그런 걸 시키지 않고 훈련시간도 줄인 거예요. 그러니 선수들 입맛만 좋아졌지요. 배가 나오고 시합하다가 여러 명이 다리에 쥐가 나서 쓰러지는 일도 있었어요. 그러니까 김삼락 코치가 크라머 감독과 한판 붙었어요. 이거 대단히 중요한 건데 아무도 얘길 안 해요. 내가 볼 때 외국 감독은 대단히 리스크가 많은 게임이에요. 그런데 이젠 그것 말고 대안이 없어요.
나는 일본의 트루시에 감독을 보고 놀랄 때가 있어요. 보통 사람이 아니에요. 아프리카 오지에서 살아나온 사람이거든요. 한국축구를 모르는 사람이 오면 틀림없이 실패하게 돼 있어요. 예를 들어서 한국의 고등학교 교육은 대학입시 중심이잖아요. 그런데 갑자기 미국식 교육을 도입한다면 얼마나 큰 혼란이 오겠어요?
사회 : 그럼 구체적으로 어느 감독이 적격이라는 얘깁니까?
신문선 : 일부에서는 비쇼베츠 감독이나 니폼니시 감독이 실패했다고 하는데 나는 그렇게 보지 않아요. 그 사람들 동구권 사람이라서 우리와 통하는 바가 많아요. 특히 니폼니시 감독은 한국의 프로선수에 대해서도 자세히 알고 있어요. 내가 책임있는 자리에 있다면 니폼니시를 영입하기 위해 노력할 겁니다.
허승표 : 냉정하게 평가해서 리스크가 적은 사람을 택해야 합니다. 나는 솔직히 한국 감독에게 맡기고 싶었어요. 이미 그건 물건너 가버렸고…. 인격을 갖춘 외국 감독을 택했으면 해요. 한국 선수들이 의외로 배타적이에요. 외국 감독이 쉽게 다루기 힘들어요. 지금 기술위원회는 외국 감독이 왔을 때 일어날 수 있는 일에 대한 마스터플랜을 만들어야 해요. 한번 봅시다. 외국 감독이 선수를 보는 눈과 기술위원회의 눈이 다를 수가 있어요. 그럼 불협화음이 생겨요. 연습경기 한 번 져보세요. 여기저기서 막 비난이 쏟아지고 감독이 흔들려요. 축구협회는 그런 것까지 고려해서 외국 감독을 뽑아야 해요.
사회 : 두 분 모두 기술위원회의 비중을 강조하시는 것 같습니다. 이용수 신임 기술위원장에게 주문하고 싶은 말은 없습니까? 먼저 친구이신 신위원께서 말씀하시죠.
신문선 : 주변에서 너무 기대가 큰 것 같아요. 이용수 위원장은 학자로서 도덕성과 실력을 갖춘 사람입니다. 하지만 기술위원장은 많은 파트너들과 부딪쳐야 하는 자리예요. 그러다 보면 마음 고생도 클 거라고 생각해요. 그것을 슬기롭게 풀어야겠죠.
저는 이번 월드컵의 성공 여부가 축구인들의 단합된 의지에 달려 있다고 생각해요. 물론 이용수 위원장에게 힘을 실어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먼저 축구협회가 환골탈태해서 힘을 보여줘야 합니다.
월드컵 끝나면 위기 올 것
허승표 : 기술위원장이 외압에 흔들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많은 감독들과 충분히 대화하면서 공정하게 선수를 뽑아야 합니다. 대표팀 감독과의 관계도 잘 정립했으면 합니다. 감독에게 너무 맡겨도 안 되고, 지나치게 간섭해도 좋지 않습니다.
사회 : 이제 대담을 정리해야 할 것 같습니다. 많은 말씀을 해주셨는데, 실제로 한국축구의 발전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지 짤막하게 정리해주시죠.
신문선 : 일단 프로축구가 살아야 해요. 일본의 트루시에 감독도 “J리그는 일본 축구의 얼굴”이라고 말했어요. 거듭 말씀드리지만 자전거의 앞바퀴는 대표팀이 아니라 프로팀이 돼야 해요. 정부에는 세제혜택을 주문하고 싶어요. 프로팀이 고등학교에 지원하는 돈이 기부금으로 처리되지 않는데 그런 건 배려해줘야 한다고 봐요. 또한 축구협회는 서비스 단체로 거듭나야 해요. 선수를 육성해주는 건 기업이고 협회는 선수를 불러다 쓰는 거예요. 그런데도 협회는 기업에 권력기관처럼 굴고 있어요. ‘선수를 보내주지 않으면 징계하겠다’는 식이에요. 올림픽 때는 정해진 날짜도 무시하고 1년 가까이 모아놓고 훈련했어요.
축구협회가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수렁에서 헤어나지 못할 거예요. 정몽준 회장은 축구를 통해 쌓은 명성만큼, 만일 2002년 월드컵에서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하면 그에 따르는 비판을 받을 겁니다.
허승표 : 이번 기회에 축구협회가 획기적으로 바뀌길 바라는 마음이 간절합니다. 지금이라도 모든 유소년 축구를 리그제로 바꿔야 합니다. 모든 축구 시스템은 프로리그 활성화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월드컵이 끝난 뒤 엄청난 위기가 올 수 있습니다. 기업 사정이 급변하는 요즘 상황에 1년에 60억원에서 100억원까지 드는 축구팀을 언제까지 운영할 것인지 따져봐야 합니다. 이대로 가면 팀을 해체하는 기업도 나올 겁니다. 지금 빨리 프로축구 중심으로 가서 지역주민의 참여를 끌어내야 합니다. 지역기반이 탄탄한 프로팀이 리그를 주도하면 경제가 어려워져도 충격이 크지 않을 것으로 봅니다.
사회 : 장시간 대담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