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12월호

암호명 모란봉! 김현철을 납치하라

  • 최영재cyj@donga.com

    입력2006-07-27 13: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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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97년 2월 황장엽의 망명으로 북한은 엄청난 손실을 입었다. 이를 보복하기 위해 북한은 YS 친인척과 측근을 4명이나 북한으로 납치하려다 미수에 그쳤다. 대상인물은 YS차남 김현철, 매제 김창원, 김정원, 엄기현 등이었다.
    97년 초에 일어난 황장엽 망명 사건은 북한에 엄청난 국가적 손실을 준 중대 사건이었다. 당시 북한은 황장엽 비서의 망명을 막기 위해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한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은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한국행을 막아야 한다는 김정일의 지시로 중국측과 치열한 막후협상을 벌였다. 만약 이것이 여의치 않다면 황장엽을 중국에서 살도록 하고, 이것조차 안 되면 사살하라는 지시까지 내렸다. 당시 외신은 평양에서 특수대원 200여 명이 황장엽을 사살하기 위해 베이징에 도착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중국 정부는 황씨 일행의 의견을 존중해 한국총영사관 경비를 강화하면서 북한에 이들의 망명이 자유의사이며 한국행을 원한다고 통보했다. 그러나 북한은 “한국행만은 절대로 안 된다”며 강력히 반발했다. 난처해진 중국은 결국 그를 제3국으로 인도한다는 방향으로 결론을 냈고 황씨는 결국 한국망명에 성공했다.

    황씨의 망명으로 중대한 손실을 입은 북한은 복수 작전을 꾸몄다. ‘모란봉 작전’으로 이름지은 이 작전은 김영삼대통령의 친인척이나 측근 또는 황장엽과 맞바꿀 수 있을 정도의 거물급 남측 인사를 평양으로 초청한다는 것이었다. 말이 초청이지 일단 평양에 들어오면 돌아가지 못할 것은 뻔한 일이었다.

    우리측 안기부도 북한의 이런 의도를 짐작하고 있었다. 권영해 부장이 지휘하던 안기부는 북한측의 집요한 대통령 친인척 초청 공작 3건을 모두 사전에 알아차리고 차단했다. 이 과정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 손충무씨다. 그는 97년 대선 당시 ‘김대중 X파일’을 집필해 김대중 국민회의 총재를 음해했다는 혐의로 실형을 선고받고 2년간 복역한 인물이다. 문민 정부 당시 권영해 안기부장과 손충무씨는 ‘특수관계’였다.





    손충무와 권영해의 특수관계

    이 특수관계는 손충무씨의 이력을 살피면 알 수 있다. 손충무씨는 1963년 경향신문 6기 수습기자로 언론계에 첫발을 내디딘 인물이다. 영어에 능통한 그는 60년대부터 미국·남미·남태평양 순회특파원, 월남·일본 순회특파원, 아프리카 등 세계일주 특파원을 지내며 해외취재로 잔뼈가 굵었다. 그는 경향신문 취재부 부장, 논설위원을 끝으로 1977년 유신에 반대하며 미국으로 망명했다. 미국에 체류하는동안 그는 미국의 정보기관과 접촉하며 해외정보망을 구축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에서도 저널리스트 계속 활동하던 그는 1986년 귀국하여 집필과 취재 활동을 계속했다.

    손씨는 저서와 기사 때문에 구속 수감을 되풀이한 인물이다. 1964년에는 한일회담 반대기사로 투옥되었고, 1988년에는 ‘이병철과 삼성왕국’이란 저서를 내고 명예훼손혐의로 구속됐다 4개월 만에 출감한 경력이 있다. 1992년에는 김영삼대통령 사생활 기사로 구속되었다 풀려났고, 1998년 ‘김대중 X파일’이란 저서로 2년 간 복역하고 지난 6월 석방되었다.

    한국 언론인으로는 보기 드물게 국제통인 손씨는 40년간에 이르는 언론인 경력, 그것도 해외 경험 때문에 국제 정보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와 권영해 전 안기부장은 1993년 처음 만났다.

    93년 당시 손충무씨는 자신이 발행하던 월간지‘인사이더 월드’에 한·미국방장관회의를 취재하여 회의록을 실었다. 당시 국방부 장관이 권영해씨였다.

    손충무씨가 입수해 게재한 한·미국방장관회의록은 미국 정부도, 한국 정부도 발표하지 않은 극비 사항이었다. 권영해 국방장관은 공개되지 않은 회담록 전문이 누출된 경위를 알아보기 위해 손씨를 만났다. 손씨를 처음 만난 권장관은 그가 만만치 않은 해외정보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두 사람은 이날 처음 만나 국내외 정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고 이후 정기적으로 만나서 정보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권영해씨는 안기부장으로 취임하면서 해외 정보 수집과 외교는 공조직도 중요하지만 기업가나 언론인이 갖고 있는 사적인 채널도 도움이 된다면서 손씨에게 국가에 도움이 되는 일이 있으면 협조해 달라고 부탁한 것으로 알려졌다.

    권영해 전 안기부장과 손충무씨의 특별관계는 이른바 ‘김대중 X파일’ 재판에서도 드러났다. 그는 1992년 5월에도 당시 민자당 대표였던 김영삼 전대통령에게 숨겨놓은 딸이 있다는 기사를 자신이 발행하던 ‘인사이더 월드’에 게재해 명예훼손혐의로 구속되었다가 고소 취하로 한 달 만에 풀려난 적이 있다. ‘김대중 X파일’ 재판 당시 검찰은 “김영삼 전대통령이 1994년 권영해씨가 안기부장에 취임한 직후 손씨를 특별관리하라고 지시했다”고 밝혔다. 검찰 수사에 따르면 권 전안기부장은 이 지시에 따라 손씨를 특별관리하며 여러 차례에 걸쳐 수백만원씩 지원했다는 것이다.

    북한은 황장엽망명사건이 발생하기 전에 김영삼 대통령의 누이동생 남편인 김창원박사를 평양에 초청할 계획이었다. 김창원씨는 미국 시민권자로 미국 이름은 리처드 김이었다. 경제학박사인 그는 한일은행 고문, 워싱턴은행 총재를 지냈다. 서강대에서 경제학을 강의하기도 했던 김영삼 대통령이 아끼던 인물이다. 김박사는 친인척은 청와대에 출입하지 말라는 김영삼 대통령의 주문에 따라 정부 일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유럽과 미국의 고급 경제 정보를 청와대에 전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96년 5월 당시 세계적인 금융회사인 ‘페레그린’의 홍콩현지법인 이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북한은 당시 페레그린과 북한의 대성은행이 합작으로 설립한 대성 페레그린 평양현지법인 차기 지점장으로 김창원씨를 요구했다. 대성 페레그린의 초대 평양 지점장은 영국인이었으나, 이 사람이 한국말을 전혀 모르기 때문에 지장이 많았던 것이다.

    당시 김창원박사는 북한 비자까지 발급받고 평양으로 부임할 차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김영삼대통령의 친매제인 그가 평양에 간 후 만에 하나 북한의 공작으로 돌아오지 못하면 국가 안보에 큰 위협이 될 수 있는 인물이었다.

    손충무씨는 96년 5월께 워싱턴DC에서 북한이 김영삼대통령의 친매제인 김창원씨를 평양으로 데려가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홍콩에 있는 영국 정보기관 에이전트가 김창원 박사가 북한 고위층과 두 번이나 만난 사진을 그에게 보여준 것이다. 손씨가 영국 정보기관에 문의한 결과 김창원박사가 곧 평양에 들어간다는 얘기를 듣게 되었다.

    그는 이 사실을 북한측 인사를 통해서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손씨는 96년 7월 중순께 도쿄에서 북한의 부총리급 인사를 만났다. 이 북측 인사와 손충무씨의 대화록이다.

    북측 인사 : “YS 동생 중에 김창원씨가 있느냐?”

    손충무: “동생이 아니라 매제다.”

    북측 인사: “워싱턴에 살았으니 손선생과 잘 알겠네.”

    손충무: “아는 사이다.”

    북측 인사: “그분이 YS와 어느 정도 사이인가?”

    손충무: “하나밖에 없는 매제다. 상당한 경제 전문가이기 때문에 YS가 아끼는 인물이다.”

    이 북측 인사는 손충무씨에게 김창원박사의 초청 계획을 확인해주었다. 물론 이 때는 황장엽씨가 망명하기 전이었다. 하지만 이 무렵 손충무씨는 1∼2년 전부터 준비하던 우리 정부의 황장엽 망명 작전을 대략 짐작하고 있었다. 김창원박사가 평양에 가서 억류된다면 황장엽씨 망명 작전에 차질을 빚을 수도 있는 사안이었다. 김박사가 자칫하면 황장엽씨와 맞바꾸는 카드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손씨는 김창원박사를 직접 만나 “당신이 평양에 가서 남북정상회담에 밑거름이 된다면 큰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북한이 내놓지 않으면 남북관계가 구렁텅이에 빠질 가능성이 크다. 대통령에게 보고하고 떠나라”고 설득했다.

    김박사를 만난 뒤 손씨는 이 사실을 권영해 안기부장에게 전했다. 당시 남한 쪽 정보기관은 황장엽을 서울로 망명시키기 위해 작전을 펴고 있었다. 물론 북한이 이 사실을 알고 김박사 초청 계획을 세운 것은 아니었다. 당시 평양이 김창원 박사를 데리고 가려 했던 것은, 남한의 쌀 지원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또 김창원박사는 YS의 친인척이라 김대통령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인물이었다. 결국 김창원 박사의 방북 계획은 안기부의 사전 차단으로 무산되었다.



    첫 번째 대상인물 김정원

    이 사건 이후 당시 안기부 내에서는 해외에 거주하는 김영삼 대통령의 친인척을 보호하는 일이 급선무로 떠올랐다. 당시 샌프란시스코에는 대통령의 큰아들 은철씨 부부가 살고 있었다. 또 YS의 세 딸 부부가 모두 미국에 거주하고 있었다. 게다가 워싱턴DC에는 여동생 부부가 살고 있었다. 황장엽 망명 작전을 준비하던 정부로서는 이들을 보호하는 문제가 커다란 과제가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권영해 안기부장은 대통령의 해외 가족을 보호하기 위한 특별작전에 들어갔다. 권부장은 미국 현지에서 전직 FBI 요원 같은 경호요원을 특별고용해 가족들을 경호하게 했다. 물론 해당 가족들은 이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황장엽씨가 한국으로 들어온 직후인 97년 3월, 권영해 안기부장은 손충무씨에게 “북한에서 황장엽 사건에 대한 보복 내지 이에 상응하는 전시 효과를 위해서 남한 요인들을 북한으로 유인하여 망명을 선언하게 하는 정치공작이 우려된다”면서 이와 관련된 정보에 관심을 가져달라고 부탁한다. 특히 해외에 거주하는 YS 친인척에 대한 유인 방북 공작을 지켜보라는 주문이었다. 이 말을 들은 손충무씨는 미국 CIA와 일본 공안청에서 한반도 문제 정보업무에 종사하다 퇴직한 취재원들에게 이와 관련한 정보를 계속 수집해달라고 부탁했다.

    황씨망명사건 후 YS친인척 평양 유인작전에 본격 착수한 북한이 첫번째로 노린 인물은 96년에 초청하려 했던 김창원박사의 친형 김정원박사였다. 97년 7∼8월 안기부는 미국 워싱턴DC에서 ‘프랑스 북한대표부에서 근무하며 김정일의 유럽자금 총책을 맡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김범철과 긴밀히 접촉하는 한국동포가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이 인물은 과거 유신정권 당시 워싱턴에서 ‘한국신보’라는 신문을 발행한 적이 있는 데이비드 한(David Han)이었다. 그는 김정원박사를 노리고 있었다. 김정원박사는 1987∼90년 통일민주당총재특보, 1990∼92년 민자당총재특보, 1993년에 안기부 제2차장을 지낸 인물이다. 북측의 초청 공작이 진행되던 1997년 7∼8월에는 외무부 산하 국제협력단(KOICA) 총재를 맡고 있었다. 김정원씨는 YS의 신임이 대단한 인물이었다. 당시 그는 대통령의 든든한 후원 아래 한국의 전통 문화를 전세계에 알리는 문화협력 사업을 추진하고 있었다. 데이비드 한은 김정원씨에 대한 북한정부의 초청장까지 갖고 국내로 들어와 김정원씨를 만나려고 시도하고 있었다. 이 또한 사실을 사전에 입수한 안기부의 저지로 무산되었다.

    북한이 노린 두 번째 인물은 대통령의 차남 김현철씨였다. 하지만 북한이 김현철씨를 평양으로 데려가려는 시도는 딱히 황장엽 망명 사건과 연관된 것만은 아니었다. 이미 95년께부터 북한은 김현철씨를 평양으로 데려가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북한은 김현철씨를 북한으로 불러들이기 위해 세 번이나 사람을 보냈고 현철씨도 평양방문을 여러 차례 추진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당시 대북 비선조직을 운영했고, 남북정상회담을 독자적으로 추진하고 있었다. 문민정부 당시 현철씨와 그의 사조직은 베이징과 도쿄에서 여러 차례 북한 쪽 인사들과 비밀리에 접촉했다. 당시 김현철씨와 그의 사조직은 북한에 상당한 식량을 제공하는 대신 남북 정상회담을 갖는다는 시나리오를 작성해서 북측 인사들과 접촉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김현철씨와 그의 사조직의 무분별한 대북 접촉은 자연히 공조직인 안기부나 통일원 팀과 불화를 빚었다. 문민정부의 대북 정책 혼선은 이런 사정 속에서 벌어진 것이다. 북한측 창구는 단일화되어 있는데, 남한측은 현철씨로 대표되는 청와대선과 권영해부장으로 대표되는 안기부선이 이중으로 대북 문제를 맡고 있었다. 북한은 이 두 채널을 적절히 이용했고, 남한측이 이용만 당하고 뒤통수를 맞는 경우가 자주 벌어졌다.

    북한은 현철씨의 이용가치를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를 교묘히 이용했다. 북한은 ▲1995년 제1차 남북한 쌀 협상 때 중도에서 현철씨가 뛰어들어 별다른 대가 없이 쌀 15만톤을 손쉽게 가져갈 수 있었으며 ▲YS는 현철씨의 말을 믿기 때문에 대통령을 움직일 수 있고 ▲비공식적인 남북 협상을 반대하는 미국과 한국 정보기관의 반대를 피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95년 쌀 협상에 김현철씨가 끼어든 사정은 이렇다. 1995년 북한은 식량난에 시달리며 미국과 일본에 식량 지원을 호소했다. 미국과 일본은 한국이 북한에 쌀을 지원하면 미·일도 나설 수 있다고 북한에 통고한 후 남북대화를 건의했다. 당시 북한은 한국정부가 김일성이 사망했을 때 조문사절단을 보내지 않은 것을 빌미로 김영삼 정권하고는 절대로 대화하지 않겠다고 버텼다. 그러나 북한은 일본 쌀을 지원받기 위해서는 남한 쌀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북한은 여러 가지 궁리를 했으나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그런 때에 권영해 안기부장이 미국과 일본의 비밀 루트를 통해 95년 3월 북한 고위층과 대화 창구를 열었다. 김일성 사망으로 막혔던 남북의 대화창구가 간신히 열리는 순간이었다.

    이 루트를 통해 남한은 북한에 ‘(1)대남 비방 방송을 중단하라 (2)게릴라 파견을 중지하고 남북 적십자 회담과 경제회담을 재개하자 (3)대화와 협상을 통해 남북한이 서로 신뢰를 구축하면 남쪽에서 북한에 식량을 지원한다 (4)경제 진출도 할 수 있다’고 제의했다. 이런 대화가 도쿄에서 조용하게 추진되고 있었다.

    당시 실무자였던 안기부와 통일원 팀은 협상을 한걸음씩 착실하게 진행해 나갔다. 그런데 6월 들어 북한측이 갑자기 태도를 바꿔 도쿄 협상을 중단하며 베이징에서 만나자고 요구했다. 그 며칠 후 청와대는 베이징 남북 쌀협상을 발표하며 남북 문제와 전혀 관련이 없는 이석채 재정경제원 차관이 베이징 협상 대표로 간다고 발표했다. 도쿄에서 협상을 진행하던 공조직 실무팀은 완전히 배제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그 후 몇 차례 회담 대표들이 오가면서 결국 남한은 쌀 15만톤을 무상이나 다름없이 제공했다. 또 쌀을 싣고 간 선박이 태극기를 달았다는 이유로 억류당하고 사진을 찍었다는 혐의로 선원이 체포되는 창피를 당하게 된 것이다. 쌀을 주고도 뒤통수를 맞은 격이었다. 당시 일본은 북한이 돈을 내고 북한 선박을 이용해서 쌀을 수송하게 만들었으며, 쌀도 무상으로 제공하지 않았다. 당시 베이징회담에 참여했던 관계자의 말을 따르면 “베이징 협상은 안기부와 통일원의 도쿄 비밀 회담 정보를 안기부내 현철씨 비밀조직이 빼낸 뒤 현철씨 사조직이 뛰어들어 망쳐놓은 본보기다”라고 말했다.

    쌀을 북한에 제공하고도 선원과 선박이 억류당하는 꼴을 본 남한 국민들은 YS 정권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YS는 남북 문제를 안기부와 통일원에서 전담하도록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현철씨는 아버지 말을 잘 듣지 않았다. 그 후에도 현철씨 그룹은 여러 경로를 통해 북한 문제에 개입하려고 했다. 하지만 미국과 안기부의 반대로 벽에 부딪히는 경우가 많았다.



    미 CIA, 김현철을 감시

    당시 현철씨가 주도하는 청와대의 대북 사업을 누구보다 못마땅하게 생각한 그룹은 바로 미국이었다. 미국은 현철씨의 대북 사업을 극도로 경계하며, 정보 요원을 동원해 현철씨 사조직의 대북 사업을 면밀히 감시하고 있었다. 당시 실제로 현철씨 사조직이 모이는 서울시내 사무실에는 청와대의 1급 비밀서류 카피가 돌아다니고 있었다. 미국은 그래서 ‘한국정부의 비밀회의 자료가 2시간 후면 야당 총재 손에 들어가고, 3시간 후면 평양에 팩스로 들어간다’며 한국 정부 고위층에 충고하고, 현철씨의 미국 유학을 주선하기도 했다.

    이러한 사실은 미국 CIA와 백악관 국가안보위원회(NSC) 전직 고위 인사들의 증언과 기밀보고서에서 확인되고 있다. 97년 1월 말 미 CIA국장에서 은퇴한 존 도이치(John Deutch)씨는 사표를 내기 며칠 전 상원 비밀청문회에 나가 “남북한 관계는 매우 불투명하다. 남북한의 최고 지도자들은 대화가 필요하다고 말은 하지만 사실은 대화를 원하지 않는다”고 증언했다. 그는 또 “미국은 한국의 정보기관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북한 문제에 대해서는 긴밀하게 협의하고 있다. 한국 정보기관은 믿을 수 없으나 정보기관 책임자인 제너럴 권(권영해)은 미국에서 군사교육을 받았으며 크리스천임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고 증언했다.

    존 도이치 국장이 의회에서 이런 증언을 한 것은 미국이 YS정권 초기에 김영삼 정권의 대북 정책을 의심했으며, 청와대와 안기부 내에 숨어 있는 김현철계 세력을 감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이 김영삼 정권의 대북 정책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게 된 것은 YS정권이 초기에 “어떠한 우방보다도 민족이 우선한다”는 슬로건을 내세우고 이인모 노인을 평양으로 돌려보내는 등 획기적인 대북 정책을 폈기 때문이다.

    97년 2월12일 베이징의 한국총영사관에 망명한 황장엽 전 북한 로동당 국제담당 비서도 “남한 정부의 중요기관과 권력 핵심부에 친북한 세력이 상당히 자리잡고 있다”고 폭로해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그의 발언은 김현철씨측의 대북 접촉을 염두에 둔 것이다.

    이런 김현철씨를 평양으로 데려가기 위해 북한이 내세운 인물은 재미동포 김양일씨(金洋一·전 미주 한미식품상 총연합회 회장)와 조지워싱턴대학의 한국계 학자 김아무개 박사로 알려지고 있다. 김양일씨는 이른바 ‘북풍 사건’의 핵심인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인물이다. 그는 당시 한나라당 정재문의원과 북한 조평통 안병수 부위원장의 접촉을 주선한 인물이기도 하다.

    미국 한인식료품연합회 회장이던 그는 1994년 코카콜라 등 미국 기업투자단이 북한을 방문할 때 통역으로 따라간 것을 계기로 대북사업에 뛰어들었다. 그가 직접 북한에 코카콜라를 수출했던 것이다.

    이후 김양일씨는 한승수 전 청와대비서실장에게 수시로 북한 관련 정보를 보고하기도 했다. 두 사람은 한승수 실장이 주미 대사로 있던 시절 알게 되었다. 김양일씨는 조평통 등 북한측 고위간부와도 접촉하면서 식량지원 같은 남북한 거래를 성사하기 위해 애쓰기도 했다. 94년부터 95년까지 재임한 한승수 비서실장은 후임인 김광일 실장에게 김양일씨를 소개했으며, 김양일씨는 민주계 인사들과 자주 접촉했다. 그는 또 자신이 직접 700만 달러를 투자해서 평양에 라면(국수)공장을 건설할 계획이었다. 이 계획은 ‘시사저널’이 특종보도한 ‘청와대 밀가루 북송 사건’이 터지면서 무산되었다.

    김양일씨는 서울에 와서 여러 지인을 만나 현철씨를 소개해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권영해 부장의 안기부는 그가 현철씨를 평양으로 데려가려는 의도임을 파악하고 있었다. 안기부는 그를 철저하게 감시했고, 현철씨와 접촉하지 못하도록 가로막아서 초청 공작을 무산시켰다.



    세 번째 대상 엄기현

    북한이 노린 마지막 인물은 문민정부의 숨은 실세 엄기현씨다. 문민정부 당시 ‘서초동 엄회장’으로 불리던 그는 김영삼 전대통령의 경남고 2년 후배로 고교 축구부 때 맺은 인연으로 50년 동안 김전대통령을 도운 인물이다. 그는 YS가 야당 시절, 커피배달 용역업체를 운영하며 금전적인 도움을 주고, 정치자문도 해왔다. 청와대 비서실장을 지낸 김광일씨가 13대 총선 당시 YS 진영으로 들어가는 데 기여한 사람도 바로 엄씨다.

    YS 진영과 그의 관계는 이른바 상도동 가신 출신 중에 엄씨에게 금전적·정신적으로 신세를 지지 않은 사람이 별로 없을 정도로 두터웠다는 소문이다. KBS 독일 특파원 출신으로 YS의 사조직인 민주사회연구소 소장과 청와대 정무비서관(1급), 방송개발원장을 지낸 엄효현씨가 그의 친동생이다.

    YS의 평생동지였던 그는 문민정부 당시 갖가지 이권에 개입한 사실이 98년 이후 드러나서 고초를 겪고 있다. 엄씨는 문민정부 초기에 박태준 전 포철회장 이후의 포철체제 수립에 깊이 관여해 포철인사를 좌지우지했다는 비난도 받았다. 또 우학그룹이 한화종금을 인수합병(M·A)할 때 로비자금 3억원을 받고, 94년 부산 민방사업 허가와 관련해 1억5000만원을 받은 혐의로 98년 구속되어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 및 추징금 4억5000만원을 선고받은 바 있다.

    북한은 황장엽 망명 직후 그를 평양으로 데려가기 위해 조총련계를 이용해 접근했다. 하지만 이도 일본 공안당국 협조로 안기부가 사전에 알아차렸다. 안기부는 일본에서 그를 만나려고 한국에 들어오려던 조총련계 인사의 비자를 거부해서 엄씨의 납치 기도를 막았다.

    결국 YS의 친인척을 납치해 황장엽 망명에 복수하려던 북측의 이른바 ‘모란봉 작전’은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만약 북한측의 납치 작전 가운데 단 한 건이라도 성공했다면 남북관계는 전혀 다른 국면으로 전개되었을 것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모란봉 작전을 좌절시킨 일등공신이 바로 DJ 정부 수립을 끝까지 막으려 했던 손충무씨와 권영해씨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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