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의 실학을 대표하는 인물이 다산 정약용이라고 한다면, 조선 후기의 문화예술계를 대표하는 인물은 추사 김정희라고 하여도 과언은 아니다. 영·정조시대 조선 후기 문화의 르네상스라고 일컬어지는, 이른바 ‘진경문화(眞景文化)’를 이끌던 세력 중심에 추사라는 인물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그런만큼 이 시대의 학문을 논할 때 정다산을 비켜갈 수 없듯이, 예술을 논하려면 김추사를 비켜갈 수 없다고 본다.
그는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의 인구에 회자되는, 유명한 서예관(書藝觀)을 피력한 바 있다.
“가슴속에 청고고아(淸高古雅)한 뜻이 있어야 하며, 그것이 문자의 향기(文字香)와 서권의 기(書卷氣)에 무르녹아 손끝에 피어나야 한다.”
명필은 단순히 글씨 연습만 반복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고 많은 독서와 사색을 통해 인문적 교양이 그 사람의 몸에 배었을 때야 비로소 가능하다는 관점이다. 문자향과 서권기는 그러한 인문적 교양을 함축한 말이다.
한자 문화권의 3대 예술장르라고 할 수 있는 시(詩)·서(書)·화(畵) 삼절(三絶)은 공통적으로 인문학적 지층이 두터워야 함은 물론이다. 온축된 학문적 바탕 없이 테크닉만 가지고는 대가의 반열에 오를 수 없다.
시서화 삼절 가운데서도 서(書) 부분이 특히 그렇지 않나 싶다. 시가 읽는 예술이라고 한다면, 그림(畵)은 보는 예술이라는 측면이 강하고, 글씨(書)는 양쪽을 겸비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서예라고 하는 장르는 글씨가 담고 있는 의미를 읽는 예술인 동시에 글씨마다의 조형적인 아름다움을 눈으로 보면서 감상하는 예술이라는 말이다. 이처럼 서예가 시와 그림 양쪽의 중도통합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보니, 한자문화권에서 상대적으로 시나 그림보다도 더욱 존중되었던 예술세계다.
아무튼 추사가 창안한 ‘추사체’ 서예는 서권(書卷)의 기(氣)라고 하는 사고의 깊이와, 문자(文字)의 향(香)이라고 하는 감성의 향기를 아울러 갖추었다는 점에서 한·중·일 삼국의 지식인 사회에 크게 반향을 일으켰다고 여겨진다. 요즈음 바둑의 천재 이창호가 천하제일의 끝내기로 삼국을 주름잡고 있는 것처럼, 19세기에는 김정희의 추사체가 그 문자향과 서권기의 품격으로 동양 삼국을 한바탕 풍미하였던 것이다.
충청도 양반론의 근거
필자가 용궁리에 있는 추사고택을 답사하는 이유 역시 추사의 문자향과 서권기를 배출한 그 풍광과 토양이 어떠했나를 추적하기 위해서다.
과연 어떠한 집터였기에 이런 인물을 배출할 수 있었을까? 비범한 터에서 비범한 인물이 나온다는 것이 감여가(堪輿家)의 지론인만큼 그 터에는 어떤 특징이 있을 것이다.
제일 먼저 검토할 사항은 추사가 충청도 양반 출신이라는 사실이다. 구한말의 지식인 황현(黃玹, 1855∼1910년)이 “평양은 기생 피해가 크고, 충청도는 양반 피해가 크고, 전주는 아전 피해가 크다”고 지적했듯이, 충청도는 양반이 하도 많아서 양반의 피해를 운운할 정도였다. 그렇다면 왜 충청도에 양반이 많이 살 수밖에 없었는가? 충청도가 양반 살기에 적당했던 인문지리적 조건은 무엇인가? ‘택리지’에서는 충청도를 이렇게 설명한다.
“남쪽의 반은 차령 남쪽에 위치하여 전라도와 가깝고, 반은 차령 북편에 있어 경기도와 이웃이다. 물산은 영남·호남에 미치지 못하나 산천이 평평하고 예쁘며, 서울 남쪽에 가까운 위치여서 사대부들이 모여 사는 곳이 되었다. 그리고 여러 대를 서울에 사는 집으로서 이 도에다 전답과 주택을 마련하여 생활의 근본되는 곳으로 만들지 않은 집이 없다. 또 서울과 가까워서 풍속에 심한 차이가 없으므로 터를 고르면 가장 살 만하고, 그중에서도 내포(內浦)가 제일 좋은 곳이다. 가야산 앞뒤에 있는 열 고을을 함께 내포라 한다. 지세가 한모퉁이에 멀리 떨어져 있고, 또 큰 길목이 아니므로 임진년(임진왜란)과 병자년(병자호란) 두 차례의 난리에도 여기에는 적군이 들어오지 않았다. 땅이 기름지고 평평하다. 또 생선과 소금이 매우 흔하므로 부자가 많고 여러 대를 이어 사는 사대부 집이 많다.”
충청도에 양반이 많이 살았던 이유를 정리하면, 우선 정치권력이 집중된 서울과 가까운 거리에 있다는 교통의 이점과, 그 다음으로는 산천이 평평하고 예쁘다는 풍수적인 장점을 꼽을 수 있다. 마지막으로는 추사고택이 자리잡고 있는 내포(內浦)라는 지역이 난리를 겪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소금과 생선이 풍부한 지역이라는 점이다.
풍수적으로 볼 때 충청도는 높고 가파른 산들이 다른 도에 비해서 현저하게 적다. 대구 팔공산이나 영암의 월출산을 둘러볼 때 다가오는 위압감이나 야성적인 느낌을 주는 산들이 충청도엔 거의 없다. 돌산보다는 흙으로 이루어진 야트막한 야산들이 주를 이룬다.
그래서 흔히 충청도 산세의 부드러움을 표현할 때 “개떡을 엎어놓은 것 같다”거나 “솜이불을 덮어놓은 것 같다”고들 한다. 그만큼 야트막한 둔덕 같은 산들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심리적인 안정감과 평화로움을 느끼게 한다. 붉은 석양이 서산에 질 무렵 길가에 차를 대놓고 야트막한 둔덕의 가장자리에 자리잡은 충청도 시골집들의 굴뚝에서 솟아오르는 흰 연기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누구라도 고요한 충만감이 가슴에 밀려오는 걸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살기가 전혀 없는 추사 고택
추사고택이 자리잡고 있는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 주변의 산세 역시 ‘솜이불을 덮어놓은 것 같은’ 충청도 산세의 전형을 보여주는 곳이다. 추사고택은 솜이불같이 포근한 기운을 풍기는 야트막한 둔덕들이 둘러싸고 있다. 주변 사방 어디를 보아도 아주 부드러운 속살 같은 이불뿐이요, 쇠붙이 같은 날카로운 느낌을 주는 산이 전혀 없다.
집터 앞의 안산(案山)은 마치 누에가 가로로 길게 누워 있는 듯한 야산일 뿐만 아니라, 청룡자락과 백호자락을 둘러보아도 높은 산이 없다. 그런가 하면 집 뒤의 내룡(來龍)을 보아도 해발 100m도 안되는 야산이라서 위압감이 전혀 느껴지질 않는다. 한마디로 추사고택 주변 산세의 특징은 살기(殺氣)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살기란 무엇인가? 바위나 암벽이 드러나 있는 험한 산에서 방사되는 기(氣)를 일러 살기라고 한다.
이를 쉽게 풀어보기로 하자. 지구 자체가 실은 하나의 거대한 자석(磁石)이며, 여기서 방사되는 자력 성분을 띤 일종의 에너지를 지자기(地磁氣)라고 한다.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틀림없이 존재하며 지구 환경에 영향을 끼치는 이 에너지를 풍수가에서는 지기(地氣)라고 부른다.
그런데 지자기는 흙으로 된 토산(土山)에 비해 바위로 된, 또는 바위나 암벽이 노출된 산에서 강하게 발산된다. 과식하면 몸에 해롭듯이 에너지가 필요 이상으로 강하면 인체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즉 바위에서는 평범한 사람이 소화 흡수할 수 있는 양을 넘어서는 지기가 방사되고 있기 때문에 해를 미친다고 보고 이런 부작용을 살기라 하는 것이다. 물론 집터를 잡을 때 이러한 산세를 피하는 것이 일반이다.
그러나 지기가 강한 바위가 있다고 해서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니다. 칼을 휘두르며 적진을 돌파해야 하는 무장(武將)들은 오히려 강한 곳을 좋아한다. 살기가 있는 곳에서 담력과 기백이 솟아나오기 때문이다.
신라시대 화랑도들이 전국의 명산(名山)을 돌아다니면서 심신을 연마하였다고 한다. 이때의 명산이란 대개 바위산을 가리킨다. 김유신 장군이 칼로 바위를 베었다는 고사가 전해지는 경주 근처 단석사(斷石寺)만 하더라도 짱짱한 화강암으로 뭉친 터다.
장군들과 마찬가지로 불교의 고승들도 강한 지기가 뿜어나오는 곳을 선호한다. 검선일치(劍禪一致)의 이치에서다. 선승(禪僧)이 되려면 검객의 기질을 가지고 있어야 하고, 실제로 선승과 검객은 통하는 면이 있다. 그 증거로 사찰에 가면 가끔 ‘심검당(尋劍堂)’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글자 그대로 ‘검(칼)을 찾는 방’이라는 뜻이다. 왜 산 속의 절간에서 칼을 찾아야만 하는가? 칼이 있어야 단도직입(單刀直入), 일도양단(一刀兩斷)으로 번뇌를 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때의 칼은 쇠로 만든 칼이 아니라 지혜의 칼을 의미한다.
유명한 고승이 머물렀던 우리나라 불교사찰의 터를 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대부분 바위산에 둘러싸여 있거나 바위 위에 자리잡고 있다. 가야산의 해인사, 속리산 법주사, 월출산 도갑사, 북한산 망월사, 관악산 연주암, 삼각산 도선사, 대둔산 태고사 등이 모두 그렇다. 그것도 한결같이 아주 험한 바위산들이다.
이렇게 바위산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어야 추사고택만이 지닌 차별성을 파악할 수 있다. 야트막한 둔덕뿐이라서 주변 사방에 살기가 보이지 않는 산세는 조선시대 양반들이 가장 선호하던 지역이었다. 양반들이 좋아하던 산세의 모범답안이 이곳이라고 해도 좋다.
주지하다시피 조선시대는 성리학(性理學)의 시대였고, 조선의 성리학은 무(武)보다는 문(文)을 지향하던 신념체계다. 조선 초기 이방원이 왕자의 난을 거쳐 태종으로 등극한 이래 쿠데타 가능성이 있는 무신들을 은근히 배제하던 분위기가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조선조의 당파싸움이란 것도 그 성격을 따지고 들어가 보면 문신(文臣)들이 서로 권력을 장악하려는 싸움 방식이었다.
문과 무를 놓고 볼 때 ‘이불을 덮어놓은 것과 같은’ 산세가 바로 문을 상징하는 것이라면, 바위나 암벽으로 위압감을 주는 산세는 무를 상징한다. 그래서 지나치리만큼 숭문주의에 빠진 조선조 양반사회에서는 양택과 음택을 막론하고 터 주변에 바위산이 보이는 곳은 흠이 있는 것으로 여겼다.
이런 맥락에서 추사고택은 바위산의 무기(武氣)가 보이지 않고 야트막한 둔덕의 문기(文氣)만 가득한 무릉도원(武陵桃源)이다. 애초 무릉도원의 말뜻이 무를 차단하는 큰 언덕이요, 칼이 없는 그곳에 복사꽃 만발한 복숭아 동산을 가리킨다. 전쟁과 격절된 채 평화가 흘러넘치는 유토피아인 것이다. 바로 이런 곳에서 문과 서를 애호한 나머지 문자향, 서권기가 나오지 않았나 싶다.
추사고택이 무릉도원이라면 혹시 복숭아밭이 있나 찾아보았으나, 늦가을의 빨간 사과들이 탐스럽게 매달린 사과밭이 여기저기 많다. 이 지역이 사과가 잘 되는가 보다. 꿩 대신 닭이라고 무릉사과밭도 괜찮은 것 같다.
잉글랜드는 신사(紳士, Gentry), 인도는 브라만, 일본은 무사 계층이 그 사회를 주도하였다면, 조선조를 주도했던 계층은 당연히 양반 계급이었다. 추사는 충청도 양반인데, 그것도 보통 시시한 양반이 아니라 일급 양반에 속하는 집안에서 태어난 인물이다.
양반에도 종류와 격이 있다. 조선의 양반을 연구해온 일본학자 궁도박사(宮島博史)에 따르면 양반은 크게 두 종류로 나뉜다. 서울에 주로 거주하는 재경양반(在京兩班)과, 지방의 농촌에 거주하는 재지양반(在地兩班)이 그것이다.
재경양반은 양반층 중에서도 명문에 속하는 가계가 많다. 이들 가계는 대대로 서울과 그 주변 지역에 거처를 정하여 과거 합격자를 많이 배출했고 고위 관직을 상당수 차지했다. 조선의 왕실인 전주 이씨를 비롯해 파평 윤씨, 안동 김씨, 풍양 조씨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런데 전주 이씨나 안동 김씨라 하더라도 모두가 재경양반에 속하는 것은 아니었다. 재경양반으로서 위세를 유지했던 가계는 전주 이씨나 안동 김씨 중에서도 특정한 파(派)였고, 재지양반층으로 농촌 지역에 거주하는 가계도 있었다.
재경양반층 사이에는 중앙정부의 권력 변동에 따른 세력의 성쇠가 있긴 했지만, 그들 가계는 그 근본이 분명했고 더구나 대대로 많은 관료를 배출했기 때문에 특권 계층인 양반 신분에 속하는 것으로 사회적으로 쉽게 인지되었다.
이에 비해 향반(鄕班)으로도 불리는 재지양반층은 그 상황이 재경양반층과는 달랐다. 재지양반층은 한 가지 요인이 아니라 몇 가지 복합적인 요인에 의하여 형성되었다. 첫째는 과거합격자 또는 과거에 합격하지는 않았지만 당대를 대표하는 저명한 학자를 조상으로 모시고 있을 것이며 그와 함께 그 조상과 연결된 계보 관계가 명확해야 했다.
둘째, 여러 대에 걸쳐 동일한 지역에 집단적으로 거주하고 있어야 한다. 이런 대대손손의 거주지를 세거지(世居地)라고 하는데, 세거지에서는 양반 가문이 동족 집단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셋째는 양반의 생활 양식을 보존하고 있어야 한다. 양반의 생활 양식이란 조상 제사와 손님에 대한 접대를 정중히 행하는(奉祭祀, 接賓客) 동시에 일상적으로는 학문에 힘쓰고 자기 수양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넷째는 대대로 결혼 상대, 즉 혼족의 대상도 첫째에서 셋째의 조건을 충족시키는 집단에서 골라야 한다.
그런데 재경과 재지양반 중에서 시간이 흐를수록 재지양반 쪽이 양반의 주류를 이루어 나갔다. 이는 중국의 사대부층이 명에서 청대에 걸쳐 점차 향거(鄕居;농촌 거주)에서 성거(城居;도시 거주)로 그 존재 형태가 변화하였고, 일본의 무사계층도 중세에 농촌에서 거주하다가 근세가 되자 성하정(城下町; 성 아래의 마을)에 집주하게 된 것과는 다른 양상이었다. 조선에서는 시간이 흐를수록 농촌에 거주하는 재지양반층이 늘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기준에 비추어 보면 추사 집안은 재경양반인가, 재지양반인가? 흥미롭게도 양쪽 모두에 해당하는 집안이었다. 추사는 16세기 중반부터 가야산 서쪽 해미 한다리(충남 서산군 음암면 대교리)에 터를 잡고 살기 시작한 소위 ‘한다리 김문(金門)’의 명문 집안이다.
먼저 추사의 고조부인 김흥경(興慶, 1677∼1750년)은 영의정(1735년)을 지낸 인물이다. 김흥경의 막내아들이 김한신(漢藎, 1720∼1758년)으로 영조의 장녀인 화순옹주(和順翁主, 1720∼1758년)와 결혼함으로써 영조의 사위인 월성위(月城尉)가 된다. 그러니까 추사는 월성위 김한신이 증조부요, 화순옹주가 증조할머니인 로열 패밀리인 것이다.
영조는 화순옹주를 무척 아꼈기에 큰사위인 월성위도 영조의 각별한 대접을 받았다. 그래서 영조는 옹주가 태어난 잠저인 창의궁(彰義宮, 천연기념물 제4호 백송이 있던 통의동 35번지)에서 얼마 멀지 않은 적선방에 월성위궁(月城尉宮, 현재 정부종합청사 부근)을 마련해주고 내당을 종덕재(種德齋), 외헌을 매죽헌(梅竹軒), 소정(小亭)을 수은정(垂恩亭)이라고 손수 써서 하사하기도 하였다.(‘과천향토사’, 154쪽)
이처럼 영조의 각별한 배려를 받은 월성위는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고, 이 경제력을 바탕으로 집도 옮기게 된다. 즉 월성위 때부터 해미의 한다리에서 신암면의 용궁리로 옮겨 살게 된 것이다.
육로와 해로의 교통요지, 용궁리
월성위는 서울 동대문 밖 검호(黔湖)에 거처를 마련하는 한편으로 충남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의 오석산(烏石山)과 용산(龍山) 주변을 사들였다. 용궁리 일대는 삽교천 중류에 위치하여 내포(內浦)에서 서울로 연결되는 육·해로의 교통요지다. 서울에서 인천을 거쳐 배를 타고 하룻길이면 아산만에 진입하고 삽교천을 거슬러 올라오면 곧바로 선착장인 용궁리에 도착할 수 있는 것이다. 또 용궁리에 도착하여 말을 타고 10리만 가면 신례원(新禮院)이라는 역원(驛院)이 있는데, 역원에서 말을 바꿔 타고 한나절이면 월성위의 조상 선영이 있는 서산에 도착할 수 있다. 이처럼 용궁리는 서울과 서산의 선영을 잇는 교통의 요지에 있었다.
당시 해로는 요즘의 고속도로와 마찬가지였다. 인천의 새우젓도 여기를 통해서 들어왔고, 1868년 4월 남연군 묘를 도굴하러 온 프러시아의 오페르트 일당이 배를 대고 상륙한 곳도 바로 이곳이다. 또한 이곳 사람들이 인천에 가서 많이 살게 된 계기도 해로를 통한 교통 때문이다. 참고로 최근에 개통된 동양 최장의 서해대교(7.3km)가 바로 아산만을 가로질러 충청도와 경기도를 연결하는 대교다.
아무튼 이곳을 고가로 사들인 월성위는 부친의 묘소(추사 고조부의 묘)도 쓰고 집도 지었다. 이 집들을 지을 때 충청도 53군현이 1칸씩 부조하여 53칸 집을 만들었다는 일화가 전해지는 것으로 보아 당시 월성위가의 명망이 어떠했는지 짐작이 간다.
이상을 정리하면 추사집안은 영의정, 판서, 대사헌을 지낸 인물에다 영조의 부마까지 배출한 명문이다. 그리고 서울에도 근거지를 가지고 있고, 시골에도 역시 세거지를 가지고 있던 양수겸장의 일급 양반 집안이다.
물론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용궁리의 지리적 특색 때문이다. 용궁리는 서울의 재경양반과 충청도 내포의 재지양반을 연결하는 고리였던 것이다. 아무튼 월성위가 이곳 용궁리에 터를 잡은 일차적인 이유는 일이 있을 때 배를 타고 서울로 빨리 갈 수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던 것은 확실하다.
둘째 이유는 두말할 필요없이 이곳이 더할 나위 없는 명당이기 때문이다. 음택과 양택에 모두 합당한 자리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점이 명당인가. 당대의 일급양반이 많은 돈을 들여 구입할 만큼 과연 명당이었던가. 필자가 1박2일 동안 현장을 면밀히 답사해본 결과 월성위가 왜 이곳을 탐냈는지, 그리고 이름을 하필이면 용궁리(龍宮里)라고 했는지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었다.
먼저 이 동네의 소종래(所從來)를 더듬어 보자. 추사고택이 있는 마을 이름은 용궁리이고, 고택이 자리한 바로 뒷산 이름은 용산(龍山)이다. 용산 줄기는 멀리 팔봉산(八峰山)에서 시작된다. 팔봉산은 용산의 조산(祖山)에 해당하는 산으로 용산까지는 20리 정도의 거리다. 즉 팔봉산이 20리를 꾸불꾸불 오다가 그 끝자락인 용산에서 나지막하게 혈을 맺은 것이다.
‘천리행룡(千里行龍)에 일석지지(一席之地)’라는 풍수 용어가 있다. 용이 천리를 내려오다가 자리 하나를 만든다는 말인데, 호박을 자세히 관찰하면 줄기 끝에 열매를 맺듯이 혈자리는 그 끝자락에 있는 법이다.
이곳 사람들은 꾸불텅 꾸불텅 내려온 20리 산줄기를 구절비룡(九節飛龍)이란 이름으로 부른다. 그 산줄기의 내려온 모양이 아홉 마디를 지닌 비룡과 흡사하다는 뜻이다. 여기서 구절이란 꼭 아홉 마디를 지칭하는 것은 아니고, 아주 많은 마디(節)라는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만큼 마디가 많다는 것인데, 풍수에서는 갈지자 형태로 이리저리 마디를 많이 만들수록 좋다고 본다. 마디없이 한일자처럼 직룡으로 내려온 줄기는 묘용(妙用)이 없다.
용산은 팔봉산에서 20리를 내려온 용의 머리에 해당한다. 그 용의 머리가 삽교천의 물로 들어가려는 형국이다. 용궁리에서 삽교천 강물까지는 300m 정도로 지척간이다.
추사의 고조부인 김흥경의 묘가 있는 곳은 용의 콧구멍에 해당하는 자리다. 지금은 지형이 바뀌었지만 원래 김흥경의 묘 앞에는 방죽이 있어서 물이 가득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화순옹주묘 앞에까지 물이 들어와 있었는데, 85년도에 경지정리를 한다고 흙으로 전부 메워버려 지금은 평토가 되었다.
용궁은 물 속에 있듯이, 이곳이 용궁리인 것은 용의 머리 주변에 자연적인 방죽이 둘러싸고 있어서 물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때의 물은 재물로 간주한다. 이렇게 물이 주변을 둘러싸고 있으면 재물도 풍족하게 유지되리라고 여겼을 것이다. 길게 누운 용이 머리를 물에 대고 막 입수(入水)하려는 지점인 용궁리.
등산화 끈을 조이고 야트막한 용산에 올라 동네를 관망한다. 아마도 150년 전 처음 이 집터를 잡을 때 풍수깨나 한다는 한다리 김씨들도 필자처럼 이곳에 올라 주변 사격(청룡·백호·주작·현무)을 관찰했을 것이다. 그들도 같은 심정이었을까, 온통 솜이불로 덮인 평화로움뿐이다.
팔봉산 쪽으로 방향을 틀어 한걸음 한걸음 주령을 타고 걸어본다. 지관은 눈으로도 보아야 하지만 반드시 발로도 밟아보아야 맛이 난다. 천상 ‘발로꾸니’가 되어야 한다. 산줄기라도 전혀 험하지 않고 뒷동산 산책하는 것같이 평탄하다. 이놈은 순한 용이라는 생각이 든다.
회룡고조의 추사 고택
패철로 추사고택의 좌향을 재보니 유좌(酉坐)다. 유좌는 정동향(正東向)을 나타낸다.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비전(秘傳)에 의하면 정동향집은 아침에 태양이 정면으로 들어오기 때문에 정좌(靜坐)를 하기에 적합한 터다. 정좌는 떠오르는 태양의 기운을 받는 작업이므로 정신수련에는 좋지만, 늦잠을 자는 사람에게는 곤란하다. 뻘건 해가 동창을 물들이니 눈이 부셔서 빈둥빈둥 누워 있기 힘들 것 아닌가.
추사고택에서 정면 오른쪽을 보니 저 멀리 높은 산봉우리가 눈에 들어온다. 동네사람 임수일씨에게 산 이름을 물어보니 팔봉산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 집은 회룡고조(回龍顧祖)의 형국이기도 하다. 용이 머리를 획 돌려 자기가 출발한 지점을 다시 쳐다보는 형국을 회룡고조라고 한다.
현대인이 보기에는 무정물에 지나지 않는 산을 용에다 비유하고, 그 용도 그냥 용이 아니라 머리를 획 돌린 용으로 보는 것이 풍수다. 무정물에 생명이 있어서 꿈틀거린다고 여기는 사유방식, 바로 이것이 동양인 풍수관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필자는 그래서 풍수를 서양 종교학자들이 말하는 애니미즘(animism, 物活論)과 상통한다고 본다. 애니미즘에 의하면 산과 바위에는 모두 정령(精靈)이 있다. 우리 시각으로 이야기하자면 산과 바위에는 지기(地氣)가 있으며, 지기가 우리 몸속에 들어와 꿈으로 나타날 때는 정령으로 현현한다.
예산 지방에는 추사의 탄생과 더불어 전설이 하나 전해온다. 추사가 태어나던 날 고택 뒤뜰에 있는 우물물이 갑자기 말라버렸고, 뒷산인 용산과 그 조산이 되는 팔봉산 초목이 모두 시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추사가 태어난 뒤에 물이 다시 샘솟고 풀과 나무가 생기를 회복하였다는 전설이다. 그래서 인근 사람들은 추사가 팔봉산 정기를 받고 태어났다고 믿었다. 인물이 날 때는 주변 산천의 정기를 모두 끌어당겨서 태어난다고 우리 조상들은 생각하였다. 산천의 정기와 인물을 둘로 보지 않는 애니미즘적인 세계관의 반영이다.
추사고택에 관한 자료를 뒤적거리다 보니 얼마 전에 출간된 김구용(金丘庸) 선생의 일기가 눈에 띈다. 지금부터 35년 전인 1965년 4월에 추사고택을 답사한 일기가 소개돼 있다. 60년대 중반 먹고살기 어려운 시대에도 문화인들은 산 넘고 물 건너 추사고택을 답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대략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예산에서 경찰서 지프를 빌려 타고 출발하여 언덕산을 넘고 논둑길을 걸으면서 용궁리에 도착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때만 해도 추사선생의 4대 종손인 김석환옹(金石煥, 당시 72세)이 생존해 있었고, 6대 종손 김완호씨(金阮鎬, 당시 32세)가 집을 지키고 있었다. 집 안에는 완당선생 도장이 많이 있어서 종이를 미리 준비해 가면 그 도장(낙관)들을 찍을 수 있었다. 지금은 나무가 많지만 당시만 해도 용궁산은 기계로 깎은 듯이 나무가 없는 민둥산이었고, 추사고택은 외딴 초가 한 채만 덜렁 있는 상태였다고 나온다. 그런데 어느날 밤 원인모를 불이 나 옛 건물은 모조리 타버렸고, 그 바람에 완당선생의 필적과 유물도 많이 소실되었다고 한다.
추사고택은 1968년 다른 사람에게 매도됐는데, 1976년에 충청남도에서 지방문화재 제43호로 지정하면서 매수하여 새로 지은 건물이다. 옛날 53칸집은 아니다. 현재의 집은 인간문화재인 이광규옹이 부분적으로 재현한 것이다.
추사고택에서 볼 만한 물건은 나무판에 가로 세로로 걸린 현판과 주련이다. 서예의 대가 집답게 수많은 주련이 대문 옆에도, 현관 앞에도, 기둥 옆에도, 담벼락에도 걸려 있다. 온통 주련이 집을 감싸고 있다. 추사선생은 갔지만 그 주련들이 남아서 선생이 생전에 흉중에 품고 있었을 사상과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이 주련들은 학문과 예술에 대해서 당대 일급의 안목을 지녔던 인물이, 과연 어느 정도 사고의 깊이와 너비를 가졌는가를 엿보게 하는 간접적인 자료이기도 하다.
사찰 대웅전이나 서원에도 몇 개씩 주련이 있긴 하지만 이처럼 주련이 도열해 있는 곳은 추사고택이 단연 독보적이다. 한마디로 ‘주련의 집’인 추사고택에서 이 주련들만 돌아가면서 보아도 문자향과 서권기에 취해서 반나절이 금방 가버릴 정도다. 샤넬의 향기도 감미롭지만 명문과 달필에서 우러나는 향기는 훨씬 은은하고 오래간다. 필자의 눈에 들어오는 것만 몇가지 소개해보자.
‘해저니우(海底泥牛) 함월주(含月走) 곤륜기상(崑崙騎象) 노사견(鷺絲牽)’ (바다 밑으로 진흙소가 달을 물고 달리고 곤륜산에서 코끼리 타니 백로가 고삐를 끈다)-설두지송(雪竇持誦)-
이는 불교 선가(禪家)의 화두(話頭)다. 추사가 선가에 침잠해 있었음을 말해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필자가 아는 수준에서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여기서 바다 밑의 진흙 소(海底泥牛)는 인체의 하단전(下丹田, 배꼽 아랫부분에 있는 혈)에 숨어 있는 쿤달리니(kundalini) 에너지(근원적인 생명 에너지)를 가리키는 것이다.
불화(佛畵)의 목우도(牧牛圖)나 십우도(十牛圖)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소는 요가에서 쿤달리니라고 말한다. 쿤달리니는 섹스에너지이기도 한데, 성교를 통해서 아래로 배출하면 생명을 낳고 명상을 통해 위로(上丹田) 끌어올리면 도인(道人)이 된다. 소를 다스린다는 것은 이 에너지를 다스린다는 의미다.
곤륜산에서 코끼리를 탄다는 것은 쿤달리니 에너지를 상단전(곤륜산)으로 끌어올린 상태이고, 백로가 고삐를 끈다는 것은 모든 것이 자유자재해서 걸림이 없는 경지를 말한다.
설두지송(雪竇持誦)이란 이 문구를 설두(雪竇)가 항상 외우고 다녔다는 뜻이다. 설두는 구한말의 설두유형(雪竇有炯, 1824∼1889년) 스님을 가리킨다. 설두는 바로 추사와 선(禪) 논쟁을 벌였던 백파(白坡) 스님의 제자로, 영광의 불갑사(佛甲寺)가 거의 폐사 직전에 있을 때 이를 중흥해낸 인물이다. 그는 백파의 구암사 문중과 초의(草衣)의 대흥사(大興寺) 문중이 100년에 걸친 선 논쟁을 벌일 때 구암사 문중을 대변하는 저술 중의 하나인 ‘선원소류(禪源溯流)’의 저자이기도 하다. 그 다음 주련들을 보면 이렇다.
書藝如孤松一枝(서예는 외로운 소나무의 한 가지와 같다)
畵法有長江萬里(그림 그리는 법은 장강 만리와 같은 유장함에 있다)
世間兩件事耕讀(세상에서 꼭 할 만한 일 두 가지는 밭갈고 책읽는 일뿐이다)
且將文字入菩提(문자를 통해서 깨달음에 들어간다)
唯愛圖書兼古器(오직 사랑하는 것은 그림과 책 그리고 옛 물건이다)
春風大雅能容物(봄바람처럼 고운 마음은 만물의 모든 것을 용납하고)
書已過三千卷(책은 이미 삼천 권이 넘었다)
半日靜坐半日讀書(반나절은 정좌하면서 마음을 수양하고 반나절은 책 읽는다)
추사고택의 사랑채 댓돌 앞에 눈길을 끄는 물건은 ‘석년(石年)’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높이가 1m 정도인 돌기둥이다. 고택이 동-서 축으로 자리잡고 있음에 비해 이 돌기둥은 남-북 방향으로 자리잡고 있다.
이 돌기둥은 해시계 구실을 한다. 태양의 위치에 따라서 이 돌기둥이 그림자를 만드는데, 그림자의 방향과 위치를 보고 시간을 알 수 있다. 옛날에는 시계가 없었으므로 이 돌기둥이야말로 훌륭한 자연시계였을 것이다. 추사선생이 제작하였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石年이라는 글씨도 추사체다. 다른 고택에서 보기 힘든 물건이다. 태엽을 감을 필요도 없고 배터리를 넣지 않아도 멈추지 않고 돌아가는 만년 시계임에 틀림없다.
음택과 양택의 동거
추사고택을 둘러보면서 필자가 받은 강한 인상은 묘지가 고택 바로 옆에 붙어 있다는 점이다. 먼저 증조부인 김한신과 화순옹주의 합묘가 고택 오른쪽에 있고, 더 오른쪽에는 고조부인 김흥경의 묘가 단정하고 온화한 터에 있다. 그런가 하면 고택 바로 왼쪽에는 추사 본인의 묘가 있다.
고택 좌우로 커다란 묘들이 포진하고 있는 셈이다. 어떻게 보면 좌우의 묘지 중간에 집이 있는 구조다. 본채의 좌우에 이처럼 묘가 있는 것을 보고 필자는 여러 가지 감회에 젖지 않을 수 없었다. 집과 묘가 나란히 있다는 것은 산자와 죽은자가 평화스럽게 공존하고 있음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집은 산사람이 사는 집이라서 양택(陽宅)이라 하고, 묘는 죽은 사람이 사는 집이라고 해서 음택(陰宅)이라 부른다. 음양택(陰陽宅)이 동거하고 있는 형국이 추사고택의 독특한 양상이다. 음양택의 동거, 산자와 죽은자의 동거, 어둠과 밝음의 동거.
이는 한국인의 사생관(死生觀)을 반영하는 풍경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죽음이 어디 멀리 공동묘지에 있는 게 아니라 바로 집 옆에 있다. 죽음이 무섭고 낯선 게 아니라 옆집처럼 이물없고 친숙하다. 그뿐 아니라 순환한다. 음택에서 양택으로, 양택에서 다시 음택으로 순환한다. 음택에서 다시 양택으로 순환한다는 것은 조상이 좋은 묘지에 들어가면 다시 그 집 후손으로 돌아온다는 믿음이다. 그러므로 한국인의 사생관에서 볼 때 죽어서 좋은 명당에 들어간다는 것은 죽음을 극복하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기쁨과도 같다.
추사고택에서 보여주는 음양택 동거처럼 한국의 전통문화를 자세히 살펴보면 이처럼 순환과 회귀의 장치가 몇 가지 더 있다. 회갑(回甲)만 해도 그렇다. 자기가 태어난 육십갑자로 60년 만에 되돌아오는 것이 회갑이다. 회갑에는 시간을 다시 시작하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겨울이 가면 다시 봄이 오는 것처럼 시간은 회귀한다.
또 초상집에 갈 때 우리 선조들은 모두 흰색 옷을 입었다. 검은색은 죽음을 상징하기 때문에 입지 않았다. 흰색이 상징하는 의미는 시작과 탄생이라고 한다. 우리는 죽음의 장소에 가서 시작과 탄생을 기원하였던 것이다.
추사 고조부의 묘를 둘러보았다. 용궁리 일대에서 제일 좋은 터는 이 고조부 묘인 것 같다. 용의 콧구멍 자리라고 하는데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다. 입수(入首)도 야트막한 둔덕으로 내려왔고, 주위의 사격(沙格), 혈구(穴口), 안대(案帶) 모두 흠잡을 데 없다.
그런데 이 묘를 한층 빛내는 기념물이 하나 있다. 바로 묘 앞에 서 있는 백송(白松)이다. 보통 예산의 백송이라 불리는데, 잎은 푸르고 몸체는 약간 흰색을 띤 희귀한 소나무다. 추사가 청나라 연경에서 돌아올 때 가지고 와서 고조부 김흥경의 묘 앞에 심어놓은 나무다. 수령 200년에, 높이는 10m다.
우아하면서도 고고한 절개가 느껴지는 백송을 바라보면서 나는 혼자서 생명의 회귀(回歸)를 상상하였다. 혹시 김흥경이 죽어서 추사로 환생한 것은 아닌가 하고 말이다. 왕대밭에 왕대 나고 쑥대밭에 쑥대 난다고 한다. 동이족(東夷族)의 무속신앙에 조상이 3∼4대 후에 자기집 후손으로 다시 돌아온다고 믿는 관습이 있는 것을 비춰보면 그렇다는 이야기다. 추사도 그 어떤 예감을 느꼈기 때문에 중국에서 가져온 백송을, 전생에 자기 자신이었던 고조부 묘에다 심어놓았을 수도 있지 않았겠는가….
추사는 유학자이면서도 ‘해동의 유마거사’라는 칭호를 들을 정도로 불교에 조예가 깊은 인물이었다. 조선시대에 불교는 무부무군(無父無君)의 이단사상이었고, 승려는 기생, 백정, 광대와 함께 팔천(八賤)에 들어가는 천민으로 취급되었다. 그런데 추사 정도 되는 일급 양반이 불교를 좋아하고 불교에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추사는 구암사의 백파(白坡)선사와 삼종선(三種禪) 논쟁을 통하여 조사선(祖師禪)에 대해 비판을 가할 정도로 선의 세계에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금강경을 호신용 부적처럼 항상 휴대하고 다닐 정도였고, 차로 유명한 전남 대흥사의 초의선사와도 차와 불교를 매개로 특별한 우정을 맺는다. 이런 걸 종합하면 조선시대를 통틀어 명문가의 유학자 신분으로 추사처럼 불교에 깊이 들어간 인물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추사가 이처럼 불교를 알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인가? 그걸 추적하다 보니까 화암사가 나온다. 화암사는 추사 불교의 원천이다. 추사고택에서 걸어서 20분 정도 거리에 있는 오석산(烏石山)에 자리잡은 작은 절이다.
이 절은 증조부인 월성위 때부터 추사 집안의 원찰(願刹)이었다. 원찰은 요즘 식으로 말하면 일종의 개인사찰이다. 자연히 추사는 어렸을 때부터 화암사를 출입하면서 자연스럽게 불교 분위기에 접했고 여러 불경을 보고 선도 익혔던 것 같다.
추사가 직접 화암사 대웅전 뒤편의 암벽에 남긴 ‘천축고선생택(天竺古先生宅)’과 ‘시경(詩境)’이라는 글자는 그러한 특별한 인연을 상징적으로 말해주는 자료다. 천축(天竺)은 서역의 인도를 말하고 고선생(古先生)은 부처를 유교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불교 사찰을 유교식으로 번역하면 바로 ‘천축고선생택’이 된다.
추사의 친필 글씨가 암각돼 있는 화암사 지세를 면밀히 살피면서 글씨가 새겨진 암벽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암벽은 대웅전 뒤편에 병풍처럼 서 있는데, 가로가 30m 세로는 3∼4m 정도의 크기다. 절에서도 이 바위를 병풍암이라 부른다.
화암사 뒷산의 이름이 오석산(烏石山)인데 까마귀 오(烏) 자를 집어넣은 이유는 돌을 깨보면 바위 속이 검기 때문이고, 그 바위가 잘 드러난 곳이 바로 이 병풍암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니까 조산인 팔봉산에서 고택이 있는 용산까지 20리를 내려온 구절비룡의 산줄기 가운데서 유일하게 바위가 돌출되어 암기(岩氣)가 강하게 발산되는 곳은 이곳 오석산의 화암사 대웅전 뒤편의 병풍암인 것이다.
그리고 그 병풍암에 추사가 직접 글씨를 새겼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내가 보기에 병풍암에 서린 암기, 즉 무기(武氣)는 불교적 선의 경지로 이끄는 원동력이었고, 더 나아가서는 추사글씨의 특징 중 하나로 꼽히는 강건함을 구성하는 밑바탕이 되지 않았나 싶다.
이 병풍암 밑에는 나무로 만든 평상이 하나 놓여 있다. 왜 놓여 있는가 하고 스님에게 물어보니 지금도 절에서 중요한 천도재를 그 병풍암 앞에서 지내면 특별한 효험이 있다고 귀띔한다.
다양한 신분의 추사 제자들
구한말 추사를 따르는 제자가 3000명이었다고 회자될 만큼 추사는 많은 제자를 거느리고 있었고, 이들 중 상당수는 돈과 실력을 갖춘 역관(譯官)과 의관(醫官)을 비롯한 중인층이었다.
그 대표적인 이가 역관이었던 이상적(李尙迪, 1804∼1865년)이다. 이상적은 추사가 제주도에 유배생활할 때 청나라를 출입하면서 구입한 귀중한 서적들을 스승에게 갖다드리려고 불원천리 제주도까지 갔던 인물이다. 추사의 유명한 ‘세한도(歲寒圖)’는 추사가 이상적의 정성과 의리에 보답하기 위하여 그려준 그림이다.
이상적의 제자도 역관이었던 오경석(吳慶錫, 1831∼1879년, 오세창이 그의 아들임)이고, 오경석 역시 청나라의 고증학을 연마한 바탕 위에 추사의 ‘금석과안록(金石過眼錄)’을 더욱 계승 발전시켜 ‘삼한금석록(三韓金石錄)’이라는 저술을 남겼다. 그런데 이 오경석은 독실한 불교신자였다. 묘비명에 의하면 그는 항상 불경을 읽었으며 ‘초조보리달마대사설(初祖菩提達磨大師說)’이라는 불교 저술을 남길 정도였다.
오경석의 불교사상은 다시 절친한 친구이자 개화파 지도자인 유대치(劉大致)에게 전해진다. 당시 백의정승(白衣政丞)이라 불리던 유대치 역시 중인계급인 한의사였으며 오경석과 교류하면서 개화사상의 지도자가 되었는데, 이때 불교도 같이 받아들였던 것으로 보인다.
유대치는 개화파의 주역인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에게 개화사상을 전해주면서 동시에 불교사상의 세례도 주었다. 그래서 김옥균을 비롯한 개화파들은 불교에서 말하는 ‘일체중생 실유불성(一切衆生 悉有佛性; 누구나 불성을 가지고 있다)’이라는 평등사상을 개화사상의 기반으로 하여 계급차별을 타파하려 했던 것이다.
이상을 종합해보면 김옥균의 개화파들에게까지 영향을 끼쳤던 불교사상의 진원지를 찾아 올라가면 추사에게 다다르고, 그 추사의 불교는 바로 이 화암사의 병풍암에서 그 기초가 형성되지 않았나 추측된다. 이런 맥락에서 화암사 대웅전 뒤에 우뚝 솟아 있는 병풍바위에 추사가 새겨놓은 ‘천축고선생택’과 ‘시경’이라는 암각(岩刻)은 사연이 있는 글씨임에 틀림없다.
결론적으로 추사고택은 조선조의 양반이 가장 선호하던 부드러운 산세에 자리잡은 저택이자, 문자향과 서권기가 은은하게 풍기는 무릉도원의 이상향이다. 아울러 그 무릉도원에 배치되어 있는 음양택 동거 구조를 관망하면서 과연 생은 무엇이고 사는 무엇인가를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