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IMF 위기의 씨앗은 바로 개발독재입니다. 박정희전대통령의 경제개발정책이 우리 국민을 빈곤에서 벗어나게 한 공은 있지만 정경유착이라는 역사의 형틀ㅇ을 만들어 결과적으로 우리 경제를 쓰러뜨린 책임도 있는 겁니다.”
찬양론자들은 박정희 시대의 경제성장 실적을 들이대며 개발독재론을 옹호하고 정당화해왔다. 한마디로 경제발전을 위해선 민주주의 유보가 불가피했다는 논리다. 정부의 박정희 기념관 건립 추진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이런 논리를 뒷받침하고 있다.
단기간 초고속성장의 신화를 낳은 개발독재. 그것은 과연 불가피한 것이었나. 역사의 저울추는 개발독재의 성과와 폐해 중 어느 쪽으로 기울고 있는가. 고려대 경영대학장과 경영대학원장을 겸하고 있는 이필상 교수(53)는 인터뷰에서 “가시적인 실적 위주의 박정희 개발독재야말로 시장 경제를 병들게 한 암세포였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IMF 금융위기의 뿌리였다”고 비판했다.
인터뷰는 11월13일 오전 고려대 경영대학장실에서 진행됐다. ‘재무관리’ ‘관리경제학’ ‘신국제금융’ ‘경제정책과 기업활동’ 등 다수의 경제 관련 책을 펴낸 이필상 교수는 그간 인터뷰나 신문 칼럼 등을 통해 한국 경제의 문제점을 날카롭게 지적해왔다. 그의 표정이 굳어 있어 혹시 인터뷰 주제가 그에게 부담스러운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이 기우라는 것을 깨닫는 데는 채 1분이 걸리지 않았다.
박정희 신화의 허구성
―최근 박정희 전대통령 흉상 철거사건이 있었습니다. 이는 그 동안 꾸준히 진행돼온 박정희 기념관 건립 반대운동과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데, 기념관 문제를 떠나 흉상철거행위 자체에 대해선 법질서를 들어 비난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듯싶습니다.
“그 자체는 불법이므로 잘못된 것이죠. 그런데 문제는 국민들 사이에 박정희 전대통령의 업적이 잘못 해석되고 신화가 돼버렸다는 데 있습니다. (흉상 철거행위는) 거기에 대한 반대의사 표시라고 생각합니다. 의사표시 방법은 잘못됐지만 그 뜻을 다함께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어요. 박 전대통령의 업적을 올바르게 인식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죠. 불법행위로 간주해 무조건 비판만 할 것이 아니라 그만큼 기념관 건립에 대한 반대여론이 강하다는 걸 인정해야 합니다.”
―박정희 기념관 논란은 박 전대통령의 공과에 대한 평가와 직결된 문제입니다. 김영삼 정부 말기인 1997년 초부터 박정희 신드롬 또는 박정희 부활현상이 일어났는데, 찬양론자들이 흔히 내세우는 것이 경제치적입니다. 먼저 박 전대통령의 경제업적을 살펴보지요.
“경제가 어렵다보니 사람들이 정신적 돌파구를 찾게 됐는데, 막연히 과거 박정희 시절의 고도성장을 동경하면서 그것을 신화로 삼는 일이 벌어진 겁니다. 일부 사람들에게는 박정희 경제신앙으로 굳어졌죠. 그 배경이 뭐냐. 첫째, 우리 민족은 6·25를 거치며 엄청난 가난에 시달렸습니다. 그런데 60년대 군사정권이 들어선 후 그 힘들던 보릿고개를 극복했습니다. 초가지붕 개량으로 상징되는 새마을운동, 그것이 후세에 길이 남을 박 전대통령의 업적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둘째, 신화창조의 계기는 경부고속도로 건설입니다. 당시 건설비용이 1년 국가예산보다 많았습니다. 일본이 주도한 아시아개발기금이 원조하는 자금을 바탕으로 착공한, 100명 이상의 사망자를 낸 대역사였습니다. 반대여론을 무릅쓰고 끝내 성사시켰는데 그것이 산업발전에 대동맥이 됐죠. 또한 우리도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안겨 줬습니다.
셋째로, 수출드라이브 정책을 쓰지 않았습니까. 그저 먹을 거나 제대로 먹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국민들에게 국토는 좁지만 경제영토는 전세계로 무한히 펼칠 수 있다는 적극적인 생각을 갖게 했습니다. 섬유라든가 합판 가발 등을 수출하면서 우리 경제의 잠재력을 일깨운 것이죠.
넷째로, 두드러진 업적은 중화학공업 발전입니다. 60년대 말부터 철강 자동차 조선 화학 등 네 분야에 대대적으로 투자했습니다. 과잉·중복투자로 국가 경제를 주름지게 했지만, 기간산업을 구축하고 우리 경제가 세계적 경제로 도약하는 데 발판이 된 것은 사실이죠.”
이교수는 박정희 개발독재의 긍정적인 측면을 부인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긍정성을 뛰어넘는 부정적 측면이 있다는 게 우리 경제의 비극이다.
―박정희 개발독재의 폐해라면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가장 큰 문제는 정경유착을 통한 불법지배체제 형성입니다. 정통성 없는 독재권력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벌어보겠다는 재벌과 불법공생관계를 형성한 것이죠. 권력은 재벌에 각종 인·허가상 특혜를 비롯해 금융·차관·세제 특혜를 주고 그 대가로 재벌로부터 정치자금을 받았습니다. 그 결과 권력과 재벌의 유착이라는 불법구조가 우리 사회를 지배하게 됐습니다. 그 정당성 없는 지배계층이 지금까지 사회·경제·정치를 좌지우지하고 있습니다. 정경유착 지배구조라는, 역사발전의 큰 걸림돌을 만든 거죠.
그 둘째 병폐는 빈부격차입니다. 무조건 고속성장을 해야 한다, 가난을 탈피해야 한다, 이런 생각에서 성장제일주의로 나갔거든요. 그것을 위해 정부가 경제를 통제했어요. 통화증발과 관치금융에 의해 인위적으로 돈을 풀어 특정기업에 지원하는 일이 다반사였죠. 그러다 보니 특혜를 받는 쪽은 자꾸 발전하고 부가 축적된 반면 일반 기업과 서민 계층은 인플레이션의 피해를 입으며 소득이 자꾸 떨어지고 빈부차이가 계속 벌어졌습니다.
빈부격차의 배경이 된 또 하나의 문제는 지하경제입니다. 정경유착 테두리에서 돈을 마구 뿌리고 고속성장에 치중하다 보니 부동산 값이 폭등했어요. 권력의 특혜를 받은 계층은 부동산투기로 엄청난 부를 축적했습니다. 부동산 값은 일반 물가보다 몇 배 상승하는 경향이 있어요. 공급이 제한돼 있고 우리나라 사람들이 땅을 좋아하기 때문이죠. 지배계층은 그걸 이권으로 삼았어요. 증권시장도 비슷한 성향을 띠고 있습니다. 부동산과 증권시장이 지하경제의 온상이 된 것은 고속성장의 큰 부작용이죠.
셋째 문제는 경제력 집중이에요. 재벌을 집중지원해 경제성장을 이룬다는 정책을 펴다보니 일반 중소기업이 빈사상태에 빠진 거죠. 대기업과 중소기업은 수직적 주종관계가 돼버렸습니다. 중소기업이라는 게 산업의 풀뿌리로 상품 개발과 기술력 향상을 통해 경쟁력의 저변이 되는 것인데, 우리나라 중소기업은 재벌기업의 하청기업으로 전락해 산업발전에 엄청난 불균형이 생겼죠. 각종 인·허가 특혜를 받은 대기업이 조금씩 대주는 걸로 연명하다보니 자생적 기술이나 상품을 가지고 국가경쟁력을 키울 수 있는 기반이 완전히 무너져버렸죠.
가장 큰 문제는 조립수출산업 위주로 산업이 발전된 데 있습니다. 흔히 가마우지 경제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가마우지라는 새는 훈련을 시키면 고기를 잡아오는데, 그것을 삼키지 못하게 목을 묶어 놓습니다. 고기를 뺏고 나서 풀어주면 다시 고기를 잡아와요. 잡아온 고기를 빼앗기고 날아가는 일을 되풀이하죠. 우리 경제가 그렇다는 거예요. 외국에서 부품과 기계를 사들여 조립해 만든 상품이 주종을 이루다보니 수출로 해외에서 돈을 벌어와 봐야 부품값 갚고 기계값이나 기술료 주고 나면 남는 게 별로 없죠. 진짜 이익인 부가가치는 뺏기고 조금씩 던져주는 먹이나 얻어먹고 사는 가마우지 경제를 만든 겁니다. 자생적 경쟁력의 기반이 처음부터 형성되지 않은 겁니다.
넷째 부작용은 지역격차입니다. 대개 동쪽에서 집권세력이 나오다 보니 영남 지역을 중심으로 산업이 발전했습니다. 그 결과 동서간 경제력 격차가 커지고 그것이 지역감정을 일으키는 요인이 됐어요. 지배계층은 그것을 또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경제의 동서분단선을 만든 겁니다. 그에 따른 사회갈등이 선거 때마다 극단의 형태로 표출되면서 극복하기 어려울 정도로 그 골이 깊어진 것입니다.”
지역감정의 뿌리
이교수는 지역간 불균형 경제발전이 오늘날 지역감정의 뿌리가 됐다고 단언했다. 그가 지적하는 박정희 개발독재의 폐해는 끝이 없을 듯싶다.
“지역격차의 또 다른 측면은 도시 농촌간 격차입니다. 재벌들에게는 한국은행을 독촉해 돈을 지원해주면서 농촌의 어려움을 덜어주는 지원엔 인색했습니다. 지배자들의 횡포였죠. 그렇지 않아도 산업화과정에는 농촌경제가 어려워지기 마련인데 인위적으로 육성하고 발전시키지는 못할지언정 거꾸로 황폐화를 가속시켰어요. 농촌 사람들이 안 되겠다 싶어 다 도시권으로 옮겨가면서 수도권을 비롯한 도시는 비대해지고 농촌은 황폐해지는, 기형적이고 비효율적인 국토발전이 이뤄졌습니다.
다섯째 폐해는 천민자본주의의 만연입니다. 고속성장을 독재정치의 수단으로 이용하면서 물질만능주의가 팽배해졌습니다. 성장제일주의가 사람들에게 사치와 허영을 부추긴 겁니다. 부동산 투기로 돈 벌어 흥청망청 쓰고 해외에 나가 낭비하고 사치품을 사들이고… 그런 게 소비미덕으로 여겨지고, 사람들이 그걸 부러워하는 사회가 돼버렸어요. 그 과정에 가난한 이웃과 나누며 살던 전통적 가치관과 따뜻한 가족관, 공동운명체 의식이 사라졌습니다. 저는 그것을 사회파괴라고 생각해요. 전통문화가 파괴되면서 민족의 정체성이 상실됐다고 봅니다.
여섯째로 관료주의 확대를 꼽을 수 있습니다. 독재권력을 장기간 유지하려다 보니 입법부 기능을 축소하고 사법부를 마비시켜야 했습니다. 반면 행정부는 굉장히 비대해졌죠. 사회를 지배하고 경제를 통제하고 기업들을 길들이기 위해 엄청난 규제가 양산됐습니다. 관료주의가 엄청난 힘을 갖고 경제를 지배하다 보니 정부와 유착하지 못한 기업은 아예 발전 대열에 진입도 못하게 됐죠. 말만 시장경제지, 사실은 관치경제였습니다.
일곱째로 빚경제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부로부터 금융특혜를 받은 기업들이 다들 자기 돈이 아닌 은행돈으로 사업을 벌이다 보니 부채비율이 엄청나게 높아졌죠. 특정 기업이 좀 어려워지면 그때마다 한국은행 돈 풀어 구제해줬습니다. 시장경제체제에서 좋은 기업이란 시장에서 자금을 지원받아 물건 판 돈으로 스스로 발전하는 기업입니다. 그렇지 못한 기업은 도태돼야 하는데, 거꾸로 됐죠. 금융특혜를 받은 부실기업에 자꾸 돈을 대주니 빚은 산더미처럼 불어나고, 부실이 확대 재생산됐습니다. 기업들을 빚 먹고 사는 공룡으로 만든 겁니다. 외국 차관도 끌어다 그런 기업에 대주고. 기업들이 시장에서 평가받고 스스로 자본을 축적해 투자하고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정부에서 돈 대줘 발전하는 기업이 경제의 중심이 되다 보니 산업구조가 매우 취약해졌어요. 위험도도 높아졌고.
여덟째. 부패공화국입니다. 경제가 부패공화국의 희생물이 된 거죠. 정경유착에 따라 재벌과 권력층이 경제를 독식하는 바람에 일반 국민경제가 희생됐습니다. 관료주의가 확대되고 규제가 양산되다 보니 뇌물이 판치는 비리구조가 위에서부터 형성됐고 그 영향이 민간부문에도 미쳤습니다. 박정희 개발독재가 그 씨앗을 뿌린 것으로 볼 수밖에 없죠.”
이교수에 따르면 박정희 개발독재의 패러다임은 지금까지 바뀌지 않고 있다. 그렇게 된 데는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등 역대 대통령들의 책임이 크다. 어쩌면 오늘 인터뷰에서 질문은 불필요한 것이 아닐까, 하는 기자의 ‘불안감’도 아랑곳없이 그는 마치 한칼에 끝장을 내기라도 하듯 설명을 계속한다.
“79년 박정희 전대통령이 서거한 후 들어선 전두환 체제는 오히려 독재권력을 강화했지요. 시장경제는 더 멀어지고. 특히 정권이 정통성을 갖지 못했기에 정경유착이 더 악화됐어요. 노태우 정권으로 넘어가면서 개발독재의 구조적 문제가 심해졌습니다. 두 사람이 쓰고 남은 돈, 들킨 돈만 각각 5000억원, 4000억원이었어요. 그렇게 따지면 독재정권의 집권자들이 재벌보다 더 큰 재벌이었던 셈입니다.
문민정부가 들어선 후 뭔가 고쳐질 것으로 다들 기대했지요. 그런데 가장 큰 걸림돌인 정치질서 체제가 바뀌지 않고 관료주의도 여전했습니다. 김영삼 대통령이 혼자 개혁하려 애썼는지는 모르지만 체질화된 관료주의와 구태에서 벗어나지 못한 정치권이 둘러싼 상태에서 도저히 뭘 할 수가 없었을 겁니다. 금융실명제라는 미증유의 개혁이 변질된 것도 그런 사정 때문입니다.
개혁을 하려면 끝까지 제대로 해야지 실패하거나 변질되면 경제에 오히려 더 부담을 줍니다. 그래서 문민정부가 경제를 망치고 말았는데, 그 배후엔 박정희 개발독재의 폐단이 있는 겁니다. 그런 점에선 국민의 정부도 크게 다를 바 없어요. 구태의연한 정치체제와 관료주의가 여전히 개혁에 걸림돌이 되고 있어요. 개혁의 성적표를 따진다면 크게 내세울 게 없죠.”
이교수의 개발독재 비판논리는 IMF 책임론으로 연결된다.
“IMF 위기의 씨앗은 바로 개발독재입니다. 박정희 전대통령의 경제개발 정책이 우리 국민을 빈곤에서 벗어나게 한 공은 있지만 정경유착이라는 역사의 형틀을 만들어 결과적으로 우리 경제를 쓰러뜨린 책임도 있는 겁니다. 안타까운 건 IMF라는 큰 국난을 극복하고 우리 경제의 틀을 바꿔야 하는 역사적 사명을 짊어진 국민의 정부가 제몫을 못 한다는 점입니다. 정경유착과 관료주의를 타파하는 근본적 개혁을 해야 하는데 그것 없이 재벌개혁을 한다고 나섰다가 저항에 부딪히자 기껏 구조조정이라는 명분으로 근로자나 정리하는 겁니다. 그렇게 보면 아직까지 박정희 개발독재의 패러다임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21세기 들어 우리 경제의 가장 큰 과제는 바로 이 잘못된 패러다임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상태에서 과거 고도성장의 향수에 빠져 박정희 기념관을 세우는 건 굉장한 모순이 아닐 수 없죠.”
독재와 지도력의 혼동
―박정희식 경제성장에 대해 학계에선 크게 세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첫째 절대 긍정론으로 박정희식 개발독재가 경제성장을 위해 바람직했고 지금도 그 패러다임이 유효하다는 겁니다. 둘째, 개발독재 자체는 비판적으로 보지만 산업화 초기단계에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보는 견해죠. 즉 한시적 긍정론입니다. 셋째 견해는 완전 부정론입니다. 개발독재는 불가피한 것이 아니라 독재를 정당화한 논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죠.
“독재는 어떤 이유에서든 합리화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고속성장했다, 빈곤에서 탈피했다, 그것을 당시 독재 덕분으로 돌리는 건 굉장히 잘못된 해석이고 위험한 일이죠. 그렇게 믿는 사람들은 독재와 지도력을 혼동해서 그래요. 독재가 아니고 국민의 지지를 받는 민주정부가 들어서서 시장경제체제를 발전시켰더라면 지금쯤 우리는 선진형 경제구조를 갖게 됐을 겁니다.”
―교수님은 그러면….
“셋째 견해에 해당하죠.”
―당시 상황을 돌이켜 보면 1960년에 4·19혁명이 일어나고 장면 정부가 들어섰지요. 그런데 민주주의를 내세운 장면 정부가 허약하고 무능해 군부가 일어났다는 것 아닙니까. 당시 장면 정부가 더 기회를 가졌다면 박정희 못지않은 경제성장을 이룰 수 있었을까요.
“이 점을 구분해야 합니다. 당시 장면이라는 사람, 장면 정부가 허약했지 민주주의가 허약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민주주의를 곧 장면 정부로 생각하면 곤란하다는 거죠. 장면 정부가 무능하고 지도력이 부족했다면 민주적 절차로 정권을 교체하면 될 일이었습니다. 그것을 빌미로 군사정권이 들어서고 독재를 정당화한 것은 잘못된 일이죠. 그때는 각 나라에서 경제발전이 시작되는 단계였어요. 어떤 정부가 들어섰더라도 경제발전에 역점을 두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제3세계, 특히 동남아국가들의 경제 발전 시기와 배경이 우리나라와 비슷하지 않습니까.
“그것도 그렇고, 특히 우리에게 굉장한 자극을 준 나라는 일본이에요. 일본이 전쟁에 패한 후 그 잿더미에서 불같이 일어나는 걸 봤거든요. 그걸 보고 우리가 어떻게 가만히 있겠어요. 당연히 우리도 해보자, 이렇게 나온 거죠. 그때 민주정부가 들어서서 합리적 경제발전 체제를 만들고 시장경제 개념을 발전시켰다면, 모르겠어요, 빈곤탈피속도는 좀 느렸을는지 모르지만 훨씬 의미 있는 경제발전을 할 수 있었다고 봅니다.”
―어쨌든 박정희식 경제발전은 한국민에게 강한 인상을 남긴 것 같습니다. 경제발전의 질보다 외형적인 수치나 가시적인 성과에 더 감동하는 것이죠. 예를 들어 당시 경제지표를 보면, 경제성장률만 해도 5·16 쿠데타가 일어난 다음해인 1962년부터 박 전대통령이 죽은 1979년까지 연평균 9.3%를 기록했습니다. 1인당 GNP도 1961년 82달러에서 1979년엔 1640달러로 커졌어요. 수출액도 4000만 달러에서 150억 달러로 엄청나게 늘었지요.
“맞아요. 그런 것에 대한 동경이죠. 그런데 지금과 그때 상황을 비교해 지금 어려우니 그때 그런 일이 또 있었으면 좋겠다, 그 사람이 또 나타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건 굉장히 잘못된 일이죠. 그때는 정말 아무것도 없던 황무지였어요. 사람들이 일을 하면 뭔가 이뤄지는 게 막 보였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경제발전이 시작되고 소득이 늘어나니 다들 놀랐죠. 그런데 지금은 경제구조가 달라요. 경제여건도 달라요. 지금 만약 박정희 방식을 적용한다면 경제, 마비됩니다. 현 경제구조에서 정부가 모든 걸 통제하고 특정기업을 지정해 특혜를 주고 정경유착을 강화한다면 경제가 쓰러지죠.”
―단기 고속성장이 갖는 단점은 무엇입니까?
“몸집이 아주 왜소한 사람이 별안간 쌀밥과 고기 먹고 몸집이 커졌다고 했을 때, 과연 몸집만 보고 그 사람이 성장했다고 볼 수 있는가. 그게 아니라는 거예요. 우리나라 경제는 초고속성장을 하며 몸집은 굉장히 커졌어요. 그런데 그 몸에 피를 돌게 하는 심장 구실을 하는 금융 부문이 관치경제에 희생되고 정경유착의 수단이 되면서 기능이 마비됐습니다. 심장에 병이 든 거예요. 심지어 플라스틱 인공심장을 달기도 했어요. 그럼 그 사람의 건강이 제대로 유지되겠어요? 계속 성장하며 힘을 발휘할 수 있겠어요? 고속성장의 가장 큰 문제는 우리 경제의 심장을 망가뜨렸다는 점, 나아가 문화 측면에서 볼 때 머리도 정신도 완전히 잃었다는 거예요. 별안간 큰다는 게 좋은 건 아니에요.”
―고도성장의 요인 중 하나로 박정희 전대통령의 리더십을 꼽는 사람이 많습니다. 경제발전에 대한 확실한 신념과 일관성 있는 전략, 그리고 지도자로서의 비전 등이지요.
“그런 것들이 상당히 긍정적으로 작용한 건 사실입니다. 고도성장에 견인차가 됐죠. 그건 인정하자는 거예요. 그런데 그걸 통치수단, 정권연장 수단으로 악용했고 그 결과 경제 전체가 병들었다는 점은 구분해 평가해야죠.”
박정희 전대통령의 경제발전에 대한 열정이나 신념은 누구도 흠잡을 수 없는 덕목인지 모른다. 그러나 문제는 경제철학이다. 이교수에 따르면 그는 시장경제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 그릇된 경제철학과 신념이 결합한데다 정치논리가 개입되면서 그 폐해가 더욱 커졌다는 것이다.
―바깥 세계의 평가도 무시할 순 없지요. 1993년 세계은행 보고서엔 한국이 일본과 더불어 동아시아 경제성장의 성공사례로 소개됐습니다. 박 전대통령의 수출지향 전략과 거시경제적 안정화 전략을 그 요인으로 꼽았더군요.
“결과만 놓고 보면 엄청나게 성장한 건 맞아요. 그러니 성공이냐 실패냐, 이렇게만 따질 때 바깥에선 당연히 성공으로 보죠. 그런데 그들이 우리 내부의 상황이나 경제발전의 내용, 예컨대 독재나 정경유착 부정부패 경제집중 등 개발독재의 폐해를 따지진 않는다는 겁니다. 내용을 따지면 실패죠.”시장경제 철학 없어
―아시아 경제성장의 성공 모델로 ‘네 마리 용’이라는 표현이 있지요. 이 나라들은 경제발전 배경이나 시기, 정치적 여건이 비슷하지 않았습니까. 그중 우리나라가 가장 잘 나가는 것처럼 보이다 지금은 가장 처졌다는 평을 듣는 것 같습니다. ‘네 마리 용’의 유사성이나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겉으로 보기엔 네 마리 용이지만 실은 세 마리 용과 한 마리 공룡입니다. 우리는 내부적으로 문제가 너무 많았어요. 몸집은 오히려 다른 세 마리보다 컸을 겁니다. 그런데 내면적인 모순 때문에 먼저 주저앉아버렸어요. 또 몸집이 크니까 그만큼 일어나기도 힘들고. 그 내면적인 병이 바로 박정희 개발독재의 폐해인 것입니다.”
―독재라는 공통점도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홍콩만 빼고요.
“독재라는 형식은 비슷해도 내용과 결과가 크게 다르죠. 대만은 중소기업 발전을 기반으로 한 경제구조가 탄탄했어요. 결정적 차이는 우리나라처럼 정치지도자가 재벌로부터 천문학적 규모의 정치자금을 받는, 재벌과 정권의 불법공생체제가 없었다는 것이죠. 좁은 국토에 자원도 없는 싱가포르는 일찍이 시장경제를 지향하면서 개방 정책을 추진했어요. 지금 싱가포르는 세계 속의 싱가포르입니다. 반면 폐쇄성이 강했던 우리 경제는 결국 억지로 개방하게 됐는데 경쟁력이 약해 맥없이 무너져버렸어요.”
암세포 도려냈어야
박 전대통령이 사망한 직후인 1980년 한국 경제의 각종 지표는 급격한 하강곡선을 그렸다. 20년 가까이 늘기만 하던 1인당 GNP가 처음으로 줄었고 실업률은 3.8%(1979년)에서 17.9%로 뛰어올랐다. 1979년 경제성장률은 6.8%였으나 1년 뒤엔 마이너스 3.9%를 기록했다. 물가도 50% 가량 올랐다. 직접적인 원인은 석유파동이었다. 그러나 박정희 비판론자들은 이를 개발독재의 후유증에 따른 구조적 위기로 본다.
―1980년의 경제지표는 각 부문에서 곤두박질쳤습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겁니까?
“80년대 초반 공장 가동률이 50%대로 떨어졌어요. 박정희 경제의 한계가 폭발한 것이죠. 그때 얼마나 큰 고통을 겪었습니까. 당시 5공 정권의 김재익 경제수석이 경제안정 정책을 펴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지요. 그것이 다시 힘을 축적하는 계기가 됐는데, 80년대 후반 노태우 정부 때 비록 엔화 가치의 절상 덕을 톡톡히 본 것이긴 하지만, 무역수지에서 엄청난 흑자를 기록하는 힘이 됐죠.”
이교수는 경제 정책에 관한 한 김영삼 전대통령보다 전두환 전대통령을 높게 평가했다.
“전두환 전대통령의 유일한 장점이라면 자기가 모르면 전문가한테 다 맡긴다는 것이죠. 경제분야는 김재익 수석에게 일임했는데 당시 물가를 3%로 잡았어요. 김영삼 전대통령도 경제를 모르니 맡기긴 했는데 사람을 잘못 썼지요. 정부 주변에서 관치금융 논리나 제공하고 영화를 누려온 사람한테 단지 부산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맡겼거든요. 김영삼 정부 초기 ‘신경제 5개년계획’이라는 걸 추진했는데, 5년 동안 한 일이라곤 한국은행에서 돈 푼 것과 외채 끌어온 것밖에 없어요. 처음 ‘신경제 100일계획’을 추진할 때만 6조8000억 원을 풀었어요. 외채는 400억 달러에서 1500억 달러로 늘었습니다. 박정희 개발독재 패러다임의 문제점을 가장 극대화한 사람이 김영삼 전대통령입니다. 구시대 패러다임을 고스란히 답습했습니다. 구조조정은 안 하고.”
―IMF의 뿌리가 박정희 개발독재라고 말씀하셨는데, 일부 경제학자들은 김영삼 정권도 억울한 점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말하자면 덤터기를 썼다는 것이죠.
“IMF 위기를 초래한 데 대해선 책임을 져야죠, 문민정부가.”
―뿌리는 박정희 개발독재에 있지만….
“뿌리는 그렇지만 그 뿌리를 잘랐어야죠, 명색이 문민정부인데. 새로 시작했어야죠. 그런데 오히려 문제를 확대시켰습니다. 암세포를 더 키운 거죠. 돈 풀어가면서, 외채 끌어들이면서.”
화제는 다시 박정희 개발독재의 문제점으로 돌아갔다.
―수출 드라이브 정책과 중화학공업의 과잉·중복투자가 지닌 문제점을 지적하셨는데, 그 두 가지는 박정희식 경제발전의 핵심요소 아니었습니까?
“수출 드라이브 정책 자체는 좋은 거죠. 문제는 실적 위주의 드라이브였다는 겁니다. 그래서 양만 강조하고 질적인 측면은 외면했어요. 기술개발보다는 값싼 노동력을 이용한 수출상품들, 예를 들어 옷이나 가발 등을 수출하는 데 주력한 겁니다.
중화학공업 투자의 경우, 아무리 좋은 투자라도 그 나라 경제가 감내할 수 있는 수준이어야 합니다. 마치 아무리 좋은 보약이라도 그 사람의 소화능력에 맞아야지, 좋다고 무조건 먹으면 설사 나는 이치와 같은 거죠. 중화학공업에 과감히 투자한 건 좋은데 과잉·중복투자를 하는 바람에 우리 힘에 부치게 됐습니다. 그래서 후유증이 컸죠. 70년대 중반부터 엄청나게 투자했는데, 1·2차 석유파동의 충격이 가해지자 가뜩이나 부담이 큰 상태에서 견디지 못하게 된 겁니다. 80년대 초반의 산업공황은 그래서 생긴 겁니다.”
박정희와 김대중의 공통점
―재벌정책은 어떤가요. 일부 경제학자는 박 전대통령이 경제발전을 위해 재벌을 적절히 이용했다고 평가하더군요. 고속성장과 대형사업을 벌이는 데 재벌의 힘이 필요했다는 것이죠.
“재벌은 우리 경제를 발전시킨 반면 주름지게 한 양면성을 갖고 있습니다. 문제는 정권이 재벌과 결탁했다는 것이죠. 재벌 불가피론엔 찬성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중소기업이 잘 발달한 대만의 경제발전은 어떻게 설명할 겁니까. 우리나라의 경우 잘못된 재벌 정책의 폐해가 너무 큽니다. 재벌에 돈이 집중되고 각종 특혜가 몰리는 바람에 너무나 많은 중소기업이 죽어버렸습니다. 그 결과 산업이 균형 있게 발전하지 못했죠.”
이교수는 인터뷰 말미에 박 전대통령의 경제발전에 대한 열정과 신념을 다시 한번 높게 평가했다. 반면 그것이 경제논리로 발전하지 못하고 정치논리에 오염된 것을 강하게 비판했다. 그리고 김대중 대통령이 박정희 기념관 건립을 지원하는 데 대해선 “박정희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끝으로 박 전대통령과 김대중 대통령이 경제정책 면에서 어떤 공통점과 차이점을 갖고 있는지 물어봤다.
“박 전대통령은 민족주의 의식이 강했습니다. 우리가 한번 일어나서 해보자, 하면 된다, 이런 정신을 갖고 있었지요. 반면 김대중 정권은 외국자본에 대한 의존도가 너무 커요. 그런 점에서 대비가 되죠. 공통점이라면 역시 정치논리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다는 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