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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취재 25일|미국大選, 그 각본없는 드라마

무너진 아메리카의 자존심

  • 이형삼 han@donga.com

무너진 아메리카의 자존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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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8일은 두 후보 지지자 모두의 손에 땀을 쥐게 한 하루였다. 재검표 결과는 공식 발표되지 않았지만, AP통신은 플로리다주 67개 카운티의 재검표 비공식 집계를 시시각각 전했다. 두 후보의 표차는 계속 좁혀졌다.

그런데 이 날 오후 팜비치 카운티 투표소에서 투표용지 시비가 일면서 하루 이틀이면 다시 윤곽을 드러낼 것으로 예상됐던 투표결과가 오리무중으로 빠져들었다. 전날 ‘부시 당선자 기념주화’를 팔던 홈쇼핑 채널에선 발 빠르게 고어의 기념주화를 부시의 기념주화와 한 세트로 묶어 ‘대선 박빙 기념주화(Presidential Election Too Close To Call Coins)’라는 이름으로 팔고 있었다.

‘나비’(butterfly ballot)라는 별명이 붙은 이 투표용지는 나비가 양 날개를 편 듯한 형태의 펀치카드인데, 왼쪽에는 위로부터 부시, 고어, 네이더 후보 등의 이름이 기재돼 있고, 오른쪽에는 뷰캐넌, 맥레이널즈 후보 등의 순으로 이름이 기재돼 있었다. 가운데는 지지후보를 표시할 기표 구멍이 세로로 나 있었다. 문제는 기표 구멍이 왼쪽 후보와 오른쪽 후보에게 번갈아 하나씩 배정돼 있었다는 점.

이 때문에 왼쪽 날개의 위에서 두 번째에 이름이 명기된 고어후보의 기표구멍은 부시, 뷰캐넌에 이어 위에서 세 번째에 표시돼 있어 유권자들의 착각을 초래했다. 고어를 지지한 일부 유권자들이 위에서 두 번째 기표 구멍에 펀칭을 하는 바람에 개혁당의 뷰캐넌 후보에게 표를 준 것이다. 덕분에 플로리다의 다른 카운티에선 수십∼수백 표를 얻는 데 그쳤던 뷰캐넌이 팜비치 카운티에선 3407표를 얻는 진기록을 세웠다.

가령 팜비치 카운티의 덜레이비치 선거구 주민들은 대부분 뉴욕과 뉴저지에서 이주해온 유태계 민주당 지지자들이다. 그런데 반유태주의자로 알려진 뷰캐넌이 이 선거구에서 47표를 얻었다. 덜레이비치 주민 로버트 로즌씨는 “나를 포함한 20명 이상의 주민이 기표구멍을 잘못 펀칭해 고어 대신 뷰캐넌에게 표를 준 것으로 확인됐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일부 주민은 뷰캐넌에게 기표한 투표용지를 투표함에 넣기 전에 자신이 잘못 기표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새 투표용지를 받아 다시 기표했지만, 상당수 주민들은 잘못 기표했다는 것을 알고서도 “당황해서”, 혹은 “창피해서” 이렇다 할 조치를 취하지 못하고 투표장을 나섰다고 한다. 팜비치 카운티의 한 관리는 “이곳에선 아라파트(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가 대통령후보로 나왔어도 뷰캐넌보다는 표를 많이 받았을 것”이라며 이 지역의 반뷰캐넌 정서를 귀띔했다.



엉성한 투표관리

팜비치에서 중소기업을 경영하는 메리 비탠코트씨는 “많은 유권자들이 처음엔 뷰캐넌을 찍었다가 실수를 깨닫고 다시 고어를 찍는 바람에 투표용지에 두 개의 구멍이 뚫려 무효표로 처리됐다”며 “투표를 마치고 나오니 몇몇 주민이 ‘고어 대신 뷰캐넌을 찍었다’며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고 말했다.

웨스트팜비치에 사는 한 주부는 9일 저녁 CNN의 방담 프로그램에 출연, 투표 전 선관위에서 자신에게 발송한 투표안내서를 내보이며 “투표안내서와 실제 투표용지의 후보 이름과 기표구멍 위치가 완전히 다르다”며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재투표뿐”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플로리다주 카운티들은 대부분 펀치카드 방식과 광학스캐너 방식 투표방법 가운데 하나를 채택하고 있다. 67개 카운티 중 펀치카드 방식을 채택한 카운티는 27개. 유권자가 컴퓨터용 사인펜으로 투표용지의 공란을 메우고 이를 개표소의 스캐너가 읽도록 한 광학스캐너 방식에 비하면 펀치카드 방식은 시대에 뒤떨어진다는 지적이 많았다.

‘마이애미 해럴드’의 안드레스 비글루치 기자는 “플로리다주 카운티들은 지금껏 선거 때마다 수백, 수천 장의 투표용지를 무효처리해왔다. 두 명의 후보에게 동시에 기표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번 대선도 예외가 아니다. 펀치카드 방식을 채택한 팜비치에서 전체 투표수의 4%에 달하는 1만9000여 표의 무효표가 나왔다는 것은 그냥 지나칠 일이 아니다”고 우려했다. 더욱이 노인 인구가 많고 이민자가 급증하고 있는 플로리다주의 특성상 이 투표방식은 선거 때마다 비슷한 혼란을 초래하게 마련이라는 것.

투표관리 면에서도 허술한 부문이 눈에 띄었다. 투표소는 대개 빈 사무실이나 차고 같은 허름한 공간에 엉성하게 마련됐고, 투표인명부와 투표용지를 관리하는 사람도 선관위에서 일용직으로 고용한 듯한 노인이나 동네 주부 2∼3명이 전부였다. 투표용지를 들고 이리저리 돌아다녀도 누구 하나 제지하지 않았다. 누군가 “기표를 잘못했다”며 새 투표용지를 덥석 집어가도 투표관리자들은 개의치 않는 표정이었다.

국무부 프로그램에 함께 참가한 동료들과 함께 투표 당일 샌프란시스코의 몇몇 투표소를 둘러봤다. 워낙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투표가 치러지고 있기에 투표관리를 맡고 있던 주부에게 “투표가 끝나면 투표함은 어떻게 개표소로 수송하느냐”고 묻자 그녀는 “우리 남편이 저녁 때 쇼핑센터에 갈 텐데, 거기에서 개표소가 가까우니 가는 길에 내려놓으라고 했다”고 대답해 우리 일행을 아연실색케 했다.

샌프란시스코 시청에 마련된 상황실에는 투표소를 찾은 유권자들의 항의전화 내용이 대형 모니터에 줄지어 띄워졌는데, ‘○○투표소-투표관리자가 없음’ ‘△△투표소-투표용지가 바닥났음’ ‘××투표소-전등이 켜지지 않음’…같은 한심한 내용이 태반이었다.

이런 사정이라면 누군가 나쁜 마음을 먹고 작정하면 얼마든지 빈틈을 노릴 수 있을 듯했다. 의도적이지 않은 ‘실수’의 가능성은 더욱 다분해 보였다. 투표 다음날인 8일 오후 플로리다주 볼루시아 카운티 투표관리자의 자동차 뒷좌석에서 800여 장의 투표용지가 뒤늦게 발견된 것이 그 예다.

기자와 함께 투표소를 둘러본 이탈리아 국회의원 다리오 파바넬로씨는 이렇게 소감을 털어놨다.

“이탈리아의 투표소에선 자동소총으로 무장한 군인과 경찰이 경계를 선다. 유권자는 신분확인을 거쳐 투표소에 들어간 뒤 지정된 자리에 앉아 기다리다 선관위 관리가 호명하면 투표용지를 받아들고 기표소로 간다. 그 전에 투표용지에 손을 댔다간 난리가 난다. 기표를 마치면 투표함이 보관된 또다른 방에 들어가 투표용지를 넣고 나온다. 이 방도 출입이 엄격하게 제한된다. 투표를 마치고 자리로 돌아오면 관리가 ‘아무개씨께서 투표를 끝냈습니다’고 선언한다. 유권자는 그제야 투표소를 벗어나 자기 의지대로 행동할 수 있다. 투표가 끝나면 투표함은 경찰의 삼엄한 경계 속에 개표소로 호송된다.

그렇듯 성역과도 같은 이탈리아 투표소에 비하면 미국의 투표소 분위기는 가위 충격적이다. 아니, 쇼핑센터 가는 길에 투표함을 내려놓는다니? 그 안에 적어도 몇천표가 들어 있을 텐데 사고라도 나면 어떻게 한단 말인가. 지금 부시와 고어가 겨우 몇백표를 놓고 싸우고들 있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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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삼 h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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