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12월호

“화해하려면 DJ 혼자 하라”

박정희 기념관을 반대하는 사람들

  • 조성식mairso2@donga.com

    입력2006-07-24 11: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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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정희 기념관’ 반대운동의 불길이 뜨겁다. 지난 9월 시민단체들을 비롯한 학계 언론계 노동계 문화계 등 각계 247개 단체의 ‘박정희 기념관 반대 국민연대’ 결성으로 기세를 떨친 이 운동은 최근 서울 문래동의 문래공원에서 벌어진 박정희 전대통령(이하 박정희) 흉상 철거 사건으로 새 국면을 맞고 있다. 국민연대는 이 사건을 계기로 기념관 반대운동을 범국민 차원으로 확산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11월8일 오후 문래공원은 적막감과 평화로움에 휩싸여 있었다. 평일이라 그런지 사람이 많지 않았다. 겨울이 성큼 다가왔음을 알리는 칼바람이 공원 여기저기에 누워 휴식을 취하고 있는 낙엽들을 들들 볶고 있었다. 놀이터에선 몇몇 아이들이 한가롭게 미끄럼을 즐기고 있었다. 기자는 오랜 세월 인간들의 삶을 지켜봐왔을 성싶은 아름드리 고목들의 연륜에 위압감을 느끼며 문제의 박정희 기념탑이 자리잡은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문래공원의 박정희

    문래공원은 약 7000평. 공원관리사무소 직원에 따르면 하루 평균 700∼800명의 시민들이 찾는다. 자연학습장과 놀이터 동물원 등이 주요 시설물이다. 공원 정문 쪽에서 박정희 기념탑 쪽으로 가다보면 금계와 인도공작, 일본원숭이 등이 놀고 있는 동물원이 눈에 띈다. 그 앞에서 직원 한 사람이 부지런히 낙엽을 쓸어모으고 있었다. 무심코 지나치려던 기자는 그의 왼손 손가락 두 개에 감긴 붕대를 발견하고는 걸음을 멈췄다. 언론에 보도된 윤아무개씨(52), 바로 그였다.

    보도에 따르면 윤씨는 3일 전인 11월5일 낮 민족문제연구소를 비롯한 5개 기관·단체 회원 30여명이 이 공원에 세워져 있던 박정희 흉상을 철거할 때 이를 저지하다가 전치2주의 손가락 부상을 입었다. 기자가 “얼마나 다쳤냐”며 아는 체를 하자 그는 겸연쩍게 웃으며 “조금 다쳤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더 말을 붙일 틈을 주지 않고 잰걸음으로 동물원 뒤쪽으로 사라졌다. 나중에 따로 공원관리사무소 직원에게 물어보니 “손가락이 부러진 건 아니고 살점이 조금 떨어져 나간 정도”라고 한다. 이 사건으로 구속된 민족문제연구소 운영위원장 김용삼씨(50)에게 적용된 폭행 혐의는 바로 이 손가락 상처와 관련된 것이다.



    동물원을 지나 20발짝쯤 걸으면 박정희 기념탑과 마주친다. 공원의 거의 동쪽 끝이다. 몸통인 흉상이 떼어진 기념탑은 흉물스럽기 짝이 없다. 높이는 2m쯤 될까. 윗부분에 흉상과의 연결고리인 듯싶은 철근 2개가 삐죽 솟아 있다. 탑 앞면엔 ‘5·16 혁명발상지’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이 탑이 이곳에 세워진 배경은 이렇다. 5·16 당시 이곳엔 서울을 관할하는 육군 제6관구사령부가 자리잡고 있었다. 1958년 별 두 개를 단 박정희는 이듬해 6개월 동안 6관구사령관직을 맡았다. 그런 인연으로 6관구사령부는 5·16 당시 쿠데타군의 지휘부 구실을 했다. 기념탑이 세워진 것은 1966년. 6관구사령부의 요청으로 홍익대 조소과 최기원 교수(65)가 제작했다. 이번 흉상 철거 사건에 홍익대민주동문회가 관련된 데는 이런 사정이 있는 것이다.

    기념탑 뒷면엔 문인 박종화(1981년 사망)가 쓴 것으로 알려진 글이 새겨져 있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아니 흔들리나니 차마 부정 불의 무능의 천지를 볼 수 없었다. 나라를 구하라는 일편단심 침착 용단 과감 결연히 이곳에 칼을 뽑아 창공을 향하여 성화를 높이 들다. 1966.7.7‘



    DJ의 선거공약

    한국 현대사의 영원한 숙제인 박정희. 그는 과연 한국민에게 어떤 존재인가.

    1961년 5월16일 육군 소장 박정희(당시 44세)는 일단의 군대를 끌고 한강을 넘었다. 쿠데타에 성공한 그는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대통령 권한대행을 거쳐 1963년 제5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해 당선됐다. 그로부터 16년 동안 한국사회는 ‘영원한 대통령’ 박정희에 의해 포박됐다. 3선개헌, 유신헌법 제정 등의 부당한 방법으로 통치기간을 연장한 그는 1979년 10월26일 심복인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쏜 총탄을 맞고서야 절대권력의 사슬에서 풀려났다.

    절대권력의 혼란기를 틈타 집권한 전두환 정권은 헌법 전문에서 ‘5·16혁명의 정신을 계승한다’는 문구를 삭제함으로써 박정희와 다름을 애써 강조했다. 이후 상당수 한국인들은 엄청난 가치관의 혼란을 겪어야 했다. ‘구국의 결단’이라던 5·16은 노태우·김영삼 정부를 거치면서 혁명이 아닌 불법 쿠데타로 굳어졌고, ‘민족중흥의 지도자’는 독재자로 전락했다.

    김대중 대통령의 입에서 박정희 기념관 얘기가 처음 나온 것은 1997년 대선 유세 때였다. 당시 김대중 후보는 경북 구미를 방문, 박정희의 생가를 둘러본 후 그 지역 유권자들에게 박정희 기념사업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현 정부의 박정희 기념관 건립사업 추진은 이처럼 김대통령의 ‘대선 공약’에서 비롯된 것이다.

    지난해 5월13일 대구를 방문한 김대통령은 이의근 경북지사로부터 업무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박정희 기념관 건립을 적극 지원할 의지를 밝힘으로써 이 문제를 공론화했다. 박정희 기념관 반대운동은 곧이어 5월19일 김대통령이 기념관건립추진위원회 결성을 지시한 직후 싹트기 시작했다. 5월20일 한국역사연구회·역사학연구소·역사문제연구소 등은 성명을 내고 “민주주의 인권 분배정의 등의 가치를 부정한 박정희식 근대화를 기념하는 것은 결국 이 사회의 민주주의적 가치와 역사의식에 왜곡과 혼란을 초래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같은 날 대구참여연대와 전교조(전국교직원노동조합) 대구지부 등 대구 지역 시민단체들도 반대성명을 냈다. 또 4·19혁명 관련 4개 단체는 “김대통령은 독재자와 화해하기 앞서 민주화투쟁을 하다 의문에 싸여 죽었거나 감옥 갔던 사람들에 대한 진상 규명과 명예회복부터 먼저 해야 한다”며 지원계획 철회를 요구했다.

    그해 7월26일 ‘박정희 대통령 기념사업회’가 창립총회를 갖고 정식으로 출범했다. 신현확 전국무총리가 회장을, 김대통령이 명예회장을 맡았다. 아울러 국민회의 권노갑 고문(현 민주당 최고위원)과 자민련 김용환 의원(현 한국신당 대표) 및 한나라당 박근혜 의원(현 한나라당 부총재)이 부회장으로 추대됐다. 정부는 박정희 기념관 건립비(100억원)와 기념사업회 운영비(5억원) 등 모두 105억원을 2000년 예산에 책정했다.

    10·26 20주기를 하루 앞둔 지난해 10월25일 서울에선 두 가지 상반된 모임이 눈길을 끌었다. 광화문 세종문화회관에선 옛 공화당 출신들이 주축이 된 박정희 어록집(‘우리도 할 수 있다’)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반면 정동의 세실 레스토랑에선 전국역사학자모임의 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 등 역사학자 10여명이 기자회견을 갖고 박정희 기념관 건립 반대의사를 표명하는 한편 국고지원 중단을 촉구했다.

    역사학자들은 성명을 통해 “현재 한국사회가 겪고 있는 사회 모순의 대부분이 박정희 시대에 이뤄졌으며, 경제성장을 내세우며 그가 자행했던 인권탄압은 세계사적으로 유례가 없는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전국역사학자모임은 전국의 대학교수, 강사 및 연구원, 대학원생, 중·고교 교사 등 역사 연구자 1100명으로부터 서명을 받았다. 11월25일엔 71개 단체가 연합한 ‘박정희 기념관 국고지원을 반대하는 시민·사회단체 연석회의’가 출범했다.

    그러나 정부 방침은 바뀌지 않았다. 국회는 정부가 제출한 박정희 기념관 예산안을 통과시켰다. 해가 바뀐 후 한동안 잠잠하던 박정희 기념관 논란이 다시 불거진 것은 7월20일 이후. 전날 정부가 2002년 월드컵이 열리는 서울 상암동에 5000∼7000평의 박정희 기념관을 짓기로 확정한 것이 촉발제가 됐다.

    동아일보와 한겨레신문이 박정희 기념관 건립의 국고지원을 강하게 비판하고 나선 가운데 한국기독교회협의회(KNCC) 인권위원회 성명(7.21), 기념관 건립을 반대하는 대구·경북지역 40개 시민단체의 국회 및 청와대 앞 항의시위(7.31), 민교협(민주화를 위한 교수협의회)·학단협(학술단체협의회) 소속 교수들의 기자회견 및 서명운동(8.3) 등이 이어졌다.

    이런 움직임은 마침내 9월28일 ‘박정희 기념관 반대 국민연대’(이하 국민연대)를 탄생시키기에 이르렀다. 국민연대엔 경실련 참여연대 환경연합 녹색연합 등 이른바 빅4 시민단체를 비롯해 민변(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민예총(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전교조, 민족문학작가회의, 4월혁명회, 민족문제연구소, 민주노총, 민언련(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 전국역사학자모임 등 모두 247개의 사회·시민단체가 참여했다.

    국민연대는 정관 제정과 함께 고문단 공동대표단 상임집행위원장단 등을 구성, 모양새를 갖췄다. 국민연대는 이날 결성선언문을 통해 “박정희 기념관 건립 추진은 민족사를 유린하는 범죄행위”라고 규정하는 한편 김대중 대통령에게 박정희 기념관 건립추진위원회 명예회장직을 사퇴하라고 촉구했다.

    10월17일엔 전국 대학교수 649명이 10월유신 선포 28돌을 맞아 박정희 기념관 반대성명을 발표했다. 한편 국민연대는 박정희 사망 21주기인 10월26일 오전 덕수궁 앞에서 회원 5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기념관 건립에 반대하는 항의집회를 열었다.

    11월5일 민족문제연구소를 비롯한 4개 단체 회원들이 서울 문래동에 있는 박정희 기념탑에서 흉상을 끌어내린 것은 박정희 기념관 반대운동의 첫 ‘실력행사’였다. 민족문제연구소는 1991년 반민족문제연구소라는 간판으로 활동을 시작했다가 1995년 지금의 이름으로 바꾸었는데, 그간 주로 친일파들의 행적을 고발하는 책을 펴내는 한편 그와 관련된 각종 시위와 집회를 주도해왔다.

    11월9일 서울 청량리동에 있는 민족문제연구소는 몹시 분주해 보였다. 전화벨이 쉴 새 없이 울려대는 가운데 직원들은 관련단체들의 지지성명을 챙기는 한편 이번 사건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느라 정신이 없는 듯싶었다. 기자와 마주 앉은 서우영 기획실장(36)은 박정희 기념관 국고 지원에 대해 “김대중 정부의 천박한 역사의식을 단적으로 드러낸 것” “영남권 지지표를 얻으려는 단세포적 정략”이라고 비난했다.

    이날 밤 10시께 방학진 조직부장(29)과 홍익대민주동문회 사무국장 이중기씨(35)가 경찰에서 풀려났다. 철거현장에서 성명서를 낭독했던 곽태영 4월혁명회 대표(64·국민연대 상임공동대표)는 하루 전인 8일 귀가조치됐다. 이제 경찰서에 남은 사람은 김용삼 운영위원장뿐이다.

    다음날 오전 방학진씨와 통화했다. 방씨는 “문래동의 흉상은 박정희 전대통령에 대한 기념비가 아닌, 쿠데타 찬양 기념비이므로 그것을 철거하는 것에 국민이 공감하리라 생각했다. 정통성을 갖춘 정부라면 당연히 철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노숙자와 실직자들이 박정희 흉상 앞에 술을 올리는 것을 본 적 있다”며 “이런 퇴행현상이 나타나는 것을 정부가 막지는 못할지언정 오히려 기념관 건립을 추진함으로써 국민의 가치관을 혼란케 하고 있다”고 정부를 비난했다.





    국가테러리즘의 시대

    박정희 기념관 건립에 대한 논란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박정희에 대한 평가, 곧 박정희의 공과에 대한 시시비비다. 반대론자들은 대체로 박정희는 기념관을 세워 기릴 만한 업적이 없으며, 오히려 역사적 과오가 크다고 주장한다. 논쟁의 또다른 초점은 국고 지원의 타당성 여부. 기념관 자체를 반대하기보다는 국민의 세금으로, 곧 정부 지원으로 기념관을 세우는 데 반대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박정희 찬양론자 또는 추종자들이 사비를 들여 박정희의 고향에 기념관을 세우는 것은 반대하지 않는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박정희의 과오 중 가장 보편적으로 거론되는 것은 민주주의 억압과 인권 탄압이다. 박정희가 집권한 기간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시절 2년을 포함하면 총 18년에 이른다. 1963년 군복을 벗고 5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당선된 박정희는 1979년 사망 당시 9대 대통령이었다. 장기집권의 포석이 된 것은 1969년의 3선개헌이다. 당시 여당인 공화당 내에서도 반대가 많았던 이 불법개헌을 성사시킨 1등 공신은 공작정치의 산실로 불리던 중앙정보부였다. 그러나 이는 독재의 서곡에 지나지 않았다. 1972년 박정희는 유신헌법을 제정, 영구집권의 길을 닦았다. 이른바 총통시대의 출현이었다.

    박정희 절대권력을 뒷받침한 것은 공포정치와 공작정치였다. 국가테러리즘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민주주의와 인권을 부르짖는 수많은 정치인 종교인 법조인 언론인 교수 학생 문인 노동자들이 고문을 당하거나 옥에 갇히거나 의문사했다. 정적에 대한 무자비한 보복과 탄압도 빼놓을 수 없다. 박정희를 비판하는 야당 의원들이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문과 구타를 당하는 것은 그다지 놀랄 일이 아니었다.

    1971년 7대 대통령선거에서 95만 표 차이로 선전해 박정희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김대중 신민당 의원은 일본 동경에서 괴한들에 납치 당해 죽을 뻔하다가 살아났다. 중앙정보부의 공작이었다. 1979년엔 야당 총재인 김영삼 의원이 국회에서 제명되는 사태까지 빚어졌다. 미국 언론과 인터뷰하며 박정희 체제를 비판한 것을 문제삼아서였다. 이 일은 부산·마산 시민들의 대규모 시위를 촉발했다.

    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만약 박정희가 김재규 손에 죽지 않았더라면’이라는 역사적 가정이다. 김재규의 법정진술에 따르면 박정희는 죽기 8일 전인 1979년 10월18일 “부마사태가 전국적인 민중봉기로 확산될 조짐이 있다”는 김재규의 보고를 받고 이런 얘기를 했다고 한다. “서울에서 4·19와 같은 데모가 일어난다면 내가 발포명령을 내리겠다.”

    김재규는 이때 박정희의 심복인 차지철 경호실장이 “캄보디아에서 300만 명이나 희생시켰는데 우리가 100만이나 200만 명 정도 희생시키는 것쯤이야 뭐 문제냐”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소름이 끼쳤다고 진술했다. 이를 근거로 학계 일부에선 “만약 박정희가 김재규 손에 죽지 않았다면 부산이나 마산에서 1980년 5월의 광주학살처럼 대규모 학살극이 벌어졌을지 모른다”는 주장마저 제기하고 있다.



    계엄령, 위수령, 긴급조치

    18년 동안 집권하면서 박정희는 계엄령을 세 차례(31개월) 발동했다. 군대가 주요 시설물을 점거해 경비하는 위수령과 각종 비상조치를 포함하면 총 105개월 동안 ‘비정상적’ 통치를 했다(한국정치연구회, ‘박정희를 넘어서’, 도서출판 푸른숲, 1998). 이는 그의 통치기간인 220개월의 약 절반에 달하는 기간이다. 1974년 1호로 시작해 1979년 9호까지 이어진 긴급조치는 체제비판을 원천봉쇄하는 초헌법적인 명령이었다.

    긴급조치 위반자는 영장도 없이 체포돼 비상군법회의에서 처벌받았다. 한성대 사학과 윤성로 교수의 ‘박정희 정권의 인권 탄압과 그 부정적 유산’이라는 논문에 따르면 1970∼1979년까지 10년 동안 국가보안법 반공법 노동법 긴급조치 등을 위반한 죄로 구속된 양심수는 총 2704명(그중 1184명은 구류)에 이른다.

    한국의 파시스트 논리를 비판한 책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의 저자로 유명한 진중권씨(36)는 박정희를 파시스트로 규정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진씨는 지난 11월7일 민언련 강당에서 열린 ‘박정희와 조선일보’라는 주제의 강연에서 “유신 이후 한국 정치는 파시스트 체제였으며 이는 히틀러가 비상대권을 휘두른 독일의 나치즘, 반미·반공주의를 내세운 일본의 신우익과 맥락이 닿아 있다”고 주장했다.

    박정희 기념관 반대론자들은 박정희의 최대 업적으로 평가되는 경제발전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다. 한마디로 개발독재의 폐해다. 개발독재가 낳은 경제성장보다는 그 폐해가 한국 경제에 끼친 악영향에 더 주목하는 것이다. 정경유착, 관치금융, 경제력의 지역격차, 소득분배 불균형 등을 대표적 후유증으로 본다. 또한 가시적인 성과와 실적 위주의 성장제일주의에 따른 구조적 모순이 한국 경제의 기반을 취약하게 만들었다고 비판한다.

    박정희의 과오를 논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그의 친일행적에 대한 시비다. 지난 11월9일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 조문기씨(76)를 비롯한 독립운동가 22인이 박정희 기념관 건립 중단을 촉구하며 발표한 성명엔 이에 대한 분노가 담겨 있다.

    “우리 독립운동가들이 젊은 시절 일제에 맞서 싸울 때 박정희는 만주에서 독립군을 때려잡는 데 앞장선 일본제국주의의 선봉대였다… 친일파를 단죄하지 못한 결과 일본군 장교출신이 대통령이 되는 민족의 비극이 일어난 것이다.”

    대구사범학교 졸업 후 문경공립보통학교에서 교사를 하던 박정희가 교직을 떠난 것은 1939년. 일본인 아리마 교장을 폭행한 것이 직접적 계기가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이후의 행적. 이듬해 23세의 그는 일본의 괴뢰국인 만주제국 육군군관학교에 입학해 군인의 길을 걷게 된다. 1941년 일본이 미국의 진주만을 기습함으로써 태평양전쟁이 벌어졌다. 그 해 그는 창씨개명을 했다. 다카끼 마사오.

    1942년 만주군관학교를 수석졸업한 다카끼 마사오는 우수한 성적 덕분에 일본 본토의 육군사관학교 3학년에 편입할 수 있었다. 1944년 일본 육사를 3등으로 졸업한 그의 첫 부임지는 관동군 635부대. 이어 만주군 보병 제8단장 부관으로 임명됐다. 1945년 8월15일 일본의 항복과 더불어 만군장교 박정희는 소속을 잃었다. 8월29일 중국 베이징으로 가 광복군 제3지대에 잠시 몸담았다가 이듬해 5월 부산을 통해 귀국했다.

    ‘신동아’는 박정희 기념관 건립에 반대하는 각계 인사 15명을 집중 인터뷰했다. 현 정부 초대 감사원장을 지낸 한승헌 변호사(64)는 “박정희의 경제성장은 근로자 권익을 짓밟는 등 강압적 요인에 의해 이뤄진 것”이라며 성장의 질을 문제삼았다.

    “결과적으로 경제가 성장한 데 대해선 평가할 만하다. 그러나 사회가 발전하는 데 본질적이고 중요한 요소는 민주주의와 인권이다. 그런 점에서 박정희는 폭군이자 반역사적 인물이다. 역사를 보면 경제성장의 가시적 성과를 내세워 독재를 정당화한 예가 많다.”

    소설가 유시춘씨(50)는 박정희 흉상 철거행위에 대해 “올바른 역사의식과 정치적 신념을 가진 양심범의 정당한 행위”라고 평가했다. 유씨는 “박정희는 쿠데타로 헌정질서를 짓밟고 인권탄압을 일삼은 독재자다. 도대체 박정희의 어떤 점을 기리겠다는 것인가”라며 분노했다.

    “우리 민족을 가난 콤플렉스에서 벗어나게 하고 경제개발에 박차를 가한 공은 인정한다. 하지만 경제개발의 공을 박정희의 카리스마로 돌리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온 국민이 열심히 일한 덕분이다.”

    인권탄압 일삼은 독재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 위원장 김재열 신부(61)는 “광복 후 친일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상태에서 일본 군대 장교 출신이 대통령이 된 것 자체가 민족의 불행”이라며 박정희의 친일행적을 비판했다. 김신부는 또 박정희의 공과에 대해 “‘경제성장 대 인권’의 이분법을 적용하는 것은 잘못된 시각”이라고 말했다.

    “경제는 속도의 차이가 있을지 몰라도 언제든 발전할 수 있는 것이지만 인간다운 삶과 자유를 누리는 것은 속도의 문제가 아니다.”

    베스트셀러인 ‘조선왕조실록’의 저자 박영규씨(36). 박씨는 지난 7월26일 동아일보에 박정희 기념관 건립에 반대한다는 뜻을 담은 의견광고를 내 화제가 됐었다. 그는 “제대로 된 국가에서라면 쿠데타를 기념하는 흉상이 세워질 수 없다”며 박정희 흉상 철거의 정당성을 강조했다. 그는 또 “똑같이 독재를 했지만 이승만은 독립운동이라도 했다”며 박정희의 친일행적을 강하게 비판했다.

    아울러 “박정희는 좌익 전력으로 체포됐을 때 자신이 살기 위해 동지들을 밀고하는 등 인간성에도 문제가 많은 인물”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4·19 이후 부패를 청산할 수 있는 기회를 5·16이 앗아갔다. 2공화국이 무능해 쿠데타를 일으켰다고 하는데, 출범한 지 1년도 안 된 정부를 어떻게 그렇게 평가할 수 있나. 2공화국도 경제개발계획을 세워놓고 있었다”며 5·16을 비판했다.

    “학교 다닐 때 그 사람(박정희)이 사라지면 나라가 망한다고 생각했다. 우리나라의 대통령은 박정희 하나밖에 없는 줄 알았다. 세뇌라는 것은 그토록 무서운 것이다. 그 여파가 최소한 30년은 간다고 봐야 한다. 여론조사에서 드러난 박정희 추모 열기는 그 시대가 제대로 종결되지 못한 데 따른 후유증이다.”

    고려대 사학과 박용운 교수(58)는 “쿠데타로 역사를 후퇴시킨 사람에 대해 아무런 역사적 평가 없이 기념관을 세운다는 것은 시기에 맞지 않는 일”이라고 말했다.

    이돈명 변호사(78)는 김지하 국보법위반사건, 김재규 내란음모사건,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등 각종 시국사건의 변호인으로 유명하다. 이변호사는 “박정희 흉상을 계속 놔둔다는 것은 민족의 정서에 유해한 일”이라며 흉상 철거를 “정당한 역사적 행위”로 평가했다. 그는 또 “박정희는 유신체제를 선포하며 죽을 때까지 권력을 놓지 않으려 했다. 그 탓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희생을 강요당했나”라며 유신독재를 비판했다. 또한 박정희의 경제발전 공적에 대해서도 이론을 폈다. “당시 경제가 어려웠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박정희 방식이 아닌, 더 합리적인 정책을 추진했다면 폐단 없이 경제개발을 이룰 수 있었을 것이다.”

    ‘10·26재평가위원회’ 위원장이기도 한 이변호사는 특별히 김재규의 ‘진실’에 대해 말했다.

    “나는 변호사로서 ‘유신체제의 종결을 위해 박정희를 죽였다’는 김재규의 증언을 조금도 의심치 않았다. 지금 이 순간까지도 진실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증거도 있다. 김재규 재판은 재판도 아니었다. 일부에서 CIA 배후설이 제기돼 김재규에게 물어보니 펄펄 뛰더라.”

    ”기념관은 박정희에게도 부담”

    경실련 정책협의회의장인 건국대 경제학과 최정표 교수(47). 최교수는 “쿠데타 주역들이 생존해 있는 지금 박정희를 올바르게 평가하는 것은 어렵다”며 개발독재론을 비판했다.

    “개발독재가 불가피한 것은 아니었다. 민주주의를 하면서 경제성장을 이뤘다면 좋았을 것이다. 우리와 비슷하게 고도성장을 이룩한 싱가포르도 우익독재를 겪었지만 오늘날 선진국가 대열에 올라섰다. 그 차이는 우리의 경우 정권유지를 위해 독재를 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최교수는 박정희를 무조건 비판하지는 않았다. 경제발전 공로를 어느 정도 인정하며 특히 지금 위기에 처한 한국 경제를 박정희 탓만으로 돌리는 데 대해선 반론을 폈다.

    “박정희의 국가경영철학과 리더십은 인정해야 한다. 개발독재의 폐해가 한국 경제의 구조를 허약하게 만들었다는 비판에 일리는 있지만 그후의 위정자들 책임도 크다. 전임자의 잘못을 고쳐나갔어야 했다. 재벌 문제만 해도 그렇다. 박정희는 재벌을 고도성장의 수단으로 활용했다. 정경유착의 폐단이 심화된 건 80년대 이후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소속 박기호 신부(51·시흥4동 성당)는 박정희 부활현상에 대해 “독재가 오래 지속되다 보면 신념화한 추종자들이 생긴다. 그들과 변혁을 두려워하는 세력이 박정희를 살려내고 있다”고 말했다. 박신부는 또 “박정희식 경제발전은 철저하게 정신세계를 파괴하는 것이었다. 정신세계는 경제와 달리 하루아침에 복구되는 것이 아니다. 경제건설을 위해 국민을 희생시킨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라며 박정희식 경제발전의 어두운 측면을 강조했다.

    동국대 철학과 홍윤기 교수(44)는 박정희를 ‘반국가사범’으로 규정하고 기념관 건립을 ‘헌법을 부정하는 행위’로 간주했다. 그는 “박정희의 정책 구조는 한국형 부패구조의 원형”이라며 “박정희 부활현상은 허약한 민주주의에 대한 반발심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진단했다.

    “박정희가 대통령이 된 것은 미숙했던 우리 정치사의 시행착오다. 그는 나름대로 노력은 했지만 불행히도 기릴 만한 업적을 남기지 못했다. 경제를 조금 발전시켰다고, 국민을 있는 대로 짓밟아놓은 그를 기념하는 것은 애들 교육에도 좋지 않다. 그것은 국민에게 부담을 주는 일이다. 아마 박정희도 지하에서 부담스러워 할 것이다.”

    홍교수는 또 “경제발전 방식이 잘못됐다”며 개발독재의 폐해를 지적했다.

    “민주화나 인권을 논하기 전에 박정희의 경제논리 자체를 비판해야 한다. 박정희 시대의 경제발전은 철저하게 노동자의 희생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노동자들에게 분배가 시작된 것은 1987년의 6월 항쟁 이후다. 새마을운동만 해도 그렇다. 북한의 천리마운동과 경쟁하기 위해 시작한 그 운동은 농민들에게 거대한 환상만 심어주고 결국엔 농촌을 폐허로 만들었다. 단기간에 가시적인 성과를 내는 데 급급했기 때문이다.”

    11월3일 박정희 기념관 건립 논쟁을 다룬 MBC의 ‘100분 토론’에 출연했던 동국대 사회학과 강정구 교수(55·학단협 대표). 강교수는 경제발전의 공을 박정희에게 돌리는 것을 경계했다.

    “당시 경제발전의 배경엔 미국이 주도한 냉전구도가 있다. 미국은 대만과 남한을 주변의 공산주의국가들에 맞서는 보루로 삼기 위해 경제발전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5·16 직전 장면 정부는 미국의 지원을 바탕으로 경제개발계획을 짜 놓았다. 그것이 박정희 경제발전계획에 토대가 됐다. 당시 세계는 자본주의경제가 팽창하던 때다. 한일협정도 미국의 압력으로 맺은 것이다. 박정희는 그때 그 자리에 우연히 있었을 뿐이다. 박정희 때문에 경제가 발전한 것은 아니다. 누가 대통령이 됐더라도 경제성장은 가능했다.”

    그는 또 박정희 리더십에 대해서도 혹독하게 비판했다.

    “리더십은 국민이 자발적으로 따르도록 만드는 지도력이다. 박정희 정권을 유지한 것은 일관된 무력이었다. 무력에 바탕을 둔 철권통치와 폭압정치는 리더십과 거리가 멀다.”

    성공회대 사회학과 조희연 교수(44·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는 “1997년부터 일기 시작한 박정희 신드롬은 경제위기 상황을 반영한 것”이라며 “대중은 위기 출구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 영웅을 상상했고, 그것을 대선 과정에 일부 정치인들이 이용함으로써 증폭된 점이 있다”고 박정희 부활현상의 원인을 진단했다.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핵심적 가치는 (일제로부터의) 독립과 민주주의를 위해 싸운 것이다. 박정희의 친일 경력과 독재는 정신적 뿌리가 같은 것으로 민족적 공분을 자아내는 것이다. 5·16은 반혁명이자 반역사적 쿠데타다. 특히 유신체제는 극단의 전체주의체제였다. 피해자가 엄존한 상태에서 충분한 국민적 합의 없이 독재자의 기념관을 짓는 것은 국론 분열을 일으킬 수 있다.”

    정치권에서도 이 문제는 뜨거운 감자다. 하지만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이라 그런지 드러내놓고 박정희 기념관 건립을 반대하는 의원은 손에 꼽을 정도다. 먼저 한나라당 박종웅 의원(47). 박의원은 “YS는 억울한 측면이 있다. 박정희 시대의 정경유착, 잘못된 재벌정책 등 개발독재의 폐해가 문민정부 때 폭발해 IMF 위기를 불렀다”며 문민정부의 경제실정을 박정희 탓으로 돌렸다. 그는 또 “당 지도부가 정체성을 못 살리고 있다”며 “박근혜 부총재도 진정 자신이 정치적으로 성장하는 데 무엇이 유리한지 잘 판단해야 할 것”이라며 박정희 기념관 문제에 관한 한나라당 지도부의 대응방식을 비판했다.

    서울시 국감에서 박정희 기념관 건립의 부당성을 제기한 민주당 심재권 의원(54)은 “박정희 흉상 철거 당시 기자들도 있었다. 도주나 증거인멸의 우려가 없는데 구속한 것은 잘못된 처사”라며 경찰의 ‘과잉대응’을 비난했다. 심의원은 “박정희는 공보다 과가 훨씬 많은 사람”이라며 박정희 체제를 “세계사에 흔치 않은 참혹한 독재”로 규정했다. 또 박정희 부활현상에 대해 “민주사회 구현과정에 과도기적으로 나타나는 사회질서 이완 현상”이라고 분석했다.

    박정희 기념관의 국고 지원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거의 한 목소리로 내놓는 대안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 기념관 건립은 추종자나 지지세력에 맡기고 정부는 지원하지 말 것. 둘째, 굳이 정부가 지원하려면 역대 대통령 모두를 대상으로 한 자료전시관, 또는 기념도서관을 지을 것. 아울러 그 장소로는 각 전직 대통령들의 고향이 적당하다는 것이다.

    이들은 또 김대중 대통령이 박정희 기념관 건립 명분으로 내세운 ‘화해(지역화합, 민족화합)’에 대해서도 강도 높게 비판한다. 빈약한 역사의식이 빚은 정략적 발상이라는 것이다. 또한 화해의 실효성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한다.

    연세대 행정학과 최평길 교수(60)는 “역대 대통령들의 기념도서관이나 기록보관소를 짓는 것은 역사적 가치가 있는, 꼭 필요한 일”이라면서도 “정부가 나서는 것은 옳지 않으며, 김대중 대통령의 정치적 제스처는 잘못된 것”이라고 비판했다. 최교수는 “민간이 주도해 역대 대통령들의 기념도서관을 지을 경우 정부의 역할은 관리비를 보조하는 데 그쳐야 한다”고 ‘대안’을 제시했다.



    DJ의 역사적 월권

    김영삼 정부 때 대통령 비서실 제2부속실장을 지낸 한나라당 정병국 의원(42)의 생각도 최교수와 비슷하다. 정의원은 “기념관이든 자료관이든 역대 대통령에 관한 자료는 귀중한 국가 자산”이라며 “전임 대통령의 추종자들이 건물을 지으면 정부는 그 내용물을 제공하고 관리비를 지원하면 된다”고 말했다. 정의원은 또 “DJ의 오만과 독선에서 비롯된 일”이라며 “DJ 개인 돈으로 (기념관을) 짓는 것은 말리지 않겠다”고 꼬집었다.

    유시춘씨는 “김대중 대통령의 평화를 존중하는 철학은 좋다. 하지만 박정희 기념관 건립은 박정희와 김대중 두 사람의 개인적 은원(恩怨)으로 판단할 일이 아니다”며 “명분은 지역화합이지만 영남 유권자에 대한 아부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김재열 신부는 “기념관 건립이 과연 지역화합에 도움이 되는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박영규씨는 “이 나라에 영호남만 있는 건 아니다. 영남에서도 (기념관 건립을) 비판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며 “김대통령이 내세우는 명분에서 전형적인 우중(愚衆)정치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고 비판했다. 박씨는 또 “기념관을 세울 경우 박정희 옹호세력의 기세만 키워줄 뿐이다. 오히려 화합의 저해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박용운 교수는 “대통령이 명분으로 내세운 화합이 오히려 국론을 분열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김대통령의 역사적 월권이자 분별력을 잃은 행위”라고 비판한 홍윤기 교수는 “김대통령이 화해를 내세우는 심정은 이해되지만, 정 화해하고 싶으면 추모회에 가서 개인 자격으로 꽃다발을 놓고 오면 될 일”이라고 ‘권고’했다. 박종웅 의원은 “대구·경북 지역에 짓는다면 반대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박기호 신부는 “명분도 잘못됐고 실효성도 없다”고 비판했다.

    강정구 교수는 “지역화합의 명분을 내세웠지만 사실은 경상도 표를 의식한 정략적 계산에서 비롯된 것 아니냐”며 “권력 기반이 약한 DJ의 고충은 이해하지만 할 일이 있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이 있다”고 비판했다. 조희연 교수는 “정치적 효과 없는 정략”으로 평가하면서 “진정 동서화합을 원한다면 기념관을 지을 것이 아니라 탈지역주의 정치구도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정희는 1963년 5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기 직전 펴낸 저서 ‘국가와 혁명과 나’의 서장에 이렇게 밝혔다. “민주주의 신봉을 견지하는 한 여론의 자유를 막을 수는 없다. ‘토론의 자유’ 속에 ‘혁명의 구심력’을 찾아야 하는 혁명.” 그러나 박정희는 집권기간 내내 여론의 자유를 막았고 토론의 자유를 막았다. 그런 점에서 그의 혁명은 실패했다.

    그는 처음부터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민주정권을 불법으로 뒤엎은 5·16도 그에겐 “내적(內賊)의 소탕을 위하여 출동한 군의 작전상 이동에 불과”했다. 그의 독재 기질은 혁명 초기단계부터 엿보였다. ‘국가와 혁명과 나’ 제1장(‘4·19 혁명의 유산과 민주당 정권’)에서 그는 “민주적 정치권능보다 일관성 있는 강력한 지도원리가 요청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제3장 ‘혁명의 중간결산’에는 “다시 한번 그들의 반성을 일방 기대하였다” “본인은 이 이상 더 관용이나 이해를 그들에게 베풀 수는 없게 되었다” 따위의 표현이 등장한다. 대통령이 되기도 전 그는 이미 ‘전제군주’의 위치에서 정치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강준만 교수(45)는 박정희 부활현상에 대해 일찍이 이렇게 진단했다.

    “여론조사에서 나타나는 박정희에 대한 호의적인 평가는 단지 복고주의니 향수니 하는 문화현상만은 아니다. 그건 정치·경제적인 현상이기도 하다. 우리 사회에서 권력과 금력을 가진 기득권층, 그리고 엘리트층의 절대 다수는 박정희 시대에 영화를 누리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우리 사회의 언로를 장악하고 있다… 박정희가 주도한 근대화를 아무리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해도 박정희는 욕을 먹어야 한다. 그건 결코 모순이 아니다. 그건 박정희 시대에 고통받은 인간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다.”(‘인물과 사상’ 2권, 1997.6)

    국민연대의 상임집행위원장을 맡고 있는 조희연 교수는 국민연대의 향후 활동계획에 대해 “무엇보다도 100억원의 추가예산 편성을 막기 위해 기념관 반대 캠페인을 지속적으로 펼치겠다. 그래도 강행한다면 건물 착공을 저지하기 위한 고강도 방안을 강구하겠다”고 밝혔다. 과연 훗날 역사는 박정희에 대한 화해와 단죄 중 어느 쪽을 더 의미 있게 평가할까.



    [옥중인터뷰|김용삼 민족문제연구소 운영위원장]

    11월13일 오후 영등포경찰서 유치장에 구금돼 있는 김용삼 민족문제연구소 운영위원장을 면회했다. 초췌해 보였지만 표정은 밝았고 자신감에 넘쳐 있었다.

    ―건강은 어떤가?

    “심장이 조금 좋지 않지만 견딜 만하다.”

    ―적용된 혐의 내용이 뭔가?

    “특수공무방해죄와 폭행죄다. 재물손괴죄 정도로 생각했는데 뜻밖이다. 재판과정에 시비가 가려질 것이다.”

    ―언제 어떤 동기로 박정희 흉상을 철거할 마음을 먹었나?

    “박정희의 가장 큰 죄는 민족을 배반한 죄다. 그는 일본군 장교로 독립군 토벌에 나섰던 사람이다. 4·19혁명 후 ‘김구 선생 암살규명위원회’가 구성됐다. 암살에 관련됐던 사람들이 속속 자수하는 상황이었는데 5·16쿠데타가 진상규명 기회를 앗아가 버렸다. 5·16은 또 4·19혁명의 영향으로 막 움트기 시작한 민주주의의 싹을 잘라버렸다. 흉상을 철거하기로 맘먹은 것은 그 자리가 바로 쿠데타 발상지이기 때문이다.

    국민연대가 출범한 9월28일 민족문제연구소의 방학진 조직부장과 함께 지하철 1호선을 타고 가는 동안 그에게 흉상을 철거해야겠다는 내 뜻을 밝혔다. 한 달 뒤 저녁 회식 후 방학진에게 이 일에 협조할 수 있는 단체를 모으라고 지시했다. 11월2일까지 4개 단체가 참여의사를 밝혀왔다.”

    ―구속을 각오했나?

    “역사적 정의 차원에서 구속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실정법에 저촉될 것은 각오했다.”

    ―박정희 부활현상을 어떻게 생각하나?

    “친일파들이 박정희를 영웅으로 추앙하면서 그의 범죄실상을 가리고 왜곡하고 있다. 민족 반역자를 기리겠다고 국민의 돈을 쏟아 붓는다니 말이 되는가. 더욱이 세계가 주목하는 장소에 반역의 바벨탑을 세우려 하다니. 이는 역사의 모순이 아닐 수 없다.”

    ―김대중 대통령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누구보다도 김대통령을 좋아하던 사람이다. 역사의식이 올바른 분으로 믿었고, 통일지향적인 대북정책에 마음이 든든하기도 했다. 김대통령의 통일정책은 국민이 적극 밀어줘야 한다. 그런데 친일을 한 박정희를, 독립운동에 평생을 바친 김구 선생보다 더 화려하게 기념하려는 것을 보고 실망했다. 박정희 기념관은 김대통령의 역사적 실패로 기록될 것이다. 역사는 대통령 개인 것이 아니라 국민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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