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12월호

“쿠데타라도 결과로 심판하자”

박정희기념사업회장 신현확 전총리 직격인터뷰

  • 조성식mairso2@donga.com

    입력2006-07-24 13:5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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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 회장인 신현확 전국무총리. 3·1운동 이듬해인 1920년 생이니 우리 나이로 올해 81세다. 모처럼 언론 인터뷰에 응한 그는 박정희 기념관 건립 취지에 대해 “개인 숭배가 아닌, ‘한강의 기적’을 기리자는 것”이라고 말했다.
    신현확 전총리는 박정희 정권 시절 보건사회부장관(1975년),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1978년)을 역임했다. 국무총리 재임기간은 박 전대통령 사망 직후인 1979년 12월부터 5공 정권이 출범하기 직전인 1980년 5월까지 약 6개월이다. 인터뷰는 11월9일 오전 상공회의소 건물 12층에 있는 한일협력위원회 사무실에서 진행됐다. 그는 인터뷰에 들어가기 전 인터뷰 취지를 다시 한번 확인했는데, 기자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였다.

    ―건강이 좋아 보이십니다.

    “나이 든 사람이 특별한 병이 없으면 건강이 좋다고 얘기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아요. 예부터 ‘노인 건강 못 믿는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아주 건강해 보여도 언제 슬쩍 가버릴지 모르지요. 특별한 병이 없더라도 모든 육체적 기능이 후퇴해 있다, 그 말이에요. 그러니까 건강을 논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지요.”

    ―운동은 좀 하십니까?

    “노령에 든 사람들끼리 OB클럽을 만들어 골프를 치는데, 여름·겨울엔 하지 말자, 날씨 좋을 때만 하자, 그러다 보니 생각한 만큼 하지 못하고 있어요.”



    그는 지금 회장직을 두 개 갖고 있다. 하나는 박정희기념사업회 회장이고 또 하나는 한일협력위원회 회장이다. 그밖에 전직 정부 수반들의 모임인 ‘OB 서미트(summit)’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한일협력위원회의 일본측 회장은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수상이다. 정계 재계 언론계 학계 관계자들로 구성된 이 단체는 민간 차원에서 양국간 현안에 대해 토의하고 협력하는 일을 하고 있다.

    ―지난해 7월 출범한 박정희기념사업회 얘기를 하지요. 회장이신데, 어떤 동기에서 맡으셨습니까.

    “지난해 4월 김대중 대통령이 만나자고 해 청와대로 갔습니다. 단 둘이 저녁을 먹으며 얘기했습니다. 그때 김대통령이 기념사업회 얘기를 꺼냈습니다. 대통령 말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어느 나라 어느 시대에도 완벽한 지도자란 있을 수 없다. 누구나 공(功)도 있고 과(過)도 있다. 그렇지만 큰 공이 있으면 비록 과가 있더라도 후세에 알려야 하고, 젊은 사람들이 배워나가도록 해야 할 필요가 있다. 박정희 대통령이 바로 그런 분이다. 나는 박정희 대통령을 정적으로서 처음 만났는데, 그가 죽을 때까지도 정적 관계였다. 나는 핍박을 받았으면 받았지 그에게 혜택을 입은 일은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내 생각엔 박대통령이 국민들에게 ‘하면 된다’는 정신을 갖게 하고, 사기를 북돋워준 공이 크다. 빈곤에서 벗어나야겠다는 신념을 갖고 산업화와 근대화를 이룩해 경제를 발전시킨 것은 분명한 공이다. 내가 핍박을 받은 처지인 만큼 내가 기념사업을 하겠다고 하면, 박대통령의 과에 대한 논란이 있더라도 국민들이 이해하게 될 거다’, 이런 얘기를 해요.

    내게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기에, ‘정말 훌륭한 생각’이라고 말해줬습니다. 그러자 ‘기념사업회를 만들려고 하는데, 회장을 맡아달라’고 부탁을 해요. 그래서 ‘나는 박대통령이 그런 일을 하는데 참여했던 사람인 만큼 기꺼이 맡겠다’고 즉석에서 답변했습니다. 그렇게 시작됐어요.”

    ―기념관 건립의 뜻을 설명하신다면?

    “김대중 대통령의 얘기에 100% 찬성합니다. 굳이 설명을 덧붙인다면 이런 것입니다. 우리가 하려는 일은, 기념관을 만들어 박정희라는 사람 개인을 숭배하고 참배하고 분향하는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당시 박대통령이 지도자로서 책임지고 이끈 것은 사실이지만 혼자 한 건 아니지요. 모든 공무원 근로자 산업가 농민… 우리 국민 모두가 뭉쳐 해낸 것이지 박정희 개인이 해낸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박대통령의 공은 바로 그런 것을 지도하고 이끌었다는 것입니다.



    ‘한강의 기적’ 기리자

    어쨌든 세계가 인정하듯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내지 않았습니까. 단시일에 산업화에 성공하고 경제도약을 한 건 사실 아닙니까. 후진국으로서 이처럼 급속하게 경제개발에 성공한 예가 없어요. 대표적 성공사례지요. 어째서 한국만 그렇게 됐냐, 이 점이 전세계적으로 연구대상입니다. 기념관은 바로 ‘한강의 기적’의 경위와 과정을 전세계에 알려주는 구실을 하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연구기관도 되고 토의기관도 되고, 또 각종 사료를 언제든지 보여줄 수 있는 도서관 또는 전시실 기능도 갖게 됩니다.”

    ―내용이야 어떻든 기념관이라는 명칭 때문에 박 전대통령을 비판하는 사람들의 거부감이나 반감이 큰 것 같습니다. 지난해 김대통령이 기념관 건립의사를 밝힌 후 역사학회나 교수들, 각종 사회·시민단체들이 반대하고 나서지 않았습니까. 지난 9월엔 247개 단체들이 ‘박정희기념관 건립반대 국민연대’를 결성했어요. 그런 움직임을, 기념관 건립의 취지를 오해한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십니까. 아니면 근본적으로 생각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보십니까.

    “반대하는 사람 중엔 기념관 건립 취지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도 상당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만 있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지도자는 누구나 과도 있고 공도 있다, 그러니 그 과를 중시해 ‘나는 기념관에 반대한다’, 그런 사람이 있을 수 있죠. 자기 신념에 따라 반대할 수 있는 거죠.

    그러나 김대통령처럼 과도 인정하지만 공도 인정해야 하는 것 아니냐, 그렇게 보는 사람들도 많다는 겁니다. 신문들이 지난해부터 여러 차례 이에 대한 여론조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산업발전을 이룬 공을 생각해 기념관을 건립해야 한다는 의견이 과반수가 넘은 것으로, 심지어 70%까지도 나타났다 말이에요. 그래도 반대하는 사람들의 신념과 의견은 존중해줘야죠. 다원사회니까요.”

    ―여론조사 비율로만 따질 문제는 아닌 듯싶습니다.

    “그렇긴 하지요.”

    ―국고에서 기념관 건립비용을 지원하는 것도 쟁점입니다. 이를테면 기념관 건립을 반대하는 사람들도 박 전대통령 추종자나 찬양론자들이 그의 고향에 세우는 건 반대하지 않겠다고 말하거든요.

    “여러 나라의 예를 다 살펴봤어요. 대통령에 관한 자료를 전시하고 관련 도서를 볼 수 있는 시설을 만드는 것은 공적인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외국에선 정부가 도와주고 있어요. 기념관을 세운 단체에 관리비를 지원하는 것이지요. 국가재산을 맡긴 것이니까요. 미국을 보면 역대 대통령의 기념관이 꼭 고향에만 있지는 않습니다. 그 중 중요한 대통령은, 예를 들어 링컨이라든가 워싱턴이라든가 루즈벨트 같은 사람들은 수도에 기념관이 있어요. 프랑스의 나폴레옹은 코르시카 사람이지만 파리 한가운데에 기념관이 있습니다. 그런데 왜 한국에서는 고향에만 기념관을 세워야 합니까.”

    ―기념관 건립 논쟁은 박 전대통령에 대한 평가와 직결된 것입니다. 반대론자들은 박 전대통령을 공보다 과가 훨씬 많은 인물로 보죠. 그래서 국가 차원에서 지원하는 건 문제라고 보는 겁니다. 심지어 반역사적 행위로까지 규정하고 있습니다.

    “박대통령은 우선 빈곤탈출부터 해야겠다, 그러기 위해선 경제가 제일이다, 잘 살고 봐야겠다, 잘 살기 위해선 자유를 일부 유보하자, 급한 일부터 먼저 하자, 그렇게 판단했습니다. 그 자유 유보가 옳으냐, 그르냐에 대해선 각자 의견이 다를 수 있지요. 중국과 미국도 그 점에 대한 의견이 달라 싸우고 있지 않습니까. 중국은 산업화하는 것이 곧 인권향상에 기여하는 길이라고 주장합니다. 미국은 달라요. 자유부터 확보해야 한다는 것이죠.

    그와 마찬가지예요. 그런데 하버드 경제학자들이 발표하지 않았습니까. 후진국 중에서 자유민주주의부터 내세워 경제가 제대로 발전한 나라가 없다고. 공공연히 학설로 내세우고 있어요. 어쨌든 박대통령이 그렇게 한 것을 과로 보는 사람도 있고 중국식으로 논리를 펴는 사람도 있을 수 있죠.”

    신회장의 답변은 거의 ‘모범답안’ 수준이다. 이런 식으로 나오면 뭘 따지고 묻기가 머쓱해진다. 기자는 “비판적인 관점에서 질문을 많이 하겠다”고 양해(?)를 구한 뒤 본격적인 질문 공세에 들어갔다.

    ―박 전대통령의 최대공적으로 흔히 경제발전 치적을 꼽지 않습니까.

    “가장 크지요. 그런데 그것만은 아닙니다. 당시 이북이 모든 분야에서 우리보다 앞섰습니다. 그런데 지금 국력을 비교하면, 국가 방위력을 비롯해 모든 점에서 우리가 열 배 이상 앞서 나가고 있습니다. 산업화뿐만 아니라 국민 생활 수준이 전반적으로 올라갔습니다. 어느 한 부분만 잘 한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박 전대통령의 리더십과 더불어 모든 국민이 열심히 일한 결과겠지요.

    “어느 시대 어떤 지도자도 혼자선 아무것도 못해요. 국민 모두가 협력해야지요.”

    ―1960년 4·19혁명이 일어난 후 장면 정부가 들어섰습니다. 박정희 찬양론들자은 지도자가 박정희였기 때문에 경제발전이 가능했다고 말하지만, 반대론자들은 꼭 박정희가 아니었더라도, 말하자면 당시 민주정부도 시간을 갖고 경제개발계획을 추진했다면 경제를 발전시킬 수 있었다고 보는 겁니다. 미국과 함께 경제발전계획도 세워둔 상태였고. 군사정부의 경제발전계획도 그것을 토대로 한 것이죠. 그런 점에서 보면 쿠데타를 굳이 일으킬 필요가 있었느냐는 의문이 일지요.

    “민주정치, 민주제도의 관점에서 보면 쿠데타는 분명 불법이죠. 그러나 쿠데타에 성공해 공을 세웠다면 양해가 되는 겁니다. 조선조도 쿠데타로 들어선 정권 아닙니까. 성공한 쿠데타는 혁명으로 부릅니다. 어떤 성과를 거두었느냐로 따져야 합니다. 그렇다고 쿠데타 자체가 불법이라는 것을 부정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박정희 개인이 모든 걸 다 잘했다, 그런 건 아니니까.”

    ―결과만 좋으면 과정이나 동기가 불순해도, 불법적이어도 괜찮다는 뜻입니까. 교육이나 가치관, 역사관에 혼란을 일으키지 않을까요?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사리사욕에서, 정권을 잡으려는 욕심에서 쿠데타를 한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는 그 결과를 보면 구분할 수 있지요. 조선조 500년 역사도 쿠데타로 출발했지만 선정(善政)을 할 때는 얼마나 잘 했습니까. 쿠데타로 세운 왕조이니 정통성을 인정하지 못하겠다, 그러면 역사가 뭐가 됩니까.”

    ―아무래도 박 전대통령의 가장 큰 과오는 독재가 아닌가 싶습니다. 권력을 연장하기 위해 1960년대 말 3선개헌을 하고 1972년엔 유신체제를 수립했습니다. 쿠데타 초기의 순수성이 사라지고, 독재를 유지하기 위해 경제논리를 이용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나만이 이 일을 해낼 수 있다는 오만함이라 할까요, 지나친 자신감이라 할까요. 그런 점이 장기독재를 부른 것 같습니다. 초기의 경제발전 업적을 인정한다 해도 3선개헌 이후로는 다른 관점에서 평가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경제발전이 궤도에 오른 건 60년대 후반에서 70년대 초까지입니다. 한창 일이 진행될 때였죠. 경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유를 일부 유보해야겠다는 생각이 옳았다는 말은 아닙니다. 자유 유보라는 게 뭡니까. 자유로운 의사 발표나 행동을 용납하지 못하겠다는 것 아닙니까. 그것을 독재라 부른다면 독재죠. 제가 독재나 자유 유보 사실을 부인하는 것은 아닙니다. 당시 자기 입으로 공공연히 말했잖아요. 한국적 민주주의를 하겠다고. 한국적 민주주의가 뭡니까. 자유를 유보한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그 점이….

    “글쎄 그 점에 대해선 옳다 그르다, 논쟁할 생각이 없다니까요, 나는. 그런 점을 인정한단 말이죠. 자유를 일부 유보한 건 사실이니까.”

    신회장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지는 듯싶었다. 벌써 몇 개째 담배를 피우는지 모르겠다. 질문과 답변이 따로 놀고 있다. 기자의 가치판단 요구에 대해 그는 가치중립적인 태도를 유지한다.

    ―말씀의 취지는 알겠는데요. 그래도 객관적으로 짚어볼 문제는 있다고 봅니다. 경제발전이 궤도에 오르니 그 기조를 유지해야 하겠고, 지속적인 경제발전을 위해 자유민주주의 유보가 불가피했다고 치죠. 그렇지만 왜 박정희 혼자 그 일을 계속해야 했는가 하는 의문이 일지요. 다른 민주정부가 들어서서 하면 안 됩니까?

    “그러니까 제 얘기는 그런 의견도 있을 수 있다는 겁니다. 지금까지 아무도 못하던 걸 내가 시작해 성공을 거두고 있으니 나는 끝을 봐야겠다, 이것이 박대통령의 논리입니다. 그것에 대해 찬성하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는 거지요. 흑백논리로 볼 문제가 아니라고 봅니다.”

    ―정부를 세우거나 나라를 경영하는 문제가 한 개인의 판단에 의해 좌지우지될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동네 가게를 운영하는 것도 아니고. 우리 사회엔 질서가 있지 않습니까. 경제발전을 위해 내가 더 해야겠다, 그것은 박정희 개인의 판단이지요.

    “그걸 문제삼자는 것이 아닙니다. 여하튼 그렇게 했지 않느냐, 이 말이에요.”

    ―그러니까 결과를 놓고 말하자….

    “결과를 놓고 얘기해야지요. 여하튼 박정희라는 사람은 그렇게 믿고 그렇게 했다, 이 말이에요. 내 얘기는 그걸 갖고 논쟁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걸 두고 ‘나는 박정희가 과가 많다고 생각하니 기념관은 절대 안 된다’, 그렇게 말한다면 잘못이라는 겁니다.”

    ―회장님도 당시 독재정치의 과오나 후유증은 인정하시는 겁니까.

    “거기에 대해선 묻지 마세요. 내가 기념사업회 회장인데, ‘너는 거기에 대해 어느 정도까지냐. 어디 줄 한 번 그어다오’, 그런 얘기는 할 필요없잖아요.”

    ―과를 인정한다고 말씀하니 여쭤보는 겁니다.

    “그걸 따지려면 각자 역사학자가 되든지 해야지, 어떻게 일일이 다 따지겠어요. 김대통령도 그럴 겁니다. 역사학자도 아닌데. (박 전대통령에게) 과가 없었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 과도 있지만 공은 공대로 인정하자. 그게 김대통령의 논리이고, 나도 거기에 찬성했고.”

    ―김대통령에게는 지나친 현실주의자라는 평이 따라다닙니다. 필요에 따라 자기 생각이나 말을 자주 바꾼다는 평가죠. 기념관 건립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 일이 김대통령의 정치적 계산, 즉 차기 정권을 내다보고 영남권 민심을 얻으려는 정략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냐고 의심합니다.

    “나한테도 그런 얘기하는 사람이 많아요. 김대중 대통령의 진심은 그게 아닐 것이라고. 정략에서 그러는 것이라고. 그런 얘기를 하는 사람에게 나는 이렇게 말해줍니다. ‘여보시오, 한 나라의 원수가 동서화합 문제나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 문제나 이런저런 것을 다 생각해 판단한 일인데, 어찌 그리 나쁜 쪽으로만 생각하느냐’고. 설사 영남의 환심을 사기 위해 그랬다 치자. 그러면 영남 사람들이 원하는 걸 해주고 환영 좀 받자, 그게 뭐 나쁜 일이냐. 또 이런 말도 했어요. 선거 때 유권자들이 원하는 것 해줄 테니 날 지지해달라, 그렇게 말하는 것이 왜 나쁘냐. 정치하는 사람이 인기 좀 얻자는 데 그게 뭐 문제냐. 그게 민주주의 아니냐.”

    ―시각 차이가 큰 것 같습니다. 반대론자들은 김대통령이 기념관 건립의 명분으로 삼은 역사적 화해와 지역화합에 대해서도 대통령 개인이 판단할 일이 아니라고 봅니다.

    “대통령이든 아니든, 동서화합을 이뤄야 한다는 데 반대하는 사람은 없지 않아요? 동서화합을 위해 김대통령이 애쓴다면 당연히 옳은 일이죠. 대통령이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지요.”

    ―비판론자들은 박정희 기념관 건립이 동서화합에 별 도움이 안 될 것으로 봅니다.

    “왜 일국의 지도자가 여러 가지를 생각해 하는 일을 꼭 꼬집고 비틀어서만 보려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참, 어려운 문제인 것 같습니다.

    기자와 신회장은 거의 동시에 웃었다.

    ―흔히 개발독재의 장단점을 얘기합니다. 개발독재가 단기간 초고속성장을 이루는 데는 효과가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우리 경제의 기반을 취약하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가시적 성과나 실적, 성장제일주의에 집착해 우리 경제를 내실있게 키우지 못했다는 비판이죠. 당시 경제정책을 담당하신 분으로서 비판론자들을 설득한다면 어떤 논리가 있을까요.

    “설득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해요.”

    ―그럼 그것도 찬반양론이 있을 수 있다고….

    “찬반양론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경제라는 것은 물 흐르듯 흘러가는 것이지 진리대로 가는 것은 아니에요. 어떤 경제정책이라도 단점은 다 있는 겁니다. 다음 정부에서 뒤따라가는 정책이 옳았느냐, 이런 점도 생각해야지요.

    경제라는 건 오늘 다르고 내일 다르고 매일매일 대응해 나가야 하는 것인데, 10년 20년 지나고 나서 그때 이런 식으로 발전했는데 잘못된 것이다, 그렇게 말할 순 없지요. 그건 학문적인 얘기도, 논리적인 얘기도 아닙니다. 나라고 뭐 박대통령 경제정책에 다 찬성했겠습니까. 의견이 일치하지 않을 때도 있었고 싸움도 했지요. 그렇지만 그때 잘못해 지금 이렇게 됐다고 얘기하는 건 마치 애가 잘못했다고 해서 저 놈 낳은 부모가 잘못됐다, 안 낳았으면 좋았는데, 그렇게 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판단해야 할 문제라는 것이죠?

    “끊임없이 흘러갑니다, 경제라는 건.”

    ―많은 경제학자들이 한국 경제구조의 취약성을 얘기하는데, 그것은 장기간에 걸쳐 축적된 내용을 두고 평가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물론이죠. 그런데 그것도 얼마나 장기간이냐에 따라 얘기가 달라질 겁니다.”

    ―개발독재의 폐해로 흔히 거론되는 게 특혜금융, 정경유착, 재벌의 비대화, 경제력 집중, 관치금융으로 대표되는 금융의 부실화 등입니다. 성장 일변도로 가다보니 당시엔 문제점이 크게 드러나지 않았지만 뒷날 우리 경제를 허약하게 만든 원인이 됐다는 것이죠. 그런 문제들은 하루아침에 해결될 수 없지 않습니까.

    “아까 말한 게 전부입니다. 그 이상 얘기해봤자 다 같은 얘기지요. 지금 21년 지났어요. 21년 전 경제를 잘못 이끌어 지금 경제가 잘못됐다, 이렇게 말하는 건 어불성설입니다. 그런 식으로 판단하고 논의할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21년이라니. 아마도 신회장은 자신이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을 맡은 해인 1978년을 기준으로 말한 듯싶다. 애초 약속한 한 시간이 지났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정경유착 문제는 어떻게 보십니까.

    “정경유착이라는 말은 잘 판단해서 사용해야 합니다. 정당한 정책적 판단에 의해, 나라를 위해서나 사회를 위해서나 이렇게 해야 한다고 판단해 특정 기업을 지원하는 것은 정경유착이 아닙니다. 정경유착이란, 부당하게 어떤 개인이나 개별 기업 또는 특정 그룹에 이득을 주기 위해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는 경우입니다.”

    ―내용에 따라 평가가 달라진다는 말씀이지요?

    “그렇죠. 물론이죠. 바로 어제 현대건설 살린다는 결정이 발표됐습니다. 시장경제 원리대로 하면 저거(현대건설), 가야 합니다. 다 인정하지 않습니까. 신문들도 그렇게 말하고, 학자들도 그렇고. 외국에서도 그렇게 평가한단 말입니다. 죽일 놈을 안 죽이기 때문에 한국 경제가 안 된다고, 그럼 죽였어야 하느냐.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현대건설의 위상으로 봐 저걸 오늘 죽이면 국제시장에서 우리나라 다른 기업들의 금융이 전부 스톱돼요.

    이런 경우엔 경제문제인지 정치문제인지 잘 구분되지 않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정격유착 아니냐고 볼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나라를 위해선 그럴 수도 있는 겁니다. 유착하지 않았다 해도 나라를 위해 살리지 않을 수 없는 겁니다. 내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건 내가 이런 문제를 직접 겪어봤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위기를 우선 넘기고 대책을 생각해야지요. 지금 당장 죽여라, 그러면 어떤 사태가 벌어지겠습니까. 다 복잡한 사정이 있는 겁니다.”

    ―박 전대통령의 친일행적도 자주 비판대상이 됩니다. 이번에 흉상 철거를 주도한 민족문제연구소라는 단체도 박 전대통령의 친일행적을 집중적으로 비판하고 있습니다.

    “예전에 친일파들의 행적에 관한 책을 본 적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어떤 행동을 했기 때문에 친일파다, 그런 식으로 죽 기술해 놨더군요. 그 책에 보면 박 전대통령의 이름이 나와요. 일본군 장교로 복무했기 때문에 친일파라는 겁니다. 최규하 전대통령도 올라 있어요. 일제 때 중학교 선생을 했다고. 내 이름도 들어가 있습니다. 일제 때 대학 졸업 후 2∼3년 동안 공무원 노릇을 했거든요. 그러니 친일파라는 겁니다.”

    일제 치하에서 보낸 청춘을 떠올리는 것일까. 아니면 후세 사람들의 ‘가혹한 평가’를 야속하게 여기는 것일까. 신회장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두 세대 전의 일을 기억의 창고에서 끄집어냈다.

    “그때 이름도 일본식으로 바꿨어요. 안 바꾸면 즉각 태평양전쟁에 강제로 끌려 갔거든요. 그랬다고 친일파라니.”



    “나도 친일했다”

    ―이름을 바꿨다고 친일파라고 규정하는 건 좀 심한 잣대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렇게 따지면 아무도 살아남지 못하죠.”

    ―그런데 신회장님과 최규하 전대통령, 박정희 전대통령의 행적은 구분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박 전대통령은 당시 독립군을 토벌하는 임무를 갖고 있는 일본군의 장교 노릇을 했습니다. 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관동군과 만주군에서 복무했습니다. 그건 차이가 있지요.

    “얼마나 차이가 날지 모르지만, 나는 다 비슷하다고 봅니다. 박 전대통령이 독립군과 전투를 벌였다든가 아니면 독립군을 억압했다든가, 그런 행위를 했다면 또 모르지요. 하지만 경비대에 있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전투할 일은 없는 것 아닙니까.”

    ―설사 독립군과 전투를 벌인 적이 없더라도 일본군 장교였던 만큼 늘 가능성을 안고 있었던 것 아니겠습니까.

    “가능성을 말하자면 공무원도 마찬가지요. 공무원은 나라에 충성하는 사람 아닙니까. 그런 점에선 다 비슷해요. 나는 24세에 대학을 졸업해 26세 여름까지 공무원을 했어요.”

    ―당시 상황에서 공무원과 군인의 길은 다르지 않습니까. 일제 때 선생이나 공무원을 한 것은 굳이 따진다면 소극적 친일행위로 볼 수 있겠지요. 당시 많은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살아가지 않았습니까. 그에 비하면 독립군의 적인 일본군에 몸담은 박 전대통령의 행위는 적극적 친일이지 않을까요.

    “그것도, 보세요. 애국적 행위에도 여러 가지가 있어요. 예를 들면 당시 조선(대한제국) 정부가 파견해 일본 육사에 들어갔던 사람들이 있는데, 육사 졸업 후 한일합방이 되는 바람에 자동으로 일본 군인이 된 사람들이 있어요. 그 사람들 중엔 만주로 가 독립운동에 뛰어든 사람도 있고 승진을 거듭해 상당한 위치까지 올라간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고 일본군이나 총독부의 고위직에 있으면서 몰래 애국운동을 도와주던 사람도 있습니다. 저 놈은 무조건 일본을 지지해서 그때 거기에 있었다, 그렇게 간단하게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군인 했으니 나쁘고, 교사 했으니 덜 나쁘고, 또 공무원 했으니 교사보다는 더 나쁘고. 그렇게 판단할 수는 없어요.”

    ―마지막으로 박정희기념사업회장으로서 기념관 건립 반대론자들에게 하고 싶은 얘기가 있다면.

    “신념을 갖고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신념을 바꿔달라고 말할 순 없죠. 다만 의견이 다르긴 하지만 서로 이해되는 점도 있다고 봅니다. 그런 마음으로 앞으로 기념사업회가 하는 일을 지켜봐 달라는 얘기를 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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