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12월호

YS정권 핵심실세가 회고하는 문민정부 5년

  • 최영재cyj@donga.com

    입력2006-07-27 13:06: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김영삼 대통령이 퇴임한 지 2년 반이 지났다.
    • 이런 시점에 ‘신동아’는 고려대학교 대통령학연구실(실장: 함성득 교수)의 협조 아래 고려대학교 정경학부 수업 ‘대통령학’에서 이루어진 ‘김영삼 정부 심포지엄’을 연재한다. 이 심포지엄에는 김영삼 전 대통령과 그를 가까이에서 보좌했던 핵심실세들이 강사로 나와 생생한 경험을 통해 문민정부의 성공과 실패를 회고하고 있다.
    이홍구

    고비용 저효율구조 바꿀 정치력이 없었다

    오늘 나는 김영삼 정부의 총리로서 겪은 경험을 토대로 해서 말씀드리는데, 적절하지 않은 게 뭐냐면 우리나라 장관도 그렇지만 총리도 자주 바뀌어요. 그래서 김영삼 대통령이 5년 동안 재임하시면서 국무총리가 6명 바뀌었습니다. 평균 1년을 못 넘겼다는 얘깁니다. 1년 이상 한 건 나하고 이수성 총리 두 사람이고 다른 사람은 몇 달씩 했습니다.

    현 정부도 2년 몇개월 됐습니다만 현 총리께서도 세 번째 총리입니다. 김종필, 박태준, 이한동 세 분인데 평균 1년을 못 넘겼습니다. 제일 오래 한 외무장관도 세 번째 장관이기 때문에, 미국의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이 불과 2년 반 동안에 3번이나 다른 장관이 와서 외무장관 회담을 하기 때문에 왜 이렇게 자꾸 바뀌나 하는 생각을 안 가질 수 없다고 했다는 것도 참고로 말씀드립니다.

    김영삼 대통령이 5년 임기 동안 뭘 하려고 했고 그 정부의 특징은 무엇인지 여러분과 함께 논의하려고 생각해봤습니다. 크게 봐서 다섯 분야에서 일을 하려고 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첫째는 민주화, 둘째 지방화, 셋째 세계화, 넷째 시장 개방, 다섯째 민족공동체 건설 문제로 얘기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면 김영삼 정부가 이런 목표를 위해서 어떤 일을 어느 정도 했는지에 대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첫째, 민주화입니다. 민주화는 생각하기에 따라서 87년 선거에서 상당한 정도 성취됐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민주화에 대해서 뭔가 남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 것은, 선거만 민주적으로 했다고 해서 민주화가 되는 거냐, 그렇지 않으면 이유야 어떻게 됐든 과거에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를 밀어낸 군부에 의해서 탄생한 정부를 그대로 정당화할 수 있느냐는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92년 선거를 김영삼 대통령은 대통령 취임사에서 문민정부의 출범이라고 얘기했습니다. 이는 과거 선거가 비민주적이었다는 얘기가 아니라 이 선거를 통해서 처음으로 전두환 노태우 박정희 대통령 같은 군부 출신이 아닌 문민 출신이 대통령이 됐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문민정부의 민주화를 위한 노력 중에 가장 큰 것을 꼽자면 전두환, 노태우 두 대통령에 관한 일을 들 수 있습니다. 이 두 분이 감옥에 가는 상황이 벌어지고 그 후에 사면복권이 됐습니다.

    민주화에 연계되는 겁니다만 둘째로 지방화입니다. 민주주의는 정치가 모든 걸 결정합니다. 이것이 국민 생활과 연계되고 가까울수록 시민의 복지와 권리가 보장되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방 자치가 중요하다는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는데, 1996년에 지방자치단체장 선거가 실시됐습니다. 이건 상당히 주목할 만한 업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아쉬운 것은 그냥 지방의회 선거를 하고 지방자치단체장을 뽑는 것에 그치지 말고 이런 제도가 과연 시민들의 자율적인 선택을 제도화하는 데 어떻게 공헌하느냐, 어떻게 운영해야 하는가, 그래서 경제·사회·문화 모든 면에서 지역사회 지역공동체를 발전시키는 것과 어떻게 연계해야 하느냐에 대해서는 충분한 논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셋째가 세계화입니다. 세계화 문제는 저로서는 특별히 관심이 많은 게 1994년 12월에 내각을 출범시키면서 제가 이끈 내각을 세계화 내각이라고 이름지었습니다. 그리고 세계화 추진위원회도 만들어서 정부 안에 위원회를 두고, 민간에도 만들어서 민간인들도 참여시켰습니다.

    왜 이런 일을 하게 됐느냐 하면 제가 총리를 했던 1995년에 우리나라가 처음으로 개인소득이 1만 달러에 달했습니다. 그리고 그 해에 처음으로 우리가 1000억 달러를 수출했습니다. 1만 달러 소득 1000억 달러 수출이 달성되고 우리가 세계 11번째 무역국이 되고, 따라서 선진국 클럽이라고 할 수 있는 OECD가 우리를 초청해서 OECD에 가입하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그때 우리가 생각했던 것은 이제는 양적인 성장에서 질적인 전환을 가져올 시점에 도달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세계화라는 것은 어느 정도 개방과 연관이 됩니다. 우리 역사나 문화를 보면 원천적으로 폐쇄성이 강합니다. 그 이유를 든다면 첫째는 지정학적인 요인입니다. 아시다시피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거의 유일하게 주변국이 다 우리나라보다 큰 나라입니다. 우리와 직접 주변국이라고 할 수 있는 중국 러시아 일본 세 나라가 얼마나 광대한 나라입니까.



    구조조정 필요성 알면서도 못했다

    우리 경제가 지금 이렇게 커져서 세계에서 11번째라고 하는데 우리 옆에 일본은 세계에서 두 번째입니다. 미국 다음으로 큽니다. 우리 땅이라는 게 광대한 대국 사이에 끼어 있습니다. 이런 나라들 사이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지정학적인 입장에서 보면, 나서면 항상 당하게 되므로 어떻게든지 우리는 조그만 벽이라도 쌓아서라도 우리끼리 피해서 사는 이런 폐쇄성이 강하게 작용할 수밖에 없었던 게 사실입니다. 그런데 아시다시피 세계는 통신 기술의 발달로 아주 좁은 하나의 세계가 돼버렸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폐쇄성을 가지고 도저히 살아갈 수 없는 상황이 됐기에 이제는 우리가 과감하게 세계 속의 한국임을 새로이 정립해야 할 시점에 왔다는 의미로 세계화를 강조하게 된 겁니다.

    넷째는 세계화와 직접 관련된 건데 시장의 개방화입니다. 시장을 닫아놓고는 살아갈 수 없는 시대가 왔기 때문에 과감하게 시장을 열어야 한다는 개방화로 간 것입니다. 이미 내가 설명한 바와 같이 우리 경제에 질적인 전환을 가져왔습니다. 그것은 요새 얘기로 해서 구조조정의 필요성을 인정한 겁니다. 그러다가 김영삼 정부 마지막에, 1997년 12월에 이른바 IMF 위기에 직면하게 돼서 김영삼 정부에서 일한 사람으로서 큰 책임을 느끼고 국민들에게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이른 것입니다. 이런 상황이 벌어질 가능성을 전혀 못 봤느냐, 정확히 봤다고 그러면 말이 안 되죠. 그러나 상당한 정도 걱정하고 진단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가장 큰 문제는 금융의 자율화, 노동시장의 경직성이었습니다. 임금이 생산성보다 훨씬 앞질러가는 문제와, 부동산 시장의 경직성 문제도 나왔습니다.

    김영삼 정부에서도 노동시장의 경직성을 타파하려고 노동법 개정에 들어갔는데 실패했습니다. 제가 국무총리 할 때 행정조정실장이 강봉균 실장인데 어려운 시기에 재정경제부 장관을 했죠. 그때도 이미 강봉균 장관이나 내 스태프들이 노동개혁과 재벌개혁을 동시에 밀고 나가야 된다는 걸 강조했습니다. 그러면 이게 고비용 저효율 구조로는 도저히 안 된다, 그래서 조직의 개편, 기업문화의 재정립 등 다 해야 되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이걸 몰라서가 아니라 알면서도 완전히 하나의 프로그램으로 만들어서 정치적으로 밀고 갈 수 있는 정치력이 부족했다는 것을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걸 역사의 교훈으로 삼아야 합니다. 아시다시피 요새도 시중에 나가보면 우리 경제 큰일났다는 얘기를 다 하고 있습니다. 우리 언론에서도 매일같이 우리 경제의 어려움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과감한 구조조정부터 처방은 다 나와 있어요.

    어떤 의미에서는 실업자를 양산하고 많은 기업을 도산시키면서도 구조조정하는 아픔, 그걸 우리 국민이 감내할 수 있는가, 어려운 선택입니다. 지난 정부가 얻은 교훈이 하나 있다면, 그것이 어렵더라도, 정치적으로 상당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시간을 놓치지 말고 밀고 가는 정치적 지도력과 결단력이 국가적으로 꼭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섯째로 통일 민족공동체 건설 문제가 남게 됩니다. 88년에 서울대에서 20년 동안 하던 교수직을 그만두고 통일원장관이 되었습니다. 내가 된 것만 중요한 게 아니라 아까 얘기한 대로 처음으로 민주화가 됐기 때문에 88년, 89년에 모든 대학, 시민단체들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통일을 논의했어요.

    그때 통일특위 위원장을 한 분이 통일민주당 박관용 의원이었는데 그 때 만들어낸 것이 민족공동체 통일방안입니다. 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은 1989년에 공식으로 우리나라 통일방안이라고 선포됩니다. 그 내용을 한마디로 얘기하면 정치 정부 국가 위주로 생각하는 것보다는 우리가 함께 사는 사회, 공동체를 상정함으로써 정치뿐 아니라 문화 사회 모든 면에서 한민족으로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데 초점을 두고 그걸 위해서 단계적으로 노력하는 겁니다. 그래서 첫 단계를 화해 협력을 위한 단계, 둘째 남북연합, 셋째 통일로 해서 3단계를 만든 겁니다. 나는 항상 세 야당 총재,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세 분을 찾아가서 상의하고 그분들 의견을 많이 들었습니다. 사실 이 문제에 대해서 제일 생각을 많이 했던 분이 그 당시 김대중 총재입니다. 그분은 그분대로 3단계 통일 방안이라는 게 있었습니다.

    그런데 94년에 가서 국내에서 다시 통일 문제에 대해서 갑론을박이 벌어지고, 북한이 핵개발을 한다는 얘기가 나와서 미국에서 흥분하고, 그래서 일이 복잡해졌어요. 94년 4월에 통일원 장관을 다시 하게 됐어요. 아무튼 들어가서 다시 논의를 해가지고 그 해 8·15에 김영삼 대통령께서 민족 공동체 통일방안이 우리의 통일방안이라고 재천명하게 된 겁니다. 오늘날 김대중 대통령께서 전개하고 계신 북한에 대한 포용정책도 그 공동체 통일방안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지금 내가 얘기한 94년에 북한 핵 문제가 나와가지고 미국에서는 상당히 심각하게 봐서 사실은 전쟁준비를 했습니다. 만일 북한이 듣지 않으면 군사적으로 핵시설을 파괴하겠다는 정도였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거기에 중재자 비슷하게 나온 것이 카터 대통령입니다. 정상회담 가능성이 있다고 카터 대통령이 와서 얘기를 해서 그 해 6월18일인가 판문점에서 나하고 북한 김용순 위원장하고 그 문제를 가지고 협상했습니다.

    요새는 어려운데 그때는 간단했어요. 하루에 모든 문제를 다 합의해서 오전 10시에 만나서 오후 8시에 합의서에 서명했습니다. 그래서 잘 됐다고 돌아와서 갈 사람도 선정하고 짐도 싸기 시작하고 이랬는데 회담 2주일 전에 김일성이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그 후 6년이라는 공백이 생겼습니다. 즉 김일성에게서 김정일로 권력이 승계되는데 6년이 걸렸다고 봐야죠. 다시 금년 6월13일날 정상회담이 이루어졌습니다. 그 6년 동안에 가장 큰 희생을 한 것은 북한 주민들입니다. 6년 동안 북한 경제는 계속 낙후를 거듭해서 문자 그대로 기아선상을 겪는 비극적인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우리 민족사에 아주 아픈 시기를 경험했다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질문: 세계화에 대해서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그 당시에도 국내 경제에 금융 문제나 경직된 노동시장, 재벌구조 등 국내 문제가 산적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상황에 세계화·개방화를 골자로 추진한다는 것은 허울 좋은 상징에 불과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니까 오히려 개혁 개방, 세계화보다는 국내 문제에 더 관심을 기울여야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답변: 국내 문제에 더 관심을 둬야 하는 건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죠. 다만 국내 문제라는 것이 세계 시장과 연결해서 생각하지 않고는 전혀 해결할 수 없는 시점에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나부터도 그 당시 세계 금융시장이 90년대에 들어가면서 얼마나 빠른 속도로 국경을 초월해서 세계화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했어요. 금융 시장의 세계화는 국경을 넘어가는 겁니다. 각 회사의 자본이 들어오기 때문에 거기에 따라서 기술이 들어옵니다.

    이제는 자신감을 가지고 우리 스스로 노력해서 이 게임에 참여해서 룰에 따라서 이기는 수밖에 없지, 거기서 후퇴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입니다. 다행히 정보화 시대가 도래하고 있는데 우리 국민은 정보화 시대에 적응해 세계 경쟁에서 살아나갈 수 있는 능력을 충분히 가지고 있는 국민이라고 나는 믿어요.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빨리 조직해서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체제를 갖추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지금 개혁해야 된다는 것이 제일 낙후된 금융입니다. 그 이유는 어디 있느냐 하면 우리 국민은 은행을 거의 정부와 비슷하게 생각해요. 정부의 연장선상에 있는 거예요. 은행에 다니는 사람은 정부에 다니는 사람이나 똑같이 관료예요. 그런데 은행은 뭐하는 곳이냐, 국민의 돈을 잘 지키고 금고에 넣어두는 곳이 아니에요. 새 시대에는 금융업이에요. 금융시장이라는 게 한마디로 얘기하면 돈으로 돈을 벌겠다는 얘기예요. 그런데 그 금융시장의 세계적인 싸움에서 밀려나면 갈 곳이 없습니다.

    둘째는 금융 내용을 보니까 쓸데없는 데다 돈을 너무 많이 빌려줬다는 겁니다. 어디다 돈을 많이 빌려줬느냐, 재벌 문제가 나오는 겁니다. 그 동안 재벌이 우리 경제 발전에 큰 공을 세웠지만 오늘날에 와서는 짐이 된단 말입니다. 이것을 빨리 개혁하지 않으면 금융이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이것도 해야 되고, 아까 얘기한 노동 개혁도 해야 되고, 물론 공공 부문도 개혁해야죠. 정부 투자기관이라는 게 관료화돼서 부실의 원천이 되잖았습니까.

    질문: 94년 당시에 김일성 주석이 남북정상회담을 하려고 한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답변: 89년에 독일이 통일되고 유럽하고 러시아가 다 변했단 말이에요. 우리하고 국교를 수립했거든요. 노태우 대통령 모시고 그 당시에 소련에 가서 고르바초프를 만나서 국교를 수립했거든요. 김일성 주석이 적절한 판단을 했다고 보는 건, 세계가 변하고 공산권이 무너진다는 것을 알았을 뿐만 아니라 수십년 동안 계속된 남북대결에서 이제는 확실히 남쪽이 우세해졌다는 것을 인정했다고 봅니다.

    그것은 내 생각입니다만, 미국과 얘기하더라도 한국이 반대하면 아무것도 안 됩니다. 아무리 미국하고 합의하고 중국하고 얘기를 해도 한국이 반대하면 안되기 때문에 미국과 풀어나가기 위해서는 한국과 공존 공생하는 길을 찾아야 한다고 판단했다고 봐요.

    질문: 94년 당시 모든 조건을 다 들어줘서 김일성의 서울 답방을 이루려고 했지만 북쪽이 안 들어줬다고 하는데, 그런 측면에서 볼 때 김정일 위원장 답방도 어렵지 않습니까?

    답변: 남북관계는 한 걸음씩 나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얘기하기 상당히 어렵습니다. 일단 그때 핵문제를 비롯해 심각한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평양에 가서 어느 정도 진전시키는 것이 급선무였고 그 문제는 대통령께서 김일성 주석과 많은 걸 얘기해야 되겠다고 했던 겁니다.

    질문: 국무총리의 역할이라는 것이 대통령의 위상에 따라서 제한받는다고 말씀하셨는데, 1년 이상 국무총리를 하신 분으로서 제도적으로 권한을 정착시키는 방안을 가지고 계신지, 이한동 총리는 인사청문회를 했는데 이것이 헌법의 의도와 연관이 되는지에 대해서 말씀해주십시오.

    답변: 내 생각은 1948년에 헌법을 만들었던 분들의 의도를 살려서 총리 중심으로 내각이 운영되는 것이 좋다는 거예요. 다만 우리나라의 특성이 있기 때문에 개헌은 필요 없다고 생각해요. 지금부터 대통령이 되는 분이 총리에게 상당한 정도의 권한을 위임하면 되는 거예요. 이건 대통령 마음이에요. 예를 들면 제일 중요한 것이 인사기 때문에 총리를 뽑는 건 대통령이 결정하시라 이거예요. 그 다음에 내각은 총리가 짜가지고 오도록 하고 최종적인 결정은 대통령이 하더라도, 이런 관행이 서면 상당히 달라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질문: 97년 신한국당 대통령 경선후보 출마 당시에 국무총리를 당 소속 국회의원들이 선출해서 각료 제청권이나 내각 통할권을 총리에게 줘서 내정을 총리가 책임을 지도록 책임 총리제를 주장하셨습니다. 국회의원들이 선출한 총리는 우리같이 정치 문화에서 철학이 부족한 나라에서는 좀 문제가 있지 않을까 생각하는데 거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답변: 문제는 좀 있을 거예요.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절대 타협을 못 한다는 전제에서 시작하면 아무 일도 못 해요. 그런 편견을 가지고 자꾸 일을 그렇게 꾸미기 때문에 정말 타협이 어려워지는 겁니다. 의원내각제는 타협을 안 하면 국정이 이루어지지 않으니까 할 수 없이 타협을 합니다. 지금 제도는, 사실은 선거만 하고 나면 그 다음 선거까지는 국민이 직접적인 영향을 주기가 굉장히 어려워요. 그래서 의원들이 의원내각제 정신에 맞게 내각을 운영하면 된다고 말합니다. 어떻게 보면 이상일 수도 있는데 나는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질문: 문민정부가 IMF를 맞아들인 원인에 대해 말씀해주십시오.

    답변: 우선 97년의 위기를 외국에서는 한국의 위기라고 하지 않고 아시안 금융위기라고 부르고 있어요. 태국 인도네시아에서 그 해 여름에 위기를 맞았는데 우리는 괜찮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만큼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두 가지 문제가 있었어요. 하나는 경제지표가 상당히 좋더라도 위기가 가지는 특별한 다이내믹스가 있어요. 그래서 시장경제에서는 별안간에 모든 사람이 이게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지배적이 되면 안 됩니다.

    시장이라는 게 아주 무서운 거예요. 시장의 다이내믹스가 얼마나 무서운 건가, 돈이 빠져나간단 말이에요.

    97년 12월 수준에서 우리 경제가 국제 시장이나 국제 금융과의 연계가 뒤처지고 있었기 때문에 위기에 처하면 짧은 시간에 국가적인 환란으로 옮겨갈 수 있다는 걸 우리가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 충분히 대처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질문: 국무총리로 재임하실 때 특별히 어떤 일을 하셨는지 못 들었던 것 같고, 김영삼 대통령이 왜 선생님을 국무총리에 임명하셨는지, 그리고 인사권을 말씀하셨는데 실질적으로 총리 하실 때 어느 정도 권한을 가졌다고 생각하십니까?

    답변: 몇 퍼센트라고 얘기할 수는 없는데 총리가 많은 인사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고 상당히 제한돼 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어떠냐고 대통령이 묻는 경우도 있지만 결국 자주 만나야 깊게 상의할 수 있는데 총리는 불과 1주일에 한 번 가서 대통령하고 상의를 하는데 비서실은 하루종일 근처에 있기 때문에 대통령에게 아이디어를 주기에 좋은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있죠.

    그리고 내가 무슨 일을 했냐고 물으셨는데, 총리는 가야 할 곳이 많습니다. 우리나라에 각종 식에서부터 전국적으로 행사가 많은데 대통령이 다 갈 수 없으니까 거기 뛰어 다니는 게 총리 일인데 제일 큰 일이 사고가 났을 때입니다. 내가 있을 때 대구 지하철이 무너졌지, 삼풍이 무너졌지, 이런 게 있을 때 누군가 책임져야 될 것 아니에요. 이건 전적으로 내 잘못이다, 하고 나서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그걸 총리가 합니다.

    안기부 축소로 국가신경 마비됐다

    문민정부를 실패한 정권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는 지난 정권을 평가하는 것은 어느 정도 기간이 지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아직도 우리 정치 사회가 후진성을 면치 못하고 있고, 나 아닌 다른 사람의 잘못을 비교해서 자기가 스스로 평가를 받으려고 하는 의도를 갖고 있는 정부가 많을 뿐만 아니라 사안마다 그야말로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입장에서 평가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문민정부가 탄생한 당시의 상황을 보면 개혁과 변화라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시대적 사명이었습니다. 1980년 중반에 고르바초프가 등장하고 90년대 초반 동구권이 무너지고 탈냉전시대를 맞이하고 민주화를 바라는 전세계의 기류를 봤을 때 우리도 이미 안보이데올로기에 매달릴 수는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정부에 들어가보고 변화를 추구해 나가고 기존 질서를 깨부수고 개혁을 추진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저는 누구보다 깊이 체험했습니다. 정말 개혁은 혁명보다 어려운 것입니다. 혁명은 총칼로 모든 것을 일시에 단절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개혁은 국민적 동의를 바탕으로 해야 하고, 이것이 점진적이고 체계적으로 진행해야 합니다.

    아무튼 이 변화와 개혁을 추구할 수밖에 없었던 문민 정부는 여러 가지 개혁 프로그램을 만듭니다. 우선 지난 군사정권 동안에 함몰되었던 우리 정권의 정통성 대표성 도덕성을 복원하는 일, 다시 말하면 지난 역사를 재평가하는 일, 5·16, 12·12사태, 5·17, 5·18을 어떻게 평가할 것이냐, 이걸 정리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역사 재평가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개혁과 변화를 주도하기 위해서는 새 시대에 맞는 인물을 써야 한다는 의미에서 중앙정보부장, 지금의 국정원장에 대학교수 출신을 기용합니다. 통일원장관에 가장 진보적인 학자 중 한 사람을 기용합니다. 이것은 과거와 단절하는 가운데서 새로운 출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과거 군사정권 밑에서 오랫동안 유지해왔던 관행은 이른바 정치군인을 양산했습니다. 문민 정부는 정치군인을 숙군하고 야전지휘관을 앞세우는 일을 했습니다. 청와대가 권위적인 곳이 아니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많은 개혁을 했습니다.

    그리고 안기부, 기무사 등을 축소하고 개편했습니다. 또 광주 사태와 관련된 자를 처벌할 수 있도록 5·18특별법을 제정했습니다. 그 모든 것이 개혁과 변화를 추구하는 구체적인 움직임으로 기록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과거에 오랜 정경유착관계를 끊기 위해서 대통령이 정치 자금을 받지 않겠다고 하는 선언을 개인이 솔선수범하는 방향으로 채택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정치 자금을 받지 않는 것을 제도화하는 방법을 강구했어야 옳지 않으냐 싶습니다만 어쨌든 우리는 위로부터의 개혁을 시도했기 때문에 일방적 선언과 솔선수범으로 추진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제도적으로 뒷받침한 것이 공직자 윤리법 개정입니다.

    또 돈 안 드는 깨끗한 정치를 위해서 정치 관계법 입법을 추진했습니다. 또 당시 모두가 요구했던 실명제를 실시했습니다. 이런 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 국민의 지지를 90%까지 얻기도 했습니다. 이런 정권이 말기에 가서 어떻게 해서 국민들로부터 그처럼 많은 비난을 받게 되고 지금 이 시간에 욕을 먹게 됐느냐, 이것이 모든 정치인들의 관심일 것이고, 정치학을 공부하는 분들에게도 연구 대상이 되리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밝혀내야 할 것입니다.

    첫째 제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문민정부의 태생적 한계입니다. 그것은 노태우 정권과 김종필씨가 이끄는 소규모 정당과 당시 통일민주당의 김영삼씨가 이끄는 3당 통합 때문입니다. 하나의 정권이 탄생하고 그 정권이 나름의 정체성을 가지고 정치 개혁을 하려면 생각이 같은 그룹이 정권을 맡아야 되는데 비판 대상이었던 군사정권과 유신잔당이라고 얘기했던 김종필씨와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던 것, 이것이 태생적 한계입니다.

    제가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들어가서 맨 먼저 과거 청와대가 한 일에 대한 기록을 찾기 위해서 기록서를 찾았습니다. 가보니 그 안에 기록보존 시설은 간략하게 돼있는데 기록은 거의 없습디다. 저는 충격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어떻게 해서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가장 중심부에 있는 청와대에 과거 기록이 하나도 없느냐고 담당직원을 추궁했더니 전직 대통령이 가져갔다고 했습니다. 가져가는 것을 어떻게 용납할 수 있느냐, 가져가는 걸 어떻게 하겠습니까라고 대답하더군요.



    YS정부의 ‘태생적 한계‘

    우리 역사는 단절의 역사였던 것입니다. 우리 국가 발전이 이런 점에서 문제가 있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통치 사료실이라는 그 방은 총무수석 산하 통치 사료비서관이라는 명칭으로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날로 개정해서 비서실장 직속으로 통치사료비서관을 두었습니다. 그 이후에 모든 기록을 남기도록 조치를 취한 바 있습니다. 그 조치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과거에 우리가 가지고 있던 모든 역사는 후세에 아무런 교훈이 되지 아니하고 계속 단절되고 청산의 대상일 뿐이었다는 것을 참고로 여러분에게 말씀드립니다.

    역사 재평가를 하는 과정에 5·16을 쿠데타로 규정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우리가 그러고 나니까 지금은 여당이 됐습니다만 당시 야당이 5·16이 쿠데타라면 쿠데타의 주모자 중 한 사람인 김종필은 어떻게 해서 당신 당에 있느냐, 그 사람을 쫓아내고 퇴진을 요구하라고 논란이 벌어졌습니다.



    대통령의 ‘무한책임’이 문제

    우리로서는 대단히 아픈 대목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정권이 또다시 JP 덕으로 당선되는 역사의 아이러니가 재연됐습니다. 우리나라 대통령은 한결같이, 나는 지금 이 시간까지도 예외가 없다고 봅니다만, 대통령이 되면 모든 권한은 내가 가지고, 모든 책임은 내가 가지고, 모든 것을 내가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정치를 어렵게 만드는 가장 큰 요인 중에 하나입니다. 장관, 차관, 수석 모두가 모든 책임은 대통령에게 있다고 하는 잘못된 인식부터 고쳐야 된다는 것을 저는 경험했습니다. 한 나라의 운명이 대통령 한 사람에게 달려 있으면 얼마나 위험합니까. 그래서 우리가 민주주의 제도에서 가장 중요한 권력분립의 원칙을 채택하고 있습니다. 권력분립이 가장 중요한 것은 다른 제도적인 측면도 있지만 저는 야당과 언론의 역할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둘째는 대통령의 성격 문제입니다. 아무리 그 사람이 민주주의 교육을 받고 민주적인 의식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그분이 독재적인 성격을 갖고 있으면 독재로 기웁니다. 대통령 이야기는 그만하고, 제가 어차피 과거 대통령 비서실장의 자격으로 이 자리에 불려왔기 때문에 비서실장의 역할은 뭐냐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비서실장은 정책 결정을 놓고 부처간, 기관간, 또는 수석간에 이견이 노출됐을 때 조정하는 일을 하는 겁니다. 크게 볼 때는 대통령이 할 일이지만 우리나라 정부에서는 비서실장 차원에서 처리되는 일이 많습니다. 물론 장관급, 차관급이 실무적인 협의를 거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조정이 안 될 때 최종 결정을 앞두고 비서실장이 조정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대통령이 미처 챙기지 못한 부분을 챙기는 것도 비서실장 몫입니다. 그 다음에 청와대 내에서 비서실 조직을 조화, 통제, 조정하는 일도 합니다. 대통령의 국정 의지나 업적에 대해서 홍보도 합니다. 그리고 국민 여론을 대통령에게 보고합니다. 저는 굉장히 중요한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만, 대통령의 판단에 대해서 제어하는 기능을 비서실장이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대통령에 대한 충성심을 통해서 대통령을 보호하는 기능을 가져야 합니다. 공은 대통령에게, 과는 본인에게라는 말이 있습니다. 대통령을 위해서 악역을 맡는다는 얘기입니다.

    다음은 개혁문제입니다. 대한민국 국민뿐만 아니라 어느 나라도 다 마찬가지입니다만 개혁에 대해서 국민들은 총론은 다 찬성합니다. 그러나 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 가장 어려운 게 뭐냐면 각론 부분에 가서 개혁을 국민들이 대단히 싫어하고 저항한다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사례를 한 가지 말씀드리면 실명제입니다. 그 동안 경제 정의를 실천하고 소득별로 종합소득세를 내기 위해서는 실명제가 필요하고 실명제야말로 경제 정의 실현에 최고의 무기라는 사실을 모든 국민이 알고 있었고 언론도 그렇게 주장했습니다. 대통령 선거 때 후보 모두가 실명제를 실시하겠다고 공약했습니다.

    실명제를 실시한다고 전격적으로 발표된 날 전국민과 모든 언론이 환영했습니다. 정말 개혁다운 개혁을 한다는 평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5~6개월이 지나자 국민들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현금을 실명화하고 통장을 자기 이름으로 만드는 것에 대해 불만을 터뜨리기 시작합니다.

    지금은 흐지부지 반쪼가리가 돼있습니다. 종합소득세를 낼 수 없게끔 돼있습니다. 이 실명제를 봐도 개혁이라는 것이 무척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개혁은 개혁을 추진하는 세력이 확보돼 있고, 그 개혁 추진 세력을 뒷받침할 수 있는 저변세력을 계속 확대해나가야 하는데 그것에 실패했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위로부터의 개혁이 아래로 불길처럼 번져야 성공하는데 한 사람의 개혁에서 끝나버리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위로부터의 개혁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또 하나 대북정책 문제와 관련해서 많은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김영삼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어떤 동맹국도 피보다 중요하지 않다고 얘기했습니다. 김일성 주석과 백두산에서든 한라산에서든 만날 용의가 있다고 정상회담에 강한 의욕을 내비칩니다. 그리고 93년 3월9일에 북이 그토록 요구했던 비전향 장기수 이인모 노인을 무조건 송환하는 조치를 취합니다. 이것은 새로운 대화와 협력의 시대를 열겠다는 강한 메시지였습니다.

    그런데 이틀이 지난 3월11일 북한은 NPT 탈퇴를 선언합니다. 그 동안 민족주의적 패러다임에서 대북문제에 접근하려다가 NPT 탈퇴가 선언되고 핵 보유 사실이 오르내리자 그때부터는 다분히 국가 중심적으로 북한하고 대결할 수밖에 없는 양상이 벌어집니다. 이것이 대북 문제에 대해서 지난 문민정부가 갈팡질팡했다고 지탄받는 가장 큰 요소입니다.

    아무튼 당시 몇몇 언론은 우리 문민정부 안에 간첩이 있다, 좌파가 있다, 빨갱이가 있다는 등의 비난을 엄청나게 퍼부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대한민국은 전세계에서 최고의 반공국가입니다. 우리가 비교적 진보적인 인사를 쓴다고 해서 많은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과정을 겪어서 오늘에 이르렀기에 좌파니 진보주의자니 하는 비판은 나오지 않습니다. 많이 여과됐기 때문입니다. 그 여과과정에 문민 정부가 존재했습니다.

    대미외교 문제만 해도 그렇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강릉 무장 간첩사건인데, 문민정부는 북한으로부터 재발 방지 약속과 사과를 받아야겠다고 강력하게 요구합니다. 미국은 적절하게 화해하는 방향을 선택했습니다. 이로 인해서 한미간 갈등이 엄청나게 심화되었습니다. 여러분도 기억하시겠지만 패트리어트 미사일 같은 무기를 구입하라는 미국의 압력도 엄청난 갈등 요인으로 작용했습니다.

    제가 대통령을 모시는 과정에 국가 지도자는 어디에서 배우는가, 하고 자문해본 적이 있습니다. 한 나라의 정상은 다른 나라의 정상으로부터 배운다는 것을 저는 경험했습니다. OECD가입이나 세계화 운동을 적극 추진하는 문제는 국제회의에 다니면서 체험하고 그분들을 통해서 깨달은 겁니다. 국내에서는 그렇게 큰 문제가 되지 않았던 점을 그런 데서 배우고 알게 되는 것입니다.



    대통령병 중 첫째는 ‘지나친 자신감‘

    정권 말기에 우리가 노동 관계법과 금융 관계법을 국회에서 통과시키는데 야당의 극렬한 반대에 부딪혀 날치기를 하게 됩니다. 날치기 통과시키면서 국민들로부터 엄청난 저항을 받았습니다. 그 이후에 야당과 협상을 통해서 이 법을 무효화시켰습니다. 이 정권이 들어서서 똑같은 법을 국회에서 다시 통과시켰습니다.

    문민정부가 그 법을 통과시키려고 한 것은 IMF와 같은 위기를 사전에 막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렇게 중요한 의미가 있는 법이라면 충분히 국민을 설득하고 홍보하고 야당을 이해시키고 그런 가운데서 이 법을 통과시켜야 하는데도 명분 있는 법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밀어붙이려고 하는 생각 때문에 저항에 부딪힙니다.

    바로 이 자리에 와서 김영삼 전 대통령이 이 법을 김대중씨가 반대했기 때문에 IMF는 김대중씨 때문에 오게 됐다 이렇게 얘기한 것으로 신문에 보도된 것을 봤습니다. 이 법은 그때 당연한 법이었고 필요한 법이었습니다.

    그 다음에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고 난 뒤에 많이 논의된 위기관리 시스템에 관해 참고로 말씀드리겠습니다. 통치권자는 갖가지 위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이제는 전문화되고 다양화된 사회입니다. 고대 희랍처럼 한 사람의 철인 정치인이 모든 정치를 담당하는 시대가 아닙니다. 하지만 간혹 내가 모든 것을 결정하면 다 할 수 있다는 자만심을 가진 지도자를 봅니다. 이것이 가장 위험하다는 겁니다. 위기를 관리하기 위해서는 어떤 상황이 벌어지면 그 상황을 지도자에게 보고하고, 그러면 다시 이 상황을 어떻게 대처할 것이냐, 관계 부처, 관계 인사, 이해관계자들이 모여서 충분히 논의하고 그 결과를 지도자에게 보고하면 지도자는 그 결론을 가지고 선택하거나 결론 자체에 대해서 동의합니다. 그래서 이것을 집행하는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그런데 그 동안 우리나라 대통령들은 대부분 사건이 발생하여 보고하면 대책회의나 관계자 회의 없이 바로 지시를 내립니다. 지금 우리나라 같은 대통령 중심제에서 대통령의 지시는 수정이 불가능합니다.

    그렇게 정책이 결정되면 위기관리가 제대로 안 된다는 말이 나옵니다. 청와대 비서실에 300여 명의 직원이 있습니다. 그렇게 많은 인원이 근무한다는 것은 어떤 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각 분야의 전문가가 다 모여 있다는 이야깁니다. 그런 인재를 잘 활용해야 합니다. 정부 부처에 많은 전문가가 있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우리 문민정부가 들어서서 대북정책에 대해서 의견이 분분했습니다. 안기부장, 통일·외무부장관, 외교안보수석 등의 생각이 너무 달랐습니다. 그래서 통일안보조정회의라는 것을 대통령 직속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때는 거의 매일 조정회의가 열렸습니다. 여기서 결정된 결과를 대통령에게 얘기하고 시행했습니다.

    제가 늘 이런 얘기를 합니다. 대통령이 된 뒤 1년만 지나면 대통령병이 몇 가지 생긴다는 말을 합니다. 그건 뭐냐면 제일 먼저 지나친 자신감입니다. 그래서 대통령들은 내가 하는 일은 모두 잘한 거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정책결정을 경솔하고 졸속으로 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둘째 병은 뭐냐, 엄청난 업적을 남기고 싶은 욕심입니다. 민족의 지도자도 되고 싶고 통일 대통령도, 개혁 대통령도 되고 싶고 이러는 사이에 지나친 업적을 만들어보려는 욕심이 생깁니다. 이런 것들이 많은 문제를 낳는 원인입니다. 일은 시스템이 해야지 개인이 하면 안 된다는 교훈이 아닌가 싶습니다.

    대통령의 업무가 과중한데요, 대통령의 업무가 왜 과중한가에 대한 제 경험입니다. 우선 수석이 됐든 장관이 됐든 자기 치적을 대통령한테 홍보하려는 생각을 갖습니다. 자기를 높이고 자기가 훌륭한 참모로 인정받기 위해서인지 모르지만 자기 치적을 자랑하고 과시하려는 데서 불필요한 보고가 많아집니다. 둘째는 책임을 면하기 위해서 보고를 합니다. 대통령한테 보고하고 승낙받은 일이라고 하면 아무도 시비를 못 걸기 때문입니다. 그 사안을 집행하기 위해서 힘을 싣기 위한 방법이지만 책임을 면하는 방법도 됩니다.

    또 하나는 청와대에 있는 간부들은 자기 권한을 확대하기 위해서 일을 청와대로 끌어오는 경향이 있습니다. 저는 대통령이라는 사람은 일하는 시간보다는 사색하는 시간이 많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너무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다 보면 판단을 그르칠 가능성이 많습니다.

    시간이 다 되어가니까 제가 여러분에게 문민정부에만 해당하는 한 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문민정부는 안기부의 권한을 크게 축소시킵니다. 특히 정치 사찰을 못 하게 합니다. 일반부서의 간섭과 정보활동을 중단시킵니다. 인체로 말하면 과거에는 중앙정보부가 신경계통을 모두 장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그런 일을 못하게 했습니다. 국회 출입도 못 한다, 언론사 출입은 더욱 못 한다, 정치 사찰 안 된다, 대공 업무, 국제 정보 외에는 하지 말라고 지시합니다.

    그러니까 인체의 모든 부분에 골고루 번져 있으면서 보고하고 제어하고, 간섭하던 조직이 일시에 마비되는 현상이 일어납디다. 보고가 제대로 안 되고 누군가가 이 사람의 행적을 감시 감독 제어하는 역할이 없어졌습니다. 청와대에 앉아 있어도 정확한 정보가 올라오지 않아요. 안기부장이 1주일에 한 번씩 와서 독대를 하는데 대북 문제, 국제 문제, 국가안보 문제 그런 것만 보고하게 하고 다른 건 못 하게 했습니다. 과거에는 기무사령관이 정치권이 어떻다는 것을 보고했는데 그걸 못 하게 했어요. 기무사령관은 특별한 사안 이외에 대통령한테 보고한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제가 초기에 보고를 받았죠. 경찰청이 보고하는 정치 정보 일반보고를 받지 않고, 간혹 내무부 장관이 중요한 부분만 보고했습니다.

    YS는 이른바 정보정치를 싫어했습니다. 그래서 정보에 어두워졌습니다. 어두운 정보의 공백을 어떻게 메웠느냐, 이른바 비선, 사조직, 친인척이라든지 이런 사람을 통해서 그 공백을 메우기 시작한 겁니다. 여기서 여러분이 다 아시는 김현철 문제도 발생했습니다.

    적어도 한 정권이 5년 임기를 마치면서 그 정권에 대해서 정확한 평가를 내리고 그것이 다른 정권에 좋은 교훈이 되고 반면교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새로운 정권이 들어설 때마다 구정권의 부도덕성과 잘못을 강조해서 자기 정부를 상대적으로 평가받으려고 하는 잘못된 관행이 이 땅에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얘기한 이와 같은 내용들이 소상히 평가되지 않고 있습니다.

    질문: 김영삼 전대통령께서는 현철씨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말씀하셨는데, 저는 인사권에 대해서 청와대 비서실장이나 수석들보다 더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알고 있거든요.

    답변: 오늘 그것이 그 질문이 있으리라고 예상했습니다. 김현철이라는 사람이 어느 정도 권력을 행사했느냐, 얼마나 정치에 관여했느냐에 대해서 솔직히 제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지금 알려진 것만큼 현철씨가 그렇게 많은 일을 저질렀느냐, 저는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과장된 표현을 너무 많이 씁니다. 제가 정확한 내용을 대통령한테 질문한 적도 있습니다만 현철씨가 한보 사건에 다 관련되고 몸통은 현철이고 깃털은 인길이라고 생각하죠. 저는 김현철이 한보 사건하고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확신합니다. 저는 김현철씨하고 사이가 나쁜 사람입니다.

    한보말고, 특히 인사 문제에 관여한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알려진 것처럼 절대적인 권한을 갖지는 않았습니다.

    질문: 대통령과 비서실장 수석비서관의 관계에 대해서 두 가지를 묻고 싶은데요, 하나는 기획조정비서관제가 신설되는 과정에 비서실장으로서 얼마나 대통령께 직언하셨는지? 비서실장과 수석비서관과 관련해서 수석회의에서 비서실장이 대통령에게 문제제기를 여러 번 하셨다고 했는데 수석비서관과 비서실장이 종적인 관계인지, 횡적인 관계인지 궁금합니다.

    답변: 기획조정비서관직은 제가 비서실장으로 있을 때 만들었습니다. 개혁 업무를 추진하는데, 아까 내가 개혁 주도세력이 있어야 된다고 했는데, 청와대 한 군데에 기획을 담당하고 이를 계획하는 부서가 있어야 합디다. 각 수석실에서 일을 추진하니까 중복되거나 마찰을 일으키는 측면이 많았습니다.

    다음으로 수석비서관과 실장의 관계가 종적인 관계인지 횡적인 관계인지 물으신 것 같은데 제가 비서실장으로 들어갈 때에는 4선의 국회의원직 사표를 내고 들어갔습니다. 장관직 비서실장으로 들어갔고 모든 수석은 차관직이었습니다. 직위로 보나, 당시 상황, 대통령 신임으로 봐서 그것이 횡적이냐 종적이냐 하는 건 알 수 있는 상황 아니겠습니까.

    질문: 비서실장의 역할을 말씀하셨는데요, 특히 인사 문제만큼은 대통령을 제대로 보좌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비서실장이라고 하면 제2인자로 인식되고 권력을 행사하고 있는데 할 일을 제대로 못 했다고 생각하거든요.

    답변: 대통령의 성격이 인사 문제에 관해서는 일절 누설하지 아니하고 단독으로 결정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물론 차관급에 대해서는 저하고 의논한 경우가 많습니다만 대통령 성격에 따라서 요직의 인사는 극비에 부치고 혼자서 독단적으로 결정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을 효과적으로 제어하지 못했다는 걸 시인합니다.

    그런 기능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대통령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고 무슨 얘기를 해도 기분 나쁘지 않을 정도로 아주 가까운 위치에 있는 사람이 비서실장을 하는 것이 가장 좋다고 봅니다. 만약에 전혀 관계없는 사람을 유능하다는 이유로 데려다 쓰면 직언을 못 하죠.

    질문: 김영삼 정권이 가장 큰 치적이라고 내세우는 것이 실명제입니다. 아까도 말씀했다시피 종합소득세가 과세가 안 된다면 의미가 없다고 봅니다.

    답변: 종합소득세 부분은 우리 정권에서 이루어진 게 아니고 IMF 이후에 현 정권에서 유보한 것입니다. 실명제가 종합소득세를 갖추지 않았기 때문에 미완의 작품이라고 하지만 저는 실명제가 갖는 의미는 아직도 살아 있다고 봅니다.



    이후락에게서 3시간 조언 들었다

    질문: 한국의 대통령제 아래서 독단을 피하기 위해서는 대통령이 내각을 중심으로 국정을 처리해 나가야 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비서실장의 권한이 늘어난다면 정책 결정에 독단적인 성격이 강해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답변: 아침에 대통령께서 등청하면 1시간 정도 비서실장하고 독대합니다. 밤새 대통령께서 생각한 것을 말씀해주시고, 비서실장이 그 전에 일어난 것, 대통령이 모르는 여론들을 정리했다가 아침에 보고하고, 그 보고에 의해서 지시를 받는 것이 제 재임 2년 동안의 관행이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보고하고 얘기 듣고 하는 것이 내 손에서 종결되는 것이 아니라 수석회의로 넘어갑니다. 수석회의에 가서 대통령의 말씀을 가지고 얘기합니다.

    이처럼 비서실장은 모든 부처와 연결되는 사람입니다. 대통령이 일일이 장관하고 만나서 얘기하기는 어렵습니다. 중요한 것은 관계 장관을 불러서 지시하고 관계 장관 회의를 열지만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일은 비서실장이 전합니다. 비서실장이 모든 업무를 조정한다는 건 바로 그런 얘깁니다.

    제가 17대 비서실장인데 전임 비서실장 중에 비교적 잘한 분이 몇 분 있습니다. 제가 비서실장으로 임명된 후에 그분들을 다 만났습니다. 제가 이후락 비서실장도 만났습니다. 이후락씨는 쿠데타 정권에서 중앙정보부장 했다고 대통령이 아주 경멸하는 사람 중에 한 사람입니다. 제가 밤에 만나서 3시간 동안 얘기를 했어요.

    정책의 일관성, 정책의 결정과정에 대한 얘기를 해주셨는데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그렇게 얘기를 많이 들어봐도 청와대의 효율적인 운영을 위해서는 비서실장이 장관과 대통령의 중간에서 원활한 역할을 해주는 것입니다.

    대통령 중심제인 나라 중에 우리나라에만 국무총리가 있습니다. 내각책임제를 가미한 것이 국무총리입니다. 국무총리는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자칫 잘못하면 국무총리가 무슨 존재냐 하는 회의를 가질 수 있습니다. 비서실장 공관에서 국무총리 공관으로 2분이면 가는데 시간이 어지간한 날은 제가 찾아가서 청와대 분위기를 얘기하고 총리 의견을 듣고 청와대에 반영했습니다.

    비서실장의 기능은 그렇게 중요합니다. 대한민국 국무총리가 내각을 통괄하고 국무위원을 추천하고, 이렇게 막강한 권한이 나와 있죠. 그런 일을 다 하는 것이 비서실장입니다. 그러니까 권한이 막강할 수밖에 없습니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