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12월호

오스트레일리안 드림을 넘어서

  • 김상순

    입력2006-07-28 11:5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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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8년 4월

    누구나 아침엔 막연하나마 기대감이 찾아들게 마련이다. 눈이 오거나 비가 오거나 햇살이 쨍하거나. 유난히 밝은 햇살이 방 안을 가득 채운 4월 어느 날, 아침신문을 훑어보던 나는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호주 사업이민 모집’.

    “바로 이거구나!”

    심호흡을 내뱉으며 나도 모르게 낸 소리다. 8년이나 기다려 형제초청 미국이민을 수속중이던 나는 그날로 미국을 포기하고 호주로 급선회했다.

    74년 해양대학을 졸업하고 2등 기관사로 승선했다. 첫 기항지는 시드니에서 200km 떨어진 뉴캐슬이었다. 부두 노동자들의 파업으로 석 달이나 그곳에 정박해 있는 동안, 나는 호주가 어떤 나라이고 호주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를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다.



    73년에 백호주의를 포기한 나라, 스위스와 국민소득 선두다툼을 벌이고, 요람에서 무덤까지 사회보장제도가 완벽하게 정비된 나라. 남한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인구가 그 80배가 넘는 땅덩이에서 풍부한 자원을 가지고 동물과 자연을 인간처럼 사랑하며 살아가는 나라.

    더구나 선진 민주주의 국가!

    그 당시 한국 사람들에게 민주주의라는 말처럼 가슴 설레는 말이 또 있었을까. 유신헌법이 서슬도 퍼렇게 버티고 있고 육영수 여사가 저격되던 그 무렵의 우리 상황과 비교한다면 호주는 말 그대로 별천지였다.

    툭 하면 시위대의 투석과 전경들의 최류탄으로 도심이 막혀버리는 길 한복판에 서서 어느 편에도 가담하지 못하는 내 비겁에 절망해야 했고 어느 특정학교 동창 모임을 방불케 하는 국무위원 명단이 발표될 때마다 오만상을 찌푸리며 백성일 뿐이라는 주제파악을 하느라 한동안 애를 먹어야 했다.

    나는 8년간의 해상생활 끝에 강남에 아파트 한 채를 마련했다. 그것도 1년 만에 귀국하는 수출선에 고용돼 목숨을 내걸고 파도와 싸운 끝에. 내 집을 가졌다고 우쭐대다가 공무원으로 출발한 친구가 바로 앞 동에 더 큰 평수의 집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느낀 것은 허탈감이 아니었다. 성실이나 노력은 결코 장래를 보장하지 않는다는 한국적 씁쓸함이었다.

    테트라 팩 엔지니어로 매주 이용하는 고속도로에선 교통경찰관이 길목을 지키면서 벌금을 받았다. 자식의 장래를 위해 허리가 휘어지는 고통도 마다않고 지불한 엄청난 과외비, 담임선생에게 꼬박꼬박 내민 봉투는 아내와 내가 모르고 살던 추한 점을 하나씩 들춰내는 꼴이었다.

    언젠가 자식들이 ‘왜 남들처럼 큰 평수에 고급차도 굴리지 못하고 고액과외도 시켜주지 못하면서 절약만 가르치려 하느냐’고 물었을 때, 그것을 아비의 무능력 탓이라고 일러주는 대신 한국의 사회구조적 모순 때문이라고 변명할까봐 두려웠다.

    내가 태어난 땅, 온전한 인간으로 품어주기보다 부딪치며 타협하고 살아야 할 일상의 염증으로 원인 모를 아픔을 지불해야 하는 땅, 내일의 꿈과 희망을 붙잡고 싶어하는 사람에게는 결실보다 불필요한 이자 상환을 먼저 염두에 두어야 하는 땅, 그래서 나는 뿌리 박고 악착같이 살기보다 내 땅을 사랑할 수 없는 부유물일 뿐인지 몰랐다.

    중학교 때부터 서부영화라면 빼놓지 않고 몰래 보았던 나는 그때부터 서구문명을 동경하게 되었는지 모른다. 거기에다 해양대학을 졸업한 후 70년대의 한국 상황은 선진국 항구를 드나들며 이민이라는 ‘상상임신’으로 헛배를 실컷 불려놓고 출산 기회만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감히 말하건대 나도 제대로 살아보고 자식에게도 나은 터전을 마련해주고픈 욕구가 절실했다.

    나는 우여곡절을 겪으며 1년 반 만에 지루한 이민수속을 끝냈다. 불과 서너 달 후에 있을 부장 진급을 앞두고 8년을 근무한 회사를 그만두었다. 정든 아파트와 몇 년 뒤면 값이 뛸 것이 확실한 땅도 헐값에 처분했다.

    해외 송금용 자금출처 확인 서류를 세무서에 제출했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처리기한을 몇 차례 넘기고도 발급받을 수 없었다. 담당자는 요건을 설명하며 특별한 지적 없이 헛걸음만 시켰다.

    “당신은 이민 잘 가는 거야. 그렇게 순진해서 어떻게 살겠어…. 서류철에 5만원만 끼워봐. 당장 나올 테니.”

    나와 함께 이민을 신청했던 친구가 핀잔을 준 말이다. 인지대만 갖고 대한민국의 세무서원에게 자금출처를 확인받을 수 있다고 믿은 내 발상이 한심하다는 설명이었다. 친구 말은 사실이었다.

    이마엔 땀이 흐르고 콧등이 시큰했다. 그래도 한번쯤 망설여보고 싶었는데…. 내 나라를 버리고 가는 내 모습을 조금은 부끄럽게 여기고 싶었는데…. 그러나 그 순간 나를 사로잡은 것은 고작 5만원에 나를 버리는 내 나라에 대한 감상이었다.

    드디어 나는 간다. 나를 낳아준 땅을 버리고 내가 선택한 새로운 땅을 찾아. 그러나 전 재산을 송금하고 손바닥만한 영수증을 받아쥔 날 밤 나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토록 갈구하던 새로운 삶을 찾아간다지만 이제 막 사춘기로 접어든 아들이 걸렸다. 호주에 가서 무얼 해먹고 살 것인가? 나는 자식의 미래를 혼자서 결정할 전권이라도 부여받았단 말인가?

    이 삶 저 삶 비교하다 망설이면 그냥 주저앉고 만다는 것이 내 지론이지만, 나는 밤새도록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두 삶을 저울질했다.



    모든 것이 정반대인 나라

    90년 1월 말 나는 가족과 함께 호주 시드니에 도착했다.

    북반구에서 남반구로 이민 왔다는 게 실감나지 않았지만 한국과 정반대인 문화와 부딪치는 일상의 생소함은 나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전기는 밑으로 내려야 켜졌고, 남향집 대신 북향집, 날씨가 더우면 창문을 여는 대신 더운 바람 한 점 들어오지 않게 꼭꼭 닫아야 하는 기후, 예금을 권유하기보다 자기 은행돈을 대출해가라고 선전공세를 펴는 나라, 그리고 무엇보다 오른쪽 운전석에 앉아 차를 몰아야 하는 혼란이 나를 괴롭혔다.

    학군에 최우선을 두고 북부 타라무라에 단독주택을 얻었다. 월세 1500달러. 금요일까지 근무하고 바로 이튿날 곧바로 이민길에 올랐던 나는 얼마간 한가하게 쉬겠다던 계획을 포기해야 했다. 짐도 풀지 못한 채 개학에 맞춰 두 아이를 입학시켜야 했기 때문이다.

    아들은 중학교 1학년, 딸은 초등학교 5학년. 입학수속은 여권의 생년월일과 이름 확인만으로 간단히 끝났다. 영어라곤 한 마디도 모르는 그들의 수학능력이 염려되었지만, 딸은 일주일에 이틀씩 특별교육을 받았고, 아들은 비영어권 학생들이 거쳐가는 학교에서 기초를 쌓은 뒤 자기 학군에 배정될 예정이었다.

    광대한 호주는 도시 자체가 자동차 문화가 전제돼 있는 나라다. 딸이 다니는 학교는 걸어다닐 거리였으나 아들은 차로 통학시켜야 했다.

    나는 차에 많은 돈을 들일 생각이 없었다. 고급차라 해서 규정 속도를 넘어서까지 안전이 보장되고 스피드건이 눈감아 주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결국 나는 망설임 없이 지난해 모델 도요타 캠리 중 기본 사양만 갖춘 것을 2만 달러에 샀다. 한국에서 200만 원짜리 중고차를 5년이나 몰고 다니던 내가 호주에 왔다고 새 차를 사느라 대단한 출혈을 한 셈이다.

    호주는 대부분의 외국 운전면허를 인정하지 않는다. 한국과 반대인 왼쪽 차선 운전은 자칫 혼동하기 쉬웠고, 불규칙적인 곡선 배열의 도로는 운전대를 잡을 때마다 겁을 주었다. 또 다른 특징은 교차로에서 우선 차선이 분명하다는 점이다. 자기가 우선이면 교차로나 로터리라고 주위를 살피거나 속도를 낮추는 법이 없다. 이런 낯선 규칙에 익숙지 못한 나는 우선인 줄 알고 진행했다가 다른 차가 급브레이크를 밟고 타이어 타는 냄새가 진동할 때 온몸에서 식은땀이 솟곤 했다.

    그토록 기대했던 이민이었지만 사글셋집은 불편했다. 복덕방 직원이 가끔 정원과 잔디를 점검하며 잔소리를 늘어놓을 때의 언짢은 기분은 내 인내심을 시험하곤 했다. 매달 지불하는 1500달러의 방세도 큰 부담이었다.

    우선 집을 사야 했다. 한국인에게 집은 거주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소유에 대한 집착 못지않게 부의 상징이고 재산 증식의 훌륭한 수단이다. 그러나 호주는 달랐다. 부의 상징일 수는 있어도 재산 증식과는 상관이 없었다. 물가 상승률을 밑도는 집값은 물론 등기세, 복덕방 비용 등이 엄청나 오히려 손해보기 십상이었다.

    중개인은 먼저 구입한 사업 이민자들의 예를 들며 40만~50만 달러 가격대의 집을 권유했다. 그러나 나는 이미 30만 달러 이내의 지출을 결정해놓았다. 우선 고려한 것은 좋은 학군과 점점 증가하는 도난 범죄에서 자유로운 지역이지 비싼 집은 아니었다.

    경험 삼아 가격대가 맞는 경매에 참가했다. 시내 중심가 경매장엔 60석 좌석이 꽉 차 있었다. 불경기탓인지 첫째 둘째 매물은 유찰됐다. 셋째가 내가 사려는 매물이었다.

    “25만 달러.”

    경매인의 구성진 리듬 사이로 매수 희망자가 손을 들고 가격을 높였다. 27만5000달러에서 더 이상 오를 기미가 보이지 않자 경매인의 목소리가 애절해지기 시작했다.

    “28만 달러.”

    한번에 5000달러를 높여 내가 부른 가격이다. 계획했던 액수보다 낮아 망설이지 않고 불렀다. 경매인은 신이 나 내 호가를 되풀이하며 더 높은 매수자를 찾았다.

    “28만 달러 한번이요.”

    그 목소리가 그렇게 차분할 수 없었다.

    “두 번이요.”

    이제 한 번만 더 부르면 나는 경락자가 된다. 숨이 가빠질 만큼 긴장되었다.

    ‘28만 1000달러.”

    뒤쪽에서 누군가가 호가를 높였다. 순간 나는 겨우 1000달러 때문에 마음에 드는 집을 살 것인지 포기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했다. 경매인이 호가를 구성지게 되풀이 부르면서 심장 박동마저 빠르게 만들었다.

    그러나 흐름을 맞추느라 1000달러가 다시 올랐을 때 나는 망설임을 깨끗이 잊기로 했다. 오기나 분위기에 휩쓸려 한번 정한 가격을 올리는 것이 도무지 내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에 몰두하고 있는데 어찌된 일인지 경매가는 30만 달러를 넘어서고 있었다. 이상한 일은 여기저기서 1000달러씩 올리며 엎치락뒤치락할 때마다 누군가가 나를 쳐다보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눈이 마주치면 고개를 얼른 돌렸다. ‘바람잡이 장난이구나.’ 나는 일어섰다. 밖으로 나오자 앞에서 매수자를 지적하던 중개인이 황급히 뛰어나와 나를 붙들었다.

    “최종 경락자가 사정이 있어 포기한답니다. 당신이 경락자요. 호가했던 가격에 사십시요.”

    “정말 유치한 장난이오. 난 가겠소.”

    “그러면 오늘 나온 매물 3개가 모두 유찰이요. 복덕방 20년에 처음 겪는 불경기라서 사무실 유지도 힘든 형편이오. 이왕 결정했던 가격이니 제발….”

    나는 키 큰 백인의 공손하기 이를 데 없는 사과를 받아들여 내 호가대로 샀다. 이민 온 지 두 달 만의 일이었다.

    집을 마련한 다음 나는 사업보다 경력과 경험을 살려 구직에 매달렸다. 한국에서는 상선의 기관장이었고 테트라 팩에선 8년간 엔지니어로 근무했다. 기계 전기 전자에는 이론과 현장 경험이 16년이나 돼 취직은 어렵지 않을 것으로 예견했다.

    한국에선 호주 테트라 팩에 추천서를 써주었지만 근무지가 변두리라서 좋은 학군을 포기하고 이사 가지 않는 한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구인광고를 보고 여기저기 이력서를 냈다.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정중한 거절 편지뿐이었다. 1차 산업과 3차 산업만 발달했을 뿐 2차 산업이 비어 있는 호주에서 나 같은 생산직 기술자가 설 자리는 좁았다.

    호주는 고용과 채용에서 한국과는 구조적으로 판이하다. 일간지와 연방 고용성 그리고 수많은 소수 민족의 언론 매체에 구인광고가 넘쳐 흐른다. 하지만 실업률은 언제나 9%에 육박한다. 고용주는 사람이 없어서 쩔쩔매고 구직자는 실업수당에 의존하는 기현상이 벌어진다.

    이 모순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기계 부품처럼 맞으면 쉽게 직장을 얻지만 그렇지 않으면 길이 막혀버리는 아우성이라고나 할까.

    나는 고급 기술직을 찾을 것이 아니라 생계비만 충당할 정도면 막일도 마다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샌드위치 바에서도 한 달 이상의 경험을 요구했고, 슈퍼마켓에 물건을 채우는 야간작업마저 거절당했다.

    고용주는 법률이 정하는 급여를 지불하면서 미숙련자를 채용해 손해볼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또 그들은 항상 전 직장의 추천서를 요구했다. 신원보증이나 재정보증을 요구할 수 없는 사회이고 보면 이해할 수 있지만 갓 이민 온 나에게는 한국에서 가져온 추천서가 있을 뿐이었다.

    경력 없이 채용하는 경우가 있기는 하다. 가령 심야 작업이나 공사장에서 무거운 걸 운반하는 일 등. 그러나 내 체력으론 사흘이 고작이었다.

    신출내기라고 골프장 잔디 물 뿌리는 일조차 거절당한 날, 나는 호주에 대한 환상이 확 깨지는 듯했다. 16년이나 쌓아온 경력과 기술을 포기할 때는 애당초 꿈꾸었던 희망의 삶을 어떤 식으로든 붙들어보겠다는 의지에서였다. 그런데 이토록 하찮은 단순노동마저 거절당하다니. 내 생에 가장 쓰라린 좌절감이 엄습했다.

    이러자고 이민 왔나. 이런 좌절까지 감수하며 견뎌내야 할 새 삶이 얼마나 대단한 것이기에…. 뭐 그리 붙잡아야 할 희망이 있다고….

    그러나 헤쳐 나가야 할 삶이었다.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고 나는 판 위를 달리는 말이었다. 호주 사회가 거부하고 새로운 환경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포기할 수는 없었다. 처음 이민 수속을 시작할 때의 나로 돌아가야 했다. 그래서 이런 좌절을 축복의 디딤돌로 디뎌야 했다.

    나는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르다는 속담을 되새겼다. 정부 직업 훈련원인 TAFE에 등록할 계획을 세우고 구직을 포기했다.



    무슨 일을 해서라도 생활비를 벌어라

    호주에선 기본 생활비가 꽤 든다. 교육비와 통학비 병원비는 무료지만 전기, 전화, 수도, 가스 등 일상에 필요한 기본비용이 많이 든다.

    주택은 정기적인 수리가 필요하고, 보험료와 차량 유지비도 큰 부담이다. 결국 이런 공공료나 보험료는 어찌할 수 없고, 절약해도 큰 효과가 나지 않는 빵 한 덩이, 생선 한 마리를 사느냐 마느냐를 오랫동안 계산하는 형편이었다.

    편리한 슈퍼마켓 대신 생산자와 소비자가 직접 연결되는 플레밍톤 새벽시장에서 토요일마다 식료품을 사 날랐으나 한 달 생활비는 2500달러를 넘어섰다. 설상가상으로 15%에 이르던 예금 이자가 절반으로 떨어져 원금을 빼 생활비를 충당해야 했다.

    곶감 빼먹듯 줄어드는 원금은 사막에서 식수가 말라가듯 줄어들었다. 진달래가 만발한 남반구의 9월 어느 날, 일요일 마감시간을 앞두고 유효기간을 넘기기 직전 아주 싼값에 처분하는 채소와 고기를 사기 위해 슈퍼마켓 ‘울워스’에 다녀오던 길이었다.

    “혹시 전북 이리에서 오신….”

    트롤리(슈퍼마켓 운반수레)를 정리하던 젊은이가 모자를 벗고 인사했다.

    그는 누군가를 통해 나를 알았다면서 반가워했다. 자기도 이리 출신이며 대학을 졸업하고 어학 연수를 와서 이렇게 일하면서 학비를 충당한다고 했다. 나는 기특하다며 몇 마디 고향 얘기를 하다가 헤어지려는데 그가 한번 찾아 뵙겠다고 했다.

    석운이란 그 청년이 찾아온 것은 2주 후였다.

    그는 트롤리 운반작업이 힘든 노동인 데 비해 수입이 시원치 않다며 고충을 털어놓았다. 그러면서 만일 내가 자신에게 청소권을 하나 사준다면 자기가 모든 걸 책임지고 관리할 테니 3만5000달러만 투자하라고 했다. 그러면 매주 700달러씩 벌어주겠다고 말했다.

    청소는 특별한 기술이나 큰 자본 또는 영어실력이 없어도 손쉽게 시작할 수 있는 사업이다. 따라서 이민자에겐 생계 수단으로, 유학생에게는 학비를 충당하는 수단으로 안성맞춤이다. 그런데도 내가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은 청소라는 선입견보다 불확실한 계약으로 인한 매매 사기나 매니저의 횡포로 자칫 본전도 못 건지고 고생만 실컷 한다는 경험자들의 충고 때문이었다.

    내가 이런 우려를 나타내자 석운은 자기가 벌써 2년이나 이 바닥에서 잔뼈가 굵었고 그런 일은 물정 모르고 쉽게 덤빈 신출내기에게나 아주 드물게 일어나는 불상사라고 말했다. 그는 얼마나 많은 한인이 청소사업에 종사해서 기반을 잡고 성공했는가를 설명하며 안전성을 강조했다. 석운의 말대로라면 난 투자를 해도 떼일 염려가 없고 가끔 매니저를 만나 커피를 마시며 청소 상태를 확인 해주는 것만으로 주 700달러를 벌 수 있다는 얘기였다.

    결국 나는 그의 제안을 수락하고 말았다. 40대 초반에 놀고 먹을 수 없다는 조바심, 이자와 원금을 털어서 생활비를 충당할 때의 허탈함을 더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청소권을 팔겠다는 사람은 나보다 두 살 많았다. 그는 홍콩에서 사업하다 망해 5년 전 빈손으로 호주에 왔다고 했다. 대책 없이 호주에 내렸지만 수중에 있는 몇 푼으로 청소시장에 뛰어들어 지금은 집도 사고 청소권도 세 개나 된다고 자랑했다.

    청소할 곳은 시내 중심가 금융회사 4층 건물이었다. 계약금 10%를 건네주자 그는 건물 매니저에게 새로운 청소감독이라고 나를 소개했다. 내가 청소권 명의를 확실하게 옮겨달라고 요구하자 그는 다음과 같은 위협적인 말로 내 기를 죽였다.

    “청소세계를 몰라서 하는 소리다. 보통 2년 단위로 계약하는데 8개월 후인 내년 5월에 재계약을 한다. 만약 원한다면 해주겠다. 그러나 명의 변경까지 2개월이 걸리고 비용도 1000달러가 넘는다. 당신 같은 방식으로는 호주에서 청소권을 살 수 없다. 이 세계가 다 그렇다.”

    마피아 영화 장면을 연상시키는 거래였다. 내가 계약금을 돌려달라고 요구하자 그는 계약 포기라며 막가는 태도로 돌변했다. 결국 나는 계약금을 포기할까 말까 고민하다가 그의 요구대로 은행을 여러 번 들락거려 나머지 3만 달러를 현금으로 지불했다. 그러나 촌놈 취급까지 당하며 내가 간신히 얻어낸 것은 아무 효력도 없는 한글 영수증과 그의 명의로 된 계약서가 전부였다.

    그는 그 후 2주간 더 현장에 나타나더니 발을 뚝 끊고 말았다. 이제부터 모든 것은 내 책임이고 내 손익이었다.

    한 달 후 청소비를 받은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청구 금액에서 20%를 원천징수 후 나머지 금액만 지급하는 것이 아닌가. 청소용품 비용을 제하고 나니 나에게 돌아온 것은 겨우 600달러에 불과했다.

    밤잠 설쳐가며 부지런히 뛰기만 하면 될 줄 알았던 청소였다. 그러나 이런 육체 노동도 어려움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가장 어려운 것은 일손 확보다.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유학생이나 뜨내기들은 잘 해야 한 달을 일하고는 어느 날 갑자기 그만두기 일쑤였다. 아무리 단순 노동이지만 초보자는 일주일 정도 요령을 가르쳐야 손발이 맞는다. 세 명이 쉬지 않고 뛰어야 4층 건물을 10시 전에 끝낼 수 있지만, 금요일 주급을 받으면 연락도 없이 그만두는 일이 예사였다. 그러면 월요일에 나 혼자 발을 동동 굴러야만 했다.

    나는 이런 문제들이 그들과 친해지면 개선될 줄 알았다. 금요일 청소가 끝나면 술도 사주고, 그들이 합숙하는 아파트까지 가서 좋아하지도 않는 고스톱도 함께 쳤다. 그러나 그들은 내 사정은 아랑곳없이 제 마음대로 그만두었다. 그럴 때는 혼자 진공청소기를 등에 메고 땀을 뻘뻘 흘리며 카펫을 문지르고 타일을 닦았다.

    배를 탈 때 내 침실엔 청소 담당 보이가 따로 있었다. 다국적기업의 중견사원이던 나는 쓰레기통 한번 비운 적이 없었다. 그런 내가 누가 더럽힌지도 모를 물건을 씻고 닦아 윤기를 낸다. 행여 지적받을까 두려워하면서.

    선진국에 이민 와서 여유 있는 삶은커녕 이렇게 남의 변기통이나 씻어내며 평생 살아야 하나. 이런 두려움에 휩싸일 때면 매일유업 중부공장에서 있었던 일이 스쳐 지나갔다. 기계가 갑자기 정지했다는 연락을 받고 가보니 밤 새워 지방까지 배달할 기사들이 줄담배를 피워대며 제품을 기다리고 있었다. 운 좋게 20분이 채 지나지 않아 고장을 발견하고 다시 생산을 시작했다. 그때 대단한 기술자라도 되는 것처럼 모두 담배를 권하며 쳐다보던 눈빛. 왜 하필 이런 때 그 일이 생생하게 떠오르는 것일까.

    서너 달이 지나자 요령도 생기고 그 방면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두루 알게 되어 큰 고비는 넘긴 것 같았다.

    따가운 햇살에 수목의 진초록이 검게 번쩍이던 2월 초. 가까이 사는 이웃이 우리 집에 모여 불고기 파티를 열었다. 타라무라에 띄엄띄엄 찾아든 한인이 어느덧 열 가구를 넘자 서로 알고 지내자는 취지로 고참인 내 집에서 갖는 간단한 저녁식사였다.

    뒤뜰에서 식사를 마치고 취기가 오를 무렵 안방에서 전화가 울어댔다. 예감이란 언제나 무시 못할 존재다.

    “석운이 형과 종만이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전화를 건 것은 한 달 전에 일을 시작한 영어 연수생이었다.

    “그럼 아직까지 청소를 시작하지 않았단 말이냐?”

    “열쇠조차 주지 않는 걸요.”

    “차가 고장났는지도….”

    말을 잇지 못하는 내 얼굴에선 이미 술기운이 싹 가셨다. 고물차가 고장나 조금만 늦어도 연락을 빼놓지 않던 그다. 건물 경비원이 전화를 바꿨다.

    “청소원이 한 명밖에 보이지 않는다. 빨리 시작하지 않으면 내일 근무시간에 늦는다.”

    경고였다. 나는 불안해하는 이웃들에게 사정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차에 시동을 걸었다. 음주 운전을 걱정한 아내가 이웃들을 남겨 놓은 채 운전대를 잡았다.

    내가 도착한 것은 청소가 끝날 시간인 열 시가 지나서였다. 모처럼 마신 술로 다리가 후들거렸고 진공청소기는 평소보다 훨씬 무거웠다. 화장실은 욕설이 나올 만큼 지저분했고 바닥은 한없이 넓었다.

    석운으로부터 전화가 온 것은 자정 무렵이었다.

    “집을 나서는 순간 이민 경찰이 덮쳐 지금 빌라우드 수용소에 있습니다. 방금 취조가 끝나 전화 거는 겁니다. 제가 나가서 모두 해결해 드릴 테니 보석금 1만 달러만 내주십시오.”

    맙소사, 그가 체류기간을 넘긴 불법 체류자였다니!

    측은함보다 나한테까지 비밀로 했다는 생각에 씁쓸함을 넘어 분노가 치밀었다. 한마디로 보석금을 거절하자 그는 막가는 태도로 저주의 말도 서슴지 않았다.

    내가 가까스로 청소를 끝낸 것은 전산부 직원의 교대가 시작되는 6시경이었다. 근처 커피라운지에서 8년이나 끊었던 담배를 사들고 도로변 나무의자에 앉았다. 담배를 피워 물자 하늘과 바다가 뒤섞인 폭풍 자락에 휩쓸려 수장의 공포에 휩싸인 선원에게만 찾아드는 해저의 고독이 밀려들었다. 다시는 일어설 수 없을 듯한 이 짓눌림의 무게…. 육지에서도 이런 고독이 찾아든다는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집에 갈 생각도 잊고 빈속에 연신 담배를 바꿔 물었다.

    “이래도 왕년엔…. 이래도 왕년엔. 이래도….”

    호주로 이민 와서 도심 건물이 밤늦게까지 환한 것이 퍽 인상적이었다. 금융과 무역의 발달로 전세계를 상대로 장사하려면 이렇게 시차를 극복해 일해야 한다고 꿰맞추었다. 그러나 그것이 청소원의 밤일이란 것을 알고 그들의 힘든 일에 동정을 금치 못했다. 그런데 내가 어쩌다가…. 호주로 사업이민을 간다는 말에 선망의 눈빛을 보내던 친구나 직장 동료들이 이 험한 꼴을 보면 뭐라고 동정하며 혀를 찰 것인가.

    “아이들 학교 데려다 줄 시간이에요”

    등뒤에서 흡연을 감히 말리지 못하고 지켜보던 아내가, 담배를 비벼 끄자 기다렸다는 듯 조심스럽게 한 마디 건넸다. 나는 아침 출근자들에게 내 초라함과 왜소함을 더 이상 노출하고 싶지 않았다. 험한 풍랑 속에 솟구치는 배처럼 벌떡 일어섰다. 황량한 생각의 되새김질은 어쩌지 못한 채.



    메마른 사회

    2주일 후, 나는 건물 매니저에게서 유감의 편지를 받았다. 석운의 체포로 어쩔 수 없이 청소가 늦은 사건 후 나는 매니저에게 불가피한 상황을 설명했다. 별다른 기색을 보이지 않던 그였다. 그 후로 여러 번 만난 일이 있고 필요하면 언제나 호출하거나 통화할 수 있는데도 편지를 보낸 것은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있음을 의미했다. 공문 형식의 그 편지는 보안을 요구하는 전산실 청소를 규정 시간을 벗어나 끝낸 점과 계약이 5월 말로 끝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계약이 끝난다…. 권리금이 날아간다는 것을 의미했다.

    단 한 번의 청소 불량이 계약 갱신에 이렇게 치명적인가 싶었다. 어느 누구도 그런 상황에선 그럴 수밖에 없었고 나도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불가피했던 사정을 감상적으로 설명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나는 변호를 통해 재고의 여지가 있는가를 은근히 타진했다.

    그러나 변호사의 전언은 씁쓸했다. 계약이 종료되는 것은 그날의 청소불량 뿐만 아니라 정부 시책에 어긋나는 불법체류자의 고용, 그리고 계약에 명시된 4명이 아니라 3명의 청소원이 규정 시간보다 일찍 끝냈다는 것이다. 이것은 명백한 계약 위반이어서 그로서는 재계약이 불가능하다는 거였다.

    뜨내기 청소원이 예고도 없이 그만둘 때는 내가 작업복을 입고 걸레질을 했다. 그럴 때는 그 시간만큼 임금이 절약되어 내 몫도 커졌다. 인원 보충이 여의치 않을 때는 자연히 내가 몇 주일 계속하기도 했다.

    청소시간 단축도 그렇다. 보통 하루 세 시간씩 일하면 일주일에 150달러를 받는다. 이 액수로는 생활비도 모자란다. 따라서 청소원은 한 곳에서 일이 끝나기 무섭게 다른 곳으로 가서 일하고, 그곳을 마치면 또…. 이렇게 동이 틀 때까지 충혈된 눈으로 두세 곳을 뛰어야 생활비를 충당하고 얼마간 저축도 할 수 있는 것이다.

    내 청소를 10시 전에 끝내야 석운은 청소원들을 싣고 15km 떨어진 슈퍼마켓을 시작할 수 있다. 적은 인원으로 한 시간 일찍 끝내려면 발바닥에 불이 나고 허리 한번 제대로 펴지 못한다. 싸우듯 고성이 오가고 피워 문 담배는 서너 번 빨면 필터까지 타들어간다.

    그들 눈엔 이렇게 바삐 설쳐대는 것이 못마땅했던 것이다. 가끔 휴식도 갖고, 독성 세제를 뿌릴 땐 마스크를 하고 손엔 고무장갑을 끼는 안전수칙을 지키라는 거였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맨손이었고 위험과 불결함엔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었다.

    매니저는 딱한 사정을 외면할 수 없었는지 다음 입찰에 서류를 갖추어 참가해도 좋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러나 나는 실적이 전무했고 추천서도 없었다.

    마지막 청소를 끝내고 장비를 싣고 철수하던 날 나는 무안을 당하고 말았다. 경비원은 매니저가 전해주라는 물건을 내밀었다. 거기에는 내가 그와 처음 대면하던 날 다음 계약 갱신을 위해 가식적인 아부로 선물했던 88서울올림픽 기념우표집이 들어 있었다.

    불행은 항상 겹쳐서 찾아들기 마련이라는 말은 두렵다.

    8개월간 바둥댔지만 돌아온 결과는 1만 달러의 손해였다. 1만 달러를 벌어도 시원치 않을 처지에 역으로 손해를 보았으니…. 누구를 원망할 수도 위로받을 수도 없었다.

    집에 틀어박혀 하는 일 없이 익은 감이 저절로 입에 떨어지기를 기다리던 어느 날, 나는 이민성으로부터 호출 전화를 받았다. 조사할 것이 있으니 나오라고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호출당할 이유가 없었다. 나는 사업이민자의 동태파악이나 설문조사쯤으로 간주하고 약속 시간에 맞춰 나갔다.

    책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이민성 직원은 두툼한 서류철을 풀었다. 내가 이민 수속을 시작해서 입국까지 오고 갔던 서류가 모두 거기에 있었다.

    “이민 변호사 비용은?”

    “은행 잔고는?”

    “집은 세를 삽니까, 자가입니까?”

    “지금 사업을 시작했나요?”

    담담한 어조로 사실대로 대답하던 나는 조금씩 불쾌함을 느꼈다. 이민관도 중간 중간에 혼잣말로 불평을 섞었다. 그런데 이상한 방향으로 초점을 맞춰 가는 것이 아닌가? 무슨 범죄 혐의자인 양, 또 내 대답의 신뢰성을 의심해 그때마다 자기가 확인할 대상을 물었다. 한 시간이나 질문해도 사소한 교통법규 하나 위반하지 않은 내게서 그 어떤 것이 나올 리 없다. 그가 실업자 수당을 받느냐고 물었을 때 내 인내는 한계에 도달한다.

    “도대체 왜 이러는 겁니까? 다른 사업이민자도 똑같은 설문조사를 받나요?”

    “모터 수리공 면허는 무슨 목적으로 했소?”

    “아, 그거야.”

    외국 면허를 호주 면허로 교환해주는 기관이 있다. 혹시 언제 필요할지 몰라 시간 있을 때 마련한다고 신청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심사관이 사업이민자는 사업을 해야지 모터 수리공 면허는 무슨 소용이 있는가를 물었다. 그 심사관이 이민성에 통보한 것이다. 사업이민자가 모터수리공으로 전락한다고. 그러고 보니 이민관이 내 송금액의 흐름에 초점을 맞춰 질문한 것이 이해가 갔다.

    내가 이민 오기 직전 홍콩과 대만에 조직을 둔 갱단에 의한 사기 사업이민 다섯 세대가 적발되어 강제 추방당한 사건이 있었다. 규정 송금액이 부족한 세대에 돈을 고리로 빌려주고 영주권을 받아 입국하면 그와 동시에 돈을 회수해 역송금을 하는 그런 사기이민 사건이다. 사업 대신 모터 수리공으로 생계를 유지할 것으로 단정한 이민관은 나를 이런 사기 사업이민자로 보고 조사한 것이다.

    조사를 마치고 돌아온 나는 상처받은 자존심으로 고통스러워하며 며칠을 보냈다. 한국에서도 어쩔 수 없이 관리들과 부딪쳤다. 그때도 나는 당당하게 내 주장을 폈고 내 방식대로 해결했다. 그런 내가 아무 잘못도 없이 이민성 직원으로부터 사기 혐의로 조사를 받다니…. 나는 그 순간을 떠올릴 때마다 분노와 무력감으로 부들부들 떨었다. 그러다가 문득 호주 때문에 중단했던 미국 이민이 탈출구로 떠올랐다.

    미국 이민을 결정하고 보니 그토록 선망했던 호주생활이 건조해지고 흥미를 잃어갔다. 미국 대사관에 연락하니 내 파일을 호주로 옮겨 이곳에서 수속이 가능하다는 회신을 받았다. 자연히 이민 수속에 가속이 붙었다. 집은 매물로 내놓았고 입항하는 배에 식품을 납품하는 선식 사업으로 성공한 미국 동기생들과 통화도 자주 했다.

    대사관 제출서류도 거의 완료되어 가던 어느 날 평소 알고 지내던 선배 한 분이 찾아왔다.

    “이 어리석은 사람아. 이민 짐은 일생에 단 한 번 싸는 것도 벅차. 두 번이나 싼 기구한 내 팔자를 보라고. 중남미를 돌다가 미국으로 가지 않고 호주로 먼길을 돌아온 나를 잊었나? 한 번 보따리 싸는 데 5만 달러는 깨지는 거야. 2년 먹고 살 돈이야. 미국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음엔 달나라로 가려나?”

    그토록 열망해온 호주를 떠난다. 그것은 내가 원하던 바가 아니다.

    “그렇지 않아도 집이 팔리지 않아 심각히 고려중입니다.”

    얼마 후, 나는 미국으로 가려던 재이민을 포기했지만 그건 선배의 말 때문만은 아니었다. 호주 싫다고 미국 가더니 그곳에서도 정착 못하고 돈만 까먹다가 막판에 죽을 고생하더라는 비아냥이 현실적으로 닥쳐올 것이란 걸 알고 있었다.

    사실 미국 이민 수속을 시작하면서 나는 호주를 떠나게 되어 시원하지는 않았다. 호주에 올 때처럼 새로운 삶에 대한 기대감도 없었다. 대신 아내와 아이들을 넋 나간 듯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간만 길어졌다. 내가 이들을 또 끌고 다니며 우왕좌왕한다….

    아니다. 나는 그 동안 내 집과 이웃 그리고 모든 것이 푸르고 눈부시게 아름다운 호주의 자연환경에 정이 들 대로 들었다. 그것은 이민을 결정할 때 내가 가졌던 호주에 대한 환상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었다. 환상은 깨졌지만 정이 남았다. 그것은 어쩌면 내일의 힘이 되고 훌륭한 자양분이 되어 줄 것이다.



    원금이 더 줄기 전에 사업을 시작하라

    91년 호주는 깊은 불경기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실업 수당 수혜자가 사상 처음으로 100만 명을 돌파했다고 매스컴은 연일 아우성이었다. 울워스 콜스 등 대형 유통업체에서 청소년 고용증대란 명목으로 주 5일 영업에서 7일 24시간 영업체제로 변모했다. 이런 대형 업체에선 생산자로부터 직접 대량 구매, 소나기식 선전, 화려한 경품행사, 박리다매 같은 영업방식을 취했으므로 이와 대적할 수 없는 소매상들은 설 자리를 잃고 문 닫는 일이 속출했다.

    그 동안 소매상들이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대형업체가 문 닫는 주말이나 밤늦은 시간에 매상을 올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일 영업으로 바뀐 지금 소비자들은 편리한 주차장과 쾌적한 환경이 완비된 대형 쇼핑센터에서 소위 말하는 토털 쇼핑을 즐기고 있다.

    나는 내 사업 규모도 줄일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그런 조바심에 주말마다 사업 매매 광고를 훑었고 중개인도 자주 만났다.

    내가 사업을 찾아 동분서주한다는 걸 알고 나보다 반 년 일찍 이민온 친구가 충고했다.

    “작년 시내 중심가에 있는 커피라운지를 깎아서 35만 달러에 흥정했어. 그런데 계약 직전에 미술을 전공한 아내 때문에 포기했지. 붓을 만지던 섬세한 손으로 그까짓 1달러도 안 되는 돈을 벌기 위해 샌드위치를 싸고 커피를 끓여 날라야 하느냐고 난리였어. 사실 나도 너처럼 줄어드는 원금을 생각하면 앞날이 막막해서 계약하려던 건데 아내는 겨우 커피장사 시키려고 호주까지 끌고 왔느냐며 자기는 한국에 돌아가면 갔지 절대 못한다는 거였다. 하는 수 없이 포기하기로 마음먹고 오리발을 내밀었지. 10만 달러 더 깎아주면 계약하겠다고. 물론 정신 나간 사람이라고 욕먹고 상담은 깨졌어. 그런데 최근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아니? 내가 제시한 25만 달러에 사라고 연락이 온 거야. 내외가 1년 동안 죽도록 고생해보았자 10만 달러 벌었겠어? 먹고 놀아 10만 달러 번 거지.”

    “네 아내가 옳았다. 대금융회사 부장이던 네가 체면이 있지. 하루에 수십억 원을 결재하던 손이 시시하게 동전치기가 뭐니. 동전치기가.”

    하마터면 큰 손해 볼 뻔한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는 아찔함에서 아직도 헤어나지 못하는 친구에게 뭐라 칭찬해줘야 할 것 같아 내가 건넨 소리다.

    그러나 친구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망설이는 호랑이는 벌보다 못하다’는 ‘사기’의 한 구절을 떠올렸다. 내 친구는 지난 일 년 동안 특별히 한 일이 없다. 골프 핸디 몇 개 줄인 것을 제외하곤.

    내 생각은 다르다. 사업을 했더라면 자산에 손해는 있었을지 몰라도 규칙적인 생활과 내일의 계획으로 우체부 지나가는 것마저 반갑게 기다려지는 정신적 허기는 달랠 수 있었을 테니까 말이다.

    나는 친구의 충고를 무시한 채 사업구상을 구체화했고 급기야 흥정을 시작했다. 10만 달러를 투자해 델리카슨(서양 양념류와 각종 치즈를 파는 일종의 식품점)을 운영하면 주 수입이 1000달러란다. 나는 흥정을 끝냈으나 계약 직전에 포기했다. 아내의 반대가 있어서도 아니었고 놀고 먹는 게 차라리 남는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도 아니었다. 내 체력으론 아침 6시부터 오후 7시까지 365일을 쉬지 않고 일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점포 계약에서 반드시 명심할 사실이 있다. 3년이나 5년 등 장기간 계약하는 임대에서 어떤 이유로든 해약하고 빠져 나오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설령 장사가 안 돼 권리금을 포기한다 해도 계약기간 세를 꼬박꼬박 내야 한다. 실제로 파라마타 지역에 대형 쇼핑센터가 들어서자 그 주위 몇몇 상가는 문을 닫은 채 집세만 물고 있는 형편이다.

    내가 계약을 포기하자 중개인은 칼텍스 정유회사의 구내 매점을 소개했다. 이곳은 8만 달러를 투자해 주 600달러의 수입을 올릴 수 있단다. 나는 월세 250달러의 매력에 끌려 계약하고 말았다.

    장사란 겉보기처럼 단순하지 않다.

    물건을 사서 얼마간의 이윤을 붙여 파는 것이 장사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막상 뛰어들고 보니 그리 만만치 않았다. 이제껏 돈 주고 사기만 하던 나다. 상인의 이익을 당연시해 값이 좀 비싸도 깎는 것을 비신사적인 행동으로 여겼다. 그런 내가 원가에 이익을 붙여 판다는 것이 심부름 갔다오면서 웃돈을 얹는 것 같아 꼭 들킬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호주에서 이런 소매업을 하려면 몇 가지 매너를 몸에 익혀야 한다. 점포에 들어서면 “굿 모닝” “굿 애프터 눈” 등은 기본이고 거스름돈을 내줄 때는 물건값에 잔돈부터 더해가며 손님이 내민 액수와 일치시키는 것이다. 거스름돈을 다 받은 손님을 응시하다가 시선이 마주치면 윙크로 어색함을 넘긴다. 이런 시선의 맞부딪침은 대단히 중요하다. 이것이 쑥스러워 고개 숙이고 우물쭈물하다간 자기에게 관심 없는 것으로 간주해 매우 불쾌하게 여긴다.

    내 가족의 생계가 이 장사에 달렸다고 생각하니 얼마 지나지 않아 제법 장사꾼다운 이력이 붙었다. 감히 말하거니와 전기 기계 엔지니어에서 구내 매점 아저씨로 바뀌는 데도 복잡한 전기회로 공부만큼의 노력을 기울였다.

    이런 매점에도 진열품이 자그마치 500여 종류나 된다. 거기에 드라이클리닝까지. 여기 사람들은 어른들도 군것질을 즐긴다. 자기가 찾는 게 없으면 곧장 옆가게로 간다. 똑같은 상품을 놓고 한 지붕 아래서 통로를 사이로 네 개의 상점이 갈라 먹는 장사다. 따라서 친절과 좋은 매너가 아니면 손님을 끌 수 없다. 더구나 다른 상점 주인들은 서구식 매너가 몸에 밴 서양인이었고 나 혼자만 동양인이다.

    나는 한번 찾아온 손님은 특징을 메모해 두었다가 다음 번에 정확히 이름을 불러 단골로 만들었다. 가령 ‘키 크고 쇼트 커트에 금발은 제니이고 그녀는 아몬드 초콜릿을 좋아한다’ 이런 식으로. 새벽부터 오후 늦게까지 열한 시간이나 일했지만 내 생활은 점차 활기를 되찾았다. 규칙적인 일과로 좁은 공간의 지루함을 잊으며.

    호주는 계약 사회다. 170여 민족이 모인 다민족 국가에서 동일 사물에 대한 판단기준은 천차만별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사소한 것도 문서화된 계약으로 분명히 해두지 않으면 나중에 엄청난 분쟁이 발생한다. 개인의 경험이나 상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사회가 아니다.

    나는 사글세 6개월 계약하는데도 조항이 9장이나 되는 작은 글씨를 검토했다. 계약서에 사인하고 나서야 알았지만, 거기엔 정원수 관리, 벽에 박을 수 있는 못의 수, 페인트 얼룩 등 별별 시시콜콜한 조항이 다 담겨 있었다. 물론 임차인으로서 계약을 위반하면 변상한다는 조건으로.

    날린 청소 권리금을 교훈 삼아 칼텍스 구내 매점은 변호사를 통해 처리했다. 그런데 3년이 지나 다시 연장하려 하자 건물 매각으로 불가능하다는 통보가 왔다.

    1957년 보험회사 AMP는 시드니에서 가장 높은 15층 건물을 완공해 칼텍스에 40년간 임대를 주었다. 그런데 그 임대 완료를 앞두고 건물 주인이 바뀐 것이다. 따라서 권리금을 주었던 1층 소매상 네 개는 점포를 비워야 했다.

    나는 칼텍스 임대 계약이 97년에 끝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전 주인은 칼텍스 같은 다국적 대기업은 재계약할 것이 분명하다는 거였다. 물론 나도 날로 사세가 확장되는 한국의 대형 정유회사에 대한 선입관으로 그러리라 믿었다. 계약서에도 분명히 3년의 계약과 3년의 연장이 명기되어 있었다.

    그런데 입주해 한 달이 지나서 안 사실이지만 매도 매수자와의 계약서 외에 건물주의 허가서가 따로 있다는 것이다. 처음 해보는 이런 매매에서 허가서가 따로 있음을 알고 거기서 임대기간의 상이점을 발견하기는 나로서는 무리였다.

    나는 이 일로 담당 변호사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를 위한 재판을 시도하다가 포기했다. 변호사를 상대로 한 재판에서 내가 소비해야 하는 시간과 노력 그리고 비용이 배상액을 넘을 것 같지 않아서였다.



    11만 5000달러를 주고 산 고생

    한 푼 보상도 없이 쫓겨나는 것이 확실해지면서부터 사람 만나기를 꺼리게 됐다. 이미 칼텍스 건물 매각과 용도 변경이 매스컴을 통해 호주 전역에 보도되던 터였다. 그래서 위로전화도 가끔씩 걸려왔다.

    ‘자식 혼자 잘난 척하고 설쳐대더니…. 그것 봐라. 누군 너만 못해서 잠자코 있는 줄 아니?’ 설마 그렇게 생각할 사람이야 없겠지만 이런 말이 어느 곳에서 한 입 건너 보태지고 부풀려 안주로 오르내릴 것만 같았다.

    사실 내가 4년 동안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골프나 낚시로 소일했더라면 분명히 은행 잔고가 더 남았을 거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놀고 먹는 게 남는 거’라는 자조적인 농담을 내가 증명해 보인 셈이다.

    그러나 비록 애태움 속에 그 많은 권리금을 소리 없이 날렸지만 값진 수확도 있었다.

    사업 매매 계약에 대한 과정과 법률 용어를 막힘 없이 읽을 수 있고 수많은 물류를 훤히 꿰뚫을 수 있는 능력이 생겼다. 자랑삼아 말하거니와 시드니에서 상점의 위치와 진열품만 보고도 매상과 순익을 나만큼 정확히 알아 맞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싶다.

    나는 햄버거 하나 사먹는 것도 아까워하고 버스를 타는 대신 걸어서 집에 와 밥 한 그릇으로 때운다. 이런 내가 11만 5000달러나 되는 수업료를 지불했다는 것은 분명히 깊은 상처다. 그러나 나는 이왕 비싸게 산 고생이니 이걸 밑바탕으로 한 발씩 전진해야 이민의 새 삶을 개척할 수 있다고 자신을 타일렀다.

    바닥부터 기어야 한다는 각오로 청소를 시작했고, 물류를 배우고자 구내 매점을 운영했다. 한꺼번에 청소원 둘이 예고도 없이 그만둬 자정을 넘어서까지 쉬지 않고 카펫을 문지르고 변기를 닦는 일을 일주일간 계속하자 코피가 터졌다. 그때마다 호주에 적응하기 위한 정신과 육체의 수련일 뿐이라고 위로하며 넘겼다.

    바닥부터 기지 않고 처음부터 번듯하게 뛰어들어 실패한 사람들을 얼마나 보아왔는가. 이 얼마나 비싸게 주고 산 고생인가!

    나에게는 폭풍 속에서 철판을 사이로 죽음의 위협을 견뎌낸 바다 사나이의 의지도 있다. 호주는 적어도 균등한 기회의 사회다. 이것저것 실패하면 네 식구 손잡고 하버브리지에서 떨어져 죽을 것은 상상했어도 한국으로 되돌아갈 생각은 한번도 떠올린 적이 없다.

    이런 곳에서 버텨내지 못한 생존의 낙오자가 학연 지연 혈연이 카스트제도로 화석이 된 한국에 어떻게 합류할 수 있겠는가?

    남은 달걀을 모두 한 광주리에 담아들고

    칼텍스는 96년 7월까지 철수하라는 최종 통보를 보내왔다. 벌써 1년 전부터 세든 소규모 회사들이 이사 가고 은행마저 옆건물로 옮겨 장사는 썰렁했다.

    매주 금요일엔 존이 초콜릿을 주문받으러 어김없이 찾아온다. 이렇게 일주일 내내 시드니 중심가를 도는 일을 25년이나 펭귄 걸음으로 뒤뚱거리며 해왔다. 그 정도 이력이라면 소매업 사정에 통달했을 것 같아 어느 날 물었다.

    “네 고객 중에 어느 상점이 불황 없이 장사가 잘 되니?”

    “그야 단연 서큘라키 뉴스에이전시다.”

    “그럼 주인에게 팔지 않겠느냐고 물어보렴.”

    딱히 사겠다는 의도로 꺼낸 말은 아니다. 빈손으로 쫓겨나는 딱함을 동정하기에 이까짓 것 정도야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는 허세를 부려본 거다. 이 불경기에 장사 잘 되는 상점을 어느 바보가 팔 것인가.

    그러나 다음주 존은 뜻밖의 소식을 전해 왔다. 팔 의사가 있다는 것이다. 나는 직감적으로 무슨 함정이 있거나 바가지를 쓸지 모른다고 판단했다.

    주인은 신경질적인 인상에 고등학교를 중퇴한 후부터 이런 소매업에 종사한 그리스인이었다. 잠시도 쉴 틈을 주지 않고 퍼부어대는 그의 말 속에서 나는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발견했다.

    첫째, 서큘라키 40여 개 상점은 95년부터 철거 대상이다. 따라서 정책이 결정돼 통보하면 6개월 이내에 철거해야 한다.

    둘째, 그는 무일푼에서 자수성가한 자신의 위대함을 인정받고 칭찬받고 싶어한다.

    서큘라키를 관통하는 시내 순환선과 이중 고가도로는 40년 전 임시로 건설되었다. 그것이 시드니항의 미관을 해친다 하여 올림픽을 앞두고 철거 도마에 오른 것이다. 내가 그 가게를 사기 위해선 과연 실제로 철거될 것인가, 턱없이 요구하는 권리금을 어떻게 내 자금에 맞추어 깎을 것인가가 문제였다.

    나는 철거 가능성에 대해 여러 채널을 통해 조사했다. 그 결과 지질학적으로 난공사고 기존 노선 높이에서 지하로 연결되기엔 거리가 짧아 급경사라는 것이다. 또 하나 하루 3만2000대가 이용하는 고가도로를 우회도로도 만들기 전에 철거하기란 대단히 어렵다는 결론을 얻었다.

    문제는 권리금이었다. 그리스 주인은 철거 대상인 주제에 현 시세에다 프리미엄을 얹으려 했고, 나는 철거에 불안해진 그가 빈손 터는 것보다 얼마간 유리한 헐값에 팔고싶어 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말하자면 동상이몽 속에 흥정이 오갔을 뿐이었다.

    나는 배달민족의 피에는 은근과 끈기의 역사성이 있다는 걸 자랑스럽게 여긴다. 그것이 언제부터 빨리빨리로 변질돼 삼풍백화점이나 성수대교 참사로 이어졌는지 모르지만 하여튼 나는 은근과 끈기라는 말을 무척 좋아한다.

    나는 차돌멩이 주인과 권리금을 깎기 위한 장기적인 싸움에 돌입했다. 만날 때마다 자수성가한 위대함을 침이 마르게 추켜세웠고 당장이라도 계약할 듯하다가 트집을 잡고 한발 물러섰다.

    그도 멀쩡한 상점에 부나방처럼 제 발로 찾아와 사겠다고 흥정을 자청하는 나를 바보로 알고 임대계약서에 장난을 쳐 내 전 재산을 노리려는 음모도 서슴지 않았다.

    온갖 우여곡절 끝에 95년 2월 초 오페라 하우스 근처의 서큘라키 뉴스에이전시를 인수하였다. 흥정을 시작한 후 만 2년의 세월이 흘렀고 호가에서 7만 달러를 깎은 가격으로. 나는 이 매매 과정에 중요한 교훈을 하나 얻었다. 호주에선 서두르면 서두른 만큼 손해라는 걸.

    뉴스에이전시는 호주 전역의 역이나 상가 또는 대형 건물에서 신문과 잡지 복권 등을 파는 거대한 조직이다. 따라서 출퇴근 시간에는 의외로 바쁘다. 다행히 나는 배달이 없지만 있는 경우는 새벽 3시 반에 일을 시작해 출근 전인 6시까지 배달을 마쳐야 한다

    반품 정리는 이익과 직결되어 신경을 곤두세워야 하고 복권 당첨 여부를 확인하려는 손님에게도 항상 친절해야 한다. ‘폴링다운’이란 영화를 보면 동전을 바꿔주지 않아 수난을 당하는 장면이 나온다. 어느 누구는 동전을 바꿔주지 않은 한인을 비신사라고 비난했지만 그건 그런 장사를 해보지 않은 사람의 말장난일 뿐이다. 수도 없는 이런 시중을 들기에는 너무 피곤하다. 오죽하면 동전을 바꿔주지 않는다는 팻말을 상점마다 붙여야 했을까.

    이런 분주함에 비해 수입은 기대 밖이다. 언제부턴가 나는 티끌을 모아선 태산이 되지 않는다는 말을 자주 중얼거린다. 20센트짜리 잡지는 정가의 25%가 이익이다. 버스 티켓과 복권도 매출액의 5%가 고작이다. 거기에 비해 한 시간 종업원 임금은 15달러, 상가세는 일주일 2800달러다. 전기, 수도, 재산세도 큰 부담이다.

    그러나 역 건물 안에 있고 경찰이 정기적으로 순찰하고 있음에도 여태껏 연말이나 부활절에 금품은 물론 껌 한 통, 신문 한 장 요구받거나 상납해본 일이 없다. 그런 비용은 걱정 안 해도 되는 게 내게 새삼스러워 보이는 것은 웬일일까.

    종업원 한 시간 임금은 키 높이의 신문을 팔아야 하고 일주일 세를 내려면 한 트럭의 잡지를 팔아야 한다. 이렇게 이윤이 박한데도 권리금이 가장 높은 것은 불경기에 민감하지 않고 다른 사업에 비해 안정적이어서다. 오히려 복권 판매는 신장되는 기현상이 일어나기도 한다.

    월요일 아침에는 신문과 주간지가 산더미처럼 배달된다. 주간지 월간지 할 것 없이 선정적인 사진과 유명인과 관련된 가십이 주종을 이룬다. 유명한 타임지나 라이프지는 겨우 대여섯 권 팔릴 뿐이다.

    74년 처음 발을 디딘 호주는 지상 낙원이었다. 경제적인 수치가 그랬고 질서 의식이 그랬다. 담장은 경계를 위한 것이었지 도둑을 막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우유 값은 현찰로 우체함에 넣어두었고 분실물은 주인이 찾기 좋게 언제나 그 자리에 놓아두었다.

    내게 가게를 인계하던 주인은 24시간 도난에 대한 경계를 철저히 해야 이익도 낼 수 있고 속도 상하지 않는다고 일러주었다. 영업중, 영업이 끝난 후, 그리고 종업원의 빼돌리기도 주의하라고 강조했다. 야간에는 경보장치가 설치되어 있었고 문단속과 보험 가입으로 어느 정도 안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머지는 항상 불안했다.

    밖에서 지켜보노라면 모자를 이것저것 만지다가 기회를 노려 버젓이 쓴 채 유유히 사라지는 멋쟁이 커플도 심심찮게 목격할 수 있었다. 어린애들이 책이나 초콜릿을 감출 때는 범죄의식의 불감증에 눈살이 저절로 찌푸려진다. 이럴 땐 다가가 “돈을 지불했습니까?”라고 묻고 물건을 회수하는 것이 고작이다.

    금전등록기나 금고를 노리는 젊은 악당들의 전문적인 수법은 감시 카메라를 비웃는다. 교묘하게 종업원에게 안내를 부탁해 유인하거나 물건을 쓰러뜨려 놓고 한눈 파는 사이 금전등록기나 금고를 털어간다. 실로 감쪽같은 솜씨다.

    대낮에 금고를 털려는 도둑과 정면으로 마주친 적이 있다. 내 평생 이 순간처럼 가슴이 뛴 적이 없다. 스무 살 가량의 도둑도 뜻밖의 발각에 놀라 눈을 크게 뜨는데 내 평생 그렇게 크게 뜬 눈도 보지 못했다. 몇 번인가 허공을 향해 손을 휘젓더니 달아나기 시작했다. 나도 소리를 지르며 뒤쫓았으나 행인 어느 누구도 가세하지 않았다. 그는 차들의 왕래가 빈번한 도로를 가로질러 달아났고, 나는 처음 본 도둑 인상 때문에 며칠을 불안에 떨며 보내야 했다.

    석 달이 지날 무렵 나는 돈과 전화카드, 버스표가 가끔 증발되는 것을 발견했다. 종업원 짓이 분명하나 카메라나 금전등록기 조사로는 잡히지 않았다. 손님을 가장한 공범에게 한 장 값에 두 장을 내준다거나 20달러의 거스름돈을 50달러로 바꿔치기하는 것은 잡아내기 힘들다.

    나는 PC를 이용해 매일 매상을 분석해 도표로 만들어 게시했다. 이것이 원인이었는지 모르지만 종업원 둘이 스스로 그만두었다. 이후부터 나는 종업원을 구하느라 어려움을 겪었다.

    장사꾼 눈에 비친 갖가지 인간상

    도난 같은 어두운 면은 있어도 호주는 기초 질서와 선진 문화가 자리잡은 나라다. 줄을 서서 기다린다거나 차례를 양보하고 노약자나 장애인에 대한 봉사정신은 일상에 습관으로 정착되어 있다.

    갑자기 돌풍이 불면 모자와 포스트카드가 도로를 굴러다닌다. 미처 손을 쓰지 못해 허둥대면 행인들이 주워 전해주는 일이 다반사다.

    빅터(71)는 25년 전에 혼자 된 노인이다. 한점 혈육도, 가까운 친척도 없이 아내가 죽고 혼자서 쓸쓸히 살아왔다. 그는 본다이에서 새벽 첫 버스를 타고 서큘라키에 내린다. 내가 문을 열면 신문을 사서 길 건너 버스 정류장 의자에 앉아 하루를 보낸다.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신문은 그의 반가운 벗이요, 빼놓을 수 없는 동반자인 것이다.

    나는 겨울이 시작되는 5월부터 20분 늦게 문을 열기로 했던 적이 있다. 그는 내가 늦게 여는 그 시간만큼 내 상점 앞에서 기다렸다. 나는 일주일 뒤 다시 5시 45분에 열었다. 25년이나 계속된 그의 리듬을 변경할 배짱이 없었기 때문이다.

    지미(59)는 이탈리아에서 이민 와 33년을 한 장소에서 영업해온 이발사다. 종업원을 하나 두고 그 긴 세월을 서서 가위질하는 동안 허벅지가 통나무처럼 단단하게 굳어버렸다. 그는 이렇게 번 돈을 아까운 줄 모르고 매주 200달러 넘게 복권 사는 데 소비한다.

    그의 말대로라면 고급주택 한 채를 구입하고도 남을 액수를 투자했지만 당첨된 것은 800달러가 최고란다. 50여 장의 복권을 확인하러 오지만 당첨금이 수십 달러에 지나지 않으면 내가 괜히 미안해진다. 그러면 그는 너털웃음을 웃으며 말한다. ‘잭폿(1등당첨)’이란 일생에 단 한 장의 복권을 구입하지 않는 것 바로 그것이라고.

    70센트짜리 신문 한 장을 사면서 50달러 지폐를 내는 손님도 있고, 담배 한 갑을 사도 정확히 동전을 준비하는 손님도 있다. 신간 잡지는 모조리 들춰 읽다가 내던지는 얌체족도 있다. 복권 한 장을 사고는 마치 1등 당첨이 분명한 양 신주 모시듯 더없이 엄숙한 손님을 보면 제발 행운이 있길 나도 모르게 빈다.

    내 상점을 드나드는 수많은 손님 중 일본인의 매너는 어느 민족과 비교할 수 없게 돋보인다. 셔츠나 점퍼를 고르다가 마음에 들지 않아 사지 않을 때도 그들은 예외 없이 원래대로 바르게 정돈해 놓는다. 아무리 많이 사도 깎으려 들지 않고 깨끗이 치른다. 반드시 줄을 서서 자기 차례를 기다리는 것은 물론 나갈 때는 고맙다는 인사말을 잊지 않는다. 그들은 너나 없이 여행자 수표로 지불하는데 이제껏 문제 된 적이 없다.

    이런 훌륭한 매너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교육 정도에 차이가 나는 것도 아니다. 남녀노소나 빈부에 관계없이 한결같이 질서 있고 세련된 매너는 부러움을 넘어 얄미울 정도다. 깊은 감동을 받았는지 호주인 종업원이 감탄 섞인 질문을 하기에 나는 일본의 풍토 탓이라고 되지도 않는 대답으로 얼버무렸다.

    일본인과 대조적인 행동으로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손님도 종종 있다. 이것 저것 손에 잡히는 대로 뒤적거려 어질러 놓고 말 한 마디 없이 나가는가 하면 물건 하나를 사면서 원산지 규격 용도를 너무 세밀하게 물으며 필요 이상의 시간을 빼앗는 서구인도 있다.

    호주 종업원과 정가대로 계산을 하다가 내가 한국인임을 아는 순간부터 깎자고 떼를 쓰는가 하면, 장사꾼이라고 한 수 접고 대하려는 손님을 보면 참으로 난감하다.

    나는 한국인들이 물건을 사고 미화로 내밀 때는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그것도 100달러짜리로. 호주나 뉴질랜드가 여행 목적지일 텐데 어쩌자고 호주화가 아닌 미화로 환전해 출국했을까. 암시장 미화가 공정환율보다 높다는 선입견과 미화의 과신에서 비롯됐겠지만 불필요한 손해치곤 너무 어이가 없다. 환전을 한번 더 거칠 때마나 공정환율로 은행에서 환전한다 해도 5%, 관광지 환전소라면 10%, 상점에서 물건값으로 직접 지불해도 10% 손해는 피할 수 없다.

    한국의 해외 관광객이 450만 명에 육박한다고 한다. 미국, 일본으로 떠난 관광객 200만명을 제외한 나머지 250만 명이 어디 화폐로 환전했을까 궁금하다. 일본인처럼 현지 여행자 수표로 바꾼다거나 서구인처럼 신용카드 사용을 권장해 국가와 개인의 어마어마한 환차손을 막을 수는 없을까 하고 주제넘은 궁리를 해본다.



    노동자 천국의 허와 실

    호주는 노동자의 나라다. 노동당이 96년 초까지 13년간 집권했을 정도다.

    과연 노동자 천국인가.

    고용 유형에는 세 가지가 있다. 영구직, 임시직, 시간제. 영구직의 경우 주 38시간 근무에 연 4주간의 유급휴가와 정부에서 정한 연금이 있고 세금을 제하고 주 342달러를 받는다.

    나는 고용인으로서 16년간 일해왔다. 내가 고용주가 되면 이런저런 점을 시정해 고용인을 가족같이 대하고 그들이 주인의식으로 일하는 분위기를 만들겠다는 포부가 남 못지 않았다. 그러나 사업을 인수하고 겨우 네 명을 부리면서 그런 포부는 말끔히 잊어야 했다.

    이곳 노동자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노동할 뿐 고용주의 사정은 언제나 자기와 무관하다. 권리 주장은 하나도 빼놓지 않으면서 의무는 철두철미하게 돈 받는 만큼 치른다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

    출근 시간보다 5분, 10분 늦는 경우는 드물지 않다. 그러나 퇴근 시간은 5분전부터 30초마다 시계를 보기 시작해 초침이 지나가기 무섭게 일자리를 떠난다. 어쩌다가 교대자가 늦어도 약속 시간에 늦는다며 나를 불러 대신한다.

    새벽에 산더미처럼 배달된 신문과 잡지를 상점 안으로 들여놓을 때도 근무시간 전에 도착한 종업원은 지척에서 쳐다보기만 할 뿐 손 하나 거들지 않는다. 이런 냉혹함은 누가 지어낸 우스갯소리로 알았던 얘기들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을 말해준다.

    퇴근 시간이 1초라도 지나면 콤마만 찍으면 정리될 서류도 미완으로 덮어두고, 쓰던 볼펜 뚜껑조차 닫지 않고 나간다거나, 한 번만 더 때리면 다 박을 못도 그대로 놓아두고 망치를 내던진다는 말이다.

    내가 사업을 인수했을 때 종업원이 네 명 있었다. 나는 이들에게 동양의 가족적인 분위기를 접목하면 능률도 향상되고 결과적으로 매출도 오를 것으로 예상했다. 어떤 이유에서든지 전화카드나 버스티켓이 없어지고 금전등록기 금액보다 돈이 모자라도 바로 책임을 묻기보다는 내 손해가 얼마이고 이것을 메우려면 얼마를 팔아야 한다는 식으로 주의를 주고 타일렀다. 생일엔 돈 아까운 줄 모르고 선물과 꽃다발도 안겨주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이런 생각이 내 희망과 얼마나 동떨어진 것인가를 깨달았다. 자기 계획을 위해선 손님이 밀려 일손이 부족해도 약속이 있다는 핑계로 단 몇 분을 거들지 않고 그냥 나간다. 근무시간이 지나선 단 1초도 급료에 포함되지 않으므로 그렇게 희생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상점만 나가면 인사는커녕 어쩌다 눈이 마주쳐도 불쾌할 정도로 외면한다. 너무 분명한 구분에 고용주와 고용인 중 어느 편이 상하 관계인가 하는 혼란에 숨막히는 어지러움을 느껴야 했다. 이런 종업원들과 함께 무슨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고 안전한 사업 번창을 꾀할 것인가.

    내가 이런 고충을 털어놓자 서큘라키에 상점을 세 개나 가지고 있는 상인 조합장이 요령을 알려주었다.

    “진급이나 보직이 전무한 고용 구조에서 고용주가 휘두를 것은 은근한 해고 위협뿐이다. 임시직은 시간을 줄인다거나 일하기 힘든 새벽이나 밤늦게 배치하여 스스로 물러나게 만드는 거다. 이 전가의 보도로 항상 불안감을 주며 다루어야 한다. 그러다가 약효가 떨어지면 또 다른 종업원을 구해 대치하고. 어느 종업원도 평생 직장으로 여긴다거나 널 위해 일한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조금이라도 좋은 환경이나 보수라면 그들은 미련 없이 떠난다는 걸 명심하라.”

    하긴 이런 고용인을 다루는 고용주의 대책도 만만치 않다. 수년을 근무해온 사원을 해고한 후 다시 임시적으로 고용하면 경비 절감과 함께 비수기엔 불필요한 임금 지출을 막을 수 있다. 한 사람을 8시간 일 시키기보다 두 사람을 4시간씩 시키면 사실상 세금을 내줘야 하는 고용주로선 지출도 적고 단시간의 노동 능률 향상과 갑작스런 사직으로 인한 충격도 최소화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방법이 끈끈한 인간관계가 전무한 고용인과 고용주 사이에서 스스럼없이 통용되는 곳이 호주다.

    중식시간과 휴식시간은 급료에서 제외된다. 노동자는 적은 수입 때문에 여러 곳에서 일해야만 생활비를 벌 수 있다.

    노동자의 나라, 연장 근무를 강요할 수 없는 나라, 툭 하면 유니언에 고발되어 고용주가 제재를 받던 것도 다 시절 좋을 때 얘기인 것 같다.

    호주 문화를 이해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도박이다. 인류문화재로 지정된 오페라 하우스가 복권 수익으로 완공되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호주에서 혁명이 일어날 경우가 딱 한 가지 있는데 그것은 도박을 근절시킬 경우라는 말이 실감날 정도다.

    세계 최대 도박국인 호주에서는 연간 600억 달러의 돈이 별다른 생산 없이 임자만 바뀐다. 국민 1인당 400달러의 지출이다. 방법도 다양해 경마, 복권, 포커머신, 카지노 등이 불황을 모르고 연간 30%씩 증대한다.

    뉴스에이전시에선 이중 복권을 취급한다. 호주에선 복권을 사는 것이 슈퍼마켓에서 물건을 사거나 세금을 내는 것처럼 아주 자연스럽다. 퇴근하는 경찰도 은행 지점장도 체면에 구애받지 않는다. 하긴 높은 세금이 포함되어 있어 납세의 떳떳함마저 엿보인다.

    이민 오기 전 길몽을 꾼 날은 주택복권을 사곤 했다. 그때마다 행여 남이 볼세라 골목을 찾아가 훔치듯 사가지고 그 자리를 총총히 벗어났던 나로서는 지금까지 호주의 이러한 복권문화가 신기하고 놀라울 뿐이다.

    기적은 그것이 실제로 일어나기 때문에 존재한다는 말을 실감나게 하는 것이 복권이다. 1등에 당첨될 확률은 현실적으로 기적에 가깝다. 세무감사에 걸릴 확률이 100분의 1, 몸은 하나인데 머리가 둘인 세 쌍둥이가 태어날 확률이 신생아 5만명당 1명, 비행기 추락 사고를 당할 가능성이 7만2000분의 1, 번개에 맞아죽을 확률이 30만 분의 1인 데 비해 1등에 당첨될 확률은 750만 분의 1이다. 그야말로 기적이 아니고선 당첨되기 어려운 확률이다. 한국의 주택복권 1등 당첨 확률인 360만 분의 1보다 갑절 이상 어려운, 그야말로 낙타가 바늘구멍 빠져나가는 기적인 것이다.

    이런 확률에도 불구하고 NSW주에서만 일주일에 두세 명, 일년에 100명 이상이 복권 당첨으로 백만장자가 되니 일확천금에 대한 미련을 뿌리치기 힘들다.

    평생 동안 열심히 노력해도 부자 되기가 어려운 선진국 생활구조에서, 땀 흘려 일한 대가 외엔 한 푼의 눈 먼 돈도 구경하기 힘든 선진국 사회에서 간단히 백만장자가 되는 길은 오로지 이것뿐이다. 그래서 오늘도 너나 할 것 없이 아끼고 아낀 돈으로 복권을 구입하는 것이 습관으로 굳어버린 듯하다. 거기에 나 혼자만의 설렘과 기대 그리고 당첨 금액을 어디에 쓸 것인가를 미리 계획 세우는 짜릿한 흥분까지 곁들여서.



    복권에 얽힌 기막힌 사연들

    BHP는 호주의 세계적인 철강회사다. 이 회사는 광산도 가지고 있는데 막장에서 일하던 인부 몇이 기발한 아이디어를 짜냈다. 바퀴벌레 44마리를 모아 등에 일련 번호를 매겼다. 어둠 속의 빛을 이용해 경주를 시켰고 그중 6등까지 들어온 번호를 골라 복권을 샀다. 그것이 1등에 당첨되었고 그들은 막장을 벗어났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들을 바퀴벌레 등에 업혀 막장을 벗어난 사나이들이라 불렀다.

    복권을 살 때 반드시 지켜야 할 중요한 수칙이 몇 개 있다. 어느 누구에게 농담으로라도 당첨되면 절반을 뚝 떼어준다고 호기를 부린다거나, 일부라도 돈을 빌려서 산다거나, 번호를 몇 개 골라보라는 식의 도움을 청하는 일 등이다. 물론 이런 분쟁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 최종 소비자나 등록자에게 지불한다는 약관이 완벽하게 되어 있기는 하다. 그러나 아무리 친한 사이일지라도 횡재는 피치 못할 분쟁을 일으키고, 그것이 법정문제로 비화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더욱이 남아도는 선진국 변호사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빈틈을 비집고, 판사는 공돈인 양 남의 돈으로 자비를 베풀기 마련이다.

    데이빗과 셀리는 술집에서 만났다. 그들은 자연스레 잠자리를 같이하며 젊음을 불태웠고 그리고 부담 없이 헤어지는 사이였다. 어느 날 데이빗이 복권을 사며 “당첨되면 절반을 줄게”라고 말했다.

    그저 해본 소리다. 그런데 그것이 95만 달러에 당첨되고 말았다. 거금을 쥔 그는 술집에서 만난 여자를 멀리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헤어진다고 선언했다. 그런데 농담 한마디 던진 것이 화근이었다. 여자는 약속대로 당첨금 분배를 요구하며 법정으로 몰고 갔다.

    판사는 28만 달러를 주라고 판결했다. 데이빗은 그녀와 겨우 다섯 번 잠자리를 했을 뿐이라며 비싸다고 투덜댔지만 복권 수칙을 어긴 대가를 톡톡히 지불해야 했다.

    크리스와 미셀은 둘 다 가정을 가진 가장이요 주부다. 어쩌다 눈이 맞아 이중의 애정행각을 지속해오고 있지만 차마 둘 다 가정을 버릴 수는 없는 처지였다. 이중생활을 지속하던 어느 날 크리스가 말했다.

    “이 복권이 당첨되면 서로 가정을 정리하고 우리 둘만의 보금자리를 마련합시다.”

    사랑의 염원인가. 복권은 당첨되었고 그들은 계획대로 가정을 정리하고 둘 만의 오붓한 인생을 시작했다.

    그런데 석 달이 지나자 남자가 도로 옛날 가정으로 돌아가겠다고 선언했다. 여자는 당첨금 분배를 요구하며 법정으로 갔다. 이 어려운 재판은 시간을 끌다가 휴정시간에 당사자가 분배 액수를 비밀에 부친 채 싱겁게 합의해 끝나고 말았다.

    고액 복권당첨자는 당첨 사실을 노출시키지 말아야 한다. 즉석복권 한 장이 10만 달러에 당첨된 어느 당첨자는 기쁜 나머지 친구와 친척들에게 자랑했다.

    한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사람들이 몰려들어 그 동안의 인간관계와 신세진 일을 내세워 분배를 요구하며 소란을 피웠다. 돈도 받기 전에(1000달러가 넘으면 반드시 2주가 지나야 지급한다) 고성이 오가는 난장판이 벌어졌다. 이웃의 신고로 경찰이 출동해서야 간신히 진압되는 어처구니없는 사건도 있었다.

    복권에 얽힌 풋풋한 미담도 간간이 들린다. 클럽을 치우던 청소원이 지갑을 주웠다. 현금 300달러가 든 지갑을 고스란히 주인에게 돌려줬다.

    “감사하오. 되돌아온 현찰로 전부 복권을 사겠소. 당첨되면 절반을 드리리다.”

    복권은 11만 달러에 당첨되었고 지갑 주인은 절반을 지갑 주워준 청소원에게 나눠주었다.



    인종 차별은 아직도 존재하는가

    호주는 아직도 인구의 60%가 영국 출신으로 이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백호주의를 73년에야 포기한, 본토보다 더 보수적인 나라다. 따라서 170여 민족이 모여 생존경쟁을 벌이는 사회에서 기득권을 놓고 인종차별이란 말이 끊임없이 오르내린다. 심지어 35명의 무고한 인명을 총기로 살상한 마틴 브라이언트라는 살인마가, “오늘은 일본인이 몇 명 보이지 않는군”이란 한마디를 던지고 총질을 해댔을 때 그것이 동양인에 대한 살의가 아닌가 하고 의견이 비등했다.

    서큘라키 쇼핑센터에는 한인 상점이 내 것을 포함해 세 개 있다. 공통점은 젊은 백인 절도범들의 끊임없는 공격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나는 그들의 시도를 발견하고 중간에 차단했지만 두 상점은 한 번씩 도난당했다.

    어느 젊은 백인은 내 상점에 진열된 잡지를 시도 때도 없이 훑어보다가 아무 데나 내던졌다. 못마땅해서 그가 들어올 때마다 도와줄게 없느냐고 물었다. 그는 미안해하기는커녕 네 나라로 돌아가라고 욕을 해댔다. 이들이 거침없이 내뱉는 욕은 아직 개념이 없어 다행이지 해석하면 천박하기 그지없다.

    이른바 ‘헨슨 파문’이란 게 있다. 96년 9월 연방하원에 당선된 여자 국회의원이 처녀 연설에서 극단적인 반아시아 이민, 반원주민 발언을 한 것이다.

    내용은 아시안 이민으로 실업률이 오르고, 복지 혜택에 예산이 과다하게 지출된다는 것과 호주가 아시안으로 게토화되고 있다는 정견을 발표한 것이다. 여기에 하워드 총리가 언론 자유를 내세워 침묵으로 짐짓 옹호의 자세를 취하여 백호주의 망령을 되살려낸 것이다. 아시안 이민 철폐의 도화선에 불이 붙고 아시안에 대한 욕설이나 침 뱉기가 평소보다 3배 이상 늘어났다.

    그녀는 한 술 더 떠 실업률이 제로로 떨어질 때까지 이민을 중단하고 그 다음부터는 영구 출국하는 역이민 숫자만큼만 유입하라고 기염을 토했다. 그녀 눈엔 총인구의 5%에 불과한 90만의 아시안이 눈엣가시로 보이는 것이 분명하다. 실업자가 있으면 사회복지기금을 축내는 천덕꾸러기로, 입국과 동시에 취업하면 호주인의 일자리를 빼앗는 적으로, 그들의 눈에는 아시안 이민자가 그렇게밖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더구나 자기 나라에서 부쳐오는 돈으로 집도 사고 차를 굴리는 이민자들을 그들로서는 결코 용납할 수 없을 터였다. 그들의 인생이란 것은 정년퇴직할 때까지 할부금을 갚아나가야 하는 것이니 말이다.

    사실 그 전에도 인종차별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한인이 경영하는 간이 음식점 간판에 백인 청년이 침을 뱉고 달아났다. 주인이 붙잡아 항의하며 경찰에 신고했다. 적반하장으로 백인은 자기가 피해자라고 주인을 고소했다. 영어가 서툴러 정황을 자세히 설명할 수 없었던 한인 주인은 오히려 가해자로 조사를 받았다.

    또 있다. 내가 사는 타라무라에서 백인 학생 15명과 중국 학생 3명이 패싸움을 벌였다. 수나 힘에서 열세에 몰린 중국 학생들은 야구방망이를 휘둘러 위기를 모면했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은 오히려 흉기 사용을 문제 삼아 중국학생을 가해자로 연행하는 어처구니없는 사건도 있었다.

    헨슨 의원의 반아시아적 극우 보수적 발언은 국내외에서 심각한 문제를 일으켰다. 팀 피셔 연방 부수상은 그런 인종주의적 발언이 대 아시아 무역관계에 손상을 입힐 것이라 비난했다. 국내 관광업계와 곡물업계에선 호주의 주된 수출 시장인 아시아 국가들과의 관계에 악영향을 초래할 것이라 경고했다.

    헨슨 의원의 발언 후 마하티르 말레이시아 총리는 호주가 아시아 국가들과 어떤 관계를 정립할 것인가는 그들의 외교정책에 달려 있다며 반아시아 정책에 우려를 표시했다. 그는 아울러 말레이시아에 대해선 우스꽝스러운 언급을 말아야 유대관계가 지속된다고 경고했다.

    그의 발언 후 호주 야당과 재계에선 양국 관계가 다시 악화되어서는 곤란하다며 우려를 표명했다.

    타일랜드는 호주가 아시안을 무시하고 인종차별 이슈로 불장난을 하고 있다고 비꼬면서 아시아 국가들이 곡물과 석탄 등 원자재 수입선을 호주에서 다른 나라로 바꾸고 호주 관광 및 유학도 중지할 수 있다고 보복 조치 가능성을 흘렸다.

    이처럼 아시아 현지 신문들이 대대적으로 보복적인 보도를 시작했다. 그러자 호주 의회에선 여야 합의로 헨슨 의원이 차기 의회에 진출하는 것을 봉쇄하기로 결의했다. 정부 차원에서 무역·관광·유학 산업의 결정적인 악재로 작용할 것을 우려해 각국에 반아시아적 발언은 한심한 일이라며 사과했다.

    이런 판국에 주재국 대사 중 지레 겁먹은 자의 유일무이한 ‘나 홀로 몸보신용’ 공식 발언이 튀어나온다.

    “폴린 헨슨 의원의 반아시아적 발언이 아시아 지역 국가에서 호주의 대외 이미지에 상처를 주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인종차별 논쟁 자체가 한호 관계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을 것입니다. 또 이것은 어디까지나 호주 국내 문제일 뿐입니다.”

    이임을 앞둔 권병현 대사가 96년 10월 22일 공식 기자회견에서 한 말이다. 그것도 한국 교민을 위해 최선이라고 강조하는 걸 잊지 않으며.

    이제 호주 정부는 세계 제2위 교역국으로 가장 심한 무역 역조를 챙기는 한국 정부에 사과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나는 이런 민족과 국가 간의 민감한 문제가 뜨겁게 달궈질 때마다 한국정부의 물러터진 자세에 답답함을 누를 길 없다. 그토록 많은 국가와 민족을 위한다는 엘리트들은 다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가? 알고도 대범한 척 뒷짐지고 방관만 하는가?

    우리가 양담배를 규제할 때 모욕적인 언사(“와이셔츠를 수입하지 않겠다”)를 던진 일본 극우파의 망언을 한번쯤 본받을 법도 한데 이상하게 못 들은 척 침묵으로 일관하는 것이 내게는 수수께끼로 보인다.

    엄청난 무역 흑자를 내면서도 겁주기 위해 주기적으로 한국 상품을 골라 덤핑으로 제소해 자국의 변호사 주머니와 인지세 수입을 올리면서 공매를 때리는데도 갓 허물 벗은 물렁게처럼 신음 소리 하나 내지 않는 것이 못마땅한 것이다.

    “한국인의 다감한 정서는 자존심을 다치면 입맛이 변해 다른 나라 쇠고기를 찾습니다. 얼마나 단결력이 강한가를 보기 전에 알아야 현명한 정책자라고 할 수 있죠.”

    이런 으름장으로 상대국에 따끔한 일침을 놓은 후 여차하면 높은 자리 박차고 시원하게 내려오는 진정한 애국자를 한 사람이라도 보았으면 좋겠다.

    서구 문명의 기본 정신은 평등과 박애가 아니다. 그들의 생활철학은 철저한 ‘노 바킹 노 이트’다. 짖는 개만이 자기 몫을 찾아먹을 수 있다는 말을 금과옥조로 신봉하는 현실적인 이익 추구의 정복 문화다.

    그까짓 초선의원의 처녀 발언을 왈가왈부한다는 것은 유구한 역사의 대한민국 위신 문제라고 의젓한 체한다면 그들은 정말 그까짓 것 정도로 간주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혈맹으로 맺은 양국의 돈독한 우의를 들먹이며 우리만은 각별한 사이라고 외교적 수사를 늘어놓는다면 짝사랑의 오해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언젠가 너도 나이 먹고 부모 될 텐데

    “관광지는 어디나 비싸다고 차 안에서 말씀드렸잖아요.?p>? “개인행동 마세요. 그러다 한번 처지면 못 찾아요.”

    “나중에 쇼핑 시간 따로 드려요.”

    “시간 없어요. 기웃거리지 말고 빨리빨리 따라오세요.”

    한국 단체관광객이 내 상점밖에 내놓은 포스트 카드나 모자를 만지작거리면 가이드가 어김없이 쏘아대는 날카로운 말들이다. 오페라 하우스나 시드니 항구 관광객이 이용하는 버스는 반드시 내 상점 바로 앞에서 정차한다.

    국적을 불문하고 관광객이 차에서 내리면 가이드는 호주의 뉴스에이전시라 소개하고 우표나 전화카드가 필요한지를 물으며 안내한다. 그러나 유독 한국 단체관광객은 가이드의 차단으로 접근이 불가능하다.

    호주를 찾는 한국 관광객은 20만 명에 이른다. 여행사 난립에 따른 덤핑 수주, 이에 따른 질 저하로 정부는 물론 교민들이 연합해 관광총연합회를 만들고 자성의 목소리를 높일 정도다.

    다음에 내가 겪은 사례는 그 폐해를 잘 보여주는 단면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관광회사에 대한 애증이나 가이드의 불손에 대한 꾸짖음과는 하등 관계가 없다. 다만 나 자신이 칠순의 부모를 조국에 두고 항상 그리워하는 쉰의 자식일 뿐이어서 하는 말이다.

    월요일이면 백만장자의 꿈을 꾸며 복권을 사려는 1500여 명의 손님들로 하루 종일 북적댄다. 한 시간에 100명 이상이 줄을 잇는 셈이다. 마감 시간인 오후 8시에 문을 닫고 나오면 파김치가 되어 가까스로 전철에 올라 귀가한다.

    유달리 바빴던 6월의 어느 월요일 문을 잠그고 나오는 나를, 3번 부두에서 간이음식점을 경영하는 토니가 허겁지겁 달려오며 불렀다.

    “이 동양 노인이 내 상점에 들어와서 뭐라 사정하는데 네가 도와주렴.”

    “나 이제 살았네 살았어.”

    노인은 내가 한국인인지 확인하지도 않고 덥석 손부터 잡더니 눈물을 글썽이며 살았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어떻게 된 겁니까, 할아버지?”

    자식들이 칠순 잔치 대신에 호주관광을 보내드렸단다. 난생 처음 보는 외국 풍물은 모든 것이 신기했다. 오페라 하우스를 대강 돌아본 단체는 버스가 기다리는 정류장으로 되돌아가는 걸음을 재촉했다.

    오페라 하우스에서 정류장까진 600여 m거리다. 그 거리를 걷는 동안 노상에서 묘기를 보이는 서너 곳에선 행인들끼리 어깨를 부딪치며 비집고 지나가야 한다. 노인의 더딘 걸음은 어디에선가 일행을 놓쳤고, 그들을 찾느라 세 시간 동안 일대를 헤맨 것이다. 노인의 말대로라면 수십 번은 왔다갔다하며 혹시 자기를 찾아 나섰을지 모를 일행에게 발견되길 기대했다는 것이다.

    어둠이 내려앉고 행인이 뜸해지자 노인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결국 아직 영업중인 토니 상점에 무턱대고 들어가 눈물을 글썽이며 한국말과 손짓발짓으로 하소연했던 것이다.

    “어느 여행사입니까? 호텔은요? 뭐 단서가 될 만한 것이라도 있습니까?”

    대답이 나올 리 없는 뻔한 질문은 하도 답답하고 막연해서 내가 해본 소리다. 노인은 아무것도 없다는 걸 증명해 보이려는 듯이 주머니를 뒤져 나한테 보이기 시작했다. 기내 식사에 나오는 간장 종지와 어디선가 얻은 시드니 안내서가 전부였다.

    “잠깐만요.”

    노인의 손에 영수증 하나가 보였다. 얼른 보니 한인 상점에서 오전에 쇼핑한 것이다. 나는 도난 경보를 해제하고 다시 내 상점으로 들어갔다. 교민 잡지에서 번호를 확인해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이것은 무슨 일일까? 내 신분을 밝히고 딱한 사정을 자세히 설명해도 저쪽에선 여행사 이름을 도무지 알려주려 하지 않았다. 내가 재차 물었으나 온 여행사가 하나도 없었다고 딱 잡아 뗐다. 영수증과 액수를 얘기해도 막무가내였다. 나를 호객행위를 위해 정보수집이나 하는 거간꾼으로 여기는 것이 분명했다. 하는 수 없어 노인에게 수화기를 건넸다. 울먹이며 사정을 얘기하자 그제야 오전에 다녀간 세 개의 여행사 이름을 알려줬다.

    내가 다음에 해결할 일은 그 세 개의 여행사 손님이 지금 어디에 투숙하고 있는지를 알아내는 것이다. 나는 이 작업을 위해 내가 아는 시드니 한인은 전부 동원한 듯싶다. 그 결과 여행사를 알아냈고 그 일행이 공항 근처 힐튼호텔에 묵고 있다는 걸 확인했다. 가까스로 가이드와 연결되었다.

    “그 할아버지가 당신 상점에 뭘 구입하러 갔습니까?”

    그때까지 한 명이 실종된 것도 모르고 있던 가이드가 엉뚱하게 내게 던진 질문이다. 그는 저녁식사를 마친 일행 중 가라오케 옵션관광객을 모아 시내로 나가는 중이니 그때까지 기다려 달라며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나는 놀라기도 하고 화도 났지만 참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노인은 내가 자기를 남겨두고 갈까 봐 연신 고맙다는 말을 되풀이하며 눈빛으로 나를 붙들었다.

    가이드가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한 시간이 훨씬 지나서였다. 그는 가라오케 술집에 손님을 안내해놓고 분위기까지 잡아놓고 온 것이 분명했다. 차에서 내린 그는 나에게 고맙다는 인사는커녕 내 존재는 아예 무시한 채 노인에게 다가갔다.

    “할아버지 이런 식으로 개인 행동하면 내일 귀국시켜 버립니다.”

    아마 그는 손자뻘쯤 되는 나이인 듯 싶다.

    언젠가 한국으로 생방송되는 라는 라디오 실황중계를 방청한 일이 있다. 한 여자 유학생이 출연해 어렵게 학비를 벌어 공부하면서도 부산에 있는 아버지를 안심시키는 대화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얼마 후 결원이 생기자 나는 기다렸다는 듯 한국 유학생으로 충원할 계획을 세웠다. 간단한 세 줄의 광고에 무려 15명이 전화를 걸어왔다. 나는 그들을 면접하면서 실망을 금치 못한다.

    이곳 현지인들은 기껏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일자리를 이곳저곳 전전한 경력에도 면접에 임하는 태도는 완벽하다. 연방고용성에서 무료로 타이핑을 해주기도 하지만 이력서, 추천서, 자기소개서는 상대방에게 호감을 주기에 충분하다. 전 직장에선 반드시 추천서를 요구해 받아나오고, 불과 몇 시간의 직업 교육도 내용과 기간이 상세하게 기록되었고, 자기소개서는 온갖 찬사가 다 동원된 느낌이다.

    나는 15명의 유학생을 모두 면접했지만 어느 누구도 종이 한 장 내미는 사람을 볼 수가 없었다. 주민등록이나 신원보증, 재정보증이 없는 사회에서 하루에도 수천 달러 현금을 취급하는 뉴스에이전시 고용주가 어떻게 안심하고 금전등록기를 맡길 것인가를 전혀 관심 있게 생각해보지 않은 것이다.

    반바지에 슬리퍼를 신고 산책 나온 차림을 하고 있는가 하면 남자 친구를 대동한 학생도 있었다. 게다가 그들의 영어회화 실력으로 과연 줄 선 손님들을 손쉽게 처리할 수 있을지도 의심스러웠다. 그래도 나는 그중 금전등록기를 사용해본 경험이 있는 한 학생을 고용했다.

    그러나 불과 사흘을 교육시키다 그만두었다. 이른 새벽 일을 해낼 체력과 의지가 모자랐던 것이다.



    한국 유학생의 탈선

    유학생은 소수의 넉넉한 사람을 제외하면 돈 걱정과 고독감으로 심각한 갈등을 겪게 마련이다. 갑자기 달라진 환경에서 스스럼없는 남녀관계, 생각처럼 쉽게 해결되지 않는 언어장벽, 성이 개방된 사회에서 넘쳐나는 시간 여유 그리고 고독.

    가치관이 정립된 학생일지라도 웬만한 의지로는 탈선의 유혹에 흔들리기 쉽다. 하물며 한국에서 부모가 과잉보호로 마마보이로 키웠다거나 제대로 가정교육을 받지 못한 학생인 경우 유학생활은 방종에 가까워진다.

    이들의 탈선 행각은 도를 넘어 교민의 우려를 낳을 정도다. 그 뒤치다꺼리는 교민 몫이기 때문이다. 카지노에서 2년이나 상주하며 10여만 달러를 날린 여학생도 있다. 어느 남학생은 카지노 도박에서 학비를 다 날렸다. 본전 찾기 위해 급전을 대주는 고리대금업자에게 돈을 빌렸다가 며칠 사이에 5000달러, 원금과 이자가 8000달러로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이런 고리대금업자는 반드시 폭력조직과 연계되어 있어 그들 손아귀에서 헤어날 길이 없다.

    어떻게 전해야 유학 보낸 고국의 부모가 걱정을 덜할까 모르겠다. 가라오케에서 밤늦게까지 접대부로 일하는 여학생, 학교 등록은커녕 유흥비를 벌기 위해 힘든 막일도 마다않는 귀엽게 키운 자식들, 그리고 문란한 이성관계. 그 또래의 자식을 둔 나는 남의 일 같지 않아 안타까울 뿐이다.

    실비아(58)는 그야말로 나에게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일요일 오전이면 어김없이 들러 무료로 배포되는 잡지부록이나 TV안내서를 생큐 한마디 던지고 얻어가던 그녀가 어느 날 육아잡지와 한국이 소개된 여행잡지를 골라 계산대로 왔다.

    “웬일이야 실비아. 딸이 해산이라도 했나?”

    “그럼. 그 이상이지. 지난 월요일 양녀를 데려 왔거든. 엄마는 한국인이야.”

    81년생 여학생이 한국에서 유학 와 중2에 편입했더란다. 공부는 뒷전이고 위조한 신분증으로 나이를 속여 디스코텍을 출입하던 그녀가 어느 날 남자를 데려와 늦잠을 자는 바람에 주인에게 들키고 말았다. 아무리 개방사회지만 호주인 주인은 한국 부모에게 연락했다. 설마 그랬을까만은 뜻밖에도 부모는 ‘하숙비는 달라는 대로 줄 테니까 임신만 하지 않게 주의를 주라’고 부탁을 하더란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성 지식에 무지한 그녀는 임신을 했고 아기를 낳았다.

    “내 딸은 운이 좋아. 기다리지 않고 병원에서 출산과 동시에 데려왔으니까.”

    이날 밤, 보기 싫으면 눈을 감고 듣기 싫으면 귀를 막으면 된다는 패배주의적인 사고방식으로 조국을 등지고 태평양을 건너온 나지만 또 하나의 빗나간 운명을 보는 것 같아 내내 가슴이 아팠다.

    내가 이 이야기를 어느 모임에서 특종인 양 얘기했다가 요즈음의 X세대를 모르는 시대에 뒤떨어진 중년으로 취급받았다. 외로움 탓일까? 아니면 젊은이들의 성 풍속도가 그럴까? 10대, 20대 유학생들은 집세와 생활비 공동부담이란 명분으로 너무 쉽게 남녀가 동거에 들어간다. 의견 차이나 환경 변화로 갈라설 때도 언제 보았냐는 듯 두부 자르듯 산뜻하고 간단하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런 미련 없는 헤어짐에 상처를 받는 쪽은 언제나 남자라는 사실에 어느새 내가 고전적인 세대로 밀려났다는 허무감만 깊이깊이 새겼다.



    넘은 산과 넘어야 할 산

    뉴질랜드 이민이 붐을 이루던 몇 년 전 한국신문에서 안정된 위치의 화이트 칼라들로 이민 설명회가 성황을 이루었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

    그들이 내세운 이유였다. 한국 사회에 대한 염증이 낳은 답변이겠지만, 삶을 여유있게 즐기겠다는 것에 더 비중을 두었던 모양이다.

    지금쯤 그들이 이민 생활에서 처음의 기대를 얼마만큼 현실로 바꾸었는지, 아니면 그 실현이 얼마나 어려운 환상이었는가를 실감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권리금을 날린 후, 전기회로라면 손금 보듯 하는 내가 시간당 9달러짜리 배선보조원 자리도 거절당한 날 남은 이력서를 모두 찢어버렸다. 자포자기에 빠져 저축이 바닥나면 집 팔아서 연명하고…. 그 다음은 그때 가서 걱정하기로 하고….

    집구석에서 하는 일 없이 공짜로 배달되는 신문이나 뒤적이던 어느 날 연변교포의 무작정 호주 유입 소식을 들었다. 빚 얻고 집 팔아 범죄조직에 엄청난 돈을 건넨 후 아무런 정보도 연고도 없이 시드니에 내린 것이다. 그들은 여행사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한인이 많이 사는 캠시로 잠적했다.

    영어 한 마디 못하고 기술도 없는 그들이지만 여자는 식당 허드렛일로, 남자는 험한 막일도 불사하며 일해 생활비 충당은 물론 고향에 송금까지 한다는 그 치열한 생존력에 나는 부끄러웠다. 그들의 목소리는 한결같았다.

    “영주권만 있다면 금방 떼부자 되겠소.”

    영주권자인 나는 이 사회가 인재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불평이나 해대고 있었던 것이다.

    뉴스에이전시는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잠시도 쉴 수 없는 고된 직종이다. 나는 이 생활에 6년째 몸담으면서 깨달은 게 있다. 그것은 대학 4년간의 새벽 기상과 힘겨웠던 군대 훈련에 대한 고마움이다. 엊그제 같은데 벌써 30년 전의 일인가! 어떻게 네 시 반에 일어나 14시간이나 쉬지 않고 일하느냐고 누가 물으면, 이렇게 답하고 싶다.

    “그거요? 영도의 찬 바닷바람 맞으며 조별과 하는 셈치죠. 이래봬도 땀의 소금기가 허옇게 밴 뻣뻣한 훈련복을 입은 채 그 지독한 상남 모기가 물어대도 꿀맛 같은 잠을 자던 사람이라고요.”

    이곳 한인들은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그 어느 민족보다 내 집 소유율이 높다는 통계도 대한민국 남자라면 누구나 겪는 군대에서의 훈련과 경험이 그 원동력이라는 게 내 믿음이다.

    퍼시픽 하이웨이, 끊임없이 남태평양의 바다를 보여주는 도로 이름이다. 주말이면 도시를 빠져나가는 차량행렬이 꼬리를 문다.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 삶을 즐기기 위해서, 주말을 위해 일주일의 노동을 견뎌낸 그들이 경쟁하듯 휴양지를 찾아나서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호주의 삶이란 듯이.

    나는 토요일을 체력단련의 날로 정했다. 병사가 내일의 전투를 준비하듯 갑작스러운 종업원의 결근에 대비해 항상 튼실한 체력을 준비해둬야 한다.

    평상시와 마찬가지로 네 시 반이면 어김없이 눈을 뜬다. 더 누워 있어야 잠은 오지 않고 허리만 아프다. 아예 뒤척임을 포기하고 일어난다.

    밖에 나오면 아직 새벽의 어둠이다. 유명한 시드니의 썰렁함이 몸 구석구석을 파고들고 바람이 스칠 때마다 한기를 느낀다. 저절로 움츠러드는 사지를 펴고 머뭇거림 없이 주말의 적막이 감도는 거리를 혼자서 뛴다. 20km 거리다. 이런 뜀박질은 일주일의 고된 일과를 준비하는 데 안성맞춤이다.

    주말의 차량 행렬과 반대방향으로 조깅하는 동안 나는 꼭 배터리 충전과 방전 같은 느낌을 내내 떨쳐버릴 수가 없다. 내가 이 충전을 위해 조깅을 선택한 이유는 간단하다. 가장 짧은 시간에 가장 효과적인 체력단련이라는 것과 돈 한푼 들이지 않고 간단히 실시할 수 있는 운동이라는 것이다.

    한인 식품점이나 한인들이 모이는 장소에 주차해 보면 내 차보다 싸구려 차는 보기 힘들다. 지붕의 기와는 빨간 칠이 벗겨진 지 오래다. 곰팡이가 자라 검게 변한 기와는, 지나가는 장사꾼마다 교환하라며 견적서를 빼놓지 않고 우체함에 넣게 한다.

    호주에서 나말고 또 누가 있을까만은 그 흔한 골프채도 낚싯대도 없지만 이런 단출이 부끄럽기는커녕 더 없이 행복하다. 이젠 정착의 어려움도 대부분 넘겼고 사업도 숨돌릴 만하니까 집도 새로 짓고 차도 고급으로 바꾸라고 하지만 나는 조금도 관심이 없다.



    고된 육체는 잡생각할 겨를이 없다

    아니 나는 아직 멀었다. 나에게 사업을 판 전 주인은 26년을 4시 반에 일어나야 하는 뉴스에이전시를 운영했다. 재작년에 환갑을 넘겼는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그 시간에 일어나 내 옆에서 음료수 가게를 운영하고 있다. 좋을 때 한몫 잡아 여생을 부족함 없이 편안히 보낼 재산도 모았지만, 그의 부지런함과 검소함은 여전하다.

    20년 전에 구입한 반 트럭은 극성인 시드니의 차도둑조차 거들떠보지 않는다. 소매가 다 낡고 색 바랜 점퍼는 언제부터 입었는지 짐작도 되지 않는다. 나는 그를 볼 때마다 감정을 가진 인간이 아니라 기름칠 일 없는 로봇이 아닌가 하고 의아해할 정도다.

    어느 날 평생을 쉬지 않고 새벽부터 일해온 그의 인생관이 하도 궁금해서 장난 삼아 기어이 묻고 말았다.

    “조, 너는 무슨 재미로 사니? 넌 취미도 휴식도 없니?”

    “그야 당연히 일하는 재미로 살지. 고된 육체는 잡생각 할 겨를이 없어야 건강하다는 걸 너는 모르니?”

    그는 오랫동안 생각해온 인생철학이라는 듯 서슴지 않고 대답했다.

    “아무리 그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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