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12월호

말도 팔고 책도 팔고 문화도 판다

연간 매출 1조 7000억원

  • 이나리 byeme@donga.com

    입력2006-07-28 12:57: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한해 유학생 수 60여만 명.
    • 대영제국은 사라졌지만, 영어 산업의 ‘해’는 아직 지지 않았다. 경제적 이득을 넘어 영어 종주국으로서의 자존심을 지키려는 영국 정부의 치열한 노력. 그 현장을 찾았다.
    젊은이들로 북적대는 런던 옥스퍼드 스트리트의 한 카페. 맥주, 샌드위치, 프랜치 프라이와 에스프레소를 나누며 담소를 즐긴다. 귀에 톡톡 와 박히는 영국식 영어 특유의 선명한 발음. 영어 공부를 어느 정도 한 사람이라면 금방 느낄 수 있는 미국식 영어와의 차이점이다.

    이처럼 단어마다 점 찍듯 힘을 실어주는 말 품새는 한국 사람의 귀에 확실히 생소하다. 중·고등학교 시절 내내 미국식 영어를 배워 온 까닭이다. 그뿐인가. ‘영어’ 하면 당연히 미국을 떠올리고, 어학 연수도 제대로 하려면 미국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 우리네 일반적인 생각이다.

    그러나 영어의 ‘종주국’은 엄연히 영국이다. 영어 사용국 대부분이 과거 영국의 식민지였거나, 경제·사회·문화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맺어 온 나라들이다. 미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인도, 싱가포르, 남아공화국 등. 영연방의 이름으로 묶여 있는 국가만 해도 54개국에 이른다. 그 국민 대다수는 여전히 영국식 영어의 영향권 아래 놓여 있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 불렸던 대영제국의 영광을 사라졌지만 그때 뿌려놓은 언어의 씨앗은 이렇듯 만개해 또 하나의 ‘권력’이자 보이지 않는 힘으로 작용하고 있다.

    영국은 이를 바탕으로, 세계를 대상으로 한 영어산업 육성에 남다른 열성을 보이고 있다. 실제로 매해 60여만 명의 연수생과 유학생들이 영국을 찾아 10억 파운드(약 1조7000억 원)라는 거액을 뿌리고 간다. 영국 관광 총수입의 4%를 차지하는 어마어마한 액수다. 물론 이 숫자 안에는 순수 영어연수생 외에 석·박사 학위나 기타 전문 교육을 받으러 온 사람들도 포함돼 있다. 그런데도 이들을 모두 ‘영어 산업 소비자’의 범주에 넣는 건, 영국이 영어 사용국이자 영어문화권의 핵심 국가임을 고려해 유학지를 선택했을 것이라 짐작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국이 외국인 영어 교육에 각별한 관심을 쏟는 것은 단지 경제적 이득을 취하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영어가 명실상부 ‘세계공용어’로 발돋움하고 있는 지금, 영어문화권 중심국으로서 위상과 영향력을 유지하는 것이야말로 영국 정부의 진정한 목표이자 과제인 것이다.





    “영국은 유럽 문화의 전진기지”

    영국은 미국, 호주 등 여타 영어연수 대상국과는 달리 정부 차원에서 영어 산업 전반을 관리·감독한다. 그 실무를 담당하는 곳이 브리티시 카운슬(The British Council), 즉 영국문화원이다.

    브리티시 카운슬의 주 업무는 영국과 세계 각국 간의 문화 교류다. 런던, 맨체스터 두 곳에 본부가 있으며 세계 243개 도시에 지부를 두고 있다. 각 지부의 주요 업무는 영국 관련 각종 자료 제공, 교육 과정 운영, 문화·예술 행사 개최 및 교류 추진 등이다. 그 핵심에 영어 교육이 있다.

    10월답지 않게 몹시 추운 가을날, 케임브리지 지부 사무실에서 브리티시 카운슬의 인증 담당 매니저 체리 고프 씨를 만났다. 그녀의 설명에 따르면 브리티시 카운슬은 정부 보조금과 유럽공동체(EU) 기금, 그리고 각 지부가 운영하는 영어 클라스 수익금으로 운영된다. 이처럼 영어 교육은 브리티시 카운슬의 직접적인 재정 기반이기도 하다.



    세 가지 단점, 음식·날씨·물가

    영국 영어 산업과 관련해 브리티시 카운슬이 맡은 가장 중요한 업무는 ‘인증(accreditation)’이다. 고프 씨가 담당하는 것이 바로 그 일. 맨체스터 본부 조사원 48명을 지휘, 380개 기(旣)인증 영어 교육기관에 대해 3년에 한 번씩 불시 감사를 단행한다.

    그렇다면 그 대상이 되는 교육 기관들은 어떤 곳일까.

    브리티시 카운슬이 인증하는 영어 교육기관은 크게 둘로 나뉜다. 하나는 대학교, 대학 등 공공기관이 운영하는 곳들이다. 이들을 아우르는 조직이 바셀트(BASELT, British Association of State English Language Teaching)다. 또 한 부류는 사립 학원들. 이 역시 아렐스(ARELS, Ass-ociation of Recognised English Lan- guage Services)라는 별도의 조직으로 묶여 있다.

    브리티시 카운슬은 외무성, 교육부, 바셀트 및 아렐스 본부의 도움을 받아 수많은 교육기관 중 일정 수준의 요건을 갖춘 곳에 인증서를 발급해 준다. 물론 철저하게 실사하며 기준도 꽤 까다로운 편이다. 따라서 영국에 어학 연수나 유학을 갈 양이면 브리티시 카운슬이 인증한 영어 교육 기관을 선택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코프 씨도 그 점을 거듭 강조했다.

    “최근 조사에 따르면, 어학 연수생 중 45%만이 브리티시 카운슬 인증 제도에 대한 정보를 갖고 있었습니다. 영국에는 바셀트나 아렐스에 가입하지 못한 영어 교육 시설도 상당히 많아요. 그런 곳을 선택했다간 자칫 후회스러운 경험을 할 수도 있습니다.”

    인증 제도를 처음 시작한 곳은 아렐스. 이것이 좋은 효과를 거두면서 범위가 확산됐다. 코프 씨는 “인증을 주도하는 것은 정부라기보다 각 교육기관들이다. 스스로 비용을 내고 심사 기준을 만들며 제도를 이끌어가고 있다. 요건을 충족시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일단 인증을 받으면 그에 걸맞은 공신력을 얻는데다, 자기 발전을 위한 자극도 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브리티시 카운슬의 심사 기준은 크게 네 가지다. 첫째, 재무·행정 등 기본 운영에 문제는 없는가, 둘째, 건물은 양호하며 안전 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는가, 셋째, 교육 관련 기자재나 시설이 충분한가, 넷째, 교사의 자질에는 문제가 없는가.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건 교육의 질. 모든 교사는 영어 교육 관련 자격증을 갖고 있어야 한다. 교사 자격증은 세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영어 교육 관련 학사학위다. 다음이 1년 과정의 영어 교사 자격 과정을 마쳤다는 수료증, 마지막이 2년 이상 영어 교육에 종사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일종의 면허증(diploma)이다. 교육기관의 홍보 내용과 실제 사이에 차이가 없는지도 조사한다. 학생 숙박시설에 대한 항목도 있어 기숙사는 물론 홈 스테이, 식당 메뉴도 검사 대상이다.

    연수생 대상 설문조사도 자주 실시한다. 일종의 소비자 만족도 조사다.

    “브리티시 카운슬이 인증한 교육기관에 다니는 학생들의 경우 긍정적인 대답이 다수를 차지합니다. 교사 수준이나 시설도 마음에 들지만, 무엇보다 영국을 거점으로 유럽 여러 곳을 여행할 수 있는 점을 큰 매력으로 느끼는 듯해요. 치안도 좋은 편이고요.”

    실제로 영국 영어 연수가 주는 최대의 ‘혜택’은 영국을 통해 유서 깊은 유럽 문화와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동유럽까지 뻗어 있는 철도를 타고 유럽 각국을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다. 정부나 각 교육기관에서도 연수생들의 여행을 적극 장려한다. 팀을 짜주거나 교통편 마련, 신용카드 사용 편의를 봐주기도 한다.

    모여드는 학생들의 국적도 호주나 미국에 비해 훨씬 다양하다. 영국은 세계 54개 영연방 국가의 ‘대모’와 같은 나라다.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심지어 피지 같은 남태평양 지역 소국에서도 해마다 수많은 학생들이 쏟아져 들어온다. 프랑스, 이탈리아, 동유럽과 북유럽, 중국, 러시아 학생들도 많다. 서로 다른 문화적 배경을 지닌 이국 친구들과의 폭넓은 교류는 영국 영어 연수가 주는 색다른 즐거움이다.

    최근에는 영국의 안정된 치안에 높은 점수를 주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실제로 런던에서 만난 영어연수생 박미정(20)씨는 “다른 나라보다 안전하지 않으냐는 부모의 권유에 따라 영국으로 오게 됐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불만이 하나도 없을 수 있을까. “물론, 있습니다. 음식이 맛없다는 거요. 사실 이 부분은 영국 사람들도 대개 동의할 걸요.” 고프 씨는 이렇게 말하며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또 하나 영국 정부가 ‘어쩔 수 없는’ 핸디캡은 바로 날씨다. 햇빛 보기가 쉽지 않은, 비 많고 안개 많은 해양성 기후. 그러나 간혹 볕이 날 때면 세상이 온통 환해 보일 만큼 잘 정돈된 나라이기도 하다. 런던, 케임브리지, 옥스퍼드, 맨체스터 등 영어 연수생이 많이 찾는 도시들은 더욱 그러하다. 정말 감탄을 자아내는 곳은 교외의 목축지대. 푸른 초원에 점점이 하얀 양떼가 노니는 모습은 확실히 ‘그림’이다.

    오히려 현지에서 만난 유학생이나 연수생들은 “물가가 너무 비싸다”는 지적을 많이 했다. 한 끼 간단히 때우기 위해 먹는 샌드위치 가격이 보통 4~5파운드. 우리나라 돈으로 환산하면 6800~8500원에 이른다. 장급 여관 수준의 숙박비가 하룻밤에 65파운드(약 11만원). 방학 동안 실시되는 4주 과정 어학연수의 경우 주당 수업료는 125~200파운드(약 21만~32만 원) 수준이다. 확실히 호주, 뉴질랜드 등에 비해 비용이 많이 드는 국가임에는 틀림없다.

    영국에서 영어 연수를 받고 싶은 사람이라면 어떤 방식으로 정보를 습득해야 할까. 한국 사람이라면 먼저 광화문에 있는 영국문화원부터 찾을 일이다. 영국 정부나 브리티시 카운슬에서 발행하는 각종 영어 연수 정보지를 접할 수 있다. 브리티시 카운슬이 인증한 모든 교육기관의 위치, 수강료, 개설 과정, 시설 등이 빠짐없이 수록돼 있다.

    인터넷을 활용하는 것도 한 방법. 브리티시 카운슬 홈페이지(www.britishco uncil.org)나 각 인증 교육기관의 정보를 담고 있는 ‘www.EnglishinBritain.co.uk’ 페이지를 참고한다. 바셀트(www.baselt. org.uk)나 아렐스(www.arels.org.uk) 홈페이지를 살펴보는 것도 유용하다. 좀더 편리한 수속을 원한다면 바셀트 또는 아렐스와 에이전시 계약을 맺고 있는 사설유학원을 찾아간다.

    바셀트 회장인 폴 매니스 씨는 50대 후반의 전형적인 영국 신사였다. 인터뷰는 브리티시 카운슬 런던 본부 건물에 입주해 있는 바셀트 사무실에서 이루어졌다.

    바셀트는 앞에서도 설명했듯 영국 내 영어교육기관 중 대학교, 대학, 평생교육원, 직업훈련소 등 공공 성격이 강한 기관들의 연합체다. 나름의 기준에 따른 엄격한 심사를 통과한 곳만 가입할 수 있으며, 현재 회원기관 수는 118개다. 학생 수가 증가하여 조만간 200여 개로 늘릴 예정이라고. 영어 산업 육성을 위한 영국 정부의 각종 지원책이 효과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 지원의 핵심은 비자 규제 완화입니다. 입·출국 편의를 증대시키고 체류 기간 연장도 쉽게 해주는 거죠. 연수 학생을 대상으로 한 취업 비자 발급도 더욱 늘릴 예정입니다. 특히 정보통신 분야 기술을 가진 학생들의 경우, 영국에 남아 일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습니다.”

    실제로 유학이나 취업·학업을 동시에 수행해야 하는 학생들에게 영국은 미국보다 진입장벽이 낮은 나라로 알려져 있다. 영국 정부는 이러한 일련의 정책을 통해, 외국 학생 수를 지금의 2배로 늘릴 계획이다.

    영국이 이처럼 영어 종주국임을 담보로 하여 외국 학생 유치에 열을 올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매니스 씨는 “문화적 영향력 향상이 가장 큰 목표”라고 말한다.

    “영어 연수나 유학을 오는 이들은 머지 않아 자국 사회의 중추가 될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영국 문화에 익숙해진다면, 또 영국 물건을 사 쓰는 데 거부감이 없어지고 영국 사회에 호감을 갖게 된다면 우리로선 그보다 더 큰 이득이 없습니다. 당장 수입이 얼마가 늘고 줄고를 떠나, 미래를 위해 가장 가치 있는 보험을 들어놓는 셈이지요.”

    영국 젊은이들에게 주는 긍정적 영향도 적지 않다.

    “각국 사람들과의 교류를 통해 절로 세계화가 되고 있습니다. 아울러 국제적인 휴먼 네트워크의 일원이 됨으로써, 향후 자신과 국가의 발전에 적지 않은 도움을 받을 수 있지요.”

    대학 또는 대학교가 주 회원인만큼, 바셀트는 자국 학생과 영어 연수생들 간의 화합과 시너지 창출에도 남다른 관심을 갖고 있다. 이는 영국 정부의 목표와 일맥상통한다. 그래서 바셀트는 영어 교육 외에 소셜 프로그램이란 이름으로 유적 답사, 문화 토론, 친목 모임 등을 적극 유도한다. ‘영어+α’를 제공하기 위한 노력이다.

    “사실, 영어를 배울 수 있는 곳은 많습니다. 요즘은 교육 여건이 좋아져 꼭 외국으로 나갈 필요도 없지요. 그런데도 영국을 찾게 하려면 뭔가 다른 소구점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영국의 발달한 민주주의, 유서 깊은 문화와 개방적인 사고방식에서 찾으려 하고 있습니다.”

    바셀트도 나름의 학생 유치 지원책을 실시중이다. 외국 대학과 손잡고 교환학생 제도를 운영하거나 아예 자매결연을 맺기도 한다. 공동 프로젝트 지원에도 나선다. 주로 경제 사정이 어려운 중국이나 라틴아메리카 대학들에 집중돼 있다.

    지난해 영국에 학생을 가장 많이 보낸 나라는 일본이었다. 이어 스페인, 이태리, 중국, 독일, 대만, 한국 순. ‘영국 영어=유럽 영어’라는 인식 때문에 유럽 비영어권 국가에서도 많은 사람이 찾아온다. 러시아 유학생도 많은 편. 신장세가 가장 두드러진 건 중국이다. 한국의 경우, IMF 구제금융 사태 직전인 4년 전에 4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영어가 아니라 문화를 판다”

    바셀트가 ‘공기업적 성격’을 띤 단체라면, 아렐스는 이윤 추구를 가장 큰 목표로 하는 사립 영어교육기관들의 모임이다. 아렐스 부회장을 맡고 있는 티모시 블래이크 씨의 ‘본업’도 ‘런던영어학교(The London School of English)’라는 유명 영어학원 교장이다.

    영국에선 보기 드물게 햇살이 아름답던 10월 마지막주 월요일, 홀랜드 파크의 주택가에 위치한 런던영어학교를 찾았다. 아렐스에 대한 설명을 듣기 전, 먼저 영국에서 가장 오래 된 영어연수기관이라는 런던영어학교를 둘러보기로 했다.

    1912년 설립된 이 학교는 런던의 두 지역에 센터를 두고 있다. 첫 방문지인 홀랜드 파크 센터는 비즈니스와 직업적 목적 때문에 영어 공부를 하는 사람들을 위한 특별 과정을 운영한다. 수강생의 성격에 따라 8개 코스가 마련돼 있다. 같은 변호사라도 기업전문변호사를 위한 집중 과정과 신참을 위한 3주 집중 과정이 따로 준비돼 있을 만큼 전문적이다. 비즈니스 분야의 경우, 대개 기업측의 의뢰에 따라 강의가 이루어진다. 컴퓨터실 등이 갖춰져 있어 학원에서 회사 업무를 볼 수도 있다.

    이곳을 둘러본 후 차로 10분쯤 거리에 떨어져 있는 웨스트코프트 스퀘어 센터로 갔다. 대학생 등 청소년이나 젊은 층을 대상으로 일반 영어를 가르치는 곳이다. 일반영어 집중과정, 영국 내에서 대학 진학을 원하는 학생들을 위한 각종 시험대비 과정, 장기 연수자 대상 과정 등이 마련돼 있었다.

    두 곳 다 조용하고 고급스런 주택가 안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 특징. 100년이 넘은 고풍스런 건물의 내부를 뜯어고쳐 비즈니스 센터, 랩실, 식당, 강의실 등으로 꾸며 놓았다.

    물론 사립 연수 기관들이 모두 런던영어학교 수준의 교육 환경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브리티시 카운슬이 인정한 기관이라면, 다양한 프로그램, 오랜 교육 경험, 비교

    적 조용하고 안정적인 주변 환경 등은 공통적인 장점이라 할만 하다. 오랜 역사, 식민지 국민을 대상으로 한 외국인 교육 경험, 안정된 정치·사회 상황이 어우러진 결과다. 현재 브리티시 카운슬이 인증한 아렐스 소속 연수 기관은 모두 220개다. 블래이크 씨는 “세심한 관리와 분화된 교육 과정이 아렐스의 강점”이라고 말했다.

    “사립 연수 기관은 공립에 비해 규모가 작고 분위기도 가족적입니다. 보통 한 학원당 5~7개의 코스가 있으며, 각 과정도 수준에 따라 상(upper)·중(intermedi- ate)·하(elementary)로 나뉘어 운영되죠. 일 대 일 수업을 실시하는 곳도 있고요. 사정이 이런 만큼 영어 공부를 처음 시작하는 학생이나, 전문적인 학습을 요하는 사람들에게 적합합니다. 퍼스널 케어가 가능하니까요.”



    ‘향수병’까지 달래주는 학원

    영어 학교들은 연수생의 학업 성취 외에 ‘향수병’을 어루만지고 숙소를 잡아주는 역할까지 한다. 학교 전화를 24시간 개방해 위급한 상황이 생길 경우 도움을 청할 수 있도록 했다. 고객들의 호감을 사기 위한 풀 서비스 작전이다. 동석한 아렐스의 수석대변인 사이먼 프리먼 씨는 “아렐스 소속 기관들은 학생들의 어떤 요구라도 수용할 수 있는 전천후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미국식 영어와 영국식 영어의 차이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미국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이왕 배울 거라면 미국식으로 하자’는 분위기가 팽배한 것이 사실. 영어 산업 분야에서 미국과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는 영국으로서는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그래서일까, 취재중에 만난 인사들은 대부분 ‘영국식 영어와 미국식 영어는 크게 다르지 않다’는 주장을 폈다. 특정 국가, 예를 들어 한국 사람들이 영국보다 미국을 선호하는 건 유용성 때문이라기보다 양국간의 정치·문화적 친밀도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혹자는 ‘한국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이 워낙 막강한 까닭’이라 풀이하기도 했다.

    프리먼 씨는 “잘 모르는 사람들이 없는 차이를 과장하는 것”이라 단언했다. “단어나 발음이 조금씩 다르지만 소통에 영향을 줄 만한 수준은 아니다. 영어는 글로벌 랭귀지다. 모든 사람이 네이티브 스피커와 똑같이 말하기 위해 영어를 배우는 건 아니다. 한국인이 인도인이나 중국인과 대화를 나누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 바로 영어 아니냐”는 설명이다.

    블래이크 씨는 이색적인 주장을 펴기도 했다.

    “흔히 생각하는 것과 달리 미국 영어는 아카데믹한 성격이 강하고, 영국 영어는 실용적 표현이 풍부합니다. 미국 영어에 오히려 구태의연한 측면이 많다는 뜻이죠. 아울러 미국식 영어 교육은 외국인을 ‘미국 사람으로 만들기 위한’ 것, 즉 이민자를 위한 교육이라면, 영국식 교수법은 말 그대로 ‘외국인이 외국어로서 사용하는 영어’라는 쪽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만큼 덜 권위적이고 개방적이죠.”

    영어 산업과 관련해 또 하나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면 바로 인증 시험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미국에서 개발한 토플과 토익이 영어 실력을 가늠하는 척도로 활용되고 있다. 미국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선 토플 점수를 써내야 하듯, 영국·호주 등의 대학에 가려면 아엘츠(IELTS,Interna tional English Language Testing Sys-tem) 점수를 제시해야 한다. 이를 비롯, 고등학교 졸업 시험 등 영국과 몇몇 영연방국의 각종 인증 시험을 총괄하는 곳이 바로 케임브리지시에 있는 어컬스(UCLES, University of Cambridge Local Examinations Syndicate). 직원 수 1000여 명에 이르는 대형 조직이다.

    어컬스 그룹 매니저 크리스티안 너틀 씨는 “아엘츠의 특징은 읽고, 쓰고, 듣고, 말하는 언어의 네 가지 측면을 모두 측정할 수 있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컴퓨터로만 시험을 치를 수 있는 토플에 비해, 필기 시험도 가능하다. 아엘츠는 호주, 뉴질랜드 등에 이민을 가기 위해서도 꼭 치러야 하는 시험이다. 토플 대신 아엘츠 점수를 인정해주는 미국 대학도 100여 곳에 이른다.

    1년에 아엘츠에 응시하는 외국인 수는 150개국, 80만 명 정도. 중국, 남부유럽을 중심으로 그 수가 점점 늘고 있다. 한국에서도 영국문화원을 찾아가면 이 시험을 치를 수 있다.

    “매해 시험 수준을 똑같이 유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또 목적이 분명해야죠. 아엘츠는 기본적으로 영어권 대학에 입학하려는 외국인의 영어 능력을 측정하기 위한 다소 아카데믹한 시험입니다. 기본적으로는 세계에 통용될 수 있는 공신력이 있어야 해요. 예를 들어 한국에서 개발한 ‘텝스’의 경우, 국내에선 별 문제가 없겠지만 외국에 나가서는 인정받을 수 없지 않겠습니까.”

    영국 영어 산업을 이끌어가는 또 하나의 큰 축은 교재 출판 사업이다. 지난해 영국산 교재의 총 수출액은 약 5억 파운드(약 8500억 원)에 달했다.

    켈틱 인터내셔널(Keltic International)은 영국 최대의 영어 교재 총판이다. 영국에서 만들어지는 수만 종의 관련 서적, 비디오테이프, 오디오테이프 등을 전세계에 공급한다. 수출로 얻는 수익이 전체 매출의 80%를 차지할 정도.

    켈틱 북 숍은 노팅힐 주택가에 있다. 책을 판매하는 곳이라기보다는 취급 서적 전시장이라 하는 편이 나을 듯싶었다. 지하 서고에는 교사용 교재부터 유아·청소년용 교재, 각종 영어 인증 시험 교재, 사전류와 비디오·오디오 테이프들이 빼곡히 들어 차 있었다.

    점포 책임자인 레슬리 해리스 씨를 만났다. 해리스 씨는 100페이지는 족히 돼 보이는 켈틱 카탈로그를 넘기며 여러 가지 질문에 친절히 답해 주었다. 치밀하고 세심하게 제작된 카탈로그가 켈틱의 명성을 웅변해주는 듯했다.

    켈틱이 배급하는 영어 교재의 가장 큰 수입처는 유럽과 중동이다. 세계 주요 도시마다 지사 또는 파트너십을 맺은 현지 출판사가 있어 영업을 주도한다. 요즘은 소비자들이 인터넷 홈페이지(www.keltic. co.uk)를 통해 직접 구매신청을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초등학교 영어 교육이 실시되면서 한국에 대한 수출도 서서히 늘어나는 추세다.

    “영국에서 만든 교재라 해서 눈에 띄는 특징이 있는 건 아닙니다. 미국산과 비교하면 종이 질이나 제본이 더 튼튼한 정도랄까요. 영국 출판계에는 어떤 ‘장인 정신’ 같은 게 남아 있어 책 만듦새가 상당히 꼼꼼한 편입니다.”

    해리스 씨는 “시대가 변하면서 영어 교재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교육 방식이 달라졌으니까요. 이전에는 단어 습득이나 문법 학습이 중요하게 취급됐는데 14, 15년 전부터 대화형 교재가 주목받기 시작했습니다. 그것도 다른 나라 말은 하나도 섞지 않고 ‘영어로만’ 돼 있는 것들이요. 그런데 최근 일부 학자들이 ‘영어만 배우는 것보다 영어와 모국어를 함께 습득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는 주장을 펴면서, 교재에도 다시 간간이 다른 언어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문법의 중요성을 새삼 강조한 책도 많이 나오고 있구요.”

    영국산 영어 교재의 베스트셀러는 어떤 것들일까.

    “영국에선 성인용이 잘 팔립니다. 아무래도 모국어니까요. 기초 과정보다는 중간 수준 이상 되는 것을 많이 찾지요. 가장 잘 나가는 건 대학 시험 대비 교재입니다. 토플 교재도 그렇고요.”

    외국에선 골고루 인기가 있는 편. 그 중에서도 11~12세용 교재가 많이 팔린다. 영어 조기 교육 열풍이 불고 있기 때문. 한국 독자들을 위해 그 또래를 대상으로 한 우수 교재를 추천해달라고 하자 케임브리지대 출판사에서 발간한 ‘Camb ridge English for School’ 시리즈를 내밀었다. 성인용으로는 옥스퍼드대 출판사에서 만든 ‘Headway’ 시리즈가 최고의 베스트셀러라고 했다.

    켈틱에서 취급하는 책을 구입하려면 영국문화원에 문의하거나 인터넷 홈페이지에 들어가 직접 주문한다. 운영자에게 전자우편을 보내면 카탈로그나 그 내용이 고스란히 담긴 CD롬을 무료 우송받을 수 있다. 내년부터는 일정한 돈을 지불하면 책 내용을 그대로 다운로드 받을 수 있는 일종의 디지털 텍스트 판매 사업도 시작할 예정이다.



    영국식이냐 미국식이냐

    켈틱이 영어 교재 총판의 대명사라면 영국을 대표하는 학습서 출판사는 케임브리지대 출판사와 옥스퍼드대 출판사다. 매출 규모는 옥스퍼드가 9000만 파운드, 케임브리지가 3000만 파운드 가량. 물론 교재 이외 출판물 수입은 제외한 수치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10월의 마지막 화요일, 케임브리지시에 있는 출판사를 찾았다. 마케팅 매니저인 데이비드 해리슨 씨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된 출판사에 오신 걸 환영한다”는 말로 첫 인사를 대신했다.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는 같은 대학 출판사라도 성격이 조금 다릅니다. 옥스퍼드 쪽이 좀더 상업적이라면, 케임브리지는 고급스럽고 전문적인 서적을 출판하는 데 관심을 갖고 있죠. 영어 교재를 만들 때도 ‘포커스 그룹’이라 불리는 연구 그룹을 따로 구성, 이 사람들에게 저자가 직접 강의하고 교재를 미리 사용해보게 하는 등 품질 향상을 위해 많은 노력을 쏟아붓고 있습니다.”

    케임브리지대에서 만든 교재 중 최고의 베스트셀러는 ‘English Grammer In Use’다. 초급용과 고급용이 있는데 그중 고급용은 지금까지 1200만 권이 팔려나갔다. 영국에서 만난 유학생 중에도 이 책으로 문법 공부를 했다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다른 교재들과 마찬가지로 이 책도 CD롬, 비디오테이프, 카세트테이프 버전이 다 따로 있다. 참고로, 우리나라에서 이 책을 사려면 케임브리지대 출판사의 한국 총판을 맡고 있는 홍익출판사(02-3452-2111)로 연락하면 된다.

    특기할 만한 사실은 이 책이 영국식 영어가 아닌 미국식 영어를 기준으로 삼고 있다는 것. 어찌 보면 미국식 영어가 세계를 장악해가고 있는 요즘, 판매율을 높이기 위한 궁여지책일 수도 있겠다. 이와 관련해 해리스 씨는 이전에 만난 전문가들과는 조금 다른 견해를 내놓았다.

    “영국식이냐 미국식이냐를 따지는 게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지만, 전 확실히 유의미한 차이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단어, 발음, 문법, 모두 말이죠. 그러니 영어 공부를 시작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에게 필요하고 또 익히기 쉬운 것이 어느 쪽인지를 결정해야 할 겁니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