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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박물관 기행

구닥다리 유물로 빚어낸 최첨단 문화공간

  • 권삼윤

구닥다리 유물로 빚어낸 최첨단 문화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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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영국과 프랑스가 남의 나라에서 발굴한 유물을 항상 자기 나라로 가져간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었는데, 그건 국가적 차원이 아니라 고대문명에 대한 열정으로 몸을 바쳤던 개인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들은 자신이 참여한 발굴 현장에 유물을 남김으로써 원래 소유국에 세계적 규모의 박물관을 세울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해 주었고, 그리하여 그들 스스로 역사를 만들어낸 주역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중 한 사람이, 카이로를 찾은 사람이라면 반드시 한번은 들러야 하는 이집트박물관의 초대관장을 지냈던 프랑스인 오귀스트 마리에트(1821∼1881)다. 이집트인들은 그가 세운 박물관 앞뜰에다 그의 등신대 동상을 만들고, 그 아래에 시신을 묻을 만큼 그를 존경한다. 그렇다고 마리에트가 처음부터 발굴품을 이집트에 남겨야 한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그 역시 초기에는 발굴되는 대로 모조리 루브르박물관으로 보냈다. 그러다가 이집트에 수에즈운하가 건설된다는 소식을 듣고는 생각을 바꾼 것이었다. 운하 공사가 시작되면 이집트의 유물이 대거 유럽으로 흘러나갈 것이 불을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그는 당시 이집트의 최고 지도자 사이드 태수를 찾아가 유물의 해외 유출을 막지 않으면 이집트가 살아남기 힘들며, 그것을 위해서는 유물을 보관할 수 있는 박물관을 건립해야 한다고 제안했던 것이다. 태수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마리에트를 초대 고고국장으로 임명했다. 마리에트는 곧바로 이집트에서 발굴된 유물은 반드시 이집트에 보존시켜야 한다는 ‘현지보존 원칙’을 만방에 알렸다.

일제는 이 땅의 문화재를 그렇게 파헤치고 가져갔지만 이와 같은 원칙을 천명하고 실천한 인물이 끝내 나오지 않았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마리에트를 만난 이집트는 그나마 다행이었다고 할 것이다. 일본의 경우 그와 비슷한 인물을 굳이 찾는다면 우리 민속문화에 관심을 가졌던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가 고작인데, 그 역시 자신의 수집품을 일본으로 가져가 자신이 세운 ‘일본민예관’에 전시했다.

죽은 날까지 자신의 원칙을 지켰던 마리에트에게는 이런 에피소드가 있다. 그는 1867년 파리에서 개최된 만국박람회장에 이집트 전시관을 열었다. 물론 대성황이었고, 프랑스의 왕비까지 방문했다. 그런데 문제는 왕비의 등장 때문에 일어났다. 그녀가 전시장을 둘러보다 욕심이 생겨 사이드 태수에게 “전시품 중 일부를 프랑스에 두고 갈 수 없냐”고 물었던 것이다. 대답이 궁했던 태수는 “그 대답은 이 분야에선 내 상관인 마리에트가 결정할 사항”이라며 살짝 떠넘겼다.



왕비는 똑같은 질문을 마리에트에게 던졌다. 그는 주저 없이 “결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라며 단호하게 거절했던 것이다. 순간 왕비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고, 장내 분위기도 싸늘해졌다. 이 일이 있고 난 뒤로 마리에트는 고국 프랑스를 다시 찾지 않았다. 카이로에서 세상을 떠났고 또 거기에 묻혔다.

마리에트의 이런 현지보존 원칙 덕분에 이집트가 보유하게 된 최고의 보물은 1921년 영국인 하워드 카터가 룩소르의 ‘왕들의 골짜기’에서 몇 년에 걸친 작업 끝에 힘들게 찾아낸 투탕카멘 왕의 미라와 황금마스크다. 석관과 미라, 황금마스크, 벽화 등 모든 것이 무덤 속에 원형 그대로 있어 고대 이집트인들이 그토록 매달렸던 영생 추구의 과정을 고스란히 알 수 있게 됐고, 그래서 세계 고고학 사상 최고의 성과란 평가를 받기도 했다. 귀중한 유물이 많은 이집트박물관이지만 특히 이 황금마스크가 전시돼 있는 2층 전시실은 늘 사람들로 붐비고, 카메라 셔터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관심분야에 집중해야

다른 한 사람은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미노스왕의 궁전이자 괴물 미노타우로스가 갇혀 있었다는 크노소스궁전 유적을 발굴한 영국인 아더 에반스. 그는 트로이와 미케네 유적을 발굴하여 세계를 놀라게 했던 독일인 하인리히 슐리만이 발굴하려다가 땅 주인이 값을 높게 부르는 바람에 포기하고 말았던 케팔라 언덕의 땅을 사들여서 문제의 궁전 유적을 발굴해냈다. 그런데도 그는 거기서 출토한 다량의 귀중한 유물을 모두 그리스 문화재청에 기증했다.

그게 기반이 되어 크레타의 주도(州都) 이라클리온에 박물관이 세워졌다. 여기에 전시돼 있는, 크노소스궁전에서 나온 각종 프레스코 벽화, 황금의 뿔을 가진 황소 머리조각, 양 가슴을 노출한 채 양 손에 뱀을 쥐고 있는 여신상, 제사 때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대형 철제 솥, 성물(聖物)이었던 양날 도끼, 45개 신성문자가 앞뒷면에 새겨진 파이스토스 원판 등을 이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유적과 함께 보게 된다면 에게 바다를 무대로 태어난 고대문명이 얼마나 화려하고 수준 높았는가를 확인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들이 남겨놓은 신화의 세계를 나름대로 그려보는 재미도 만끽할 수가 있다.

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 그런데 이런 유물들이 영국으로 건너갔을 경우를 상상해보라. 그러므로 유물은 유적 가까운 곳에 보존돼야 하는 것이다.

지구의 숨결을 들려주는 자연사박물관과는 달리 대영박물관은 인간의 손때와 상상력의 세계가 어떠한지를 잘 보여준다. 그런데 대영박물관의 전시물량은 너무나 방대하다. 그러므로 누구도 그 전부를 볼 수는 없다. 설령 그럴 수 있다 하더라도 그걸 모두 머리 속에 담을 수는 없는 일이다. 따라서 욕심을 버리고 자신이 관심을 가진 분야나 지역을 중점적으로 보면서 나머지는 스쳐 지나가는 식으로 볼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1시간도 채 안 되어 관람을 끝내는 것은 곤란하다. 아무리 공짜라도.

여기서 내가 오랜 시간을 보낸 곳은 아시리아실과 이집트실, 그리고 메소포타미아실이다. 그건 내 관심분야여서다. 아시리아와의 인연은 중학시절에 시작됐다. 그때 ‘앗시리아’란 별명을 가진 분이 세계사 선생님이었다.

나이가 지긋했던 선생님은 수업 진도와는 상관없이 시간마다 아시리아 이야기를 꺼냈고, 또 ‘아’에다 얼마나 힘을 주어 말했던지 ‘앗’ 소리가 그만 귀에 박히고 말았다. 앗시리아 선생님이 아시리아의 강대함과 그들의 용맹함을 우리에게 들려주었기에 아시리아는 세계사에서 차지하는 비중 이상으로 내 머리에 각인됐고, 어느새 아시리아에 대한 묘한 향수 같은 것을 갖게 되었는데, 대영박물관의 아시리아실에서 왕궁을 지키던 거대한 ‘사람 얼굴에 커다란 날개를 단 황소상’(‘라마스’라 부름)과 ‘아슈르바니팔 대왕의 사자사냥도’ 부조를 실물로 보았으니 나는 발걸음을 쉬 옮길 수가 없었던 것이다. 거대하면서도 사실적인 조각과 부조들을 보면서 나는 만약 앗시리아 선생님이 그걸 직접 보았더라면 우리에게 어떤 말씀을 들려주었을까를 떠올려보기도 했다.

왕이 쏜 화살을 맞아 발버둥치는 사자는 매우 사실적이긴 하나 익살스런 구석도 있어 웃음을 짓게 했다. 그런데 라마스는 현실세계에 존재하는 동물이 아니라 상상하여 그린 것이라, 왜 저런 것을 만들어냈을까 하는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다. 자세히 보니 얼굴과 앞가슴, 두 팔은 사람의 그것이었는데, 양쪽에 커다란 독수리 날개를 두 개 달고 있었고, 몸통과 다리는 황소의 그것이었다. 또 복부에는 용의 비늘이 새겨져 있었다. 네 가지 동물이 한 몸을 이루고 있는 이 혼성동물은 결국은 육·해·공군을 한데 합쳐 놓은 것으로, 그들은 하늘과 땅, 물 속으로부터 오는 적과 재앙을 모두 막아내겠다는 뜻에서 그런 수호신상을 만든 것이었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독일 페르가몬 박물관의 유래

이들 아시리아 유물은 19세기 중반 영국의 오스틴 헨리 레이야드가 발굴한 것으로 그가 직접 영국으로 옮겨왔다. 어릴 때부터 여행기를 즐겨 읽고 모험심과 낭만적인 기질을 기르면서 ‘서양 지혜의 발상지’인 유프라테스 강 너머의 땅으로 가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했던 그는 옛 아시리아의 폐허를 발굴하고자 이라크의 고도 모술로 달려갔고, 드디어 1845년, 모술 인근 니느베의 폐허에서 왕궁 유적과 거대한 라마스를 파냄으로써 유럽 사회에 아시리아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급기야 프랑스까지 아시리아 발굴에 뛰어들게 만들었다. 당시 모술 주재 프랑스 부영사 에밀 보타가 레이야드가 미처 손을 대지 못하고 있던 코르사바드에서 왕궁 정문을 지키고 있던 32t에 이르는 라마스와 벽부조를 발굴하여 루브르박물관에 선사했던 것이다.

당시 아시아, 아프리카, 태평양 등지에서 더 많은 땅을 차지하려고 각축전을 벌이던 영국과 프랑스는 유물 발굴에서도 접전을 벌였는데, 그것은 땅을 더 갖는 것보다 더 큰 자긍심을 자기네 국민들에게 안겨줄 수 있다고 생각해서였다. 이런 문화제국주의 대열에 뒤늦게 통일을 이룬 독일(당시 이름은 프러시아)까지 끼여들었다. 삼파전이 된 것이다. 독일은 영국의 3C(Cairo, Capetown, Calcutta)정책에 3B(Berlin, Byzantium, Baghdad)정책으로 대응하는 등 적극적인 해외진출을 꾀했으며, 오리엔트학회를 통해 오리엔트지역에서의 발굴작업도 병행 추진했다. 그리하여 로베르트 콜데바이는 그때까지 성서와 헤로도투스의 ‘역사’ 속에서만 살아 있던 바벨탑의 도시 바빌론에서 성스러운 동물 조각들이 박혀 있는 거대하고도 화려한 이시타르 성문을 발굴하여 바빌론의 실재를 증명했을 뿐 아니라 독일의 문화적 자존심도 한껏 높였다. 그는 그걸 해체하여 베를린의 페르가몬박물관으로 옮겼다.

이 박물관은 에게 바다와 가까운 소아시아의 고도 페르가몬에 있던 거대한 신전의 제단을 몽땅 옮겨온 독일이 그걸 전시하기 위해 특별히 세운 박물관이다. 1871년 독일 통일 후 새로운 수도가 된 베를린을 파리나 런던, 로마와 어깨를 겨룰 수 있는 문화도시로 만들고, 신생 후발국가 독일이 유럽에서 행세깨나 하려면 그럴 듯한 그리스 조각 작품 몇 점쯤은 갖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그렇게 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무척 장엄한 느낌을 주는 하얀 대리석 신전 제단과, 빛나는 청색 바탕에 금방이라도 달려나올 것 같은 황소와 성수(聖獸) 시르시, 그리고 식물 문양이 다채롭게 펼쳐져 있는 이시타르 성문을 모셔놓은 페르가몬박물관은 독일 제국주의의 문화적 자긍심의 상징이기도 했다.

슈프레강을 끼고 있는 이 박물관 옆에는 유럽 여러 나라의 회화작품을 전시하는 국립미술관과 국립미술관 구관, 이집트 미술 전문인 보데미술관이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런던의 사우스 켄싱턴처럼 박물관 단지인데, 그래서 이름도 ‘박물관 섬’이다.

베를린에는 또 하나의 세계적 박물관인 베를린 민족박물관이 있다. 중남미와 서아시아, 동남아, 태평양 지역 원주민들의 삶을 보여주는 유물과 생활용구들을 집중 전시하고 있는데, 전시방식이 개방적이라 관람객은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전시물을 접할 수 있고, 꽤 자세한 안내문도 유물 곁에 비치해 놓아 웬만한 궁금증은 그 자리에서 해결할 수 있다.

이런 민족학 박물관으로 유명한 곳은 오사카의 세계민족학박물관이다. 1975년 오사카 만국박람회에 전시된 작품을 기초로 세워진 것이라 세계적인 행사를 개최하고 그 부산물로 박물관을 건립한 것이었다. 우리는 행사를 치르고 나면 모든 것을 짐으로 생각하는데 일본인들은 그걸 세계적인 박물관으로 만들었다. 대단하지 않은가. 우리는 지금도 국제니 세계니 하는 이름이 들어간 행사를 열심히 치르고 있는데, 과문한 탓인지 이렇게 사후문제까지 고려한 예는 아직 들어보지 못했다. DDD라는 새로운 전화방식을 처음으로 선보인 오사카 만국박람회는 행사기간 내내 풍성한 화젯거리를 만들어내 긴장을 고조시키면서 즐거움과 배울 것을 동시에 선사했다. 살아 있는 박물관이 어떤 것인가를 몸소 보여주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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