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축구는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아시안컵 이후 확산된 ‘위기론’은 단순한 기우일까? 아니면 재앙의 전조일까?
잠시 2년 전을 돌이켜보자. 한국축구는 98프랑스월드컵에서 예선 탈락했다. 특히 네덜란드전에서 0대5로 패한 사건(?)은 엄청난 파문을 몰고 왔다. 차범근 감독이 월드컵 도중에 경질됐고, 후임자를 뽑기 위해 축구협회는 사상 최초로 대표팀 감독을 공개 검증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기술위원회의 추천으로 후보에 오른 사람은 김호곤, 이차만, 허정무 감독이었다. 2차 결선투표까지 가는 접전 끝에 대표팀을 맡은 허정무 감독은 한국축구의 세계화를 부르짖으며 2년 뒤에 벌어질 올림픽에 강한 자신감을 보였다.
그리고 2년이 흘렀다. 한국은 시드니올림픽에서 목표로 했던 8강 진출에 실패했다. 곧이어 벌어진 아시안컵에서도 쿠웨이트, 사우디아라비아에게 패하며 3위에 그쳤다. 상대적으로 일본이 우승을 차지하면서 충격은 일파만파로 번졌다.
이번에도 축구협회는 ‘분위기 쇄신’을 외치고 있다. 그동안 개혁세력으로 분류됐던 이용수 세종대 교수를 기술위원장에 앉히고 외국인 감독 영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하지만 뭔가 알맹이가 빠진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많은 축구인들은 한국이 2002년 월드컵에서 16강에 오르지 못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더 심각한 것은 월드컵이 끝난 뒤 한국축구는 더 큰 재앙을 맞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왜 그렇게 비관적으로 전망하는 것일까? 간단히 말해서 수십년간 거의 달라지지 않은 ‘축구 인프라’의 부족을 지적할 수 있다.
‘신동아’는 위기의 한국축구를 심층 진단하는 특별대담을 마련했다. 그동안 한국축구의 문제점을 끊임없이 제기한 신문선 MBC 축구해설위원과 허승표 전 대한축구협회 부회장이 대담에 참여했다. 신문선 위원은 축구계에서 ‘재야인사’로 불릴 만큼 쓴소리를 많이 냈던 사람이다. 또한 허승표 전 부회장은 지난 96년 정몽준 체제에 반기를 들고 ‘축축모’(축구를 사랑하는 축구인들의 모임) 대표로 축구협회 회장 경선에 나선 바 있다.
사회 : 이번 대담은 한국축구의 여러 가지 문제점을 짚어보면서 대안을 함께 모색해보자는 차원에서 마련했습니다. 최근 한국축구는 국민들에게 큰 실망을 안겨준 것 같습니다. 올림픽이나 월드컵이 끝날 때마다 되풀이된 일이지만, 이번엔 월드컵이 얼마 남지 않아서 그런지 충격이 더한 것 같습니다. 먼저 시드니올림픽과 아시안컵을 지켜보신 소감부터 말씀해주시지요.
허승표 : 우리가 너무 특징 없는 플레이를 했다고 봅니다. 경기를 풀어가는 방식에서 예전과 비교해 위기감을 느낄 정도로 위축돼 보였습니다. 옛날에는 우리 나름의 컬러가 있었어요. 조직력이나 투지, 스피드와 체력을 가지고 아시아권에서는 어느 정도 통했던 거지요. 그건 아시아 축구가 그만큼 약했다는 뜻이기도 하죠. 하지만 이번에 보니까 상대 국가의 기술과 전술은 발전했는데 상대적으로 우리는 정체된 것을 느낄 수 있었어요.
부실한 시스템이 문제
신문선 : 올림픽과 아시안컵은 예견됐던 ‘인재’가 결과로 나타난 겁니다. 한국축구는 그동안 월드컵을 유치했다는 꿈에 취해 있었지요. 그러다 보니 계획이 없고, 구조나 시스템 자체가 부실해진 거죠. 성수대교나 삼풍백화점이 부실공사 때문에 무너진 것처럼 한국축구도 부실구조 때문에 주기적으로 망신을 당하는 겁니다.
사회 : 구조와 시스템의 부실화 문제는 오래 전부터 나온 얘기인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어떻게 부실하다는 것인지 말씀해주셨으면 합니다.
신문선 : 자전거의 앞바퀴와 뒷바퀴는 서로 밸런스를 유지해야 잘 나갑니다. 지금 한국은 앞바퀴가 대표팀, 뒷바퀴가 프로축구로 돼 있어요. 그런데 이게 거꾸로 돼야 한다는 겁니다. 역대 축구협회 회장들은 대표팀 성적이 좋아야 국내 축구가 잘 된다는 생각으로 이끌어왔는데, 그건 잘못됐어요. 프로축구가 강한 나라치고 그 나라 대표팀이 약한 나라가 없어요. 한국은 축구협회 회장이 전시 행정에 치우치다 보니 앞바퀴에 너무 신경을 쓰는 겁니다. 실제로 축구협회 1년 예산 중에 국가대표팀에 들어가는 비용이 가장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아마추어 축구는 시들 수밖에 없고 프로축구를 운영하는 기업들은 투자할 의욕이 꺾이는 겁니다.
90년대까지는 대표팀 성적이 그런 대로 ‘바람’이 될 수 있었어요. 일본이나 중국이 우리가 이길 수 있는 범위에 있었던 거지요. 하지만 이젠 앞바퀴마저 바람이 빠졌어요. 펑크가 났다니까요. 그래서 문제가 더 심각해진 겁니다. 한국축구의 구조적인 문제는 이러한 불균형에서 오는 거지요. 정몽준 회장이 국가대표팀 위주로 회의장에서 안면을 세우고 정치적인 시각에서 체면치레 방식으로 협회를 운영하는 시스템이 오늘과 같은 결과를 낳은 겁니다.
허승표 : 한 나라의 축구가 어느 날 갑자기 세계 수준으로 발전할 수는 없습니다. 먼저 대표선수들이 실력을 키울 수 있는 시스템이 구축돼야 합니다. 제가 보기에 한국축구는 30년간 큰 변화가 없었습니다. 협회가 눈앞의 성적만 생각해서 대표팀에 치중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프로리그에 차질을 빚으면서까지 대표선수를 소집해서야 되겠습니까? 프로가 살지 않으면 대표팀도 살 수 없어요.
사회 : 토론을 좀더 구체적으로 진행시켜보죠. 한국축구의 수많은 문제점 가운데 먼저 선수에 대한 문제점부터 따져보겠습니다. 왜 우리 선수들의 기량이 좀더 발전하지 못하는 걸까요?
프로가 살아야 대표팀이 산다
신문선 : 협회 예산이 대표팀 위주로 편성되다 보니 하부구조는 자연스럽게 부실해질 수밖에 없어요. 그러다 보니까 좋은 선수가 나오질 않아요. 냉정하게 말해서 2002년 월드컵에서 뛸 선수들이 98년 프랑스월드컵에서 뛰었던 선수들보다 경기력이 향상되었느냐? 저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잘못된 인프라가 끊임없이 병든 선수들을 만들어내고 그 선수들이 부메랑이 돼서 한국축구를 부실하게 만들고 있어요. 대학을 졸업한 선수들이 실제 연령은 20대인데 신체적인 연령은 환갑이 넘어요.
그동안 한국축구의 장점으로 지적됐던 정신력과 심리적 요인은 이제 한계에 왔어요. 이번에 보니까 일본, 중국 하다 못해 아시아의 변방으로 얘기했던 태국이나 카타르도 정신력은 많이 올라와 있어요. 아시안컵 쿠웨이트전을 지켜보면서 우리 선수들이 과연 국가대표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개인 기량이 미흡했어요. 전체적인 한국 선수들의 수준이 떨어졌어요. 정몽준 회장 집행부가 들어선 지 8년째인데, 자전거의 방향을 잘못 잡고 페달을 잘못 밟아 좋은 선수를 길러내지 못한 결과를 초래한 겁니다.
허승표 : 지금 축구인들과 매스컴이 잘못 보는 게 있습니다. 제가 74년 영국으로 유학 갔을 때 아담스 감독을 만났어요. 그분은 한국에서도 가르쳤고 캐나다 대표팀도 맡았던 지도자예요. 그 사람 얘기가 한국 선수들은 탤런트 기질이 있다는 겁니다. 실제로 60~70년대 우리 선수들은 열악한 시스템에서도 아시아 정상을 지켜왔습니다. 그 후 세계축구는 엄청난 속도로 변했는데 우리는 하나도 변하지 않은데 문제의 원인이 있습니다. 우리는 좋은 선수를 배출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지 못했습니다. 기반이라는 것은 경기제도, 팀 수, 좋은 코치겠지요. 3년 전 축구협회 예산을 보니까 유소년 축구 지원금은 겨우 3억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 선수들에게 정신력을 강요할 수는 없는 겁니다.
요즘 축구협회가 일부 선수들을 외국 프로팀에 유학 보내려고 하는 모양인데, 그건 정말 난센스라고 생각합니다. 정말 외국 프로팀의 시스템을 모르고 하는 얘기입니다. 예를 들어 고종수 선수를 외국으로 보낸다고 했을 때 그쪽에서 생각하는 것은 시장논리 딱 하나입니다. ‘고종수가 우리 팀에서 뛸 때 이길 수 있느냐.’ 이거 하나로 판가름나는 겁니다. 우리 협회가 ‘이 선수가 유망하니 써주십시오’라고 부탁한다고 받아줄 외국 프로팀이 아닙니다. 만일 우리나라의 삼성이나 LG에서 태국 선수를 데려온다면 1군 경기에 넣어주는 줄 압니까? 2군 연습에 겨우 참가할 뿐입니다. 물론 해외진출을 위해 노력하는 건 좋지만, 정확히 알고 가야 합니다. 그래서 나는 우리 선수들이 국내 프로에서 열심히 뛰면서 인정받고 그렇게 해서 외국으로 진출하는 게 좋다고 봐요. 실력이 있으면 에이전트들이 먼저 알고 외국으로 보내주게 돼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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