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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향기 숲빛깔 숲소리 찾아 떠나는 여행

전영우 교수의 숲 이야기

  • 전영우 < 국민대 교수 . 임학 >

숲향기 숲빛깔 숲소리 찾아 떠나는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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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 소리를 듣기에는 겨울이 제격입니다. 겨울 숲의 소리는 흔들리는 꽃잎이 만든 봄 숲의 소리와 습한 비바람이 꾸미는 여름 숲의 소리, 현란한 단풍에 묻힌 가을 숲의 소리와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봄, 여름, 가을 숲이 만들어낸 화사함, 안락함, 현란함은 없을지라도 겨울 숲의 소리는 또 다른 감흥을 줍니다. 회색빛 겨울 숲이 다양한 표정을 연출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완급과 고저가 다른 여러 가지 독특한 소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눈을 감고 낙엽 밟는 소리를 한번 떠올려 보십시오. 서릿발을 밟으면서 숲길을 걷는다고 생각해 보세요. 얼음장 밑으로 흐르는 계곡의 물소리를 기억하십니까. 푸른 창공을 가로지르는 겨울 숲이 만들어낸 그 소리, 대지를 밟는 그 소리, 그리고 개울을 지나는 그 소리들은 자연이 선사하는 최고의 선물임을 한번이라도 느끼기엔 사실 우리는 너무나 오랫동안 그리고 너무나 철저하게 인공의 소리에 길들어 있는지 모릅니다.

숲이 만드는 소리는 그 숲이 어디에 자리잡고 있는지에 따라 다릅니다. 능선비탈이나 마루금의 숲을 지나는 바람은 조급합니다. 그래서 가는바람이나 산들바람처럼 여유를 부릴 틈이 없습니다. 쌩, 쏴쏴, 쐐, 씽씽…. 그저 바쁘고 빠른 소리를 만듭니다. 산록이나 계곡을 지나는 바람소리는 마루금을 지나는 바람소리에 비하면 성미가 급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조금은 편안한 소리를 즐길 수 있습니다. ‘우-’ 하고 말입니다.

숲을 이룬 나무에 따라서 숲이 만들어내는 소리가 다릅니다. 겨울에도 잎을 달고 있는 참나무들은 약한 바람에도 소리를 냅니다. 그래서 쉽게 바삭거리고 버석댑니다. 그리고 스르륵거리며 서걱대고 소시락댑니다. 이렇게 참나무 숲의 소리는 번잡스럽습니다. 참나무들은 나이가 들면 대부분 잎을 떨구지만 어린 시절엔 겨우내 잎을 가지 끝에 달고 있습니다. 말라버린 참나무 잎은 떨어지지 않고, 그대로 가지에 붙어 있기에 약한 바람에도 사각거리는 소리를 냅니다. 그래서 작은 바람에도 겨울 참나무 숲에선 사각사각, 서걱서걱거리는 소리를 쉽게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마른 참나무 잎은 참나무의 훌륭한 발성기관입니다. 참나무의 마른 잎이 만들어내는 소리는 처음엔 번잡스럽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어느 틈에 그런 번잡스러움은 감쪽같이 사라집니다. 대신에 ‘서걱’, ‘사각’, ‘스르륵’, ‘소시락’거리는 모든 소리에 질서가 있음을 느낄 수 있을 겁니다. 그것이 바로 자연이 만들어내는 화음의 아름다움이지요.



숲이 만드는 소리 중에 솔숲이 만드는 소리는 격이 다릅니다. 사실 소나무 숲은 쉽게 소리를 내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 번 소나무가 말을 하면 잠든 영혼을 깨우듯 숲 전체가 울리는 웅장한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서늘한 바람이 솔숲을 가로지르면서 만들어내는 ‘쏴아’하는 솔바람소리는 영혼을 흔드는 소리입니다. 그래서 우리 어머니들은 솔잎을 가르는 장엄한 바람소리를 태아에게 들려주면서 시기와 증오, 원한을 가라앉히고자 솔밭에 정좌하여 태교를 실천하셨는지도 모릅니다.

심신을 치유하는 자연의 소리

다른 나무도 마찬가지입니다만, 특히 소나무는 바람이 있어야 제 값이 나타납니다. 한 시인은 “솔바람 소리를 들을 줄 아는 귀라야 별들의 숨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솔바람소리가 오죽 영묘하면 밤하늘 별의 숨소리까지 들을 수 있는 신묘한 귀를 가져야만 들을 수 있다고 하겠습니까. 그래서 조상들은 송성(松聲)이나 송운(松韻)이라 하면서 솔바람소리를 특히 아꼈는지도 모릅니다.

숲이 만드는 소리는 자연의 소리입니다. 자연의 소리는 지친 뇌를 쉬게 해줍니다. 솔바람, 시냇물 흐르는 소리, 새소리처럼 자연의 소리를 접하면 뇌에서 알파파가 나와 잡념을 없애고 정신을 하나로 통일시키며, 무상무념의 경지를 갖게 해줍니다. 숲을 찾으면 정신이 맑아지고 쉽게 명상에 빠져들 수 있는 이치도 자연의 소리가 만들어주는 이 알파 뇌파 덕분입니다.

숲이 만드는 소리는 빠름의 가치체계에 전도된 우리네 삶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일처럼 인식되기 쉽습니다. 하지만 산업문명의 거대한 톱니바퀴 속에서 하루하루를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 각박한 세태에 숲을 가르는 바람소리에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쉬 돈이 생길 것 같지 않아도, 아무런 실용성이 없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숲이 품고 있는 소리는 속도에 대한 현대문명의 잘못된 믿음을 깨뜨리거나, 소비문화에 전도된 물신주의의 가치관을 한번쯤 되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우리에게 안겨줍니다. 그래서 숲을 가르는 바람소리를 듣고 즐기는 일은 하찮은 일이 아닙니다.

‘느림’의 가치관

오늘날 ‘빠름’에 대한 가치관은 맹목적인 선으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반면에 ‘느림’에 대한 가치관은 부정되거나 애써 무시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자연과 인간이 공존할 수 있는 상생의 원리는 빠른 것이 최선이 아님을 일러줍니다. 대량생산, 대량소비, 대량훼손, 대량폐기는 모두 빠름에서 유래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런 빠름의 세태를 맹목적으로 쫓아가서는 희망이 없습니다. 오히려 덜 쓰고 덜 더럽히고 덜 훼손시키는 것이 내일을 위한 책무임을 인식하고, 느림의 가치관을 우리 사회에 확산시키는 일도 중요합니다.

솔숲을 가르는 바람소리를 들으면서 당신은 행복합니다. 마른 가랑잎이 만드는 소리와 솔숲을 가르는 바람소리를 구별하므로 당신은 더욱 행복해집니다. 아니 무엇보다 압축 고도성장기에 이어 초고속 정보통신의 광풍이 숨막히게 휘몰아치는 이때, 느림의 가치를 대변하는 숲의 소리를 즐길 수 있는 여유가 있기에 당신은 더 더욱 행복합니다. 겨울 숲의 웅장한 소리에 귀기울여볼 생각은 없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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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우 < 국민대 교수 . 임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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