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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명가 명택 13 | 남원 몽심재 (夢心齋)

원불교 성직자 40여 명 배출한 명당

  • 조용헌 < 원광대 동양학대학원 교수 > cyh062@wonkwang.ac.kr

원불교 성직자 40여 명 배출한 명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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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백호보다 좌청룡이 훨씬 길고 튼튼해 풍수상 ‘청룡장(靑龍藏)’ 형국을 갖춘 몽심재 터에서는 도인(道人)이 많이 나온다. 몽심재를 중심으로 90여 가구 남짓한 죽산박씨 집성촌에서 종교 성직자가 무려 40여 명이나 배출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닐 것이다.
원불교 성직자 40여 명 배출한 명당
백두산에서 시작된 백두대간은 3000리를 내려오다가 지리산에서 마지막 여정을 푼다. 지리산은 그 둘레 길이가 500리가 넘는 한국 최대의 덕산(德山)이다.

500리 둘레에는 돌아가면서 남원, 구례, 하동, 산청, 함양 등 이름난 고을들이 들어서 있다. 이들 고을은 지리산을 중심으로 환지리산(環智異山) 문화권을 형성하였다. 지리산의 험준한 산악지역을 연결하면서 자연스럽게 생겨난 일종의 문화 실크로드라 할 수 있다. 지리산의 길을 따라서 영·호남 간 물적·인적 교류는 물론 유·불·선에 정통한 기인, 달사들이 오가면서 수많은 신화와 전설 그리고 사연을 남겼던 것이다.

그 실크로드의 한 축인 전라도 남원에 가면 죽산박씨(竹山朴氏)의 고택인 몽심재(夢心齋)가 유명하다. 남원의 죽산박씨들이 500년 동안 세거(世居)하고 있는 동네가 남원시 수지면 호음실(虎音室, 보통 ‘홈-실’이라고 부른다)에 있고, 그 홈실 중심에 몽심재가 자리잡고 있다.

몽심재가 남원 인근에서 회자된 것은 과객을 잘 대접하였기 때문이다. 찾아오는 손님을 후하게 대접하기로 유명했던 몽심재는 당연히 조선 후기 지리산 로드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베이스캠프였던 것이다.

지리적으로도 남원은 구례, 순천 지역에서 한양으로 올라갈 때 거쳐야 하는 곳이다 보니 몽심재는 자연 구례, 순천 쪽에서 과거 보러 올라가는 선비들이 들르는 단골 사랑채가 되었다. 전라도뿐 아니라 함양 쪽에서 넘어오는 영남 선비들도 남원을 거쳐서 한양으로 올라갔는데, 별일 없는 한 몽심재에 머물렀다. 대접이 후해서 선비라면 누구나 부담 없이 들렀다.



만석꾼 집안의 적선

조선시대 대갓집에서 중요시했던 일은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조상에 대한 제사를 충실히 지내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찾아오는 손님을 정성스럽게 대접하는 일이었다. 특히 후자의 접빈객(接賓客) 풍습은 타인에 대한 적선(積善)의 의미와 함께 그 행위를 통해 세상 돌아가는 정보를 자연스럽게 수집하는 효과도 있었다.

신문도 없고 전화도 없고 자동차도 없던 시대에 다른 지역의 소식을 알 수 있는 것은 사람의 입이다. 내 집을 찾아오는 손님들이야말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를 전달해 주는 뉴스전달 매체이기도 하였다. 특히 독서를 많이 한 식자층의 방문은 더욱 그러하였을 것이다.

인품과 지성을 갖춘 식자층은 다른 지방에 대한 소식뿐만 아니라, 집주인과 더불어 문학과 역사와 철학을 토론하면서 기인, 달사들과의 인맥을 형성시켜 주는 일도 했을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엮어지는 공간은 그 집안의 사랑채다. 명문가의 사랑채는 접빈객이 이루어지는 남자들만의 공간이자 문화공간이었던 것이다.

많은 사람을 접대할 수 있는 사랑채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재력이 충분히 뒷받침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적어도 100석 이상의 재산이 있어야 손님 대접에 부담을 느끼지 않는 반열에 오를 수 있었고, 전국에 소문날 정도가 되려면 3000석 이상은 가지고 있어야 했다. 조선시대 서민가족(6인 기준) 한 가구의 1년 쌀 소비량이 평균 5가마 정도였다는 통계를 감안하면, 1000가마의 쌀은 200 가구가 1년 동안 먹고 살 수 있는 식량이고, 3000가마는 600가구(3600명)가 1년 동안 먹고 살 수 있는 호구책이다. 그러니 예나 지금이나 돈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 바로 이런 문화사업이다.

아무튼 조선 후기 전라도 남원지역에서 만석꾼 소리를 들으며 과객 대접이 후하기로 소문났던 몽심재는 죽산박씨 연당(蓮堂) 박동식(朴東式, 1763∼1830년) 고택의 사랑채다.

지리산 자락인 견두산(犬頭山) 아래에 자리잡은 이 고택의 사랑채 당호(堂號)가 몽심재인 것엔 까닭이 있다. 이성계의 조선 건국을 반대하고 개성 근처 만수산(萬壽山) 남쪽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 고려왕조에 끝까지 충절을 지킨 두문동 72현(賢)의 영수인 송암(松菴) 박문수(朴門壽, 시호는 忠顯)의 시에서 유래한다. 몽심재를 건립한 연당의 14대조인 송암은 도연명과 백이, 숙제의 고결함과 지조를 흠모해 ‘隔洞柳眠元亮夢 登山薇吐伯夷心(마을을 등지고 늘어서 있는 버드나무는 도연명(元亮)이 꿈꾸고 있는 듯하고, 산에 오르니 고사리는 백이 숙제의 마음을 토하는 것 같구나)란 시구를 남겼는데, 이 시의 첫줄 끝자인 몽(夢) 자와 둘째 줄 끝자인 심(心) 자를 따서 몽심재라고 지은 것이다.

언뜻 보아서는 문학적인 냄새를 풍기는 이름 같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대의명분과 지조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가시밭 길을 택했던 조선 선비의 단호한 각오가 묻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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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헌 < 원광대 동양학대학원 교수 > cyh062@wonkwa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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