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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명가 명택 13 | 남원 몽심재 (夢心齋)

원불교 성직자 40여 명 배출한 명당

  • 조용헌 < 원광대 동양학대학원 교수 > cyh062@wonkwang.ac.kr

원불교 성직자 40여 명 배출한 명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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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심재가 자리잡은 남원 수지면 호곡리 호음실은 남원 일대에서 손꼽히는 명당이다. 남원 사람들이 양택지로 손꼽는 명당은 대략 네 군데다. 첫째가 남원시 주생면 상동리 이언(伊彦)으로 남원양씨 집성촌이다. 국회의원 양창식씨가 이곳 출생이다. 둘째는 주생면 지당리에 있는 지당(池塘)인데, 남원윤씨와 남양방씨 집성촌이다. 방예원 사법고시연수원장이 남양방씨 출신이다. 셋째는 대산면 죽곡리에 있는 대곡(大谷)으로 남원진씨와 장수황씨 집성촌이다. 황희 정승의 후손들이 살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넷째가 수지면 호곡리에 있는 호음실(虎音室)로 바로 죽산박씨 집성촌이다.

남원 4대 양택지에 관한 이야기 한 토막. 옛날 어느 스님이 남원 일대를 둘러보면서 지당이라는 동네의 산세가 아주 훌륭하다고 했다. 그래서 지당을 남원 일대에서 제일가는 명당으로 평가하였다. 그러고 나서 고개를 하나 넘어 옆동네로 가보니 방금 보고 온 지당보다 훨씬 더 훌륭한 산세를 갖춘 곳이 나타나는 것 아닌가. 그래서 순간적으로 “이런!” 하고 탄식하였다고 한다. “이런”이라는 스님의 탄식이 한문으로 옮겨져 ‘이언(伊彦)’이 되었다는 구전이다.

또 남원의 남쪽 방향에 자리한 견두산(犬頭山) 호곡리(好谷里) 호음실(虎音室)도 풍수적 설화가 전해진다. 원래 견두산은 호랑이 호 자가 들어간 호두산(虎頭山)이었고, 호곡리 역시 호랑이 이름이 들어간 호곡리(虎谷里)였다. 그러던 것이 개 견(犬) 자와 좋을 호(好) 자로 바뀌게 된 배경은 호랑이와 관련된 풍수 때문이다.

지리산이 가까운 남원에는 호랑이에게 사람이 물려 죽는 피해가 많았다. 호환(虎患)은 조선시대 가장 무서운 재앙에 속하였다. 장례를 중요시하던 조선사회에서 죽은 사람의 시체는 물론 뼈마저 찾을 수 없어 장사를 지낼 수 없으니까 말이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호식(虎食)당하는 수가 태종 2년에 수백 명이라 했고, 영조 30년에는 경기도 지방에서 한 달 동안에 무려 120명이 호랑이에게 당했다고 한다.

말이 나온 김에 호식총(虎食塚)도 살펴보자. 범이 먹다 남긴 사람의 시체가 산 속에서 발견되었을 때 화장을 하고 그 위에 돌을 쌓아놓은 것이 호식총인데, 흥미로운 점은 그 돌 위에 시루를 엎고 시루 구멍에다 물레에 쓰는 쇠가락을 꽂아 놓은 것이다.



민속학자 최성민씨는 돌을 쌓은 것은 ‘신성한 곳’이라는 표시이기도 하지만 ‘창귀’의 발호를 막기 위함이라고 설명한다. 창귀는 호식당한 사람의 귀신으로 범의 호위병 노릇을 하면서 다른 사람을 불러내 범의 먹잇감을 만든 뒤 자기는 그 대신에 범의 굴레에서 벗어난다는 귀신이다. 그래서 돌로 무덤을 쌓아둠으로써 이 귀신을 꼼짝못하게 하는 동시에 무덤에 풀이 자라지 않게 해 벌초하려다 창귀에 걸리는 피해를 막으려는 것이다.

또 시루는 ‘철옹성’임을 뜻하는 동시에 솥 위에 올라앉는 형국으로, 뚫린 구멍과 함께 하늘을 상징한다. 사악함과 불결함, 모든 것을 찌고 삶아 죽이는 시루를 엎어놓으면 창귀도 그 안에서 꼼짝못하리라 여겼던 것이다. 아홉 개의 시루 구멍으로 귀신이 빠져나갈 수 없도록 벼락을 의미하는 쇠가락도 꽂았다. 쇠가락을 꽂은 또 다른 이유는 물레에서 가락의 용도처럼 창귀도 묘 안에서 맴돌기만 하고 나오지 말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사람들이 호환을 얼마나 두려워했던지 사주명리학에 등장하는 각종 흉살(凶殺) 에도 ‘백호대살(白虎大殺)’이라는 살 이름이 들어 있을 정도다. “백호에게 물려가 죽는다”는 의미의 백호대살은 불의의 사고를 당하여 피를 흘리고 죽는다는 살이다. 이 살이 있는 사람은 본인이 피를 흘리고 사고를 당하거나, 아니면 가까운 피붙이가 피를 흘리고 죽는다고 한다. 오늘날에는 백호대살을 교통사고로 해석하는데, 자동차에 치이면 길에서 피를 흘리고 죽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자동차가 예전의 호랑이 노릇을 하는 셈이다.

아무튼 남원에서 속출하는 호환을 해결하기 위해서 당시 전라감사였던 이서구(李書九, 1754∼1825년)가 남원을 방문하였다. ‘서전’ 서문(序文)을 구천독(九千讀)하였다고 해서 이름을 ‘서구(書九)’로 지었다는 일화가 전해지는 그는 서화담-이토정-이서구-이운규-김일부로 이어지는 조선조 유가(儒家) 도맥(道脈)의 반열에 올라 있는 인물이다. 고위관료를 지냈으면서도 재야의 학문인 천문, 지리에 능통했다고 평가받았던 당대의 이인(異人)이었던 것이다. 그는 전라감사를 정조와 순조 때 두 번이나 역임하였으며 오늘날까지도 회자되는 선정을 많이 베풀어 전라도민에게는 특별한 감사로 기억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 이서구가 남원을 방문하여 내린 처방은 남원 남쪽의 호두산에 어려 있는 호랑이 정기가 너무 강하니 이를 눌러야 한다는 것이었다. 진압 방법은 첫째로 호두산을 견두산으로 바꾸는 것이었다. 둘째는 호두산의 맥이 내려와서 뭉친 지역인 호곡리 명칭을 호곡리(好谷里)로 바꾸는 것이었다. 셋째는 사람들이 운집하는 장소인 광한루 옆에 돌로 된 호랑이상(虎石像)을 세워 호두산을 바라보게 하였다. 호두산의 호랑이 기운을 돌로 만든 호랑이상으로 하여금 대항하게 한 것이다.

이렇게 이름을 바꾸고 돌로 만든 호랑이상을 세운 후에 신기하게도 호환이 사라졌다고 한다. 천문·지리·인사를 하나로 관통하는 법칙은 상응(相應, correspondence)이다. 지상의 호랑이와 돌로 만든 호랑이 그리고 사람이 부르는 호랑이 이름은 4차원에 들어가면 어떤 형태로든지 서로 상응한다는 이치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道人이 나오는 청룡장

몽심재의 풍수는 어떤가. 지리산 노고단에서 내려오는 지맥 중의 하나는 만복대를 거쳐 해발 775m의 견(호)두산에서 일단 숨을 멈춘다. 그런 다음 견두산에서 다시 5km를 내려와 호음실에서 기운이 맺히면서 자리를 하나 만들어 놓는다. 그 자리가 몽심재와 죽산박씨 종택이 있는 자리다.

그러니까 몽심재는 옆으로 누워 있는 호랑이 머리 부분에 터를 잡은 셈이다. 바로 호두혈(虎頭穴)이다. 몽심재 터는 호랑이 턱 아랫부분에 해당한다. 앞의 안산은 호랑이 꼬리로 본다. 이렇게 호두산의 호랑이 정기가 호곡리를 거쳐 마지막으로 뭉친 터가 이 지점이기 때문에 홈실이 남원 4대 양택지에 든다.

몽심재의 지세에서 한 가지 특기할 점은 안대(案帶, 案山)가 아주 가깝다는 점이다. 안대가 대문 앞에서 100m도 안 될 정도로 아주 가깝게 붙어 있다. 돌을 던지면 닿을 정도다. 이런 경우는 그리 흔치 않다. 물형으로 볼 때 이 안대는 호랑이 꼬리에 해당하고, 청룡 백호로 따지면 좌청룡에 해당한다. 좌청룡이 동시에 안대 노릇도 겸하고 있는 것이다.

원래 터 앞의 안대는 다른 곳에서 내려온 지맥이 자리잡는 것이 정상이지만, 자기 본신(本身)에서 분기한 청룡이 좌측에서 오른쪽으로 돌아 내려가면서 안대를 만드는 경우가 드물다. 몽심재는 그 보기 드문 사례 중 하나인데, 이런 경우 발복이 빠르다고 본다. 외부에서 온 맥보다 자기에게서 나간 맥이 안대가 되면 감응하는 효과가 훨씬 빠르다는 뜻이다. 이치를 따져보아도 남의 팔보다는 자기 팔이 훨씬 가까울 뿐 아니라 자유자재로 사용하기에 편할 게 아닌가.

풍수에서는 안대가 터와 가까울수록 거기에 비례해서 발복하는 시간이 빠르다고 본다. 하물며 본신이 안대를 이루면 감응이 속발(速發)한다. 반대로 안대가 너무 멀어 100년 후에 발복하는 터도 있다고 한다.

한편으로 몽심재의 백호는 분명한 모습이 아니다. 약한 편이다. 따지고 보면 청룡의 맥이 지나치게 길고 튼튼해서 이와 같은 형국이 조성되었다. 백호보다 청룡이 훨씬 길고 튼튼한 경우를 풍수가에서는 ‘청룡장(靑龍藏)’이라고 부른다. 청룡장 터에서는 도를 닦는 도인이 많이 나온다는 것이 통설이다. 그래서 불교 스님이나 도교의 단학 수련자들은 청룡장 터를 선호한다.

이와 관련해 몽심재 안대를 자세히 보면 그 모습이 아미사(蛾眉砂)와 비슷한 점이 눈에 들어온다. 아미사는 초승달 형태로 흔히 여자의 눈썹과 같이 생긴 사격(砂格)을 가리킨다. 필자의 풍수 선생님에게 들은 바에 따르면 이처럼 잘생긴 아미사가 터 앞에 있으면 여자들이 훌륭하게 된다고 한다. 아미사는 여자를 상징하므로 남자보다는 여자 후손이 복을 받는다고 믿는 까닭이다.

풍수에는 성 차별이 없다. 그 동안 답사했던 명묘(名墓) 가운데 아미사가 유달리 좋았던 것이 5공 때 보사부 장관을 지냈던 김정례씨의 선산으로 기억된다. 전남 담양에 있는 김 전장관의 증조부 묘를 보면 정면에 나지막한 아미사가 보기 좋게 자리잡고 있다.

지금부터 대략 100년 전쯤 전라도 일대를 풍미한 지관 문선전(文宣傳, 성이 문이고 宣傳官 벼슬을 지냈음)이 이 묘를 잡아주면서 “100년 후에 여자 판서가 나온다”고 예언하였다고 한다. 그때는 사람들이 “여자가 무슨 판서를 할 수 있느냐”면서 다들 웃었는데 결과적으로 여자 후손이 장관을 지냈다.

홈실 몽심재 터가 도인이 많이 나오는 청룡장이라는 점, 안대가 아미사라는 점, 그리고 물형이 호랑이 꼬리라는 점을 종합하면 이 터에서 힘 있는 여자 도인이 많이 나올 수 있다고 추측해볼 수 있다.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홈실의 죽산박씨 가운데 원불교에 출가한 교무(敎務)가 40여 명이나 된다.

원불교에서는 출가한 성직자를 교무라고 부른다. 90여 가구 남짓한 시골 동네에서 도를 닦는 직업 성직자가 40여 명이나 나왔다는 것은 대단한 사건이다. 40여 명 가운데 남녀 비율을 보면 남자가 10명, 여자가 30명쯤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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