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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완수의 우리 문화 바로보기 28

후백제 견훤이 꽃피운 禪宗예술

  • 최완수 < 간송미술관 연구실장 >

후백제 견훤이 꽃피운 禪宗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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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미 고목이 되어 썩어가는 나무를 회생시킬 방법은 없었다. 그래서 다음해(895)에 궁예가 강릉을 차지하고 나서 한산주와 패서 일대를 차례로 복속시킨 다음 이를 기반으로 나라를 일으키는 것을 보면서, 최치원은 차츰 신라 조정에 대한 환멸로 벼슬을 버리고 속세를 떠나려는 계획을 세우는 듯하다.

이해에 18세가 되는 또 다른 사촌아우인 최신지(崔愼之, 仁, 彦로 계속 이름을 바꿈. 878∼944년)를 당나라로 유학 보내면서 진성여왕을 대신하여 당나라 황제에게 이들의 국자감 입학과 장학 자금의 계속 지원을 간곡히 부탁하는 장문의 장계를 올려, 당나라 조정이 이들을 보호해주도록 조치를 취하는 것에서 이를 대강 짐작할 수 있다. ‘동문선(東文選)’ 권47에 실려 있는 ‘숙위(宿衛) 학생과 수령(首領) 등을 보내어 조정에 들어가게 하는 장계(遣宿衛學生首領等入朝狀)’의 일부를 옮겨 본다.

“신라국 당국은 숙위 학생과 수령을 뽑아 보내어 조정에 들어가게 하고 국자감(國子監; 대학)에 붙이어 학업을 닦게 하기를 청합니다. 삼가 인원 수와 성명을 갖추어 아뢰되 나누면 다음과 같습니다. 학생 여덟 사람(최신지 등), 대수령 여덟 사람(기탁 등), 소수령 두 사람(소은 등)입니다. (중략) 신은 지금 앞의 학생들을 뽑고 수령으로써 시중꾼에 충당하여 하정사(賀正使) 수창부시랑(守倉部侍郞) 급찬(級餐) 김영(金穎, 845∼910년경)의 배편에 딸려 보냅니다. 대궐에 이르러 학업을 익히고 겸해서 숙위에 충당하게 하소서. 최신지(崔愼之) 등은 비록 재주가 미전(美箭; 아름다운 화살)에는 부끄럽지만 타고난 업은 좋은 활을 뒤이을 만하니 쓰면 움직이고 이로우면 가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문득 많이 배우는 것으로 귀함을 삼는데 어찌 예절을 멀리하겠습니까. 김곡(金鵠)은 죽은 해주현(海州縣) 자사(刺史) 김장(金裝)의 친아들인데 나면서부터 중국에 있어 양대를 지냈으니 가히 가업을 이어 가성(家聲; 집안의 명성, 집안에 대한 평판)을 떨어뜨리는 것만은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이 감히 흥학(興學; 학교를 일으킴)을 먼저 할 일로 삼고 구현(求賢; 어진 이를 구함)이 임무라고 생각하여 책 살 돈은 이미 고루 조금씩 나눠주었습니다. 책 읽을 양식은 곧 가만히 큰 은혜를 바랍니다. 또 천리의 여행에 비용을 모으면 오히려 3개월분에도 힘에 겹습니다. 10년을 살아가면서 궁함을 구제함은 오직 구천(九天; 天子, 즉 황제를 상징하는 말)을 우러를 뿐입니다.



다행히 당나라가 문덕(文德; 학문의 덕, 문교의 힘)을 널리 펼침을 만났으니 바라건대 종 칠 힘이 없는 것을 용서하시고 경쇠 칠 마음이 있는 것을 가련하게 생각하시어 자석(磁石)이 바늘을 끌어가듯이 자비를 내리시고 시룻번이 시루에 생기듯 급함을 구해주십시오.

특별히 홍려시(鴻寺; 외교를 담당하는 관청)에 선지(宣旨; 임금의 뜻)를 내리시어 지난 용기(龍紀) 3년(891) 하등극사(賀登極使) 판관 검교사부랑중(判官 檢校司部郞中) 최원(崔元)을 따라 입조했던 학생 최영(崔霙) 등의 사례에 따라 경조부(京兆府)로 하여금 달마다 글 읽을 양식을 지급하게 해주시고 겸해서 겨울과 봄에 시절 의복을 내려주시기를 바랍니다.”

같은해 7월16일에는 (도판 3)를 지었으니 이 사실은 1966년 여름에 합천 해인사 부근의 3층 석탑 속에서 이 탑기가 새겨진 벽돌판이 발견됨으로써 알려졌다. 그 내용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해인사 묘길상탑기. 최치원이 짓다. 당나라 19대 황제(昭宗)가 중흥(中興)하던 때에 전쟁과 흉년 두 가지 재앙이 서쪽(당)에서 멈추자 동쪽(신라)으로 와서 흉악한 중에 흉악한 것이 없는 곳이 없다. 주려 죽은 시체와 싸우다 죽은 시체가 들판에 별처럼 흩어져 있으니 해인사에 있던 별대덕(別大德; 승려의 지위) 승훈(僧訓)이 이를 슬퍼하였다.

이에 도사(導師; 중생을 해탈로 이끌어 가는 법사)의 힘을 베풀어 시중(豕衆; 돼지처럼 욕심 많고 어리석은 중생)의 마음을 유인하니 각각 상수리 한 말씩을 희사하여 함께 3층 옥탑을 이루었다. 그 소원하는 간절한 뜻은 크게 말해서 나라를 보호하는 것으로 우선을 삼는다 하겠다. 이중에 나아가서 특별히 원통하게 비명횡사하여 지옥에 빠진 혼백들을 건져내었으니 제사에 화답하여 복을 받고 영원히 이곳에 있으라. 건녕(乾寧) 2년(895) 신월(申月, 7월) 기망(旣望, 16일)에 쓴다.”

당시 사회의 비참한 상황을 알려주는 내용이다. 최치원이 해인사에 이런 탑기를 남긴 것은 그의 친형인 현준(賢俊)대사가 해인사 승려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41세 때인 897년 1월에는 ‘가야산 해인사 결계장기(伽倻山 海印寺 結界場記)’도 짓고 44세 때인 900년 섣달 그믐날에는 ‘해인사 선안주원벽기(海印寺 善安住院壁記)’도 짓는다. 이런 인연으로 결국 최치원은 이 기간 중 어느 때에 가족을 이끌고 해인사로 들어가 은둔했다고 한다. ‘삼국사기’ 권46 최치원전에서 밝히고 있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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