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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직 외교관이 쓴 韓中 5000년

백제 최후의 날, 백강 대해전

“불꽃이 하늘을 물들였고, 바닷물마저 핏빛이 됐다”

  • 백범흠|駐프랑크푸르트 총영사, 정치학박사

백제 최후의 날, 백강 대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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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63년 8월 백제-왜 연합해군이 중국과 한반도, 일본 세력이 모두 관여한 동북아 최초의 국제해전에서 대패했다. 백제와 왜는 영국과 미국의 관계처럼 백제를 세운 부여계가 왜의 건국에 관여했다가 웅진 시대를 전후해 왜가 백제보다 더 강대해져 거꾸로 왜가 백제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추정된다.
고구려가 수·당 교체기(615~625)를 틈타 4세기 모용선비족의 전연·후연(前燕·後燕)처럼 화북으로 진출했다면 관동(허베이, 허난, 산둥, 산시 등)을 장악할 수 있었을 것이다. 허베이는 고구려 영토와 접했고, 거란·해, 돌궐, 말갈 등 새외민족 수도 많았으며, 산둥반도는 랴오둥반도와 지척의 거리로 고구려 해군력으로 통제 가능한 범위 내에 있었다. 당시 고구려의 국력이나 국제정세에 비춰볼 때 고구려는 전연·후연과 달리 점령지를 장기간 통치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또한 고구려는 후방이 튼튼하지 못하던 선비족과는 달리 랴오허-압록강-대동강-예성강 유역이라는 튼튼한 후방기지를 갖고 있었다.



고구려의 실기

그럼에도 고구려가 관동의 범위를 넘기는 어려웠던 것으로 판단된다. 수백만 명에 불과한 고구려인 중 화북 점령과 통치를 위해 상당수가 떠나면 본거지가 백제, 신라, 말갈 등의 공격을 받아 위기에 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고구려가 수(隋)와의 16년에 걸친 전쟁으로 고통받았고, 남쪽의 도전 세력인 신라에 대한 반격이 긴요했다 해도 수·당 교체기에 중국 내부 동향을 수수방관한 것은 큰 실책이다. 고구려는 중국의 전란에 개입해 일부를 점령함으로써 중국 정세에 영향을 미치고, 나아가 △고구려 △중국 △돌궐계 설연타(薛延陀) 등 몽골고원의 유목국가 간 정족지세(鼎足之勢)의 세력균형을 만들었어야 했다.

영류왕(재위 618~642)을 비롯한 고구려 지도부는 중국에서 수십 년간 전란이 지속되거나 최소한 3, 4개 나라로 분열될 것으로 예상한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의 지나치게 소극적인 대(對)중국 정책은 당에 틈을 내줬으며, 도리어 고구려는 당의 분열정책에 놀아나 연개소문의 아들들이 상잔(相殘)을 벌인 끝에 멸망당하고 말았다.

당 태종 이세민(李世民)은 630년 몽골고원에 자리한 동돌궐(東突厥)을 멸망시키고, 인근 북방민족 수장들로부터 농경-유목 2개 세계의 패자라는 뜻을 가진 천가한(天可汗)으로 추대되는 등 국력을 급속히 강화했으나 고구려는 수·당 교체기를 넋 놓고 바라보다가 동돌궐을 제압한 당나라가 압박해오자 631년 초가 돼서야 북부 부여성(扶餘城)에서 보하이만(渤海灣)에 이르는 천리장성을 쌓기 시작했다. 그해 7월 당(唐)은 고구려가 조성해놓은 랴오시 경관(景觀)을 파괴했다. 경관은 고구려 침공전에서 전사한 수나라 병사의 해골을 모아 쌓은 것으로 일종의 전승탑이다. 고구려 지도부는 당의 도발에 긴장했으며 백제 의자왕은 신라를 공격했다.





멸망 위기 직면한 신라

의자왕은 642년 8월 부여윤충(扶餘允忠)에게 1만여 병력을 주어 신라의 대야성(합천)을 공략하게 했다. 대야성이 함락된 후 신라는 낙동강 우안(右岸) 영토 대부분을 백제에 빼앗기고, 낙동강 좌안(左岸) 압량주(경산)에 최후의 방어선을 쳤다. 압량주에서 수도 월성(경주)까지의 거리는 40~50㎞에 지나지 않는다. 신라는 고구려 전선에서도 밀려나 동해안 국경이 하슬라(강릉)까지 축소됐다.

백제와 고구려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해 멸망 위기에 직면한 신라는 김춘추를 파견해 고구려에 군사 지원을 요청하는 한편, 김유신을 압량주 군사령관으로 임명해 전열을 재정비했다. 642년 가을 영류왕을 죽이고 정권을 장악한 고구려 연개소문이 군사지원을 거부하자 신라는 당나라에 매달렸다. 당나라는 태종이 직접 지휘한 645년 고구려 침공전에서 패배하자 신라를 이용해 백제를 멸망시키고, 랴오허와 한강 2개의 전선에서 고구려를 침공하기로 방침을 정했다.

645년 나카노오에 왕자(덴지 천황)가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후 왜국(倭國)은 당나라를 개혁 모델로 삼아 ‘다이카 개신(大化 改新)’을 추진하면서 당나라의 동맹국 신라와 다소 가까워졌다. 압량주까지 후퇴하며 멸망의 위기에 몰린 신라의 김춘추가 직접 왜와 교섭했지만, 왜를 백제로부터 떼어놓으려는 계획은 실패로 끝났다.


백제, 황혼에 물들다

백제 지도부는 신라-당 동맹 구축 등 국제정세 변화에 둔감했다. 백제는 신라를 침공하기 위한 육군력 증강에 치중하느라 해군을 등한시했다. 660년 15만 대군을 실은 당나라 함대가 경기만(京畿灣)까지 남하해 덕물도(덕적도)에 20여 일이나 기항했는데도, 고구려 정벌을 준비하는 줄로만 알 정도로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당나라군은 금강(錦江)을 타고 올라가 신라군과 합세해 사비(부여)와 웅진(공주)을 빼앗고, 의자왕의 항복을 받아냈다.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은 고구려를 치는 것처럼 보이게 한강 유역으로 북진하다가 방향을 틀어 남하해 황산벌에서 부여계백(扶餘階伯)의 결사대를 격파하고, 사비와 웅진 공격전에 합세했다.

백제에서는 곧 복국(復國) 운동이 일어났다. 백제 부흥군이 지원을 요청하자 왜는 당과 부흥군 사이에서 난처한 처지에 빠졌다.부흥군 지도자 귀실복신(鬼室福信)이 원병과 함께 의자왕의 아들 부여풍의 귀국을 요청한 때가 660년 10월인데, 왜가 부여풍을 백제로 보낸 것은 거의 1년 뒤인 661년 9월이다. 왜는 결단을 내린 뒤에는 파격적으로 부흥군을 지원했다. 661년 천왕 사이메이(齊明)가 급서한 뒤 나카노오에가 즉위를 미루면서까지 부흥군 지원에 전력을 다할 정도였다. 왜는 662년 1월 화살 10만 개와 곡식 종자 3000석을 원조했으며, 2개월 뒤인 3월 피륙 300단을 추가로 보냈다. 왜가 백제 복국 지원에 나서기로 한 데는 662년 1월 연개소문이 평양 근교에서 당나라군 10만 명을 전멸시키고, 2월에는 평양 근교에 고립된 당장(唐將) 소정방이 신라군으로부터 군량 지원을 받은 후 간신히 퇴각한 것도 영향을 미쳤다.

귀실복신이 지휘한 백제 부흥군은 사비성 주둔 당군을 포위할 만큼 기세를 올렸으나 전권을 장악한 귀실복신과 국왕 부여풍 간 갈등이 격화했으며, 663년 6월 부여풍은 귀실복신을 살해했다. 부여풍은 그해 8월 왜와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원병을 요청했다. 왜는 추가 파병했으며 고구려는 신라의 변경을 공략했다.

백제 부흥군 내부에 혼란이 일어났음을 파악한 신라는 서둘러 출병했다. 당은 웅진에 주둔하던 유인원(劉仁願)의 증병 요청에 따라 해군 7000명을 추가 파병했다. 당의 손인사와 유인원, 신라 문무왕이 이끄는 육군 및 당나라 두상과 의자왕의 아들 부여륭(扶餘隆)이 이끄는 170여 척의 함선에 나눠 탄 해군이 수륙 협공으로 부흥군의 수도 주류성(두루성)으로 진격했다. 육지에서는 부흥군 기병이 신라군과 맞섰으며, 바다에서는 왜에서 건너온 1000여 척의 함선이 백강(白江) 강변에 정박했다. 왜국 선단은 셋으로 나뉘어 당나라 해군을 공격했지만 간조(干潮) 시간차 등으로 인해 수적으로 우세했음에도 네 번 모두 대패했다. 백강에 집결한 왜 함선 가운데 400척이 불탔다. 구당서와 신당서, 자치통감, 삼국사기 모두 백강 해전에 대해 “연기와 불꽃은 하늘을 붉게 물들였고, 바닷물마저 핏빛이 되었다”고 묘사한다.

왜국 장수 에치노 다쿠쓰는 수십 명을 죽이며 분전했지만 끝내 전사했고, 규슈의 호족(豪族) 치쿠시노기미 사쓰야마는 당나라군에 잡혀 8년간 억류됐다가 귀국했다. 부여풍은 몇 사람만 거느린 채 고구려로 달아나고, 살아남은 왜군 함대는 흩어진 병사들과 백제 유민을 태우고 당나라군에 쫓기면서 간신히 귀국했다. 백강 대해전은 중국과 한반도, 일본 세력이 모두 관계된 동북아 최초의 해전이었다.



연개소문家의 상잔

백강 대해전을 끝으로 한반도와 왜(倭)의 관계가 일단락됐다. 백제와 왜는 영국과 미국의 관계처럼 백제를 세운 부여계가 왜의 건국에 관여했다가 웅진 시대를 전후해 왜가 백제보다 더 강대해져 거꾸로 왜가 백제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추정된다. 육지에서도 당군이 백제 부흥군을 제압하고 수도 주류성을 함락시킴으로써, 임존성의 지수신(遲受信)을 제외한 부흥군 세력이 궤멸했다. 이때 사택상여와 흑치상지, 왜군, 탐라(耽羅) 사신 모두가 항복했다.

백제 멸망 후 당나라로 끌려간 백제 왕족 및 귀족은 상당한 입지를 구축했다. 황실 방계인 이옹이 출세를 위해 의자왕의 증손녀 부여태비(扶餘太妃)와 혼인할 정도였다. 당나라로 끌려간 백제인 대부분은 당의 정책에 따라 랴오허 유역 건안성으로 이주당해 발해의 서진(西進)을 막는 역할을 맡았다. 백제인들은 당나라에 의해 오랑캐로써 오랑캐를 제압한다는 이이제이(以夷制夷)의 수단으로 이용당하기는 했지만, 그 과정에서 입지를 강화할 수 있었다.

663년 백제가 멸망함에 따라 고구려는 랴오허와 한강 유역 2개의 전선에서 적군을 막아야 했다. 고구려는 당이나 신라 등 외적이 아니라 연개소문 아들끼리 벌인 권력투쟁 여파로 몰락했다. 동생들과의 권력투쟁에서 패배한 장남 연남생은 당나라에 투항했으며, 당나라 정복군 대장 이적(서세적)은 668년 연남생을 향도로 삼아 신라의 지원을 받아 평양성을 함락하고 고구려를 멸했다.
 
당나라는 국력에 비해 과도하게 팽창했다. 백제를 멸망시킴으로써 한반도 남부에까지 세력을 뻗쳤으며, 고구려를 멸망시킴으로써 랴오허, 쑹화장(松花江)을 넘어 흑수말갈(黑水靺鞨)의 근거지 헤이룽장 유역까지 세력을 넓혔다. 여기에다 몽골고원의 설연타를 제압하고, 키르기즈와 우즈베키스탄을 포함한 중앙아시아와 길기트를 포함한 파키스탄 동북부로까지 세력을 뻗쳤다.

당나라는 과도하게 팽창하면서 내외 모두의 저항에 부딪혔다. 과도한 전비 지출로 증세(增稅)가 불가피해짐에 따라 경제 중심지인 장화이(江淮)를 비롯한 도처에서 민란이 일어났다. 거란과 발해의 공격에 대비해 설치된 허베이, 산시, 산둥 지역 절도사들의 할거는 당나라의 분열을 재촉했다. 티베트 고원의 토번, 만주의 발해, 윈난의 남조(南詔), 중앙아시아 사라센 압바스 왕조, 몽골 고원의 후돌궐(後突闕)의 저항은 제국의 분열을 가속화했다.


티베트의 흥기

당(唐)의 강적은 서쪽에서 출현했다. 티베트 고원에서 흥기한 토번이었다. 고구려가 멸망한 다음 해인 669년 가르첸링이 이끄는 토번군은 설인귀가 지휘한 당나라-토욕혼 10만 연합군을 청해호 남쪽의 다페이촨(大非川)에서 격파했으며, 여세를 몰아 신강의 안서 4진(安西四鎭) 즉, 카라샤르, 쿠차, 호탄, 카슈가르를 장악했다. 몽골고원의 돌궐이 부흥하고, 만주와 한반도 북부를 영역으로 하는 발해가 독립했으며, 신라가 당군(唐軍)을 물리친 것도 다페이촨 전투에서 당나라가 토번에 대패했기 때문이다. 가르첸링의 토번군은 678년 이경현이 이끄는 당나라 18만 대군을 칭하이호 부근의 칭펑링(承風嶺)에서 대파했는데, 이로써 칭하이의 티베트화가 공고해졌다.

동돌궐이 멸망한 지 50여 년이 지난 679년 아쉬나(阿史那) 부족장 쿠틀룩(Qutluk)이 톤유쿡(Tonyukuk)과 함께 돌궐을 재건했다. 몽골고원을 중심으로 돌궐제국을 재건한 쿠틀룩은 당나라에 공세를 취해 허베이와 산시, 간쑤성 변경을 주기적으로 약탈했다. 쿠틀룩의 동생 카프간(默啜)도 당나라에 대한 공세를 계속해, 전돌궐(前突厥) 전성기의 영토를 거의 회복했다. 이때 고구려 유민 10만여 명도 돌궐에 합류했다. 그중 고문간(高文簡)은 카프간의 사위가 돼 ‘고려왕막리지(高麗王莫離支)’라고 칭했다. 이후 고문간과 고공의, 고정부 등이 이끄는 고구려인들은 쿠틀룩과 카프간 후손 간 내분이 일어나자 당나라에 항복했으며 내몽골에 정주했다.

당나라가 신흥 토번과 후돌궐의 공격에 시달릴 때 랴오허 유역으로 강제 이주된 고구려 잔존 세력이 거란족이 봉기한 기회를 이용해 부흥 운동에 나섰다. 처음에는 걸걸중상과 걸사비우, 나중에는 대조영이 지휘한 고구려 별부(別部) 말갈계 중심의 부흥군은 고구려가 멸망한 30년 뒤인 698년 당나라 추격군을 격파하고 동모산성(지린성 옌볜조선족자치주 둔화시)을 중심으로 발해(渤海)를 세웠다. 걸걸중상(乞乞仲象)과 걸사비우(乞四比羽)의 ‘걸걸(乞乞)’ 또는 ‘걸(乞)’은 우리말 ‘클(크다)’을 음차(音借)한 것이다. 대조영(大祚榮)과 대야발(大野勃)을 포함한 걸걸중상의 자손이 대씨(大氏)를 칭한 것은 이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세계의 수도, 장안

카프간의 아들 뵈귀(Innel)를 죽이고 가한 자리에 오른 쿠틀룩의 아들 빌게(716~734)는 725년 당나라와 외교 관계를 수립했으며, 복속 부족의 반란을 평정하고 후돌궐을 안정시켰다. 빌게는 둘궐의 비스마르크로 알려진 톤유쿡을 시켜 당나라군을 간쑤 지역에서 대파하고, 하서회랑 지대를 유린했다. 후돌궐의 역사는 731년 사망한 빌게의 동생 퀼테긴(Kültegin)의 업적을 기린 오르콘 비문(Orkhon Inscription)에 잘 나타나 있다. 퀼테긴의 장례식에는 당나라, 거란, 티베트, 소그드, 부하라, 키르기스에서 온 조문 사절이 참석했다. 돌궐어와 한문으로 새겨진 톤유쿡 비문은 전돌궐(前突闕) 패망의 원인을 첫째, 쇠퇴기 지도자들의 태만과 무지. 둘째, 돌궐 백성의 어리석음과 동족 간 대립. 셋째, 돌궐 문화 포기와 중국화 추종. 넷째, 중국 왕조의 내부 분열책 등이라고 지적했다. 또한 “이동하는 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으며, 돌궐을 약하게 만드는 불교와 도교 등 이질적인 종교를 받아들이지 말고 돌궐정신을 보존하자”는 말도 포함돼 있다.

당나라는 한문화(漢文化)를 기본으로 했으나 황실이 선비족인 까닭에 선비적 요소가 곳곳에 남아 있었다. 당나라 이씨는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의 하나인 한족 왕조 서량(西涼) 이씨를 선조로 한다고 주장하나, 실제는 북위(北魏) 무천진 선비족 출신 대야씨(大野氏)의 후손이다. 태종 이세민의 경우 어머니는 선비족 두씨(竇氏), 아내도 선비족 장손씨(長孫氏)다. 태종은 ‘현무문의 정변’에서 살해된 친동생 이원길의 아내 양씨를 후궁으로 들였으며, 고종은 아버지 태종의 후궁이던 무조(武照)를 아내로 삼았고, 현종은 아들 수왕 이모(李瑁)의 아내 양옥진을 빼앗아 후궁으로 뒀다.



훈자족의 나라 소발률

당나라는 외국인이라 해도 능력 있는 자는 요직에 발탁하는 등 내·외국인 간 차별을 두지 않았다. 흑치상지, 고선지, 이정기, 부몽영찰, 가서한, 안록산, 이근행과 그의 아들 이다조 등 수많은 외국 출신 인사가 고위직에 올랐다. 장안은 당나라의 수도일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와 중앙아시아-중동을 아우르는 세계의 수도 구실을 했다. 따라서 인재와 물산이 장안으로 모여들었다. 

선비족을 조상으로 둔 태종 이세민의 후궁 무조(측천무후)는 655년 고종의 황후로 책봉된 이후 정권을 잡았다. 측천무후는 705년 사망할 때까지 50년간 절대 권력을 한 차례도 놓지 않았다. 690년 국명을 아예 주(周)나라로 바꾸고, 낙양으로 천도하기까지 했다. 측천무후는 태종의 처남이며 무천진 인맥의 중핵인 재상 장손무기(長孫無忌)를 살해하는 등 서위→북주→수→당에 이르기까지 정권을 오로지한 선비족 무천진 인맥(關隴集團) 위주에서 벗어나 서위(西魏)-북제(北齊) 지역이던 관동 출신들도 기용했다.

측천무후는 자신에게 반대하는 자는 자손이라 해도 용서하지 않은 냉혹 무자비한 정치인이었다. 아들 이홍, 손녀 영태군주를 포함한 황족들과 중신들을 수없이 죽였다. 그러나 적인걸(狄仁傑)과 요숭(姚崇), 장간지(張柬之) 등 필요한 인재를 키우고, 나라를 효율적으로 통치해 국부를 증대시키는 등 상당한 업적을 이룩했다.

측천무후가 죽은 뒤 손자 이융기는 쿠데타를 일으켜 숙부인 중종의 황후 위씨(韋氏) 일당을 제거했다. 그는 황제(현종)가 된 다음 적극적인 대내외 정책을 취했다. 현종 시대에도 당나라와 토번은 신장과 중앙아시아에 대한 패권을 놓고 전쟁을 계속했다. 당나라와 토번 간 전쟁에서 핵심 지역은 파키스탄 동북부 훈자족의 나라 소발률(길기트)이었다. 소발률(小勃律)은 동쪽은 티베트, 서쪽은 아프가니스탄, 남쪽은 인더스강, 북쪽은 신장과 연결되는 요충지였다. 소발률은 사마르칸드(康國), 부하라(安國), 타슈켄트(石國), 샤흐리샤브즈(史國) 등 중앙아시아의 오아시스 도시국가에서 당나라로 가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목구멍(咽喉) 같은 곳으로 토번이 장악하고 있었다.




제지 기술의 유럽 전파

747년 고구려 유민 출신 안서도호부 부도호(副都護) 고선지는 7000여 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파미르 고원을 넘어 방심하고 있던 토번군을 격파한 데 이어 빙하로 뒤덮인 다르코트 계곡을 달려 내려가 소발률성을 함락시킴으로써 중앙아시아에 대한 당나라의 패권을 확립했다. 그로부터 3년 뒤인 750년 고선지는 다시 중앙아시아 원정길에 올랐다. 타슈켄트가 사라센으로 기울어짐에 따라 중앙아시아에 대한 당나라의 영향력이 약화되던 시기다.

고선지가 이끄는 당(唐)-서역(西域) 10만 연합군은 751년 1월 타슈켄트성(城)을 포위했다. 고선지는 타슈켄트왕을 속여 항복을 받아냈다. 당초 약속과 달리 장안으로 연행된 타슈켄트왕은 처형당했으나 중앙아시아의 많은 나라가 사라센 압바스 왕조로 넘어갔다. 당나라의 중앙아시아 지배가 뿌리째 흔들린 것이다.

사라센은 페르가나 계곡을 넘어 키르기즈의 탈라스 강까지 촉수를 뻗쳐왔다. 751년 8월 고선지가 지휘하는 당나라군은 탈라스 전투에서 사라센과 돌궐계 카를룩 연합군에 대패했으며, 이로써 당나라의 중앙아시아 지배는 종식됐다. 이때 당나라군 진영에 있던 제지 기술자가 사라센군에 잡혀간 것이 제지 기술이 사라센(중동)과 유럽에 전파되는 기원이다.

당나라는 750년 양귀비(楊貴妃) 일가인 재상 양쇠(양국충)와 검남절도사(劍南節度使) 선우중통의 지휘하에 윈난(남만)의 백족(白族) 왕국인 남조(南詔)를 공격했으나, 각라봉(閣羅鳳)이 지휘하는 남조군과의 노남 전투에서 전사자 7만여 명을 내는 등 대패했다. 7세기 초 백족이 쿤밍(昆明) 서북부에 위치한 대리를 중심으로 몽수(蒙嶲), 월석(越析), 시랑(施浪), 등섬(邆賧), 낭궁(浪穹), 몽사(蒙舍) 등 6개의 조(詔·나라라는 뜻)를 건설했으나, 몽사를 제외한 5개 나라는 곧 서북쪽으로부터 침공해온 토번에게 정복당하고 말았다. 토번과 적대관계이던 당나라는 남조왕 피라각(皮邏閣)을 지원해 토번의 영향하에 있던 여타 5개의 조를 멸망시키고 737년 윈난을 통일하게 했으나, 남조가 급성장해나가자 위협을 느낀 나머지 침공한 것이다.



唐, 멸망하다

당나라는 753년 가권(賈顴), 754년 이복(李宓)에게 대군을 주어 지난번의 패전을 설욕하게 했으나 거듭 참패하고 말았다. 남조의 최전성기를 가져온 이모심(異牟尋)이 재위하던 793년 남조는 토번을 격파했으며, 권풍우(勸豊祐)가 통치하던 829년에는 쓰촨으로 북진해 청두(成都)를 점령했다. 안록산-사사명의 난 이후 토번이 장안까지 침공하자 국력을 강화한 남조도 쓰촨을 잠식해 들어갔다. 남조는 미얀마, 라오스, 태국, 북베트남 방향으로도 세력을 뻗어나갔다. 남조의 공세에 밀려 윈난 일대에 거주하던 타이, 샨 종족이 오늘날의 인도차이나 지방으로 밀려났다.

당나라는 남조에 대비해 구이저우(貴州)와 광시(廣西) 방면에도 수비군을 증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남조에게마저 밀린 당나라의 황혼이 붉게 물들었다. 남조 역시 873년 북방 전진기지인 청두를 상실한 다음부터 쇠락의 길을 걸었다. 혼란 끝에 902년 한족 출신 권신(權臣) 정매사가 정권을 찬탈해 대장화국(大長和國)을 세웠다. 927년에는 검남절도사 양간정이 대장화국을 멸망시키고 대의령국(大義寧國)을 세웠으며, 그로부터 10년 뒤인 937년 통해절도사 단사평(段思平)이 여러 부족의 지지를 받아 대의령국을 멸망시키고 대리국을 세웠다.

후돌궐에서는 오즈미시 샤드가 741년 텡그리 가한을 죽이고 스스로 가한에 등극했다. 오즈미시에 반대한 후돌궐 지배층 대부분은 742년 당나라에 투항했다. 약체화된 후돌궐은 위구르족에 의해 멸망당했으며, 이는 당나라의 위기를 심화시켰다. 몽골고원의 돌궐족이 서천(西遷)함에 따라 몽골고원과 신장, 랴오허 유역이 한꺼번에 불안정해졌다. 당나라를 멸망으로 이끈 것은 안록산-사사명의 난, 황소(黃巢)의 난과 함께 사타돌궐족(沙陀突厥族)의 남하였다. 안·사의 난으로 카운터펀치를 맞은 당나라는 황소의 난과 뒤이은 주전충의 배반, 사타돌궐의 침공으로 멸망했다.




백범흠
● 1962년 경북 예천 출생
● 연세대 신문방송학과 졸업, 정치학박사
● 駐중국대사관 총영사
● 現 駐프랑크푸르트총영사관 총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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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흠|駐프랑크푸르트 총영사, 정치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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