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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중심! 경북세상! | 권두 interview

경북의 文人 이문열 “품격 있는 고향에서 儒家·현대문학 잇는 작업할 것”

  • 배수강 기자|bsk@donga.com

경북의 文人 이문열 “품격 있는 고향에서 儒家·현대문학 잇는 작업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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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이문열의 고향은 경북 영양이다. 청록파 시인 조지훈과 시인이자 수필가 오일도의 고향이기도 하다. 경북 북부지역이 그러하듯, 그는 영양의 재령이씨(載寧李氏) 집성촌에서 자라면서 부지불식간 퇴계학풍의 영향을 받았다. 이게 때론 그의 보수성을 공격하는 빌미가 되기도 하지만 그는 담담하게 말한다. 

“유학은 개인적 취향이자 정신적 고향이고 바탕, 토양 같은 느낌입니다. 거기에는 굉장한 ‘문장 미학’이 있는데, 우리는 서양 문학만 하다 보니 우리 문학의 폭이 좁아진 느낌이죠.”

다음은 그와의 일문일답이다.

고향에 지은 ‘광산문우’는 ‘이문열 문학관’이라고 알려졌던데요.
“아시다시피 아버지가 월북하고, 젊은 어머니와 늙은 할머니가 50칸 큰 집에서 생활하기 어려웠어요. 집을 팔려고 내놓으니 그곳 집안 어르신이 타 지역 사람에게 팔까봐 걱정이 됐는지, 적당한 값에 집을 사고는 나중에 아버지가 (북한에서) 내려오거나 아들이 장성하면 되돌려주기로 했다고 해요. 1990년대 중반 고향에 가서 그 어른의 손자를 만났더니 그 사연을 잘 모르더라고요. 그래서 집안 동생이 ‘근처에 집을 지으라’고 해서 사비를 들여 집을 짓고 ‘광산문학연구소 광산문우(匡山文友)’라고 이름 지었어요. 문학관은 아니고 개인 집이자 사랑방인데, 제가 지었으니 문학관으로 알려진 거 같아요.”





영남 남인의 독특한 운명

경북이 고향이라는 게 ‘이문열 작품 세계’에 영향을 줬나요?
“적어도 문인 중에는 고향의 영향을 많이 받은 사람일 겁니다. 선조들이 300~400년간 영양의 재령이씨 집성촌에서 살면서 형성된 무엇인가가 있어요. 근래 경북 북부지역 문인으로는 영양의 조지훈, 오일도 선생과 안동의 이육사, 유안진 시인(서울대 명예교수) 집안이 있는데, 학풍으로 말하면 퇴계학풍으로 통일돼 있죠. 영남 남인의 독특한 운명이죠.”

독특한 운명?
“조선시대 300년 가까이 남인들은 노론 정권에 소외돼 있었습니다. 한양과 그 근교에 거주한 경화사족(京華士族)은 시골에 살다가 중앙에 진출하면 가솔(家率)을 전부 데리고 한양에 가요. 그런데 영남 사람들은 재지사족(在地士族)이라고 해서, 대체로 향촌 사회에서 지주로서의 경제적 기반을 두고 천거를 받으면 장성한 아들과 단출하게 한양에 가 벼슬을 해요. 그런데 사화(士禍) 등으로 집안이 망하면 경화사족은 도와줄 사람이 거의 없지만, 재지사족은 고향에 도움받을 자손이나 친지들이 있어 권토중래(捲土重來)할 수 있었죠. 그래서 경북 남인들은 항시적으로 (고향) 땅에 살면서 문중을 만들고 학통을 연결해요.”

그렇군요. 남인 학풍은 이후 현대문학으로 연결되진 못한 거 같은데요.
“맞아요. 이육사, 조지훈의 시에서 ‘강건한 선비 문화’가 예술화됐지만, 퇴계 중심의 도학(道學)이 현대문학에 강하게 연결되진 못했죠. 유가(儒家) 문학에도 굉장한 ‘문장 미학’이 있는데, 우리는 서양 문학만 하다 보니 문학의 폭이 좁아진 느낌입니다. 조지훈 이육사 선생의 한시는 율격까지 다 맞아요. 이러한 유가 문학도 현대문학으로 종합되고 절충될 수 있습니다. 조지훈 선생도 이러한 문학을 우리말로 많이 풀려고 노력했고, 나도 고향에서 문학을 한다면 그중 하나가 유가 문학과 현대문학을 연결하는 작업일 겁니다. 나도 기본적으로 그러한 문화를 가진 거 같아 그런 걸 좀 하려다가 완고한 사람으로 비쳤잖아요. 나의 보수성, 같은 걸로 공격받을 때 근거가 되기도 하고요(웃음).”


열흘간 머무는 고향

그랬나요?
“개인적 취향으로 (유가 문학을) 조금 했는데, 한문 잘하고 유학 배운 걸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더라고요. 따로 선생님을 구해서 배운 적은 없어요. 유학은 개인적 취향이자 정신적 고향이고 바탕, 토양 같은 느낌입니다.”

이문열은 인조 18년(1640) 병자호란의 국치를 부끄럽게 여겨 이곳으로 들어온 석계(石溪) 이시명 선생의 후손이다. 부인은 안동장씨 장계향. 최초 한글 조리서인 ‘음식디미방’을 집필했는데, 작가 이문열의 소설 ‘선택’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석계 부부는 왜란과 호란으로 궁핍해진 이웃을 위해 상수리나무를 심었고, 지금도 수령 400여 년이 된 상수리 고목이 50여 그루에 이른다. 이문열은 석계 선생의 넷째 아들 항재(恒齋) 이숭일의 12세손. 영양의 재령이씨는 의병대장을 지낸 나산 이현규, 일제강점기 유림 대표로 파리장서사건(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한국 독립을 호소한 서한을 작성한 사건)에 서명한 운서 이돈호 등 독립운동가와 항일 시인 이병각 등을 배출했다. 이어지는 그의 설명이다.

“자치단체에선 선비정신을 강조하던데, 요즘 시각으론 옛날의 미덕이고 그렇게 살기를 바라는 정도죠. 전통문화를 지향하는 거죠. 나도 일곱 살 때 고향을 떠났다가 여덟 살에 안동 중앙초교, 서울 종암초교를 다니다가 4학년 때 경남 밀양으로 갔어요. 6·25전쟁 직후 어지러운 세상에 신분이 노출돼 여기저기 이사를 다녔죠. 그런데요, 늘 밖에서 떠돌아다녀도 꼭 고향에 가고 싶어요.

10대 후반부터 지금까지 1년에 한 번은 고향에 가서 열흘 정도 머뭅니다. 고향의 전통, 그래도 내가 구습(舊習)을 아는 것도 이 때문이죠.”

경북 사람으로 살아보니 어떤가요?
“뭐, 힘들 때도 있어요. 가끔 경북은… 역사의 과잉이 느껴져요.”



몇 백 년 이어져오는 훈도

역사의 과잉이라면….
“그 지역에 너무 큰 문화가 중복돼 있는 거죠. 경주를 중심으로 한 불교문화도 그렇고, 주자학 측면에서도 기호학파 영남학파 중 2분의 1이죠. 그러니 경북 분들은 자부심도 도도하고, 문화유산도 많은 데다 박정희 전 대통령과 산업화 세력이 근·현대사를 끌어와 정신적 콤플렉스를 만들기도 해요. 산업화 덕을 본 도시는 구미 정도인데, 경북인으로서의 정신적 자부심은 고단합니다.

 다만 고향 사람들 마음속에는 천박하게 막돼먹지 않고 어떤 격이 있는 거 같아요. 그 품격이 위로가 됩니다. 문중이 망할 때 망하고, 구를 때 굴러도 몇 백 년 이어져오는 훈도(薰陶·덕으로 사람 품성이나 도덕 따위를 가르치고 길러 선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가 있는 거 같아요.”

최근 ‘신동아’에 ‘둔주곡(遁走曲) 80년대’ 연재를 시작했는데요.
“쓰기 시작하면 웬만한 작품은 1년 내에 쓰는데, 내가 생각을 입히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는 스타일이어서 매달 쓰려니 힘드네요. 둔주곡은 ‘푸가(fuga)’라고 하는데, 하나의 주제로 각 성부나 악기에 장기적이고 규율적인 모방반복을 하면서 특정된 법칙을 지켜 이루어진 악곡입니다.

노래 부를 때 한가락으로 가는 게 아니고, 가락 자체가 다른 가락이 가는 거죠. 그러니 불협화음 공간이 생기는데, 그 땐 이상한 음이라고 생각하지만 전체로는 한 노래를 이루죠. 우리의 1980년대도 산업화와 민주화가 각기 다른 가락처럼 보이지만, 멀리서 보면 한 노래입니다. 경북이 가진 인상도 각기 다른 가락이 다른 소리를 내지만 결국 한 방향으로 종합하고 절충할 수 있을 거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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