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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력 특집 | 비바! 한국축구

부산의 환희 대구의 한숨 인천의 눈물

한국축구, 기적의 현장을 가다

  • 육성철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sixman@donga.com

부산의 환희 대구의 한숨 인천의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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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아시아드주경기장 주위를 가득 메우고 목이 터져라 ‘대한민국’을 외치는 축구팬들을 뒤로하고 해운대로 향했다. 이날 부산에서는 10여 개의 대형 전광판이 설치됐는데, 부산역 광장과 해운대에 가장 많은 인파가 몰렸다. 해운대로 가는 동안 도심 곳곳에서 유럽에서나 볼 수 있던 풍경들이 펼쳐졌다. ‘대~한민국’ 박수에 맞춰 자동차 경적을 울리는가 하면, 대형 태극기를 들고 도로 한복판으로 질주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을 피해가며 조심스럽게 차를 몰던 택시 기사는 “월드컵 개막일 이후 무단횡단과 합승 단속이 심했는데, 오늘은 다 봐주는 것 같아요. 축구가 참 대단하네요”라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6월5일 0시30분. 해운대는 대낮처럼 밝았다. 도로변에서는 술판이, 해수욕장 백사장에서는 춤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축구가 끝난 지 두 시간이 지났는데도, 축제는 계속되었다. 언더그라운드 가수가 나와 ‘라밤바’를 부르자 외국인과 ‘붉은 악마’ 티셔츠를 입은 사람들이 한데 어우러져 격정적인 댄스를 선보였다. 노래가 끝나면, ‘대~한민국’ 박수가 이어지고, 박수가 멈추면 또 다시 춤판이 벌어졌다.

시작이 반이라면 한국은 5부 능선을 돌파한 셈이었다. 난적으로 예상했던 폴란드를 물리쳤기 때문에 16강진출 가능성은 어느 때보다 높았다. 기자는 ‘포르투갈이 미국을 물리치면 여유있게 미국전을 준비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6월5일 수원월드컵경기장에 도착했다. 수원에 모인 축구팬들도 폴란드전의 감격이 채 가시지 않은 듯했다. 포르투갈과 미국이 몸을 푸는 중에도 한국의 폴란드전 골 장면을 떠올리는 사람이 많았다. 현장에서 양 팀을 분석중인 히딩크 감독의 모습이 전광판에 나타나자 관중들은 환호했다.

미국은 플레이메이커 레이나와 공격수 매시스가 빠진 반면, 포르투갈은 부상에서 완쾌되지 않은 피구까지 투입했다. 때문에 베스트 11의 면면에서 포르투갈의 우세를 점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이를 어쩌랴. 공은 둥글고, 축구는 인간의 신체 중 가장 부정확한 발로 하는 스포츠인 것을….

축구공은 둥글다



경기 시작 3분 만에 미국의 오브라이언 선수가 선취골을 터뜨렸다. 당황한 포르투갈 수비들은 공을 걷어내기에 바빴고, 미국은 그 틈을 예리하게 파고들었다. 전반 29분 포르투갈의 자살골과 35분 맥 브라이드의 그림 같은 헤딩슛으로 스코어는 순식간에 3대0으로 벌어졌다. 이제 66잉글랜드월드컵의 에우제비오가 아니라면 포르투갈은 치욕의 패배를 당할 수밖에 없다. 과연 피구는 에우제비오의 뒤를 이을 것인가?

포르투갈의 반격은 너무 늦게 불이 붙었다. 몸이 무거운 선수들은 패스미스가 나올 때마다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고, 교묘하게 시간을 끄는 미국 선수들의 플레이에 말려들어 쓸데없는 파울을 남발했다. 3대2. 우승후보 포르투갈의 데뷔전은 초라했다. 선수들은 인사도 하지 않고 라커룸으로 퇴장했고, 포르투갈 응원단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한동안 자리를 뜨지 못했다.

1라운드 결과 당초 2강으로 꼽혔던 포르투갈과 폴란드가 나란히 1패를 기록하면서, D그룹도 ‘죽음의 조’로 돌변했다. 수원월드컵경기장에 나온 축구인들은 한결같이 “포르투갈이 첫 경기에서 패했지만 엄연한 우승후보이고, 폴란드도 무기력하게 3패를 당할 팀이 아니다”라고 평가했다. 그렇다면 6월10일 한미전은 운명의 격돌이 될 수밖에 없다. 어느 팀이든 패하면 16강 경쟁에서 밀려날 가능성이 높아진 것이다. 이번만은 ‘경우의 수’라는 덫에 빠지지 않기를 기대했지만 D그룹의 판도는 2차방정식을 넘어 3차방정식 수준으로 얽혀버렸다.

한국과 미국. 두 나라의 대결은 이미 축구 경기 이상의 의미를 품고 있었다. 모 대학 총학생회가 반미응원을 펼치겠다고 선언하자, 정부는 반미응원을 규제하겠다고 발표했다. 붉은 악마는 기자회견을 통해 ‘반미응원은 없다’고 못박았지만,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 쇼트트랙 경기에서 미국의 오노 선수에게 금메달을 빼앗긴 김동성은 고심 끝에 대구행을 포기했다. ‘김동성이 나타나면 관중들이 흥분할 수도 있다’는 게 경기관람을 취소한 이유였다.

한미전을 앞둔 양팀의 신경전도 대단했다. 특히 심판문제를 놓고 양측은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먼저 한국은 미국대표팀이 FIFA 심판들과 같은 호텔에 묵은 것을 문제삼았다. 이 호텔은 당초 한국대표팀의 투숙을 거부한 곳이어서 더욱 문제가 됐다. 결국 FIFA가 한국의 항의를 받아들여 심판진의 숙소를 옮기는 것으로 파문이 마무리됐지만, ‘미국이 돈으로 심판을 구워삶으려 한다’는 세간의 의혹마저 잠재우지는 못했다.

반면 미국은 한미전 주심 우르스 마이어씨에 대한 불만을 우회적으로 터뜨렸다. 마이어씨는 98프랑스월드컵 미국 대 이란전에서 주심을 맡았는데, 미국은 이 경기에서 이란에 패했기 때문이다. 또한 미국 기자들은 ‘스위스 심판이 나오면 진다’는 역대 월드컵의 징크스를 떠올리며 한국의 홈 어드밴티지를 경계하는 모습을 보였다.

대구의 날씨는 최상

6월10일 아침 7시. 기자는 전남 목포에서 광주로 가는 버스를 탔다. 라디오에서는 ‘손석희의 시선집중’이 흘러나왔다. 날이 날인지라 이 프로그램은 한미전 소식에 긴 시간을 할애했다. 어떤 여학생이 축구를 꼭 보고 싶은데, 수업 때문에 걱정이라고 말하자, 손석희 아나운서는 직접 담임 선생님과 통화하면서 “오늘은 단축수업을 할 수 없냐”고 요청했다.

광주에서도 축구의 열기는 대단했다. 고속버스터미널 앞에서 유세중이던 지방선거 후보자는 “오후 3시부터는 유세를 중단하고, 축구를 봅시다”라며 ‘축구는 한국, 시장은 ○○○’이라는 구호를 외쳤다. 터미널측은 “오후 3시 이후에 출발하는 고속버스는 대구행 외에는 티켓이 거의 팔리지 않았다”고 말했으며, 대구로 떠나는 버스에는 붉은 색 티셔츠를 입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8시20분. 광주지역에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광주에서 대구로 넘어가는 동안 차창에 빗물이 계속해서 부딪혀왔다. 지리산 자락의 끄트머리인 거창휴게소를 넘어갈 무렵에는 우산 없이 다니기 힘들 만큼 빗발이 굵어졌다.

많은 축구전문가들이 미국전은 더울수록 유리하다고 전망했다. 그것은 한국 선수들이 체력적으로 앞서기 때문이다. 한국은 역대 월드컵에서도 악조건일수록 좋은 경기를 펼쳤다. 최초의 무승부를 기록한 86멕시코월드컵 불가리아전은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수중전이었고, 최고의 명승부로 꼽히는 94미국월드컵 독일전은 40℃의 불볕 더위 속에서 치러졌다. 그런 점에서 한국이 오후 3시30분에 대구에서 미국과 만난 건 행운이었다.

하지만 적당히 비가 내릴 경우에는 얘기가 달라진다. 장대비가 퍼붓는 상황이라면 불리할 게 없지만, 무더위를 식힐 만큼의 비는 한국보다 미국에 유리하다. 기자는 급한 마음에 기상청에 전화를 걸었다. “곳에 따라 비가 내릴 수도 있지만, 전반적으로 대구지방은 맑겠습니다.” 기상청의 보도는 정확했다. 버스가 합천터널을 지나 경북지방으로 들어서면서 구름이 걷혔다.

오후 2시. 대구월드컵경기장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한낮이다보니 6월4일 부산의 밤 풍경보다 붉은 빛깔이 더욱 선연했다. 곳곳에서 성조기를 몸에 두르고 ‘USA’를 외치는 미국인들도 눈에 띄었지만, 대형 깃발을 앞세우고 거리 출정식까지 벌인 ‘붉은 악마’의 상대가 되지는 못했다.

대구의 날씨는 역시 한국 편이었다. 얼굴이 따끔거릴 정도의 햇볕이 내리쬐는 가운데 간간이 비가 뿌렸다. 여우비였다. 무더위를 식히는 소나기가 아니라, 더운 날씨를 더욱 후텁지근하게 만드는 이슬비였다.

경기장 주변에서부터 출입구까지 경찰들이 촘촘히 서 있었다. 미국 선수들이 대구경기장으로 올 때는 군 장갑차까지 동원됐다. 경기장 상공에서는 쉴새없이 헬리콥터가 떠다녔다. 물론 기습테러에 대비하기 위해서다. 사람들은 축구경기를 하면서 군대의 힘까지 빌어야 하는 미국의 신세를 불쌍하게 여기는가 하면, 정부가 미국팀을 과잉보호하고 있다며 쓴소리를 늘어놓기도 했다.

미국 국가와 애국가가 차례로 울려퍼졌다. 붉은악마는 부산에서는 폴란드 국가가 끝나기도 전에 응원전을 펼쳤지만, 대구에서는 미국 국가를 끝까지 경청했다. 스탠드 상단에서 잠시 ‘우’ 하는 소리가 나왔지만, 동조자는 별로 없었다. 양국 국가 연주에 아랑곳하지 않고 스탠드 앞쪽에 우뚝 서서, 붉은색 물결을 바라보며, 종교적 메시지를 전달하던 중년 남자는 결국 경찰과 함께 그라운드 밖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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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성철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sixm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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