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창균옹은 올해로 95세다. 남들 같으면 은퇴하고도 20~30년은 족히 흘렀을 법한 고령이건만, 현재 신옹이 가진 대표적인 공식 직함만도 4개나 된다.
남·북·해외동포 조국통일범민족연합(이하 범민련) 남측본부 명예의장, 6·15공동선언 실천과 한반도 평화를 위한 통일연대(통일연대) 명예대표, (사)민족화합운동연합(민화련) 명예의장, (사)백범정신실천겨레연합 수석대표 등이 그것이다.
그런 그가 6월1일 사단법인 ‘통일맞이’가 주는 제7회 ‘늦봄 통일상’(‘늦봄’은 고 문익환 목사의 호)을 받은 것은 어찌보면 지극히 순리(順理)적인 일일 것이다. 신옹은 통일운동가이자, 백범이 우리 곁을 떠난 지 53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그의 유지(遺志)를 받드는 일을 최고의 사명으로 여기는 이른바 ‘백범맨’이기 때문이다.
7월8일 경기도 과천시 별양동에 있는 신옹의 아파트를 취재차 방문했을 때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던 신옹은 “8·15해방 전엔 항일독립이 우리 민족의 소원이었지만, 해방 이후엔 남북통일이 최대의 과제”란 말부터 꺼냈다. 때문에 통일운동이야말로 ‘제2의 독립운동’이란 것이다.
그러고는 “조국의 자주독립과 통일을 위한 삶을 산다고 살았지만, 막상 이번에 상을 받고는 부끄럽기 그지없었다. 이 상을, 만일 살아있다면 나와 나란히 자리를 함께했을 이 땅의 수많은 독립운동가 및 통일운동가들에게 돌리고 싶다”고 수상 소감을 밝혔다.
신옹과의 만남은 당초 지난 6월 초로 예정돼 있었다. 그러나 그는 때마침 서울 종로5가를 걷던 중 다른 행인의 다리에 걸려 허리를 삐끗한 상태였다. 게다가 신옹의 귀가 너무 어두워 일단 인터뷰를 보류했다.
이번 취재과정에서, 보청기를 착용하고도 청력이 약한 신옹과의 대화중 상당부분은 그가 ‘주워온 아홉번째 아들’이라 부르는 홍원식(42·(사)백범정신실천겨레연합 사무처장)씨의 도움을 받았다. 홍씨는 5년 전부터 신옹의 신변잡사를 수발해오고 있다.
자녀들을 모두 출가시킨 뒤 15년째 부인과 단둘이 살고 있는 23평짜리 작은 아파트에서 신옹은 새벽5시부터 하루를 시작한다. 자리에서 일어난 뒤 신문을 보거나 성경을 읽고, 다시 한숨 눈붙인 다음 일어나 식사하고 본격적으로 일과를 개시한다.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고 자신이 몸담고 있는 4개 단체의 사무실 중 하루에 한 군데는 꼭 들러 통일운동에 대한 계획 등을 구상하고 그 실행 정도를 체크한다.
장기간 통일운동을 해오다보니 일부 언론에선 그를 두고 ‘친북적 인사’란 표현을 쓰기도 한다. 그러나 신옹의 생각은 단호하다. 자신은 사상적 측면에서가 아니라 민족적 측면에서만 친북적이라는 것이다.
최근 신옹에게 충격을 던진 ‘사건’ 중 하나는 2002한일월드컵이다.
“가장 극적인 경기는 승부차기로 끝난 한국-스페인전이었지만, 사실은 붉은악마를 필두로 한국민이 하나로 결집한 장면이 더욱 감격스러웠어. 왠지 3·1운동 때가 생각나면서 눈물이 나오더라고. 그 힘이 남북통일을 위한 힘으로 승화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서해교전은 잠시 그의 상심을 불렀다.
“서해교전 이후 남북간 통일논의가 경색될까봐 걱정했는데 다행히 햇볕정책엔 변함없는 것 같아 다소 마음이 놓여. 통일논의는 그대로 이어질 거야, 마땅히 이어져야만 하고.”
신창균옹은 충북 영동 태생이다. 1908년, 중산층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늦둥이어서 가족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다. 일곱 살 때부터 한문서당에 다녔는데 그가 학동(學童) 생활을 마칠 무렵인 열두 살 때 3·1운동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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