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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의 삶

“나는 히딩크에게 야망을 배웠다”

2002한일월드컵 축구국가대표팀 박항서 코치

  • 이계홍 < 작가·용인대 겸임교수 >

“나는 히딩크에게 야망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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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00여 일 동안 명장 히딩크 감독을 보좌해온 박항서(44) 코치는 선수들의 운동 스케줄, 트레이닝, 잔일까지 빈틈없이 챙기는 ‘선임하사’ 역할을 해왔다. “4강 신화를 이어가려면 지금부터 다시 멀리 보고 준비해야 한다”는 박코치의 축구와 삶 이야기.
지난 6월4일 부산에서 열린 2002한일월드컵 예선 D조 첫 경기 한국 대 폴란드전. 황선홍이 감각 넘치는 슈팅으로 가볍게 첫 골을 터뜨린 뒤 두 손을 높이 쳐들고 벤치 쪽으로 달려가 키 작은 대머리의 사내를 끌어안고 기쁨을 만끽했다. 바로 박항서 코치였다. 얼싸안고 환호하며 한 덩어리가 된 두 사람의 등을 히딩크 감독이 두드리며 격려했다. 눈썰미가 좋은 팬이라면 한번쯤 가져봤을 의문. 왜 히딩크 감독이 아닌 박코치였을까. 대회 첫 골을 터뜨린 선수라면, 그것도 산전수전 다 겪은 노장 황선홍이라면 마땅히 감독의 품에 뛰어들어야 옳지 않았을까.

“엉겁결에 뛰어나갔어요. 너무 기쁜 나머지 주체할 수가 없었던 거지요. 그런데 결국 그게 제 실수였습니다. 코치란 언제 어디서든 뒷전에 물러서 있어야 하는데, 순간적으로 망각한 셈이 됐어요. 그래서 그 순간이 지나자 머쓱해지더군요. 그 순간 감독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호사가들은 또 무슨 입방아를 찧을까 생각하니 절로 반성이 되더군요. 결국 저의 수양 부족 탓이라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기쁨과 영광에도 언제나 순서가 있는 법. 코치가 맨 앞에 나서서는 안된다는 것이 평소 지론이었다고 박항서 코치는 말한다.

“사실 경기 전날 감독님 지시로 호텔 숙소에서 긴장하고 있는 선수들을 하나하나 만나 격려해줬죠. 그 중 나이가 많은 황선홍 선수에게는 ‘네가 골을 넣으면 첫번째는 아내에게 골 세리머니 사인을 보내고, 나한테도 한번 멋지게 해달라’고 했지요. 반은 농담이었지만 ‘네가 뭔가 해줘야 한다’는 책임감을 부여하고 싶었거든요.

그러자 황선수가 ‘아내에게는 집에 가서 해줄 수 있으니까 박코치님한테 먼저 하죠’라고 받더군요. 그런데 경기장에서 그게 딱 현실로 다가오잖아요. 저도 모르게 운동장으로 달려나갔던 거였죠. 황선수도 마찬가지였을 테고요.”



그는 한순간이나마 코치로서의 직분을 망각했다는 자책감을 갖고 있는 듯 했다. 누가 나서서 탓하는 것도 아니고 감독이 서운함을 표시했을 리도 만무하지만, 그게 코치의 숙명이라는 게 박코치의 ‘코치 철학’인 셈이다. 그가 유난히 오랫동안 대표팀 코치자리를 유지하는 것은 그 덕분일까.

“당신은 훌륭한 지도자 될 것”

박코치와의 인터뷰 약속은 어렵게 이루어졌다. 월드컵 대회기간에는 언론 접촉이 완전히 차단됐고, 대회를 마치고 나서는 여러가지 행사 참여 문제로 사정이 허락지 않았다. 아직 히딩크 감독이 출국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약속이 미뤄지거나 시간과 장소가 바뀌기도 수 차례. 마침내 히딩크 감독이 고국 네덜란드를 향해 떠난 7월7일 어렵사리 만날 수 있었다.

서울 강동구 고덕동 올림픽도로 주변 숲속의 대우아파트. 박항서 코치의 30여 평 자택은 평범한 생활인의 가정 그대로다. 아내 최상아(42)씨, 외아들 찬성(16·고교 1년)군 세 식구가 단출하게 살고 있는 그의 집 거실은, 오래된 유화 한 폭이 텔레비전 수상기 옆에 아무렇게나 세워져 있는 것이 눈에 뜨일 뿐, 특별한 치장이나 장식이 없어 소박하다. 오디오 탁자 밑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철 지난 비디오 테이프들도 편안한 분위기를 준다.

- 오늘 낮에 히딩크 감독이 출국했는데 공항에 다녀오셨습니까.

“네. 기내까지 통역과 함께 들어갔다 왔습니다.”

- 긴 시간을 함께하셨는데 마지막 인사는 어떻게 나누셨나요.

“공항에서는 별로 얘기가 없었습니다. 환송객도 많고, 지인들과도 인사를 나누어야 했으니까요. 그렇지만 기내에서 헤어지려고 하자 눈물이 나려고 하더군요. 감독님이 저를 포옹하면서 ‘당신은 훌륭한 지도자가 될 거다. 그리고 나와는 결코 헤어지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년 8개월 동안의 동고동락. 물론 통역을 맡고 있는 축구협회 전한진 과장이 24시간 곁에 있었지만, 히딩크 감독과는 어느새 ‘눈빛만 봐도 통하는 사이’가 됐다.

“히딩크 감독님은 같은 말을 늘 반복하고, 또 가능한 한 쉬운 용어를 선택해서 말합니다. 축구 용어는 100% 알아듣죠. 그런 점에서 별로 어려운 점은 없었습니다. 감독님이 한국말을 차츰 많이 익히기도 했고요.”

- 출국 때 연인인 엘리자베스 여사와 함께 비행기에 탑승하는 모습을 보았는데, 다정해보이던가요.

“무슨 뜻으로 묻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장난스러운 질문은 아니었으면 합니다. 엘리자베스 여사는 같은 네덜란드 국적이고 다정한 관계니 함께 떠나는 게 당연한 일 아닙니까. 감독님의 여자 친구에 대해 지나치게 관심을 보이는 것은 프라이버시 침해입니다.”

단호하다. 두 번 물을 수 없을 만큼 단단한 그의 못질 때문에 남아메리카 수리남에서 태어나 네덜란드 국적을 취득했다는 이 여성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도 붙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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