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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 남성을 위한 패션 명품 가이드

“당신을 위한 딱 한 벌, 인상이 바뀌면 인생도 바뀐다”

  • 김묘환 < CMG 대표 >

중년 남성을 위한 패션 명품 가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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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킨백(Birkin Bag)이나 켈리백 등 여성들에겐 영원한 동경의 대상인 에르메스도 시작은 남성들을 위한 가죽 마구 제품이었다. 에르메스의 170여 년 역사는 독일계 이민인 티에르 에르메스가 파리 마들레느 광장 인근에서 마구용품을 수공 제작하면서 시작됐다. 처음 에르메스의 성가를 높인 것은 특유의 견고함이었다. 이후 7대에 걸쳐 에르메스 가문은 ‘개성 있는 품위’로 표현되는 에르메스만의 이미지를 구축하는 데 성공한다. 에르메스는 코코 샤넬 등 전설적 디자이너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1925년, 프랑스의 유명 작가 콜레트는 에르메스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에르메스 제품의 견고성과 품위, 그리고 불필요한 장식을 최대한 억제하는 단순미는 한치의 실수도 허용하지 않는 완벽함을 구현하고 있다.”

이러한 평을 들으며 오늘날 에르메스 왕국의 기틀을 구축한 이는 3대 계승자인 에밀 에르메스다. 그는 당시 두 가지 일에 심취했다. 첫째는 수집벽이다. 그는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 보이는 대로 사 모았다. 이를 바탕으로 에밀은 지금도 파리 생토노레 거리에 있는 에르메스 박물관을 설립했다. 후손들이 이곳의 소장품을 둘러봄으로써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게 되길 기대한 것이다. 실제로 에르메스의 디자이너들은 지금도 에밀의 수집품에서 많은 영감을 얻고 있다.

그가 둘째로 몰두한 일은 여행이다. 전세계를 돌며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고 고객을 만들어 나갔다. 에밀은 여행 중 만난 대부분의 사람을 그의 고객으로 끌어들이는 능력을 발휘했다.



여기서도 알 수 있듯 에르메스의 정신은 역사성 속에서 항상 혁신을 추구하는 것이다. 흔히 명품은 오래된 것 내지는 고전적인 것이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에르메스는 어느 시대건 늘 혁신을 추구해왔다. 지퍼를 처음 채택한 브랜드도 에르메스고, 아무도 생각지 못했던 레드 컬러를 제품에 처음 도입한 것도 에르메스다. 이번 월드컵에서 붉은악마들이 온 세계에 센세이션을 일으킨 것처럼 에르메스가 핸드백에 레드 컬러를 사용한 것은 당시로선 대단한 모험이었다. 나일론을 명품 소재의 반열에 올려놓은 브랜드 하면 흔히 프라다를 떠올리지만, 남성 제품에서 나일론 섬유를 소가죽과 결합해 선보인 첫 브랜드 역시 에르메스다.

남자들을 위한 에르메스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넥타이다. 매년 10여 개의 테마로 100여 점의 새 디자인을 선보이고 있지만 미니 모티브(작은 무늬)의 넥타이를 보면 사람들은 금세 에르메스를 떠올린다. 겉에 브랜드를 알리는 표식이 없음에도 기막히게 에르메스를 짚어 내는 것이다. 필자 역시 정장보다 캐주얼한 차림을 할 때가 많음에도 몇 장의 에르메스 넥타이를 갖고 있다. 선물 받은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1995년 뉴욕의 바니스에서 115달러란, 당시 평범한 비즈니스맨에게는 거금이랄 수 있는 돈을 주고 구입한 저니 시리즈 넥타이는 8년 가까운 시간이 지났음에도 가장 애용하는 제품이다. 시간이 흘러도 항상 새로운 느낌을 주며 어떤 스타일의 재킷과도 잘 어울린다. 더 중요한 이유는 주로 만나는 부류의 사람들(패션업계)이 필자를 ‘에르메스를 입는 사람’으로 기억하길 바라기 때문이다.

에르메스의 또 다른 명품 중에는 비즈니스맨을 위한 다이어리 겸용 파우치(손지갑)가 있다. 비즈니스의 상대가 에르메스 파우치에 몽블랑 만년필을 사용해 메모를 한다면 필자는 그 사람에게 절대적인 신뢰를 보낼 수 있을 것이다. 명품은 단순한 제품 가치보다 그것을 소유한 자의 안목까지 함께 발산하기 때문이다.

▶ 지도자를 위한 슈트 | 안젤로 리트리코

명품의 탄생에는 하나같이 극적인 스토리가 존재한다. 에르메스처럼 오랜 시간 귀족계층의 전유물이었다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초기에는 스타마케팅(지금은 계약에 의해 움직이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당시에는 의도가 분명치 않았다. 서로가 필요한 부분을 채우기 위해 결합한 정도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나 PPL(Product placement, 영화나 드라마등에 홍보 목적으로 상품을 소품으로 등장시키는 간접 광고 방식)을 통해 브랜드 이미지를 심었다. 잘 알려진 예로는 그레이스 켈리와 에르메스 외에도 오드리 헵번이 ‘사브리나’ ‘오후의 연정’ 등의 영화에서 애용한 지방시가 있다.

이탈리아의 대표적 남성복 하우스인 ‘안젤로 리트리코(Angelo Litrico)’는 대중 스타가 아닌 세계적 권력자를 통해 그 이름을 세계에 알린 드문 경우다.

1920년대 이탈리아 시실리 섬에서 태어난 안젤로 리트리코는 패션사에 커플룩을 처음 발표한 사람으로 기록돼 있다. 그러나 정작 그를 유명하게 만든 건 소련 수상 흐루시초프와의 일화다.

1950년대 후반 세계 정세는 한국전쟁 후 가속화한 동서냉전 기류 속에서 미소간 극한 대립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1959년 유엔총회에서 흐루시초프는 연설 도중 당시로선 대단한 해프닝을 벌인다. 자신이 신고 있던 구두를 벗어 단상 위에 올려놓고는 “사람들이 내게 어떻게 이곳까지 오게 됐느냐고 묻는데, 바로 이 구두를 신고 왔다”고 말한 것이다. 이로써 흐루시초프는 서방 세계인 이탈리아의 한 무명 브랜드에 거창한 신고식을 치러준 것이다.

리트리코는 신문에서 당시 세계적 화제 인물이던 흐루시초프의 사진만 보고 양복을 지어 모스크바로 보냈는데, 그 옷을 입어본 흐루시초프가 매우 만족해 하며 답례로 소련제 카메라를 선물하곤, 직접 자신의 정확한 치수를 보내 유엔총회 방문 패션 일습을 부탁한 것이었다. 물론 거기에는 구두도 포함돼 있다. 이 해프닝으로 리트리코는 미국에 널리 알려지게 됐고, 뉴욕에서 패션쇼를 할 때에는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는 기록인 37개 국어로 인터뷰를 하는 등 엄청난 유명세를 탔다. 또 하나의 명품 브랜드가 탄생한 것이다.

이후 리트리코의 고객은 리처드 버튼, 존 휴스톤과 같은 은막 스타들뿐 아니라 유고의 티토 대통령, 아르헨티나의 페론 대통령, 이집트의 나세르 수상, 요르단의 후세인 국왕, 미국의 아이젠하워와 닉슨 대통령 등으로 넓어져 갔다. 그야말로 세계 정상들의 패션을 전담하는 명품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1986년 안젤로 리트리코는 세상을 떠났지만 지금도 처음 문을 열었던 로마 시실리 거리에는 그 형제들의 손으로 세계 최고의 양복이 만들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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