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술을 좋아하는 편이다. 많이 마시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술 마시는 자리를, 그 편안한 시간을 좋아한다. 술을 즐길 줄 안다는 건 일종의 행운인 것 같다. 내 친구들 중에는 술을 전혀 못 마시는 사람도 있다. 그건 나에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술을 마시는 자리엔 그저 친구가 함께 있어주면 된다. 혼자서 술을 마시는 일은 이제 드물다. 며칠 전엔 단골식당에 가서 와인 한 병을 혼자 마시고 돌아왔다. 맥주는 혼자 마시지 않는다. 맥주는 혼자 마시는 술이 아니기 때문이다. 친구가 있어야 완벽한 술이 되는 것. 그리고 나누어 마실 수 있을 때 맥주는 비로소 ‘술’이 된다.
오랫동안 ‘장롱면허’ 신세를 면치 못했던 내가 얼마 전에 운전연수를 마쳤다. 그러고도 나는 운전을 할 일이 거의 없다. 그건 전적으로 맥주 때문이다. 외출을 하는 경우가 드문 내가 이따금씩 저녁에 슬슬 밖으로 나가는 이유는 몇 안되는 좋은 친구들과 술을 마시기 위해서이니, 자동차를 몰고 나갈 수가 없는 것이다.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내가 술을 마시는 것, 그리고 그 사실을 주변 사람들이 아는 걸, 그리고 술에 관한 글을 쓰는 걸 부끄러워한다. 하지만 또 어쩔 수 없이 나는 지금 맥주에 관한 글을 쓰고 있다. 맥주 첫 모금의 기쁨을 나는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 싶다.
프랑스 작가 필립 들레름(Philippe Delerm)은 맥주에 관해 이렇게 쓴 적 있다. ‘맥주를 들이켜면, 숨소리가 나고, 혀가 달싹댄다. 그리고 침묵은 이 즉각적인 행복이라는 문장에 구두점을 찍는다. 무한을 향해서 열리는, 믿을 수 없는 기쁨의 느낌…. 동시에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가장 좋은 기쁨은 벌써 맛보아버렸다는 것을. 이제 맥주를 마실수록 기쁨은 더욱더 줄어든다. 그것은 쓰라린 행복이다. 우리는 첫 잔을 잊기 위해서 마시는 것이다’.
첫 잔을 잊기 위해 마신다
맥주를 마실 때의 그 쓰라린 행복. 그걸 아는 사람과는 맥주에 관한 주제만으로도 밤새껏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아마도 필립 들레름은 맥주의 첫 모금에 무척이나 압도당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 이후에 마시는 술은 단지 첫 잔을 잊기 위해서 마시는 것이라 했으니. 하긴 좋은 것도 지나치면 더 좋을 게 없다. 게다가 그것이 술이라면!
나는 내가 욕심이 많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하지만 음식이나 좋은 술일 경우에는 태도가 달라진다. 나는 내가 식탐이 많다는 걸 최근에야 알아차렸다. 맛있는 걸 먹자거나, 좋은 와인이 있다거나 신선한 맥주를 파는 곳에 가자거나 하는 이야기를 듣고 있자면 그때부터 가슴이 뛴다. 내 마음은 벌써 그 음식들과 술이 있는 장소에 가 있다.
작년에 독일이란 나라에 처음 가보았다. 행사가 끝나고 나서도 나는 한동안 이 나라에 머물렀다. 그동안 내가 한 일은 맛있는 음식, 독일의 그 좋다는 와인과 맥주를 마시는 데 시간과 돈을 다 써버린 것뿐이다.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그 맛을 평생 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맛’에 관해 민감한 편이지만 어쩐 일인지 그 맛에 관해서는 상세히 설명할 수가 없다. 그것은 불행한 일이지만, 또 모르겠다. 내가 맥주라도 한잔 마시고 나서 거나해지면 그 맛에 관해서 세세히, 탐미적이며 감각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을는지도.
맥주는 오래된 연인
맥주는 오래 전부터 내가 마셔왔던 술이다. 한때는 와인의 세계에 탐닉해 들어간 적이 있다. 와인은 퍼스낼리티가 있어서 좋다. 와인은 부드럽고 달콤하지만 아직 친밀하거나 다정하게 느껴지진 않는다. 맥주는 아주 오래된 연인이나 평생 함께 갈 친구 같다. 이제는 나의 일부가 된 느낌이기도 하니, 나는 정말 맥주를 사랑하는 것일까.
나는 세상에 맥주가 없으면 얼마나 건조하고 무의미할까, 이따금씩 생각해본다. 맥주는 ‘액체의 빵’이다. 맥주는 ‘보리의 땀’이다. 그리고 그건 우리의 친구다. 언제나 우리 곁에 가까이 있다. 브뢰겔의 그림 ‘농부들의 춤’을 보고 있자면 당장이라도 벌컥벌컥 맥주가 마시고 싶어진다. 서로의 손을 맞잡고 춤을 추고 있는 농부들의 곁에는 철철 넘치는 맥주가 있다. 이제 막 고된 노동을 끝낸 농부들의 얼굴엔 기쁨과 평화로움과 자유가 흐른다.
그 그림을 더욱 오래 들여다보고 있자면 자크 브렐의 ‘맥주’가 생각난다.
‘맥주, 그 끝없는 맛의 세계가 우리를 돌게 만드네.알코올은 황금빛악마는 우리편….런던에서 베를린까지 온통 맥주 냄새이렇게 좋을 수가! 온통 맥주 냄새내 손을 잡아주게, 온통 맥주 냄새.’
내가 맥주를 좋아하는 이유가 분명해지는 순간이다. 노동을 끝낸 후 마시는 맥주의 첫 모금. 그 홀가분함과 부드러움과 기쁨. 이제 여름이다. 여름은 맥주의 계절이다.
유럽의 베스트셀러 작가, 장 반 암므가 시나리오를 쓰고 프란시스 발레가 그림을 그린 만화 ‘맥주명가 스틴포’를 보면 벨기에를 비롯한 유럽 여러 나라에서 맥주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보급되기 시작했는지 알 수 있다. 하지만 그 만화를 나는 아직 3권까지밖에 읽지 못했으니 그 만화에 관해서는 더 이상 아는 체를 할 수 없다.
‘창해ABC북’ 시리즈 중 ‘맥주’편을 읽다보면 맥주의 기원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독일이나, 연간 맥주 소비량이 세계 1위라는 체코에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과장을 한다면 맥주는 스틴포의 나라 벨기에의 술이라고 말할 수 있다. 독일이나 체코처럼 벨기에 맥주 역시 과거 농촌생활 속에 뿌리박은 문화이며 현재 벨기에에 있는 120여 개의 맥주회사 대부분은 1910년에 3349개로 조사되었던 농가 양조장에서 출발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벨기에에서 생산되는 맥주를 모두 기술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