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후 6시에 시작해 다음날 아침 8시까지 계속되는 포장마차 일. 그나마 일자리가 있는 것만 해도 다행이다.
“막상 송씨가 사는 집을 찾아가 보았더니, 원래 못살았는지 사업에 실패했는지 조그마한 주택 지하방에서 살고 있더라고요. 본인은 만나지도 못했어요. 대신 며칠만 참아달라는 연락을 받았지요. 약속한 기일이 지나니 이번에는 ‘다른 급한 일이 생겼다’며 피하는 거예요. 찾아가면 어느새 도망가버리고, 날짜는 하염없이 흘러가고, 그러다 결국 불법 체류자가 됐어요. 아마 내 비자가 만기될 때를 기다리고 있었나봐요. 어떻게 그렇게 야비할 수 있나싶어요.”
이야기를 하다 보니 감정이 북받쳐오르는 듯 안씨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어쩌면 수많은 중국 동포들이 당한 피해의 한 사례일 뿐이라고 넘길 수도 있다. 혹자는 초기에 사정을 잘 모르고 중국에 건너간 한국 업자들이 조선족 동포에게 속아 당한 피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안씨는 이 일로 남편과 이혼했고, 아이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다시는 중국 하늘 아래 발붙이고 살아가기도 쉽지 않은 신세가 된 것이다.
-돈도 못 받고 쫓기는 불법체류자 신세라면 서울살이가 만만치 않을 텐데요. 어쩌면 약점을 빌미로 더 큰 불이익을 당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지난 6월 구로동 조선족교회를 중심으로 조선족 동포들이 항의시위를 벌였어요. 그 덕분인지 내년 3월12일 전에만 중국에 가면 된다는 도장도 여권에 받아뒀어요. 하지만 이 상태로는 돌아갈 수가 없지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검찰에 낸 탄원서는 다음과 같은 ‘진정사건 처분결과 통지’가 되어 돌아왔다.
‘진정번호 2002 진정 제371호. 처분 일자 2002. 9.16. 처분 내용: 이 건 진정 관련 사안은 당청 2001형제 28181호로 수사, 2001. 7.24. 기소중지 처분되었고, 2002. 1.3일로 공소시효가 도과되어 이미 종결된 사안이므로 재수사할 필요성이 없다고 판단되므로 진정인에게 통지하고 공람 종결하였습니다.’
한 가정을 완전히 망가뜨린 사건을 두고 내린 결정치고는 너무 메마르고 무책임해 보인다. 사회적 약자가 법의 유용성에 회의를 갖는 것은 바로 이런 순간일 것이다. 갑갑한 마음에 엉뚱한 질문을 던져봤다.
열혈 공산주의자가 자본가로
-돈을 벌겠다고 욕심 부리지 않고 조용히 살았다면 아무일 없었을 것 아닙니까.
“남편이 공산당 지역 간부였지만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이해하고 있었시오. 오래 전부터 공산주의는 안 맞다고 말해 왔지요. 일 벌이기 좋아하는 남편이 ‘앞으로는 돈을 벌어야 사람대우를 받는다’고 해서 기회를 잡자고 생각한 거야요.”
18년 전부터 중국 정부는 국유 전답을 개인에게 분배했다. 말하자면 자본주의 시스템을 적용해 개인이 땅을 분배받아 경작도록 한 것이다. 이때 분배사업을 주도했던 안씨 남편은 겁이 난 농민들이 반납한 땅을 모아 선봉촌 논밭 3분의 1을 차지하게 됐다.
“국유전답에서 농사를 지어 나라에 바치면 먹고 살 식량을 충분히 배급받으니 모험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농민들이 많았어요. 시키는 대로만 하면 사는 데는 지장이 없다는 거죠. 농토를 거저 줘도 받지 않고 반납한 농토를 남편이 대신 받아 농사를 지었지요. 농기구 관리까지 맡았기 때문에 엄청나게 많은 쌀을 생산할 수 있었지요.”
농토의 개인불하는 생산량을 엄청나게 늘렸다. 옛날로 치면 매년 대풍작이었다. 국유였을 때는 논 1쌍(1만㎡)에 1만근이 나오던 벼가 불하 이후에는 1만8000근으로 늘었다. 기후가 변한 것도, 비료나 농기구가 개선된 것도 아니었다. 안씨 남편이 자본주의의 매력에 빠져든 것은 이때부터다.
엄청난 생산량이 쌀값 폭락을 가져와 판로가 막혔지만 부부는 기민하게 적응했다. 농토를 반으로 줄이는 대신 양계장을 차리고 사료공장을 만들자 재산은 자꾸 불어났다. 양계장이 커지면서 닭은 5000마리로 늘어났다. 돈 벌기는 땅 짚고 헤엄치기나 다름없었다. 이 와중에 송씨를 만난 것이었다.
“송씨가 처음 우리집을 방문하여서는 이렇게 잘사느냐고 놀랄 정도였으니 말 다했지요. 우리는 문화혁명 세대야요. 저도 중학교 때(1966년 무렵) 문화혁명 전사(홍위병)가 되어 이 집 저 집 많이 털러 다녔댔시오. 옛날책을 집에 두고 있는 사람을 끌어내 족치고, ‘지주 부농 타도하자’며 지주 계급들을 잡아 족쳤댔지요. 뭐가 뭔지도 모르고 그렇게 지내다 학교가 폐쇄되고, 젊은 청년들이 길길이 뛰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학교가 폐쇄되었다가 다시 문을 여니 밑에서 올라오는 학생들 때문에 공부한 것도 없이 한 학년 훌쩍 뛰어넘어 복학을 했지요. 그러니 공부는 너나없이 엉터리였댔지요. 이때 남편은 리더로 활약을 했댔시오. 그래서 일찌감치 지역 공산당 간부가 된 것이지요.”
열혈 공산주의자에서 자본주의자로 변신한 안씨 부부의 이념 스펙트럼과 과격한 사업욕으로 인한 불행에는 중국대륙이 거쳐온 격변의 역사가 고스란히 스며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