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름대로 부모님의 강한 그늘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삶을 살고자 했던 일생일대의 모험이 수인의 신분으로 처절하게 막을 내리고 말았습니다. …(중략)… 이제 진정한 고통의 잔을 마신 피고인에게 참다운 자유를 주시길 바랍니다.’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의 셋째 아들 홍걸(弘傑)씨가 1심 선고를 앞두고 법원에 낸 최후변론문 내용의 일부다. 6개월간 계속된 재판 과정에 탄원서 한번 내지 않았던 그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이제 진정한 고통의 잔을 마셨다”며 선처를 호소했다.
그리고 그는 풀려났다. 사건을 맡은 서울지법 형사합의23부(김용헌·金庸憲부장판사)는 10월11일 홍걸씨에 대해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 및 추징금 2억원을 선고했다. 36억원에 이르는 부정한 돈을 받고도 실형을 피해간 것이다.
한 법조인은 “홍걸씨가 권력 주위로 몰려드는 부나방들에게 이용당한 측면이 있다”고 말한다. 재판부도 판결문에서 “주변 사업가들의 꼬임에 빠져 소극적, 수동적으로 범행에 개입한 것으로 보인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세상물정 모르는 대통령의 아들임을 내세워 솜방망이 처벌을 받았다”는 비판여론도 상당하다. 어두운 성장과정과 내성적인 성격 등을 부각시켜 쉽게 동정을 얻었다는 것이다.
진실은 무엇인가. 178일간의 구속생활은 과연 그에게 충분한 죄값이었는가. 장기간의 해외 유학생활로 배울 만큼 배우고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39세의 사내가 철저하게 이용당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김홍걸. 그는 누구인가.
◇ 출두
귀공자. 5월17일 오전 10시 검찰청사 앞에 모습을 드러낸 홍걸씨를 본 기자의 첫 인상이었다. 185㎝ 가량의 훤칠한 키에 감색 양복이 잘 어울리는 균형 잡힌 몸. 오똑한 콧날과 뒤로 말끔하게 빗어넘긴 머리는 ‘귀하게 자란 도련님’의 외모였다. 꼭 다문 입술은 언뜻 오만해보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러나 그는 얼어 있었다. 카메라 플래시가 연달아 터지는 노란 포토라인 앞. 그 앞에서는 누구든 긴장하기 마련이지만 그는 유난히 겁을 먹고 있었다. 200여 명에 이르는 취재진 앞에서 그의 두 눈동자가 불안하게 떨렸다. 커다란 체구가 민망하다싶을 만큼 그는 어쩔 줄 몰랐다. “한 마디 해달라”는 취재진의 요구에도 쉽게 입을 떼지 못했다.
홍걸씨 변호를 맡은 조석현(曺碩鉉) 변호사에 따르면 그는 소환 직전까지도 극도의 불안감과 긴장감에 시달렸다. 어머니 이희호(李姬鎬) 여사와 통화할 때는 눈물을 비치기도 했다. 안정을 못 찾는 데다 몸살기까지 있어 조변호사는 기본적인 상담조차 제대로 진행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런 홍걸씨는 정확히 5년 전 구속기소된 김영삼(金泳三) 전 대통령의 차남 현철(賢哲)씨와 여러 면에서 비교된다. 현직 대통령 아들의 금품 및 이권청탁 비리라는 사건의 외양은 유사하다. 측근관리를 소홀히 해 빚어진 테이프 폭로가 사건의 발단이 된 점도 비슷하다. 그러나 조사받는 태도나 대응 방식이 달랐다.
5년 전의 현철씨는 ‘터프가이’에 가까웠다. 그는 검찰수사 당시 크게 반발하며 ‘음모론’까지 제기했다. 그가 검찰청에 들어서기 전 내뱉은 말은 “검찰은 절대로 나를 치지 못한다. 수사를 받더라도 입을 열지 않겠다”였다.
현철씨는 이후 혐의를 추궁하는 검사에게 “내가 뭘 잘못했느냐”며 맞고함을 지르는가 하면 “검찰총장을 불러내라”는 요구까지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기독교 신자인 그가 검사에게 들이민 성경 구절은 ‘원수들을 없애 억울함을 풀어달라’는 내용인 시편 143장.
반면 홍걸씨는 검찰청사 포토라인에서 “검찰 수사에 순순히 응하겠다. 지혜롭지 못한 나의 잘못이다”며 고개를 숙였다. 그가 구속 직전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읽은 성경구절은 솔로몬의 지혜를 담은 잠언.
“홍걸씨가 우유를 좋아해요”
검찰 관계자는 “홍걸씨가 피곤해하면서도 비교적 담담하게 수사에 응하고 있다”고 말했다. 서초동 안팎에서는 소환 직후부터 그가 최규선(崔圭善)씨에게 휘둘렸을 가능성도 있다는 동정론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자폐아에 가까운 성격의 소유자라는 소문도 돌았다.
우습게도 그 이미지를 더욱 강조한 것은 소품인 우유. 수사가 계속되면서 조석현 변호사가 조그만 비닐봉지를 들고 수시로 조사실을 왔다갔다하는 것이 취재진 눈에 띄었다. 안에 들어 있는 것은 우유라고 했다.
“아따, 홍걸씨가 우유를 좋아해요잉. 갖다 달라고도 하고 조사받으면서 지칠 것 같아서….”
조변호사는 특유의 여유와 능청스런 말투로 의혹의 눈길을 던지는 취재진 앞에 우유를 내밀었다. 어린아이를 연상시키는 하얀 우유는 의도적이었건 우연이었건 ‘순둥이’라는 인상을 만들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