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5월호

新국가발전 전략 수립을 위한 5대 제언

금융·물류 뛰어넘는 ‘동북아 중핵국가’ 노려라

  • 글: 안석교 한양대 교수·경제학 skan@hanyang.ac.kr

    입력2004-04-27 12: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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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럽을 겨냥했던 일본이 다시 아시아로 눈을 돌리고 있다. 중국의 전략산업은 곧 우리의 성장주력산업이다. 중·일간 패권다툼은 동북아의 불안요인으로 작용한다. 지역패권구도의 중재자요 조정자로 나서는 것이야말로 21세기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시대정신이다.


    위기의 악령이 우리 사회를 배회하고 있다. 정치권은 총체적 부정부패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국민에게 체념과 절망을 안겨주고 있다. 나라의 성장 잠재력은 지속적으로 약화되고, 청년실업률은 날로 높아져 꿈을 상실한 젊은 세대를 양산하고 있다. 이념적 대결구도와 세대간 갈등이 확대 심화되면서 사회적 긴장은 고조되고 있다. 게다가 지식인 사회에는 냉소주의가 팽배해 있다.

    모든 국민이 염원하는 ‘정상국가’의 실현은 언제나 가능할 것인가. 탄핵 국면 이후 새롭게 출발하는 대통령과 새롭게 구성될 국회는 이와 같은 중층적 위기구조를 혁파해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되었다. 사회적 친화력을 회복하고 발전의 목표를 향해 사회적 에너지를 결집시키기 위한 몇 가지 기본과제와 전략을 요약해 보기로 한다.

    [혁신 통한 성장잠재력 강화해야]

    첫째, 활력 있는 시장경제를 통해 선진국 진입을 실현해야 한다. 지난해 새 정부가 등장하면서 참여민주주의 같은 정책 ‘이슈’가 부각되었다. 또한 최근 발전전략에 관한 논의과정에서도 경제성장의 목표가 평가절하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경제성장은 여전히 핵심적 국가 전략목표로 추구되어야 한다. 선진국과 비교할 때 우리의 사회간접자본과 교육, 의료, 환경 및 문화 등의 ‘사회적 자본’은 극히 취약한 실정이다. 사회경제적 발전의 지표로 평가할 때 우리는 아직도 후진국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성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성장없는 발전은 불가능하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사회경제적 혁신 능력을 제고해야 한다. 기존의 기술 모방에 의한 외형 중심의 팽창전략을 혁신주도형 전략으로 전환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한국은행의 분석자료에 따르면 이 같은 전략 수정은 기업의 기술개발 노력과 함께 정부의 연구개발(R&D) 투자 확대 및 대학교육의 질적 개선이 병행되어야 효과적으로 이룰 수 있다.

    경기부양을 위한 투자촉진 정책을 수립하는 데 있어서도 양적 규모의 확대보다는 기술개발과 생산성 향상을 통한 성장잠재력 배양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성이 있다. 노동이나 자본의 투입 규모에 의존하는 외연성장 전략은 이제 중국을 비롯한 후발공업국의 성장으로 인해 우리의 비교우위가 급속하게 잠식된 상태에서는 무의미하다. 국내의 여러 예측기관에 따르면 우리 경제의 성장견인차 역할을 맡고 있는 전략산업도 기술적인 도약 없이는 향후 5∼10년에 걸쳐 경쟁력을 상실할 위협에 노출되어 있다.

    [규제 개혁은 투자 유치의 첫 단추]

    혁신을 통해 기술적 도약을 이루기 위해서는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제도, 의식, 관행이 정립되어 있어야 한다. 개발도상국이 대부분 선진국 진입에 실패한 주된 원인도 혁신에 조응하는 제도적 요소들이 결여된 데서 찾을 수 있다. 외연성장이 관(官) 주도의 인위적 인센티브에 의해 가능했다면, 기술혁신은 경쟁적 시장의 인센티브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그러나 이러한 ‘패러다임의 전환’은 대단히 어려운 작업이다. 이를 위해서는 시장순응적인 제도개혁뿐만 아니라 그에 상응해 사회구성원의 의식 전환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제도 개혁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관련법과 제반 규제의 시장순응성 여부를 검토하여 재정립하는 작업이다. 이때 규제의 해석과 적용에 있어 자의성이 개입될 가능성을 최소화해야 한다. 규제는 정경유착을 조장하고 기업의 에너지를 ‘로비’에 집중시킴으로써 거래비용을 증가시키는 부작용을 유발한다.

    세계화에 따라 전통적인 생산요소와 기술 정보의 이동이 자유로운 상황에서는 국가의 경쟁력을 결정하는 데에 제도적 요인이 절대적 중요성을 가진다. 특히 다국적기업이 국가간 투자 입지요건을 비교할 때 제도적 요인을 의사결정의 핵심적 요소로 평가한다. 국가간 제도 경쟁이 날로 치열해지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필자의 판단으로는 현 정부가 시장의 경쟁규범을 침해하는 관련법과 규제를 시장경쟁 친화적 방향으로 정비한다면 이는 체제의 활력을 회복하는 데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는 업적이 될 것이다.

    정부의 제도개혁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사회구성원의 의식 속에 법질서를 존중하는 문화를 배양하는 작업이다. 이는 전자에 비해 훨씬 어려운 과제일 뿐 아니라 단기적인 처방으로 해소하기도 어렵다. 세계 170여개에 달하는 개도국에서 시장경제가 제대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시행착오와 혼란을 반복하고 있는 것도 시장규범이 시민사회의 의식에 제대로 뿌리내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발전이란 단순한 경제적 영역을 벗어나는 ‘사회적 과정(social process)’이며, 법치의 문화와 시민사회의 질서의식을 전제로 한다. 2차대전 이후 한 세대 이상에 걸쳐 세계 1∼2위의 국제경쟁력을 발휘한 독일이나 일본의 사례는 이러한 명제의 정당성을 반증하고 있다. 이들 국가에서 법과 질서의식은 경쟁력 배양의 제도적 원천이 되어온 것이다. 근대 자유시장경제의 사상적 토대를 제공한 애덤 스미스가 강조한 것도 윤리질서--법질서--경제질서의 상호연계성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 드러난 윤리질서와 법질서의 실종은 시장질서의 생성을 불가능하게 하고 있다. 문제는 과거처럼 정부개입에 의한 공업화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현 단계에서는 기술진보, 생산성 향상과 같은 혁신, 즉 ‘창조적 파괴의 영속적 회오리’를 위한 발전의 동력은 그러한 시장문화의 뒷받침없이 불가능하다는 데에 있다.

    둘째로 국가의 발전전략을 마련하는 데 있어 고려해야 할 정책 과제는 실업문제의 해결이다. 실업은 당사자에게 최소한의 인간 존엄성을 박탈하는 ‘자기 마모적’ 질환이며 사회적 긴장과 불안의 원천이다. 특히 청년실업의 증가는 젊은 세대에게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확산시킴으로써 사회의 기본가치를 위협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오늘날 선진 공업국가들이 경제성장 못지않게 고용창출에 정책과 개혁의 최우선 순위를 두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문제는 새로운 경제 패러다임에선 경제성장만으로 실업문제의 해소를 기대하기가 어렵다는 데에 있다. 특히 우리나라와 같이 정보통신(IT)산업이 성장의 견인차로 작용하는 상황에서는 경제성장의 고용창출 효과가 감소하는 경향이 있다. 또한 해외 직접투자의 급속한 증가에 따른 산업 공동화(空洞化) 현상은 고용기회의 해외 이전을 촉진시키고 있다. 산업구조별로 보면 제조업 부문의 고용효과는 낮아지는 반면 서비스업 부문의 고용기여도는 지속적으로 상승하는 추이가 나타나고 있다.

    정보산업이 확산되고 성장에 대한 기술진보의 기여도가 높을수록 성장극대화만으로는 완전고용을 실현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여러 학자의 진단에 따르면 지식과 정보중심의 ‘연성(軟性)사회’로 진입하면서 산업혁명 이후 정착된 제조업 중심의 정규 노동계약에 기초한 완전고용 사회는 막을 내렸다. 전통적인 재정의 경기조절 기능을 통한 완전고용의 실현이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와 함께 노동시장의 구조가 단절화되는 경향이 심화되고 있다. 즉, 정보사회의 노동구조는 소수의 ‘프로그래머(programmer)’와 다수의 단순 ‘키 펀처(key puncher)’로 양분되고 그 결과 사회경제적 계층구조 역시 양극화하는 결과가 나타날 위험성이 있다.

    이처럼 실업의 원인이 다양하기 때문에 고용창출을 위한 정책 역시 복합적이어야 한다. 성장 동력을 유지하면서 노동시장 유연화나 고용중개 기능 활성화와 같은 제도 개혁이 요구되는 것이다. 이와 관련 최근에 사회경제적으로 민감한 사안으로 부각되고 있는 불완전취업자의 정규직화는 그것이 고용에 미치는 영향을 신중히 검토할 필요성이 있다.

    비정규직 근로자에 대한 사회적 처우를 개선하는 데에는 대체로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들을 정규직으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이른바 ‘노노(勞勞)간’ 합의를 포함한 여러 전제조건이 충족되어야 할 것이다. 이와 함께 중소기업의 경쟁력 강화, IT산업과 제조업간의 연계성 강화 및 생산적 3차산업의 육성 등에 보다 적극적인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세대교체 와중에서 혼란 불가피]

    셋째, 발전 목표는 사회적 안정과 조화의 정착이다. 여러 가지 징후로 미뤄 보아 이 또한 만만치 않은 도전에 직면해 있다. 무엇보다도 우리 경제가 감속성장 단계로 진입함에 따라 분배의 몫을 둘러싼 이익집단간의 갈등이 확대심화되고 있다. 그럼에도 고속성장기에 익숙해진, 실질소득의 상승을 관철시키려 한다면 실업의 압력을 가중시킬 뿐만 아니라, 사회적 불안을 증폭시킬 것이다.

    세계화에 따른 구조조정도 그 진행과정에 사회적, 정치적 진통을 동반할 수 밖에 없다. 우루과이라운드(UR) 이후 정부의 대규모 지원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농업은 개방의 충격을 감당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여기에 금융, 법률 서비스, 의료, 교육 등과 같은 낙후부문은 개방에 따른 구조조정 압력에 노출되어 있다.

    불안요인은 경제부문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다. 외환·금융위기 이후 빠른 속도로 진행된 기존 사회질서의 균열 현상 역시 심각한 상태다. 특히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로 확산된 ‘세대교체’의 속도와 규모는 근대 정상국가에서 그 예를 발견하기 어려울 만큼 충격적이다. 그 결과 사회적 친화력을 유지했던 기존 가치규범이 와해되고 있으며, 기성세대를 대체할 후속세대의 가치와 행위규범이 보편적 가치로 수용될 때까지는 사회적 혼란이 지속될 것이다. 설자리를 상실한 50대 이후 세대의 퇴장과 함께 우리 사회는 불가피하게 가치관의 진공상태에서 탈피하기 어렵게 되었다. 사회적 정체성을 새롭게 정립하고 위기에 대한 관리능력을 제고하는 작업이야말로 우리가 직면한 가장 중요한 과제로 부각되고 있다.

    지난해 새 정부가 출범하면서 경제정책의 우선순위를 분배와 사회정책에 두었다. 분배중시 정책은 외환·금융위기 이후 악화된 분배구조를 개선하고 사회적 저변계층에 대한 생존권 보호라는 차원에서 나름의 설득력을 갖고 있다. 또한 구조조정의 충격을 완화하기 위한 재정지원 필요성은 부인할 수 없다.

    영국이나 미국처럼 자유시장경제가 발달한 국가에서도 시장경쟁의 부작용을 보완하기 위한 정부의 사회정책적 기능은 우리에게 알려진 것 이상으로 확대되어 있다. 근대산업사회에서 사회복지정책은 사회적 안정을 이끌어내는 안전판이다. 그러나 사회정책을 마련하는 데 있어서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점에 유의해야 한다.

    [재정능력 고려한 복지정책 실시해야]

    무엇보다도 재정능력을 고려해야 한다. 성장률 둔화 현상이 지속될 경우 세원(稅源) 확보를 통한 재정여력이 제한될 수 있으며, 재정에서 소비성 지출 비중이 급속하게 증가하면 이는 다시 성장잠재력을 약화시키는 악순환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헌법재판소의 결정 이후 새롭게 출발하는 대통령과 민생정당을 표방해온 집권당은 사회복지 지원을 대폭 증대시켜야 하는 부담을 안게 될 것이다. 그러나 예산 항목 중에서 특히 사회성 지출은 하방경직적 성격이 강해 경제상황에 따른 예산 절감이 대단히 어렵다는 사실에 유념해야 한다. 독일을 비롯한 여러 유럽국가가 추구해온 개혁이 좌초 위기에 놓인 것도 따지고 보면 사회보장 부문의 개혁에 대한 저항 때문으로 볼 수 있다.

    개방에 따른 구조조정을 관리하는 데 있어 정부는 단기적 ‘포퓰리즘’에서 탈피해야 한다. 한국은 과거의 남미국가들과 달리 개방형 개발전략을 통해 공업화를 추구한 성공사례로 꼽힌다.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개방의 이익을 향유해온 나라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특정산업이나 이익집단은 당사자의 이해관계와 관련되는 사안에선 보호주의와 개방의 피해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게 마련이다. 이 경우 정부 지원은 구조조정 압력을 약화시킨다. 사회적으로 광범위하게 확산되어 있는 모럴 해저드 역시 그러한 정책의 부작용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특정산업이나 계층에 대한 정부지원은 부작용을 최소화할 수 있는 범위에 국한되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앞으로는 국가의 기능과 역할에 대한 전환이 요구된다. 즉, 국가가 자신의 문제해결 능력을 과대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한 세대가 넘게 지속된 개입주의를 통한 경제적 성과는 관료집단으로 하여금 정부의 능력을 과신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는 자율과 창의성, 그리고 책임이 강조되는 시장사회의 원리와도 맞지 않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국가의 역할을 강조해온 사민당이 집권하고 있는 독일에서도 경제의 혁신능력을 제고하기 위한 개혁과정에서 ‘사회의 탈(脫)국가화’가 급속하게 진행되고 있다. 사회보장 제도 및 고용알선 제도의 사유화 등이 대표적 사례다. 연방노동청은 전체 예산의 절반 가량을 관료집단의 인건비와 운영비로 지출하고 있으며, 이는 여타 사회보장기구의 경우에도 큰 차이가 없다. 대규모 예산이 복지 노동과 관련된 본래 목적에서 벗어나 관료조직을 위한 경비로 지출되면서 정책의 비효율성, 재정적자, 국민의 조세 부담을 증가시키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

    [‘동북아 허브’는 경제분야에만 치우쳐]

    넷째, 미래의 국제분업질서는 세계화와 지역주의라는 두 개의 요소에 심대한 영향을 받을 것이다. 양자는 보완적 또는 갈등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거의 모든 지역통합체가 역내(域內) 국가간 무역과 직접투자의 자유화를 지향한다는 점에서는 세계화를 촉진하는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다. 반면 역외(域外) 국가에 대해 다양한 차별화 정책을 도입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갈등구조가 심화될 것이다.

    新국가발전 전략 수립을 위한 5대 제언

    전자, IT, 자동차 등 중국의 전략상업이 성장하면서 과잉 공급이 예상되고 있다.

    따라서 장기적으로 우리의 동북아 전략이 추구하는 목표는 지역안정과 한반도의 통일 및 세계경제의 지역주의화에 효율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동북아의 중핵국가’를 지향해야 할 것이다. 현 정부에서 표방하고 있는 동북아의 허브(HUB)국가 개념은 주로 물류중심이나 금융센터와 같은 특정 경제분야의 중추기능만을 강조하고 있다. 이에 비해 중핵국가는 보다 다차원적 의미의 정치 외교적, 경제적 역할을 겨냥한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일본은 국가의 정체성 정립을 새 천년에 대비한 장기 발전전략의 핵심과제로 설정했다. 그동안의 근대화 과정에서 일본은 ‘탈아입구(脫亞入歐, 아시아를 벗어나 서구로 진입한다)’라는 목표에 따라 서구사회를 벤치마킹하면서 공업화의 길을 걸어왔다. 이미 오부치 정부는 새 천년을 맞이하는 장기비전과 전략을 마련하면서 서구사회를 이정표로 진행되어온 공업화는 이제 마무리된 것으로 간주했다. 이러한 평가를 기초로 일본은 대내적으로 일본식 ‘협치(協治, co-governance)’에 기초한 부민유덕(富民有德)의 사회를, 대외적으로는 동(북)아시아에서의 적극적 역할을 통한 위상 정립을 모색하고 있다.

    오늘날 동(북)아의 통합전략과 일본의 역할에 관한 논의는 사회과학연구소와 전문가들 사이에서 중요한 연구주제의 하나로 부상했다. 일본의 빠른 우경화와 아시아 회귀는 앞으로 동북아 질서 재편에 결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다.

    중국 역시 고속성장한 경제력에 상응하는 군사력을 축적하고 있다. 중국은 아직까지 반(反)패권주의 노선을 대외정책의 기본원칙으로 견지하고 있다. 그러나 머지않은 장래에 중국은 적어도 동(북)아에서 지역패권국으로 등장할 것이다. 중화사상(中華思想), 그것은 과거에도 그러했듯이 장래에도 중국정치와 사회의 저변을 관류하는 기본이념이다. 중국은 이미 동아시아에 포진한 화교자본과 2010년까지 자유무역지대를 설립한다는 데 합의함으로써 지역통합의 기선을 제압하고 나섰다.

    이처럼 일본과 중국 사이에 지역패권을 겨냥한 갈등과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향후 동북아 지역은 필연적으로 불안정한 구도가 될 것이다. 지역안정을 위한 중재 및 조정자로서 우리의 위상을 새롭게 정립해야 할 까닭이 여기에 있다. 헤겔의 용어를 빌리자면,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시대정신(Zeitgeist)’이다.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경제통합을 실현한 유럽연합(EU)도 그 생성 배경에는 단순한 자유무역의 이익 못지않게 지역통합에 의한 평화질서의 구축이라는 목표가 깔려 있었다. 독일의 아데나워 수상과 프랑스의 드골 대통령이 이러한 노력을 주도했다.

    [지역통합으로 한·중·일 분업구조 만들어라]

    그러나 동북아에서는 일본과 중국의 지역패권주의를 겨냥한 경쟁과 갈등으로 인해 안정적 평화질서를 구축하기가 매우 어려울 것으로 전망된다. EU의 경험은 경제통합과 지역안정이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이유에서 우리의 조정기능이 동북아 지역통합에 관건이 되는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다.

    따라서 한국을 비롯한 역내국가들의 대외 협상력을 높이기 위해서도 동북아의 경제통합이 절실히 요구된다. 앞으로 노동, 환경 등 여러 분야에서 EU와 같은 지역단위의 기준과 규범이 강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러한 기준을 지키지 않을 경우 해당 지역에 대한 수출에 통상정책상의 제재가 가해질 것이다. 또한 남미경제공동체(MERCOSUR)의 사례에서 보듯이 역외국가에 대한 차별관세가 확산되고 있다. 이같이 지역이기주의에 입각한 차별정책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한 협상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도 동북아 지역통합이 절실하다.

    동북아의 지역경제 통합은 특히 한국과 중국이 효과적인 산업협력 체제를 구축하는 데 기여할 것이다. 중국 국무원의 내부자료에 따르면 중국의 산업구조는 노동집약적 중소기업과 지식집약 산업이 병존하는 구조다. 중국의 유휴 노동력은 약 3억명으로 추산되며, 이는 저임금에 기초한 공업화의 원천이 되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는 선진국 다국적기업의 대(對)중국 직접투자 및 기술이전으로 중국의 지식집약 산업이 급속하게 경쟁력을 강화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新국가발전 전략 수립을 위한 5대 제언

    동독이 서독의 시장경제에 편입됨으로써 통일이 이뤄진 것을 보더라도 남북한 흡수통일은 불가피하다.

    문제는 전자, IT, 자동차, 화학, 철강 등 중국의 전략산업과 우리의 성장주력산업이 거의 일치하고 있다는 점이다. 여러 전문가의 예측에 따르면 중장기적으로 이들 산업은 과잉공급이 예상되고 있다. 따라서 한중일의 경제통합은 이들 전략산업에 대한 효율적인 구조조정과 비교우위에 입각한 역내 분업구조를 형성하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동북아에서 한국의 중핵적 기능은 이상과 같은 경제적, 외교적, 군사적 측면에서 그 당위성이 제기되고 있다. 현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물류·금융서비스 중심의 지역허브국 형성 전략은 기술적·단선적 접근으로밖에 볼 수 없다. 지금부터라도 지향하는 목표와 전략적 지평을 새롭게 정립할 필요가 있다.

    [동북3성을 거점지역화하라]

    지역통합 노력과 함께 우리는 장기 발전전략을 수립하는 데 있어 중국 요소를 심각하게 고려해야 할 것이다. 세계은행은 중국이 2020년까지 연평균 7%의 경제성장을 실현할 것으로 예측했다. 물론 중국은 여러 가지 문제를 안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국유기업의 구조조정, 대규모의 부실채권, 대량실업의 압력 등이 그것이다. 또한 경제성장과 IT산업의 발전에 따라 민주화 요구가 거세지는 과정에서 사회정치적 불안이 야기될 개연성도 크다.

    그러나 중국은 개혁·개방 이후 위기에 대한 관리능력을 배양해왔으며 극도의 실용주의 노선을 견지하는 정치적 리더십을 보유하고 있다. 경제적으로는 광범위한 화교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으며, 규모의 경제를 실현하여 해외 충격을 흡수할 수 있는 내수시장이 존재한다. 다국적기업의 대중국 투자 역시 지속될 것이며 우리 경제와 중국 경제의 보완과 갈등의 구조는 더욱 심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구매력 평가 방식에 의한 중국의 국민총생산은 이미 일본을 추월했다.

    보완적 요소를 강화하기 위한 여러 방안 중 특히 대중(對中) 직접투자와 관련하여 동북3성(省) 지역을 거점지역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중국은 최근에 들어서면서 동부연안 중심의 개발전략에서 탈피해 동북지역에 대한 대대적인 개발계획에 착수했다. 이를 위해 대규모의 간접자본망을 형성할 계획이며 외국기업의 직접투자에 대한 다양한 특혜조치를 강구하고 있다. 이 지역에는 중국의 전통적인 중화학산업이 집중되어 있어 앞에서 지적한 전략산업 부문의 협력 가능성이 높다. 또한 180만에 이르는 조선족이 이 지역에 포진하고 있어 북한, 러시아 원동(遠東)지역과 함께 동북아의 다자협력을 강화시킬 수 있는 전략적 거점으로 부상할 것이 분명하다.

    [시장경제냐 계획경제냐]

    마지막으로 우리의 대북정책이 지향하는 목표는 평화공존과 공동번영이며, 동시에 통일에 대비한 내부의 역량 축적에 두어야 한다. 독일의 경험은 통일과 같은 역사적 사건은 항시 예측가능성이 극히 제한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대북정책에 있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점에 유의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흡수통합’에 대한 사회 통념을 바로잡아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통일의 ‘과정’과 ‘결과’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흡수통합에 반대 의사를 표시한다면 이는 형식법적 통일과정에서 강요와 폭력-군사력을 포함한-을 행사하지 않겠다는 의미이다. 즉 민주적 절차에 의한 통일을 지향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통일의 결과로 나타나는 국가의 체제유형은 자본주의 시장경제 아니면 사회주의 계획경제 중 하나이다. 경제체제는 현실적으로 다양한 변형 모델이 존재할 수 있으나 기본적으로는 두 개의 모형이 있을 뿐이다. 따라서 통일 이후 우리가 취할 수 있는 경제체제는 시장경제 아니면 계획경제이며, 이는 결과적으로 흡수통일을 의미한다. 독일 역시 통일과정은 서독의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동독 주민의 선거를 통한 민주적 절차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그 결과 동독은 서독의 시장경제에 흡수 편입됐다.

    이에 반해 우리 사회에서 전개되는 흡수통합 반대논리는 시장경제나 계획경제가 아닌 ‘제3의 길’을 지향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는 경제체제에 대한 무지의 소산이다. 존재하지 않는 가공의 경제체제를 지향하는 통일전략은 출발부터 방향타를 잘못 설정한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남북한 공존과 공동번영을 위해서는 북한의 지속적인 개혁 개방이 전제되어야 한다. 이질적 체제간의 교류 협력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은 5개의 발전목표와 전략을 제대로 추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기존의 단기적, 임기응변적 정책관리 방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정책의 지평을 넓히고 시계(視界)를 장기 발전목표로 넓혀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장기 목표와 단기정책간에 괴리 현상이 끊임없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제반 정책이 단기적, 가시적, 계량적 지표에 집중된다면 국가발전의 장기적, 질적 측면은 늘 정책자원(policy resource)의 배분에서 사각지대에 놓일 것이다. 이를 시정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

    그 하나는 행정부에 대한 인사정책의 안정성을 강화하는 일이다. 장관의 잦은 교체와 그에 따른 관료의 단명(短命) 현상이 반복되는 한 나라의 장기적 발전전략을 일관되게 수립하고 추진할 수 없다. 전문관료 집단이 안정적으로 전문성을 발휘할 수 있도록 인사 관행의 개선이 시급하다.

    이와 함께 국회의 정책기능을 더욱 활성화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가령 행정부가 제출한 정책사안을 심의하는 데 있어 정책의 중장기적 효과와 부작용을 보고하도록 의무화하고 그에 상응하는 입법부의 정책토론과 심사 기능도 강화되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청와대 기능 가운데 국가발전의 비전과 전략에 우선순위를 두고 개별부서의 정책과 이러한 발전전략을 조율하는 작업을 활성화할 필요가 있다. 통상적인 사안에 대해서는 해당부서의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하면서도 국가발전의 방향타를 정립하고 주요 정책의 일관성을 견지하도록 하는 것은 청와대의 몫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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