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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주의 ‘책 하고 놀자’

르네상스 시대에도 명품족 있었네 ‘상품의 역사’

  • 글: 장석주 문학평론가 kafkajs@hanmail.net

르네상스 시대에도 명품족 있었네 ‘상품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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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시대에도 명품족 있었네 ‘상품의 역사’

‘상품의 역사’<br>리사 자딘 지음/이선근 옮김/ 영림카디널/496쪽/2만8000원

당신이 에르메스 버킨 핸드백을 들고, 카르티에나 불가리 시계를 차고, 알랭 미클리 안경을 쓰고 있다면, 당신은 몸에 두르고 있는 명품을 통해 심리적 우월감을 맛보려는 명품족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스타벅스 커피와 오페라 관람을 즐기며 세컨드 명품 브랜드로 자신의 감성과 개성을 돋보이게 치장하기 위해 몇 달치 월급을 아낌없이 쓰거나 카드 할부를 주저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신명품족이라는 이름을 얻게 될 것이다.

명시적 신분제도가 소멸된 현대사회에서 명품은 신분과 능력을 드러내는 새로운 징표다. 명품 구매 열풍은 우리 시대의 소비 트렌드 중 하나로 자리잡았다. 사람들은 왜 명품에 열광할까. 명품에의 강렬한 유혹은 명품 자체의 사용가치보다 그것이 갖고 있는 후광효과(halo effect)에서 비롯된다. 그들은 명품을 통해 다른 사람과의 질적인 다름과 차이를 추구하고 그 다름과 차이에서 발생하는 심리적 만족감에 탐닉한다. 이러한 명품족의 역사는 매우 길다. 최초의 명품족은 이미 르네상스 시대에 나타났으니까.

물질의 내면풍경

아직 종교적 신성, 혹은 형이상학이 그 자취를 다 감춘 것은 아니지만 르네상스 시대의 예술가들은 사물의 사실적인 현상 방식에 주목하기 시작한다. 신의 존엄과 현시를 드러내는 도구였던 예술이 그것에서 자유로워지자 예술가들은 아름다움이 현상의 합법칙성 속에서 발견되는 그 무엇이라는 걸 깨닫게 된 것이다.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들은 사물의 멀고 가까움, 크고 작음을 의미에 따라서가 아니라 사물 그 자체에 작용하는 현상의 합법칙성에 따라 결정했다. 화가들은 눈에 보이는 그대로, 대상이 보여주고자 하는 의도에 충실하게 사물을 묘사한다. 화가들은 그 대상이 세계의 가상(假像)이 아니라 실재이며 그것에서 비롯되는 감각적인 경험이 인간의 존엄성을 고양시킨다는 사실을 말하려고 했던 것이다.



르네상스 시대에도 명품족 있었네 ‘상품의 역사’

얀 반 아이크가 그린 ‘아르놀피니의 결혼’(좌). 카를로 크리벨리의 ‘수태고지와 성 에미디우’(우)

리사 자딘은 ‘상품의 역사’를 집필하면서 르네상스에 대한 근본적인 재해석을 시도했다고 말한다. 창조적인 기운과 열정, 지적 흥분으로 가득 차 있던 르네상스 시대를 그 시대의 꽃이라고 부를 만한 회화(繪畵)를 근거로 상품을 둘러싼 시대의 변화와 그 촉매제로 작용하는 여러 조건들, 그리고 호사스런 물질생활의 이면에 숨어 있는 그 시대 사람들의 내면풍경을 고고학적으로 탐사한다. 리사 자딘이 말하는 르네상스의 재해석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르네상스의 물질문명에 대한 재조망이다.

카를로 크리벨리의 ‘수태고지와 성 에미디우스’에서 성모마리아는 그리스·로마 시대의 장식으로 치장된 이탈리아풍 건축물 속에 들어 있다. 작은 창문을 통해 비쳐든 한 줄기 금빛 광선이 마리아의 관자놀이에 머문다. 함께 묘사된 비둘기는 그 빛이 성령의 빛임을 암시한다.

물론 이 그림은 성모마리아의 순결에 대한 예찬을 표현하고 있지만, 배경의 압도적인 화려함 때문에 성스러움은 그림 바깥으로 밀려나는 느낌이 강하다.

코린트 양식의 신전 기둥과 고대 양식의 벽기둥, 건물 1층과 2층 사이를 가로로 장식하고 있는 고전적인 프리즈, 기둥과 아치로 받쳐진 기하학적인 천장의 로지아, 그 금박과 테라코타 장식의 색조와 대리석의 질감은 화려함과 넘치는 부를 과시한다. 인물을 둘러싸고 있는 의상과 침대 시트, 수놓은 우단, 투르크의 카펫, 선반 위의 놋촛대, 상자, 주전자, 도자기 접시들, 끈으로 묶은 양장본, 크리스털 꽃병들…. 르네상스의 화가는 대상과 장식들을 매우 사실적으로 재현한다. 이것들은 르네상스 시대의 ‘풍부한 소비생활과 무역에 대한 찬사’이다.

르네상스의 화가들은 성화(聖畵) 속에 이국적이고 진귀한 상품들을 묘사함으로써 이것들에 투사된 당대 사람들의 욕망과 외경(畏敬)을, 그리고 ‘상업적인 것과 영적인 것의 조화’를 드러내 보이려고 했다. 이 화려한 물품의 목록들은 르네상스 시대 사람들의 취향과 가치관과 이것을 향한 정신적 경외심을 드러내는 항구적 분신(分身)이다.

얀 반 아이크의 ‘아르놀피니의 결혼’은 나란히 서 있는 부부의 초상을 아주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우리가 이 그림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유별난 사랑을 강조하는 부부의 모습이 아니라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사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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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장석주 문학평론가 kafkaj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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