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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奇人·名人 ⑤

‘꽃의 달인’ 유박|“깊은 밤 홀로 꽃 사이에 서니 옷깃 가득 이슬과 향기에 젖어…”

  • 글: 안대회 영남대 교수·한문교육 ahnhoi@yumail.ac.kr

‘꽃의 달인’ 유박|“깊은 밤 홀로 꽃 사이에 서니 옷깃 가득 이슬과 향기에 젖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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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의 달인’ 유박|“깊은 밤 홀로 꽃 사이에 서니  옷깃 가득  이슬과  향기에 젖어…”
이 글에 나타난 백화암 주인 유박은 한창 나이에 벼슬을 포기하고 바닷가에 정착한 은사의 모습이다. 시비가 난무하고 귀천과 영욕이 무쌍한 현실과 단절한 채 은자의 삶을 택한 것이다.

금곡에 정착한 이후 유박은 이 지역 지식인들과 교유하면서 무려 20년 동안이나 화원의 경영에 정성을 기울였다. 불혹의 나이가 된 그는 지난날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읊조린다.

“물가에서 미친 노래를 부른 지 20년인데 어느새 늙어버린 채 온갖 꽃을 앞에 두고 있네(澤藪狂歌二十年 居然老大百花前 - ‘그저 읊다(?吟)’라는 자작시 중의 한 구절)”라고.

또 자신의 집에 얹을 현판에 직접 쓴 ‘화암기(花菴記)’에서는 자신의 삶을 이렇게 묘사했다.

[나는 타고난 성품이 졸렬하여 스스로 판단해도 쓸모없는 사람이다. 사는 곳의 산수는 무겁고 탁하여 유람할 만한 경치가 드물다. 거적으로 문을 단 궁벽한 집이라 한 해가 다 가도록 훌륭한 분의 수레가 끊어졌다.



근래 사시사철의 화훼 백 본(本)을 구해다 큰 것은 재배하고 작은 것은 옹기를 화단처럼 만들어 화암(花庵) 안에 두었다. 나는 그 사이에서 소일하며 세상을 잊고 즐거운 마음으로 지냈다. 분매와 금취(국화의 일종)는 그 정신을 세밀하게 관찰하고, 왜철쭉과 영산홍은 그 형세를 멀리서 살펴보며, 웅위함은 단약(丹藥)을 취하고, 계수와 복사꽃은 새로 얻은 첩인 양하고, 치자와 측백은 큰 손님을 대하듯 다뤘다. 교태 있는 용모가 손에 잡힐 듯한 것은 석류이고, 기상이 활달한 것은 파초다. 괴석으로는 뜰에 명산을 만들고, 비쩍 마른 소나무는 태고적 얼굴을 만난다. 풍죽(風竹)은 전국(戰國)시대의 기상을 띠고 있고, 잡종은 시자(侍者)가 된다. 연꽃은 공경히 주렴계(周濂溪)를 마주한 듯하다.

그 가운데 기이한 것과 예스러운 것을 취하여 스승으로 삼고, 맑은 것과 고결한 것을 취해 벗을 삼으며, 번화한 것과 화려한 것을 취하여 손님을 삼는다. 이러한 즐거움을 남들에게 양보하고자 해도 사람들은 이것을 버린다. 따라서 나 홀로 즐겨도 다행히 금하는 이가 없다. 기쁠 때도 화날 때도 시름겨울 때도 즐거울 때도 앉아 있을 때도 누워 있을 때도 언제나 이 화병의 꽃에 의지하면서 내 몸뚱어리를 잊은 채 늙음이 곧 이를 것도 알지 못한다.(‘화암기’ 전문)]

완물상지(玩物喪志)의 경계를 넘어

그는 자신을 주류사회에서 낙오한 사람으로 간주했다. 주류란 과거를 보아 조정에 출사하는 삶이다. 최소한 성리학을 공부하여 향리에서 산림처사(山林處士)로 행세하며 사는 삶을 추구한다. 선비는 주류사회에서 낙오되지 않기를 지향한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선비의 삶을 스스로 거부했다. 사대부의 일원이었으나 고전적인 가치관의 세계에서는 어떤 성취도 이루지 못했다.

유박은 과감한 선택을 한다. 평생 꽃을 키우며 살겠다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대장부가 꽃에 관심을 두는 것은 완물상지(玩物喪志·사물에 탐닉하면 의지가 손상된다)라 하여 비판받았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선비들의 세계에서는 정치나 교화, 경서 등을 제외한 일에 지나치게 관심을 기울이는 것을 완물상지라 하여 경계했다.

18세기의 성리학자 봉암(鳳巖) 채지홍(蔡之洪) 같은 이는 뜰에다 많은 꽃을 심고 이를 감상하며 시를 지었다. 그는 시집의 서문 ‘정훼잡영서(庭卉雜詠序)’에서 “적적함을 달래기 위해서일 뿐 감히 아름다움을 즐기기 위해서는 아니다. 요컨대 정선생(程先生)의 완물상지(玩物喪志)의 경계를 가슴속에 새겨 꽃에 젖어들어가는 우려를 없앨 것이다”라고 소회를 밝혔다. 꽃을 즐기되 거기에 깊이 빠질까 우려하는 마음이다. 꽃에 탐닉해 유학에 소홀할까 염려한 것이다. 이렇듯 당시 사대부들은 완물상지의 계율을 저버릴 수 없었다.

그러나 유박은 당대를 지배한 의식의 경계를 벗어났다. 자신은 버림받은 자이니 좋아하는 꽃을 스승으로, 벗으로, 손님으로 삼아서 꽃과 함께 인생을 구가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남이 가는 길과는 다른 자신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물론 이 시기에는 심로숭(沈魯崇)이 ‘자저실기(自著實紀)’에서 “연못가나 뜰에 이름난 꽃, 아름다운 나무를 심는다면 사람의 성령(性靈)을 배양할 수 있는데, 그것을 일러 완물상지라고 말하는 것은 그릇되다”고 말한 바와 같이, 꽃에 의미를 두는 사람도 존재했다. 이미 모두가 지향하는 하나의 길을 가지 않고 다른 길을 걷는 다양화가 시작되는 시기였다. 유박은 새로운 길의 전위에서 제 길을 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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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안대회 영남대 교수·한문교육 ahnhoi@yumail.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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