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향로봉 정상. 멀리 보이는 산줄기가 금강산 주능선이고, 그 사이에 남북을 가르는 철책이 있다.
그런데 2005년 새해 벽두, 대부분의 신문에 대서특필된 백두대간 관련 기사에 필자는 흥분을 넘어 감동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국토연구원이 위성영상과 지리정보시스템(GPS) 등 첨단기법을 동원해 백두산부터 지리산까지 산줄기가 하나로 이어져 있음을 보여주는 새로운 지도를 완성했다는 내용이었다. 물론 이 지도가 일본인이 만든 구 산맥지도를 대체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 스스로 우리 땅의 연속성을 직접 확인했다는 것은 그 자체로 값진 쾌거임에 분명하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게 있다. 우리가 과학의 힘을 빌려 100년 만에 되찾은 지도는 놀랍게도 인사동 헌책방에서 먼지를 뒤집어쓴 채 발견된 ‘산경표’를 쏙 빼닮았다는 점이다. 고산자 김정호가 눈물겹게 만들어낸 ‘대동여지도’의 숨결도 그대로 옮겨진 듯하다. 그들은 어떻게 우리보다 앞서 이 땅의 모습을 그토록 세밀하게 바라볼 수 있었을까? ‘산경표’를 처음 발견해 소개한 고지도연구가 고(故) 이우형 선생은 생전에 그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김정호 선생이 애국을 뭐라고 그랬는지 아십니까? 첫째는 자신이 살고 있는 땅을 사랑하는 것이고, 둘째는 그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했어요. 바로 그런 생각 때문에 고산자는 당시 6m가 넘는 ‘대동여지도’를 만들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12월19일 새벽. 속초터미널에서 동해에 거주하는 산행 동반자 박 선생을 만나 택시를 타고 미시령으로 붙었다. 미시령 고개를 오르는 길은 언제 봐도 아슬아슬하다. 동쪽에서 막 솟구치기 시작한 태양은 가장 먼저 외설악의 명물 울산바위를 비추더니 곧이어 가을을 벗어 던지고 겨울로 들어선 설악산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미시령 정상에서 곧바로 상봉(1239m)을 향해 붙는데 양편에서 불어오는 찬바람이 예사롭지 않았다.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 탓인지 두 번이나 현기증을 느끼고 발까지 헛디뎠다. 차가운 날씨에 갑자기 기운을 쓰려고 하니 일시적으로 몸의 밸런스가 깨진 모양이다. 심호흡을 하고 초콜릿을 몇 개 입에 넣으니 겨우 진정됐다.
가을과 겨울의 공존
미시령에서 상봉까지는 긴 오르막이지만 일단 상봉에 이르면 남쪽으로 설악산을 시원하게 굽어볼 수 있는 바위가 있다. 이곳에서 박 선생에게 설악산의 매력에 대해 한 수 배우고 신선봉(1204m)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상봉부터는 암릉구간이어서 긴장을 늦추지 말아야 한다. 암릉을 통과하면 밧줄에 몸을 맡겨야 하는 가파른 내리막인데 며칠 전 내린 눈이 녹지 않은 채 쌓여 있어서 애를 먹었다. 상봉을 사이에 두고 남쪽은 늦가을이고 북쪽은 초겨울이다. 박 선생은 “백두대간에서 첫눈을 보았다”며 즐거워했다.
눈길을 따라 20분쯤 내려가면 화암재다. 여기서 왼편으로 하산하면 내설악 어귀인 용대리로 이어지는 마장터가 나온다. 화암재부터는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오른편의 신선봉을 두고 길이 애매하게 나 있기 때문이다. 혹 신선봉 부근에서 길을 잃기라도 한다면 일단 왼편의 산기슭을 향해 내려서는 것이 좋다.
대간 줄기는 왼쪽으로 쭉 뻗다가 큰새이령(대간령)에서 한 차례 숨을 고르고 다시 솟아오른다. 큰새이령에서 박 선생을 기다리는데 중년 부부가 먼저 도착했다. 이들 부부에게 박 선생에 대해 물으니 도중에 아무도 만나지 못했다고 했다. 아마도 신선봉 주변에서 길을 잃은 모양이다. 30여분쯤 기다리니 박 선생이 도착했다. 꽤나 힘들었을 텐데도 “덕분에 좋은 구경 많이 했다”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역시 산을 즐길 줄 아는 분이다.
마산에서 길을 잃다
큰새이령에서 고성군 토성면과 간성읍의 경계지점인 마산(1051.9m)까지는 2시간 남짓 걸린다. 도중에 암봉과 병풍바위를 지나치는데 남북으로 탁 트인 곳이 여러 군데 있다. 필자는 박 선생보다 먼저 출발하면서 적당한 곳에서 점심을 먹자고 했다. 원래는 병풍바위쯤에서 쉬어가려 했는데 걸음이 빨라지다 보니 어느덧 마산까지 지나쳐버렸다. 왼편으로 시원하게 내려다보이는 알프스 스키장과 목장을 바라보면서 달리다 보니 나도 모르게 속도가 붙은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