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눈여겨볼 것은 이 핵심 발언이 대부분 대통령 본인이 직접 구술하거나 작성한 문서 형태로 나왔다는 점이다. 우선 주무부서인 외교통상부는 거의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해 발언 이후에 그 배경을 확인하러 나서는 혼선을 겪기도 했다는 것이 외교부 관계자의 설명이다. 안보 관련 사안에 있어 대통령 연설원고를 준비하는 NSC도 이 발언들과 관련해서는 자체적으로 작성한 원고가 폐기되는 등 이전 같은 역할을 하지 못했다. 일부 관련부처 당국자들의 경우 배경설명이 대통령의 본의와 차이가 있다는 질책을 받기도 했다는 것.
이런 상황은 “대통령의 최근 생각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은 누구인가”하는 질문에 청와대 관계자들이 “그런 사람은 없다”고 말하는 것과도 연관된다. 최근의 발언은 한마디로 대통령 본인의 생각이라는 것이다. 한 정부 당국자는 일련의 발언이 대통령 한 사람의 결심이라는 관측이 많다는 지적에 “꼭 그렇지는 않다. 토론과정을 통해 끼친 부(負)의 영향도 영향 아니겠나” 하고 반문했다. 앞에서 주도해 이끈 사람은 없고 다만 뒤에서 잡아끌어 오히려 정교화할 수 있게 만든 경우라는 뉘앙스다.
이는 ‘동북아 균형자론’을 놓고 이후 청와대 고위 관계자들이 언론과 접촉하면서 밝힌 배경이나 해석에서 미묘한 차이가 발견되는 것만 봐도 분명해진다. 한마디로 ‘그게 뭘 의미하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대통령 한 사람뿐’이라는 것이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난 것일까. 노무현 대통령은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가. ‘부(負)의 영향’이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대통령의 질타
지난해 12월, 4개월여간의 숨돌릴 틈 없던 해외순방을 마치고 돌아온 노무현 대통령이 외교안보 분야 주요 정부 관계자들이 참석하는 회의를 소집했다. 11월12일 이른바 ‘LA 발언’ 이후 한국 외교의 나아갈 방향을 총체적으로 점검하는 보고를 받는 자리였다. 브리핑이 끝나자 대통령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이 보고서가 어떤 경로와 논의과정을 거쳐 올라온 겁니까.”
대통령의 심상치 않은 어조에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이 보고서에 비전이 있습니까? 국민들이 이해하겠습니까? 일관성이 있습니까? 장관님들께서는 아랫사람이나 특정부서의 일이라 생각하지 마시고 직접 고민해주십시오. 좀더 근본적인 문제를 살펴야 하지 않겠습니까.”
보고서의 내용이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평가에 참석자들은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최근 들어 외교안보 관련 사안과 관련해 보좌진의 인식을 질타하는 발언이 계속되는 상황이었다. 특히 11월12일 미국 LA 국제문제협의회(WAC) 초청 오찬에서 “북한의 주장은 일리가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며 북한에 대한 미국의 무력행사와 봉쇄정책에 단호히 반대하는 메시지를 분명히 언급한 ‘LA 발언’은 그 정점이었다.
LA 발언의 경우 사전에 NSC와 관계부처에서 작성해 보고한 연설 초안은 대부분 폐기됐다. 연설을 닷새 앞둔 11월7일 기존의 원고를 원점으로 돌린 대통령이 95% 이상 새로운 연설문을 두 시간여에 걸쳐 구술한 것. 대통령의 구술은 오랜 기간에 걸쳐 생각한 듯 막힘이 없었다고 윤태영 청와대 제1부속실장은 전했다(2005년 1월6일 ‘청와대 브리핑’).
미국으로 출발할 때까지 원고를 확인하지 못한 일부 참모들은 도중에 연설 내용을 확인하고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연설 내용이 부시 대통령 재선 이후 힘을 ‘재충전한’ 미 행정부 네오콘의 대북 강경기조를 비판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대통령에게 급히 면담을 요청해 발언을 만류하려 한 참모도 있었던 것으로 전한다. 실제로 발언 직후 일부 고위관계자는 “북한과 미국에 모두 전략적 결단을 요구한 것”이라며 발언의 충격파를 줄이려 애쓰는 듯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