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려대의 과거사 100년이 ‘민족’을 매개로 한 것이었다면 앞으로 100년, 아니 1000년은 ‘세계’를 겨냥하는 데 초점이 맞춰질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 대학 사회에 변화의 소용돌이를 몰고 온 고려대의 ‘글로벌 프로젝트’는 한국에서보다 세계에서 평가받는 것이 더 타당해 보인다.
물론 강의 내내 우리말은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김 교수는 유창한 영어로 학생들에게 마케팅 환경의 변화를 조목조목 설명했고, 대부분의 학생이 강의 내용을 무리없이 이해하는 듯했다. 몇몇 학생에게 영어 강의에 대한 반응을 물어보았다.
“기업들은 이미 해외에 나가서 싸우고 있는데 언제까지 우리끼리 안에서 먹고살겠다고 할 수 있나요? 글로벌 마인드를 갖추려면 영어로 강의하고 듣는 것이 오히려 늦은 감이 있죠.”
수업을 듣고 있던 4학년 강신영씨(교육학과)의 답변은 기자가 기대한 것 이상으로 ‘글로벌화’되어 있었다. 강씨는 “하버드대는 삼성전자 황창규 사장을 불러서 특강을 들었다던데, 우리도 빨리 그렇게 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제안도 했다.
김 교수의 ‘마케팅원론’ 강의는 고려대가 몇 년 전부터 도입해 최근 비중을 크게 높이고 있는 영어 강의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 경영학과에서 웬만한 강의는 대부분 영어로 진행된다고 해도 큰 무리가 없다. 2중 전공으로 경영학을 선택한 강씨만 해도 ‘마케팅원론’뿐 아니라 ‘국제경영’ ‘재무관리’ 등 세 과목의 영어 강의를 수강하고 있다.
고려대의 영어 강의가 처음부터 매끄럽게 추진된 것은 아니다. 군 입대 후 복학해 취업을 준비중인 99학번 김진우씨(생명유전공학부)는 “2003년 무렵 영어 강의를 처음 듣기 시작했을 때는 교수와 학생이 시행착오를 자주 겪었는데, 복학해보니 영어 강의가 완전히 정착돼 있더라”고 말했다.
전체 강의 30%는 영어로
김씨도 생명공학이나 유전학 같은 전공수업은 물론 2중전공을 하고 있는 경영학 관련 강의도 모두 영어로 듣고 있다. “수업 내용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없느냐”고 묻자 김씨는 “전공수업은 전혀 어려움이 없지만 경영학 수업은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 다소 있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김씨가 말하는 ‘어려움’이란 것도 ‘수업내용의 10~20%를 이해하기 어려운 정도’라고 하니 별문제는 아닌 것으로 보였다.
고려대는 2003년 전체 강의의 10% 수준에 불과하던 영어 강의 비율을 최근 23%까지 높였고, 오는 2학기에는 30%까지 높인다는 방침이다. 이러한 구상을 실현하기 위해 최근 고려대에서 신규 임용하는 교원은 무조건 영어로 강의한다는 원칙을 세워놓았다. 신임 교원을 채용하기 전에는 어윤대 총장이 직접 나서 영어로 면접을 하기도 한다.
심지어 국문학과에도 외국인 교수를 채용해 영어 강의를 개설한다는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 최근 고려대가 야심 차게 추진하고 있는 ‘글로벌 프로젝트’에서 국문학도 예외가 아님을 보여주기 위해 마련된 국문과 외국인 교수 임용 계획은 이미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 오는 2학기부터는 국문과에서도 영어 강의를 듣게 될 전망이다.
‘민족대학’이라는 고정된 이미지에 갇혀 있던 고려대에 숨돌릴 틈 없는 변화의 물결이 밀려들기 시작한 것은 2003년 초 어윤대 총장이 취임하면서부터다. 국제금융을 전공한 경영학과 교수 출신의 어 총장은 취임 직후 ‘고려대 글로벌화’를 내세우며 강력한 개혁에 시동을 걸었다. 이른바 ‘글로벌 KU(Korea University) 프로젝트’.
‘막걸리대학’이라는 고려대의 이미지를 바꾸기 위해 ‘고대 와인’을 수입하기도 했고 검정 예복으로만 제작해오던 졸업복을 고려대의 상징인 크림슨(심홍색)으로 바꾸는 파격을 선보이기도 했다.
발상의 전환을 동반한 강력한 개혁 작업이 2년을 넘기면서 이제 고려대의 변화는 국내 대학은 물론 아시아 지역의 다른 대학이 주목하는 벤치마킹 모델이 되고 있다. ‘국제화’를 내세운 고려대의 교육 혁신 프로젝트가 여기저기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중국의 런민대(人民大) 다롄대(大連大), 그리고 일본의 와세다(早稻田)대와 소카(創價)대 등 아시아권 대학들의 방문이 잇따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올해 한국경제신문이 주최하는 제7회 ‘한경 마케팅 대상’을 수상함으로써 고려대는 이제 일반 소비자들이 사용하고 제품 이상의 브랜드 가치를 시장에서 인정받았다. 이 상은 일반 기업들의 마케팅 혁신 사례를 발굴하기 위해 마련된 것으로 대학이 수상한 것은 전무후무한 일이다.
‘마케팅원론’ 강의가 진행되고 있던 엘지포스코(LG-POSCO) 경영관도 고려대의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건물 중 하나다. 지난 2003년 LG와 포스코가 지원한 270억원의 예산을 들여 완공한 이 건물의 강의실은 국제회의실 수준으로 지어졌고, 각 강의실 문 앞에는 건립기금을 기부한 동문의 이름이 붙어 있다. 이를테면 김승유 하나은행 이사회 의장이 기증한 ‘김승유 강의실’, 유상욱 코리아나 화장품 회장이 기증한 ‘유상욱 강의실’, 그리고 이명박 서울시장이 희사한 ‘이명박 라운지’ 등이다.
물론 이 건물의 안내 표지판에서도 한글을 찾아보기 힘들다. 층별 공간 배치를 알리는 안내 표지판에는 ‘1F-Seminar Room, 2F-Career Center, 3F-Digital Library’ 같은 영문 안내가 적혀 있을 뿐이다. 말하자면 엘지포스코 경영관이야말로 고려대의 국제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건물인 셈이다.
오는 5월5일 개교 100주년을 앞두고최근 고려대에는 100년사에 남을 만한 몇 가지 공사가 진행중이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은 100주년 기념관과 종합체육관. 100주년 기념관은 고려대 재단인 고려중앙학원이 삼성측의 지원을 받아 400억원을 출연해 지은 뒤 학교에 헌정하는 형식으로 들어선다.
교내 단일 건물로는 가장 큰 규모인데다 겉모습은 ‘석탑’으로 상징되는 고려대 건물답게 석조 고딕 양식으로 지어지지만 내부는 초현대식 원형 아트리움으로 만들어져 고려대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상징하게 된다. 100주년 기념관에는 박물관과 학술정보관 등 다양한 시설이 들어설 예정이다.
녹지캠퍼스 노천극장 자리에 들어서는 지하 3층, 지상 3층의 대규모 종합체육관 공사에도 고려중앙학원이 262억원을 투자할 예정이다. 스탠드와 바닥을 포함, 8000명까지 수용 가능한 초대형 체육관은 외부 경기 유치는 물론 학생 및 교수 등 학교 관계자들이 참여하는 각종 행사에 활용된다.
고려중앙학원 관계자는 “2003년 완공한 중앙광장에 이어 앞으로 문을 열 100주년 기념관과 종합체육관은 김병관 이사장이 취임하면서 공약한 사항인 만큼 학교 발전에 대한 재단측의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 관계자는 “인촌 김성수 선생이 보성전문학교(고려대의 전신) 교장을 역임했을 때 앞에 나서서 강연하는 것조차 꺼렸던 것처럼 재단도 학교 발전을 위해 뒤에서 묵묵히 돕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사실 고려대가 과거의 ‘영화’를 과감하게 포기하고 ‘가지 않은 길’을 향해 새로운 행진을 하겠다는 조짐은 이미 어 총장 취임 이후 일간지를 통해 ‘도발적인’ 광고를 선보일 때부터 주변에 감지되기 시작했다. 김병관 이사장이 취임하면서 내세운 ‘변화와 개혁’이라는 화두와 어윤대 총장의 글로벌 마인드가 의기투합해 ‘세계고대’를 향한 첫걸음을 이때부터 떼어놓은 것이다.
지난해 7월 고려대가 내놓은 첫 번째 광고의 헤드카피는 ‘명문을 버려라’였다. 이 광고를 언뜻 본 사람들은 그 의미를 선뜻 이해하지 못했다. 너도나도 명문대학이 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마당에 명문을 버리라니.
고려대는 이때 이미 그동안 누려온 세간의 평판과 이로 인한 기득권을 버리겠다고 대내외에 선언하고 나선 셈이다.
사실 기자로서만 본다면 최근 고려대의 변화를 가장 먼저 느낄 수 있는 부분은 홍보라인이다. 과거 고려대를 출입하던 기자들이 우스개 삼아 털어놓던 가장 큰 불만 중 하나는 “도대체 내가 기자인지 학교 후배인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초년병 기자들을 출입처에 배치할 때 대부분 출신 학교가 위치한 지역을 맡겨온 관행 때문에 고려대 출입기자는 고려대 출신이 맡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과거 고려대 출신 출입기자는 취재를 위해 행정부서에 들를 때마다 받는 질문이 ‘몇 학번이냐’였다고 한다. 그러고 나서 선후배 관계가 확인되면 기자로 대하기보다 까마득한 후배를 대하는 듯한 일부 학교 관계자의 태도가 그다지 좋지 않은 인상을 남겨왔던 것이다. 유독 선후배간의 정이 두터운 고려대의 전통 탓이라고 넘기면 그만이지만, ‘홍보 마인드’ 면에서 보면 고려대 관계자들이 기자를 대하는 태도는 ABC부터 잘못되어 있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최근 고려대 홍보라인 관계자들이 언론매체를 대하는 태도는 과거와 판이하게 달라졌다. 이두희 대외협력처장을 만나기 위해 잠시 기다리는 사이 함박웃음을 머금고 다가온 홍보팀 여직원은 고려대 출신이 아니라고 했다. 일반 기업에서 홍보업무를 맡던 전문가를 채용한 것이다.
고려대 재단이 400억원을 출연해 지은 100주년 기념관은 전통 고딕 양식과 초현대식 아트리움이 조화를 이룬다.
사실 영어 강의 비중을 크게 높인 것은 고려대가 최근 2년간 추진해온 강력한 국제화 전략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 고려대는 그동안 선진국의 유명 대학과 맺은 학술교류 협정을 지속적으로 확대해 더 많은 학생을 외국으로 내보내고, 외국 학생을 더 많이 받아들이는 데 총력을 기울여왔다.
어윤대 총장 취임 이후에만 2003년에 24건, 2004년에 29건의 학술교류협정을 추가로 맺었다. 대상 지역도 미국 일본 등 주요 국가 위주에서 스페인 오스트리아 등 유럽 국가는 물론 멕시코 칠레 등 남미 국가로까지 넓혔다. 지금까지 학술교류협정을 체결한 대학은 49개국에 395개교.
물론 최근 국내 대학들이 학술교류협정을 통해 외국 유명 대학에 더 많은 교환학생을 파견하는 추세가 고려대에 국한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고려대 관계자들은 교환학생 제도가 겉은 그럴 듯해 보이지만 맹점이 많은 제도라고 지적한다.
교환학생 제도는 상호주의를 원칙으로 하기 때문에 한국에서 공부하기를 희망하는 지원자가 있어야 우리도 외국 대학에 학생을 내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민 끝에 고려대가 내놓은 방안이 외국 유학생에 대한 등록금 환불 제도.
교환학생 프로그램에 따라 고려대에 와서 공부하기를 희망하는 외국 학생이 없어 고대생을 내보낼 수 없는 경우 유학경비를 학교에서 대주어서라도 학생을 내보내겠다는 것이다. 교환학생 프로그램(Exchange Students Program)이 양방향 교류 프로그램이라면 등록금 환불 제도는 일방적인 학생 파견 프로그램(Visiting Students Program)인 셈이다.
학생들을 받아들이는 외국 대학으로서는 수업료 및 각종 경비를 학교측에서 대겠다는 데야 고려대생을 마다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이 제도를 놓고 외국 대학들은 여전히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한다.
이두희 대외협력처장은 “전세계 대학 총장들이 우리가 채택한 방식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왜 밑지는 장사를 하냐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우리가 국제화에 대해 종교와 같은 신념 을 갖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고 말한다. 이 처장은 “이러한 우리의 시도를 감히 ‘KU모델’이라고 불러도 좋다”고 단언했다.
그러나 외국 대학에 학생들을 파견하려고 할 때 등록금이나 수업료 문제를 해결하더라도 여전히 남는 것은 기숙사 등 주거문제이다. 고려대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아예 해당 대학에 고려대생이 묵을 수 있는 기숙사를 지어주고 들어가는 방법을 선택했다. 이름하여 ‘글로벌 KU 캠퍼스’.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대(UBC)는 2002년 고려대생 전용 기숙사인 ‘고려대-UBC관’을 지어 연간 100명의 고려대생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이뿐만 아니라 영국 런던대의 로열 홀러웨이(Royal Holloway) 칼리지에는 건립기금을 기부한 고대경제인회 이상일 회장의 이름을 따 ‘고대이상일홀’을, 중국 런민대에는 ‘고려회관’을 각각 35명과 100명 수용 규모로 2006년 완공한다는 방침이어서 고려대의 ‘글로벌 캠퍼스’는 점점 늘어날 전망이다.
이 밖에도 고려대는 미국 데이비스에 있는 캘리포니아대(UC Davis)와 하와이대, 일본의 와세다대, 호주의 그리피스대 등을 거점 대학으로, 대규모 학생을 지속적으로 내보내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불문과는 프랑스로 가라”
외국어와 외국문학을 배우는 국제어문학부 학생들은 국제화 프로그램이 더욱 필요하다. 고려대가 이 학생들에게 8학기 중 반드시 한 학기는 해당 국가 현지에서 이수하게끔 하는, 이른바 ‘7+1 프로그램’을 도입한 것도 눈에 띄는 대목이다. 이미 외국어 전공 학생들이 어학 능력을 증진하기 위해 휴학한 후 해당 국가로 자비 연수를 떠나는 일이 적지 않다는 점을 감안해 아예 이를 제도화한 셈이다.
해당 국가에서 수강한 과목은 학점을 인정해주고 그 학기의 등록금은 장학금으로 충당해주기 때문에 이 분야 학생들에게도 인기 만점이다. 16억원의 기금을 마련해 400명의 학생을 내보낸다는 계획 아래 이미 지난해 46명의 학생을 보냈고, 올해도 173명의 학생을 선발했다.
고려대의 국제화 열풍은 학생들을 내보내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외국 학생들이 고려대에서 공부하도록 유도하는 쪽에서도 불고 있다. 방학 중 빈 캠퍼스를 활용해 해외 교포 학생이나 외국인 학생들을 위한 국제하계대학(International Summer Campus)을 연 것도 이러한 노력의 일환이다.
외국인 학생들과 함께 생활함으로써 고려대생들에게 해외 유학에 버금가는 체험 학습을 제공한다는 목표에 부응하기 위해서는 일단 많은 외국 학생들이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래서 고안한 것이 해외 유명 교수들을 불러들여 방학 기간 고려대에서 강의하게 하는 단기 초청 교수제도다.
‘고대로 유학 가자’는 모토를 내걸고 지난해 50과목을 처음 개설한 국제하계대학 프로그램에는 해외 대학생 150여명을 포함해 282명이 참여해 대성황을 이뤘다. 이 프로그램에 참가한 대학만 해도 프린스턴, 스탠퍼드, MIT 등과 같은 미국의 명문대를 포함해 98개나 되고 교수들도 캘리포니아대(UCLA), 예일대, 스탠퍼드대 등에서 강의하는 우수 교수로만 선발됐다. 이러한 프로그램 덕택에 고대생들은 그동안 ‘민족고대’에서는 경험하지 못하던 새로운 국제화 물결을 체험하고 있다.
외국인 친구 사귀기
지난해 열린 국제하계대학에서 외국인 교수로부터 국제경제협상 과목을 수강한 김수광씨는 “통상협상 무대에서 직접 정부대표로 일하던 사람에게서 풍부한 협상 경험을 들을 수 있어서 좋았을 뿐 아니라 외국인 친구를 많이 사귄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국제하계대학에 참가하는 학생들은 ‘버디(buddy) 프로그램’ 등을 통해 외국인 학생에게 1 대 1 가이드를 해주면서 친분을 쌓기도 한다.
고려대가 최근 새로 준공한 외국인 기숙사인 ‘CJ 인터내셔널하우스’도 외국인 교원을 크게 늘리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고려대는 이 인터내셔널하우스 건립으로 그동안 외국 유명 석학 등을 초청하는 데 장애물로 작용하던 열악한 숙박시설의 수준을 한층 높였다. 학교 관계자의 표현에 따르면 “(무슨 학교시설이 이렇게 호화로우냐고) 욕이 튀어나올 정도로 잘 지어놓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인터내셔널하우스를 돌아보니 사치스럽다고 느낄 정도는 아니었다. 4인실이나 8인실 등의 주거 공간은 기존 기숙사 면적과 크게 다르지 않다.
대신 냉장고와 가스레인지 등 주방 시설을 ‘빌트인(built-in)’ 방식으로 갖춰 외국인 교원이 혼자서 또는 가족과 함께 체류하는 데 불편함이 전혀 없도록 배려한 점이 눈에 띈다. 회의실이나 연구실은 물론 50평이 넘는 피트니스센터와 기도실까지 갖춰 해외 유명 교수들을 초청하더라도 손색이 없을 만큼 내 집 같은 분위기를 만들어놓은 것도 장점.
고려대 기숙사를 관리하는 안암학사 관리운영팀 윤희령씨는 “이전에는 권위 있는 외국인 교원을 초빙하면 교내 외국인 숙소가 협소하고 시설이 노후해 외부에 아파트를 빌려 거주하게 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인터내셔널하우스의 준공으로 그런 불편함을 완전히 해소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고려대의 이러한 국제화 추진 실적은 교육부로부터 국제화 우수대학으로 2년 연속 선정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기업이 원하는 교과과정 마련
고려대가 글로벌 프로젝트와 함께 경쟁력 강화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최근 부쩍 강조하는 것이 바로 ‘이공계열 강화’다. 최근 고려대 공과대에는 기획담당 부학장이 신설됐다. 외부 용역과제를 수주하고 실제 산업 현장에서 필요한 연구 계획을 수립하기 위해서는 공대 내에 기획업무가 필수적이다. 이미 많은 대학이 공과대에 기획담당 부학장이나 기획실장과 같은 별도 보직을 두고 있다.
여기에 비하면 고려대에 기획담당 부학장 제도가 신설된 것은 늦어도 한참 늦은 일이다. 그러나 이는 그동안 다른 단과대에 비해 뒤져 있던 공과대의 변신을 함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산학(産學)협동에 기반해 수요자 중심의 교육과정을 만들려는 노력이 이제 속도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올해 처음 도입한 이른바 ‘주문형 석사’ 제도는 이러한 수요자 중심 교육의 일환이다. 공학 분야는 다른 전공에 비해 산학협동 연구가 이미 활발한 편이다. 교과과정 자체가 교육 수요자라고 할 수 있는 기업의 요구에 따르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고려대가 올해 도입한 ‘주문형 석사’ 제도는 기존 산학협동 모델에서 한걸음 더 나아간 것이다. 학교가 추천한 4학년 학생중 기업체가 서류심사와 면접을 통해 석사과정 입학자를 결정한 뒤 교과과정을 처음부터 기업이 설계해 학교측에 ‘주문’하는 방식이다. 물론 기업측은 선발된 학생들에게 전액 장학금과 생활비를 보조하고 석사학위 취득 후에는 취업도 보장한다.
고려대가 최근 준공한 인터내셔널하우스는 외국의 유명 석학이 머물며 강의하는 데 손색이 없을 정도로 완벽한 편의시설을 갖추었다.
고려대는 이번 학기부터 LG전자와 협정을 맺어 주문형 석사과정 학생을 선발했으며 전자 및 기계공학과 중심으로 이 제도를 시범 운영한 뒤 공대 전체에 도입한다는 방침이다. 물론 교육현장에서 기업들의 요구에 맞춰 교과과정까지 짜주는 것이 타당한지에 대한 논란은 있을 수 있다. ‘지나친 것 아니냐’는 목소리도 나올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제도야말로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 일이고 학교당국의 강력한 의지 없이는 실시하기 어려운 일인 것만은 분명하다.
이 프로그램에 참가한 기업들의 반응도 아주 좋다. LG전자 디지털미디어사업본부 김성민 부장은 “고려대 안에 ‘LG-고려대 R&D센터’를 만들어 학생들에게 연구공간을 제공하고 LG측 연구원들이 직접 강의에도 참가하는 등 공동작업이 활발해 졸업생들의 실무 능력을 크게 향상시킬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그동안 다른 대학에 비해 약세를 면치 못하던 고려대 공대가 올해 첫선을 보인 새로운 교육 프로그램 중에는 졸업생의 창업을 촉진하기 위해 마련한 ‘엔터프라이즈 프로그램’도 빼놓을 수 없다.
이 프로그램은 재학생들이 학교를 졸업하기 전에 실제로 소규모 사업을 운영해봄으로써 충분한 경험을 쌓고 나서 실제 비즈니스 현장에 투입될 수 있도록 미국 미시간 공과대학이 처음 도입한 것이다. 2003년 미국공학교육학회지인 ‘ASEE Prism’에 “기업체를 감동시키고 있다”고까지 소개된 바 있는 혁신적 공학교육 프로그램.
공대 재학생들은 이 프로그램을 통해 상품 디자인부터 현장 방문 및 마케팅까지의 전과정을 체험해봄으로써 취업 후 재교육이 필요없이 곧바로 현장에서 일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된다. 기업체는 ‘준비된’ 졸업생들을 산업 현장에 곧바로 배치할 수 있고, 학교는 졸업생들의 취업률을 높일 수 있는 효과를 얻고 있다.
삼성전자에서 4만달러의 재정 후원을 받아 시작한 올해 엔터프라이즈 프로그램에 참여한 학생은 6학점을 인정받지만, 앞으로는 3년에 걸쳐 20학점까지 인정받도록 참여 범위를 확대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있다.
공학 분야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사실 교육 분야보다 연구 분야가 더욱 중요하다. 흔히 ‘SCI’라고 불리는 ‘과학논문 인용 색인(Science Citation Index)’에 등재된 논문 수는 연구 수준을 직접적으로 나타내는 계량적 지표로 쓰이기도 한다. 3000여 종이 넘는 ‘SCI 학술지’에 얼마나 많은 논문을 게재하는지가 과학기술 분야 연구의 중요한 평가기준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국가별로 보면 영어권 국가를 제외하더라도 일본이 7만8000여 편, 독일이 7만여 편, 중국이 3만6000편 수준인 데 비해 우리는 아직 2만편을 넘지 못하고 있다.
대학들은 SCI 논문 수를 늘리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으나 국내 대학들 중 교수 1인당 SCI 논문 수를 보면 고려대는 1.37편으로 여전히 서울대나 연세대 등 경쟁 대학에 뒤져 있다.
이공계 교수 충원 급증
이에 따라 고려대는 논문 발표 수를 늘리는 것은 물론 ‘네이처’나 ‘사이언스’같은 유명 저널에 논문이 실리는 경우 공대 차원에서 해당 교수에게 인센티브를 줌으로써 ‘양보다 질’에 치중하는 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이들 저널은 다른 어떤 저널보다도 해당 분야 연구자들의 인용 빈도가 높기 때문에 논문 게재만으로도 월등한 권위를 인정받고 있다. 고려대는 이런 노력을 인정받아 얼마전 대학교육협의회가 발표한 전국 대학평가에서 기계공학과가 학문분야 1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공과대의 교수 수도 그동안 100명 수준에서 답보를 면치 못하다가 최근 2년 동안 120명을 넘어설 정도로 크게 늘었다. 자연계열의 한 교수는 “대학본부에 교수 인가를 요청하면 과거에는 반려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최근 들어서는 오히려 교수들이 학교의 재정 형편을 걱정할 정도로 학교측이 이공계열 교수 충원에 적극적”이라고 전했다.
심지어 과거의 관례를 감안해 실제 수요보다 다소 부풀린 충원 요구마저 수용하는 바람에 일부 학과에서는 요청해놓은 교수 충원을 유보하는 해프닝도 벌어지고 있다는 것.
어윤대 총장은 오는 2010년에 ‘세계 100대 대학’에 진입하겠다는 목표를 내걸고 이를 달성하는 지름길로 이공계열을 집중 육성하는 방안을 내놓았다. 이른바 ‘과학고대’ 플랜이다. 고려대는 이를 위해 생명과학 분야에 자연계열 지원의 초점을 맞춘다는 구상이다. 특히 학교행정에 목표관리제를 도입해 인센티브 시스템을 도입하면서 생명과학대와 생명환경과학대 등 일부 단과대학에서는 ‘규모의 경제 효과’를 노린 통합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고 한다.
사실 수학이나 물리학과 같은 기초학문을 가르치는 이과대에서 당장 성과를 내놓을 수 있는 ‘아이템’은 많지 않다. ‘물리학 분야에서는 100년 전에 발견한 이론이 가장 최근의 연구 성과’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이과대는 ‘학문하는 법’을 가르치는 곳이다. 산학협동 연구를 통해 실용적 성과를 낼 수 있는 공학 계열과 다른 점이 바로 이것이다.
실습 장비부터 업그레이드
그래서 고려대는 이과대의 경우 우선 각종 실험실습 관련 투자를 획기적으로 늘리는 일부터 시작했다. 자연계열 실험실습 관련 예산으로만 올해 10억원이 배정됐다. 과거에도 이 분야 교수들은 늘 예산 확충을 요구해왔지만 이공계열은 쉽게 말해 ‘찬밥’ 신세를 벗어나지 못했다. 법학과 경영학, 그리고 사회과학 위주의 학풍이 아무래도 투자 우선순위를 결정하는 데 영향을 끼친 탓이다.
그러나 최근 들어 이러한 분위기가 크게 바뀌고 있다. 현재 고려대 이공대 캠퍼스에는 대형 굴착기의 작업소리가 그치지 않고 있다. 캠퍼스 중앙에 8500평 규모의 대형 지하광장을 만들어 부족한 열람실 공간을 확보하고 각종 편익시설을 입주시키기 위한 ‘애기능 광장’ 조성공사가 한창인 것. ‘애기능’은 고려대 이공대 캠퍼스 안에 위치한 작은 언덕을 일컫는 애칭이다.
고려대는 이미 2002년, 캠퍼스 중앙에 자리잡은 대운동장을 없애고 분수광장을 만든 뒤 지하에 도서관 열람실과 각종 편익시설 및 대형 주차장을 설치해 대학 관계자들 사이에서 ‘히트상품’이라는 호평을 들은 바 있다. ‘애기능 광장’ 조성공사는 이러한 ‘지하광장 캠퍼스’의 제2탄인 셈이다.
이 이공계열 캠퍼스 중앙광장 조성공사는 최근 고려대 출신의 김승유 하나은행 이사회 의장이 80억원이라는 거액을 기부함으로써 속도를 내게 됐다. 김승유 의장은 경영학과 졸업생이지만 ‘과학고대’를 앞세운 어윤대 총장의 간곡한 요청을 받고는 기부금을 이공계열 투자에 쓰는 데 동의했다는 후문이다. 그만큼 최근 고려대가 이공계열의 경쟁력 확보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는 말.
이과대 조동현 교수(물리학)는 “과거에는 각종 외부 평가를 앞두고 있을 때만 형식적으로 투자하는 데 그쳤는데 최근 들어서는 이과대가 요구하기 전에 학교본부가 먼저 나서서 실험실습 시설 확충 등 투자사업을 추진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고 말했다.
학교측의 이런 적극적인 투자 덕에 고려대 이과대는 최근 3억원을 들여 일반 물리실험 장비를 전면 교체했다. 교양물리학 같은 경우 수강생이 줄잡아 1000명이나 되는 통에 보수비만 1년에 1억원 넘게 들어 골치를 썩이던 노후시설을 미국 유수대학에서 사용하는 최신 장비로 업그레이드하며 ‘앓던 이를 뺀’ 것이다.
수요자 중심의 교육이라는 최근 흐름은 순수학문인 물리학이나 수학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이번 학기부터 고려대 아산(峨山)이학관 4층에는 ‘물리토론방’이라는 작은 공간이 새로 생겼다.
이 토론방을 찾는 학생들은 주요 과목을 가르치는 교수나 조교를 늘 만날 수 있다. 자연스럽게 둘러앉아 수업 중 궁금한 내용이나 이해하지 못한 내용을 언제든지 물어볼 수 있는 것은 물론이다.
“학생이 찾아오기 전에…”
교수와 조교들은 시간을 정해놓고 돌아가면서 이 토론방에서 ‘당직’을 선다. 학생이 교수를 찾아오기 전에 교수가 학생의 공간 속으로 찾아가는 셈이다. 조동현 교수는 “교수들이 상담시간을 마련해놓고 있지만 아무래도 학생들이 연구실로 찾아오기를 부담스러워하는 것 같아 이런 방안을 마련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여전히 경쟁 대학에 비해 고려대 이공계열이 뛰어넘어야 할 벽은 높다. 짧은 역사와 넉넉지 못한 교수 수 등을 감안하면 법대나 경영대, 그리고 사회과학 분야에 비해 ‘저평가’되어온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이러한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고려대는 연구 경쟁력 제고에 관한 한 ‘전방위 전략’을 구사한다는 방침이다. 공과대 정진택 부학장의 설명이다.
“공대 차원에서 차세대 성장동력 사업이나 G7 프로젝트 등 대형 과제를 수행하려면 무엇보다 학과나 단과대학의 경계를 뛰어넘는 협동 연구가 중요합니다. 이를 위해서 교수님들의 연구회 활동을 적극 지원하고 ‘학제간’ 연구도 활성화하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 단과대학 차원의 이러한 경쟁력 강화 프로그램이 활성화한 데는 예산 및 학사 운영에 관한 총장의 권한을 단과대학장에게 과감하게 위임한 ‘분권형 경영’이 큰 몫을 하고 있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단과대별 목표관리제다. 어윤대 총장은 경영학과 교수답게 민간기업에서 쓰이는 목표관리제(MBO)를 도입해 각 단과대나 학부 단위로 교육, 연구, 행정, 서비스 등 대학 운영 전반에 관한 지표를 설정하고 이를 토대로 정기적으로 실적을 평가해 그 결과에 따라 차등 보상하는 제도를 도입했다.
단과대학별로 업무의 특성이 서로 다른데다 인문학이나 물리학, 수학 같은 순수학문 전공자들은 최근 수익성 위주의 대학 운영에 반감을 갖고 있는 만큼 이러한 접근을 모든 대학 구성원이 쉽게 받아들이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이제 시행 2년째에 접어드는 올해부터 단과대학들은 스스로 목표를 설정하고 목표 달성을 위해 모금 및 시설 확충, 연구의 질 제고 등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각 단과대학은 취업률과 강의평가 만족도, 학술논문 실적 등 총 8개 항목에서 공통목표를 설정해 이를 수치화한 뒤 매년 달성 여부를 평가받게 된다. 그뿐만 아니라 공통목표 외에 매년 3개의 특성화 목표를 내놓아야 한다. 예를 들어 경영대의 경우 올해 국제화 프로그램을 확대해 교환학생 수를 100명으로 늘리고 학술교류협정 대상 학교를 현재 30개에서 40개로 늘리는 등의 구체적 목표를 내놓았다.
목표관리제를 바탕으로 하는 학사운영의 인센티브 시스템은 앞으로도 계속될 전망이다. 현인택 기획예산처장은 “의과대학에서는 임상에 대한 부담 없이 연구에만 전념할 수 있는 교수를 7명이나 뽑았고 이공계열에서는 최우수 교수를 선정해 앞으로 3년 동안 매년 5000만원씩을 지원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쯤 되면 민간기업에서도 시도하기 어려운 파격적인 지원책을 고려대에서 실험하고 있는 셈이다.
매일 2억7000만원씩 모금
고려대의 이러한 ‘뱃심’은 사실 최근 가파른 상승 국면을 타고 있는 발전기금 모금액에서 나온다. 어윤대 총장은 취임 이후 2년 동안 총 1965억원의 발전기금(연구비를 제외하면 747억원)을 모으는 기염을 토했다. 어림잡아 2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2억7000만원씩을 모금했다는 이야기다. 이는 어 총장이 취임 당시 공약한 모금액을 4년 임기의 절반 동안 이미 초과달성한 것이기도 하다.
고려대는 이러한 발전기금을 기반으로 앞으로도 세계적 기준에 부합하는 경쟁력을 확보하고 글로벌 네트워크를 구축해 2010년 ‘세계 100대 대학 진입’을 목표로 국제화 전략에 박차를 가한다는 구상이다. 이두희 대외협력처장은 “두고 보라. 앞으로 2년쯤 지나면 지금까지의 졸업생과는 전혀 다른 ‘글로벌 제너레이션’이 고려대 교문을 나서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고 힘주어 말했다.
이렇듯 고려대의 과거사 100년이 ‘민족’을 매개로 한 것이었다면 앞으로 100년, 아니 1000년은 ‘세계’를 화두로 안고 갈 것임이 분명해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 대학사회에 변화의 소용돌이를 몰고 온 고려대가 주도하는 글로벌 프로젝트는 한국에서 평가받기보다는 세계에서 평가받는 것이 더욱 타당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