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5월호

미군정, 1946년 한국인 사유재산 ‘몰수’

한국 정부, 30년 뒤 ‘대일 청구권 자금’으로 보상

  • 글: 김진수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jockey@donga.com

    입력2005-04-21 17:5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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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제도 주민 임춘남씨, “올해 중 미국 정부 상대로 첫 손해배상청구소송 제기”
    • 미 군정청, 법령 제57호 공포해 한국인 소유 일본은행권 강제 예입
    • 미 군정이 몰수한 재산을 일본이 준 ‘청구권 자금’으로 보상
    • 보상받지 못한 이들의 예입금은 어디로?
    • “57호 관련 피해자 10만명 넘는다”
    • 재정경제부, “강제 예입 맞지만 정확한 사유 몰라”
    미군정, 1946년 한국인 사유재산 ‘몰수’

    미 군정법령 57호와 관련, 올해 중 미국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할 예정인 임춘남씨.

    1951년 10월20일 시작돼 13년 8개월을 끌던 지리한 한일회담은 1965년 6월22일 한일협정으로 마침내 막을 내렸다. 올해는 이 협정의 체결로 한일수교가 재개된 지 40주년이자 광복 60주년을 맞는 해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지난 1월17일 한일협정 문서가 1차 공개된 이후 이 협정을 둘러싼 재협상 및 개인 청구권 보상 요구 파문이 확산일로에 있다.

    이는 회담 당시 일본측이 일제 강점기의 한국인 피해자 실태를 조사해 개별 보상해야 한다는 의견을 낸 반면, 한국측은 배상금을 일괄적으로 받아 처리하겠다고 밝히는 등 협상 자체가 철저히 이뤄지지 않아 개인 청구권이 사실상 차단되는 결과를 낳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정부는 지난 2월 실무 차원의 ‘한일수교회담 문서공개 등 대책기획단’을, 3월엔 ‘한일수교회담 문서공개 대책 민·관공동위원회’(공동위원장·이해찬 국무총리, 이용훈 전 대법관)를 잇따라 구성해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문제에 대한 각계 의견 수렴, 개인 청구권 소멸 여부의 법적 검토 등 문서공개 이후 상황에 대한 방안을 논의중이다.

    ‘인출 불허’ ‘무이자 거치’

    이와 같은 한일협정 문서공개 파문과 관련, ‘신동아’는 한국인이 미국 정부에 대해 사유재산권 침해를 이유로 손해배상청구소송 준비에 돌입한 사실을 최초로 확인했다. 대일 민간 청구권 관련 사안으로 한국인이 미국 정부에 직접 소송을 제기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주인공은 임춘남(64·목사·경남 거제시 남부면 다대리)씨. 그가 소송하기로 결심을 굳힌 계기는 광복 직후부터 3년간 남한을 실질적으로 통치한 재(在)조선 미육군사령부 군정청이 1946년 2월21일 공포와 동시에 효력을 발생케 한 군정법령 제57호에서 비롯된다.

    총 5개조(條)로 이뤄진 이 법령은 1946년 3월2일부터 7일까지 미 군정청이 지정한 7개 금융기관(조선은행, 조선식산은행, 조흥은행, 조선상업은행, 조선신탁회사, 조선저축은행, 금융조합연합회)에 남조선 내 자연인 및 법인이 소유 또는 점유한 1원권 이상 종류의 일본은행권과 대만은행권을 예입해야 하며, 예입한 뒤엔 어떠한 경우에도 해당 화폐의 수출, 수입, 영수, 지불, 고의적 소유 혹은 점유, 교부 또는 기타 이전 등 모든 거래를 금지토록 했다.

    법령 어디에도 예입금을 상환해준다는 내용은 없다. 되레 ‘본 령에 의해 일본·대만 은행권의 예입 당좌는 인출을 불허함. 무이자 거치하며 현재 또는 장래의 대부 또는 부채의 담보로써 양도, 유통 사용치 못함’이라고 못박았다(제3조). 다시 말해 예입을 ‘강제’한 것이다. 더욱이 제4조는 ‘본 령의 조규에 위반한 자는 군정재판소 결정에 따라 처벌한다’는 벌칙까지 규정해 사실상 당시 조선인이 소지하고 있던 일본·대만 은행권을 모조리 ‘몰수’한 셈이라 할 수 있다.

    광복 이전 일본에서 사업을 해 상당액의 엔화를 벌어들여 광복과 함께 귀국한 임씨의 부친 임상봉씨와 모친 박갑수씨도 군정법령 제57호에 따라 소지하고 있던 6만5200엔을 경남 진해시(당시에는 읍 단위)의 조흥은행 지점에 예치했다.

    문제가 생긴 것은 넉 달 뒤였다. “양친은 예치한 엔화를 늦어도 3개월 안에 조선 돈(한화)으로 바꿔준다는 미 군정청측의 약속을 철석같이 믿고 가족의 목숨이나 다름없는 거액의 엔화를 예치했다”는 것이 임씨의 증언. 그러나 그 약속은 3개월이 지나도 지켜지지 않았고, 억울해하다 화병마저 얻은 임씨 모친은 치료도 제대로 받아보지 못한 채 임씨가 6세 되던 1946년 6월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보상 명목은 ‘대일 청구권 자금’

    임씨가 양친이 예치한 엔화를 원화로 돌려받은 때는 30년이 다 된, 박정희 정권 치하인 1975년. 상환받은 돈은 한화 195만6000원(1엔당 30원으로 산정)으로, 상환 명목은 엉뚱하게도 ‘대일 청구권 자금’이었다.

    임씨는 자신이 돌려받은 돈의 출처가 대일 청구권 자금이라는 사실조차 뒤늦게 알게 됐다. 그는 의문을 풀기 위해 1997∼98년 국민고충처리위원회 등 관계기관에 수차례 민원을 낸 끝에 1998년 5월 재정경제부를 통해 회신을 받았다. 곧 이어 상환받은 예입금 명세가 적힌 ‘대일 민간 청구권 보상금 지급 결정대장’ 사본(정부기록보존소가 관리)을 입수해 대장에 기록된 보상 사유가 ‘군정 57호’였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그러나 재경부의 회신엔 ‘(한일협정에 따라 한국 정부는) 민간인에 대한 보상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1966년 2월19일 청구권 자금의 운용 및 관리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고, 이 법률에 따라 제정한 대일 민간 청구권 신고에 관한 법률 및 대일 민간 청구권 보상에 관한 법률이 정하는 바에 따라 군정법령 제57호에 의한 예입금은 대일 민간 청구권 신고대상에 해당되어 1971년 5월21일부터 1972년 3월20일까지 10개월 동안 청구권 신고를 받아, 대일 민간 청구권 신고관리위원회에서 증거 및 자료의 적정성을 심사한 후 1975년 7월1일부터 1977년 6월30일까지 보상금을 지급했다’는 ‘결과적 사실’만 담겨 있을 뿐이었다.

    임씨는 이를 납득할 수 없었다. 그의 양친은 당시 남한 내에서 미국 정부를 대표하던 미 군정청의 명령에 따라 일본은행권을 미국측이 지정한 은행에 예치한 것이지, 이미 패망해 일본으로 돌아간 일본은행에 예치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군정법령 제57호와 관련한 문제는 명백히 미 군정청이 책임져야 하며, 최종적으론 남한 땅에 군정을 세운 미국이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임씨는 지난 3월에도 같은 내용의 청원서를 청와대에 냈지만, 4월6일 돌아온 재경부의 회신 역시 ‘이미 보상이 끝나 현 시점에 정부 차원의 추가 보상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임씨는 분통을 터뜨린다.

    “미 군정청의 명령으로 엔화를 예치한 지 30년이 다 된 시점에 물가상승 수준에 비해 터무니없이 적은 금액을, 그것도 대일 청구권 자금 명목으로 한국 정부가 상환했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말이 되는가. 미국 정부는 군정법령 제57호 관련자들에게 예입금에 대한 은행이자는 물론 예금주에 대한 위자료 등 정당한 손해배상이나 사과 한마디 없이 한국 정부에 문제를 떠넘겼다. 그러니 결국 이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책임과 의무는 미국 정부에 있지 않은가.”

    ‘귀속재산’과 ‘사유재산’

    주지하듯, 대일 청구권 자금은 한일협정에 따른 결과물로, 일본측이 한국 정부에 건네준 무상 3억달러, 유상 2억달러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박정희 정권은 한일협정 체결 10년 후인 1975년 7월1일부터 1977년 6월30일에 걸쳐 일제 강점기의 한국 민간인 피해자에 대한 보상 자금을 확립해 자격을 갖춘 이들에게 보상금을 지급했다.

    문제는 군정법령 제57호로 몰수한 돈이 1945년 8월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한 전범국인 일본이 남한에 남기고 간 재산을 뜻하는 이른바 ‘귀속재산’과는 성격이 다르다는 점이다. 귀속재산에 대해 규정한 것은 미 군정법령 제33호다. 미 군정청은 1945년 12월6일 남한 내 모든 공사(公私) 일본인 소유 재산을 미군정이 접수한다는 법령 제33호를 공포해 귀속재산을 군정청 소유로 두는 한편, 군정청의 허가 없이는 그 재산을 점유하거나 이전 또는 가치효용을 훼손하는 행위를 불법으로 규정한 바 있다. 군정법령 제33호에 의한 귀속재산은 1948년 수립된 대한민국 정부로 이관됐다.

    반면 미 군정청이 강제 예입을 명령한 일본은행권은 광복을 즈음해 귀국한 재일(在日) 귀향민들이 일본 현지에서 피땀 흘려 벌어들인 순수한 ‘사유재산’으로, 귀속재산과는 성격이 엄연히 다르다. 군정법령 제57호는 공포 당시 엔화를 보유하고 있던 그들에겐 ‘청천벽력’이나 다름없는 조치였던 셈이다. 이와 같은 공권력을 동원한 미국의 약소국 재산권 침해 사례는 세계적으로도 그 유례를 찾기 힘들다.

    군정법령 제57호로 인한 ‘피해자’는 임씨만이 아니다. 그러나 미군정이 남한 에서 거둬들인 일본은행권이 과연 얼마만한 액수인지, 돈을 맡긴 사람은 몇 명이나 되는지에 대한 정확한 수치는 파악되지 않고 있다. 다만 1969년 1월7일자 ‘부산일보’ 기사엔 당시 엔화를 예치한 한국인 수를 추정할 만한 단서가 밝혀져 있다.

    당시 ‘부산일보’는 군정법령 제57호에 의거해 조선은행 군산지점에 일본에서 23년간 일해 모은 한화 15만230원(圓) 상당의 일본은행권을 예치했다 돌려받지 못하고 있던 이제춘(당시 61세·부산시 수영구 민락동)씨의 사례를 소개하면서 그의 입을 빌려 “나와 같은 처지에 놓인 사람이 전국적으로 10만명이나 된다”고 보도했다. 당시 이씨는 또 “(미 군정청이 지정한 은행에 돈을) 예치하면 3개월 이내에 돌려준다는 말을 들었다”고 밝혔다.

    이씨의 이런 증언은 당시 수많은 한국인이 군정법령 제57호에 따라 일본은행권을 예치했다는 사실에 대한 방증일 것이다. ‘3개월 이내에 돌려준다’는 언급은 임씨의 양친이 한 말과 같은 것으로, 당시 미 군정청이 일본은행권 예입을 독려하기 위해 사술(詐術)을 쓴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가져볼 만하다. 앞서 언급했듯, 군정법령 제57호에는 예입금을 상환해준다는 규정이 전무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보도 당시 이미 고령이던 이씨의 생존 여부조차 불확실해 그가 실제로 보상을 받을 수 있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미군정, 1946년 한국인 사유재산 ‘몰수’

    정순조씨가 선친에게서 받은 ‘일본은행권 보관증’.

    하지만 1974년 9월24일자 ‘동아일보’에 ‘9월23일 대일 민간 청구권 대상자 500여 명이 서울 중구 태평로 신문회관에서 정부가 30배(1엔당 30원)로 정하려는 대일 민간 청구권 보상비율을 500배(1엔당 500원) 이상으로 올려달라고 정부에 요구하는 모임을 가진 뒤 재무부 앞에서 농성을 벌이다 이중 일부가 한때 경찰에 연행되기도 했다. 일부는 청와대로 가려다 서울 종로구 효자동 문화재관리국 앞길에서 경찰의 저지를 받고 되돌아갔다’는 내용의 기사가 실린 것을 보면, 당시에도 대일 민간 청구권 자금의 보상액에 대한 사회적 불만이 적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후 비슷한 사례가 전해지지 않는 것을 보면, 박정희 정권 치하의 강압적인 사회 분위기 탓에 그와 같은 불만이 전국적으로 표출되지 못하고 가라앉은 것으로 짐작해볼 수 있다.

    ‘신동아’는 수소문 끝에 또 다른 ‘피해자’ 정순조(66·여·경남 양산시 웅상읍 평산리)씨를 찾을 수 있었다. 정씨의 아버지 정기돌씨(작고)도 광복 이전 일본에서 일해서 번 일본은행권 3100엔을 군정법령 제57호에 의거해 1946년 3월6일 조선식산은행 부산지점 부산진출장소에 예치한 뒤 ‘일본은행권 보관증’을 받았다.

    정씨의 사례가 임춘남씨의 경우와 다른 것이 있다면, 예입금을 돌려받지 못했다는 점이다. 정씨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예입금을 상환해준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그때가 하필이면 대일 민간 청구권 신고 마감 하루 전이었다. 시골에 살다 보니 시간이 촉박해 신고 장소인 부산의 한 세무서에 마감 직후 도착했는데, 마감했다는 이유로 결국 신고를 받아주지 않았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이유야 어쨌든 정씨처럼 보상을 받지 못한 이들의 예입금은 대체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1948년에 정부가 수립된 대한민국 국고로 귀속된 걸까. 아니면 혹시라도 미국으로 흘러 들어간 것일까. 그도 아니면 한국 정부가 다른 목적을 위해 ‘횡령’한 것일까. 그 무엇 하나 속시원히 풀리지 않는 의문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더욱이 6·25전쟁 때 일본은행권 예치증서를 분실 또는 소실한 이가 얼마나 되는지도 알려지지 않았다.

    군정법령 57호가 SOFA와 관련?

    갖은 개인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의문을 풀 길이 없던 임춘남씨는 1997년 3월과 4월 두 차례에 걸쳐 빌 클린턴 당시 미국 대통령 앞으로 진정서를 보낸 끝에 그해 9월2일 회신을 받아냈다. 그러나 회신의 결론은 ‘임씨의 청구는 한미행정협정(한미주둔군지위협정·SOFA) 요건에 부적합하므로 기각한다’는 것이었다. 다음은 임씨가 미 육군성 주한미군 배상사무소(소장·사울 콘트레라스 소령)로부터 받은 답변서 내용 의 일부다.

    ‘귀하가 주장하는 점에 대해 법률적 탐구 및 조사를 해본 바로는 우리가 귀하의 진정 건(件)을 들어줄 수 있는 법적 근거가 전혀 없음이 밝혀졌습니다. 미 군정법령 제57호에 의거해 귀하의 양친이 한반도 내 지정 금융기관에 예치한 일본은행권을 1946년 당시의 재조선 미육군사령부 군정청 또는 미국 정부가 직·간접적으로 개입해 귀하의 양친으로부터 탈취해간 사건이 전혀 발생하지도, 할 수도 없었다고 하는 사실을 밝혀드리는 바입니다. 1948년 8월15일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한반도에서의 모든 업무가 미 군정장관의 손에서 대한민국 정부 당국자의 손으로 이관됐습니다. …(중략)… 부산지구 국가배상 심의위원회에서는 귀하의 진정 사건을 한미행정협정 제23조에 해당하는 사건으로 취급한 결과, 귀하가 제기한 진정서의 청구 건이 대한민국의 국가배상법상 요건에 부적합하여 아무런 조치 없이 동 행협(한미행정협정) 사건을 종결처리하였음을 알려드리는 바입니다. 상술한 이유로써, 본 사무소는 귀하의 청구를 기각합니다.’

    한미행정협정 제23조는 ‘청구권’에 관한 규정. 하지만 이 협정의 효력 발생 전에 발생한 청구권에는 적용하지 않도록 못박고 있다.

    그러나 임씨는 “대한민국 정부가 존재하지도 않던 1946년에 미 군정청이 공포한 법령에 의해 발생한 사건에 대한 진정을 왜 그로부터 21년이 지난 1967년 2월9일 발효된 한미행정협정에 의한 청구권과 연계시켜 기각하는가”라고 반문한다.

    임씨가 1998년 대통령비서실에 제출한 진정서에 대한 외교통상부의 회신도 신통치 않긴 마찬가지였다. 외교부의 ‘민원사항 검토결과’ 내용은 다음과 같다.

    미군정, 1946년 한국인 사유재산 ‘몰수’

    5개 조문으로만 이뤄진 미 군정법령 57호.

    ‘귀하의 진정 건은 주한미군 지위협정 제23조(청구권)와는 관계가 없으며, 또한 미 군정의 보상책임을 물을 수 있는 근거도 불명확하여 우리 부에서 미국측에 대해 취해드릴 수 있는 조치가 현재로서는 없는 것으로 사료된다. … 다만, 귀하의 예금에 대한 보상책임이 과연 미국측에 있는지, 우리 정부에 있는지를 규명하기 위해 1948년 정부수립 당시 미 군정법령 제57호와 관련한 예금지급 의무가 우리 정부로 이관됐는지 여부와, 우리 정부에 보상책임이 있는 것으로 판명될 경우 귀하께서 어떤 행정적 절차나 법적 소송에 의해 추가적으로 현실적 액수의 국가보상을 청구할 수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법무부, 재경부 등 관련기관에 협조를 요청하는 공문을 발송했다.’

    그러나 임씨는 이후 ‘보상책임’의 ‘소재’에 관한 회신을 받은 적이 없다.

    “57호 발효 사유 몰라”

    만일 임씨에게 보낸 미국측 답변이 정확하다면, 1946년 당시 미 군정청이 거둬들인 엔화는 한국 정부의 국고(國庫)에 포함됐을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1975∼77년 박정희 정권은 왜 미 군정청이 강제 예입을 명령했던 한국인 소유의 사유재산을 대일 민간 청구권 자금으로 상환한 것일까. 미 군정청으로부터 이관받은 예입금을 원화로 환산해 그냥 상환해도 되지 않았을까. 또한 이런저런 사유로 예입금을 끝내 돌려받지 못한 이들의 돈은 과연 어디로 흘러간 것일까.

    아쉽게도 이 미스터리에 대해 아는 사람을 찾는 일은 지극히 어려웠다. 한국 근현대사 연구 경험이 있는 학자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일본 미쓰비시중공업 한국인 징용자 재판지원회’ 대표인 건국대 김창록 교수(법학)는 사견임을 전제로, “추측건대 당시 일본·대만 은행권이 한국 돈과 함께 시중에 유통될 경우에 일어날 혼란을 미리 막기 위해 과도정부인 미 군정청이 그런 조치를 취한 것 아닌가 생각된다”면서도 “오래 전에 대일 민간 청구권 관련 법률에 의거해 보상이 끝난 만큼 추가 보상은 힘들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국고 업무를 맡고 있는 재경부의 입장도 별반 다르지 않다. 재경부 재정정보관리과 관계자는 “대일 민간 청구권 보상이 워낙 오래 전에 이뤄진 탓에 우리도 청와대에 낸 임씨의 민원이 외교부를 경유해 우리 부로 이첩돼온 것을 계기로 관련 기록을 추적하다 군정법령 제57호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됐다. 그런데 강제 예입 성격을 띤 것만은 분명하다”며 “임씨의 경우와 비슷하거나 아직도 일본은행권 예치증서를 보유중인 이들의 민원이 간간이 들어오고 있지만, 관련 법률이 폐지된 탓에 추가보상을 해줄 수 없다는 회신만 보내주고 있다”고 밝혔다.

    재경부 은행제도과 관계자도 “군정법령 제57호의 발효 사유는 물론 그 법령에 의거해 미 군정청이 거둬들인 일본은행권의 총액과 이를 맡긴 예금주 수가 정확히 몇 명인지에 대한 구체적 통계는 알 수 없는 형편”이라고 답했다.

    우리 정부를 통해서도 명쾌한 해결책을 얻지 못한 임씨는 현재 미국 현지 변호사를 선임해 사유재산권 침해를 이유로 미국 정부에 손해배상청구소송을 낼 준비를 서두르고 있다. 이를 위해 1997년 두 차례 도미한 데 이어 지난 3월29일∼4월4일에도 미국 LA를 방문, 한국계인 조지프 한(Joseph Hahn) 변호사와 상담한 뒤 공동 변론을 맡을 미국 변호사를 물색중이다.

    임씨는 “1946년 당시 지금의 강남지역인 서울 근교의 전답 값이 1평당 1엔 이하였으니, 6만5200엔이란 금액은 어지간한 중소기업을 설립할 만한 거액이었다. 따라서 60년이 다 된 지금까지의 물가지수 상승분, 화폐개혁의 영향, 은행이자 등을 종합적으로 감안해 미화 1250만달러(한화 130억원)의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올해 안에 낼 예정이며, 소송에 동참할 피해자들을 찾고 있다”고 밝혔다.

    “한·미 양국, 진실 낱낱이 밝혀라”

    이와 관련해 주목할 것은, 민간단체인 ‘보험소비자연맹(약칭 보소연)’이 추진하고 있는 일제 강점기 보험료 반환운동이다. 당시 일본의 전쟁자금을 조달하려 조선총독부가 한국인에게 가입을 강요했던 종신보험료에 대한 반환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것. 접수 시작 3주째인 4월11일 현재 보소연에 보험증권 등 관련 서류를 접수한 사람은 1000여 명. 광복 당시 일본 보험사에 가입한 한국인의 보험계약은 99만6000여 건, 당시 돈으로 24억500만원 규모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보소연 조연행(45) 사무국장은 “이들 보험 역시 군정법령 제57호에 의한 강제 예입금과 마찬가지로 1975∼77년 대일 민간 청구권 자금에 의거해 보상받았지만, 1엔당 30원의 비율로 터무니없는 소액이 지급된데다 보상 사실마저 몰라 시기를 놓친 이도 많다. 일제는 월 보험료로 50전 내지 1원씩 받았는데, 광복 당시의 한화 1원을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10만원에 이른다”며 “현재 보험료 반환을 위한 법률 자문을 구하고 있다”고 밝혔다.

    박정희 정권이 1975∼77년 대일 청구권 자금에 의한 민간인 보상과정에 일본 정부에게 받은 청구권 자금의 100%를 보상하지 않고, 20분의 1(5%)만 피해자들에게 지급했으며, 나머지는 포항제철 건립, 경부고속도로 건설 등 경제개발 목적으로 사용했다는 사실은 이미 밝혀졌다. 따라서 군정법령 제57호에 의한 강제예입금의 행방도 이와 연계해서 추적할 필요성은 충분해 보인다.

    그러나 한일회담 당시 국제법 전공의 서울대 교수로서 회담에 참가한 정일영(79) 전 외무부 차관은 4월11일 기자와의 통화에서 “일제 강점기의 한국인 피해자에 대한 보상은 국회에서 만든 관련 법률에 따라 이뤄졌고, 그 보상 명세가 1976년 당시 경제기획원이 작성한 ‘청구권 자금 백서’에도 나와 있는 만큼, 지금 와서 새롭게 추가보상 관련 소송을 제기하는 것은 실익이 없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하지만 임씨의 생각은 다르다. 그는 “ 선친의 재산도 되찾아야 하겠지만 무엇보다 미군정이 한국인의 사유재산을 막무가내로 ‘몰수’했다가 30년이 지난 시점에 한국 정부가 다시 예금주와 아무런 동의절차도 거치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소액 상환한 경위를 낱낱이 밝혀야 한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한 독일은 유대인에게 착취한 돈 1달러까지 배상하지 않았는가” 하고 강조한다. 다시 말하면, 군정법령 제57호의 적용을 받은 당사자로서 이후 뒤따르는 여러 의문에 대한 진실을 소상하게 알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

    이를 대략 몇 가지로 요약하면, ▲군정법령 제57호에 의한 강제 예입금의 총액과 모든 예금주에 대한 명세 ▲미군정이 한국인 보유 일본은행권을 강제 예입케 한 명확한 동기 ▲보상 대상자 중 보상받지 못한 이들의 예입금 행방 ▲예입금을 일본으로부터 받아낸 청구권 자금으로 상환하게 된 정확한 경위 ▲청구권 자금으로 상환함에 따라 당연히 지금껏 남아 있어야 할 원래 예입금의 행방 등이다.

    일그러진 과거사를 바로잡으려는 정부에 이제 뭉뚱그려진 ‘결과적 사실’만 남은 채 세세한 ‘과정’에 대한 스토리는 실종돼버린, 한·미·일 3국이 뒤얽힌 ‘미 군정법령 제57호’의 수수께끼를 풀어야 할 과제가 추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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