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사가 현금 좋아하는지, 상품권 좋아하는지 학부모 모임서 분석
- 촌지 건넨 후 ‘칭찬 스티커’ 붙는 속도 빨라져
- 강남에선 망신당하지 않으려면 한 번에 30만원 이상
- 100만원 받은 교사의 자상한 답례전화
- 1인당 80만원 ‘반비’ 걷어 교사에 상납
- 교사가 가장 싫어하는 학부모 직업은 ‘기자’
2000년 3월. 첫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직후 왠지 모르게 마음이 불안했다. 딱히 그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아이가 학교생활에 잘 적응할 수 있을까’ 하는 막연한 불안감이 엄습하자 시쳇말로 ‘아이를 맡긴 죄인’이라는 말이 실감났다. 친구와 지인들이 교사에게 촌지를 줬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학부모가 바로 서야 교육계가 맑아진다”고 극구 주장하던 터였다.
하지만 막상 학부모가 되니 사정이 달라졌다.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와 책가방을 내려놓기가 무섭게 “오늘 학교생활은 재미있었어?” 혹은 “손 들었을 때 선생님이 잘 시켜줬어?”하고 물어보았다. 행여 교사가 아이들을 편애하거나 차별하지 않을까 해서 말이다.
입학한 지 열흘쯤 지나 일부 학부모가 돈봉투를 들고 학교를 찾아가 교사를 만나고 왔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적정가’는 10만~20만원. “거절하는 내색 없이 태연하게 받더라”는 부연설명이 곁들여졌다. 마음이 더 조급해졌다. 교사가 촌지를 건넨 부모의 아이와 촌지를 안 준 부모의 아이를 차별하지 않을까 걱정이 됐다.
시집 속에 상품권 끼워 전달
그때쯤 ‘교사에게 촌지를 주는 것은 사회악’이라는 필자의 생각은 자라목처럼 쏙 들어갔다. 대신 ‘철없는 어린아이들을 가르치느라 고생하는데 약간의 촌지를 주는 것도 괜찮지 않나’ 하는 생각이 고개를 들었다. 현금을 건넬까, 백화점 상품권을 갖다줄까 고민하다가 결국 후자를 택했다. 촌지를 준다는 생각을 조금이라도 떨쳐버리기 위한 나름의 선택이었다.
그런데 달랑 봉투만 건넨다는 게 썩 내키지 않았다. 그제야 촌지를 줄 때 책과 케이크 상자가 적합한 ‘도구’임을 절감했다. 시집 한 권을 구입해 10만원권 백화점 상품권이 담긴 봉투를 넣었다. 교사와 대면했다. 아이의 학교생활에 대해 대화를 나눈 후 가방을 열었다. 순간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고 가슴이 콩닥콩닥 뛰기 시작했다. 교사에게 시집을 건넸다.
“고맙습니다.”
책갈피 사이에 촌지가 들어 있음을 미리 알고 있는 듯한 인사였다.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마치 도둑질하다 들킨 사람처럼 그곳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심장 박동은 더 빨라졌고 화끈거리는 얼굴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기어드는 목소리로 인사를 한 후 재빨리 교실 문을 나섰다. 뒤통수가 당겼고 누군가 손가락질을 하는 것만 같았다. 이후 더는 교사에게 촌지를 건네지 않았다. 주는 손과 받는 손이 모두 부끄럽게 여겨졌고, 두 번 다시 양심에 거리끼는 짓을 하고 싶지 않았다.
주려면 하루라도 빨리 줘라?
촌지에 대한 취재는 이때부터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6년여 동안 ‘생활 속에서’ 만난 수많은 학부모와 교사가 취재대상이었다. 촌지를 건네는 과정과 갈등은 필자와 비슷했다. ‘불안감’ 에 촌지를 건네는 경향은 초등학교 입학 직후에 가장 두드러졌다.
촌지를 기준으로 학부모 유형을 분류하면 크게 세 가지다. ‘당연히 준다’, ‘교사의 성향과 경제적 여건에 따라 준다’, 그리고 ‘전혀 주지 않는다’가 그것. 초등학교 학부모 중에는 둘째 유형이 가장 많았고, 첫째와 셋째 비율은 엇비슷했다. 중·고등학생을 둔 학부모는 ‘당연히 준다’는 쪽과 ‘전혀 주지 않는다’는 쪽으로 나눠졌다. 초등학교 때와는 달리 교사의 성향에 개의치 않고 소신껏 행동한다는 점이 눈에 띈다.
매년 신학기가 되면 학부모는 촉각을 곤두세운다. 담임교사의 성향과 촌지수수 ‘전력’을 파악하기 위해 학부모 모임이 잦아지는 것도 이때다. 인맥을 총동원해 교사와 관련된 모든 정보를 수집하고 이를 바탕으로 교사의 성향을 분석한다. 촌지를 밝히는지 그렇지 않은지, 가정형편은 어떤지, 여교사의 경우 남편의 직업까지 도마에 오른다. 백화점 상품권과 현금 중 어느 것을 선호하는지와 같은 사소한 정보도 교환한다.
지난 3월초, 경기도 분당의 전모(37)씨는 신학기가 시작되자마자 초등학교 2학년 아이의 담임에게 20만원을 건넸다. 지난해 촌지의 ‘위력’을 경험한 후 주려면 하루라도 빨리 주는 게 좋다고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다.
“지난해 첫아이가 입학한 뒤 소화불량에 걸릴 만큼 신경이 쓰였다. 아이가 소심한 구석이 있어서 불안감은 가중됐다. 고민 끝에 3월말 봉투를 내밀었다. 그후부터 다른 아이에 비해 ‘칭찬 스티커’ 붙는 속도가 빨랐다. 학부모가 참여하는 공개수업 때는 우리 아이를 특별히 지명해 발표를 하도록 했다. 그래서 스승의 날에 15만원대 외제 화장품을, 2학기 초엔 1학기 때와 마찬가지로 20만원을 또 건넸다.”
전씨는 “올해 스승의 날에는 선물이 아닌 현금으로 주겠다”면서 “교사가 주부라 실생활에서 선물보다 현금을 더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아서”라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백화점 상품권에 배추김치 한 통
촌지가 도덕적으로 지탄받는 행동이라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촌지가 근절되지 않는 것은 ‘내 아이만을 특별히 잘 봐주기’를 바라는 학부모와 이를 거절하지 않는 교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물론 상당수 교사는 사명감을 갖고 참교육을 실천하기 위해 애쓰고 있지만.
촌지수수의 가장 큰 병폐는 교사가 알게 모르게 촌지를 건넨 학부모의 아이에 대해 ‘특별대우’를 한다는 데 있다. 학부모가 봉투를 준비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촌지 액수는 학부모의 경제력뿐만 아니라 지역에 따라서도 차이가 있다. 초등학교의 경우 수도권과 지방은 10만~20만원, 서울은 20만~30만원이 주를 이뤘다. 이 금액은 6년 전과 비교할 때 큰 차이가 없다.
서울 강남의 손모(41)씨는 “‘교육특별구’라 불리는 우리 동네 초등학교는 ‘망신당하지’ 않는 수준이 30만원”이라면서 “상당수 학부모가 습관처럼 촌지를 건넨다”고 밝혔다.
“한국에서 교육열이 가장 높기로 소문난 이곳은 촌지 액수가 다른 지역에 비해 많은 편이다. 학부모는 촌지를 아예 주지 않거나 ‘확실히’ 주는 쪽으로 양분된다. 전자는 소신이 뚜렷하거나 돈이 없어서 못하는 경우다. 남편의 월급으로 사교육비 대기도 벅차기 때문이다. 반면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사업가와 전문직 종사자는 후자에 속한다. 아주 적게 하는 경우가 30만원이고 50만원이 보편적이다. 100만원을 건넨 학부모도 있다. 100만원을 받은 어떤 교사는 “아버님 사업이 잘 되기 바란다”는 답례 전화까지 했다고 한다. 촌지는 3월 신학기와 스승의 날, 2학기 초, 그리고 이듬해 설날 등 1년에 네 차례 하는 것이 ‘정석’이다.”
지난 3월 중순부터 4월 초에 걸쳐 만난 강남지역 초등학교 학부모 16명의 경험담도 손씨의 얘기와 비슷했다. ‘정석’대로 촌지를 건네는 게 부담스러우면 스승의 날과 2학기 초, 두 차례만 건넨다고 한다.
물론 예외는 있다. 손씨 자녀가 다니는 학교의 학부모인 김모(35)씨는 그 지역의 ‘적정금액’이 아닌 줄 알면서도 10만원권 백화점 상품권을 준비했다. 부족한 금액을 무엇으로 채울까 고민하던 김씨는 정성껏 담근 배추김치 1통을 함께 건넸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자식을 학교에 보내는 부모로서 이 땅의 열악한 교육현실에 분노를 느끼지 않은 사람은 드물 것이다. 교사와 학부모의 인격적 만남을 가로막는 잘못된 교육풍토의 주범은 촌지다. 촌지는 학부모와 교사의 관계를 어렵게 만든다. 학부모가 교사를 만나고 싶어도 경제적인 여건이 뒷받침되지 않거나 양심에 거리껴 촌지를 준비하지 못하면 학교 방문을 꺼리게 된다. 이런 현상이 되풀이되다 보면 학부모와 교사의 의사소통은 단절되고 결국 그 피해는 학생에게 돌아간다.
“이번처럼 수준 낮은 반은 처음”
한국의 교사와 학부모는 평등관계가 아니다. 그들은 ‘강자’와 ‘약자’다. 촌지는 약자인 학부모가 강자인 교사에게 건넨다는 점에서 뇌물과 비슷한 성격을 띤다.
참교육을 위한 전국학부모회(www.
hakbumo.or.kr·이하 참교육학부모회) 상담실에는 ‘약자’들의 고민이 수북이 쌓여 있다. 다음은 지난 3월25일 ‘4학년 학부모’라는 닉네임으로 올린 고민 중 일부다.
“하루는 아이의 귀가가 늦어 교실로 찾아갔더니 담임선생님이 ‘아이의 수업태도가 안 좋고 편식을 한다. 그래서 야단을 많이 쳤다. 이번처럼 수준이 낮은 반은 처음 봤다. 학부모들 호응도 없고. 다른 반은 엄마들이 화분도 사오고, (교사들을 위한) 간식도 돌리고 난리인데 우리 반에는 지금까지 화분을 사오거나 간식 사오는 엄마가 한 명도 없다’고 했다. (교사가) 간접적으로 뭘 바라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에 교실로 큰 화분을 보냈는데, 영 기분이 안 좋다. 혹시 아이가 교사에게 불이익을 당하거나 야단맞지 않을까 싶어 화분을 보냈지만 학부모 총회에 가는 것이 두렵고 솔직히 담임선생님과의 인사도 피하고 싶다.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
이 학부모는 “초등학교 시절 교사의 칭찬 한 마디가 아이의 인생을 바꿀 수도 있다”며 안타까운 심경을 토로했다.
학교를 사랑하는 학부모모임 회원들이 ‘촌지 없는 스승의 날’ 선포식을 하며 촌지 화형식을 갖고 있다.
“작은애가 초등학교 3학년이다. 많은 초등학교 선생님을 만나고 겪으면서 느끼는 점은 분명히 촌지를 바라는 선생님이 지금도 수없이 존재하고, 거기에 부합하는 엄마가 많이 있다는 것이다. 세상이 바뀌어서 그런 교사가 줄어들었다고들 하지만 (나는) 안 믿는다. 지난주 학부모 상담주간이라 학교에 갔는데 엄마들이 차에서 내리면서 쇼핑백 하나씩을 들고 교실로 들어갔다.
촌지가 꼭 돈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선물 중에도 뇌물에 가까운 게 많다. 학년 초에 연례행사로 열리는 학부모 총회에서 선생님이 왜 엄마들에게 촌지와 뇌물에 관한 이야기를 언급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매 학년 초마다 언론에서 촌지 문제를 언급해도 왜 교사들은 구경만 하고 있는 것일까. 교사가 (먼저 나서서) ‘촌지를 주고자 하는 부모 심정은 이해하지만 절대로 촌지나 선물은 받지 않겠다’고 왜 말하지 못하는 걸까. 내가 만난(내 아이를 가르친) 선생님은 한번도 그런 소리를 안 했다. 촌지 문제가 불거져 나오면 그제야 ‘엄마들이 잘못된 행동을 해서 교사들이 억울하게 불이익을 당한다’고 얘기한다. 하루빨리 대한민국 초등학교 학부모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은 심정이다.”
교육 비리의 주범인 촌지를 사라지게 할 근본적인 방법은 없을까. 참교육학부모회 박경양 회장은 이렇게 말한다.
안 받고 차별하지 않는 것이 해결책
“교사들은 촌지와 관련된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촌지 제공자인 학부모의 이기심이 원인’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그것은 논리적으로 잘못됐다. 주는 사람이 있어도 받는 사람이 거절하면 문제는 간단히 해결된다. 교사가 촌지를 안 받겠다는 의사를 강력히 피력하고 학생들을 차별 대우하지 않으면 촌지는 사라지게 되어 있다. 촌지는 주는 사람이 효용성이 있다고 판단하니까 주는 것이다. 촌지를 줘봐야 별 소용이 없으면 교사에게 촌지를 건넬 학부모가 몇이나 되겠냐”고 반문했다.
2001년 3월초. 인천 부평구 B초등학교 1학년 담임 임모 교사는 각 가정에 가정통신문을 보냈다. 요지는 이랬다.
“아이를 학교에 보내놓고 여러 가지로 신경이 쓰일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중략) 저는 촌지는 물론이고 스승의 날 선물도 받지 않을 것입니다. 1년 동안 모든 아이에게 따뜻한 사랑과 관심을 골고루 쏟고자 노력하겠습니다.”
교사의 단호한 의지가 담겨 있는 편지였다. 편지를 받은 직후 학부모의 반응은 각양각색이었다. “공개적으로 촌지를 안 받겠다고 밝힌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는 의견이 압도적이었지만, 반신반의하며 “굳이 그럴 필요까지 있냐”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필자도 이 편지를 받은 학부모 중 한 명으로, 1년 동안 학부모와 교사와의 관계 변화를 면밀히 관찰했다.
학기 초, 몇몇 학부모가 촌지를 들고 임 교사를 찾아갔다가 그 자리에서 되돌려 받았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설마 했는데 진짜로 안 받더라”는 정보가 순식간에 학부모들에게 전달됐다. 이쯤 되자 촌지를 줄까 말까 고민하던 일부 학부모들도 ‘주지 않겠다’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촌지를 안 받는 것이 확인된 이상 굳이 망신살 뻗치는 행동을 할 이유가 없다는 게 학부모들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그해 스승의 날. 여러 학부모가 임 교사에게 선물을 보냈지만 ‘마음만 받겠습니다’라고 적힌 쪽지와 함께 선물이 되돌아왔다. 그후 학부모들은 촌지와 선물 문제로 더는 고민하지 않았다. 그제서야 ‘줘도 받지 않는다’는 확실한 결론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촌지에 대한 부담이 사라지자 학교를 찾는 학부모의 발걸음이 가벼워졌고, 교사와 자녀교육에 대해 상담하는 학부모가 늘어났다. 자녀에 대해 교사가 좋지 않은 평가를 하면 대개는 ‘혹시 촌지를 바라고 지적하는 것은 아닐까’ 하고 교사의 의중을 살피게 된다.
그러나 촌지수수가 사라지자 사정이 달라졌다. 교사로부터 “아이가 집중력이 떨어진다거나 산만하다”는 지적을 받아도 액면 그대로 받아들였다. 학부모는 더 이상 교사를 색안경 끼고 바라보지 않았고, 오히려 교사와 함께 가정교육과 학교교육을 연계할 방안을 모색했다.
촌지수수가 사라지자 교사에 대한 학부모의 신뢰도가 높아졌다. 학부모는 임 교사의 교육관에 존경을 표했다. 1년 동안 교사와 학부모는 촌지 없는 ‘건강한’ 관계를 유지했다. 필자는 이러한 과정을 지켜보면서 촌지 없는 교육풍토가 자리잡으려면 무엇보다도 교사의 의지와 소신이 중요하다는 것을 절감했다.
교사가 촌지를 거절한 또 하나의 사례. 지난해 추석, 학부모 정모(41)씨는 전남 목포시 상동 H초등학교 정모 교사의 집에 택배회사를 통해 갈비세트를 보냈다. 그러나 ‘수취인 거부’로 선물이 되돌아왔다. 정씨는 “추석 연휴 직후 ‘선물을 정중히 거절한다’는 내용이 담긴 편지를 전달받았다”면서 “갈비를 되돌려 받고 몹시 민망했지만 교사에 대한 신뢰가 깊어지는 계기가 됐다”고 털어놓았다.
촌지는 일종의 마약과도 같다. 달콤한 맛에 길들면 부도덕한 행위임을 알면서도 유혹의 손길을 쉽게 뿌리치지 못한다. 평소 필자와 친분이 있는 한 고등학교 교사가 “학부모의 직업 중 교사가 가장 싫어하는 업종이 무엇인지 아냐”고 물었다. 정답은 ‘기자’였다. 이유는 “어쨌든 신경이 쓰이기 때문”이라고. 거기엔 만에 하나 잘못 걸리면 ‘끝장’이라는 불안감도 작용한다고 했다. 이 교사는 교사와 기자 학부모의 묘한 관계를 이렇게 설명했다.
“경기 고양시 일산 신도시는 기자가 가장 많이 거주하는 지역 중 하나다. 중앙일간지 3사를 비롯한 여러 신문사와 MBC, KBS, SBS 등 방송국들이 일산과 가까운 곳에 자리잡고 있어 기자와 방송관계자의 거주 비율이 타 지역보다 매우 높다. 이곳 교사들 중 일부는 처음에는 기자 학부모를 경계하는 눈치였지만 일단 이들이 촌지를 가져오자 더 당당하게 받았다. 교사가 기자 학부모로부터 촌지를 받는 순간 알 수 없는 경계심은 눈 녹듯이 사라진다.”
취재 중에 만난 대다수의 학부모는 교사가 공정하고 공평하게 아이를 대하고 불이익이 없다면 촌지를 주지 않겠다고 답했다. ‘내 아이에게 득 될 게 없으면 굳이 줄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다.
지난 3월29일 서울 동작구에 있는 한 초등학교의 5학년 교사라는 사람이 인터넷 포털사이트에 ‘촌지를 주고받는 것은 당연하다’는 글을 올려 파문이 일었다.
“촌지 주는 거 억울하면 조기유학 보내면 된다. 학교 청소 때, 스승의 날, 요즘 같은 신학기에 알아서 (촌지를) 챙겨 오면서 왜 교사 욕을 하느냐. 초등학교 교사는 그 월급 받고는 못하는 직업이다. 요즘 신학기라 학부모들이 상품권을 가장 많이 준비하고 있다. 촌지가 없다는 말은 안 하겠다.”
이 글의 조회횟수는 순식간에 3000회를 넘어섰고 학부모들의 분노에 찬 성토가 이어졌다. 일부 학부모는 서울 동작구 교육청에 이 교사의 신원을 파악해 징계하라는 주문을 쏟아냈고, 동작구 교육청은 이틀 뒤인 3월31일 노량진경찰서에 이 글을 쓴 사람의 인터넷 주소 추적을 요청했다.
교육계는 숨죽여 결과를 예의주시했다. 만약 현직교사로 밝혀질 경우 불어 닥칠 사회적인 파장은 불을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경찰 조사결과 이 글을 쓴 주인공은 26세의 무직 여성으로 “중학교 재학 당시 촌지 때문에 불이익을 받아 결석까지 하는 등 평소 촌지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어” 이런 글을 올린 것으로 밝혀졌다.
‘가짜 교사’라는 소식이 전해지자 교육계와 관계 당국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여전히 긴장하는 분위기다. 당장의 회오리는 피했지만, 촌지 문제는 언제 어디서 터질지 모를 ‘시한폭탄’이기 때문이다.
1인당 200만원 ‘반비’ 요청
학부모가 촌지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워지는 시기는 자녀가 중학교에 들어간 이후다. 초등학교 때와는 달리 담임교사가 성적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부분이 상대적으로 적은 것이 그 원인 중 하나다. 학부모가 교사에게 잘 보이기 위해 애쓰기보다는 자녀를 공부에 전념하도록 만드는 것이 낫다고 판단하는 것도 이때다. 즉 촌지에 쓸 돈을 사교육에 쏟아붓는 것이다. 통계에 따르면 중·고교 시절의 촌지는 주로 반장, 부반장 등 학급 임원을 맡은 학부모가 ‘인사치레’로 하는 경우가 많고, 금액은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20만~30만원이 보편적이다.
일부 고등학교의 경우 촌지보다 학급 임원의 학부모가 나서서 걷는 ‘반비’의 폐해가 심각했다. 지난 3월말. 서울의 한 고등학교 3학년 반 모임에 15명의 학부모가 참석했다.
이들은 1인당 80만원의 반비를 모금하기로 결정했다. 참석인원 중 절반에 가까운 8명이 즉석에서 회비를 납부했다. 15명에게서 걷은 반비 총액은 1200만원. 이중 일부는 담임교사에게 ‘상납’하고 일부는 야간자율 학습시간 등에 간식비로 사용된다고 한다.
참교육학부모회 박범이 위원장은 “최근 서울의 한 고등학교 3학년 학부모가 ‘1인당 200만원의 반비를 납부하라는 통지를 받았다’면서 감사를 요청했다”고 밝혔다. 박 위원장은 “반비는 주로 매월 또는 분기별로 교사에게 촌지를 지급하는 데 사용된다”면서 “학생들을 위해 사용하는 돈보다 교사에게 건네는 촌지가 훨씬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 주장했다.
학교를 사랑하는 학부모모임 회원들이 ‘촌지 없는 스승의 날’ 선포식을 하며 촌지 화형식을 갖고 있다.
교사가 학부모 눈치 보는 일본
2000년부터 3년 동안 일본에서 살다 온 김숙(45·서울 중랑구)씨. 일본 시부야구 요요기 초등학교에 남매(현재 초5·중1)를 보낸 그는 일본의 교육풍토에서 한국이 배워야 할 점이 많다고 조언했다.
“우리나라는 학부모가 교사의 눈치를 보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일본은 교사가 아이에게 부당한 대우를 하거나 교사의 자질이 부족하다고 판단되면 학부모가 교육위원회(교육청)에 고발한다. 교사와는 1년에 두 번 공동면담을 하도록 돼 있다.
모든 학부모는 우리의 학부모회와 비슷한 성격인 PTA(Parents and Teachers Association) 회원으로 가입해야 한다. 회비는 한 계좌에 월 500엔이다. 형편에 따라 두 계좌를 신청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1계좌의 회비를 낸다. 회비의 사용처는 철저히 아이와 학부모 중심으로 사용된다. 우리나라와는 달리 교사의 회식비나 체육대회 후 목욕비 등에 지원하는 일은 없다. 사용처는 학부모에게 공개하도록 돼 있다.”
김씨는 “우리의 학부모회와 지역사회 어머니회, 녹색어머니회 등은 폐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불법 찬조금을 모금하는 ‘공식 창구’ 구실을 하기 때문이라는 것. 앞서 언급한 반비는 불법찬조금의 전형에 속한다.
우리나라도 일본과 마찬가지로 각 지역 교육청별 인터넷사이트에 ‘클린센터’를 마련해 운영하고 있다. 하지만 무용지물에 가깝다. 서울시 교육청 관계자는 “이용자가 거의 없다”면서 “클린센터를 잘 활용하면 우리나라 교육계가 좋아질 것”이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대부분의 학부모는 교육부문의 부패와 비리가 심각하다고 느끼고 있지만, 자녀가 당할 불이익 때문에 시정 요구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3월30일 참교육학부모회가 부패방지위원회에 제출한 연구용역 보고서 ‘교육분야 부패방지를 위한 학부모 실천방안 연구’에 따르면 학부모 10명 중 7명은 교육비리가 심각하다고 인식하고 있다.
“시정 요구해도 은폐·축소”
참교육학부모회는 지난해 11월말 전국 학부모 342명을 상대로 교육부패 정도에 대한 인식과 교육부패의 원인, 교육부패 시정 경험과 반응에 대한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조사결과, 우리 사회의 일반적인 수준에 비해 교육부문의 부패·비리가 많다고 생각하냐는 질문에 71.9%의 학부모들이 ‘그렇다’(매우 많다 22.8%, 많은 편 49.1%)고 답했다. ‘매우 적다’고 응답한 학부모는 4.7%에 그쳤다.
학부모들은 적극적으로 비리 시정을 요구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로 ‘자녀에게 불이익을 줄 가능성이 있다’(63.2%·복수응답)를 꼽았다. ‘상급기관도 같은 편이라서 시정을 요구해봐야 별 성과가 없을 것’이라는 판단(61.4%)과 ‘시정을 요구해도 고쳐지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50.3%)도 학부모들이 시정요구를 기피하는 주요 원인이었다.
비리·부패에 대해 시정을 요구한 적이 있는지에 대한 설문에는 응답자의 42.3%가 ‘그렇다’고 답했지만, 이들 가운데 11.7%만이 ‘만족할 만한 응답을 얻었다’고 답했다. 반면 ‘해결됐지만 불이익을 당했다’는 응답이 30%, ‘해결되지 않고 불이익만 받았다’는 응답이 58.3%를 차지했다.
시정요구에 대한 학교장, 교사 및 교육공무원의 태도에 대한 질문에는 대체로 ‘은폐하거나 축소를 시도했다’(52.9%), ‘소극적으로 대응했다’(27.9%)고 답해 불만을 드러냈다. ‘적극적이고 친절하게 해결을 위해 노력했다’는 응답은 4.4%에 지나지 않았다.
부패와 비리가 근절되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는 ‘행정의 내용이 공개되지 않기 때문’이라는 응답이 가장 많았으며(50.9%), ‘감사체계에 문제가 있다는 응답’(49.7%)과 ‘처벌이 약해서 그렇다’는 응답(39.8%)이 뒤를 이었다. 학부모들은 부패를 막기 위한 방법으로 학교, 교육청 행정의 공개(63.7%), 처벌 강화(63.2%), 내부고발자의 신분보장(60.8%) 등을 꼽았다.
바야흐로 촌지의 계절이다. ‘스승의 날’ 전후인 3~5월은 1년 중 가장 많은 학부모가 교사에게 촌지를 건네는 시기로 꼽힌다. 서울시 교육청은 4월1일 교사의 촌지수수와 불법 찬조금 모금 등 교육 부조리에 대해 특별 감찰을 벌인다고 밝혔다.
서울시 교육청은 공직기강을 확립하기 위해 본청과 지역교육청 직원 3명으로 구성된 특별공직감찰반 11개조를 편성해 4월4일부터 16일까지 촌지수수와 불법 찬조금 모금, 계약 관련 각종 금품수수, 급식 비리 등에 대해 단속을 벌일 계획이다. 특히 지역 교육청 감찰반과 일선 학교 교사들의 유착을 막기 위해 관할 지역이 아닌 다른 지역 학교로 감찰반을 보내기로 했다. 중점 감찰대상은 강남·강동·강서·노원·도봉·서초·양천구 지역의 200여 개 초·중·고교다.
서울시 교육청 관계자는 “비리 혐의자는 사법기관에 고발하고 징계하는 등 강력하게 대응하기로 했다”며 “학부모들도 부조리한 일을 당하거나 발견하면 곧바로 지역 교육청에 신고해 주기를 바란다”고 당부했다.
4월8일, “감찰 실시 이후 적발된 사례가 있냐”는 질문에 서울시 교육청 관계자는 “아직 감찰이 진행 중이라 어떤 대답도 할 수 없다”면서 “감찰 방법과 내용은 극비사항이다”고 답했다.
필자가 학부모가 된 6년 전부터 관심 있게 지켜본 교육계. 여전히 촌지 관행은 사라지지 않았고 학부모위원회, 지역사회어머니회 등을 통한 불법찬조금 모금 또한 각 학교에서 공공연히 이뤄지고 있다. 서울시 교육청 관계자에게 “이번 취재를 통해 촌지를 건넨 부모를 여럿 만났으며 불법찬조금 또한 대부분의 학교에서 오래 전부터 걷고 있다”고 지적하자 “이번 감찰을 통해 철저히 조사하겠다”는 ‘모범답안’을 내놓았다.
생색내기용 정책이나 조사를 위한 조사에 학부모는 신물이 나 있다. 본보기용으로 몇 명 사법처리를 강행하는 연례행사는 이제 막을 내려야 한다. 이번 기회에 촌지수수 감찰과정과 방법은 낱낱이 공개돼야 한다. 또한 교사와 학부모는 건전한 평등관계 회복을 위해 서로 노력하고 교육현장에 곰팡이가 피지 않도록 애써야 한다. 교육이 서야 나라가 바로 서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