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5월호

죽음을 가린 의식의 장막을 거둬라! ‘고통과의 화해’

  • 글: 장석주 시인·문학평론가 kafkajs@hanmail.net

    입력2005-04-26 09:51: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죽음을 가린 의식의 장막을 거둬라! ‘고통과의 화해’

    ‘고통과의 화해’<br>스펜서 내들러 지음/ 이충웅 옮김/이제이북스

    사람들은 죽음을 혐오하고 거부한다. 그러나 놀랍게도 세포는 죽음을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받아들인다. 죽음을 거부하는 것은 우리의 의식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문명의 훈육이 죽음을 부자연스러운 것, 더러운 것, 나쁜 것이라고 우리의 의식 속에 새겨놓았다.

    뜻하지 않게 문명으로부터 악덕이라는 평판을 얻었지만 그렇다고 죽음이 흘러가는 삶의 최종 목적지라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죽음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런 직관을 강화하고 고양할 때 삶을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를 만들 수 있다. 노화와 질병, 죽음에 대한 필요 이상의 공포심은 죽음을 죽음으로 응시하지 못하게 하며 실존의 불가피한 사건인 죽음을 실제보다 기이한 것으로 바라보게 한다. 오랫동안 질병과 싸우며 죽어가는 사람들을 관찰한 외과의사 스펜서 내들러는 이렇게 말한다.

    “‘노화’라는 말은 죽어간다는 것의 완곡어법이다. 몸의 쇠락이 지극히 시각적이고, 지각 가능한 방식으로 어떻게 몸이 종언을 고하기 시작하는지 가르쳐준다 해도 우리는 그 가르침을 부인하려 든다. 우리는 외모를 가꾸는 데 해마다 수십억 달러의 돈을 쓴다. 희끗희끗 머리를 염색하고 벗겨지는 머리를 가발로 장식하며 주름의 골을 채우고 얼굴 피부를 끌어당기며 지방을 흡입한다. 몸의 쇠퇴가 직접적으로 삶을 위협하기 전까지 줄곧 우리는 안절부절못하며 노화의 가시적인 유언을 화학적 혹은 외과적으로 바꾸면서 결코 죽음을 응시하지 못한다. 죽음으로부터 멀어지려 겉치장에 몰두하는 것은 죽음을 실제보다 더 기이한 것으로 만든다. 그것은 극도의 고통과 굴욕에 대한 두려움으로 죽음을 신화의 장막 속에 감추는 일이다.”

    죽음을 자연스럽게 맞는 세포

    이 책의 부제는 ‘어느 외과 병리학자의 눈에 비친 일상의 영웅들’이다. 사람은 몸의 존재이고 몸은 세포로 이뤄져 있다. 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세포의 존재로서 질병, 노화, 죽음을 겪으며 살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몸은 일차적으로 생식 세포의 DNA를 다음 세대에 전달하기 위한 도구다. 그러나 사람은 세포 이상의 존재, 생각의 파동을 가진 존재다. 그렇기에 우리가 늙고 병들고 죽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라 해도 질병, 노화, 죽음에 대해 여전히 의문을 갖게 되고 ‘생명의 진정한 의미가 어디에 있는가’ 하는 형이상학적인 물음을 자신에게 던지는 것이다.



    노화의 가시적인 유언을 화학적 혹은 외과적으로 바꾸려는 노력은 안쓰럽고 가련한 짓이다. 이는 아름다움의 규준이 노화나 죽음과 멀리 떨어진 것에서 결정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한 사회가 규정하는 아름다움의 규준에 도달하려는 노력이 무모한 이유는 그것이 곧 생물학적인 자연의 합법칙성에 대한 반발이며 피할 수 없는 죽음에 대한 저항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암과의 동행’ 편에서 한 유방암 환자와 함께 환자의 세포조직을 현미경으로 관찰한 경험을 털어놓는다. 분홍빛 수국처럼 보이는 소엽, 젖을 유두까지 운반하는 가지처럼 뻗어나가는 관들, 소엽과 관을 둘러싼 파란색 핵과 세포질, 분리된 핵막을 바라보며 환자는 감탄한다.

    “세상에! 저것 좀 보세요. 젖을 나르는 연못들, 호수들, 강들, 그리고 강어귀. 모두 굉장히 평화로워 보여요.”

    정상 세포가 이뤄낸 평화스런 풍경 옆에 악성 종양의 흐트러진 풍경이 보인다. 환자와 함께 현미경으로 병소(病巢)를 관찰하는 저자의 모습은 잔잔한 감동을 준다. 환자를 단순한 치료의 대상으로만 보는 게 아니라 영혼으로 소통해야 할 존재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질병과 죽음에 대한 새로운 통찰

    미시적인 것을 다루는 전문가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은 미시적인 것에 매몰되어 더 큰 것을 놓친다는 점이다. 하지만 내들러는 우리가 평생을 살며 배워야 할 삶의 신비와 이치를 세포 차원의 것으로 분해하는 우를 범하지 않는다. 내들러는 단순히 세포와 세포가 겪는 이상 변이와 질병, 죽음에 관한 임상적 관찰과 치유만을 다루지 않는다. 질병과 죽음에 침윤된 자들이 겪는 고통을, 그 고통과 화해하면서 삶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담담하게 기술한다. 질병과 죽음은 자신의 삶이 그 누군가의 삶보다 의미가 없을까 두려워하면서 삶을 소모하는 비자각적 타성과 인습을 벗어나 삶을 새롭게 바라보도록 이끄는 계기다. 질병과 죽음의 의미에 대한 새로운 통찰은 우리를 불필요한 두려움에서 해방시키고 고통과 화해하는 지혜로 이끈다.

    의학이 발달해도 몸은 여전히 불명료한 영역으로 남아 있다. 육체는 불명료한 영혼인 것이다. 이를테면 고장 나고 불필요한 세포들은 세포 자체의 자살 프로그램으로 스스로 죽게 되어 있다. 그런데 어떤 세포들은 자살 프로그램을 무력화시키며 계속 증식하며 옮겨다닌다. 이것이 암세포인데, 현대의학은 스스로 죽지 않는 암세포에 대해 부분적으로만 알고 있을 뿐이다. 우리가 잘 알지 못한다고 해서 암이 우리를 피해가는 법은 없다.

    누구에게나 병이 찾아오고 늙어가며 결국 죽는다. 그 과정에서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기도 한다. 고통은 부처의 보리수와 같이 깨달음이란 선물을 주기도 하지만 대개의 경우 고통은 뇌수를 쥐어짜고 영혼을 비튼다. 질병과 노화에 직면할 때 절망에 떨며 그 현상을 애써 바로 보려 하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다.

    활력을 잃은 환자들, 질병이 초래한 고통에 비명을 지르는 환자들, 죽음이 드리우는 그림자로 공포에 질린 환자들…. 의사는 그들을 따뜻하게 도와야 한다. 그것은 의사의 숭고한 도덕적 책무다. 훌륭한 의사는 환자가 고통과 화해하며 품위 있게 죽음을 맞도록 돕는다. 내들러는 암, 비만, 알츠하이머병에 걸린 사람들의 실제 경험을 토대로 뇌세포와 심장, 죽어가는 것에 대한 따뜻한 숙고를 보여준다. 질병이란 일상에서 벌어지는 ‘기막힌 사건’의 한 부분이고, 우리 삶은 그 사건들 속에서 소진되는 것이다. 내들러는 질병에 걸린 사람들이 겪는 고통과 불안에 대해, 그리고 그들이 어떻게 고통과 화해하며 그것을 영웅적으로 극복하는지에 대해 말한다. 아울러 의료화된 죽음과 달리 평온하고 사려 깊게 수용되는 훌륭한 죽음을 예찬한다.

    죽음을 보면서 삶을 배운다

    내들러는 세포의 마지막 순간은 인간의 죽음만큼이나 불가사의하다고 말한다. 내들러의 임상적 경험과 그것에 대한 인문학적 숙고를 통해 우리는 질병과 죽음에 대해, 나아가 삶 전체에 대해 새롭게 인식할 수 있게 된다.

    내들러는 죽음을 불명료한 신화의 장막 속에 가둬놓을 게 아니라 그것을 투명하게 바라봐야 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죽음을 응시함으로써 삶에 대해 더 잘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가 “죽는 것에 대해 가르치는 사람은 사는 것에 대해 가르치는 것”이라는 몽테뉴의 말을 인용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삶이란 저마다 작가가 되어 쓰는 자기의 이야기다. 죽음을 받아들일 때 삶은 더욱 투명해진다. 그렇기에 자기의 이야기를 더 잘 쓰기 위해 우리는 죽음이 불러일으키는 공포와 자기연민을 넘어서야 한다.

    인간의 역사는 고통의 역사이기도 하다. 고통은 신체적인 것과 심리적인 것을 포괄한다. 신체는 통증의 작용점이지만, 신경전달물질에 의해 전달된 고통의 메시지를 해독하고 인지하는 것은 뇌다. 현대문명이 고통을 없애고 내면화시키는 무통문명(無痛文明)을 지향하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일례로 제왕절개술은 출산에 따르는 산통을 배제한다. 무통문명은 노화와 죽음까지 관리하고 통제한다. 고통을 면제하는 대신에 안전, 쾌락, 안락함, 자극을 준다고 한다.

    대개의 사람은 고통을 피하려 들지만, 오히려 자청하는 수행자들도 있다. 그들은 고통을 받아들이고 넘어선다. 또 극단적으로 고통을 피하고 안전과 쾌락만을 추구하는 문명은 고통을 통해 얻는 생명의 고양감과 도덕적 숭고함마저 없애버린다는 사실을 안다. 내들러는 인간이 질병과 죽음의 고통에 직면해서 어떻게 그 존엄성을 드러낼 수 있는지를 보았다.



    무통화 사회가 인간의 유토피아일 수는 없다. 사람이 극단적으로 고통을 피하고 쾌락을 구하는 것은 대개는 숭고하지 않은 신체의 욕망에 포박되었을 때다. 숭고한 정신을 지닌 사람은 고통을 정면으로 직시, 수용하며 화해를 추구한다. 신체의 욕망이나 자기 한계를 넘어서 도덕적 숭고함에 이르는 것이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