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도가 우리 땅이듯, 청주는 우리 전통 술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우리의 청주는 ‘약주’로 불리고, 일본의 하쿠쓰루(白鶴)나 겟케이칸(月桂冠)이 청주를 대표해왔다. 아직도 뿌리깊은 일제 강점기의 잔재이자 부끄러운 우리의 자화상이다.
겟케이칸 오쿠라 기념관의 전시실.
왜곡도 큰 왜곡이다. 한국 청주와 일본 청주는 재료와 빚는 방법이 엄연히 다른데도 일본양조협회는 이를 무시한 것이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우리 안에 일제 강점기의 찌꺼기가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 그래서 더 화가 난다. 청주는 탁주의 상대적인 개념이다. 술이 익으면 지게미가 가라앉고, 술독에 박아둔 용수(대오리로 짠 채) 안에 맑은 술이 뜬다. 그 술을 우리 조상들은 맑은 술, ‘청주(淸酒)’라 부르며 마셨다. 한국의 문화재로 지정된 발효주들이 바로 청주에 속한다. 그런데 국내법에는 이 술을 청주라고 부르지 않고, 부르지도 못하도록 규정돼 있다.
주세법 제4조 2항을 보면 ‘청주는 곡류 중 쌀(찹쌀을 포함)·국 및 물을 원료로 하여 발효시킨 술덧을 여과·제성한 것, 또는 그 발효·제성 과정에 대통령령이 정하는 물료를 첨가한 것’이라고 설명돼 있다. 여기서 ‘국(麴)’은 일본의 쌀 고오지(누룩)다.
쌀이야 한국이나 일본이나 다를 바 없으니 일본식이라고 말할 것은 없지만, 일본식 쌀 고오지만을 청주의 재료로 규정함으로써 한국 청주는 일본식 청주라는 것을 공인한 셈이다. 일본 주세법 제1장 3조를 보면 ‘청주는 쌀, 쌀 고오지 및 물을 원료로 발효시키고 여과한 것’이라고 돼 있는데, 사실상 우리의 주세법 내용과 같다.
이렇게 법적으로 일본에 청주라는 이름을 내주고, 한국의 전통 청주는 ‘약주’라는 이름을 쓰고 있다. 일본에 안방을 내주고 우리는 문간방 신세를 자청한 꼴이다. 이것이 우리 안의 식민지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우리나라에 일본의 산업화된 양조기술이 유입된 것은 일제 강점기였고, 일본인에 의해 주세법이 제정됐다. 또 일본인 주도로 주류업이 본격적인 산업으로 자리잡기 시작했고, 그러면서 일본 청주가 우리 청주의 자리를 꿰차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관행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일본식 청주회사가 26개나 있었는데 지금은 1개만 남았다. 이제라도 우리 조상들이 사용한 청주 개념을 회복해야 하고, 법도 서둘러 고쳐야 한다.
그런데 법만 고친다고 청주가 우리 것으로 온전히 회복되는 것은 아니다. 현재 일본의 양조기술은 우리의 술 산업 속에 깊숙이 침투해 있다. 술을 만드는 것은 과학이니 선진 기술을 받아들인 것은 결코 창피스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 전통은 내팽개치고 일본 것을 마치 제 것인 양, 또는 제 것인 줄 알고 사용하는 것이 문제다.
일본 양조업이 대량화·산업화하기 시작한 것은 17세기 들어서다. 항아리에 술을 빚다가 나무통을 사용한 게 그 무렵이다. 항아리는 고작해야 1~2석(1석(石)은 180ℓ)밖에 담을 수 없는데, 목제 통엔 30석 정도가 들어가니 대량 생산이 가능해진 것이다.
그리고 일본의 양조기술이 과학화된 것은 100년 전부터다. 1895년에 청주 효모를 분리했고, 일본양조협회에서 순수배양 효모를 공급하기 시작한 게 1906년의 일이다. 일본은 지금도 술에 관한 연구를 발효과학의 큰 축으로 삼아 국책사업으로 진행하고 있고, 축적된 연구 결과를 두루 공유하고 있다. 그에 비하면 우리의 양조 연구는 초보 수준이다. 학문적 접근은 걸음마 단계이고, 그나마 업체에서 개발한 기술과 정보도 전혀 공유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그렇다면 일본은 우리와 얼마나 다른지, 한국으로 일본 청주를 수출하는 겟케이칸(月桂冠) 주식회사를 통해서 일본청주의 역사와 현주소를 살펴보자.
‘겟케이칸’은 월계관의 일본식 발음이다. 한국에는 겟케이칸의 술을 판매하는 전문유통업체로 한국월계관(대표·서정훈)이 있다. 한국월계관은 1995년부터 국내에 겟케이칸 제품을 판매하기 시작해, 연간 30억원 규모인 한국의 일본 청주 소비시장에서 20억원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진로가 2004년 일본에 600억원 어치의 소주를 판 것에 견주면 미미한 분량이다. 그렇다고 한국 술이 일본보다 더 우수하다고 얘기하기는 곤란하다. 일본의 주류 소비유형이 더 다양하다는 표현이 알맞을 듯싶다.
겟케이칸은 1500여 개의 일본 청주회사 중에서 ‘하쿠쓰루(白鶴)’에 이어 매출 2위를 기록하고 있다. 2004년 출고량은 하쿠쓰루가 6만1964㎘였고, 겟케이칸이 5만6102㎘였다. 겟케이칸은 현재 청주, 쌀소주, 술지게미 가공상품, 화장품까지 만들고 있다. 청주 종류만도 70여 종인데, 용량과 디자인이 다른 상품을 포함하면 200여 종에 이른다. 단일 주력상품을 대량 판매하는 한국 주류회사들과는 사뭇 다르다.
겟케이칸 공장은 교토시의 남쪽, 후시미(伏見)에 있다. 교토는 헤이안 시대(784~1185)때 수도가 된 뒤로 일본 정치와 문화의 중심지였다가, 에도 막부 시대(1603~1867)가 시작되면서 정치 중심지는 에도(도쿄)로 넘어갔다. 1868년까지 천황이 교토에 터잡고 있었다. 화려하고 융성한 교토에 술을 공급하던 지역이 후시미였고, 그래서 고베(神戶)의 나다(灘)에 이어 일본에서 두 번째로 유명한 술 동네가 됐다.
후시미에서는 일찍부터 양조업이 번창했다. 이 동네에서 처음으로 양조 솜씨를 발휘한 것은 5세기 무렵에 외부에서 들어온 하타비토(秦人)라는 집단이다. 하타비토는 바다를 건너온 외래인을 일컫는데, 이들이 한반도에서 건너왔다는 견해도 있다. 후시미에서 가장 규모 있고 오래된 양조장이 겟케이칸이다.
겟케이칸이 창립된 것은 1637년이다. 그 무렵인 1657년에 후시미에는 술 빚는 곳(酒造家)이 83개가 있었고, 생산량도 2700㎘나 됐다. 한 곳에서 평균 32.5㎘씩 생산했으니 가내수공업 수준은 훨씬 넘어선 규모다.
1673년 바쿠후(幕府) 정권은 겨울에만 술을 빚도록 하는 법령을 시행했는데, 그 법령은 일본의 전통으로 굳어져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정치세력이 양조업을 지원하고 통제한 이유는 세금을 걷기 위한 속셈이 컸다. 일본은 878년에 처음으로 주세를 걷은 적이 있는데, 19세기 후반에 청일전쟁을 치르고 한반도를 넘보던 무렵에는 국가 세수(稅收)의 30%가 술에서 나왔다. 주세는 일본 근대화의 밑천이었고, 제국주의 침략의 군자금이었던 셈이다.
겟케이칸은 일제 강점기인 1942년, 충청북도 청주에 있던 고견(高見)주조주식회사를 인수해 한반도에서도 청주를 빚은 적이 있다. 1961년에는 일본에서 처음으로 사계절 술을 빚는 회사가 되면서, 300년 동안 이어오던 양조 관행을 처음으로 깼다. 그리고 1989년에는 미국에 청주제조 회사를 설립해 해외시장을 공략하고 있다.
교토역에서 열차를 타고 10여 분을 가면 후시미 모모야마역에 도착한다. 후시미 술 동네 관광은 이곳에서부터 시작된다. 역 주변엔 상가들이 즐비한데, 후시미에서 제조된 술을 모두 모아놓고 시음용 잔술을 파는 상점도 있다. 이 동네에선 큰길이라고 해봤자 폭이 그리 넓지 않다. 그 길 양쪽으로 작은 골목들이 뻗어 있고, 그 안쪽으로 목조건물이 눈에 많이 띈다. 분위기는 관광객으로 넘쳐나는 교토 중심가에 비해 한산하다.
상표만 봐도 청주 맛을 안다
후시미에는 130년 역사를 지닌 후시미 양조협회가 있는데, 현재 협회에 가입한 양조장은 30개다. 역에서 겟케이칸 회사까지 가는 길에 간이 우물터가 하나 있다. 작은 수도꼭지에서 물이 나오는데, 지하수다. 우물터 한쪽에는 양조장에서도 이와 똑같은 물을 사용한다는 안내문이 걸려 있고, 물을 받으러 오는 사람이 끊이지 않았다. 도시가 번성했지만, 아직도 지하수는 잘 보존돼 있다. 후시미에 술도가들이 건재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은 듯하다. 1920년대 후반 이 동네를 통과하는 지하철 노선이 정해지자 동네 사람들은 지하수를 지키려 지하공사를 반대해 지상으로 철로가 나도록 했다고 한다.
우물에서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돌아서니, ‘달의 계수나무(月の桂)’라고 적힌 현판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겟케이칸의 양조장이다. 양조장의 외벽은 삼나무판으로 덧대어져 길게 이어지고 그 중간에 음식점과 기념품 가게, 기념관이 늘어서 있다.
사계절 술을 빚는 겟케이칸 제1공장.
전시장에는 술 빚는 과정과 그에 필요한 용기며 도구들이 전시돼 있다. 용기와 도구는 대부분 나무로 만든 것들인데, 오랜 세월 썩히지 않고 잘 보존해온 노력이 가상했다. 그 옛날 도자기병 제품에서 오늘날 유리병 제품까지, 전시장은 넓지는 않지만 술의 제조 과정과 회사의 역사를 한눈에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기념관이 예전에 양조장으로 쓰인 곳이라는 점도 인상적이다.
전시장 다음은 시음 코너다. 이곳에서 단맛이 도는 술과 쓴맛이 도는 술 등 다양한 종류의 청주를 맛볼 수 있다. 일본 청주의 가장 큰 특징은 술병의 상표에 알코올 도수뿐 아니라 술맛을 확인할 수 있는 여러 가지 표시가 적혀 있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게 단맛의 정도를 표시하는 ‘일본주도(日本酒度)’다. 일본주도는 0을 기준으로 마이너스 쪽은 단맛(甘口)이 강하고, 플러스 쪽은 달지 않은 맛(辛口)이 강하다. ‘가라구치(辛口)’의 한문 뜻은 매운맛인데, 술맛을 분류할 때는 달지 않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내 입에는 달지 않아서 쓰게 느껴지는 맛이었다. 일본주도는 술의 비중을 재서 표시한 기호다. 그리고 맛이 진한 것을 ‘농순(濃醇)하다’고, 맛이 엷은 것을 ‘담려(淡麗)하다’고 표기한다. 현재 일본 청주를 주도하는 맛은 달지 않고 담려한 쪽이다. 예전에는 달고 농순한 맛이 인기가 있었다는데, 술맛이 경쾌한 쪽으로 옮겨온 것이다.
전통에 대한 진지한 접근
2.3t짜리 발효통.술이 한창 익어가고 있다.
기념관을 돌아본 후 길 건너에 있는 양조장을 찾았다. 양조장 내부 견학은 미리 허락을 얻어야 하다. 그곳은 손으로 술을 빚는 작업장이었다. 겟케이칸은 후시미에 5개의 양조장을 갖고 있다. 양조장이 흩어져 있는 게 독특해서 무라카미 홍보실장에게 그 이유를 물었더니 “쌀을 보관하기 위해 군데군데 창고를 마련했는데, 공장의 규모가 커지면서 작업장으로 바뀌었다”고 했다.
겟케이칸은 또 45년 전 일본에서 가장 먼저 사계절 양조를 시작했지만 아직도 겨울에만 양조하는 장인들을 별도로 고용하고 있다. 전체 직원이 650명쯤 되는데 늦가을에 들어와 술을 빚고 벚꽃(사쿠라) 필 때 집으로 돌아가는 장인이 30명쯤 된다. 전통적인 기술을 어떻게 현대화할 것인지가 지금도 여전히 연구대상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전통을 가볍게 여기지 않는 진지함이 무섭기도 하고 부럽기도 했다.
수작업을 하는 고오지 제조실은 외부 사람들이 들여다볼 수 있도록 유리벽으로 돼 있다. 2층에는 기념관에 자리를 차지하지 못한 또 다른 유물들이 잔뜩 쌓여 있다. 이 회사에서 보관하고 있는 민속문화재는 무려 6120점, 이 모두 사 모은 것이 아니라 직접 사용하던 것이라고해 다시 한번 놀랐다.
일본 청주를 논할 때 많이 쓰는 말이 있다. 첫째가 고오지(麴)고, 둘째가 주모(酒母), 셋째가 모로미(?)다. 이 세 과정을 순차적으로 거치면 일본 청주가 완성되는데, 고오지가 가장 먼저 꼽히는 것은 그만큼 중요하다는 얘기다.
고오지는 찐 쌀알에 균을 뿌려 배양하는 과정으로 45~47시간이 걸린다. 시간대별로 온도와 습도를 살펴야 하기 때문에 밤잠을 설치면서 만든다. 잘 뜨면 구수한 밤(栗) 냄새가 난다. 쌀알에 곰팡이가 파고들어 약간 무르는데, 씹으면 단맛이 돈다.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입맛을 좇아 개발한 흥미로운 누룩이다.
주모 만들기는 효모를 집중적으로 증식시키는 과정이다. 주모는 전체 술량의 7%를 차지한다. 일본에서는 청주 효모를 1895년에 처음 분리해냈고, 1906년부터는 양조협회에서 순수배양효모를 보급하기 시작했다. 양조 기술의 과학화가 일찍 이뤄졌음을 알 수 있는 지표다. 우리 양조장에서도 일본식을 좇아 주모를 만드는데, 전통적으로는 밑술이 주모와 유사한 기능을 담당한 걸로 보인다.
주모는 12~16일 걸려서 완성된다. 주모가 완성되면 본격적인 술 빚기에 들어간다. 주모에 고두밥과 고오지와 물을 넣은 상태를 모로미라고 한다. 모로미는 우리말로는 덧술, 또는 술덧이라는 뜻이다.
모로미는 세 차례로 나눠 담는 방식으로, 정형화돼 있다. 세 차례 나눠 담는 것을 일본에서는 3단 시고미(仕혺)라고 한다. 시고미는 술밥을 넣는 행위를 지칭하는데, 한국 양조장에서는 그냥 음독(音讀)하여 ‘사입(仕혺)’이라고 말한다. 고두밥을 넣는 순서는 첫날 처음 넣고, 이튿날에는 쉬었다가, 사흗날에 두 번째로 넣고, 나흗날에 세 번째로 넣어 끝을 낸다. 고두밥을 넣는 비율은 첫날 100kg을 넣었다면, 사흘째는 200kg, 나흘째는 300kg을 넣는다. 발효 끝 무렵에 단맛을 강화하기 위해 고두밥을 한 차례 더 넣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일반적인 관행은 아니다.
담백·향긋한 맛으로 진화
한국 양조장에서도 일본식의 3단 사입법을 보편적으로 채택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들어온 기술이다. 이는 술 담글 때 사용하는 용어가 일본말이거나 일본식 한자라는 데서 그 정황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수작업 공장을 나와 자동화 설비가 된 제1공장을 찾아갔다. 공장과 공장의 거리는 차로 이동해야 할 만큼 제법 멀었다. 제1공장은 굵은 보일러관이 드러나 있고 높다란 굴뚝이 있는, 8층 높이의 웅장한 현대식 건물이다. 홍보실의 다나카씨는 먼저 공장 옥상으로 안내해 후시미와 교토의 산 능선을 보여줬다. 교토는 북쪽과 동쪽이 높고, 남쪽과 서쪽이 낮은 분지 지형이다. 후시미는 교토의 남쪽에 자리잡고 있는데, 지하수가 교토의 분지에서 남으로 흘러내려온다고 했다.
공장 안의 작업은 대부분 컴퓨터로 자동 제어된다. 고오지실에서는 훈훈한 밤 냄새가 났다. 나선형의 날이 달려 있는 기계가 쌀을 뒤섞으면서 고오지를 만들고 있었다. 고두밥은 자동화기계로 찌고 있었다. 복도에는 고두밥 찌는 자동설비의 축소판 모형이 전시돼 있었다. 견학 온 사람들을 위한 배려였다.
통상 고두밥은 김이 쌀 틈을 비집고 한번 솟아오른 뒤로 50분이 지나야 다 익게 된다. 그런데 겟케이칸의 기계는 고두밥을 찌는 데 25분밖에 안 걸린다. 컨베이어 벨트처럼 생긴 설비인데, 1시간에 4.5t을 쪄댄다. 이 회사에서 처음 사용한 것으로, 일본 양조기술을 한 단계 발전시킨 획기적인 장비다.
발효탱크는 무게 2.3t에 2층 높이였다. 공장 안에 같은 규모의 발효탱크 250개가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실로 엄청난 규모였다. 그런데도 온도 조절은 발효통의 외곽에 순환하는 찬물만으로 이뤄졌다. 외부 순환하는 물 온도는 3~4℃인데, 술 내부 온도는 13℃ 정도였다. 담근 지 14일째 된 술통에서 긴 막대 끝에 달린 주걱으로 술을 한 잔 떠서 맛을 보여줬다. 술맛은 쌉싸래하고 짱짱하면서 향긋하다. 날이 선 것처럼 향이 날카롭다. 아세톤 향도 나고 바닐라향도 나며, 부드러운 바나나향도 깔려 있다. 일본 청주는 담백하면서 향긋하고 맑은 쪽으로 끊임없이 진화해왔다. 우리에게는 맛이 엷게 느껴질 정도로 맑다.
차별되지 않는 게 문제
겟케이칸 양조장을 다 돌아보고 나서 무라카미 홍보실장에게 이렇게 물었다.
“다 보여주고, 다 말해주고, 자기 가진 것 다 공개하고 나면 다른 회사들도 금방 따라 할 텐데 그럼 무슨 차이가 납니까?”
결정적인 것은 숨기겠지만, 공장을 샅샅이 보여주는 개방적인 태도에 감탄해 던진 질문이었다. 그의 답은 이랬다.
“우리가 개발한 것은 특허를 내기 때문에 문제가 없습니다. 일본 양조업계는 고도의 기술을 공유해 모두 우등생이 되었고, 서로 차별화가 안 되는 게 문제이긴 합니다.”
은근히 자랑하는 말투였다. 대놓고 부정할 수가 없었다. 일본의 양조장은 기술을 0공유하는 게 사실이다. 그 기술의 일부를 한국도 공유하고 있고, 일본의 양조용어인 주모, 고오지, 3단 담금, 사입, 모로미 따위를 한국 양조장에서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일본 기술을 받아들이는 일은 부끄러울 게 없다. 하지만 우리의 전통을 팽개쳐두고 아무런 기술개발도 하지 않은 채 남의 것만을 따라간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이제 현행법상 규정된 청주는 일본청주라고 부르고, 우리 전통주에 청주라는 이름을 부여해야 한다. 독도만 우리 게 아니라 청주도 우리 것이다. 식민지 잔재 청산은 일본 것을 일본 것이라 하고 우리 것을 우리 것이라고 하면 이뤄지는 일이다. 그리고 청주가 진정 우리 것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 청주만의 독특한 양조기술을 발전시키고 과학화하는 노력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