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5월호

‘동북아 균형자론’, 어떻게 볼 것인가

‘최악의 상황’ 염려한 절박한 선택 vs ‘최악의 상황’ 부를 수 있는 미숙한 개념

  • 진행·정리: 황일도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hamora@donga.com

    입력2005-04-21 16: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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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무현 정부가 내놓은 동북아 균형자론은 어떤 고민과 의미를 담고 있는가. 그 바탕에 깔린 국제정세 인식은 과연 적절한가. 균형자론이 지향하는 미래구상에 대해 미국, 중국, 일본은 어떤 생각을 갖고 있으며, 이로 인해 야기될 수 있는 문제점과 극복방안은 무엇인가. 동아시아 국제정치 및 각국 입장에 정통한 전문가들이 동북아 균형자론이 미칠 파급효과를 분석했다.
    일 시 : 4월9일 오후 1시장 소 : 동아미디어센터 14층 회의실참석자 : 김우상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정재호 서울대 외교학과 교수, 진창수 세종연구소 일본연구센터장

    ‘동북아 균형자론’, 어떻게 볼 것인가
    사회 : 바쁘신데도 자리를 같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모두발언 삼아 ‘동북아 균형자론’를 총론적으로 어떻게 평가하는지 한 말씀씩 부탁 드립니다.

    김우상 : 정부가 ‘동북아 균형자론’을 내놓은 의도는 좋다고 봅니다. 다만 문제는 한국이 동북아에서 균형자 노릇을 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 따라서 이를 세련된 모델로 바꾸는 작업이 뒷받침돼야 하겠죠. 동북아 안보환경이 변하고 있으므로 한미동맹이든 한중관계든 한일관계든 조정해야 한다는 데는 동의합니다. 그러나 그 답을 ‘균형자’라는 말로 못박는 데는 문제가 있다고 봐요. 이 표현이 국제적으로 영향을 끼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떤 의도를 갖고 있든 주변국이 ‘한국은 균형자(balancer) 노릇을 하려는구나’라고 인식할 때 오해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국제정치에서 균형자라는 표현은 군사력에 바탕을 둔 국력을 기반으로 삼는 것으로 인식되어 왔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군사력이 아니라 소프트파워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말해도 남들이 그렇게 인식할 가능성이 크지 않아요. 그러기에 다른 말로 주변국들을 이해시켜야 한다는 겁니다.

    정재호 : 건국 이후 문민정부까지 한국의 외교는 ‘무엇을 할 것이냐’에 중심을 둬왔습니다. 국민의 정부에 들어서서야 비로소 ‘무엇이 될 것이냐’라는 명제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죠. 참여정부 외교정책의 ‘비전’에 대한 고민이 ‘동북아 균형자’라는 말로 표현됐다고 봅니다. 뭔가 모색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고 지난 2년 동안 간헐적으로 논의됐지만, ‘균형자’라는 한 마디가 우리가 가는 방향을 명시적으로 규정하는지에 대해선 의문이 있습니다. 정부가 ‘동북아 균형자’가 무엇인지 밝힌 것은 3월30일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사무처에서 내놓은 한 쪽짜리 설명서뿐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것인지 아직 명확치 않다고 봐요.



    한걸음 더 나아가면 ‘균형자’라는 말에 집착할 이유가 없다고 봅니다. NSC가 밝힌 설명을 보면 이렇게 법석을 떨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거든요. ‘한번도 전쟁을 수행한 적이 없는 유일한 전통적 평화세력으로서 도덕적 우월성을 가지고 이 지역에서 주체적인 평화촉진을 위해 노력한다’는 말에 누가 이의를 제기할 수 있을까요.

    물론 균형자라는 말이 국제정치학적인 면에서 안 맞는 부분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어느 정부든 외교안보정책의 상당수는 국제정치학 개념에 들어맞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미국도 마찬가지죠.

    한국의 국력이 균형자 노릇을 하기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점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현안별로 균형자 역할을 할 여지는 충분하다고 봅니다. 예컨대 북핵 문제의 해결과 관련해 미국과 중국 모두 한국의 입장을 배려합니다. 분명히 균형자의 측면이 있는 거죠. 중국이나 일본도 한국이 빠진 상태에서 동북아 FTA가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은 또 다른 예가 될 수 있을 겁니다.

    현 정부가 하는 일은 무조건 잘못됐다는 식의 정파주의적 시각을 떠나서 이론적·학문적인 차원을 벗어나 균형자론이 나온 배경을 살펴보면 반박의 여지는 그리 많지 않다고 봅니다. 그 책임의 일부는 언론에도 있을 겁니다. 정부는 공식적으로 ‘남방 3각에서 탈피한다’는 표현을 한번도 사용한 적이 없는 것으로 압니다. 언론이 과도하게 해석한 게 아닐까요?

    동북아의 미래는 패권경쟁인가

    진창수 : 정부도 지금 당장 균형자 역할을 하겠다고 나선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향후 기조에 대한 의사를 밝힌 것이죠. 동북아 균형자론이 지향하는 방향에 대해서는 충분히 동의합니다. 다만 이제부터 로드맵을 그려나가야 할 텐데, 말이 너무 앞선 것 아닌가 하는 걱정이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한 국가가 지역에서 자율적인 입지를 갖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일본처럼 강대국과의 긴밀한 동맹을 통해 위상을 강화하거나, 현재의 구조를 흔들어 자국의 자율적인 공간을 만드는 식입니다. 노무현 정부가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방향은 후자에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이 방식은 보통 힘있는 국가가 택하는 방법입니다. 한국의 국력이 그에 적합한지는 생각해볼 문제죠. 동북아 균형자론에 대해 쏟아진 비판은 우리가 실제로 갖고 있는 힘보다 의도가 너무 앞서 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한미관계의 신뢰는 떨어지고 북핵문제에서 일본에게 ‘왕따’당할 가능성이 있는데다, 그렇다고 중국이 우리 뜻대로 움직일 것인지도 불명확하니까요.

    둘째는 전제가 불명확하다는 점입니다. 정부가 말하는 균형자론은 그 뉘앙스가 중국과 일본이 패권경쟁으로 치닫고 있다는 전제를 담고 있는 듯한데, 일본과 중국의 관계는 최소한 경제적으로는 매우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지난해 일본에서 가장 많은 이익을 얻은 부문이 해운사업입니다. 중국이 대량으로 철강을 생산하는 과정에서 일본 기업들이 큰 이익을 본 거죠. 그래서 일본 기업 가운데는 미국이 아니라 중국과 손잡아야 먹고사는 것 아니냐, 중국의 전략적 가치를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는 이야기도 나옵니다. 우리가 중일 패권경쟁 속에 있는지는 신중히 생각해봐야 해요.

    ‘동북아 균형자론’, 어떻게 볼 것인가

    정재호 서울대 외교학과 교수<br>“한국이 중국과 미국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 것이야말로 최악의 상황이고 와서는 안 될 상황이지만, 그런 상황을 전제로 하는 결정의 순간은 분명 가시화하고 있습니다.”

    정재호 : 동북아 균형자라는 개념이 현재의 상황과 직접 연관되는 것이라면 문제가 있겠죠. 그러나 미래 지향에 관한 것임을 감안하면 공감할 여지가 상당히 있다고 봅니다. 10년, 20년 후를 생각할 때 지금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되는 까닭에 화두를 던지는 의미가 있다는 겁니다. 지금 합의해두지 않으면 20년 뒤 국가생존이 불투명하다는 긴박감에서 나온 것이라고 봐야겠지요.

    저도 중일간 혹은 미중간 패권경쟁과 관련해 정해진 건 아무것도 없다고 봅니다만, 최악의 상황에 대비해 준비하는 태도는 필요하지 않을까요? 지금까지 한국 외교는 대개 낙관론에 근거해 최악의 상황에 미리 대비하지 못한 측면이 있었으니까요. 경제관계, 교역규모만 놓고 보면 미국은 이제 우리의 가장 중요한 파트너가 아닙니다. 지난해를 기점으로 중국이 가장 중요한 파트너가 됐죠. 만약 미중관계가 갈등과 대립으로 향할 경우 예전처럼 간단히 ‘한미동맹’이라는 한마디로 해결할 수 있는지, 250억달러가 넘는 대중투자와 총 무역흑자의 80%가 넘는 대중국 교역을 일거에 포기할 수 있는지, 이런 고민이 담겨 있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김우상 : 중국과 일본의 경쟁구도, 미국과 중국의 패권다툼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균형자론 구상이 나왔다는 말에는 100% 동감합니다. 사실 미국이나 일본이 중국의 성장에 대해 느끼는 불안은 우리보다 훨씬 더 큽니다. 그러나 미국이나 일본은 그걸 공식적인 형태로 발표하지는 않습니다.

    분명 미국은 대(對)중국 봉쇄라는 아이디어를 갖고 있습니다. 일본도 그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미국, 일본이 중국을 무조건 없애버리거나 냉전구도를 만들어 이기겠다는 생각은 아니잖습니까. 중국이 아직 사회주의를 유지하고 있는데다 가치관에서 다른 부분이 많으니까 불안해하는 거죠. 대만 문제도 있고요. 중국의 패권화를 경계하는 의미에서 여러 정책을 눈에 확 띄지 않게, 조심스러운 방법으로 추진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한편 미국과 일본은 중국과 화해와 협력관계로 나아가려는 외교적 노력도 병행하고 있습니다. 양쪽으로 모두 대비책을 세우는 거죠. 이 상황에서 한국이 미일간 경쟁이나 미중간 대립을 공식화해버리고 동북아 균형자 같은 카드를 꺼내면 오히려 그러한 경향에 촉매로 작용할 수도 있습니다. 오해를 살 여지도 있고요. 안 하느니 못한 결과를 낳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최악의 상황’ 대비한 고민 있어야

    사회 : 중국에 대한 미국의 경계, 봉쇄정책과 관련해 한국에 가장 민감한 주제가 아마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에 관한 부분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 문제가 갖는 의미, 중국이 그에 대해 어떻게 반응할지 등에 대해 분석해주시지요.

    정재호 : 먼저 균형자 발언이 중일간 패권경쟁에 촉매로 작용할 수 있다는 김 교수님 말씀은 우리에게 균형자적 ‘소질’이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 흥미롭습니다(웃음). 저는 한미동맹이 매우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미군의 동북아 전략이 바뀌고 있는 것 역시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주한미군·주일미군의 개념보다는 주한기지·주일기지의 개념이 존재할 뿐이지요. 이렇게 되면 우리로서는 한국이 대만해협 문제에 연루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중국이 상하이엑스포나 베이징올림픽 때문에 대만의 독립성향에 대해 유연하게 넘어갈 것이라는 의견이 있습니다만, 저는 이것이 잘못된 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중국은 최근 반국가분열법을 만들어 ‘이러이러한 경우에는 대만에 무력을 사용할 것’이라고 자신을 옭아매고 있습니다. 대만이 2006년 개헌, 2007년 독립선언 시나리오로 나아간다면, 또 그 시점이 중국이 수륙양용 작전능력을 갖추는 시점과 일치할 수도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지금까지의 미사일 발사 수준을 넘어서는 ‘국지전적’ 군사대립도 예상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주한미군의 대만해협 개입을 인정할 것이냐를 두고 이라크 파병 여부를 결정하는 과정에 겪은 여론 양극화보다 훨씬 심각한 혼란을 겪어야 할 것입니다. 더욱이 대만해협 문제는 이라크와 달리 우리의 생존을 좌우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대만해협에서 상황이 발생하면 미국은 분명 우리의 충성도를 시험하려 들 것이고,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든 대만해협 사태에 관여할 경우-단순히 미군에 대한 기지제공이든 경제적 지원이든-중국의 대응조치는 심각한 수준이 될 것입니다.

    한국이 중국과 미국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 것이야말로 최악의 상황이고 와서는 안 될 상황이지만, 그런 상황을 전제로 하는 결정의 순간은 분명 가시화하고 있습니다. 벌써 이 문제를 논의하는 한미안보정책구상회의 1차회의가 끝나지 않았습니까. 한국은 심각한 고민과 준비를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될 시점이라고 봅니다.

    진창수 : 중일 사이에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것은 분명 사실입니다. 일본 우익이나 보수세력은 한국을 이용해 중국을 포위하고 이를 바탕으로 동아시아에서 일본의 위상을 확대하려는 사고를 갖고 있다고 봅니다. 일본이 최근의 한일문제에 비교적 냉정하게 대응하는 것도 아직은 대중국 관계에서 한국이 전략적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죠.

    그러나 일본 정치가 앞으로도 계속 미일동맹의 틀 속에서 움직일까요? 그럴 개연성이 크기는 하지만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일본 정부가 이라크 파병을 결정할 때도 국민의 엄청난 반발에 부딪혀야 했습니다. 이를 반영한 것이 참의원선거 결과였고요. 중국을 포위하는 미일동맹의 틀이 일본의 군사대국화를 부추긴다고 생각하는 일본 국민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아직 정권적 차원에서 나타나지 않았을 뿐입니다.

    이렇듯 중일관계가 어디로 나아갈지 확정되지 않은 현실에서, 우리가 ‘너희는 이 방향으로 갈 것이다’라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상정하고 그 안에서 우리가 이러이러한 역할을 하겠다고 나서는 것은 시기적으로 이른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올 수 있다고 봅니다.

    ‘동북아 균형자론’, 어떻게 볼 것인가

    김우상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br>“이 상황에서 한국이 미일 간의 경쟁이나 미중 간의 대립을 공식화해버리고 동북아 균형자 같은 카드를 꺼내면 오히려 그러한 경향을 더욱 촉매할 수도 있습니다. 안 하느니 못한 결과를 낳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김우상 : 개연성이 있으면 앉아 있을 수만은 없겠죠. 뭔가 노력해야 한다는 것은 맞지만 방법이 달라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동북아 안보공동체를 만들자고 나선다고 해서 뚝딱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동북아 문화공동체 같은 아이디어가 나을 수 있겠죠. 우리가 군사적인 강자가 아니므로 군사안보는 잘 모르겠다, 대신 문화공동체를 만들어서 통하자는 식으로 소프트파워를 이용해 우회하는 방법이 가능하지 않겠냐는 겁니다.

    안보공동체, 아직은 꿈일 뿐

    사회 : 동북아 안보공동체에 대한 말이 나온 김에 그에 관한 이야기를 했으면 합니다. 정부 관계자들의 발언을 종합해보면 동북아 균형자론이 지향하는 최종적인 그림은 동북아에서 다자안보공동체를 구성하는 형태인 것 같습니다. 유럽에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바르샤바조약기구(WTO)가 함께 참여했던 OSCE(유럽안보협력기구)가 그 모델인 것 같고요. 궁금한 것은 이러한 동북아 안보공동체 구상에 대해 각국이 어떤 반응을 보이느냐의 문제입니다.

    김우상 : 장기적으로 볼 때 동북아 안보공동체라는 아이디어에는 미국 중국 일본이 모두 동의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러나 지금은 불가능합니다. 중국이 앞으로 어떻게 변할 것인지 불확실한 상황에서 미국과 일본은 그에 대비해 봉쇄정책을 생각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중국이 민주화 해 국제체제의 파트너가 되면 동북아안보공동체는 모두가 동의하는 대안으로 제기되겠지만, 아직은 미국이 중국을 수용할 여지가 없다고 봐야 합니다. 미일동맹 체제 하에 있는 일본도 마찬가지겠죠.

    진창수 : 1996년 일본이 미국과 신안보선언을 준비할 때, 일본의 지식인들이 다자안보협력체를 만들자는 아이디어를 내놓은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미국에서 비판적인 논의가 일자마자 바로 빼버리고 미일동맹 강화로 결론 지었습니다. 앞서도 말했듯이 현재 일본은 장차 중국이 조화로운 파트너가 될 것이라는 데 대체로 동의하지 않습니다. 더욱이 일본의 우익은 중국이 산업구조상 10년 내에 심각한 위기를 겪을 가능성이 크다고 봅니다. 위기가 오면 중국의 내셔널리즘과 어우러져 긴장이 높아질 것이므로 이에 대비해야 한다는 구상입니다. 그 바탕에서 헌법도 고치고 군대도 가져야 한다는 것이죠.

    따라서 안보공동체라는 아이디어는 장기적 지향점일 수는 있지만 10~20년 내에 현실화할 가능성도, 필요성도 없다고 판단하는 듯합니다. 안보공동체라는 애드벌룬을 띄운다면 반대하지는 않겠지만 실질적으로 움직이지는 않을 겁니다. 6자회담에서 일본이 실질적으로 아무 역할을 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죠.

    사회 : 결국 안보공동체에 대한 일본, 미국의 움직임은 중국이 어떻게 뻗어나가느냐에 달려 있는 듯합니다.

    정재호 : 중국의 의도에 대해 고정관념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중국이 동북아에서 패권을 추구하느냐는 질문도 시기상조인 듯합니다. 중국의 현재 목표는 강대국화이지 패권의 추구가 아닙니다. 강대국도 되지 못한 상태에서 패권을 논하는 것은 워싱턴 일각, 도쿄 일각에서 나름의 국내적 요인 때문에 만들어내는 이야기일 뿐이라고 봅니다. 2003년 미국 외교협회에서 발간한 ‘중국의 군사력(Chinese Military Power)’이라는 보고서를 보면 향후 20년간 미국의 군사적 우위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자신 있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패권의 문제는 빨라야 2020년 이후에나 이슈가 될 수 있을 겁니다.

    안보공동체와 관련해서, 최근 중국은 매우 전향적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10년 전에는 대놓고 반대했지만 현재는 다릅니다. 오히려 요즘은 양자관계에 중점을 둔 미국이 더 수세적인 처지가 아닌가 합니다. 중국은 이미 이 지역에서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지요. 그 가운데 하나가 6자회담이고요. 중국이 그 가운데 어느 것을 선택해 발전시켜 나갈지 불분명하지만 다자안보협력이라는 주제에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사회 : 이 사안과 관련해 국민이 가장 궁금해하는 것은, 균형자론이 가속화할 경우 과연 한국과 주변국의 관계가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라고 봅니다. 우선 한미동맹의 문제가 있습니다. 균형자론이라는 개념이 과연 한미동맹과 공존할 수 있는 것인지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가 많은데요.

    김우상 : 아까도 말했듯이 균형자라는 표현은 주변국들이 군사적인 의미로 해석할 가능성이 큽니다. 미국, 일본, 중국은 균형자의 의미를 ‘하드 파워’에서의 균형자로 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한미동맹이 하드 파워에서의 균형자론과 함께 갈 수 있느냐, 만약 한국과 미국의 관계가 지금보다 더 긴밀해진다면 가능할 수도 있겠죠. 즉 중국이 강대국으로 성장할 때 한국과 미국이 강력한 군사동맹을 바탕으로 이 지역에서 균형자 노릇을 하는 그림입니다. 실질적으로 미국이 지역 밖의 균형자 역할을 하고 우리는 미국을 등에 업고 지역 안의 균형자 역할을 하는 거죠.

    그러나 앞서도 말했듯 한미동맹은 조정될 수밖에 없고, 군사적으로 이전에 비해 더욱 강력해지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신뢰 차원의 동맹은 가능하지만 군사적인 면에서는 훨씬 느슨한 동맹이 되겠죠. 그렇게 볼 때 한미동맹과 균형자론이 함께 갈 가능성은 매우 제한되어 있습니다. 더욱이 미국과 함께하지 않고 우리 혼자 군사적인 균형자 노릇을 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어느 나라든 마찬가지 생각일 겁니다.

    한미동맹, 쉽게 깨지지 않을 것

    사회 : 결국 근본적인 포인트는 참여정부가 그리는 동북아 미래의 그림과 미국, 특히 부시 행정부가 그리는 그림이 사뭇 다르다는 사실아닌가 합니다. 한국은 공동체의 비전을 그리고 있는 반면, 부시 행정부는 대중국 봉쇄의 그림을 염두에 두고 있으니까요. 이렇듯 미래에 대한 비전이 엇갈리는 상황이 극단화할 경우 미국은 한국과의 동맹을 포기할 수 있을까요.

    김우상 : 미묘한 부분이 있습니다. 사람마다 의견이 다를 수 있지만, 미국에 게 한반도는 갖고 있기엔 귀찮고 손을 놓기엔 아까운 애매한 지역이라고 봅니다. 특히 미일동맹이 있기 때문에 이 지역에 대한 미국의 군사전략은 상당부분 일본과의 협력, 일본 내 미군기지의 운용을 통해 달성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미국은 여간해서는 한국에서 손 떼려 하지 않을 겁니다. 전략적 유연성 문제 등에서 의견이 극단적으로 갈리면 주한미군을 철수할 수 있겠지만 그래도 한국과의 기본적인 관계는 유지하려 할 겁니다. 동맹과 군대주둔을 분리해 생각하는 거죠. 미국으로서는 이 지역에서 완벽한 힘의 공백이 나타나는 상황을 좌시할 수 없으니까요.

    최근 들어 중국에 가까워지는 듯한 한국의 분위기, 늘어나는 한중 교역량 등을 생각하면 중국의 영향력 확대를 경계하는 차원에서라도 관계를 완전히 끊을 수는 없을 겁니다. 군사적으로 전략적 유연성을 위해 한국 내 미군기지를 빼내 다른 곳으로 이동할 수는 있겠지만 이를 동맹의 파기로 연결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봅니다.

    정재호 : 저는 한국이 대통령 명의로 요청하거나 국회 결의가 없는 상황에서 미국이 자발적, 능동적으로 동맹을 폐기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봅니다. 전략적 유연성 문제만 해도 기본적으로 유연성을 인정해주고 때로 한국의 협력 가능성을 열어놓되 우리의 핵심국익이 걸린 ‘특정상황’에 대해서만 예외를 명기한다면 미국을 포함해 아무도 반대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분이 지난 2년간 한미동맹이 많이 망가졌다고 이야기하는데요, 2년 정도 흔들어서 동맹이 삐그덕거린다면 지난 30년 동안 동맹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다는 방증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 불거진 문제는 모두 언젠가는 드러날 것이었다는 말이죠.

    ‘동북아 균형자론’, 어떻게 볼 것인가

    진창수 세종연구소 일본연구센터장<br>“정부가 말하는 균형자론은 그 뉘앙스가 중국과 일본이 패권경쟁으로 치닫고 있다는 전제를 담고 있는 듯한데, 일본과 중국의 관계는 최소한 경제적으로는 매우

    진창수 : 결국은 설득의 파이프라인이 부족한 것이 문제라고 봅니다. 미국에 대해 창구가 많은 것 같지만 실제로 일이 터졌을 때 솔직하게 미국을 설득할 네트워크는 없다시피 하니까요. 한일관계도 마찬가지죠. 속으로는 서로의 전략적 가치를 인정하지만 관계는 계속 냉각상태입니다. 그걸 풀 수 있는 네트워크나 파이프라인이 변변치 않다는 것은 아쉬운 대목입니다.

    이렇게 보면 지금 당장 전략적 유연성을 전적으로 인정하는 것에는 위험이 따릅니다. 사실 법적으로 따지면 우리에게는 이를 인정해야 할 의무가 없습니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은 한반도에서의 상황만을 규정하고 있으니까요. 문제는 미국이 결정적인 순간에 양안(兩岸)사태 관여를 강요할 경우에 그건 도저히 안 된다고 우리의 입장을 설명하고 양해를 얻어낼 채널이 마땅치 않다는 겁니다.

    김우상 : 이 부분이 균형자론과 관련한 핵심주제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균형자가 되려 한다면 행위자와 모두 탄탄한 신뢰관계를 유지해야 합니다. 미국과 중국이 서로 불신해 직접 대화가 안 통하면 두 나라와 모두 신뢰가 깊은 우리가 나서서 도와주는 식이어야 하는 겁니다. 그러나 현재 상황은 균형자론이 오히려 주변의 신뢰를 잃는 방향으로 작용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문제입니다.

    일본 움직일 카드가 없다

    사회 : 균형자론 혹은 그것의 전제인 동북아 미래상을 위해서 또 한 가지 필수적인 요소는 일본의 변화일 것입니다. 일본이 지금처럼 미국을 등에 업고 역내(域內) 세력강화를 추구하는 전략을 폐기해야 공존의 논의가 가능할 테니까 말입니다. 한국이 일본의 이와 같은 변화를 유도해낼 여지가 있을까요? 당장 독도나 교과서 문제에서 우리가 일본에 영향력을 발휘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도 궁금합니다.

    진창수 : 불행하게도 부정적입니다. 지금 일본 정치권에는 국제적 시각을 가진 정치가가 드뭅니다. 국내정치의 논리로 국제관계를 논하는 거죠. 우리는 양심세력과 연대하겠다고 이야기하지만, 일본이 실질적으로 변해 국제관계에서 순기능을 하려면 일본 내부에서 국제주의적인 정치가들이 영향력을 발휘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지금 상황은 그렇지 못하죠.

    마찬가지 이유로 독도나 교과서 문제도 어렵다고 봅니다. 우리 스스로 방법이 있는 것처럼 포장하고 있을 뿐이죠. 한국 정부는 우리가 강하게 항의하면 일본 정부가 들어줄 것이라고 전제하지만, 이는 미국적인 시각입니다. 압력으로 일본의 뜻을 꺾을 수 있는 나라는 미국과 중국뿐이니까요. 의지할 수 있는 것은 국제여론뿐인데, 그것도 미국과 중국의 이익에 부합할 때만 움직일 따름입니다.

    일본을 변화시키려면, 일단 대통령이 원칙은 표명했으니 그 원칙에 따라 차근차근 이슈별로 대응하며 나름의 노하우를 습득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아직은 그 수준이 못 되는 것이 사실이므로 대일관계는 앞으로도 어려울 거라고 판단됩니다. 일본 정치권의 망언은 더욱 많아질 것이고 한국은 더욱더 분노하며 대응하겠죠.

    김우상 : 공식적으로 강하게 문제제기를 할 필요가 있을 때는 해야 하지만, 강하게 얘기하는 채널만 두어서는 안 되겠죠. 신뢰에 바탕을 두고 협력을 지향하는 채널과 왜 식민주의 망령을 못 버리느냐고 강하게 공격하는 채널이 있어서 두 목소리가 동시에 전달돼야 합니다. 이런 역할분담을 생각해보면 대통령이라는 자리가 직접 분노를 표시하고 불쾌감을 전달하는 자리는 아니라는 점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진창수 : 덧붙여 설명하자면, 한일관계가 오래 냉각되면서 일본이 타협의 카드를 꺼낼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최고결정자인 대통령이 타협하기에는 얕은 수준의 카드를 보내겠죠. 우리는 그 카드를 받을 수 없을 것이고, 일본 내부에서는 “우리는 카드를 보냈는데 한국이 반응을 안 한다, 외교에서 힘의 논리를 보여줄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힘을 얻을 겁니다. 외무성에서도 그런 주장이 점차 강해지고 있고요. 아직까지는 중국을 생각해서 이쯤에서 참자는 목소리가 만만치 않은 형국이긴 합니다만.

    중국의 미래구상, 단정할 수 없어

    사회 : 균형자론을 포함해 최근 정부의 행보를 보면, 단기적으로는 미국이나 일본과의 관계가 외형상 불편해지는 것을 감수하더라도 할 말은 한다는 자세를 읽을 수 있습니다. 반면 중국과의 관계는 상대적으로 가까워지는 형국이지요. 지난 4월 초 윤광웅 국방장관이 “중국과의 군사교류를 일본 수준으로 끌어올리겠다”고 언급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비치는 것 같습니다.

    정재호 : 먼저 한일관계를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지난 한두 달만 보면 대통령이 앞서 나갔다고 말할 수 있지만, 취임 이후의 시기 전체를 조망해보면 이제 나설 때가 됐다고 봅니다. 그간에도 분명 대통령이 나름대로 일본에 보낸 제스처가 있습니다. 일본 내에서 국제주의적 정치가가 영향력을 발휘할 가능성은 앞으로도 상당 기간 없겠지만, 어차피 우리가 영향을 줄 수 없기 때문에 아무것도 안 할 것인지, 그래도 뭔가를 해야 하는 것인지는 생각해볼 문제입니다.

    오히려 제가 걱정하는 것은 앞으로 나타날지도 모를 반복 현상입니다. 지난해 8월 고구려사 왜곡 문제가 불거졌을 때 중국 정부가 우리에게 제시한 변명은 “이는 지린성이라는 지방정부가 시행하는 것이어서 어쩔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일본이 그 사례를 열심히 공부한 것 같아요. 그래서 이번에 시마네현을 들고 나왔죠(웃음). 우리가 고구려사 왜곡문제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자 일본은 거기에서 상당한 아이디어를 얻은 것 같습니다. 중국을 의식해서라도 이번 일본 교과서 문제는 해볼 만큼 해봤으면 좋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앞으로 중국이 어떻게 나올지 매우 걱정스럽습니다.

    윤광웅 장관의 발언도 그런 의미에서 평가할 수 있을 겁니다. 일본은 우리와 동맹관계를 맺고 있지 않고 군사교류도 대단치 않습니다. 중국과의 협력은 이미 일정부분 제도화되어 있고요. 그걸 일본 수준으로 올리겠다는 것에 대해 언론에서 법석을 떨 이유가 있을까요. 거꾸로 보면 윤 장관의 발언은, 진 박사께서 언급했듯 일본 외무성 내에서도 우리를 중국과 관련해 생각하려는 견해가 있다는 걸 한국이 간파했음을 의미한다고 봅니다. 중국과 가까워지는 듯한 우리의 제스처가 일본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가능성 말입니다. 양자관계를 단순히 양자관계로만 보지 말고 이를 지켜보는 주변 ‘관중’에 대해 치밀한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거죠.

    사회 : 과연 중국이 이러한 한국의 움직임 혹은 제스처를 반길까요?

    정재호 :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저는 솔직히 리빈 대사가 균형자론을 환영한다는 성명을 곧바로 발표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만, 공식적으로 그런 입장을 표명했죠. 여러 중국인 전문가와의 인터뷰를 통해 내린 결론은 중국이 장기적으로 한국과의 관계를 어떻게 가져갈 것이냐에 대해 지금 심각하게 논의중이라는 겁니다. 미중 구도하에서 한국이 자신들과 가까워지는 것이 자산으로 작용할지, 아니면 부채가 될지 명확히 결론짓지 못했다는 거죠.

    다만 이런 문제는 있습니다. 6~7년 전만 해도 중국은 한국 중심의 한반도 통일에 대해 명시적으로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 비록 사적인 자리에서지만 중국측 인사들이 “한국 중심의 한반도 통일에 대해 중국의 거부감은 크지 않다”고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중국에 대한 한국 사회의 호감을 고려하면 그러한 통일이 반드시 미국에만 유리한 구도는 아니라고 판단하기 시작한 듯합니다.

    ‘왕따’ 각오하려면 국민합의 있어야

    사회 : 이 문제와 관련해 가장 강력한 논쟁점은 결국 의도하지 않은 결과가 빚어질 것에 대한 우려입니다. 특히 보수언론을 중심으로 제기되는 이른바 ‘왕따론’입니다. 한국이 이렇게 움직이면 미일동맹이 강화될 것이 뻔한데, 중국이 우리랑 찰싹 붙어줄 가능성도 없으니 결국 우리만 왕따당하는 것 아니냐는 염려겠지요. 이러한 우려가 의미가 있는지, 실제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인지에 대해 평가해주시기 바랍니다.

    김우상 : 단기적으로 생각해볼 문제는 6자회담입니다. 앞서가는 미국과 일본을 우리가 조정해야 하는데 입지가 좁아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당연히 모두 바라는 긍정적인 결과를 얻기는 더욱 어려워지겠죠. 그렇다고 중국을 이용해서 미국을 움직이거나 북한을 움직이기도 쉽지 않을 테고요.

    차라리 전략적 유연성 문제에 조금 더 탄력적으로 대처할 필요가 있었다고 봅니다. 즉 전략적으로 모호함을 유지하는 것이 오히려 중국이 우리를 조금 더 가치있는 파트너로 생각하게 만들 수 있지 않았을까, 한국이 장차 미국, 일본과 똘똘 뭉치지 않도록 잘 대해줘야겠다고 생각하게 만들어 실리를 챙길 수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정재호 : 이 문제가 가장 어려운 지점이 아닐까 싶습니다. 요즘 회자되는 ‘외교 왕따론’의 기저에는 근본적으로 미국과의 관계경색에 대한 우려가 깔려 있다고 봅니다. 한미동맹이 꼭 필요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문제의 만병통치약은 아니겠지요. 한미관계가 악화됐기 때문에 일본이 그 사이를 치고 들어와 한일관계가 악화됐다고 생각하지도 않고요. 한 번도 이루기 어려운 강대국화를 한 세기 안에 두 번이나 이룬 나라가 그 정도의 소프트 파워밖에 없다는 것을 생각하면 한미관계가 강하든 약하든 한일관계의 경색은 한번쯤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고 봅니다.

    한미동맹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상황과 조건에 관계없이 한미관계가 절대적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에게 제가 묻고 싶은 것은, 한미관계의 강화가 실제로 미중관계의 악화나 한일관계의 현실적인 상황에 구체적으로 어떤 해답을 제시해줄 수 있느냐는 겁니다. 이에 대해 명확한 답이 없다면 균형자든 다른 무엇이든 그 틈새에 대한 우리 나름의 전략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다시 전략적 유연성 이야기로 돌아가보면, 중국(대만문제)과 관련해서 이를 허용할 수 없다고 공식적으로 명시하는 것은 우둔한 일이겠지만 중국에 대한 한국의 입장을 사전에 미국으로부터 양해받는 식으로라도 빠져나갈 최소한의 방법은 만들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렇지 않으면 중국에 대한 투자 추세를 둔화시키거나 만일의 상황에 대처할 방안을 만들어야 할 겁니다. 준비 없이 최악의 상황을 맞으면 그 엄청난 손실은 누가 보상해주겠습니까.

    진창수 : 조금 다른 포인트를 이야기하자면, 저는 왕따를 당해도 좋다고 봅니다. 전제조건은 그에 대한 국내적인 합의입니다. 우리 앞에는 균형자냐 편승이냐,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동북아에서 패권경쟁이 벌어지면 힘센 놈에게 편승해서 사는 것이 편할 테고, 동북아가 힘의 균형상태, 세력균형상태로 간다면 균형자 노릇을 할 수 있겠죠.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정하고 어느 길이든 택한다면 당분간 왕따를 당하고 손해를 입더라도 감수해야 할 겁니다.

    그러기 위한 전제는 국민이 상황을 명확히 알고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내부적인 컨센서스를 이뤄 장기적인 목표를 향해 나아간다면 단기적으로 왕따를 당해도 감당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정부의 행보가 빨라질수록 국민 사이에도 완전히 갈라진 스펙트럼이 발생할 것이고, 해외에 우리의 의견을 전달하는 네트워크도 양분될 겁니다. 외교문제가 극단적인 정치적 양극대결로 가는 것은 바람직한 현상이 아니잖습니까.

    김우상 : 언론의 중요한 기능은 사실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입니다. 정치인이나 일부 지식인 못지않게 언론이 다원적인 문제를 꼭 둘로 양분해 접근하는 방식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건전한 사회에서 의견이 하나나 둘만 있을 리 없죠. 다양한 목소리가 있는데 그걸 꼭 둘로 나누어 택일하게끔 강요하는 것은 잘못된 방식이라는 겁니다. ‘미국이냐 중국이냐’ 같은 단선적인 접근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도광양회’와 ‘유소작위’

    사회 : 끝으로, 정부가 균형자론을 구체화하는 과정에 염두에 둬야 할 포인트가 무엇인지 한마디 해주십시오.

    김우상 : 서두에서 균형자론이 오히려 긴장을 고조시킬 수도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대안으로 어떤 개념이 있을 수 있는가. 지금 대통령이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것은 사실 균형자라는 표현보다는 신뢰구축자(Confidence builder), 평화중재자(Peacemaker) 개념에 가깝다고 봅니다.

    그래서 저는 균형자라는 용어 대신 ‘중추적 동반자(Pivotal Partner)’라는 용어를 제안하고 싶습니다. 미국과 중국이 대립하고 일본과 중국이 경쟁하는 최악의 상황이 올 경우 나름의 소프트파워를 이용해 중간에서 테이블을 차려주는 나라가 되자는 겁니다. 이런 식의 회의외교, 문화외교를 주도하면 강대국과 어깨를 맞대고 무시 못할 지분을 행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정재호 : 기본적으로 균형자론에 담겨있는 고민, 고뇌에 대해 공감합니다. 다만 그 제기방식이 적절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는다고 봅니다. 흔히 외교는 99%가 형식이라고 하니까요. ‘균형자가 되는 것’보다는 ‘균형점을 모색하는 것’에 대해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 20년간 중국이 견지해온 도광양회(韜光養晦) 전략을 참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칼집에서 검광이 새나오지 않도록 꾹 눌러 담고 있다가’ 유소작위(有所作爲), 즉 때가 되면 그것을 제대로 사용하는 전략입니다. 조용하지만 실질적으로 움직이는 그런 준비 말입니다.

    어려움은 잘 알고 있습니다. 특히 한국 외교의 머리와 손발이 제대로 맞아 돌아가느냐에 대해 걱정이 앞섭니다. 실제로 행해지는 미시적인 움직임이 위에서 갖고 있는 고민이나 생각을 반영하지 못하는 모습이 보이니까요. 청와대가 균형자론이라는 틀을 공개적으로 명시한 배경에는 그러한 ‘지체부조화’의 어려움이 있었다고 느껴집니다만, 그래도 앞으로 꾸준히 갈고 닦으면 20년 후에는 일정부분 균형자 노릇을 할 준비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진창수 : 미래에 차근차근 준비해야 한다는 정부의 고민은 이해합니다만, 국내정치와 국제정치의 조화를 이뤄달라는 당부를 하고 싶습니다. 국내정치를 생각해 지나치게 앞서나가도 안 되고 국제정치만 생각해 국내정치를 무시해서도 안 되겠죠.

    또한 미래에 대한 비전을 내세우려면 상대방에게도 선택의 여지를 만들어줘야 합니다. 새로운 질서를 이끌어내고 싶다면 다른 나라들이 따라올 수 있게 해야 하는데 그런 면에서 조금 서투르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말은 쉬운데 참 어려운 문제입니다. 넘어야 할 산이 너무도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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