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세기 말부터 반외세, 자민족 우월주의, 국수주의를 기반으로 활동해온 일본 우익은 2001년 이후 도드라진 행보를 보였다.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으로 대표되는 이 세력이 왜곡된 역사관에 근거한 교과서를 제작하고, 문부과학성이 이를 검정함으로써 마각을 드러낸 것. 일본의 우경화가 최근 들어 가속화하고 일본 정부가 교과서 왜곡을 주도한 까닭은 뭘까.
재일동포 3, 4세 중 18~30세를 주축으로 구성된 재일본대한민국청년회가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과 관련해 기자회견을 열고 이성적으로 대응할 것을 촉구했다.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주변국의 강력한 비난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우익 인사들은 우익사관에 근거한 역사교과서 집필을 강행하고 검정을 신청했다. 한술 더 떠, 일본 정부는 교과서에 독도가 일본땅이라고 명시할 것을 주문하는 등 역사왜곡을 주도하고 나섰다. 다쿠쇼쿠(拓殖)대 후지오카 노부카쓰 교수가 주도하는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하 ‘새역모’)이 집필한 역사교과서는 여러 가지 문제점을 갖고 있다.
첫째, 태평양전쟁은 자위(自衛)전쟁으로 아시아 피압박민족의 해방을 위한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이것을 침략 의도가 깔린 잘못된 전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자학(自虐)사관’이며, 일본의 어두운 역사를 강조할 뿐이라는 것.
둘째, 일본의 조선에 대한 식민지 지배는 조선을 수탈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근대화에 도움을 줬다는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한다. 또 한일강제합방에 대해서는 1910년 당시 한일합방을 찬성한 조선인도 있었으며, 미국 영국 프랑스이탈리아 러시아 등 당시 강대국들이 승인한 국제조약으로 정당하고 합법적이었다고 말한다.
셋째, 역사적 사실을 날조, 왜곡하고 있다. 우익 역사교과서는 조선에서 자행한 강제연행, 일본어 강요, 일본식 성명 강요 등이 잘못 알려졌거나 날조됐다고 주장한다. 새역모가 역사교과서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삭제하려는 대목은 일본군위안부에 관한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1937년 12월에 일어난 난징(南京) 대학살은 과장되고 조작된 이야기이며, 당시 난징에서 발견된 중국인 시체는 학살당한 민간인이 아니라 전투에서 죽은 군인들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여러 사료와 학살 현장을 목격한 병사들과 외국인들의 증언을 통해 학살부정론이 사실상 허구임이 이미 밝혀졌다.
새역모는 2001년 새롭게 집필한 중학교 역사교과서를 문부과학성에 검정을 신청했고, 4년마다 재검정하는 제도에 따라 2005년 3월 재검정을 신청했다. 4월5일 일본 문부과학성은 일제침략을 정당화하는 우익 교과서를 그대로 통과시킴으로써 한국과 주변 아시아 국가들의 공분을 샀다.
19세기 말 이후 형성된 일본 우익은 반외세, 자민족 우월주의, 국수주의에 입각한 활동을 벌여왔고, 1945년 패전 이후에도 꾸준한 움직임을 보였다. 그러면, 우익은 왜 2001년이 되어서야 자신의 역사관에 근거해 서술한 중학생용 교과서의 검정을 신청했는가.
개혁 정국이 야기한 불안
이 문제를 설명하려면 후지오카 교수가 다른 우익 지식인들과 함께 새역모를 결성한 1997년 전후 일본사회의 경제적·정치적 상황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우선 경제적으로 1991년부터 경기가 후퇴하면서 일본경제의 거품이 꺼지기 시작했고, 일본은 구조적 장기 불황을 경험했다. 10년 이상 지속된 경제불황은 고실업률, 대형 기업과 금융기관의 잇따른 도산 및 기업 채산성 악화 등으로 전후 경제성장의 신화가 뿌리부터 흔들렸다.
1990년대 들어 능률적이고 정직하다고 믿었던 관료들의 부패와 비효율이 잇달아 드러나 관료제의 신화도 붕괴됐다. 전후 일본의 경제성장을 주도한 양대 세력인 기업과 관료집단이 동시에 국민으로부터 신뢰를 잃게 되었으나, 이를 대체할 세력은 나타나지 않았다. 이러한 위기의식 속에 제3의 국가개혁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둘째, 정치개혁 정국에서 1993년 자민당이 정권을 잃었다. 패전 후 사회 갈등을 관리하면서 지속적 경제성장을 가능하게 한 정치적 기반이 이른바 ‘자민당 55년 체제’였으나, 이것이 국민의 지지를 더는 받지 못하게 된 것이다. 개혁 정국은 양당제를 지향하는 소선구제로 선거제도를 개편했고, 사회당 출신 총리가 등장했으며, 정당간 이합집산이 반복되면서 1990년대 10년간 7명의 총리가 교체됐다. 정치권은 사회당이 몰락하면서 보수화하는 혼란을 겪었다. 1990년대 후반의 정치적 불안정 속에서 일본 우익은 자신들의 국가관을 국가 진로의 대안으로 선전하고자 했다.
셋째, 자민당이 정권을 상실한 이후 등장한 호소카와 연립내각과 사회당 출신의 무라야마 총리는 진보적 역사인식을 정치적 어젠더로 삼았다.
1990년대 중반, 과거 군국주의 역사를 반성하고 이를 대외적으로 분명하게 밝혀야 한다고 주장한 일본 국내 정치세력은 크게 두 갈래다. 먼저, 일본이 국제정치 무대에서 역할을 확대하기 위해 과거청산 작업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보수적 정치세력이 있다. 일본의 대외적 역할 확대를 비판하는 아시아 주변 국가들을 대상으로 일본이 과거 제국주의와 다르다는 것을 증명하려면 과거 군국주의 역사에 대한 고백적 반성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은 군국주의 역사를 청산해야 한다고 전통적으로 주장해온 사회당 중심의 진보적 정치세력이다. 이들은 “일제의 침략적 국가행위로 한국과 중국이 커다란 피해를 보았지만, 사실 일본 국민이 가장 큰 피해자다. 당시 국가정책이 잘못됐다고 반성하는 것은 주변국 국민뿐만 아니라 일본 국민을 위해서도 필요하다”고 말한다.
1993년 7월, 7개 정당 연합으로 결성된 호소카와 정권은 “과거 전쟁에 대해서 반성한다”는 정책제안을 연립정권의 정책 대강에 포함시켰다. 호소카와 총리는 1993년 8월 취임 후 국회의 소신표명 연설에서 “과거 전쟁은 침략적 행위였기에 깊이 반성하며, 인근 아시아 제국에 진심으로 사과한다”고 밝혔다
1994년 6월 발족한 무라야마 정권은 사회당, 자민당, 신당사키가케의 연립정권으로 ‘전후 50년 결의’를 채택할 것을 3당 합의사항으로 공표했다. 1995년은 전후 50주년. 이를 계기로 과거 50년의 역사를 반성하며, 장래 50년을 새롭게 시작하자는 취지였다. 사회당은 과거 전쟁으로 한국과 중국 등 아시아 국가들이 겪은 희생과 고통을 구체적으로 적시함으로써 국회 결의에 대한 국민의 지지와 협조를 호소했다. 특히, 태평양전쟁을 일제가 일으킨 ‘침략전쟁’이라고 명확히 규정해 ‘아시아 해방전쟁’ 등으로 미화한 우익의 역사관을 비판했다.
‘不戰과 사죄’ 표현 논란
사회당의 주도로 1995년 6월 ‘역사를 교훈삼아 평화에의 다짐을 새롭게 하는 결의’가 통합야당과 자민당 소속 일부 의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참석자 다수의 찬성을 얻어 중의원에서 채택됐다. 이들은 결의를 통해 “아시아 여러 국민에게 준 고통을 인식하며 깊이 반성한다”고 밝혔다. 무라야마 내각 발족 이후 1년 가까이 논쟁을 벌여온 ‘전후 50년 결의’는 정당간의 대결이 아니라 전쟁 인식에 대한 역사관 대립으로 발전했다.
이러한 진보세력의 사과 움직임에 대해 우익세력은 반대 견해를 분명히 밝혔다. 우익 정치세력은 “일본이 사죄를 표현해야 할 과거의 잘못된 국가행위는 없었다”고 주장하며, 이 결의안의 국회 채택을 강력히 반대했다. 오쿠노 세이스케 등 우익 국회의원들이 반대 움직임을 주도했다. 결국 처음 제안된 ‘전쟁사죄 반성 및 부전(不戰)결의’라는 결의안 제목은 우익의 의지대로 ‘역사교훈과 평화결의’로 바뀌었고, 문안에서 ‘부전’과 ‘사죄’라는 표현마저 빠지게 됐다.
1990년대 후반 일본 국내정치의 불안정과 경기 침체 속에서 역사 인식의 차이가 정치적 어젠더가 되어 진보세력과 우익세력을 가르는 대립각으로 작용했다. 과거 침략역사에 대해서 주변국가게 사과해야 한다는 주장이 진보세력을 중심으로 퍼졌다. 한편, 우익세력은 이러한 움직임을 자학적이라고 비판하고 자신들의 역사관을 일본 청소년에게 심어줄 필요가 있다고 본 듯하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우익 역사가들은 우익사관에 동조하는 정치가들과 함께 자신들의 주장을 본격적으로 펼치기 시작했다. 이들은 국민의 자신감 상실을 위기라고 보고, 일본 민족의 역사를 미화하고 애국심을 강조함으로써 난국을 극복하고자 했다. 후지오카 교수가 제시한 ‘개정판 새로운 역사교과서의 7개 포인트’에 ‘애국심 강조’와 ‘자학사관 극복’이 포함된 것에는 이러한 배경이 깔려 있다. 이런 관점에서 우익은, 1999년 히노마루(일장기)와 기미가요를 국기와 국가로 공식 지정하는 법이 성립된 것을 커다란 정치적 승리로 해석한다.
새역모를 직접적으로 후원하고 우익 역사관을 공유하며 공동전선을 형성하는 집단은 세 개의 그룹으로 나뉜다.
첫째, 우익 정치가 집단이다. 일본 국회에서 ‘전후 50년 결의’가 논의되자, 자민당의 일부 국회의원은 ‘종전 50주년 국회의원 연맹’(회장·오쿠노 세이스케)을 결성하고, 사죄 및 부전 결의 반대운동을 전개했다. 1996년에는 앞의 조직을 국회의원 116명이 참가하는 ‘밝은 일본 국회의원 연맹’으로 확대 개편해 교과서 검정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또한 5선 이하 국회의원들을 중심으로 ‘일본의 앞날과 역사교육을 생각하는 젊은 의원의 모임’(대표·나카가와 쇼이치로)에 62명의 국회의원이 참가했다. 자민당 내의 이러한 조직들은 우익사관이 역사교과서에 포함되도록 교과서 검정제도와 교과서 채택방침의 재검토 등을 주도하고 있다.
둘째, 우익 교과서를 출판하는 후소샤(扶桑社)는 주류 언론사인 후지산케이 그룹이 투자해 설립한 출판사다. 이 그룹은 우익 일간지 ‘산케이신문’을 발행하고 있으며, 후지텔레비전 방송국을 보유하고 있어 우익사관의 정당성을 일반 국민에게 전파하고 있다.
셋째, 전통적인 우익활동을 해온 다수의 사회단체가 있다. 이들은 1920~30년대의 우익단체와 정신적으로 밀접하게 닿아 있으며, 배타적 국가주의를 주창하는 우익단체로 우익사관을 지지하고 있다. 우익단체들은 공개적으로 활동하기도 하지만 비밀조직도 있어 정확한 실태를 파악하기는 어렵다. 2005년 현재 전국 500여 개 단체에 12만명 정도가 활동 중인 것으로 추정된다.
우익 역사가들이 중학교 역사교과서에 황국사관을 주입하려고 공공연하게 행동하는 것은 보수화하는 일본 정치의 전반적인 분위기와도 관련이 깊다. 군국주의를 비판하는 진보적 역사관을 견지하는 사회당이 몰락했으며, 전쟁과 패전의 경험이 없는 젊은 세대가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등장한 것. 이러한 신(新)보수세력은 일제가 아시아 국가들을 침략했다는 속죄의식이 없다. 이들은 냉전 종식과 더불어 경제대국으로서 국가 지위가 상승한 일본이 국내외적 환경변화에 대응하고, 국익을 새롭게 해석함으로써 국내 정치체제를 정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일본의 보수세력에 더욱 힘을 실어준 것은 미국의 세계 전략이다. 냉전 종결 이후 미국은 일본의 군사적 역할 확대를 동아시아 전략의 중요 요소로 여기며, 일본의 적극적인 안보태세를 원했다. 특히 부시 행정부는 미일동맹을 중심으로 아시아 전략을 수행하겠다고 천명했다. 이들은 미일동맹이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고 본다. 일본은 세계 제2의 경제대국인 동시에 잘 훈련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으며 민주주의를 시행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 영미동맹을 모델로 삼아 미일동맹을 강화하는 것이 바로 미국의 계산이다.
미국은 1995년 이래 “일본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이 되는 것을 지지한다”고 공개적으로 천명하면서, 이를 위해서는 일본 현행 헌법의 개정이 선행돼야 한다고 조언했다. 미국이 아시아 문제에 개입하는 데 있어 일본이 주춧돌 노릇을 하며, 미일동맹은 미국의 세계안보전략의 중심이라고 했다. 따라서 부시 행정부는 미국의 방위무기 기술을 일본에 제공하고, 미일 미사일 방어협력의 대상 분야를 확대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또한 미일간 정보협조를 강화하여 정찰위성을 포함한 일본의 독자적 정보능력을 확대하는 데 협조하겠다고 했다.
평화헌법 개정 논의
일본도 국내 체제를 정비해 미국의 전략에 부응하고자 한다. 그 장기적 귀결점은 집단적 자위권을 행사할 수 있게 헌법 해석을 변경하고, 자위대에 군대의 지위를 부여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헌법 개정이 필수적이다. 일본의 보수세력과 우익세력이 모두 이를 희망하고 있으나 다른 아시아 국가들은 이를 두고 “군국주의적 행태”라고 비판의 목소리를 높인다.
우익사관의 등장은 단순히 교과서 개정만을 목표로 삼고 있는 것이 아니다. 정치·군사 대국화와 이를 위한 평화헌법 개정 논의 전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일본은 냉전 종결 이후 세계질서의 급변, 북한 핵문제를 둘러싼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 중국의 경제적 성장과 군사대국화 경향 등 동아시아의 안보정세 변화에 직면했다. 이에 일본은 국제사회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고 경제대국에 걸맞은 역할을 요구받게 되었다. 1991년 걸프전쟁에서 130억달러의 전쟁비용을 지출하고도 “피와 땀을 흘리지 않은 얼굴 없는 국제공헌”이라는 국제적 비난이 쏟아지자 일본인들은 국제정세에 대응이 미흡했음을 통감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북한의 핵개발 의혹, 대포동 로켓 개발 및 실험발사, 일본인 납치에 대한 무력한 대처, 중국의 핵실험이나 대만해협 위기 사태 등 동아시아에서 발생한 일련의 안보위협사태에 대해 일본이 피동적인 대응밖에 못하고 있다며 불만을 나타내는 일본인이 많아졌다. 우익세력은 이러한 불만을 정치적으로 이용해 군사대국 노선으로 국가전략을 전환하고 이를 위해서 국내제도부터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익세력은 평화헌법이 제정될 당시부터 개정을 요구했다. 평화헌법은 미군정 시기에 미국이 만들어준 ‘외국제’ 헌법이지 자주 헌법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우익세력은 일본의 국가의지와 일본인의 자존심이 아직도 패전국가의 상태에 머물러 있는 근본 원인을 미국이 1946년에 만든 헌법에서 찾는다. 일본이 정식적·의식적으로 평화헌법에 속박돼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러므로 일본이 자유로운 국가의지를 갖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자주 헌법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2005년 현재 헌법 개정 논의는 우익뿐만 아니라 일본사회 전반에서 광범위하게 전개되고 있다. 60년 전 제정된 헌법에 기본권 향상, 남녀평등, 정보화·고령화 등 사회 발전상과 냉전 종식, 경제대국 지위 획득, 자위대 해외파견 등의 국제적 변화를 반영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됐기 때문이다. 특히 유엔 창설 60주년이란 적절한 타이밍은 일본이 “안보리 상임이사국 지위를 얻기 위해 헌법 개정이 필요하다”고 국민을 설득하는 계기가 됐다. 우익세력은 이러한 헌법 개정 논의를 바탕으로, 본격적인 군사대국화의 길을 국가노선으로 제시하고 있다. 스스로 지킬 수 있는 능력을 갖지 못한 국가는 세계질서 변화에 발언권을 가질 수 없다고 전제하고, 국가의 자립을 위해서 자위대의 군대화 및 강화가 필요하며 이를 위한 개헌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한다.
일본 국내 정치의 보수화 움직임을 보면서 건전한 흐름과 불건전한 흐름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두 흐름은 일본의 안보태세를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대외적 역할을 강조한다는 점은 같으나 적어도 두 가지 중요한 차이가 존재한다.
우익과 건전 보수세력은 구분돼야
첫째, 과거 일본 군국주의 역사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가, 아니면 긍정적으로 평가하는가. 둘째, 미일동맹을 일반 대외정책의 잣대로 볼 것인가, 아니면 미국까지 일본 민족주의의 배타적 대상으로 볼 것인가. 우익은 역사적으로 군국주의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미국을 일본 민족주의의 배타적 대상으로 삼아왔다. 일본 우익이 주도한 태평양전쟁이 미국을 적국으로 삼았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한국이 비판하는 일본의 정치이념은 우익, 즉 불건전한 민족주의를 대상으로 하고 있으며, 이번에 문제가 된 ‘새역모’가 그 좋은 예다. 이러한 비판에서 우리가 주의할 것은 자연적인 국가 발전을 추구하는 보수주의까지 매도하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다. 우익을 일본 국내에서 고립시키기 위해서는 일본 내 건전한 보수주의자들까지 우리의 비판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 될 것이다.
일본의 건전한 보수주의자들도 외국으로부터 오해받지 않도록 우익세력과 확연히 구별짓는 엄격성이 필요하다. 우익의 발호는 일본의 국익에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한일 우호관계를 무시하고 한일관계를 지배와 종속의 관계로만 해석하는 우익에 대해서, 일본 정치 지도자들이 확실히 선을 그어야 한다. 현재 고이즈미 내각이 정치 이념적으로 이러한 엄격성을 발휘하고 있다고 평가받기는 어렵다.